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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자료

'창씨개명 반대' 자결한 사람들

작성자우렁각시|작성시간12.10.01|조회수516 목록 댓글 0

'창씨개명 반대' 자결한 사람들

 

1895년 김홍집 내각은 양력 채택과 함께 단발령을 내렸다. 이에 고종이 먼저 서양식으로 머리를 깎고 모범을 보였다. 내부대신 유길준은 고시(告示)를 통해 관리들이 가위를 들고 거리로 나가 백성들의 머리를 강제로 깎게 하였다. 그러자 이는 곧바로 큰 반발에 부닥쳤다. 유교 관습에 머리카락조차도 함부로 훼상(毁傷)하지 않는 것이 효도의 시작이라고 여겨왔기 때문이다. 머리카락 자르는 것을 놓고도 이런 지경이었는데, 성과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라고 했으니 그 저항과 반발이 어떠했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단발령 공포 후 체두관(剃頭官)이 행인을 붙잡아 강제로 상투를 자르는 모습

 

 한국에는 ‘10촌만 넘으면 남’이라는 말이 있는 데 이를 뒤집어보면 10촌 이내는 전부 한 가족이라는 얘기다. 피난 갈 때도 지고 가는 족보는 단순히 한 가족의 가계도가 아니라 같은 성을 가진 일족 전체의 계보도이다. 그런데 창씨개명을 하게 되면 족보도 아무 소용이 없어지게 된다고 하자 양반 유생들이 먼저 들고 일어났다.

 

경기도의 한 양반은 “성(姓)을 대대손손 전해 비로소 혈통을 완수하는 것으로써 옛말에도 성을 바꾸면 머슴보다 못하다고 했다. 나는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성을 바꿀 생각이 없다.”며 강하게 반발했다. 또 전북의 한 양반은 “창씨는 유서 있는 집안의 우리들로서는 선조의 공로를 모독하는 유감스런 것으로 참기 어려운 고통이다.”며 역시 반대 입장을 밝혔다.

현실 불가피론을 전제한 사람도 없진 않았다. 그러나 그들 중에는 ‘창씨 해도 조선인은 조선인이다’라거나 ‘장차 조선이 독립되면 내지식 창씨를 본래의 성으로 개정할 수 있을 것이니 크게 신경 쓸 필요 없다’는 식이었다. 주로 이런 이유로 인해 초창기 창씨개명 신청이 저조하자 일제는 급기야 조선인들의 일상을 파고들어가 압박하기 시작했다. 문정창(文定昌)의 <군국일본 조선강점 36년(하)>에 따르면, 창씨를 하지 않을 경우 자녀의 입학을 불허하는 등 아래의 6개항과 같은 불이익을 주었다.

➀ 창씨 하지 않은 사람의 자제에 대해서는 각급 학교로의 입학·진학을 거부한다.
➁ 창씨 하지 않은 아동에 대해 일본인 교사는 이유 없이 질책·구타함으로써 아동의 호소에 의해 그 부모가 창씨하게 한다.
➂ 창씨 하지 않은 사람은 공사를 불문하고 총독부 기관에 일체 채용하지 않는다. 또한 현직자도 점차 면직조치를 취한다.
➃ 창씨 하지 않은 사람에 대해서는 행정기관과 관련된 모든 사무를 취급하지 않는다.
➄ 창씨 하지 않은 사람은 비(非)국민 또는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 단정해 경찰수첩에 등록해 사찰·미행을 철저히 함과 동시에 우선적으로 노무징용의 대상자로 한다. 혹은 식료 및 기타 물자배급 대상에서 제외한다.
➅ 창씨 하지 않은 조선인의 이름이 붙어 있는 화물은 철도국 및 환성(丸星)운송점에서 취급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대론은 쉽게 수그러들지 않았다. 저항 방식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창씨제를 웃음거리로 만들어 희화화 하는 방식이었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희생을 각오하고 직접 저항하는 방식이었다.
우선 전자의 사례를 보면, “성을 바꾸었으니 ‘개자식’이 된 단군의 자손”이라는 뜻으로 ‘견자웅손(犬子雄孫)’으로 창씨계를 제출했다가 퇴짜를 맞기도 하였고, 또 어떤 이는 ‘개 같은 놈 똥이나 처먹어라’는 의미의 ‘견분식위(犬糞食衛)’로 제출했다가 경찰로부터 문책을 당하기도 했다. 또 엄이섭(嚴珥燮)이라는 사람은 이름 밑에 ‘也’자만 붙여 ‘嚴珥燮也’로 제출해 온 가족의 성이 ‘엄이’가 된 예도 있었다.

일황 등 황족을 빗댄 경우도 더러 있었다. ‘천황폐하(덴노헤이카)’와 일본어 발음이 같은 ‘田農丙下’로 창씨개명한 사례도 있었고, 일본 황족 약송궁(若松宮)의 ‘若松’과 일황 유인(裕仁, 히로히토)의 ‘仁’을 취해 ‘若松仁’이라고 창씨개명 했다가 불경죄로 경찰에 체포되기도 했다. 또 창씨개명을 실시한 미나미 지로(南次郞) 총독의 이름을 흉내내 미나미 다로(南太郞)으로 지은 경우도 있는데, 일본식으로 ‘次郞’은 둘째아들, ‘太郞’은 맏아들을 지칭한다. 이 모두 창씨개명을 반대하는 소극적 저항의 한 형태였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비해 감옥살이와 죽음을 각오하고 창씨개명을 극력 저항한 사람도 더러 있었다. 충남 대덕의 이기용과 김한규는 창씨제도를 비방한 죄로 각각 8개월, 1년씩 징역형을 선고받았으며, 그밖에 구류처분을 받은 사람은 허다했다. 창씨개명을 반대하며 목숨을 바친 사람도 두 사람이나 있었다. 전남 곡성의 류건영(柳健永)은 미나미 총독에게 창씨제를 반대하는 엄중한 서한을 보낸 후 자결하였다. 유건영이 남긴 유서의 한 대목을 옮겨 보면,


“슬프다. 류건영은 천년고족(千年古族)이다... 이미 나라가 멸망했을 때 죽지 못하고 30년간 치욕을 받아왔지만 이제는 혈족의 성마저 빼앗으려 한다... 동성동본이 서로 결혼하고 이성(異姓)을 양자로 맞아들이고 데릴사위가 자신의 성을 버리고 그 집의 성을 부르도록 하니 이는 금수의 도(道)를 5백년 문화민족에게 강요하는 것이다... 나 건영은 짐승이 되어 사느니 차라리 깨끗한 죽음을 택한다.”

전북 고창의 의병 출신 설진영(薛鎭永)은 어느 날 아이가 다니던 학교로부터 창씨개명을 하지 않을 경우 자녀를 퇴학시키겠다는 통보를 받았다.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가 울면서 창씨개명을 해달라고 애원하자 그는 할 수 없이 창씨개명을 했다. 그리고는 자신은 조상을 볼 낯이 없다며 돌을 안고 마당의 우물로 뛰어들어 목숨을 끊었다. 설진영의 이야기는 일본인 가지야마 기이치(梶山季之)가 <족보>라는 소설로도 발표했으며, 1978년 한국에서 영화로 제작되기도 했다. (* 설진영은 의병활동 공로 등을 감안해 1991년 뒤늦게 건국훈장 애국장(4등급)을 추서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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