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09-01 천도교중앙간부, 김완규, 오상준, 이종린, 이교홍, 김건식이 한일합병에 반대 항거하다가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

작성시간19.09.30|조회수25 목록 댓글 0



일제침략하 한국36년사 1권 > 1910년 9월 1일 > 天道敎中央幹部 金完圭 吳尙俊 李鍾


   연월일      1910년 09월 01일

   주제분류    문화,학술 > 종교 > 천도교 > 천도교일반

                   민족해방운동,대중운동 > 민족주의운동 > 기타민족주의운동

                    > 기타민족주의운동

    출전          天道敎大宗司日記


天道敎中央幹部 金完圭吳尙俊李鍾麟李敎鴻金健植이 한일합병에 반대 항거하다가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다.


             天道敎大宗司日記


천도교중앙간부(天道敎中央幹部) 김완규(金完圭) 오상준(吳尙俊) 이종린(李鍾麟) 이교홍(李敎鴻) 김건식(金健植)이 한일합병에 반대 항거하다가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다.



   김완규 (金完圭)  독립운동가,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 중 1인이다.

 

  


 1878년 8월 7일(음력 7월 9일) ~ 1948년 양력 5월 25일)


 * 아호 ; 송암(松巖), 송석(松石)

 천도교 도호 ; 법암(法菴)

 *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1910년 9월 각국 영사에게 한일병합 반대 편지 발송으로 체포,


 1919년 3 ・ 1운동 민족 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 3 ・ 1운동에 참여


 

1876년 7월 9일 서울 연지동(蓮池洞)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서당에서 한문을 수학하였다. 1898년 여수(麗水) 통신주사(通信主事) 및 한성부 주사 등을 지내고, 국권상실 이후에는 천도교에 입교하여 봉도(奉道)·법암장(法庵長) 등을 역임하였다.


1906년 2월 20일 권동진(權東鎭) 연원(淵源)으로 천도교에 입교하였다. 이때 천도교단은 중앙과 지방 조직을 정비하고 있었다. 2월 10일 공포된 「천도교대헌天(道敎大憲)」에 따라 천도교 중앙조직은 대도주를 정점으로 원직(原職)과 주직(住職)의 이원체제로 구성되었다. 1906년 5월 15일 원직(原職)인 중정中正과 주직(住職)인 중앙총부 서응관(庶應觀) 교섭원에 임명되었다. 이후 1906년 10월 서응관장 서리(署理), 1907년 9월 금융관(金融觀) 교섭원을 거처 12월 전제관장(典制觀長)에 임명되었다. 1909년 2월 전제관장을 그만두고, 총인원(叢仁院) 의사원(議事員)에 임명되었다.


1910년 8월 15일 천도교리 선전과 학술 보급을 목적으로 창간한 『천도교회월보(天道敎會月報)』의 발행인으로 활동하였다. 편집인 김원극(金源極), 인쇄인 이교홍(李敎鴻) 등과 함께 잡지를 발행하였다.


1910년 9월 이교홍 등 천도교회월보사 사원 3명과 함께 ‘한일병합’에 반대하는 편지를 각국 영사에게 보내고 성원을 요청하였다. 이일로 오상준(吳尙俊), 이종린(李鍾麟), 이교홍, 김건식(金健植) 등 천도교 간부들과 함께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일본 경찰은 천도교의 조직 ・ 운영 ・ 재정 ・ 간부 신상 ・ 교인 동태 등에 대해 심문하고, 앞으로는 정치적으로 불온한 행동과 의사 표현을 하지 않겠다는 선서를 하게 한 후 석방하였다. 이후 11월 2일 『천도교회월보』 발행인 겸편집인이 차상학(車相鶴)으로 교체되었다.


    

    3·1운동 당시 천도교 지휘부였던 송현동 천도교 중앙총부 정면 모습<출처 : 천도교100사>

     천도교 중앙총부 옛터 현 덕성여중  


1912년 최준모(崔俊模)와 함께 중앙총부 봉도실(奉道室) 우봉도(右奉道)로 활동하다가 1913년 5월 16일 우봉도를 그만두고 승례(承禮)로 옮겼다.



1919년 제1차 세계대전을 마무리하기위한 파리강화회의가 열리자 권동진(權東鎭), 오세창(吳世昌) 등 천도교 지도자들은 종교계와 교육계 인사를 중심으로 독립선언식을 준비하였다.2월 천도교의 기도회 종료보고와 국장참배를 위하여 상경하여, 손병희(孫秉熙) · 권동진(權東鎭). 오세창(吳世昌) 등은 서명할 것을 동의하였다. 손병희(孫秉熙)로부터 조선독립운동을 준비한다는 말을 일찍부터 들었으며, 2월 26일 권동진 집에서 오세창에게 기독교 ・ 불교와 함께 국민의 대표자로 독립선언을 하게 되었다는 말을 듣고 이에 찬동하였다. 2월 27일 오세창(吳世昌) , 권동진(權東鎭), 최린(崔麟), 나용환(羅龍煥), 권병덕(權秉悳), 나인협(羅仁協), 양한묵(梁漢默), 임예환(林禮煥), 홍기조(洪基兆), 홍병기(洪秉箕) 등과 함께 집에서 만나 독립선언서와 다른 문서의 초안을 검토하고 서명하였다.


     

    3.1운동 당시 천도교중앙총부 건물. 2층 양옥 건물이었다. 지금 덕성여중 자리이다. 하지만 현 덕성여중 자리에는

   표지판 하나 없다. 3.1운동 당시 손병희 집과 마찬가지로 3.1운동 준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장소이다.    


    1919년 3·1운동 당시의 중앙학교 숙직실(오른쪽 건물)과 중앙학교 운동부 학생들(아래)이 사용하던 합숙소(왼쪽 건물). 교장  사택이기도 한 숙직실에서 송진우, 현상윤, 최남선, 최린 등이 천도교와 기독교 등 종교연합을 논의했다. 중앙고교 제공

    1919년 3·1운동 당시의 중앙학교 숙직실(오른쪽 건물)과 중앙학교 운동부 학생들(아래)이 사용하던 합숙소(왼쪽

   건물). 교장 사택이기도 한 숙직실에서 송진우, 현상윤, 최남선, 최린 등이 천도교와 기독교 등 종교연합을 논의했

   다. 중앙고교 제공


    

      1918년 경성지도. ‘천도교총부(天道敎總部)’로 표기되어 있다.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파고다공원(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한다는 데 동의하고 민족대표로서 「독립선언서」에 서명 날인하였다.


천도교에서는 각 기관이나 연원의 대표로 활동하던 핵심간부 15명이 서명하였다. 이 서명에 천도교 총대표 손병희, 천도교중앙총부 대표 권병덕, 보성학교 대표 최린, 천도교월보사 대표 이종일(李鍾一), 장로인 이종훈(李鍾勳) . 홍병기, 그리고 천도교 원로로서 도사인 권동진, 오세창, 양한묵, 임예환, 홍기조, 나용환, 박준승(朴準承) 등과 함께 서명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2월 28일 이종일의 방에 가서 독립선언서를 미리 보았다.


3월 1일 아침 최린으로부터 독립선언식 장소가 인사동의 명월관(明月館) 지점 태화관(泰華館)으로 바뀌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오후 2시경 인사동(仁寺洞) 소재 태화관에 민족대표로 서명한 33인 중 길선주(吉善宙), 유여대(劉如大), 김병조(金秉祚), 정춘수(鄭春洙) 등 4명을 제외한 29명이 모였다. 독립선언식을 마친 후 민족대표들과 함께 종로경찰서에 그 사실을 통보하였고, 즉시 달려온 일본경찰에 의하여 경무총감부(警務總監部)에 구금되었다.


1919년 6월 상순 경찰과 검찰의 취조를 거쳐, 8월 1일 이른바 「내란죄」를 적용하여 최고심인 고등법원(高等法院)에 사건을 회부하면서 예심이 종결되었다. 그런데 고등법원에서는 전국적 만세시위에 대해 ‘민족대표들이 내란을 교사한 적이 없고, 폭동행위자의 자발적 의사에 의해 폭동이 일어난 것’으로 규정하고, 이른바 「보안법」, 「제령 제7호」, 「출판법」 등을 적용해야 한다고 결정하였다. 결국 재판은 고등법원이 아닌 경성지방법원(京城地方法院)에서 진행되었다.


1920년 7월 13일 열린 첫 공판에서 허헌(許憲) 변호사는 고등법원의 「예심종결서」에 ‘경성지방법원으로 송치한다’는 말이 없으니 이 사건을 경성지방법원에서 다룰 수 없고, 고등법원에서도 내란죄가 적용되지 않는다고 했으니 이 사건을 다룰 수 없다고 논하며 공소를 수리하지 말고 피고를 방면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재판부가 이를 받아 들여 공소불수리 결정을 하였다. 검사는 즉각 항소하였다. 경성복심법원(京城覆審法院)은 경성지방법원의 공소불수리 판결을 취소하고 곧바로 심리에 들어갔다.


재판 과정에서  ‘조선이 독립될 줄 생각하는가?’ 라는 질문에 

“되고 안 되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될 수 있는 데까지는 해볼생각” 이라고 답하였다.

또한  ‘앞으로도 또 조선독립운동을 할 것인가?’ 라는 질문에는 

 “그렇다. 나는 한일합병을 반대하므로 언제든지 기회만 있으면 할 것이다.”  “기회가 있으면 독립운동을 계속할 것이고 또 나는 일본국민이 되지 않을 것을 명심하고 있다.”

고 말하였다.


결국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 정동분실(貞洞分室)에서 나용환, 나인협, 박준승, 권병덕, 임예환, 양전백(梁甸伯) 등과 함께 이른바 「보안법 제7조 위반」으로 징역 2년(미결구류일수 360일 본형산입)을 선고받았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 경성감옥으로 이감되어 1921년 11월 4일 신석구(申錫九), 이필주(李弼柱), 김원벽(金元璧), 나용환, 임예환, 양전백, 최성모(崔聖模) 등 15명과 함께 만기 출옥하였다.


출옥 후 천도교 도사로 종교활동과 민족운동을 계속하였다


1922년 2월 22일 손병희로부터 법암이라는 천도교 도호를 받았다. 4월 28일 천도교중앙총부 포덕과 주임 권동진, 교육과 주임 최린, 경리과 주임 오상준과 함께 서무과 주임에 임명되었다. 중앙총부에서 활동하다 동두천으로 가 농사를 지었다. 1925년 5월 서산(瑞山)으로 이주하였고, 이후 1945년 광복 때까지의 행적은 자료상확인되지 않는다.


광복 후 민생협회(民生協會)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재정부장, 대한독립촉성국민회(大韓獨立促成國民會) 한성지부 지부장 등을 역임하였다. 전재민 구제와 전재 고학생원호를 목적으로 결성한 특별구제회(特別救濟會) 명예회장으로 추대되었다. 1946년 12월 천도교 종무위원, 1947년 10월 천도교 도령을 역임하였다.

 이때까지 생존해 있던 천도교 출신의 민족대표 33인인 오세창, 권동진 등과 함께 참가했으나 민족대표 33인 유가족회 회장 등으로 활동하다가 곧 병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헌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오상준(吳尙俊), 1883∼1947 일제 강점기의 천도교 지도자이다

1900년대 초 천도교의 신지식인(新知識人) 중의 한 사람인 오상준(吳尙俊)은 1907년 초등교서(初等敎書)라는 ‘교과서’적인 서적을 펴냈다. 이 책에는 모두 28개 장에 걸쳐 근대국가 체재(體裁)와 그 국가의 국민으로서의 덕목(德目)을 일목요연하게 제시하고 있다. 특히 ‘독립’이라는 단어에 대한 다각도의 이해, 우리나라의 독립이 위협(탈취)받는 상황에서 어떻게 (근대)독립 국가를 건설할 것인지, 공화제(共和制)에 대한 이해와 전파가 상당한 수준에서 전개되고 있다. 이것은 동학-천도교 운동사에서 면면히 이어져 온 보국안민-다시개벽으로서의 영성적 근대의 추구, 개화(改化) 아닌 개벽(開闢)으로서의 자생적․토착적 근대의 추구, 침략주의-강권주의의 서구적 근대에 대한 저항적 근대로서의 자주적 근대의 추구가 1910년대 직전 어떻게 정리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생생한 전거(典據)이다.


오상준(吳尙俊)은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종교 분야 에 분류된 천도교 (30명)의 명단에 포함되었다.


이종린(李鍾麟),

1883년 2월 11일 ~ 1951년 9월 1일

* 호 ; 황산(凰山)   *천도교 도호(道號) ; 보암(普菴)

* 본관 ;성주(星州) ― 경상북도 성주군 

일본식 이름: 瑞原鍾麟(서원종린)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 작가이자 종교인이며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천도교 지도자로, 3.1 만세 운동 당시 친척 형이되는 이종일(李種一)을 보좌하였다. 해방 후에는 초대, 제2대 국회의원을 역임하였다.


충청남도 서산군 출신으로, 이교칠(李敎七)과 전주 이씨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유복자로 태어났다. 나중에 작은아버지 이교삼(李敎三)의 양자로 입양되었다. 성인이 된 뒤에 경성부로 상경하여 계속 거주하였다.


대한제국 말기의 일간지 대한민보(大韓民報)의 주필을 거쳐 천도교 교역자로 종교활동을 하였으며, 천도교 월보사의 주필로 활동했다. 3·1 운동 때는 박인호, 이종일, 김홍규, 윤익선과 함께 지하신문인 《조선독립신문》을 발행하여 3·1 운동의 전국적 확산에 주력하다가 옥고를 당하는 등 항일언론 활동을 하였고, 하와이 만국기자대회에 가입하고 기자단체인 무명회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개화기 문인으로서도 문학사(文學史) 상 중요한 위치를 점한다. 대표적인 문학작품으로 문장수사론(文章修辭論)인〈文章體法〉과 한문희곡인〈滿江紅〉을 비롯하여 수편의 장편소설이 있다. 특히 황산은 ‘표제(標題) 단편소설’의 효시인〈모란봉〉을 비롯한 5편의 단편소설을 발표하여 개화기 소설가로서도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1910년 천도교에 입교한 후 오랫동안 교단의 중책을 역임하였다. 한편 이종일이 아들이 일찍 사망하였으므로, 1925년 이종일의 장례식과 장례비를 부담하기도 했다. 또한 〈중성〉〈산업계〉〈실생활〉등의 잡지를 발간 운영하였고 각종 민족운동에 참여하여 조선물산장려회이사장, 신간회 본부 선전부장과 신간회 경성지회위원장, 조선기근구제위원장 등으로 다양한 활동을 하였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에는 교단의 최고책임자인 천도교 대종사장과 교령직에 있으면서 일제에 협력하기도 했다. 일제 말기 이종린의 행적을 천도교 교단의 영욕을 대변해야 하는 안타까운 지경에 처했던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해방 이후에는 반민특위에 체포되어 조사를 받기도 하였으나, 반민특위가 조직적인 방해를 받으면서 재판 결과 무혐의 판결을 받아 풀려났다. 1948년 5월 10일 제헌국회(충남 서산갑)의원에서 헌법기초위원으로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공헌하기도 하였다.


이종린은 한국전쟁때는 피난을 하지 못하고 조선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했을 때 체포되었다가 서울이 수복되던 날 납북되던 중에 사망하였다. 안창호, 여운형과 더불어 세칭 당대의 ‘3대 웅변가’로 일컬어졌었다.  또한 그는 400여 수의 시를 남기기도 했다. 자택 후원으로 옮겨져 가매장하였다가 한국 전쟁이 끝난 뒤 1954년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중계리(현 서울특별시 노원구 중계동) 산에 안장되었다.



1967년 12월 대한민국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되었다.

친일파 708인 명단의 기타 부문,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의 종교 부문,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4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종교 분야 에 분류된 천도교 (30명)의 명단에 포함외었다.


2004년 2월 고향인 서산시 지곡면 화천리 안견기념관 앞 공원에 황산 이종린 문학기념비가 건립되었다.



천도교회월보(天道敎會月報)

     

 

 천도교(동학)는 1910년 8월15일 신문 대신 기관지로서 월간잡지 [천도교회월보(天道敎會月報)]를 창간 발행하게 되었다. 그때는 한일합방 직전이었기 때문에 순수한 종교적 논설과 교도간의 소식 등을 게재한다는 조건 아래 그나마 신문지법에 의해 발행이 허가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중앙총부는 1910년 7월 16일 월보과(月報課)를 새로 설치하고 8월 15일에 [천도교회월보](이하 월보라 칭함) 창간호를 발행하였다. 당시 발행인은 김완규(金完圭) 편집인은 김원식(金源植), 주간 및 인쇄인은 이교홍(李敎鴻)이었다.

   

      ▲천도교회월보

창간호의 발행일자는‘융희(隆熙) 4년 8월 15일’로 표기되어 있다. 그러나 창간 1주일만인 8월 22일 일본이 우리나라를 강제 합병함으로써 월보 제2호부터는 발행일이 일본연호로 바뀌어 ‘명치(明治) 43년 9월 15일’로 명시되었다.


1910년 8월 29일에 한일합병이 발표되자 월보사는 주간 이 교홍 명의로 서울 주재 각국 영사관에 일본의 한국병탄을 반대 매도하고 합병의 부당함을 주장하는 성명서를 발송하여 성원해주도록 요청했다. 그러나 이것은 곧 왜경에 발각되어 김완규(金完圭), 오상준(吳尙俊),이종린(李鍾麟),이교홍(李敎鴻),김건식(金健植) 천도교중앙간부진 4, 5명이 투옥되고 발행인이 교체되는 곤욕을 치루었다. 체포된 간부들은 합방에 반대하고 외국 영사관에 청원한 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의사일 뿐 월보사나 교회와는 무관하다고 주장하여 다행히 월보는 폐간을 면하여 계속 발행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만약의 경우 의암성사(義菴聖師) 손 병희(孫秉熙)에게 미칠지도 모를 화를 미연에 방지했던 것이다. 이처럼 그 출발부터 수난을 겪어야 했던 월보였기에 그 후 3백여호를 발행하는 동안 일제에 의한 가혹한 탄압을 받으면서도 일제강점기 우리나라 잡지사상 가장 장수했던 잡지로 기록되고 있다.


 그 후 1910년 12월에 천도교가 보성학교를 인수하면서 학교에 부설된 보성사(普成社) 인쇄소도 함께 인수하여

기존의 창신사(彰新社) 인쇄소를 여기에 통합 확장하여

그 이름을 그대로 보성사라 하고 여기서 월보를 비롯한

각종 교회서적을 발행하다가 3.1운동때 이 곳에서 독립

선언서를 인쇄했다.


의암성사(義菴聖師) 손병희(孫秉熙)는 일본 망명시에

이미 64명의 국내 젊은이를 유학시킨바 있거니와 귀국

후에도 남달리 교육 사업에 열의를 보였다. 이러한 교육열은 사회적으로도 주목을 받게 되어 [황성신문]은 1906년 2월 14일자 사설에서‘손병희씨의 교육열의에 감사한다(謝孫秉熙氏熱意敎育)’는 글을 실었다

  손병희

     손병희(孫秉熙)

   1861년 4월 8일 ~ 1922년 5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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