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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뜻글자(漢字)인가

日· 碩學·文字學의 父 : 시라카와(白川靜) 오류와 왜곡

작성자法故創新|작성시간22.03.01|조회수984 목록 댓글 0

家苑, 한·중·일 漢字 문자학 천하통일 : 『천자문大觀』5권 발간

일본 최후의 석학, 문자학의 父 : 시라카와 시즈카(白川靜) 오류와 왜곡

 

편집자 주)

역사와 전통의 단절과 오류와 왜곡이 심한 나라 중의 하나가 우리나라이다. 바깥으로 일본과의 역사전쟁이 그렇고 국내적으로 역사 해석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정파간 진영간의 논쟁이 끊이지 않는 것을 보면 더욱 그렇다. 그 결정적인 원인은 황하문명권 나라들(한·중·일)이 자신들의 문명(사)에 대한 공통된 이해와 합의된 인식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아래 글에서 언급하듯이 서구식 근대화와 산업화가 지배함으로써 자신의 과거 역사와 전통을 부정하거나 짓밟거나 (서구식으로) 덮어 버렸기 때문이다.  황하문명과 서구문명은 크게 농경과 유목으로 대별된다(아래 글 참고). 그런데 서구식이 지배하다보니 유목문화적 관점에서 농경문화의 황하문명(역사와 전통)을 해석하거나 해설하니 오류와 왜곡이 생길 수 밖에 없다.

 

단편적인 사례를 들자면, 이동성이 강한 유목문명은 전쟁에 익숙한 반면에 정착 생활을 위주로 한 농경문화는 내부의 통합과 평화에 중점을 둔다. 이런 역사적 경험과 전통이 현대사회에까지 이어져 내려온 사건이 20-21세기에 벌어진 유럽의 종족(민족)분쟁이다. 맑스·레닌의 계급투쟁 사관 역시 전형적인 유목문화적 관점의 역사관이다.

 

지구 역사상 가장 큰(大) 홍수가 동,서양 양쪽으로 같은 시기에 발생했는데 서구 지역의 홍수가 성경에 나오는 '노아의 홍수'라면 황하문명권은 『書經』에 나오는 요,순임금 시기의 대홍수이다. 그런데 성경과 서경의 두 문헌에 따르면 이 홍수에 대한 대처방식이 유목문화와 농경문화가 확연히 다르다.  이동 생활에 익숙한 유목문화는 배(舟)를 통해 피신하는 것으로 대응하는 반면에 정착 생활 중심인 농경문화는 홍수를 피하지 않고 자체적으로 해결하는 방법을 찾는다. 또한 유목문화에 기반한 성경에 의하면 '돌아온 탕자'는 환대받는 것으로 나오지만 농경문화는 반드시 처벌이나 책임을 묻는 것으로 나온다. 

 

그외에 서구 사회에서 흔히 드러나는 ‘동성애(gay:게이)’ 역시 유목문화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시라카와 시즈카' 문자학의 핵심근거인 '주술(呪術)·제사장 문화' 역시 유목문명에서 일반화된 '인격 神(히브리즘 + 헬레니즘)' 개념이다. 황하문명권의 농경문화는 인격신 개념이 없다. 다만 정치권력이 自然神에게 제사지내는 것이다. 

더 근본적인 문제점은 황하문명권(한·중·일) 내의 지식인들조차 서구식을 더 우수하거나 우월한 것으로 받아 들여 열등감 속에 황하문명의 역사와 전통에 대해 공유하거나 공감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각자 각기 해석하는 통에 중구난방이다.

 

유목문명과 농경문명의 차이점을 구별하지 못함으로써 발생한 어처구니없는 사태가 한국과 일본의 최고 碩學(석학)이라고 평가받는 이어령(李御寧)과 시라카와 시즈카(白川靜)의 오류와 왜곡이다. 이어령의 경우는 본 카페에서 충분히 거론되었다.

 

서구식 방식으로 漢字(문자) 문자학을 정립한  시라카와 시즈카 경우는 아래 별도로 정리하였다. 이해를 돕기 위해 ‘유목문명과 농경문명’의 차이점을 밝힌 글을 참고삼아 별도로 게재하였다. 그리고 본 글의 취지가 시라카와 시즈카 文字學의 문제점을 밝히는 것이기에 본 카페에서 여러번 거론되었던 ‘왜 漢文(한문)이나 漢字(한자)라고 부를까?’를 보완하여 첨부하였다.

 

맨 끝(밑)에 시라카와 시즈카 관련 글과 문제점을 지적한 『천자문大觀』의 내용을 덧붙였다. 두 내용을 비교하여 시시비비를 가려보는 것도 공부의 한 방법이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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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양 문명 차이와 漢字 語原해석의 오류와 왜곡

 

서구문명과 (동북아) 황하문명의 역사와 전통은 명백히 다르다. 동·서양 문명의 역사와 전통은 그 지리적 측면에서 原流를 크게 ‘농경(農耕)중심의 정착사회’와 ‘유목(遊牧)중심의 이동사회’로 구별한다. 정신·사상적 측면에서는 헬레니즘(그리스·로마문명)과 히브리즘(기독교 Bible)이 사회적 규범이자 잣대와 기준으로서 서구(毆美) 문명의 법치주의와 도덕주의의 토대가 되었다. 반면에 황하문명은 음양오행(儒·仙·佛 공통)과 漢字(한자)와 유학경전에 사회규범의 잣대와 법치주의와 도덕주의의 토대를 두고 있다.

 

따라서 서구문명의 역사와 전통을 원천적으로 이해하려면 헬레니즘과 히브리즘을 알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음양오행(儒·仙·佛)과 漢字(한자)와 유학경전을 알지 못하고는 황하문명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문제는 근·현대 사회에 들어와 도시화와 산업화와 과학기술에 의한 물질문명으로 인해 동·서양이 (겉으로 보기에) 별 차이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점이다. 그러다보니 산업화·근대화에 앞선 서구 열강들의 문명과 문화가 우수하다는 전제하에 이것이 마치 정답인양 여겨지면서 다른 여타 후발국들은 무조건 이를 따라야 한다는 인식이 팽배했다.

 

동북아 황하문명권을 대표하는 한·중·일의 경우, 일본은 일찌감치 서구적 방식의 근대화와 산업화를 도입해 列强에 합류했다. 한국은 식민지를 겪으면서 전통과 역사를 안팎으로 부정당하며 완전히 미국식으로 근대화·산업화를 달성하며 세계 최고의 성공국가가 되었다. 중국은 列强(외세)에 봉건체제가 무너지고 사회주의 혁명을 거치면서 자신의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反動으로 치부하고는 부정하고 짓밟았다. 이렇게 세 나라는 황하문명의 바탕이 되는 철학과 사상이 단절되고 말았다. 이는 곧 음양오행(儒·仙·佛)과 漢字(한자)와 유학경전의 제도권에서의 퇴출로 나타났다. 대신에 그 자리를 서구문명의 원리와 이론이 차지했다.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미국에 경도되었던 한국사회는 미국 유학파와 기독교와 영어가 지배하는 나라가 되고 말았다. 2천여년 유지되어온 공문서상의 漢字 병기가 개정된 국어기본법(2006년)에서 삭제되었다. 문제는 한국 사회의 토대였던 황하문명과 미국으로 대표되는 서구문명의 충돌이다.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센 문명의 충돌을 겪었고 이는 현재도 진행중이다. 이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지표가 지난 십 수년간의 OECD국 자살률 1위와 세계 최저 출산율이다. 『한국사회大觀』(2021,경연서원)에서 ‘정체성’이란 관점에서 자세히 조망하였다.

 

수 천년간의 황하문명의 역사와 전통을 토대로 살아온 삶에 어느 날 어느 시기에 (갑자기) 전혀 다른 서구문명을 덮어 씌우면 그게 온전하겠는가? 그 혼란과 혼동의 집약적인 결과(댓가)가 최고 자살률과 최저 출산율인 것이다. 다른 한편 서구 교육체제에서 자라난 세대에서는 산업화와 현대화 또는 세계화(globalization) 시대에 전통과 역사에 구애받지 않고도 잘 사는데 무슨 문제냐하는 반발이 있다.

 

유목과 농경문명의 차이가 여전히 드러나고 있는 실증적인 사례는 유목(이동)생활에서 발생할 수 밖에 없는‘동성애(gay:게이)’이다. 동성애에 대해 기독교 차원에서 엄단해왔음에도 불구하고 또한 남·녀 가족 중심의 도시화와 산업화가 정착된 현대사회에 와서도 서구사회에서는 여전히 ‘동성애’가 낯설지 않다. 이는 서구사회 유목문화의 역사와 전통의 유산이라고 볼 수 밖에 없다. 반면에 가족 단위의 노동력을 기반으로 한 농경(정착)사회는 ‘동성애’가 발생하기 힘든 구조라는 점에서 황하문명권은 동성애가 사회문제로 대두되지 않았다.

 

혈연에 대한 입장도 큰 차이가 있다.  이동 생활 중심의 유목문화는 여성 배우자가 불가피하게 다른 남성의 아이를 낳더라도 대체로 남성 배우자가 자신의 아이로 수용(인정)하는 문화이다. 현대 서구 사회에서 일반화된 入養문화는 이러한 유목문화의 유산이다. 반면에 정착생활 중심의 농경문화는 남성 배우자의 혈연이나 혈통에 의한 입양이 일반적이다.      

 

이렇듯 문명과 문화에 의한 역사와 전통의 차이는 현대사회에 와서도 깊숙이 작용하고 있다. 다만 서구 열강의 유목문명적 방식이 득세하면서 이것이 다른 문명(문화)의 역사와 전통을 덮어 씌워 현상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듯 보일 뿐이다. 따라서 현상적으로 드러난 유사성만 보고 문명의 본질적 차이를 보지 못한다면 이는 결국 장님 코끼리 만지기식이다. 즉 문제진단과 해결능력이 허공을 헤맨다는 뜻이다.

 

그 점에서 문자(언어)야말로 서구문명(알파벳 소리글자)과 황하문명(漢字 뜻글자)을 구별짓는 가장 큰 징표이다. 문자 측면에서 별도로 漢字를 언급한 이유는 서구 문명에서 문자(알파벳 소리글자)는 단순히 수단과 방법(소통과 표기)으로 쓰여졌던 것에 비해 漢字(뜻글자)에는 황하문명의 사상과 철학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漢字를 ‘언어와 기록’이라는 기능적인 측면에서 알파벳 문자와 동일시할 경우 치명적인 오류를 낳는다.

 

소리글자(表音문자)와 뜻글자(表意문자)를 구별하여 우월성을 논하자는 것이 아니라 문명사를 올바로 이해하자는 것이다. 서구문명에서 문자(알파벳)의 역할과 기능은 그 시대의 사상과 철학, 생활을 이해하는데 있어 결정적 요인이 아니다. 대신에 문자로 구성된 용어(word)나 텍스트(text)가 더 중요하다. 반면에 漢字(문자)에는 낱글자 자체에 황하문명의 토대가 된 음양오행과 농경문화가 고스란히 담겨 있기에 漢字를 소리글자처럼 훈(訓 : 뜻)과 음(音 : 발음)만 알아서는 황하문명을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서구의 언어·문법체계를 익힌 근·현대의 지식인들은 漢字를 (訓과 音으로 이루어진) 소리글자로 배웠기에 뜻글자인 漢字를 단순히 소리글자(문자)로 취급해왔다. 또는 한자를 뜻글자로 인식하더라도 상상력을 동원해 자의적으로 파자해(破字解)하거나 牽强附會(견강부회)적 해석으로 인해 심각한 오류와 왜곡을 낳았다.

 

그 원조는 ‘시라카와 시즈카’(白川靜, 1910~2006년)라는 일본의 한문·한자 학자이다.(아래 별첨 자료 참고). 우리나라에도 그의 이론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전공자(전문가) 부류가 있는데 경성대와 고려대의 한문학과와 그 부속연구소이다. 경성대와 고려대 문제는 경연학당 카페와 『한국사회대관』에서 자세히 다루었다. 아래에 언급된 ‘시라카와 시즈카’ 관련 신문기사와 그의 저서 역시 또 다른 판박이 오류와 왜곡 사례에 해당한다.

 

아래 글을 보면, 시라카와는 ‘家’의 ‘豕’에 대해 ‘돼지’라는 기존의 해석을 뒤집고는 “갑골문에선 토지신에게 제물로 바쳐진 죽은 개가 꼬리를 내린 모습이 선명했다.”라며 ‘豕’를 ‘개’로 해석했다. 이야말로 ‘상형(象形)문자’를 무조건 형상을 본떠 만든 문자라는 ‘우물 안 개구리 하늘 보기’식의 문자해석이다. 황하문명권은 상고시대이래 자연 神에게 제사지내는 犧牲(희생)의식이 발달되었는데 이 때 가축 祭物이 소(牛),돼지(豕),양(羊)이다.

 

이는 문헌에도 명확히 나와 있다. 문헌뿐만 아니라 글자(문자)에도 나타냈다. ‘牲’의 ‘牛’나 ‘희생양’의 양(羊)으로만 보아도 제물로 쓰인 가축이 ‘개(犭)’가 아님은 명백하다. 또한 흰 백(白)에 대해 “백골이 된 두개골의 모양을 본뜬 상형자”라는 해석에 이르러서는 어이 없는데다 어처구니 조차 없다. 사회적 합의를 거친 문헌(아래 『家苑 천자문大觀』 해설 참조)에 명백히 나와 있는 해석을 아예 무시하고는 ‘형상을 본떠 만든 문자(象形字)’라는 미명하에 임의로 억지 해석을 했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을 무슨 대단한 ‘석학’인양 떠받드는 언론이나 지식사회를 보면 정말 한심하기 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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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漢文(한문)이나 漢字(한자)라고 부를까?

황하문명권의 문자 창제와 변천사는 수천 년의 역사를 이루고 있는데 그 명칭에 ‘漢’을 써서 왜 漢文(한문)이나 漢字(한자)라고 부를까? 중국은 지리적으로 광활하다보니 각 지역의 말(언어와 발음)은 달랐지만 天子와 각 지역의 제후들 간에 왕래하는 의사소통수단인 文字는 통일을 이뤘다. 즉 중앙정부가 사용하는 표준문자가 있었다. 그 중에 현재까지 발견된 가장 오래된 문자가 殷(은)나라(商나라 : BC1600년경~1046년경) 때의 갑골문자다.

 

殷(은)나라를 몰아내고 들어선 周(주)나라(BC1046년~256년) 때에는 창업군주인 무왕(武王)의 아우인 주공(周公)이 「주례(周禮)」와 「주역(周易)」의 효사(爻辭) 등의 문헌을 지었다. 이때 황하문명권에서 가장 오래된 문헌인 「周易」의 음양(⚊,⚋)부호와 괘상(卦:8괘,64괘)과 「서경(書經)」 하도낙서(河圖洛書)의 오행(五行)과 수()의 음양오행 원리()가 반영되었다. 즉 주나라 시기에 (『易·書』의) 음양오행 원리와 이치를 적용해 처음으로 공용문자 표준화와 문자통일의 기반을 형성한 것으로 추론된다.

 

이를 토대로 周나라 선왕(宣王) 때는 태사(太史)인 籀(주)가 大篆(대전) 15편을 지었는데 이 때 쓰인 글자의 서체(書體)를 籒文(주문) 또는 大篆體(대전체)라 한다. 이후 죽간(竹簡)이나 목간(木簡)에 쇠꼬챙이 등으로 글을 새겨 넣은 과두(蝌蚪)文字가 생겨났다. 공자가 문헌 고증을 위해 周나라 왕실도서관의 책임자였던 老子를 찾아간 것도 주나라 시기 중앙정부 차원에서 공용(公用)文字로 작성되어 보관된 문헌을 열람하기 위해서였다. 공자 당시의 춘추시대만 하더라도 周나라 天子의 권위가 무너졌기에 각 제후국별로 공용어를 쓰지 않으면서 언어(文字)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전국시대를 거치면서 공용어 개념은 더욱 퇴색되어 갔는데 그나마 공용어 기능을 갖고 널리 쓰인 문자가 大篆體(대전체)이다. 大篆體는 복잡했기에 이를 간편한 小篆體(소전체)로 통합하여 명실공히 문자통일을 이룬 인물이 진시황제(秦始皇帝)이다. 이후 진시황제는 대전체와 기타 여러 문자로 작성된 전적(典籍)들을 小篆體로 정리하여 황실 도서관에 둔 뒤 나머지 전적(典籍)들은 모두 소각하도록 했다. 이른바 ‘분서갱유(焚書坑儒)’ 사건이다. 역사는 이를 반대 세력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으로 평가하고 있으나 실상은 문자통일의 의미가 더 크다.

 

그런데 소전체가 공용문자로 정착되기도 전에 진(秦)나라는 15년 만에 망하고 漢나라가 들어섰다. ‘焚書坑儒’ 등을 비롯한 진(秦)나라의 강압적인 통치로 피폐해진 민심을 회복하는 차원에서 漢나라는 사면복권(赦免復權) 등의 국가통합 조치를 취했다. 다행히 漢나라는 진시황제의 도량형과 문자 통일을 기반으로 제국(帝國)의 기반을 쉽게 다질 수 있었다.

 

그 덕분에 유학(儒學)이 전면적으로 부활되고 불태워진 유학 전적들에 대한 대대적인 복간(復刊)작업이 이루어졌다. 숨겨졌던 유학 경전(經典)들을 가져오는 이들에게 포상과 함께 벼슬이 주어졌다. 報償(보상) 조치로 인해 위서(僞書)들이 나왔고 (유학경전의 사상적 토대인) 음양오행에 기초한 위작(僞作)들도 쏟아졌다. 僞書와 僞作들을 분별해내는 작업과 전적 복간작업에는 문자통일이 필수적이다.

 

이에 따라 오랜 세월 황하문명과 유학경전의 철학적·사상적 바탕이었던 「易. 書」의 괘(卦)와 음양오행 이치와 원리를 잣대와 기준으로 삼아 문자를 표준화하는 정비작업이 이루어졌다. 즉 漢나라 때 정비작업을 통해 나온 통일 문자라 해서 한자(漢字)라 칭하게 된 것이다.

 

이 문자통일을 계기로 漢나라 이전 시기에 사용되었던 여러 글자체를 통틀어 고문(古文)이라 하고, 새롭게 정비된 漢字에 대해선 금문(今文)이라 구별하게 되었다. 이 今文이 오늘날의 漢字 해서체(楷書體)이자 정체자(正體字)로 이어져 왔다. 따라서 ‘漢文’ ‘漢字’라 칭한 배경은 漢나라 때 통일문자로 재정비된 글자라는 뜻이지 漢나라 때 처음으로 창제된 글자라는 뜻이 아니다. 이 점에서 “漢字란 바로 중국의 주류 민족인 한족(漢族)이 사용하는 문자를 말한다.(23p)”는 『한자의 세계』(하영삼 경성대 교수 著)의 해설은 오류이자 왜곡이다.

 

後漢시기 허신(許愼 : 30년~124년)은 「說文解字(설문해자)」에서 漢나라 때 새로 정비된 今文 해서체가 아니라 진(秦)나라 때의 소전체를 기본 문자로 삼되 古文 문자체 변천 과정을 담아 파자해(破字解)를 하였다. 또한 (해서체로의 문자통일 재정비 과정에 반영된)음양오행 원리와 이치까지도 접목시켰다.

 

그런데 소전체 중심의 문자변천을 반영한 파자해 해설과 음양오행 원리와 이치가 반영된 해서체 중심의 파자해 해설이 충돌하는 경우가 있다. 「說文解字」의 한계이자 약점이다. 이러한 혼선을 종합 정리한 문헌이 오대십국 南唐 시기의 서개(徐鍇,921~974), 徐鉉 형제의 『설문계전(說文繫傳)』과 『설문해자운보(說文解子韻譜)』이다. 그리고 이 모두를 망라해 집대성한 문헌은 청나라 때 단옥재(段玉裁,1735~1815)의 「說文解字 註」이다. 그리고는 200여년 만에 한국에서 家苑(이윤숙)의 『천자문大觀』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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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라카와 시즈카(白川靜,1910~2006년)

일본의 한문 및 한자학자. 대만(타이완)에 보관된 갑골문과 金石文 자료를 종교 및 주술적 관점에서 분석하여 한자의 어원과 관련해 독자적인 '시라카와 문자학' 정립.

 

저서 『주술의 사상』에서 漢字는 단순히 ‘인간과 인간의 소통수단’으로서만의 (상형)문자가 아니라 신과 인간간의 소통을 담아낸 문자라고 주장. 공자에 대해서도 “무당의 사생아”라고 주장.

‘일본 최후의 석학‘이라 불릴 정도로 학문적 권위를 인정받아 ‘시리카와 시즈카 기념 동양문자문화연구소’(白川靜記念東洋文字文化硏究所) 설립. 2004년 일본 문화훈장 수상. 저서 :『시라카와 시즈카 전집,12권』(白川靜全集).

시라카와 문자 해석 사례

① 婦를 '빗자루를 들고 청소하는 여자'라는 기존의 설문해자 해석을 뒤엎고 이를 신전을 정화하는 무녀(媚)라 해석. ② 告를 단순히 牛와 口의 형성자가 아닌, 신에 대한 축고를 걸어 놓은 그릇 위에 나뭇가지가 꽂혀 있는 모습(나무에 매달린 모습)을 나타낸다고 주장. ③ 眉는 그저 눈썹 모양을 형상화한 글자가 아니라, 주술을 실행하는 무녀가 눈화장을 한 모습을 뜻한다고 주술적 의미에 입각하여 설명.④ 帝는 꽂받침을 형상화하였다고 정의하며 샤머니즘에 입각하여 설명.<출처 : 중국학 위키백과>

[책마을] 한자가 두려운 사람들에게 (출처: 한국경제 2022.02.25.)

《한자의 재구성》은 중국 고대사를 전공한 전문가(박영철 군산대 사학과 교수)가 주요 한자의 자원(字源)을 분석한 책이다. 이 책은 갑골문과 금석문 연구의 대가로서 ‘일본 최후의 석학’이라 불리는 시라카와 시즈카(白川靜)의 저서인 《자통(字統)》 《자훈(字訓)》 《자통(字通)》과 이 3개를 요약한《상용자해(常用字解)》(박영철 옮김, 도서출판 길)를 바탕으로 한자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흥미롭게 설명했다.

후한 시대 허신(許愼)이 쓴 《설문해자(說文解字)》는 한자의 연원을 따지는 데 있어 오랫동안 절대적 권위를 누렸다. 하지만 설문해자의 해석은 갑골문 발견 이후 상당수가 그 근거를 상실했다. 갑골문은 전통 시대 학자들이 풀지 못한 글자의 ‘뿌리’를 밝혀내는 단초가 되기도 했다.

대표적인 것이 ‘집 가(家)’자다. 《설문해자주(說文解字注)》를 쓴 청나라 고증학자 단옥재를 비롯해 수많은 학자가 ‘집 면(宀)’이라는 부수 아래에 ‘돼지 시(豕)’가 들어 있는 이유를 마땅히 설명하지 못했다. 중국인의 조상들이 돼지와 함께 살았다는 설부터 돼지가 새끼를 많이 낳는 동물이어서 사람이 모여 사는 곳의 의미로 그 글자를 빌려왔다는 추론까지 다양한 해석이 쏟아졌지만 명쾌하지 않은 구석이 적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갑골문이 해법에 직결되는 ‘돌파구’를 제시했다. 갑골학의 연구 성과를 반영하면 집 면(宀) 아래에 원래 있던 것은 희생용으로 살해된 개(犬)였다. 갑골문에선 토지신에게 제물로 바쳐진 죽은 개가 꼬리를 내린 모습이 선명했다. 가(家)란 원래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던 신성한 사당이었다. 진대의 서체인 전서체로 쓴 문자가 개보다 돼지처럼 보인 탓에 후대에 도저히 풀 수 없는 미스터리를 남겼던 것이다.

갑골문을 연구하면 ‘흰 백(白)’자가 어떻게 ‘하얗다’는 뜻을 지니게 됐는지 의문이 술술 풀린다. 흰 백(白)은 원래 백골이 된 두개골의 모양을 본뜬 상형자다. 그리고 위대한 지도자나 적의 수급을 백골화해 보존하던 풍습에서 ‘우두머리 백(伯)’자까지 나왔다. 수장의 머리를 자르는 것을 형상화한 사람 인(人)과 백골화한 두개골(白)에서 우두머리 백(伯)자가 유래했다는 설명에는 무릎을 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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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책&생각> 문자, 고대인의 삶과 생각을 푸는 열쇠  (한겨레신문 2022.02.25)

위 글보다 좀더 자세한 한겨레신문 서평기사이다 :  https://www.hani.co.kr/arti/culture/book/103253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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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家苑(이윤숙)의 『천자문大觀』의 내용으로 위 해석의 오류를 짚어본다.

                  좌측에서 순서대로 ① 康熙字典體(강희자전체) ② 隸書(예서) ③ 小篆(소전) 혹은 大篆 ④ 行書(행서) ⑤ 草書(초서)

                                                              ⑥ 甲骨文(갑골문) ⑦ 金文(금문) ⑧ 古文과 나머지는 異體字(이체자)

 

① 家는 宀(집 면)에 多産의 豕(돼지 시)를 넣어 많은 식구가 있는 집안, 곧 앞서 서설에서 보았듯이 伐氷之家의 家門으로부터 百乘之家와 千乘之家, 萬乘之家에 이르는 公卿大夫家, 諸侯家, 王家, 國家의 개념이다. 家가 있으면 그 아래 戶가 있기에 家家戶戶라고 하는 데에서 그 규모의 차이가 있음을 보여준다. 家와 易의 ‘蒙’괘에 있는 宀(집 면)과 冖(집 멱, 덮을 멱)은 집의 지붕을 나타낸 글자이고 두 글자에 있는 ‘豕’는 易의 8괘에서 坎(감: ☵)卦의 象으로 ‘돼지’ ‘어두움’ ‘험난함’ 등을 상징한다. 이에 <家와 蒙>은 유학경전에서 쓰이는 맥락상 서로 통하는 글자이다.

 

공자는 ‘蒙’괘에 대해선 無知蒙昧한 자식과 백성들을 덕과 교육으로 길러내다는 의미를 두었으며 유학경전에서 ‘家’는 앞의 ①의 해석에서 보듯 ‘많은 무리’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따라서 <家와 蒙>에는 ‘많은 무리들을 거느리거나 양육하여 보호하면서 길러내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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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과 漢字 창제원리는 『易·書』의 음양오행

세종대왕은 「훈민정음해례 제자해(訓民正音解例制字解)」에서 한글 창제원리가 陰陽五行에 근거하고 있음을 명백히 밝혔다. “天地之道, 一陰陽五行而已, 凡有生類在天地之間者, 捨陰陽而何之, 故人之聲音, 皆有陰陽之理, 顧人不察耳. (천지의 도는 한번 음하고 한번 양하며 오행의 이치를 생성할 뿐이라. 무릇 어떤 생물이든 하늘과 땅 사이에 있는 것들이 음양을 버리고 어디로 가리오. 그러므로 사람의 성음에 다 음양의 이치가 있는데도 다만 사람들이 살피지 않았을 뿐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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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에서 순서대로 ① 康熙字典體(강희자전체) ② 隸書(예서) ③ 小篆(소전) 혹은 大篆 ④ 行書(행서) ⑤ 草書(초서)

                                                              ⑥ 甲骨文(갑골문) ⑦ 金文(금문) ⑧ 古文과 나머지는 異體字(이체자)

 

① 『설문』에서 白은 “西方色이니, 음(陰)이 작용하여 물건의 색이 희다. 入(들 입)에 二가 합해졌으니, 二는 음수라(西方色也니 陰用事하여 物色白이라 从入合二니 二는 陰數라).”고 했다. 가을은 만물이 凋落(조락)하고 퇴색하여 희끄무레한 색으로 변한다. 사람이 늙으면 머리카락이 흰색으로 변하는 것도 같은 이치이다. 이에 白을 陰으로 들어가는 글자로 보았고, 위의 첫 번째 글자인 󰡔강희자전󰡕체에서는 白 안의 一을 음부호 (- -)로 썼음을 볼 수 있다.

 

② 白은 丶(불똥 주)에 日(해 일)의 글자로 보면 햇살을 가리킨다. 해가 비치면 만물의 본래 모습이 환히 밝혀지는데서 바탕색을 뜻하는 ‘희다’라는 뜻이 나왔다. ‘白日中天’, ‘白日場’, ‘白日下’의 白 역시 대낮의 환하고 밝음을 뜻한다.

 

③ 曰(말씀 왈)에 ’숨김없이 훤히 드러나게 말하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는 점에서 曰이 日(해 일)로부터 연유했다고 본다. 상세히 조사하여 명백하게 밝힌 글을 뜻하는 ‘白書’의 白은 '사뢸 백, 말씀 백'이다. 이때 白의 日은 曰(왈)과 같다.

 

④ 공자 당시에 下剋上의 권력쟁탈전이 날이 갈수록 심해졌는데 大夫의 家臣들도 이에 가세하여 거점을 확보한 뒤 孔子를 불러 권력의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했다. 그중 하나인 晉나라의 佛肸(필힐)이 大夫인 趙簡子를 배반하고 공자를 불렀다. 세상에 道를 펴기가 점차 어렵게 되자 공자는 뭐라도 하나 붙잡겠다는 심정으로 가고자 했으나 자로가 말렸다. 결국 가지 않았으나 공자는 자조 섞인 심경으로 이렇게 말씀하셨다(『논어』 陽貨편).

 

“그러하다. 이런 말이 있느니라. 단단하다고 하지 않는가? 갈아도 얇아지지 않느니라. 희다고 하지 않는가? 검은 물을 들이려 하여도 검어지지 않느니라. 내 어찌 매인 박이며 오이이랴? 어찌 능히 매었다고 먹지 아니 하리오?(然하다 有是言也니라 不曰堅乎아 磨而不磷이니라 不曰白乎아 涅而不緇니라 吾豈匏瓜也哉아 焉能繫而不食이리오)”

磷 얇을 린 涅 검은 물들일 열 緇 검을 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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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에서 순서대로 ① 康熙字典體(강희자전체) ② 隸書(예서) ③ 小篆(소전) 혹은 大篆 ④ 行書(행서) ⑤ 草書(초서)

                                                              ⑥ 甲骨文(갑골문) ⑦ 金文(금문) ⑧ 古文과 나머지는 異體字(이체자)

 

① 伯은 人(사람 인)에 白(사뢸 백)을 더해 사뢰어야 하는 사람, 곧 우두머리를 뜻하고 한 집안에서는 ‘맏이’를 뜻한다. 白이나 覇(으뜸 패)로도 쓰고 읽는다. 큰아버지를 ‘伯父’라 하고, 第三等의 爵位를 ‘伯’으로 나타내며, 각 지역의 수령을 ‘方伯’이라 하고, 서쪽의 으뜸 패자를 ‘西伯’이라 일컫는데서 그 뜻을 볼 수 있다.

 

② 『논어』 述而편에 子貢이 “伯夷叔齊는 何人也잇가(백이 숙제는 어떤 사람입니까?)”라는 물음에서 伯은 맏이를, 叔은 셋째를 나타내고, 뒤의 夷와 齊는 이름이다. 泰伯이라는 편명 또한 周나라 古公亶父(고공단보)의 맏아들을 가리키는 말이고, 공자의 맏아들이 ‘伯魚’인데 노나라 군주가 잉어를 하사했기에 이름을 魚로 붙인 것이다. 『詩』 小雅 何人斯편의 “伯氏吹壎이면 仲氏吹篪라(백씨가 질나발을 불면 중씨가 젓대를 부니라.)”에서 ‘伯氏’ ‘仲氏’는 형제를 나타내고, 여기에서 사이좋은 형제를 가리키는 말로 ‘壎篪(훈지)’라고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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