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美術)
美 아름다울 미 /術 1) 꾀 2) 마을 이름
한국에서 '미술(美術)'이라는 신조어가 공식적으로 쓰인 것은 1911년에 발족한 '서화미술회'라는 명칭에서인데 보편적으로 쓰였던 것을 보면 일본의 명치(明治) 직후에 사용되기 시작한 것을 그대로 받아들였음이 분명하다. 일본에서 '미술'이 조형造形일반을 지칭하는 개념으로 사용된 것은 명치(明治) 이후이며 Fine Art(les beaux-arts)에 해당하는 순수미술로 굳어 진 것은 명치(明治)후반기의 일이다
* 明治(메이지1868년 1월 3일~1912년 7월 30일)
특히 시각에 호소하는 예술로 회화·조각·건축 등을 말한다. 그러나 'fine art'란 본래 조형예술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 전반을 포함한 것이며, 그 역어로서의 '미술'은 개념이 명확하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이 '예술'이라는 말은 중국 〈후한서 後漢書〉에서도 볼 수 있는 오래된 개념으로 학문·기예를 가리키며 당시에는 아직 “미술”이라는 말은 없었다.
청말(淸末)이 되어 역대의 미술론을 편집한 〈미술총서 美術叢書〉가 만들어졌는데 이것은 서주(西周) 이후부터 쓰인 것으로 생각된다. 아무튼 미술이라는 말은 그 원어 본래의 의미를 떠나 현대에 이르기까지 활발히 사용되고 있다. 미술이란 무엇이냐 하는 본질적인 개념을 정의하기란 매우 어려우며 시대와 장소, 또는 그때의 사회현상에 따라 개념이 변천하는 경향이 있다.
경성 서화 미술원[ 京城書畵美術院 ]
*설립자 윤영기 *대표자 이완용
;1911년 윤영기(尹永基)·방한덕(方漢德), 이 '고금서화(古今書畵)의 모집·진열과 서화교육'을 목표로 경성서화미술원(京城書畵美術院)을 설립했을 때 그 운영위원회격으로 결성된 모임.근대적 성격을 띤 최초의 미술교육기관.
1911년 창설되어 1919년 폐쇄될 때까지 한국 근대 동양화단의 대표적 화가들을 많이 배출하였다.
근대적 성격을 띤 우리나라 최초의 미술교육기관이다. 처음 서화미술회의 설립은, 전통서화의 계승과 후진양성을 위한 미술교육기관의 필요성을 느꼈던 문인화가 윤영기(尹永基)가 1911년 3월에 경성(서울) 중학동에 경성서화미술원(京城書畫美術院)을 마련한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처음에는 조선 왕실의 지원을 받았으나 설립 6개월 만에 이완용(李完用)에게 운영권을 넘겨줘야 했다.
경성서화미술원은 설립추진과정에서 이완용(李完用)·조중응(趙重應)·조민희(趙民熙 이완용의 처남) 등 일파들로 구성된 운영위원회 성격의 서화미술회(書畵美術會)로부터 재정적 도움을 받았으며, 설립 이후에는 이왕가(李王家조선 왕실)로부터 후원을 받았다.
따라서 재정적인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는 경성서화미술원의 실질적인 운영을 위하여 이완용을 회장으로 하는 서화미술회가 조직된 것이다. 이후 경성서화미술원과 더불어 윤영기는 퇴진하였고 “서화미술회”로서 출발하게 되었다.
이후 재정적인 어려움에 봉착하자 실질적인 운영을 맡은 서화미술회로 주도권이 이완용에게 운영권을 빼앗겼고 조선총독부로부터 재정 후원을 받는 등 총독부 영향권 안에 있는 서화 애호단체의 성격을 분명히 했다.
윤영기로부터 경성서화원의 주도권을 넘겨받은 이완용은 1912년 조중응(趙重應), 조민희(趙民熙) 등 친일파들로 구성된 조선서화미술회((朝鮮書畵美術會)를 설립하고 회장이 되어 미술원을 운영했다. 이완용은 자금과 권력을 배경으로 이 미술원을 이용하여 문화계 인사들과 교류하였다
미술가를 양성하기 시작했으며 교수진은 당시 서화계의 대가였던 조석진(趙錫晋1853~1920)과 안중식(安中植1861~1919)을 중심으로 강진희(姜璡熙1851~1919)·정대유(丁大有1852~1927)·김응원(金應元1855~1921)·강필주(姜弼周1860경~1923)·이도영(李道榮1884~1933) 등이었다
정대유와 강진희가 지도한 서과에서는 전(篆), 예(隸), 해(楷), 행서(行書)를 가르쳤고, 화과에서는 산수(山水), 인물(人物)로부터 화조(花鳥), 기명절지(器皿折枝) 등 모든 전통적 화법을 가르쳤는데, 주된 교육방식은 화보(畵譜)나 중국화가의 그림을 임모(臨摹)하는 봉건적인 교육방식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 미술원은 3년 과정으로 4회에 걸쳐 교육생을 배출하였다
서화미술회 강습소에는 서과(書科)와 화과(畫科)의 두 과로 나누어 학생들을 모집하였다.
수업연한은 서화전공별로 3년이었고, 수업료는 전혀 받지 않았으며, 정규학생 이외에도 단기적인 교육을 받는 학생들도 있었다. 교육과정에는 화보나 중국화가들의 작품을 모방하여 베끼는 봉건적인 교육방식이 주류를 이루었다. 초기의 강습소는 백목다리(지금의 신문로) 근처에 있던 왕실 소유의 큰 한옥건물이었으나, 1915년에 관철동으로 옮겨졌다.
이들의 교육방법은 고법전수식(古法傳授式)으로, 학생들은 선생들이 수묵화와 채색화의 여러 체본(體本)들을 그려주면 그것을 일일이 임모(臨模)한다든가 또는 개자원화보(芥子園畫譜)를 참고하기도 하였다. 이따금 실물사생을 하였으나 적극적인 것은 아니었고, 주로 옛 화법에 의해 기초훈련을 쌓는 데 중점을 두었다.
1913년과 1915년에는 전람회를 개최하여 근대적인 미술문화의 보급에 기여했다.
1919년 해체될 때까지 서화미술회출신의 대표적 화가로는 제1기생(1914)으로 오일영(吳一英1810~1960)·이용우(李用雨1902~1952), 제2기생(1915) 으로 김은호(金殷鎬1892~1979), 제3기생(1917)으로 박승무(朴勝武1893~1980), 제4기생(1918)으로 이상범(李象範1897~1972)·노수현(盧壽鉉1899~1978)·최우석(崔禹錫1899~1965) 등을 배출하여 다음 시기 서화협회書畵協會와 같은 근대적인 미술가단체가 결성되고 활발한 미술활동이 전개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이들은 1920년 이후 한국근대동양화단의 대표적인 화가들이 되었으며, 이들에게 화풍상 가장 많은 영향을 끼쳤던 사람은 조석진과 안중식(安中植)·이었다.
1911년 윤영기가 경성서화미술원을, 안중식(安中植)·조석진(趙錫晉)이 서화미술회를, 1915년 김규진(金圭鎭)이 서화연구회를 설립하고 평양이나 대구에서도 학원이 생겨 미술인이 증가함에 따라 고희동(高羲東)은 윤영기·김규진 등과 단체설립을 모색하였다
1918년 해체될 때까지 미술가를 양성함으로써 다음 시기 서화협회와 같은 근대적인 미술가단체가 결성되고 활발한 미술활동이 전개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근현대화단의 주요인물인 이상범·노수현·이용우·김은호·오일영·박승무·변관식·최우석 등은 이 강습소 출신이다.
서화협회와 같은 근대적인 미술가 단체가 결성되고 활동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1918년 강습소에서 제4회 졸업생을 배출한 것을 마지막으로 1920년 6월에 해체되었다.
기성서화회 箕城書畵會
1914년 윤영기(尹永基, 1833-?)가 평양에서 결성한 서화가들의 단체.
기성(箕城)은 평양의 옛 이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