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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ND 원산위정철 칼럼

(8) 충의록(忠義錄)의 보완문제(補完問題)

작성자위윤기|작성시간21.04.28|조회수25 목록 댓글 0


(8) 충의록(忠義錄)의 보완문제(補完問題)
존재공은 38세인 1765년[을유(乙酉)]에 선조 49분의 충의록(忠義錄)을 저술했다. 공은 서문에서󰡒(중략) 삼국사기를 살펴보면 분명하고 족보에도 고려 시중 창주(菖珠)로부터 합문판사(閤門判事) 휘 충(种)에 이르기까지 14세인데 시중(侍中)과 평장사(平章事) 같은 벼슬이 이어진 집안이다. 판사공은 시중 김종연(金宗衍)과 고려를 위해 모사하다가 천호 윤귀택의 고변으로 종연은 차열되고 공은 곤장을 맞고 귀향됐다.
이태조가 등극하여 그 자손들을 특별히 사면하였는데 유독 우리 선조는 백이와 숙제 같은 정신으로 3세 동안 문무과에 나아가지 않고 조정으로부터 녹음을 내려도 명에 응하지 않다가 우리 8대 숙조(생원공)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진사에 합격하여 그 후로 문과로는 사마에 오르고 무과로도 벼슬길이 열렸다. 임진·갑자·정묘·병자의 난과 같이 대란이 있을 때마다 의병과 의곡을 모아 희생적으로 충성을 다하였다.(중략)
우리가 10여세 동안 고관대작은 없었다. 하지만 한미한 씨족으로서 미천함을 면하게 되었고 능히 유사의 뒤를 따르게 된 것은 모두가 충효와 행의(行誼)의 실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세대는 멀어지고 풍속은 희미해져 그 실상을 잃어버려 1500년간 사족의 세대를 더럽히게 될까 두렵다. 그래서 그 유적(遺跡)이 현저하고 고증이 있는 분들을 편집하여「위씨 충의록」이라 이름하여 소장하게 하였다.󰡓(하략)고 한다.
그러나 49인(人)선조의 충의사실에는 문제가 있는 분이 많다. 일부 선조들의 행적은 충의로 보기 어려운 분이 있다. 또한 실제 역사기록과 전혀 다른 분이 있다. 다음으로는 충의의 행적을 고증할 수 없는 분도 없지 않다. 물론 당시로는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 자료를 수집, 찬술했을 것이다. 하지만 시대적 여건으로 인한 한계를 벗어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럼에도 후손들은 오류자체를 아예 모르고 살고 있다.
조상들은 고려시대에는 명문이었으나 조선이 건국되면서 반역의 집안으로 낙인 찍혔다고 한다. 그래서 건국 이후 200년간 변변한 벼슬자리 하나 앉지 못했다. 그러다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무과나 의병으로 진출, 비로소 출사하기 시작한 집안이 됐다. 따라서 충의록은 조상의 임진왜란 활약상이라 할 수 있다. 그러기에 충의록을 제대로 기술하기 위해서는 임진왜란에 대한 바른 이해를 기초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임진왜란 때 많은 선조들이 참전했지만 수사공(水使公) 위대기(魏大器) 장군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괴봉공의 격문에 호응해서 의병으로 참여한 행원과 사월방의 위씨들은 거의 그와 함께 참전했다고 추정된다. 그러므로 수사공의 행적을 바르게 기록하지 않으면 다른 의병들도 모두 잘못되게 마련인 것이다. 그 대표적 사례가 좌랑(佐郞) 위공달(魏公達)에 대한 기록으로 사실(史實)과 다르거나 아예 기록이 없다.
그런데 충남 금산면 묵산리에는 세워진 임진왜란「이치(梨峙)대첩비」가 있다. 그리고 비에는 권율(權慄)장군 등 전투에 참전한 118명의 제공록(諸公錄)에 공의 휘자가 새겨 있다. 그분들의 이름이 왜 여기에 있는가. 수사공에 대해 충의록에는 이치와 웅치(熊峙)전투에 모두 참여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1592년 7월 8일 당일 치러진 전투에 한 사람이 두 전투에 참전하기란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지역이다.
대첩비와 사당의 위패에 등장한 좌랑공은 누구인가. 그는 사월파 21세 중준(重俊) - 22세 상(祥) - 23세 방길(方吉)의 아들 공립(公立), 공식(公式), 공달, 공일(公逸), 공준(公濬) 5형제 중 3남이다. 공은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괴봉공의 창의에 따라 두 동생과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수사공을 따라 동복현감 황진(黃進)부대로 들어가 용인(龍仁)전투에서 패한 후 1592년 7월 8일에 벌어진 권율의 이치전투에 참전했다.
함께 출전했을 것으로 보인 동생 중 공일(公逸)은 훈련부정으로 원종2등훈의 공록을 받는다. 다만 공준(公濬)의 행적은 어디에도 기록이 없다. 이치전투는 임진왜란 7년간 육상전투로는 행주대첩에 비견된 정도로 대승을 거뒀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전라북도 1866년 대첩비를 세웠으나 일제는 1944년 이를 파괴했다. 이후 금산군이 충남으로 편입되면서 1963년 재건수되고, 1991년에 성역화사업을 추진, 완료했다.
여기서 확인된 사실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공이 임진왜란에 참전했다는 사실이다. 다른 하나는 공의 벼슬이 좌랑이라는 사실이다. 그것도 공식적인 역사기록이라 할 대첩비의 제공록과 위패를 모셨다는 것이다. 이 정도의 공식기록이면 더 이상 고증이 필요가 없는 역사사실이 되고도 남는다. 그러므로 비록 존재공이 편찬한 충의록일지라도 역사기록과 부합될 수 없는 대목은 보완하는 방안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이상의 기록을 대조해도 족보의 면주와 역사사실과는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기록은 두 가지 측면에서 풀이할 수 있다. 첫째는 역사기록을 제대로 수집할 수 없어서 비롯된 결과일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기록도 많지 않을 뿐 아니라 있는 기록도 부실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실에 부합된 기록을 저술하기란 어려웠다. 존재공은 가능한 한 진실된 기록을 바탕으로 선조들의 활약상을 그리고 싶었을 것이다.
둘째는 조상을 미화시키고 싶은 성향이다. 인간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마음일 것이다. 존재공이라고 예외일 수 없었을 것이다. 자연히 조상의 활략상을 거창하게 보이고자 조금은 무리한 기록을 썼을지 모른다. 가령 수사공의 경우 8백근의 칼을 휘두른달지, 관아의 중방을 뽑아 휘둘렸다는 표현들이 그것이다. 사람이 아무리 힘이 세다고 하지만 그런 무게의 활을 자유자제로 사용하기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參考文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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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圓鑑國師集(秦成圭 敎授․中央大)
■ 長興文集解題(長興文化院 1997년)
■ 岐峯集(白光弘․기념사업회 발행)
■ 長興魏氏大同門案(1927년 8월 발행)
■ 聽禽遺稿集(諱 廷勳)
■ 磻溪遺稿集(諱 廷鳴)
■ 三足堂遺稿集(諱 世寶)
■ 艮庵遺稿集(諱 世鈺)
■ 詠而齋遺稿集(諱 文德)
■ 存齋遺稿集(諱 伯珪)
■ 書溪遺稿集(諱 伯純)
■ 竹塢遺稿集(諱 道僩)
■ 茶嵒遺稿集(諱 榮馥)
■ 春軒遺稿集(諱 啓泮)
■ 桂史遺稿集(諱 澤基)
■ 竹軒遺稿集(諱 啓昌)
■ 梧軒遺稿集(諱 啓龍)
■ 重窩遺稿集(諱 洪良)
■ 德庵遺稿集(諱 錫奎)
■ 毅齋遺稿集(諱 錫漢)
■ 栢堂遺稿集(諱 大煥)
■ 晩翠遺稿集(諱 啓道)
■ 長興魏氏(1989년 在京宗親會發行)
■ 長興魏氏宗報 1號~15號(大宗會發行)
■ 月明頌 1輯~8輯(關北宗親會發行)
■ 長興의 歌辭文學(長興文化院)
■ 長興文化 13號~30號(長興文化院發行)
■ 桂沙小考集 上下卷(魏聖浩 著)
■ 海東師弟錄(奉在鍾 編著)
■ 壬辰 義兵將 魯認의 錦溪集(국역본)
■ 允瑞와의 對話(松堂 自敍傳)
■ 傍村學Ⅰ(위의환, 2009년 12월 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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