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대 조선총독 : 사이토 마코토 (齋藤 實)

작성자우렁각시|작성시간13.03.10|조회수914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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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5대 조선총독 : 사이토 마코토

                             齋藤 實  / 제등 실  / さいとう まこと / Saito Mako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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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해군 군인이자 관료, 정치가이다 해군병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에 유학, 자수성가하여 해군 대장에 이르렀고 해군대신을 지냈다. 총리(1932~34)와 2차례의 조선총독을 역임했다.

1919년부터 27년까지 제3대 조선총독으로서 종전의 무단정치에서 '문화정치'로 통치방법을 전환시켜 식민지 반발을 무마하려 노력했다.

1929년부터 31년까지 제5대 조선총독부 총독으로 강압적 식민통치를 완화하여 조선인의 저항을 무력화하려는 문화 통치 정책을 추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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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대 조선 총독 재임기간

        ;1919년 8월 12일 - 1927년 ( 1회차)

제5대 조선 총독 재임기간

   ;1929년 8월 17일 - 1931년 6월 16일

             (2회차)

 

출생사망

      ;1858년 12월 2일 ~ 1936년 2월 26일

 출생지 일본일본 제국 무쓰노쿠니 미즈사와 번

 사망지 일본일본 제국 도쿄 도


이와테 현(岩手縣, 현 오쓰 시(奥州市) 마쓰사와 구(水沢区))에서 몰락한 사족(士族) 집안에서 태어났다. 처음 이름은 토미고로(富五郎)였다가 나중에 마코토(實)로 개명하였다.

 

◈수학과 해군 복무 

                파일:Makoto Saito.jpg ◀해군대신 시절

 

1879년 일본 해군병학교(海軍兵學校)를 졸업하고 1884년 미국으로 유학하였으며 유학 중 겸임 주미일본공사관 주재무관의 자격이 부여되어 1888년까지 그곳의 일본 최초의 주재무관으로 머물렀다. 이때 국제적인 안목을 기르고 유창한 영어를 습득했다.

 

후에 일본으로 돌아와 아키즈노즈(秋津洲) 호와 쿠마(嚴島)호의 함장을 지냈다. 이후 자수성가하여 야전과 참모, 궁정직을 돌아가면서 섭렵했고 1897년에는 한 달 만에 2계급을 뛰어넘는 고속승진을 하여 대좌에 올랐다. 1900년 5월~14년 해군 소장(해군상海軍相)을 맡았으며 1904년 6월 해군 중장으로 승진했으며 러일 전쟁에 참전하였다.

 

◈장군 진급과 각료 취임

1905년 1월에는 선박 건조를 담당하는 부서인 해군 감정본부장(艦政本部長)이 되고 러일 전쟁 때는 해군차관에 임명되었다. 이후 7년간 해군차관으로 복무하며 중장까지 승진, 대해군 건설에 힘쏟아 러일 전쟁에서 일본 해군이 러시아 해군을 격파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해군 대장에 이르렀다. 1907년 남작의 작위를 받았다.

 

          

◈제3대 조선총독

1906년 사이온지 내각에서 해군대신이 되었고, 이후의 내각에서도 다섯 차례 연속으로 해군대신을 지냈다. 1912년에는 대장으로 승진했으나, 1914년 해군의 독직(瀆職) 사건(지멘스 스캔들)으로 으로 붕괴하자 사임하였다. 1919년 3.1 운동 직후  8월 12일 조선총독이 되어 3·1운동 이후의 후폭풍을 우려,강압적 식민통치를 완화하여 조선인의 저항을 무력화하려는 문화 통치 정책을 추진하였다.  

 

1919년 9월 2일에는 조선총독으로 부임하러 조선에 입국, 경성역에 내리다가 강우규(姜宇奎) 등의 폭탄습격을 받았으나 구사일생으로 죽음을 면하였다 대신 사이토를 호위하던 일본인 경찰을 비롯하여 사상자 37명이 나왔다 강우규(姜宇奎)는 총독 암살미수혐의와 민간인 사상 혐의로 사형 구형, 1920년 11월 29일 서대문감옥에서 교수형을 당하였다.

 

1925년에 자작이 되고, 1927년 제네바 해군 군축협상에 전권대표로 참석하기 위해 귀국한 뒤에 조선총독직에서 물러났다. 사임하고 천황의 추밀고문관(樞密顧問官)이 되었다.

 

◈제5대 조선총독

1929년에 조선총독에 재임명되었고, 1931년 조선총독직을 다시 사임, 1932년 총리 이누카이 쓰요시[犬養毅]가 암살되자  총리가 되었다.

     파일:Saito Makoto.jpg ◀사이토 마코토의 초상화

 

 총리 사퇴와 최후

1932년 거국일치 내각을 조직하여 수상에 취임, 만주국 승인하고 국제연맹 탈퇴하는 조치 농촌 구제사업을 추진하여 민심과 내분을 수습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1932년 외무대신을 겸하였고, 1933년 외무대신직에서 물러났으나 겸임 학무대신이 되었다. 1934년 내각의 비리 스캔들로 총리직을 사임했고 이후 일본 천황의 보좌관격인 내대신(內大臣)이 되었다. 그는 만주 사변 이후 국가의 총체적 군국화를 주장하며 발호하는 혁신우익(황도파)에 맞서 현상유지를 노력했기 때문에 황도파의 젊은 장교들의 주적이 되었다.

 

1936년 친영파(親英派)와 친미파(親美派) 정치인의 한사람으로 지목되어 그해 2월 2.26사건 당시 반란을 일으킨 황도파 청년장교들에게 도쿄에서 78세의 나이로 암살되었다.

       파일:SaitoMakoto.statue.JPG ◀사이토 마코토의 동상

 

 

☆☆☆☆☆ 일본의 조선 통치 과정에서 조선 총독 이란? ☆☆☆☆☆

                   

조선총독들의 이력을 중심으로 어떠한 인물들이 역대 조선총독을 역임했는지를 살펴보았다.

9대의 8명에 이르는 일본 육해군 대장들이 역임했던 조선 총독은 식민지 조선의 최고 권력자로서 그 중에서 5명이 일본 내각 수상직을 수행하였다.(마지막 총독인 아베는 수상을 물러난 후에 조선 총독이 됨)  

 

요컨대 군사강점을 통해 조선을 식민지화했던 일제는 군부 중심, 그 중에서도 육군이 중심이 되어 조선 통치를 실현하였다. 이러한 점은 근대의 일본 육군을 조슈(長州)벌 세력이 장악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점은  

 

식민지 전 시기를 통해 조선에 이주하였던 재조선 일본인의 4할 정도가 조슈지역 즉 현재의 야마구치(山口)현 출신자였다는 점만 보더라도 일본의 조선 통치의 과정에서 지역 이해관계가 어떻게 작용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주요한 대목이라고 하겠다.

 

 더불어 조선 총독 역임자들은 그 경력을 밑바탕으로 일본의 수상이 되는 전형적인 엘리트 군인의 정치가로서의 중간 코스가 조선 총독이란 지위였다고도 할 수 있다. 또 이는 조선 통치의 성격이 군사적 지배에 있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며 아울러 근대의 일본의 정치를 이해하는데도 매우 중요한 군인 정치가의 배출 과정이었다고도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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