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침략하 한국36년사 1권 > 1910년 9월 1일 > 大韓人國民會 하와이지방총회는 공동
연월일 1910년 09월 01일
주제분류 해외한인 > 재미한인(하와이,멕시코포함) > 대한인국민회 > 하와이지방총회
출전
大韓人國民會 하와이지방총회는 공동 대회를 열고 왜적을 성토하며 합병을 부인하는 결의문을 연합통신으로 세계 각지에 발표하다.
하와이 지방총회, 한일합방이 조작임을 미국연합통신 통해 세계각지에 보냈다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 民會) 하와이지방총회는 공동대회를 열고 왜적을 성토하며 합방을 부인하는 결의문을 연합통신으로 세계각지에 발표하였다
대한인국민회 하와이 지방 총회의 결의안
1. 우리는 만고의 치욕적인 '한일합방'을 부인하며 그에 관한 왜적(倭敵)의 일체 행사를 배척함
2. 우리는 대한민족이오 왜족(倭族)의 부속민이 되지 않을 것을 맹서하며 소위 '한일합방'은
우리 민족의 의사로 된 것이 아니고 왜적의 위협적 위조인 것을 확인함
3. 우리는 한국의 국호와 국기를 보장하며 우리 국토에서 왜적을 축출할 때까지는 8월 29일을
'국치일(國恥日)'로 기념하여서 왜적에게 대한 적개심을 해마다 새롭게 함
4. 우리는 왜적과 공사간 일체 관계를 단절하며 국제상 관계가 발생될 때는 대한인국민회가
재미 한인을 대표하게 함
5. 일본 황제와 사내정의(寺內正毅)에게 이 결의문을 보내서 우리의 주장을 명확히 알게 함
6. 한국과의 조약상 의무가 있는 각국 정부에 공첩(公牒)을 보내서 '한일합방' 부인의 이유와
일본이 우리의 원수인 사실과 국제상 관계가 있을 경우에 대한인국민회가 재미 한인을
대표할 것을 알게 하기로 함
7. 한인으로서 왜적의 정부기관이나 개인간의 친선 관계를 가지는 자는 민족반역자로 인정할
것이며 경우와 형편에 따라서 처리하기로 함
『한국독립운동사』 2, 국사편찬위원회(104쪽)
나라잃은 비통한 슬픔을 이기지 못해 도처에서 순국하는 인사들이 늘고 있었다.
금산군수 홍 범식(洪範植,1871.7. 23∼1910.8.29) , 전 러시아 공사 이 범진(李範晋,1852.9.3~ 1911. 1.26 ), 민비시해와 단발령에 반대하여 의병을 일으켰던 이 근주(李根周, 1860 ∼1910.10.25), 안동사람 유 도발(柳道發.1832∼1910.11. 27), 전 성균관 생원 이 현섭(李鉉燮,1844∼1910.11. 26)…
국권상실에 울분을 참지 못하고 순절한 이들의 이름이다.
대문호요 절사인 매천 황현(梅泉,1855.12.11∼1910.9.10), 의 죽음은 특히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애저리게 했다. 그는 병합의 소식을 듣고 음식을 전폐한 후 절명시 4수와 유서를 남기고 독약을 먹어 순국하였다.
뿐만 아니라 의병들의 무력항쟁도 각지에서 계속되고 있었다.
병합 전 일제의 남한대토벌작전으로 많은 타격을 입었으나 병합소식이 전해지자 악조건 속에서도 소규모 투쟁을 계속하고 있다. 의병활동의 중심지는 현재 황해도와 경북 일월산 일대로 많게는 40~50명, 적게는 수 명이 게릴라전으로 일본군에 타격을 주고 있다. 일본군의 압도적인 무력에 밀려 의병부대들은 만주로 이동하여 독립군으로의 전환을 모색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려온다.
나라 밖에서도 합병 거부 투쟁의 움직임은 예외가 아니었다.
합병소식을 들은 재미 한인들은 9월 1일 합병부인 성명서를 발표하고 왜적을 우리 강토에서 몰아낼 때까지 〈8월 29일을 국치일國恥日〉로 기념하여 왜적에 대한 적개심을 새롭게 하고, 이제부터는 대한인국민회가 재미한인을 대표한다고 발표했다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
1909년 미국에 사는 한국인들이 조직한 단체가 1910년 국민회가 대동 보단회(大同保團會)와 통합하면서 조직되었던 독립운동단체.
1938년 대한인국민회 총회관 모습. 배우 송혜교와 서경덕 성신여대 교수가 2018년 11월 9일 도산 안창호 선생 탄생 140주년을 맞아 미국 LA에 있는 대한인국민회에 한국어와 영어로 된 안내서 1만부를 제작해 기증했다 |
1908년 장인환(張仁煥)·전명운(田明雲)에 의한 친일 미국인 스티븐스저격의거를 계기로 일어난 재미 한인단체 통합운동의 결과로,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대한인공립협회(大韓人共立協會)와 하와이의 한인합성협회(韓人合成協會)를 통합하여 1909년 2월 국민회(國民會)를 조직하였다.
1909년 2월 대동보국회(大同保國會)가 국민회(國民會)에 흡수됨으로써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가 출범하였다. 이 대한인국민회는 해외 한인을 총망라한 단체로 구성하기 위해 대한인국민회는 한인이 살고 있는 지역마다 지방총회를 조직하고, 미주에는 북미지방총회를, 하와이에는 하와이지방총회를, 멕시코에도 멕시코지방회를 조직하였다.
멕시코 지방회는 1909년 5월 9일 국민회 북미총회 산하로 조직되었으며 국민회가 대한인국민회로 변천하자 대한인국민회 지방총회로 자리매김하였다.
1911년 3월경 대한인국민회는 중앙총회를 설립하였다. 그러나 분과와 임원을 완비한 완전한 조직구성을 완료하지는 못했다. 나아가 1911년에는 시베리아지방총회를 설치하고 치타·이르쿠츠크·수청(水靑) 등 16개 지방에 지방회를 구성하여 회원이 1,150여명에 달하였으며, 같은 해 11월 만주지방총회를 설립하고 8개처에 지방회를 구성하였다.
1912년 다시 북아메리카(북미)·하와이·시베리아·만주 등 각 지방총회의 대표자회의를 소집하여 샌프란시스코에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를 설치했다. 중앙총회 회장은 안창호가 맡았다가 백일규·윤병구(尹炳球) 등이 이어받아 활동했다.
대한인국민회의 주요한 성과로는 한인과 일본인의 대우를 구별해 줄 것을 미국정부에 요청하여 승인받은 사실이다. 승인 내용은 『재미한인은 국권피탈 전에 한국을 떠난 사람들로서 한국의 병합을 절대 반대하고 일본정부와 관계가 없기 때문에, 앞으로 재미한인에 관계되는 일은 공사를 막론하고 일본정부나 관리를 통하지 않고 한인사회와 직접 교섭한다 』 는 것이었다. 이 조치를 통해 대한인국민회는 재미동포를 대표하는 기관으로 인정을 받았다.
1912년 11월 제1회 대표원의회를 개최하였다. 이로써 재외한국인의 권익을 대변하는 최고기관으로 활동하였다.
1919년 2월에는 한국독립운동에 대한 청원서를 미국의 윌슨 대통령에게 제출하여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기도 했다.
대한인국민회는 기관지로 『신한민보(新韓民報)』를 발간하여 국내외에 배포함으로써 항일의식을 고취하였고, 조국 광복 때까지 해외 한민족의 독립운동을 주도하였다.
미국 LA에 있는 대한인국민회 총회관 사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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