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으로 그려온 감동 / 정 영 권
기온이 30도 남짓이라고는 하지만 체감 온도는 40도 가까이에 습도까지 높아 구경 같은 건 미루기로 했다. 콘도 내에 있는 수영장에 다녀와 누워있는데 유치원에 다녀온 손주가 인사를 하고는 무언가를 머리맡에 놓고 간다. 언뜻 보니 그림이 그려진 도화지인 듯하다. 어제 가족이라고 그린 그림을 보고 서운한 감도 있고 하여 외면하고 있는데, 손주가 다시 들어와 돌아 누워있는 내 얼굴 앞에다 그것을 옮겨 놓고 간다. 얼마쯤 지나, 아내가 들어와 손주가 그런다면서 그림을 좀 보라고 한다. 어느새 손주가 다시 와 그림을 보지 않은 채로 있는 정황을 엿보았는가 보다. 혹시 내 맘을 눈치채면 놀릴 것도 같고, 미안한 생각도 들고 하여 더는 외면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아니 이럴 수가, 그림을 보고는 깜짝 놀라 기쁨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며칠 전, 하나뿐인 5살 난 손녀가 너무나 보고 싶어 1년여 만에 싱가포르에 살고 있는 아들 집에 왔다. 손주와 조금이라도 더 같이하고 싶어 제 어미를 젖혀놓고 유치원에 등·하원도 시켜주고 있다. 손주도 이것저것 챙기며 훈육하고 지적도 하는 제 엄마보다 저를 마냥 예뻐 만 하는 우리를 더 따르는 것 같다. 어제는 손주와 하원하다가 하도 더워서 콘도 현관에 있는 휴게실에서 쉬고 있는데, 유치원에서 그렸다고 자랑하면서 그림을 내보였다.
가운데에는 제 엄마인 듯한 아주머니와 손주가 자리하고, 그 옆에는 강아지가 그려져 있다. 현관에는 저를 돌봐주는 이모(헬퍼)가 서 있고, 이어지는 계단에는 아주머니 한 분이 운동하듯 오르고 있었다.
아내가 묻는다. ‘이건 서연이고, 옆에는 엄마구나?’ 그런데, 손주 대답이 의외다. ‘엄마가 아니고, 할머니인데…’ 아내는 호들갑스럽게 좋아한다. ‘그래, 고마워! 서연이가 할미를 좋아해서 옆에다 그려주었구나.’ 손주는 아내와 눈을 마주치며 긍정의 미소를 건넨다. 그러면 엄마는 어디에 있냐고 물으니, 계단을 오르고 있는 분이 엄마란다. 가족들의 건강을 챙겨가며 본인부터 솔선하여 운동을 열심히 하는 엄마는 그림에서도 운동을 하는가 보다. 아빠는 왜 없느냐고 물으니, 장난스럽게도 그림 윗부분을 가리키면서 비행기를 타고 출장을 가고 있단다. 아침에 일찍 직장으로 나가 저녁 늦게야 들어오는 데다가 해외 출장이 잦은 아빠는 그림에서도 높은 하늘에 비행기를 타고 가기에 보이지도 않는 이 정황이 안타깝다.
그럼 나는 어디 있느냐고 물었더니, 나를 한번 바라보고는 흠칫하더니만 눈을 내리깔면서 입을 삐쭉거리는 표정이 심상치 않다. 곧 울 것만 같아 당황스러웠다. 깜박했나 보구나 싶어, 안쓰러워서 달래며 안아주었다.
그런데 아내는 그려 넣고 왜 나만 빠트렸을까? 아마 시도 때도 없이 살갑게 안아주고 정겹게 놀아주며 세정을 알아주는 제 할미를 더 좋아하는 것도 당연(當然)하리라. 그러니 내가 옹졸해지면 안 된다며 마음을 추스르면서도, 왠지 서운한 감정은 아직도 가시질 않았었나 보다.
아, 그런데 이 그림은 그 그림하고는 다르지 않은가!
어제 그림에는 없었던 내가 이 그림 안에 당당히 자리하고 있다. 나를 버젓이 그려 가족에 합류시켜 놓은 것이다. 저 어린 것이, 이내 심정을 헤아려 그림을 고치려고 마음을 썼다니 참으로 대견스럽지 않은가. 무척이나 좋아하는 나를 보고, 손주는 귀에 대고 덧붙인다. ‘아빠도 멋있게 그려 넣었어…’ 그러면서 제 아빠한테는 비밀로 해달란다. 그러나 알게 된대도, 아빠의 마음까지도 헤아려주는 이 기특하고 귀여운 딸이 어찌 예쁘지 않으리오?
처음 선생님이 가족을 그려보라고 하였을 때, 아직은 어린지라 엊그제 오랜만에 만나 반가운 데다가 정이 많아 따뜻하고 잘해주는 할미가 먼저 떠올랐을 것이고, 자기와 같이 어른들의 보살핌을 받는 처지로 친근감이 가는 구름이(강아지), 자기를 낳아 더할 나위 없는 모정으로 품어서 기르고 가르쳐주시는 엄마, 항상 보살펴주고 챙겨주는 이모(헬퍼)가 생각나 그렇게 그렸을 것이다.
그런데 곁에 있는 시간이 적어서 그랬든지 깜박했으나, 생명을 주어 피를 나누고 정으로 맺어져 가슴에 품고 있는 아빠, 그리고 할미만은 좀 못할지 모르나 사랑해 주고 귀엽다시는 포근한 할아버지를 어찌 모르고 빠뜨리리오. 깜짝 놀라 얼른 챙긴 것이다. 그리하여 맑고 어여쁜 작은 가슴에 선명히 새겨진 영상을 고사리 같은 손으로 꾹꾹 눌러 앙증맞게 그려낸 가족들이다. 할아비의 투정 때문이었을까 만은, “(즉흥적인?)감정에서 가슴으로 그려온 감동”이 다스한 봄날처럼 펼쳐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