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침략하 한국36년사 1권 > 1910년 9월중·9월말 > 이달 중에 前工曹參議 李晩燾(字
연월일 1910년 09월
주제분류 민족해방운동,대중운동 > 민족주의운동 > 기타민족주의운동
> 기타민족주의운동
출전 騎驢隨筆
이달 중에 前工曹參議 李晩燾(字 觀必 號響山)가 유소와 유시를 써 놓고 단식 24일 만에 순사하다. 李는 1905년 5적주토상소문을 올린 바 있다.
騎驢隨筆
이달 중에 전(前) 공조참의(工曹參議) 이만도(李晩燾) (자(字) 관필(觀必) 호(號) 향산(響山) )가 유소와 유시를 써 놓고 단식 24일 만에 순사하다. 이(李)는 1905년 5적주토상소문을 올린 바 있다.
※ 1910. 10. 10 이만도(李晩壽) ,합병에 반대하여 자결함
이만도 (李晩壽) 1842. 1. 28~1910. 10. 10(음 9.8)
광복회와 공동으로 독립운동가, 2012년 8월의 독립운동가
1905년(광무 9) 5적 주토상소문을 올린 바 있음
*본관 진보(眞寶). *자 관필(觀必). *호 향산(響山).
경상북도 안동 출생이다.
퇴계의 11대손으로 그 자신을 포함, 3대에 걸쳐 문과에 급제한 명문의 후예다
이만도(李晩燾)는 23세 되던 1866년(고종 3)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장원, 전적(典籍)·병조좌랑(兵曹佐郞)·정언(正言)을 지내고,사성(司成)·응교(應敎) 등을 거쳐 양산군수(梁山郡守)가 되고 1875년 부교리(副校理)·장령(掌令)·지평(持平)을 거쳐 1876년(고종 13) 일본과 강화도조약 체결에 즈음하여 1878년 재차 집의(執義)가 되었으며 집의로 있을 때 최익현의 상소 운동을 두둔하다 파직되었고, 1882년 통정대부(정3품)에 올라 공조참의(工曹參議)에 승진된 후 사직하였다.
1894년(고종 31) 사(邪)를 척결하고 정(正)을 지키기 위해서는 서원을 복설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1894년 동학(東學)과 일련의 개혁 정치를 모두 ‘사’로 인식하고 척사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의 위정척사 운동은 1895년(고종 32) 의병 운동으로 이어졌다.
1895년 을미사변(乙未事變)과 단발령이 안동에 전해지면서 의병을 일으킬 움직임이 일어났다. 안동에서 의병 봉기를 촉구하는 첫 통문은 선성(宣城 현 예안면)에서 나왔는데, 1896년 1월 13일 이만응(李晩鷹)·금봉술(琴鳳述)·이만윤(李晩允)을 비롯한 223명의 이름으로 작성되었다.이 통문을 바탕으로 이만도는 대장이 되고, 이중린(李中麟)을 부장 또는 중군으로 삼아 선성의진을 조직하였다
1905년(광무 9.고종 42)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이만도는 5적신(五賊臣)의 처형을 상소올렸다. 상소문의 내용은 을사오적을 참하고, 만국공법에 의지해서라도 조약을 폐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상소하고 일월산으로 물러나 근신했다
그는 '조선의 역사가 생산해 낸 인물'로 '주자학 근본주의자'(안동대 윤천근 교수)였다. 그의 의식을 지배했던 것은 군왕에 대한 충절의식과 가문에 대한 자존의식, 그리고 유학에 대한 순결한 태도였던 것이다.
향산은 을사늑약으로 나라를 빼앗긴 것으로 이해했고, "을사의 변란이 일어났을 때 신은 병상에 누워 있어서 돌계단에 머리를 부수며 간적과 이 일을 바로잡기 위해 다투지 못하였으니 이것은 신의 죄"라고 고백한 바 있었다.
1907년 고종이 강제로 퇴위 순종이 즉위한 뒤 일본군이 불을 질러 퇴계 종가가 불타 버리는 일이 일어났다. 퇴계 종가의 화재는 군왕에 대한 신하의 의무를 다하지 못해 스스로를 죄인이라 칭했던 향산에게는 가문에 대한 자존마저 무너뜨린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1907년 가선대부에, 1910년 자헌대부에 승자되었다.
“경술국치를 당하매, 그는 그예 자진을 결심한다. 을사 이후 실낱 같던 희망은 합병조약으로 스러져 버렸고, 막힌 출구 앞에서 향산은 고통스레 고백했다. "나라의 녹을 먹던 신하로서 원수의 백성 되는 것을 기꺼워하고 무지몽매하게 부끄러움을 알지 못하니, 이는 신의 죄입니다."

▲ 청구일기. 1910년 대한제국이 멸망한 뒤 이만도가 24일간의 단식 끝에 운명할 때까지 수행자들이 기록한 일기. 한문 필사본.
위정척사 운동과 의병 항쟁을 벌이던 이만도 1910년 8월일본에 의해 나라가 강제로 빼앗았다는 소식을 듣고 1910년 9월17일부터 단식을 시작하였다. 이는 임금의 신하 된 자로서 적의 백성으로는 하루도 살 수 없다는 철저한 의리론적(義理論的) 대응이었다.
단식을 시작하면서 가족과 친지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는 담담하게 자신의 죽음을 준비했다. 그가 선택한 죽음은 '원수의 백성이기를 거부하는 것'이었고, 그것은 그가 신하로서, 가문의 후예로서, 유생으로서의 책임을 다하는 일이었던 것이다.
향산이 '청구동'(예안면)에서 단식하며 순국에 이른 과정을 기록한 "청구일기(靑邱日記)"에 따르면 그는 단식 기간 중 결코 동요하지 않았다. 대부분 두문(杜門)하고 단식했던 여느 사람과 달리 그는 일상생활을 영위하면서 단식을 계속한 독특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곡기를 멀리하면서도 그는 친구들과 인생을 논했고, 제자들에게는 경학을 강의했으며, 자신의 사후 장사 문제까지 유언했다. 어린 손자들에게는 손을 잡고 유학 원리를 강의하는 등 마지막까지 유학자의 소임을 다했다.
단식은 자기 목숨을 버리는 극단적인 저항이었지만, 일제의 식민통치 부당성을 환기하고 항일 투쟁에 대한 정당성을 드높이면서 결연하게 전개되었다. 이러한 영향의 파급을 두려워한 일제는 단식을 그치게 하기 위해 회유와 협박을 서슴지 않았고, 순절 후에는 부고도 전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의 단식을 안 일경이 와서 강제로 미음을 떠 넣으려 하자 혼수상태인 줄 알았던 향산이 벌떡 일어나 "나는 내 명(命)으로 죽을 것이다. 지금 너희들이 나를 속히 죽이고자 하느냐. 나를 속히 죽이고자 하면 즉시 총을 쏘아 죽여라"고 소리쳤다. 그는 또 "어떤 놈이 감히 나를 회유하며, 어떤 놈이 감히 나를 공갈하고 협박하려 드느냐"고 호령했다.

▲ 하계마을 독립운동 기적비. 도산면 토계리 하계마을 입구에 세워졌다. 이 마을에서 모두 25명의 독립지사가 났다.
이만도는 유서를 지어 남긴 뒤 1910년 10월 10일(음 9월 8일) 단식 24일 만에 순국하였다.
10월 10일, 그는 공동체의 운명을 책임진 어른답게 의연하게 최후를 맞았다. 향년 69세. 그의 의기와 뜻은 자식들을 통하여 이어졌다. 아들, 며느리, 손자 등 3대에 걸쳐 모두 8명이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향산의 아들 중업은 1차 대전 후에 파리에서 열린 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낸 제1차 유림단 의거(파리장서 운동)를 이끌었다. 손자 동흠과 종흠은 독립 자금마련을 위해 의열단원인 나석주와 연계하여 벌인 이른바 '2차 유림단 의거'의 주역으로서 조부의 유지를 이었다.
특히 향산의 며느리 김락은 안동대 김희곤 교수가 '민족의 딸, 아내 그리고 어머니'라는 헌사를 바친 여장부다. 백하 김대락의 누이인 김락은 시부와 남편, 아들의 독립투쟁을 뒷바라지했고, 3·1 만세운동 때는 고문으로 두 눈을 잃는 고통을 겪었다.
퇴계 이황 선생의 12대손 안동의 유학자이자 의병장인 이중언(李中彦1850~1910)은 10월 10일 이만도의 부음을 듣고 단식을 시작했다 만 60세의 나이에 1910년 10월 20일단식한 지 27일만에 순국하였다 이중언은 향산 이만도의 3종질로 임오군란 이후 봉화에 은거하고 있었다.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안동에서 김도현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을사늑약 이후에는 조약의 파기와 오적을 참형할 것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이중언은 단식 도중 일경이 찾아와 음식을 먹도록 권할 것을 가족들에게 협박하자, "저 놈을 내쫓지 않으면 내가 찔러 죽이겠다"고 고함을 질렀다. 그는 주위 사람들에게 머리를 빗고 의관을 갖추게 한 뒤, 반듯하게 앉아서 죽었다
향산이 태어난 도산면 토계리 하계(下溪)마을은 이육사가 태어난 원천리로 가는 길목에 있다. 당시 150가구였던 이 마을은 무려 25명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했다. 그러나 지금은 10여 호만이 남아 있는 동네 입구에 몇 해 전에 세운 '하계마을 독립운동 기적비'가 쓸쓸하게 서 있다.

▲ 담너머로 바라본 향산고택의 사랑채. 퇴계선생 종택 복원추진위원회의 현판이 걸려 있다
향산의 옛집은 안동시청에서 도산서원 가는 길, 퇴계로의 안막동 언덕받이에 호젓하게 서 있다. 원래 도산면 토계리에 있었으나 안동댐 수몰로 1976년에 현 위치로 옮겼다. 사람들은 향산을 잘 모른다. 당연히 그의 고택도 잘 모른다.

▲ 향산고택의 사랑채. ‘기암고택’ 등 현판이 여럿 붙어 있다.
낡은 옛집의 일각대문엔 굵은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고 석양에 '향산구려(響山舊廬)' 현판만이 외로웠다. 한길로 나오자 언덕 아래 시가지의 하늘에 황혼이 붉었다. 그 붉은 놀 속에 문득 얼굴조차 남지 않은 우국(憂國)의 죽음들이 하나씩 차례로 명멸하는 듯했다. 그것은 고통스럽게 맞이한 20세기 벽두에 우리가 영결(永訣)한 19세기의 마지막 장엄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처음 단식을 시작한 곳은 봉화 재산의 묘막이었으나, 동생 이만규(李晩煃), 아들 이중업, 종손 이강호(李綱鎬)의 간청으로 종가인 율리(栗里) 만화공(晩花公) 댁으로 자리를 옮겼다. .

▲ 향산 이만도李晩壽선생 순국유허비. 향산이 순국한 장소에 세워졌다. 위당 정인보의 글과 백범 김구의 글씨.
순절한 뜻을 기리기 위해 1949년 영남 유림들이 뜻을 모아 세운 이만도 청구유허비(靑邱遺墟碑)가 안동시 예안면 인계리 만화공 집터에 있다. 비문은 위당 정인보가 짓고, 백범 김구가 썼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저서로는 『향산문집(響山文集)』·『청구일기(靑邱日記)』·『향산일기(響山日記)』를 남겼다.

▲ 향산고택의 담장. 빈 골목길과 낡은 옛집이 쓸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