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건의 발생 / 이향지
손가락으로 창문을 그리고 하늘을 열어 두었다
두 손으로 창틀을 오려내자 향기로운 바람이 목덜미에
가실래요 같이
바람 속에서 손을 잡는 것들은 모두 꽃이다
반짝이며 나부끼며 초록길이 길게 이어진다
꼬불꼬불 날아오르던 나비가 한잠 쉬어가는 꽃마루
길 있어요?
길이 있냐구요?
길이 어디 있니, 우리가 지나가면 길이 되는 거야
그럼 나는 안 갈래요
길 없으면 난 안 가요
가드레일을 도로 기어나가는 바람
누군가 지나갔네, 발자국들 비에 지워져 희미하게
여기 길 있네, 여기 꽃 있네
안녕, 한계령풀
안녕, 갈퀴현호색
심지 깊은 선괭이눈
늦잠쟁이 얼레지
단 한 송이 흰,에게도
꽃보다 낮은 인사를
가요, 이제 가요
하양 노랑 파랑 보라 웃고 있을 때
나비로 돌아가요
신발 끝에 스친 풀꽃들
호오 불어서 일으켜주고
여기 길 없어요
여기 꽃 없어요
손가락으로 키 큰 숲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그리고
다시 만날 꽃들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겹쳐 그리고
재촉하는 서쪽 하늘을 발끝으로 당겨온다
낮게 엎드렸던 나무들 흙을 털며 다시 숲으로
―사이버문학광장 《문장 웹진》 2023년 6월호
<이향지 시인>
1942년 통영 출생.
부산대학교 졸업.
1989년 《월간문학》을 통해 등단.
시집 『괄호 속의 귀뚜라미』 『구절리 바람 소리』 『물이 가는 길과 바람이 가는 길』 『내 눈앞의 전선』, 산문집 『산아, 산아』, 연구서 『북한 쪽 백두대간, 지도 위에서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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