亞聖 孟子, 浮沈의 歷史
貶孟 ‧ 尊孟 ‧ 刪孟 그리고…
[다음은 2011년 8월 11일자 中國의 인터넷통신사인 新华网 WWW.NEWS.CN에 게재된 「趣談:朱元璋貶孔不成便‘刪孟’」이다. 원출처는 廣東省에 있는 『廣州日報』로 되어 있는데, 현재 글쓴이를 확인할 수가 없다. 역사적으로 『맹자』가 오늘에 전해지기까지 가장 큰 공로가 있었던 朱熹의 『讀余隱之尊孟辯』을 번역해 실으려 했으나 宋代 이후의 역사를 볼 수 없던 차에 新华网에 게재된 글을 우연찮게 발견하였다. 신문의 칼럼답게 재미있으면서도 간결하게 6회에 걸쳐 유학사도 정리되었기에 소개한다. 간혹 사회주의적인 용어들이 익숙하지 않은 부분도 있지만 글쓴이의 글맛을 살리고자 그대로 번역했다. 원문은 新华网에 실린 그대로 싣되 문장부호들은 필요에 따라 정리했으며, 오타는 수정(象 → 商)했다. 참고로 貶孟(폄맹)은 맹자를 폄하하는 파, 尊孟(존맹)은 맹자를 존숭하는 세력, 刪孟(산맹)은 『孟子』원문에서 군주에게 거슬리는 대목을 깎아냈다는 뜻이다.-家苑]
맹자(왼쪽)와 주원장(오른쪽), 이 둘은 역사를 넘어 氷炭의 관계였다.
1. 맹자, 양혜왕에게 仁政을 행할 것을 권하다
(명나라의 태조)주원장(1328~1398)은 정치상 독재를 휘둘렀는데 승상제 폐지를 통과시키고 중앙집권적 권력으로 바꾸어 황제의 전권을 이루었으며, 문화상 전제주의도 휘둘렀는데, 그는 다만 종횡가와 법가와 음양가의 학설을 이단의 사설로 보았을 뿐만 아니라 한나라 이후로 역대 통치자들이 받들던 정통적 유가 학설을 온갖 방법으로 도려내고 깎아냈다. 그는 전국에 영을 내려 공자의 제사를 중지시켰고, 공자의 ‘교주’ 지위를 폄하하려 했으나 결과적으로 지식분자들의 강렬한 반대에 부딪혀 원하는 대로 하지 못했다.
공자의 행함을 폄하하려 했으나 통하지 않자 주원장은 몇 년 뒤에 창끝을 맹자에게 돌렸다. 맹자의 군주 대함이 극도로 존중하지 않는 언론이기 때문에 이를 이유로 맹자를 문묘에서 축출하려 했으나 똑같이 대신들의 강렬한 반대에 부딪히게 되자 이듬해 곧 명을 거두어들였다. 맹자의 위패를 철거하지 못한 것은 주원장으로 하여금 체면을 잃었다고 생각하게 했다. 그는 글을 간추려 맹자를 징벌할 방법을 생각해내고, 유삼오 등에게 명령하여 자기의 뜻이 장차 『맹자』 일서에서 3분의 1을 깎아내려함을 알려 『孟子節文』 일서로 편집하고, 또 명하여 과거와 고시에서는 깎아낸 조문과 명제를 쓰지 못하게 했다.
주원장의 산맹(刪孟)은 나쁜 결과를 조성했으니 이것은 독서인들의 사상의 자유를 막았으며, 명청 양대에 이르도록 중국의 인문정신의 몰락을 가져왔으며, 선진문화를 보수문화로 변하게 했으며, 특립독행의 사상가가 한 명이라도 나타나는 것을 어렵게 했으며, 문화사상의 영역 전체가 정적으로 빠져들었으며, 모든 말들이 일제히 벙어리가 되었다.(세상은 조용해졌다)
* 萬馬齊瘖(만마제음) : 송나라 때 서역에서 말 한 마리가 진상되었는데 키가 팔 척이고, 용 머리에 봉황의 가슴이며, 범의 등마루에 표범의 무늬였으며, 마구간에 이르러 갈기를 떨며 길게 울자 만 마리의 말이 다 벙어리가 된 듯 조용해졌다(宋時, 西域進貢一馬, 頭高八尺, “龍顱而鳳膺, 虎脊而豹章”, 到養馬房裏, “振鬣長鳴, 萬馬皆暗”)고 한다. 宋代의 蘇軾이 쓴 『三馬圖贊』에 나오는 내용으로, 여기의 萬馬皆暗을 明淸代 文字獄과 八股文으로 학문과 사상의 자유가 극히 억압되자 淸代의 시인인 龔自珍이 『己亥雜詩』에서 정치개혁을 주장하며 萬馬齊瘖으로 인용하여 읊은 데서 더욱 유명해진 구절이다.
1. 孟子勸梁惠王行仁政
朱元璋在政治上搞獨裁, 通過廢除丞相使中央集權變成皇帝專權, 在文化上搞專制主義, 他不僅把縱橫家, 法家, 陰陽家的學說視為異端邪說, 對被漢以後歷代統治者奉為正統的儒家學說也百般挑剔. 他曾下令全國停止對孔子的祭祀, 想貶低孔子的‘教主’地位, 結果遭到知識分子的強烈反對而未能如願.
貶孔行不通, 朱元璋幾年後把矛頭轉向孟子. 以孟子對君主有極不尊重的言論為由將孟子逐出文廟, 結果同樣遭到大臣們的強烈反對, 次年便收回成命. 撤不了孟子的牌位, 使朱元璋覺得臉上無光. 他想出了刪書的辦法‘懲罰’孟子, 命令劉三吾等人按自己的旨意將《孟子》一書刪去三分之一, 編成《孟子節文》一書, 又下令科舉考試不得以被刪的條文命題.
朱元璋刪孟造成的惡果, 是禁錮了讀書人的思想自由, 導致明清兩代中國人文精神沉淪, 先進文化變成保守文化, 特立獨行的思想家難得一見, 文化思想領域一片沉寂, 萬馬齊喑.
2. 전국에 공자 제사를 지내지 못하게 명하다
주원장은 비록 십여 권의 책을 읽은 것에 불과했으되 그는 국가를 오래도록 다스릴 도의 요체를 알고 있었으니 어찌 공맹의 도를 열어보지 않고 놔두었을 것이며, 저 한나라 이후로 명나라 이전까지 불편했던 역사의 경험을 자주 비교해 보았을 것이다. 제위에 막 올랐을 때에 그는 공자를 대함에 도리어 비상한 존경을 표했다. 홍무 원년(1368년) 2월 정미일에 주원장은 조서를 내려 ‘태뢰(소 양 돼지를 통째로 희생 제물로 씀)로 先聖인 공자를 국학에서 제사하라’고 하면서 아울러 시자를 곡부에 보내 치제(致祭, 임금이 제물과 제문을 보내 죽은 이를 제사지내도록 함)하도록 했는데, 시자가 가기 전에 주원장이 훈계하면서 말하기를, “중니의 도는 광대 유구하여 천지와 함께 나란히 했노라. 천하 사람들은 경건히 제사 섬김을 다하지 않음이 없도록 하라. 짐은 천하의 주인이 되어 대명의 교화를 기약함에 선성의 도를 행하노라. 이제 이미 성균에서 석전제를 지내고, 이에 그대를 궐리로 보내 제사 섬김을 다하도록 하노니, 그대는 공경히 할지어다”라고 했다. 그런데 뒤따라 발생된 한 사건이 그로 하여금 공자와 그 후인들을 대함에 시각을 변하게 하였다.
홍무 원년 3월에 대장군 서달이 산동 제녕을 함락했는데, 당시 곡부는 제녕로에 속했기에 주원장은 곧 서달에게 명하여 공자의 제55대 손인 공극견에게 보내 남경(당시 明의 수도)에서 직접 만나고자 했다. 공극견은 칭병하며 가지 않고, 다만 그의 아들인 공희학을 보내 서달을 만나게 했고, 서달은 공희학을 데리고 갔다. 주원장은 공극견이 친히 오지 않음을 보고 매우 화를 내면서 바로 또한 칙서를 내려 공극견에게 보냈는데 내용인즉, “그대는 병이 있다고 말하나 실제인지 아닌지는 알지 못하겠다. 만약 병을 핑계하여 나를 업신여겼다면 불가하다.”고 하면서 공극견에 대해 정말 병이 있는지의 여부에 회의를 표시했다. 당시 공극견은 주원장이 불쾌해 할 것을 염려하여 아이 적에 남경을 따라 간 적이 있던 터라 스스로가 몸을 움직여 길에 올랐는데 노상에서 시자를 만나고, 칙서를 본 뒤에는 황공하여 어찌할 줄을 모르고 밤낮으로 길을 달려 남경에 이르렀고, 주원장은 근신전에서 공극견을 접견했다. 주원장이 그대는 나이가 얼마나 많은가하고 묻자 공극견은 이미 53세이라고 말했다. 주원장이 말하기를 “경의 나이가 아직은 늙어서 병들 나이가 아니고, 지금 그대는 관직으로 골치 아프지도 않고 오직 先聖의 후손으로 불가불 배울 따름이라. 그대는 온후하니 마땅히 진덕수업하여 짐의 마음을 보좌하라.”하고 그날로 공극견에게 택지 한 구역과 말 한 필 쌀 20석을 하사했다. 그 다음날에 주원장은 근신들에게 “선성의 후예이니 마땅히 예로 우대하고 녹으로 기르되 일은 맡기지 말라.”고 했다.
공극견은 元朝에서 국자감 좨주로 있었는데 이 또한 작은 관직이 아니었으나 明朝에서는 도리어 벼슬도 직분도 없었으니 주원장이 공자의 후손을 대함에 경계하는 마음을 두었음을 볼 수 있다. 그가 공자의 후손을 대함이 이러했으니, 공자에 대해서도 자연히 마음이 떠나 좋을 없었다. 홍무 2년(1369년) 주원장은 돌연히 일거에 경천동지할 조서를 발표하는데, 조서에 “공묘의 춘추 석전을 다만 곡부에서만 행하고 천하에서는 절대로 제사를 지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마침내 천하 사람들이 공자제사를 중지시킴을 규탄했으니 당시에 모든 독서인들이 느끼기에는 청천벽력과 같았다. 비록 저 황제의 성지였지만 크고 작은 신하들이 없이 과감히 구차스럽게 동조하지 않았다. 형부상서 전당은 복궐상소하여 말하기를, “공자가 만세에 가르침을 드리우고 천하가 모두 그 가르침을 존숭했으므로 천하가 다 공자에게 제사를 올립니다. 근본에 보답하는 예는 가히 폐하지 못합니다”고 했고, 시랑인 서정도 상소하여 기리기를, “고금의 제사의 전법에는 오직 사직과 삼황과 공자만이 두루 통하는 제사입니다. 천하의 백성들은 사직과 삼황이 아니면 이로써 삶이 없고, 공자의 도가 아니면 이로써 섬이 없나이다. 요 순 우 탕 문무 주공은 다 성인이나 그러나 삼강오상의 도가 펼쳐지고, 경에 올려지고, 모든 왕을 규범하고, 만세를 사표하고, 세대로 내려갈수록 사람이 끝내 추락하지 않는 것은 공자의 힘입니다. 공자가 도로써 가르침을 베풀고 천하가 제사지냄은 그 사람을 제사지냄이 아니라 그 가르침을 제사지내고 그 도를 제사지냄입니다. 천하 사람들로 하여금 그 글을 읽고 그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그 도를 행하면서 그 제사를 올리지 않는다면 오직 사람 마음이 아닐 것이니 세대의 가르침을 붙들어 주옵소서!” 전당과 서정은 모두 설득함에 뜻이 있고 이치가 있었음에도 주원장은 다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고집대로만 했다. 뒤에 그는 하나같이 법을 만들고 자기가 항상 말했던 “천하를 다스림에 인의로 근본을 삼는다”는 것과는 스스로가 서로 모순됨을 깨닫고 어쩔 수 없이 내렸던 명을 거두었다.
2. 下令全國停止通祀孔子
朱元璋雖沒讀過什麼書, 但他知道要使國家長治久, 安離不開孔孟之道, 這是漢以後明以前屢試不爽的歷史經驗. 在剛登上帝位時, 他對孔子還非常尊敬. 洪武元年(公元1368年)二月丁未, 朱元璋下詔‘以太牢祀先聖孔子于國學’, 並派使者到曲阜致祭, 使者臨行前, 朱元璋告誡說, “仲尼之道, 廣大悠久, 與天地並. 有天下者莫不虔修祀事. 朕為天下主, 期大明教化, 以行先聖之道. 今既釋奠成均, 仍遣爾修祀事于闕裏, 爾其敬之.” 但隨後發生的一件事, 使他對孔子及其後人的看法有所改變.
洪武元年三月, 大將軍徐達攻克山東濟寧, 當時曲阜屬濟寧路, 朱元璋便令徐達送孔子第五十五代孫孔克堅到南京見自己. 孔克堅稱病不赴, 只派他的兒子孔希學來見徐達, 徐達把孔希學送往京師. 朱元璋見孔克堅沒有親自前來, 非常惱火, 馬上又下敕書給孔克堅, 裏面說, “爾言有疾, 未知實否. 若稱疾以慢吾, 不可也.” 對孔克堅是否真的有病表示懷疑. 當時孔克堅擔心朱元璋不高興, 在兒子赴南京後自己也動身起程, 在路上遇見使者, 見到敕書後十分惶恐, 日夜兼程趕到南京, 朱元璋在謹身殿接見了孔克堅. 朱元璋問他多大年齡, 孔克堅說已五十三歲. 朱元璋說, “卿年未邁而疾嬰之, 今不煩爾以官, 惟先聖子孫不可不學. 爾子溫厚, 宜俾之進德修業, 以副朕懷.” 即日賜給孔克堅宅一區, 馬一匹, 米二十石. 第二天, 朱元璋對侍臣說, “先聖後裔, 宜優禮之, 養以祿而不任以事也.”
孔克堅在元朝任國子監祭酒, 也是個不小的官, 在明朝卻無官無職, 可見朱元璋對孔子後人有提防之心. 他對孔子的後人如此, 對孔子自然也不會好到哪裏去. 洪武二年(公元1369年), 朱元璋突然下了一道令天下震驚的詔書, 詔書說, “孔廟春秋釋奠, 止行于曲阜, 天下不必通祀.” 竟然叫停天下人祭祀孔子, 這在當時令所有的讀書人感到有如晴天霹靂. 雖然這是皇帝的聖旨, 但不少大臣表示不敢茍同. 刑部尚書錢唐, ‘伏闕上疏’言, “孔子垂教萬世, 天下共尊其教, 故天下得通祀孔子, 報本之禮不可廢.” 侍郎徐程也上疏稱, “古今祀典, 獨社稷, 三皇與孔子通祀. 天下民非社稷, 三皇則無以生, 非孔子之道則無以立. 堯舜禹湯文武周公, 皆聖人也, 然發揮三綱五常之道, 載之于經, 儀范百王, 師表萬世, 使世愈降而人極不墜者, 孔子力也. 孔子以道設教, 天下祀之, 非祀其人, 祀其教也, 祀其道也. 今使天下之人讀其書, 由其教, 行其道, 而不得舉其祀, 非所以維人心, 扶世教也.” 錢唐, 徐程都說得在情在理, 但朱元璋均不接納, 仍一意孤行. 後來, 他覺得這一做法與自己常說的‘治天下以仁義為本’自相矛盾. 只好收回了成命.
3. 나아가 『맹자』 3분의 1을 깎아내다.
유아독존의 주원장은 공자를 폄하할 방법을 찾지 못하게 되자 바로 시선을 다른 유가의 인물들에게 돌렸다. 홍무 5년(1372년)에 주원장은 우연히 『맹자』를 보다가 “임금이 신하 보기를 흙먼지처럼 하면 신하는 임금 보기를 원수처럼 한다.”는 대목에 이르러 왈칵 대노를 금치 못하여 욕하며 말하기를, “이 늙은이가 오늘까지 있다니 어찌 면하랴!” 하면서, 당장에 명하여 맹자를 문묘전 바깥으로 축출하고 배향하지 못하도록 했다. 아울러 대신들에 대해서는 간하는 자가 있다면 “크게 불경으로 논죄하겠다”고 했다. 당시에 모든 대신들은 다 감히 이의를 표시하지 못하고, 다만 형부상서 전당만이 황제에게 죄 얻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기에 그는 재차 앞장서서 나아가 상소문을 올리고 입궐하여 간했다. 그는 말하기를, “신이 맹가를 위해 죽는다면 죽음이 저에게는 영광입니다”라고 했다. 당시 조정 대신들은 모두 전당 때문에 손에 땀을 취었다. 마음속에서 분노가 불처럼 일었던 주원장은 전당을 잡으려고 칼을 빼려고 했으나 그의 태도가 진실로 간절하고 굽히지 않는 굳건한 의연함을 보고 곧 그 일마(一馬)를 놓아주었다.
공연히 아무런 이유도 없이 맹자를 문묘에서 축출했기에 뚜렷이 인심을 얻지 못했다. 1년 뒤에 주원장은 조칙을 내려 말하기를, “맹자는 사설을 죄주고 이단을 분별하고 선성의 도를 드러내 밝혔으니 그 다시 회복하노라.”고 했다. 맹자의 위패가 다시 문묘로 돌아오고 예전처럼 배향했으나 주원장은 맹자의 예리한 언론을 대하면서 점점 골똘히 일어나는 생각이 있었는데, 그는 『맹자』를 천하의 독서인들이 움켜쥔다면 모든 교화가 무너질 것을 두려워했고, 또 “백성들은 귀함이 되고, 사직이 다음이고, 군주는 가벼움이 된다”는 사상이 사람들 마음속으로 깊이 들어가서 대명 왕조를 대함에 불리할 것을 두려워하면서 문득 글을 깎아낼 방법을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홍무 27년(1394년)에 주원장은 한림학사 유삼오 등에게 명하여 『맹자』에 대하여 구절들을 깎아내도록 했는데, 유삼오는 황상의 의사를 헤아리고 더듬어 도합 『맹자』 85조목이 ‘문제가 있는’ 내용이라고 깎아냈으니 거의 전서의 3분의 1에 해당되었고, 아울러 남은 내용들을 묶어 『맹자절요』 일서로 삼았다. 유삼오가 ‘산맹’의 임무를 완성한 뒤에 주원장은 곧바로 조서를 내려 “지금부터 85조목 내에서 선비들이 명제가 아닌 것으로 시험을 보면 과거에서 뽑지 말고, 오로지 성현의 중정의 학문(『맹자절요』를 가리킴)으로 근본을 삼으라” 했다.
당대의 학자인 이결비가 평론하여 말하기를, “주원장은 모름지기 무식한 사람인데도 이런 사람이 어찌 권력의 잠재력을 다하였는지 실로 일반인보다 뛰어난 천부의 재질이 있고, 문화인들의 여러 면을 정리했고, 창조적이고 발명적이며 독보적인 점이 매우 많이 있었으니 앞선 제왕들을 그와 비교해보면 한 가지도 뛰어남이 없었다. 그가 한 손에는 ‘문자옥’을, 한 손에는 ‘팔고취사(과거시험에 八股文 형식을 도입해 관리 선발)’라는 ‘자웅쌍검’을 휘둘러 지식분자들을 길들여 고분고분하게 했음을 보라. 더욱이 그 ‘팔고문’은 독서인의 명치를 쥐락펴락 했다. 명제가 다만 사서오경에 국한됨에 따라(당연히 모든 경전의 과정은 『맹자절문』식으로 처리되었다.), 이 외에 글을 읽은 것은 버려지고 급기야는 쓰이지 않았으니, 이로써 지식분자들의 사상이 경직되고 속박되어가면서 사람들은 어두운 방속에서나 마음을 놓았다. 그의 이러한 몇 가지 창조는 明朝를 대체한 청인들로 하여금 오체투지(明代의 五拜三叩之禮가 淸代에 들어 三跪九叩頭禮, 혹은 三拜九叩頭禮가 됨)를 얻어 탄복케 하였다. 후자가 ‘外夷’로 중원에 들어와 주인이 되자 다시 사상의 금고를 부드럽게 풀어줄 것을 요구함에 따라 이로써 주원장의 양대 법보에 대해 전부 회수해 견주어 보고, 한 손의 ‘문자옥’과 한 손의 ‘팔고취사’로써 이른바 ‘강희제와 건륭제의 성세’를 이루어 활발했지만 자유로운 사상은 희미해지고 종적조차 없어졌으니, 서생과 학인들은 한쪽으로만 파고들어 고증과 장구와 판본과 목록학 속에만 있었다. 중국의 인문 정신은 여기서 더욱 푹 가라앉았고, 다만 청나라 말기에 이르러 근대 서방문명의 거대함이 진동한 뒤에야 겨우 다시 깨어났다.
3. 將《孟子》刪去三分之一
唯我獨尊的朱元璋沒有辦法貶低孔子, 便把目光盯在其他儒家人物身上. 洪武五年(公元1372年) 朱元璋偶覽《孟子》, 當他看到 “君之視臣如土芥, 則臣視君如寇仇” 那一段時, 不禁勃然大怒, 罵道, “使此老在今日, 寧得免耶!” 當天就下令將孟子逐出文廟殿外, 不得配享. 並對諸大臣說, 如有諫者‘以大不敬論’. 當時所有大臣均不敢表示異議, 只有刑部尚書錢唐不怕得罪皇帝, 他再次挺身而出, 抗疏入諫, 他說, “臣為孟軻而死, 死有余榮.” 當時朝中大臣都為錢唐捏了一把汗. 滿腔怒火的朱元璋本想拿錢唐開刀, 但見他態度誠懇, 堅毅不屈, 便放了他一馬.
無端端地將孟子逐出文廟顯然是不得人心之舉. 一年後, 朱元璋下詔稱, “孟子辟邪說, 辨異端, 發明先聖之道, 其復之.” 把孟子的牌位放回文廟, 配享如故. 然而, 朱元璋對孟子的犀利言論仍耿耿于懷, 他怕《孟子》把天下讀書人都教壞了, 更怕 “民為貴, 社稷次之, 君為輕”的思想深入人心, 對大明王朝不利, 便想出了刪書的辦法.
洪武二十七年(公元1394年), 朱元璋命翰林學士劉三吾等人對《孟子》進行刪節. 劉三吾揣摸皇上的意思, 共刪掉《孟子》八十五條‘有問題’的內容, 幾乎佔全書的三分之一, 並將剩下的內容編為《孟子節文》一書. 劉三吾完成刪孟任務後, 朱元璋立即下詔書, 規定 “自今八十五條之內, 課士不以命題, 科舉不以取士, 一以聖賢中正之學(指《孟子節文》)為本.”
當代學者李潔非評論說, “朱元璋雖是大老粗, 但此人對于怎樣挖掘極權的潛力, 實有過人的天賦, 在收拾文化人方面, 有很多創造發明獨到之處, 先前的帝王沒一個比得過他. 你看他揮舞著‘雌雄雙劍’, 一手‘文字獄’, 一手‘八股取士’, 把知識分子馴得服服帖帖. 尤其是‘八股文’, 摳住了讀書人的命門. 因為命題只限于‘四書五經’(當然都經過《孟子節文》式的處理), 舍此之外讀書再多都沒用, 所以知識分子的思想就被死死地限制在這個令人放心的黑屋子裏面. 他的這些創造, 讓取代明朝的清人佩服得五體投地. 後者以‘外夷’入主中原, 更需要思想的禁錮和麻木, 所以對朱元璋的兩大法寶照單全收, 一手‘文字獄’, 一手‘八股取士’, 以致到所謂‘康乾盛世’, 活潑, 自由的思想杳無蹤跡, 書生學人一頭扎在考據, 章句, 版本, 目錄學之中. 中國人文精神就此沉淪, 直到清末, 在近代西方文明的巨大震撼下才重新蘇醒.”
4. 맹자의 어떤 말이 주원장을 자극시켰나?
주원장은 중국 역사상 유명한 독재군주로, 그는 승상제를 폐지하고 軍政의 대권을 한 몸에 거머쥐고 중앙집권을 해야 한다며 황제 1인의 전권을 이루고자 했다. 그가 인정한 것은 군주의 권력은 지고하여 위가 없어야 한다면서 당당하게 천하 백성들 위에서 군림하였다. 그런데 맹자는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백성들이 귀하고 군주는 가볍다”는 사상을 냈으니, 그의 관점과 주원장의 관점은 첨예하게 맞설 뿐이니, 가히 천생의 대립자라고 할 만하니, 저 둘이 비록 서로간의 거리가 1천 수백 년이지만 저들 사이의 ‘관점의 충돌’은 가히 피할 수 없었다.
맹자의 정치사상의 핵심은 仁政의 학설이고, 仁政의 학설의 기초는 ‘민본’사상이다. 중국의 고대 사상가 중에 맹자의 ‘민본’사상의 표현이 가장 두드러진다. 그는 통치자의 얼굴을 돌아보지 않고, 대담하게 “백성이 귀함이 되고, 사직이 다음이고, 군주는 가벼움이 된다.”는 견해를 제출하여 인민의 이익을 제1위에 두고, ‘인군’을 ‘백성’과 ‘사직’의 뒤에 두었으니, 이처럼 군주의 지위를 폄하했기에 자연히 역대 통치자들이 모두 옳다고 인정하지 않았고, 주원장도 당연히 예외일 리가 없었다.
그런데 다시 주원장으로 하여금 용인하는 것이 옳다고 어렵사리 느끼도록 한 것은 맹자의 인식은 존재하지 않는 절대적인 천자의 권위를 위한 것이고, 천하백성들은 반드시 한 성의 한 사람에게 충성을 다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인민은 권력을 “바꿔놓기”도 하고 혹 직책에 걸맞지 않는 자와 백성을 해치는 군주를 뒤집어엎기도 한다. 그는 말하기를, “제후가 사직을 위태롭게 하면 바꿔놓는다.”고 했다. 제선왕과 1차 대화를 할 때 맹자는 교묘하게 화제를 잡고 과연 “나라 안이 다스려지지 않을 경우” 군왕이 자기의 문제를 어찌 처리해야 마땅한지를 이끌어 제선왕으로 하여금 십분 난감하게 했다.
맹자가 제선왕을 대하고 말하기를, “왕의 신하가 그 처자를 그 벗에게 맡겨놓고 초나라로 외유를 갔다가 돌아와 보니 그 처자가 추위에 떨면서 굶주리고 있다면 어찌하겠습니까(당신의 일개 신하가 그의 처자식을 벗에게 잘 돌봐달라고 맡겨놓고 자기는 초나라를 유람하고 돌아왔을 때 처자식이 굶주림과 추위에 떨고 있다면 어찌하겠습니까)?”라고 하자 제선왕은 “버립니다(그와는 절교합니다).”고 말했다. 맹자가 다시 “사사가 능히 관리들을 다스리지 못하면 어찌하겠습니까(옥관이 그의 아랫사람들을 잘 관리하지 못하면 어찌하겠습니까)?”라고 하자 제선왕은 “그만두게 합니다(그를 파면합니다)”고 말했다. 맹자가 이어서 드러내놓고 “나라 안이 다스려지지 않는다면 어찌하겠습니까(정리한다면 이 국가가 능히 잘 다스려지지 못하면 어찌하겠습니까)?”라고 묻자 제선왕이 겨우 맹자에게 적당하게 드러낸 것이라고는 난감해하면서 “좌우를 돌아보면서 ‘저’라고 말한 것이다.”
제선왕이 맹자와 토론하면서 “탕이 걸을 유치(留置)하고 무왕이 주를 쳤다”고 했을 때, 제선왕이 “신하가 그 군주를 시해함이 가합니까?”라고 묻자 맹자가 회답하여 말하기를 “仁을 해치는 자를 적(賊)이라 하고 義를 해치는 자를 잔(殘)이라하고, 잔적한 사람을 한 사내라고 하니, 한 사내인 주(紂)를 죽였다고 들었지 군주를 시해했다고는 듣지 못하였나이다”고 말했다. 불인함과 불의함으로 백성들을 해친 상나라 왕인 주를 일컬어 ‘한 사내’라고 하고, 주 무왕이 상의 주왕을 뒤엎고 아울러 위를 범하고 난을 일으켜 군주를 시해한 행위가 아니라 이는 백성들을 위해 해치는 자를 제거했음을 일컬음이라.
역사의 글 속에서 주원장으로 하여금 벌컥 대노하게 한 일단의 화법은 『맹자』 이루하편에 출현하는데, 또한 맹자가 제선왕에게 말하는 것으로, 맹자가 “인군이 신하보기를 수족같이 한다면 신하는 인군보기를 복심처럼 하고, 인군이 신하보기를 견마처럼 한다면 신하는 인군보기를 나라사람(들판이나 길거리 사람)처럼 하고, 인군이 신하보기를 흙먼지처럼 한다면 신하는 인군보기를 원수처럼 할 것이라.”고 했다. 이 속에는 맹자가 평등한 각도를 따라 군신관계를 다루고 있고, 또한 거듭 강조하여 드러낸 것은 인군이 신하를 대함에 예의 전제가 있어야 하고 그런 다음에 신하가 군주를 대함은 고작 충성스러움뿐이고, 그렇지 않으면 신하가 인군을 대함에 겨우 불충하지 않을 뿐이고, 또한 인군을 ‘국인’과 ‘원수’가 된다고 보았다. 이런 종류의 군신간의 ‘상호작용관계’는 본래 이것이 매우 정상적인데도 다만 주원장은 신하가 군주를 대함에 무조건 절대복종으로 응해야 함만을 인정했고, 맹자의 이 몇 마디 말은 '신하된 자가 마땅히 말할 바가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크게 노하면서 맹자를 문묘에게 축출하려고 한 것이다.
4. 孟子哪些言論刺激了朱元璋?
朱元璋是中國歷史上有名的獨裁君主, 他廢除丞相制, 集軍政大權于一身, 將中央集權變成皇帝一人的專權. 他認為君權至高無上, 堂而皇之地淩駕于天下百姓之上. 而孟子是中國歷史上首次提出“民貴君輕”的思想家, 他的觀點和朱元璋的觀點針鋒相對, 可謂天生的對立者, 所以他倆雖然相隔一千數百年, 但他們之間的‘觀點碰撞’ 是不可避免的.
孟子的政治思想的核心是仁政學說, 而仁政學說的基礎是‘民本’思想. 在中國古代思想家中, 孟子的‘民本’思想表現得最為突出. 他不顧統治者的顏面, 大膽提出 “民為貴, 社稷次之, 君為輕”的見解, 把人民的利益放在第一位, 把‘君’擺在‘民’和‘社稷’的後面, 如此貶低君的地位, 自然是歷代統治者都不會認可的, 朱元璋當然也不會例外.
而更讓朱元璋感到難以容忍的是, 孟子認為不存在絕對的天子權威, 天下百姓不必效忠于一姓一人. 人民有權力“變置”或推翻不稱職和殘害百姓的君主. 他說, “諸侯危社稷, 則變置.” 在與齊宣王的一次對話中, 孟子巧妙地把話題引導到如果“四境不治”, 君王該怎麼處理自己的問題, 使齊宣王十分尷尬.
孟子對齊宣王說, “王之臣有托其妻子于其友而之楚遊者, 比其反也, 則凍餒其妻子, 則如之何(您的一個臣子把他的妻兒托付給朋友照顧, 自己去楚國遊歷, 回來時發現妻兒挨餓受凍, 怎麼辦)?” 齊宣王說, “棄之(與他絕交).” 孟子又說, 士師不能治士, 則如之何(獄官不能管好他的屬下, 怎麼辦)?” 齊宣王說, “已之(罷免他).” 孟子接著問, “四境之內不治, 則如之何(整個國家不能治理好, 怎麼辦)?” 齊宣王這才發現上了孟子的當, 尷尬地“顧左右而言他.”
齊宣王在與孟子討論“湯放桀, 武王伐紂”時, 齊宣王問, “臣弒其君可乎?” 孟子回答說, “賊仁者謂之賊, 賊義者謂之殘, 殘賊之人謂之一夫. 聞誅一夫紂矣, 未聞弒君也.” 把不仁不義, 殘害百姓的商王紂稱為“一夫”, 稱周武王推翻商紂王, 並不是犯上作亂的弒君行為, 而是為民除害.
史書上提到令朱元璋勃然大怒的一段話出現在《孟子‧離婁下》, 也是孟子對齊宣王說的, 孟子說, “君之視臣如手足, 則臣視君如腹心, 君之視臣如犬馬, 則臣視君如國人(陌路人), 君之視臣如土芥, 則臣視君如寇仇.” 在這裏, 孟子從平等的角度看待君臣關係, 而且著重強調在君對臣有禮的前提下臣對君才會忠, 否則臣對君不僅不忠, 而且把君視為‘國人’和‘寇仇’. 這種君臣之間‘互動關係’本來是很正常的, 但朱元璋認為臣對君應無條件絕對服從, 孟子這些話“非臣子所宜言”, 故一怒之下將孟子逐出文廟.
5. 맹자가 제후들에게 유세함에 냉대를 받다
제후들은 그를 세상물정에 어둡고 실제적이지 못하다고 했다
맹자는 전국시대에 추나라(지금의 산동 추현) 사람이고, 漢나라 사람인 조기는 그가 춘추시기의 노나라 귀족인 맹손씨의 후손이라고 했다. 맹자는 ‘오경’에 통하였고 시서에 더욱 뛰어났으며, 일찍이 학생들을 앞뒤로 거느리고 제 송 노 등 양 등의 나라에서 유세했고, 비록 한동안 제나라의 객경을 지냈지만 그의 주장은 제후들의 견해와 전혀 맞지 않았고, 끝내는 통치자가 쓰는 바가 되지 못했다.
사마천의 『사기』 맹자순경열전에 기재하기를, “맹자는 추나라 사람으로 자사의 문인에게 수업했다. 도가 이미 통하여 제선왕에게 유세 했으나 선왕이 능히 등용하지 않았다. 양나라로 갔으나 양혜왕은 말한 바를 실천하지 않았으니 곧 사정에 멀고 어둡다고 보았다. 이러한 때에 진나라는 상군을 등용하여 부국강병을 하였고 초나라와 위나라는 오기를 등용하여 약한 적들과 싸워 이겼고, 제위왕과 선왕은 손자와 전기의 무리들을 등용하여 제후들이 동쪽으로 제나라를 조회하였다. 천하가 바야흐로 합종연횡에 힘쓰고 공벌을 어질다고 하는데, 맹가가 이에 당우와 삼대의 덕을 말했으니, 이로써 가는 곳과 맞지 않았다.”고 했다. 맹자는 仁政의 이념으로써 공벌하고 겸병에 바쁜 제후들에게 유세했으니 현격하게 시의에 맞지 않았다. 사마천이 든 하나의 예로, 양혜왕이 맹자와 함께 조나라를 칠 준비를 의논하는데 맹자는 도리어 고의로 양혜왕에게 들려준 것은 어느 해에 태왕이 이적을 피하여 주동하여 빈땅을 떠나 남쪽으로 옮겨 가 기산 아래에 이른 고사였다. 사마천이 말하기를, 저 제후들에게 유세한 것은 흡사 “네모난 장부를 잡고 둥근 구멍에 넣으려는 것(한 개의 네모난 장부를 잡고서 둥근 구멍으로 끼워 넣는 것)”이니 어찌 끼워지겠는가? 그랬기에 맹가는 제나라와 양나라에서 곤했다.
이러했으므로 제후들에게 유세함이 성공하지는 못했으나, 맹자는 물러나 만장의 무리들과 더불어 시서를 서술하고 중니의 뜻을 펴서 『맹자』 7편을 지었다. 맹자 사후에 그 지위는 상당 시간 동안 나라 안에서 높아지지 않았다. 한 나라 때 『논어』는 경서였으나 『맹자』는 자서(제자백가서의 하나)였으니 그 지위는 같은 날에 말할 수가 없었다. 그 뒤에 『수서(隋書)』 경적지(經籍志)와 『구당서』 경적지와 『신당서』 예문지에 모두 『맹자』를 자부(子部)에 배치했으나 경(經)과의 지위는 현저하게 차이 났다.
역사상 제일 먼저 맹자의 지위를 높게 들어 올린 이는 당나라 때의 문호인 한유(韓愈)이다. 한유는 『原道』에서 도의 계통설을 제출하였느니, 그가 인정한 것은 ‘도’는 인의도덕 등 ‘선왕의 가르침’이 될 뿐이고, 설명하기를, “요가 이로써 순에게 전했고, 순은 이로써 우에게 전했고, 우는 이로써 탕에게 전했고, 탕은 이로써 문무주공에게 전했고, 문무주공은 공자에게 전했고, 공자는 맹가에게 전했는데, 가가 죽고 그 전함을 얻지 못했느니라.”고 했다. 맹자는 도통 전승의 최후의 한 사람이 됨을 승인한 것이다. 한유가 다시 말하기를 “그러므로 성인의 도를 구해보려는 자는 반드시 맹자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했다. 이로부터 ‘존맹(尊孟)’의 서막이 열리게 되었다.
5. 孟子遊說諸侯遭冷遇
諸侯稱他迂遠不實際
孟子是戰國時鄒(今山東鄒縣)人, 漢人趙岐說他是春秋時期魯國貴族孟孫氏的後代. 孟子通‘五經’, 尤長于《詩》《書》, 曾帶領學生先後遊說齊宋魯滕梁等國, 雖一度做過齊國的客卿, 但他的主張與諸侯的想法格格不入, 最終不為統治者所用.
司馬遷在《史記‧孟子荀卿列傳》中記載, “孟子, 鄒人也, 受業子思之門人. 道既通, 遊事齊宣王, 宣王不能用. 適梁, 梁惠王不果所言, 則見以為迂遠而闊于事情. 當是之時, 秦用商君, 富國強兵, 楚魏用吳起, 戰勝弱敵, 齊威王宣王用孫子田忌之徒, 而諸侯東面朝齊. 天下方務于合從連衡, 以攻伐為賢, 而孟軻乃述唐虞三代之德, 是以所如者不合.” 孟子用仁政理念去遊說忙于攻伐兼並的諸侯, 顯然不合時宜. 司馬遷舉了一個例子, 梁惠王與孟子商量準備攻打趙國, 而孟子卻故意給梁惠王講了一個當年太王為躲避夷狄而主動離開邠地南遷到岐山之下的故事. 司馬遷說, 這樣遊說諸侯好比“持方枘欲內圜鑿(拿著一個方榫往圓槽插),” 怎麼會插得進去? 難怪孟軻“困于齊梁”了.
因遊說諸侯不成功, 孟子“退而與萬章之徒序《詩》《書》, 述仲尼之意, 作《孟子七篇》.” 孟子死後, 其地位在相當長時間內都不高. 在漢代, 《論語》是經書, 《孟子》是子書, 其地位不可同日而語. 其後, 《隋書‧經籍志》《舊唐書‧經籍志》和《新唐書‧藝文志》都列《孟子》于子部, 與經地位懸殊.
歷史上第一個抬高孟子地位的是唐代文豪韓愈. 韓愈在《原道》中提出道統說, 他認為‘道’就是仁義道德等‘先王之教’, 他說, “堯以是傳之舜, 舜以是傳之禹, 禹以是傳之湯, 湯以是傳之文武周公, 文武周公傳之孔子, 孔子傳之孟軻, 軻之死, 不得其傳焉.” 認為孟子是道統傳承的最後一人. 韓愈還說, “故求觀聖人之道者, 必自孟子始.” 從此拉開了尊孟的序幕.
6. 존맹(尊孟)과 폄맹(貶孟)의 논쟁 1백 년,
최후는 주희의 일추정음(一錘定音)이다
송대에 이르러 맹자 그 사람과 그 글의 지위가 점점 올라갔다. 북송의 신종 희녕 4년(1071년)에 『맹자』 일서는 처음으로 과거고시 과목 속으로 들어왔고, 원풍 6년(1083년)에 맹자는 처음으로 조정에서 ‘추국공(鄒國公)’으로 추봉되었으며, 다음해에 공묘 배향이 비준되었다. 뒷날 송유들이 다시 한 걸음 나아가 『맹자』를 자서에서 경서로 승격하였다. 그런데 『맹자』가 ‘子’를 넘어 ‘經’으로 들어갈 무렵에 학술계에서 폄맹과 존맹의 논쟁이 발생했다. 이 논쟁은 양송(북송과 남송)의 즈음에 1백년간 지속되었고, 주희가 『여은지의 존맹변(尊孟辨)을 읽고』를 쓰고 나서야 겨우 일단락되었다.
폄맹파는 사상가인 이구(李覯)와 학자인 정숙우와 역사학자인 사마광 등이 대표적이다. 이구는 『상어(常語)』에서 맹자를 비판했는데, 이구는 맹자가 인의로 “천하를 어지럽혔다”고 꾸짖으면서 그 인의의 설은 종횡가의 음모와 병가의 속임수와 함께 방식이 비록 같은 모양은 아니지만 “천하를 어지럽힌” 결과는 서로 같은데, 이것은 맹자가 “오패의 죄인”이라고 한 데에서 비롯된다고 하였다. 이구는 또 맹자가 순임금과 고수를 연관 지어 설명한 곳과 상나라 부열의 황당무계한 ‘길거리 얘기’를 지목하였고, 한유가 이른바 성인의 도는 “공자가 맹가에게 전하는” 데에서부터라고 하는 것도 사실에 부합되지 않는다고 했다. 정숙우는 『예포절중(藝圃折中)』을 지어 맹자가 “중니를 끼고 천하를 속였다”고 하면서 근본이 이같이 “현인”이 되지 못하고 “잔인한 사람”이거나 “말 잘하는 선비”로 타고난 성품이 경박하다고 했다. 맹자가 입을 엶에 인의가 떨어지지 않음은 이것이 “인의를 파는 것”이라고 했다. 제선왕의 면전에서 높은 대가를 요구했고 큰 관직을 바라면서 희롱하는 이런 수작은 “시정의 행상하는 아주머니가 소금과 물고기와 과일과 채소를 팔러 다니는 태도”이라고 했다. 사마광은 『의맹(疑孟)』을 지어 맹자를 “예모를 위해서 벼슬하고” “음식을 위해서 벼슬하려고” 했으니 이는 “선왕의 도를 팔아 그 몸을 사게 하려는 것”이라고 지적했으니, 정숙우의 의논과 비슷하다. 그 외에 또 빙휴는 『산맹자(刪孟子)』를 지었고, 조열지는 『저맹(詆孟)』을 지었으니, 다 맹자를 비방하고 헐뜯음을 일삼은 것이다.
존맹파는 이정(정이, 정호)과 여은지와 주희 등이 대표적이다. 二程은 “맹자가 성문에 공이 있음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고 말했고, 또 “맹자는 세상에 큰 공이 있다.”고 했으며 “중니가 다만 하나의 ‘仁’자를 말했다면 맹자는 입만 열면 문득 ‘인의’를 말했고, 중니는 다만 하나의 ‘志’만을 말했다면 맹자는 문득 허다히 養氣를 냈다. 다만 이 두 글자만으로도 그 공이 심히 크다.”고 했다. 여은지는 『존맹변』을 써서 이구와 정숙우 등이 폄맹의 언론을 조목조목 반박하여 쫓아내 맹자를 변호하였다. 주희는 곧 『여은지의 존맹변을 읽고』를 써서 여은지의 관점을 긍정하면서 아울러 보충하여 맹자를 존숭함에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주희는 맹자를 “출처의 대개”라고 일컬으면서 높아서 가히 미칠 수 없다고 했다. “육경이 천곡의 배라면 맹자는 배를 움직이는 사람”이니 맹자라는 이 “배를 움직이는 사람”이 있지 않았다면 배가 나아가 운행함이 없었을 것이다. 주희는 쓰기를 이구는 “맹자의 울타리를 족히 엿보지 못했고,” 정숙우의 의논은 “편벽하고 전도되었으며,” “매우 독하게 논하여 세상을 놀라게 함을 좋아한다.”고 했다.
이정과 주희는 모두 저명한 이학가이기 때문에 그들의 언론의 영향은 절대적이었다. 주희의 『여은지의 존맹변을 읽고』는 논쟁의 장을 종결지었고, 잇달아 모두 맹자를 높였으며, 존맹이 필수가 되어 학술계의 공통된 지식이 되었다. 뒤에 주희는 또 『맹자』와 『논어』 『대학』 『중용』을 합해 “사서(四書)”로 삼았고, “오경(五經)”과 아울러 나란히 하게 하였으며, 또한 그 실제적 지위는 다시 오경의 위에 있었다. 이후에 맹자의 지위는 날이 갈수록 더욱 높아져 원나라 때인 지순(至順) 원년(1330년)에 맹자는 “아성공(亞聖公)”으로 가봉되고 이후에는 “아성(亞聖)”으로 일컬어지니, 유문 가운데 지위가 공자보다 조금 다음이다.
유가 사상은 한나라 이후에 역대의 통치자들이 국가를 다스리는 주도 사상이었고, 맹자는 유가 중에서 지위가 이처럼 존숭되었다가 명나라 태조인 주원장이 황제의 높은 권력으로 맹자를 문묘에서 축출 했으나 또한 맹자가 전국 지식분자들의 마음과 눈 속에 자리한 지위를 능히 고쳐서 바꾸지 못하자, 곧 주원장이 사람들에게 명하여 『맹자』의 많은 내용을 깎아내도록 했으나 또한 맹자사상이 후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데 능히 위축시키지도 못했다.
* 一錘定音 : 징을 만드는데 마지막 한 번의 망치질로 징의 음색을 결정짓는다는 뜻으로, 분분한 논쟁이 있을 때 결정적인 한 마디로 일거에 논쟁을 잠재울 때 쓰인다. 1950년대 중국에서 神童作家로 불린 劉紹棠(1936 ~ 1997)의『小荷才露尖尖角』(작은 연꽃 봉오리가 물위로 삐죽이 고개를 내밀 때)라는 소설의 “他不聲不響,卻是一家之主, 女兒中意, 老伴點頭, 也還得聽他一錘定音.”이라는 내용에서 유래한다.
6. 尊孟與貶孟爭了百年
最後由朱熹一錘定音
到了宋代, 孟子其人其書的地位逐漸上升. 北宋神宗熙寧四年(公元1071年), 《孟子》一書首次被列入科舉考試科目之中, 元豐六年(公元1083年), 孟子首次被朝廷追封為‘鄒國公’, 翌年被批準配享孔廟. 後來, 宋儒還進一步把《孟子》從子書升格為經書. 然而, 就在《孟子》超‘子’入‘經’的時候, 學術界發生了貶孟與尊孟的爭論. 這個爭論在兩宋之際延續了一百年, 直到朱熹直到了《讀余隱之尊孟辯》, 才塵埃落定.
貶孟派以思想家李覯, 學者鄭叔友和歷史學家司馬光等為代表. 李覯著《常語》批判孟子, 李覯指責孟子以仁義“亂天下” 其仁義之說, 與縱橫家的陰謀, 兵家的詐詭, 方式雖然不一樣, 而“亂天下”的結果是相同的, 因此孟子是‘五霸之罪人’. 李覯還指出孟子所說關于舜與瞽叟, 商的傳說是無稽的‘委巷之談’, 韓愈說所謂聖人之道由“孔子傳之孟軻”也不符合事實. 鄭叔友著《藝圃折中》, 稱孟子“挾仲尼以欺天下”, 根本不是什麼“賢人” 而是“忍人” “辯士” 資性輕薄. 孟子開口不離仁義, 乃是“賣仁義.” 在齊宣王面前索要高價, 想做大官, 玩的是一套“市井販婦行鬻魚鹽果菜之態.” 司馬光著《疑孟》, 指出孟子是“為禮貌而仕” “為飲食而仕”是“鬻先王之道以售其身” 與鄭叔友的議論相似. 另外, 還有馮休著《刪孟子》, 晁說之著《詆孟》, 皆以詆毀孟子為事.
尊孟派以二程(程頤, 程顥), 余隱之, 朱熹等為代表. 二程說, “孟子有功于聖門, 不可勝言.” 又說, “孟子有大功于世.” “仲尼只說一個‘仁’字, 孟子開口便說‘仁義’, 仲尼只說一個‘志’, 孟子便說許多養氣出來. 只此二字, 其功甚多.” 余隱之寫了《尊孟辯》, 逐條反駁李覯, 鄭叔友等人的貶孟言論, 為孟子辯護. 朱熹則寫了《讀余隱之尊孟辯》, 肯定並補充余隱之的觀點, 進一步尊崇孟子. 朱熹稱孟子“出處大概” 高不可及. “六經如千斛之舟, 而孟子是運舟之人” 沒有孟子這個“運舟之人” 舟就無可航行. 朱熹認為李覯“不足以窺孟子之藩籬” 鄭叔友的議論是“詭僻顛倒”, “好為太高之論以駭世.”
由于二程和朱熹都是著名的理學家, 他們的言論影響極大. 朱熹的《讀余隱之尊孟辯》終結了這場爭論, 應該尊孟, 必須尊孟成為學術界的共識. 後來, 朱熹又把《孟子》與《論語》《大學》《中庸》合為“四書”, 使之與“五經”並列, 而且其實際地位更在“五經”之上. 此後, 孟子的地位越來越高, 元朝至順元年(公元1330年), 孟子被加封為“亞聖公”, 以後就稱為“亞聖”, 在儒門中地位僅次于孔子.
儒家思想是漢以後歷代統治者治理國家的主導思想, 而孟子在儒家中的地位是如此尊崇, 所以即使明太祖朱元璋以皇帝之尊將孟子逐出文廟, 也不能改變孟子在全國知識分子心目中的地位, 即使朱元璋令人刪去《孟子》大量內容, 也不能削弱孟子思想對後人的影響.
출처 : 孟子易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