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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슬리 설교

45. 거듭남 (New Birth)

작성자한은혜|작성시간06.10.30|조회수594 목록 댓글 0
 

거듭남 (New Birth)

                  

       < 설교해설 >

      영국성공회의 전통적인 구원론의 시각에서 볼 때 원죄의 근본 치유는 항상 교회와 세례 성례전 안에 이루어진다. (속죄에 대한 교리는, 초대교회에서와 마찬가지로, 성령과 교회에 대한 믿음과 관련되어있는 감리교교리의 제3강령에 포함되어 있다. ) 청년 웨슬리는 이 영국 성공회 전통에서 성장했으며, 그의 부친의 설교(The Pious Communicant Rightly Prepared, A Short Discourse of Baptism)를 요약했다는 언급없이 ‘세례에 대한 논문’을 1758년 그의 이름으로 다시 출판했다. 장년 웨슬리가 되어서도 그는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은총에 의한 신생을 보통 물세례와 연관지었다. 부흥운동의 긴장이 고조되었을 때 형신적인 그리스도인들이 주장하는 물세례에 의한 ‘거듭남’의 교리와 복음주의자들의 ‘회심’(칭의와 성와와 관련된 거듭남의 모든 문제)에 대한 주장은 점점 더 첨예화 되어갔다. 따라서 웨슬리가 그의 원죄에 대한 교리를 다시 진술하면서 세례에 의한 거듭남이라는 전통적인 생각을 수정한다는 언급과 함께 새로운 상황에서 ‘거듭남’에 대한 교리를 갱신한 것은 명백한 논리가 있었던 것 같다.

    이 설교는 1740년대(1740년에 한 번)로부터 1750년대까지 요한복음 3: 7절 본문으로 해서 60번이상 행했던 구두설교를 요약한 것으로 계속해서 여러번 설교한 본문이다.


    “내가 네게 다시 나야 한다는 말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요한 3: 7)


  1. 만일 기독교의 전체적인 범위 안에서 어떤 교리든지 ‘근본적’이라고 적절히 규정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다음의 두 가지, 즉 의롭다하심(義認化)의 교리와 거듭남(新生)의 교리입니다.  전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for us)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신 위대한 역사(役事)와 관계되며, 후자는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in us) 우리의 타락된 본성을 다시 새롭게 하시는 위대한 역사와 관계됩니다.  시간적인 순서로 본다면(in the order of time), 어느 것도 다른 것에 우선되지 않으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하심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 순간(in the moment), 역시 우리는 성령으로 새로 태어나게 됩니다.  그러나 사고의 순서로 본다면(in the order of thinking), 그것이 의미하는 것처럼 의롭다하심이 거듭남에 앞서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선 먼저 하나님의 진노가 사라지고 난 다음에야 성령께서 우리의 심령 속에 역사하시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2. 그렇다면, 모든 인간의 후예들에게 이와 같이 근본적인 교리들을 철저히 이해시켜야만 된다는 사실은 얼마나 중요한 일이겠습니까?  이러한 교리를 전적으로 확신함으로 인해 많은 탁월한 사람들은 이것과 관련된  요점들을 설명하며,  이에 대해 취급한 성경구절들을 밝히면서 의롭다하심에 관해 광범위한 글을 써왔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많은 사람들은 거듭남에 대해서 많은 저술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는 아주 흡족할 만한 글을 썼던 사람들도 있었지만, 자신이 희망하였던 바와 같이 분명하고 심오하며 또한 정확하게 쓰지 못했고, 오히려 여기에 대해 모호하고 난해한 설명들을 하였으며, 천박하고 피상적인 설명에 그쳤던 것입니다.  따라서 거듭남에 대해서 충분하고도 분명한 설명은 아직까지는 부족한 것 같으며 그것은 다음의 세 가지 질문에 만족할 만한 답변을 줄 수 없는 정도입니다.  첫째, 우리는 왜 다시 태어나야만 하는가?  즉, 거듭남이라는 교리의 근거는 무엇인가?  둘째, 우리는 어떻게 해서 다시 태어날 수 있는가?  즉 거듭남의 본질은 무엇인가?  셋째, 왜 우리는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인가?  즉, 거듭남은 무슨 목적 때문에 필요한가?  저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 간단 명료한 대답을 하려고 합니다.  그런 다음, 여기에 자연히 뒤따라 오게 될 몇 가지의 추론을 보충하고자 합니다.


                                 I


  1. 그러면 첫째로, 우리는 왜 다시 태어나야만 합니까?  이 교리의 근거는 무엇입니까?  거듭남의 근거는 거의 이 세상의 창조만큼이나 심오한데 놓여 있습니다.  우리가 읽는 성경말씀의 설명에 따르면,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우리의 형상과 모습을 따라서 인간을 창조하자고 하시고’ 이에 따라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대로, 즉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창 1 : 26, 27).  즉, 하나님 자신의 불멸성의 모습 즉 자연적인 형상(natural image)을 따라, 뿐만 아니라 이해력과 자유의지와  여러 가지 감정을 가진 영적인 존재로써, 또는 ‘바다의 고기와 땅 위의 만물을 지배하는’ 이 세상의 지배자인 정치적인 형상(political image)으로서, 그 뿐만 아니라 사도 바울의 말과 같이 ‘의로움과 참 거룩함’(엡 4 : 24)을 지닌 도덕적인 형상(moral image)으로 인간을 지으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형상(image of God) 속에서 인간이 창조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말씀과 같이 인간이 창조되었을 때에는 사랑이 충만하였고, 사랑은 인간의 본성과 사고와 언어와 행동의 유일한 원리였습니다.  하나님은 정의와 자비와 진리가 충만하신 분이시며, 인간은 이러한 창조주의 솜씨에 의해 창조된 그러한 인간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흠 없이 순수하신 분이시고 그래서 태초에 인간은 모든 죄악의 오점으로부터 순결하였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하나님께서 자신이 만드신 만물과 인간에 대해 ‘매우 좋다’(창 1: 31)고 말씀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인간이 죄로부터 순수해 질 수 없었다거나 의로움과 참 거룩함으로 충만할 수 없었다면 하나님께서 매우 좋다고 어떻게 말씀하실 수 있었겠습니까?  왜냐하면 여기에는 중간적인 상태란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만일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않고, 의롭고 거룩하지도 않으며 단순히 지성적인 피조물이라고 생각한다면 필연적으로 인간은 전혀 선하다고 생각할 수 없으며 더구나 ‘매우 좋다’고 상상할 수는 없습니다. 

  2. 그러나 인간이 비록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어졌다고 할지라도 불변하게 창조된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두시기를 기뻐하신 시험의 상태와 불일치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시험에 견딜 수 있도록 창조되었지만 타락하기 쉬운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사실을 인간에게 깨우쳐 주시고 이에 대해 엄숙한 경고를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자신의 명예를 저버렸습니다’.  즉 고귀한 상태에서 타락한 것입니다.  인간은 주님께서 ‘먹지 말라고 명령하신 선악과 열매를 따 먹었습니다.’  이와 같이 창조주에 대한 고의적인 불순종 행위로, 즉 자신의 통치자에 대해 노골적인 반란을 함으로, ‘하나님은 인간을 더 이상 지배할 수 없었으며, 인간은 자신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가 아니라 자신의 뜻에 따라 지배되어야 한다고 공공연하게 주장을 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 안에서는 더 이상 행복을 구할 수 없고, 단지 세상과 자신의 솜씨로 만든 것 중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다고 단정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전에 󰡐네가 그 열매를 먹으면 반드시 죽으리라’고 인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은 파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죽는 날에는, 즉 하나님께 대하여 죽는 날에는 모든 죽음 가운데 가장 무서운 죽음을 당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생명을 상실하게 됩니다.  즉 자신의 영적인 생명과 결합되신 분인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됩니다.  육신은 영혼과 분리될 때 죽는 것이며, 영혼은 하나님과 분리될 때 죽는 것입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이 금단의 열매를 따먹었던 날, 그 시간부터 인간은 이와 같이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었던 것입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소외되어 버린’ 그의 영혼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행동으로 나타냄으로써 즉시 이 사실을 입증하였습니다.  그 대신 그는 이제 굴욕적인 공포의 힘에 짓눌리게 되었고, 그 결과 하나님의 면전으로부터 도망하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하늘과 땅에 충만해 계신 분이라는 하나님께 관한 지식을 거의 상실하고 말았기 때문에, 하나님께로부터 도피하여 동산의 나무 사이에 몸을 숨겼습니다(창 3: 8).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의 형상 없이는 지탱할 수 없는 하나님께 대한 지식과 사랑을 상실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이와 동시에 하나님의 형상을 박탈당하고, 불행하게 됨과 동시에 거룩함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또한 이로써, 바로 악마의 형상인(the very image of the devil) 교만과 아집에 빠지게 되었고 멸망할 짐승의 형상인(the image of beasts) 관능적 욕구와 정욕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3. 만일 ‘네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게 되리라’는 경고가 ‘단순한 위협일 뿐이고’ 현세적인 죽음, 그리고 죽음 그 자체만을, 즉 육체의 죽음에 대해서만 언급한 것이라면 그 대답은 명백합니다.  즉, 이 사실을 긍정하는 것이 됩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네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게 되리라’는 의미에서 죽는 것이 아니라는 증거가 있기 때문입니다.  아담은 이런 죽음과는 오히려 반대로 그 후에도 900세 이상을 살았습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진실을 거부하지 않고서는 단지 이 말을 육체의 죽음으로서만 이해하기가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말씀을 영적인 죽음, 즉 생명과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했다는 사실로서 이해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4. 그리하여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었고’, 즉 모든 인류들과 사람의 모든 자녀들이 죽었습니다.  이렇게 된 자연적인 결과로서, 아담의 후손이 된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께 대한 죽음, 영적인 죽음, 죄 속에서의 전적인 죽음 속에서 이렇게 태어나게 되었고, 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의 생명을 전적으로 상실하고, 아담이 창조되었을 때 가지고 있었던 의로움과 거룩함 대신 지금 이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사람은 교만과 아집에 사로잡힌 채 악마의 형상을 지니게 되었고, 관능적 욕구와 정욕 속에서 짐승의 형상을 지니고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본성이 전적으로 타락하게 되었다는 점(the entire corruption of our nature), 바로 이것이 신생의 근거가 됩니다.  그러므로, ‘죄가운데  태어났기’때문에 우리는 ’다시 태어나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자에게서 태어난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으로 다시 태어나야만 하는 것입니다. 


                                II


  1. 그러나 인간이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는가?  신생의 본질은 무엇인가?  이것이 바로 두번째 질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생각해 볼 수 있는 가장 높은 차원의 질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와 같이 중요한 관심을 너무 가볍게 취급한 채, 만족해서는 안되며, 가능한 한 모든 관심을 기울여 검토해야 하고, 그리고 이렇게도 우리에게 중요한 사실을 충분히 이해해야 되며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는가를 우리 마음 속에 분명히 깨달을 때까지 이 문제를 골돌히 생각해 봐야 합니다.

  2. 이것이 어떻게 행해질 수 있는가 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한 순간이라도 철학적으로 설명되기를 기대해서는 안됩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와 같은 기대에 대비하여 바로 다음 귀절의 말씀을 통하여 이 점을 충분히 알려 주셨습니다.  이 말씀 속에서 주님은, 해 아래 있는 어떤 현명한 자라도 설명하기 어려운 자연의 전체적인 영역에 대하여,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보다 못지 않게 분명한 사실로서 니고데모에게 일깨워 주셨읍니다.  어떠한 힘이나 지혜로서가 아니라 ‘바람은 임의로 불고 있다.’  그리하여 ‘너희는 그 소리를 듣고’ 의심할 여지없이 바람이 불고 있다는 사실을 확신한다. ‘그러나 너희는 바람이 어디로부터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다.’  즉, 어떤 방법으로 발생하여 어떻게 끝나고, 흥하고 쇠하게 되는 것인지 누구도 알 수 없다. ‘성령으로 난 사람(누구든지)은 다 이러하니라’. 여러분은 바람이 분다는 사실은 명백하게 확신할 것입니다만 인간의 영혼 속에서 성령께서 이 일을 어떻게 행하시는 것인지는 당신이나 또는 사람의 후예 중 가장 현명한 자라도 이 사실을 설명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3. 그러나, 호기심이나 비판적인 탐구에 빠지지 않고서도 거듭남의 본질에 대해서 분명한 성서적 해답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은 모든 합리적인 목적과 기독교적인 목적을 위해서 흡족한 일일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이 자기 영혼의 구원만을 갈망하는 이성적인 모든 인간들을 만족시키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태어난다’는 말은 주님께서 니고데모와 대화하시는 중에 최초로 사용된 표현은 아닙니다.  이것은 이러한 만남이 일어나기 전에도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며, 구주께서 유대인들 가운데 살아계셨을 때에도 이미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성인이 된 이방인들이 유대종교야 말로 하나님께 속한 종교라는 사실을 확신하며, 입교하기를 원했을 때 이방인들은 할례를 받기 전에 먼저 세례를 받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방인이 세례를 받았을 때에 ‘다시 태어난다’고 말하였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사람들은 이전에는 악마의 자녀였던 자가 지금은 하나님의 가족으로 입양되고, 하나님의 자녀의 한 사람으로 간주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선생’이었던 니고데모가 잘 이해했어야 했던 것을 주님께서는 그와의 대화 중에 사용하신 것입니다.  단지 주님께서는 그가 익숙하게 알고 있었던 사실보다 더 강한 의미로서 이 말씀을 사용하셨을 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니고데모가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읍니까?’하고 물었던 질문의 이유일지도 모릅니다.  ‘다시 태어난다’는 말은 문자 그대로는 일어날 수 없는 사건입니다. 사람은 어머니의 뱃속에서 다시 들어가 두 번 다시 태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이러한 일이 가능합니다.  즉 인간은 자연적인 탄생과 매우 가깝게 유비되는 방법으로 ‘위로부터’, ‘하나님으로부터’, ‘성령으로부터’  태어날 수 있습니다.

  4. 어린아이가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는 눈을 가지고 있으나 보지 못하고, 귀를 가지고 있으나 듣지를 못합니다.  그는 다른 감각기관 조차도 아주 불완전하게 사용합니다.  그는 세상일에 대한 아무런 지식도 없고, 어떤 선천적인 이해력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린아이가 가지고 있는 존재방법에 대해 우리가 진정한 생명이라고 일컬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출생한 다음에야 비로서 우리는 그가 살기 시작한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태어나자 마자 빛과 그를 둘러싸고 있는 다양한 대상들을 보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그때에야, 그의 귀가 열리고 계속적으로 그에게 부딪쳐 오는 음향을 듣게 됩니다.  이와 동시에 다른 모든 감각기관들도 적절한 대상들을 검토하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해서 전과는 전혀 다른 방법으로 숨을 쉬고 살아갑니다.  이 모든 예는 얼마나 정확하게 비슷한 점이 있습니까!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떠나기 전, 단순히 자연적인 상태에 있을 동안에는 영적인 의미에서 비록 눈이 있으나 보지를 못합니다.  눈에는 벗길 수 없는 두터운 장막이 가로막고 있습니다.  그리고 귀가 있어도 듣지를 못합니다.  그가 가장 관심을 가지고 들어야하는 바를 전혀 들을 수 없습니다.  그의 영적인 다른 감각 마저도 모두 닫혀져 있습니다.  그는 마치 그런 기관들이 없는 것과 같은 상태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께 대한 지식이 없습니다.  그분과 교제도 할 수가 없고 전혀 가까히 할 수도 없습니다.  그는 영적이거나 영원한 하나님의 일들에 대해서 참된 지식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살아 있지만 죽은 기독교인입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떠나자 마자 이 모든 특징에 전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위대한 바울 사도의 말과 같이).  ‘이해의 문이 열립니다’.   그리고 그 옛날 ‘어둠 속에서 빛이 비쳐 나오라’고 명령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 속을 비쳐주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의 빛, 즉 주님의 영광스러운 사랑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의 귀는 열립니다.  그는 지금 ‘기뻐하라! 이미 너의 죄는 사함을 받았다’ ‘가라! 그리고 더 이상 죄를 짓지 마라!’고 하시는 내적인 주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비록 똑같은 말은 아닐지라도 이것이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향하여 말씀하시는 요지입니다.  이제 그는 ‘사람에게 지식을 가르치시는 하나님이 때때로 그에게 계시하시기를 즐겨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들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는 이제, 이 세상 사람들이 우매하게 혹은 제멋대로 말씀을 곡해하는 것처럼 조잡하고 육욕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교회에서 쓰는 말을 빌린다면 ‘하나님의 영의 전능하신 역사를’ ‘마음 속에 느끼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반복해서 이러한 말씀을 들어 왔다 하더라도 우리는 더 이상 여기에서 이 말씀을 더할 수도 덜할 수도 없습니다.  그는 이제 하나님의 영이 그의 마음 속에서 역사하시는 은총을 내적으로 지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모든 이해를 넘어선 평화’에 대해 내적으로 깨닫게 됩니다.  그는 ‘말로 다할 수 없으며, 영광에 가득 찬 하나님 안에서의 기쁨을’ 수차에 걸쳐 느끼게 됩니다.  ‘그에게 주신 성령에 의해서, 그의 심령 속에 빛을 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그때 그의 모든 영적인 감각은 선과 악을 명확히 분별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들을 사용함으로서 그는 하나님과 하나님이 보내주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리고 그의 내적 왕국에 속하는 모든 사실들에 대한 지식이 날로 증대해 갑니다.  이제는 그가 산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령에 의해서 하나님께서 그를 깨우셨기 때문에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 산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는 세상이 알지 못하는 하나님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감추어진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은 실제로 우리의 영혼에 끊임없이 생기를 불어넣으십니다.  그리고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을 향해 호흡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마음속에 내려오고, 기도와 찬양은 하늘을 향해 올라갑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교제를 통해 성부와 성자의 교제가 일종의 영적인 호흡을 통하여 인간의 영혼에 있게 됨으로 하나님의 생명은 영혼속에 지속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를 때까지 하나님의 자녀들은 성장해 갑니다. 

  5. 이러한 사실로부터 신생의 본질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 분명히 나타납니다.  신생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생명으로 이끄실 때 하나님께서 영혼 안에서 역사하시는 위대한 변화를 의미합니다.  그때 하나님은 죄로 인한 죽음에서 우리를 일으키시사 의의 생명으로 이끄십니다.  신생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을 때 전능하신 하나님의 영으로 모든 영혼 안에 일어나는 놀라운 변화입니다.  의와 참된 성결 속에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새로와지고, 세상에 대한 사랑이 하나님께 대한 사랑으로, 교만이 겸비로, 거친 마음이 온유한 마음으로, 미움 시기 악의가 모든 인류에 대한 신실과 온유와 희생적인 사랑으로 변화될 때, 여기에 거듭남이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거듭남은 세상적이고 정욕적이며 악마적인 마음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마음’으로 바꿔지는 변화입니다.  이것이 바로 거듭남의 본질이며,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은 다 이와 같은’ 것입니다.


                                 III


  1. 이러한 사실을 숙고한 사람은 누구든지 거듭남의 필요를 느끼게 되며, 그래서 무엇 때문에, 무슨 목적으로 우리가 다시 태어나야만 하는가? 하는 세 번째 질문에 쉽게 답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신생은 첫째로, 성결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라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는 성결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그것을 다수가 말하고 그리고 정확하게 수행된다 할지라도 그것은 단순히 외적인 종교거나 외적인 의무의 반복만은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적인 성결이란 마음에 새겨진 하나님의 비젼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온전한 마음 바로 그것입니다.  그것은 그의 아들 독생자를 우리에게 아낌없이 주셨던 하나님께 대해 끊임없이 그리고 감사에 넘쳐 사랑하는 일입니다.  즉 모든 사람의 자녀를 사랑하는 일이 우리들에게는 자연적이고 필수적인 일인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자비와 친절과 겸손과 오래 참는 마음을 가득 채우는 일과 같은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들에게 모든 모양의 대화에 있어서 책망할 것이 없도록 우리를 가르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육체, 존재와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 생각과 언행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 받아 들여질 수 있는 끊임없는 희생 제물로 드리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의 형상이 새로 지음을 받기까지는 이러한 성결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변화가 일어나기 전에는, 주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가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세력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서기 전에는 이것이 우리의 마음속에 일어나지 않습니다.  즉 다시 태어나기 전에는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은 성결을 위해서는 절대로 필요한 일입니다.

  2. ‘거룩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주님을 보지 못할’것이며 영광 속에 나타나시는 하나님의 얼굴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거듭남은 영원한 구원을 얻기 위하여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인간은 최후의 순간이 올 때까지는 죄 속에서 살게 될 것이지만, 그러나 그후에는 하나님과 함께 살게 될 것이라고 실제로 스스로 우쭐댈지도 모릅니다(인간의 마음은 그렇게 절망적으로 악하며 그렇게 거짓된 것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멸망으로 인도하지 않는 넓은 길을 발견했다고 실제로 믿고 있습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그렇게 죄가 없고 덕스러운 여인이 어떻게 위험 가운데 빠질 수 있단 말인가!’  ‘그렇게 정직한 남자가, 그렇게 엄중한 도덕을 지키는 사람이 어떻게 천국을 잃어버릴 염려가 있겠는가!’  특별히 ‘무엇보다도 끊임없이 교회에 출석해서 성례전에 참예한다면 천국에 못 갈 염려가 없지 않겠는가!’  그 중에 어떤 사람은 ‘도대체 내 이웃과 똑같이 행동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하고 확신을 가지고 질문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당신의 불경한 이웃과 똑같이 행동해 보십시오.  그러면 당신은 무저갱, 즉 지옥의 가장 밑바닥으로 떨어질 것입니다.  당신은 이웃과 함께 불붙는 못 속으로 던져지게 될 것입니다.  즉 유황이 타오르는 불못 속으로 말입니다.  그때야 비로소 당신은 영광을 위해서 거룩하게 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하나님께서 사전에 이것을 당신에게 알 수 있도록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결과적으로 신생은 필요한 것인데 왜냐하면 다시 태어남이 없이는 아무도 거룩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3. 똑같은 이유로서, 사람이 다시 태어나지 않고서는 누구도 이 세상에서조차 행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사물의 이치로 본다면 거룩하지 않은 자가 행복하게 되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가련하고 불경한 시인조차 다음과 같이 우리에게 말합니다.  Neno malus felix, 즉 ‘사악한 인간은 행복할 수 없다.’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모든 불경한 성품은 불안한 성품이기 때문입니다.  악의, 미움, 질투, 투기, 복수심은 마음 속에 현재적인 지옥을 만들 뿐만 아니라 그 적절한 한계를 유지하지 못한다면 유순한 정열조차도 기쁨보다는 몇 천 배의 고통을 주는 것입니다.  ‘희망조차도’ 지연될 때는 ‘마음을 병들게’ 합니다(그런데 이런 경우는 아주 흔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따르지 않는 모든 욕망은 ‘수많은 슬픔’을 통해 우리를 ‘찌르기’ 쉬운 것입니다.  그리고 죄의 일반적인 근원들은 즉, 교만, 이기심, 우상숭배는 그것이 퍼져나가는 것과 똑같은 비례로서 불행의 통상적인 근원이 됩니다.  그러므로 어떤 영혼 속에서건 죄가 지배하고 있는 한 행복은 그곳에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우리의 본성의 경향이 변화되기 전에는, 즉 다시 태어나기 전에는 틀림없이 우리를 지배할 것이며 결과적으로 거듭남은 장차 올 세상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되기 위하여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IV


 나는 마지막 부분에서, 위에서 언급한 몇 가지 관찰로부터 자연적으로 뒤따라 오게 되는 몇 가지 추론들을 첨부하여 제시하였었습니다.

  1. 그래서, 첫째로 세례는 거듭남이 아니라는 사실, 즉 양자가 동일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결과하게 됩니다.  많은 사감들은 실제로 세례와 신생이 아주 똑같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읍니다.  적어도 그들은 마치 그것들이 그렇게 생각될 수 있는 것인양 말을 합니다.  그러나 나는 그런 의견이 어떤 기독교 종파에서건 공공연하게 인정되고 있다는 말을 들어 본 일이 없습니다.  분명히 영국내의 어느 종파도, 즉 국교든지 청교교든지 간에 세례와 거듭남을 동일하게 취급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청교도의 판단은 대교리문답서에 분명하게 선언되어져 있습니다.

  (문) 성례전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답) 성례전의 역할은 둘이 있습니다.  하나는 외적이고 지각적인 표징이며, 다른 하나는 이것이 의미하는 내적이며 영적인 은혜입니다.  (문) 세례는 무엇입니까?  (답) 세례한 성령에 의한 중생의 상징과 보증으로서 그리스도께서 물로 씻는 것을 제정하신 성례전입니다.  여기에서 표징으로서의 세례는 그 세례가 의미하는 중생과 구분된 것으로서 언급하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다음과 같은 교리문답서에는 우리 교회의 판단이 아주 분명하게 선언이 되어 있읍니다.

  (문) 성례전이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답) 내가 의미하는 성례전은 내적이며 영적인 은혜로 된 외적이며 가시적인 상징을 뜻합니다.  (문) 세례에 있어서 무엇이 외적인 부분이며 형식입니까?  (답)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사람들이 이로 인해 세례를 받게 되는 물입니다.  (문) 외적인 부분 또는 상징되어진 것은 무엇입니까?  (답) 죄에 대해서 죽는 것과 의에 의해서 신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국교회의 판단에 따른다면 세례가 신생이 아니라는 사실이 더욱 명백하게 드러납니다.  참으로 이러한 사실에 대한 이유는 너무나 명백하고 뚜렷하기 때문에 어떤 다른 근거가 필요 없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는 외적인 역사에 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내적인 역사에 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보이는 사건이고 다른 하나는 보이지 않는 사건이기 때문에 양자가 전적으로 다른 것이라는 사실보다 더 이상 분명한 점이 무엇이겠습니까!  즉 하나는 육신을 깨끗케 하는 사람의 행위이며, 다른 하나는 영혼과 몸이, 물과 성령이, 구별되는 것처럼 이것은 서로 구별되는 것입니다.

  2. 이상과 같은 고찰로부터 두 번째 우리는 거듭남이 세례와 같지 않은 것처럼 거듭남이 항시 세례를 수반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양자가 언제나 양립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 ‘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 하더라도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내적인 은혜가 없을 때라도 외적인 표징은 때때로 존재할 수 있습니다.  내가 지금 어린애들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릴 때 세례받은 모든 사람들은 그와 동시에 다시 태어났다고 우리 교회가 생각하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유아 세례에 대한 모든 제도가 이런 가정 속에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용인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 어린 아이들에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는가를 이해할 수 없다고 해서 이에 대한 중대한 반대가 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성인이 된 사람들에게 있어서도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린아이들의 경우가 어떻든지 간에 이미 세례받은 성인들도 그와 동시에 다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분명한 것입니다.  ‘나무는 그 열매를 보아 아는 것입니다’  세례받기 전에 악마의 자녀들이었던 사람들이 세례받은 후에도 여전히 같은 상태가 지속되는 것은 너무나 분명하기 때문에 부정할 수 없읍니다.  그들은 ‘그들의 아버지가 행한 일을 자신들도 행하고 있읍니다’  그들은 내적이거나 외적인 거룩함을 요구하지 않은 채 죄의 종노릇을 계속합니다.

  3. 우리가 지금까지 관찰해온 사실로부터 이끌어낼 수 있는 세 번째 추론은 거듭남은 성화와 동일하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이 점은 실제에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고 있는 사실입니다.  특별히 기독교적 중생의 본질과 근거에 대한 저명한 작가의 최근의 논문 속에서도 이 사실이 인정되고 있습니다.  그 논문에 대해 제기되고 있는 몇 가지 반대들을 제쳐놓고라도 이 사실은 분명하게 드러나 있읍니다.  이 논문은 중생에 대해서, 일괄적으로 말하기를 중생은 우리가 처음 하나님께 돌아서게 되는 순간부터 서서히 영혼 속에서 수행되어지는 점진적인 역사라고 언급하고 있읍니다.  이것은 틀림없이 성화에 대해서는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중생이나 신생에 대해서는 그렇지가 않읍니다.  신생은 성화의 일부분이지 그 전체는 아닙니다.  신생은 성화로 들어가는 문이고 통로입니다.  우리가 다시 태어날 때, 그 때 우리의 성화, 즉 우리의 내적이고 외적인 성결이 시작됩니다.  그리하여 그 이후부터 우리는 점차적으로 ‘우리의 머리되신 그리스도에게 이르기까지 성장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도 바울의 표현은 신생과 성화의 분명한 차이점을 보여 주며, 더구나 자연적인 것과 영적인 것 사이에 놓여져 있는 정확한 유비를 지적해 줍니다.  어린아이는 순간적으로 아주 짧은 시간에 여인으로부터 태어납니다.  그 후에 그는 한 인간으로 성장하기까지 점차적으로 그리고 서서히 자라나게 됩니다.  이와 마찬가지 방법으로 사람은 어린애처럼 순간적으로 또는 짧은 시간 안에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나게 됩니다.  그러나 그 후에도 그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자라게 되는 것은 점증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자연적인 출생과 성장과의 동일한 관계가 우리의 신생과 성화와의 관계에도 일어납니다. 

  4. 위에서 언급한 사실로부터 한 가지 사실을 더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점은 보다 주의깊게 생각하며, 장구하게 논의해도 좋을 만한 아주 중요한 사실입니다.  사람의 영혼을 사랑하고 그 중에 어느 사람이 멸망할까를 슬퍼하는 사람이 안식일을 범하고, 술취하고, 또는 다른 고의적인 죄를 지며 살아가는 사람을 볼 때, 그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합니까?  만약 앞에서의 관찰이 사실이라면 ‘당신은 새로 태어나야 한다’는 말 밖에는 다른 말을 할 수가 없읍니다.  ‘아닙니다, 절대로 그렇게 말할 수 없읍니다.  당신이 어떻게 그렇게 무자비하게 그 사람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읍니까?  그가 지금 다시 태어날 수는 없읍니다’고 어떤 열렬한 사람은 말을 할 것입니다.  ‘그 사람은 이미 세례를 받지 않았읍니까?’  ‘이제 그는 다시 태어날 수는 없읍니다’고 말 할 것입니다.  과연 그가 다시 태어날 수 없읍니까?  당신도 그렇다고 긍정하시겠읍니까?  그렇다면 그는 구원받을 수 없읍니다.  그 삶이 비록 니고데모처럼 연로하다고 할지라도 만일 그가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가 없읍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그는 다시 태어날 수 없다고 말함으로써 그 사람을 마침내 파멸로 이끌어가고 말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느 편이 더 무자비한 것입니까?  내 편입니까?  아니면 당신 편입니까?  나는 ‘그가 다시 태어나기만 한다면’ 구원의 상속자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당신은 ‘그는 다시 태어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렇다면 그는 필연적으로, 멸망 받을 수 밖에는 없읍니다.  이렇게 함으로서 당신은 사람의 구원의 길을 차단해 버리고 단지 자비라는 명목으로 그를 지옥으로 내 모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참된 자비심’을 가지고 ‘당신은 다시 태어나야만 합니다’고 말할 때라도 그 죄인 자신은 ‘나는 당신의 새로운 교리를 거부합니다’고 항변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는 ‘나는 다시 태어날 필요가 없읍니다.’  ‘나는 세례받을 때에 이미 다시 태어났읍니다.’  ‘그런데 도대체 무엇 때문에 당신은 내가 받은 세례를 부정합니까?’고 대들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세상에서는 거짓말을 용서할 수 없읍니다’고 뻔뻔스러운 죄인들에게 대답할 것이며, 그 뿐만 아니라 ‘당신이 세례를 받았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읍니다.  왜냐하면 그 세례가 당신의 죄를 얼마나 증가시키고 있읍니까?’고 답변할 것입니다.  얼마나 그것이 당신의 멸망을 증가시키고 있읍니까?  당신은 난지 팔일만에 하나님께 바쳐졌는데, 나머지 생애를 악마에게 바쳐 온 것이 아닙니까?  당신은 이성을 사용하기 전에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신 하나님께 대하여 성별되지 않았었읍니까?  그러나 당신이 이성을 사용한 이래로 하나님의 면전에서 도망하고 자신을 사탄에게 바치지 않았읍니까?  거룩한 곳을 범하는 가증스러운 자로서 즉 세상에 대한 사랑, 교만, 분냄, 육욕, 우매한 욕정, 모든 악한 감정등을 가짐으로서 서지 않아야 될 자리에 서 있는 것이 아닙니까?  당신은 한때 성령의 전이었던 영혼 속에, 성령을 통한 하나님의 거처로서 성별된 영혼 속에, 하나님께서 엄숙히 위탁한 그 영혼 속에, 이 모든 가증스러운 것들을 허용한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당신이 한때 하나님께 속했었다는 이유만으로 스스로를 영광스럽게 생각합니까?  아!  정말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일입니다.  지상에서 종적을 감추십시오.  당신을 혼돈으로 가득 채우며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서 수치스러운 것들에 대해서 더 이상 자랑을 하지 마십시오.  둘째로, 당신은 당신의 세례를 이미 부정했고 더구나 아주 합리적인 방법으로 그와 같은 일을 했다고 나는 답변할 것입니다.  당신은 헤아릴 수 없이 세례를 부정했고 지금도 날마다 부정하고 있읍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세례를 받을 때 당신은 악마와 그의 모든 역사를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악마에게 설 자리를 제공할 때는 언제나 악마의 역사를 행하는 것이며 그때 당신은 자신의 세례를 부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여러 가지 고의적인 죄로 인하여 세례를 부정하는 것이 됩니다.  여러 가지의 불결함, 술취함, 복수심, 여러 가지 외설적이고 비속한 언어, 또한 자신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맹세의 행위에 의해 세례를 부정하게 됩니다.  당신은 주의 날을 모독할 때마다 그것으로 인하여 세례를 부정하게 됩니다.  그리고 당신이 다른 사람이 당신에게 해서는 안될 일을 당신이 다른 사람에게 행하게 될 때 세례를 부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셋째로, 당신이 세례를 받았던지 받지 못했던지 간에 당신은 다시 태어나야만 된다고 답변하겠읍니다.  그렇지 못하다면 당신이 내적으로 거룩하게 되기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리고 외적인 정도와 마찬가지로 내적으로 성결하지 않고서는 이 세상에 있어서 행복해질 수 없을 뿐 아니라 장차 올 세상에서는 더욱 행복해 질 수 없읍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나는 어떤 사람도 해롭게 한 적이 없읍니다.  나는 내 모든 행동에 있어서 정직하고 공정했읍니다.  나는 저주하지도 않았고 더우기 주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지도 않았읍니다.  나는 주의 날을 모독한 일도 없읍니다.  나는 술취하지도 않았읍니다.  나는 이웃을 모략하지도 않았고 고의적인 죄를 지으며 생활하지도 않았읍니다’고 당신은 항의하시겠읍니까?  만일 그 대답이 사실이라면, 모든 사람들이 당신이 행한 것만큼 그런 행동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당신은 더욱 더 전진해아 하고 그렇지 못하다면 구원을 받을 수 없읍니다.  ‘즉 당신은 다시 태어나야만 합니다.’  그러나 당신은 ‘나는 지금 그 이상 앞으로 나가고 있읍니다.’  ‘나는 어떤 해로운 일도 하지 않았고 가능한한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읍니다’고 덧붙여 말씀하시겠읍니까?  나는 그 사실이 의심스럽읍니다.  나는 당신이 행할 수 있었던 수많은 기회를 포착하지 않고 지나쳐 버리고, 이 때문에 하나님께 책임을 져야 한다는 사실에 대해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당신이 그 기회를 선용했다 할지라도, 즉 모든 사람들에게 가능한한 최선을 다했다고 할지라도, 이것이 구원받지 못할 상태를 변경시킬수는 결코 없읍니다.  그래도 ‘당신은 다시 태어나야만 합니다.’  새로 태어나지 않고서는 불쌍하고, 죄악에 가득 차고 오염된 영혼에 대해서 아무것도 유익함을 줄 수가 없읍니다.  ‘천만에 말씀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모든 규례를 언제나 지켜왔읍니다.  나는 교회의 성례전에 항상 참례하였읍니다.’  ‘좋읍니다.  그러나 당신이 다시 태어나지 않고서는 이 모든 것들이 당신을 지옥에서 건지게 하지 못합니다.’  하루에 두번씩 교회에 가고 매주 성찬에 참석하십시오. 읽으십시오.  그러나 아직도 ‘당신은 다시 태어나야만 합니다.  이것들 중에 어떤 것도 신생에 대치될 만한 것이 없읍니다.   진정 이 세상에는 없읍니다.  그러므로 만약 그와 같은 하나님의 내적 역사를 경험하지 못했다면 당신은 다음과 같이 끊임없는 기도를 하셔야 됩니다.  󰡐주님이시여, 이 모든 당신의 축복에 신생을 더하여 주시사, 나를 다시 태어나게 하옵소서.  당신이 무엇을 거절하시기 원하시던지 간에 이것만은 거절하시지 마시고, 나로 하여금 “위로부터 태어나게” 하옵소서.  당신이 좋게 생각하시는 모든 것, 즉 명예, 재산, 친구, 건강을 내게서 빼앗아 가시더라도 오직 이것만은 허락하게 하옵소서.  성령으로 태어나게 해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받아 주옵소서.  나를 “살아계시고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썩어질 씨로서가 아니라 썩지 않을 씨로서” 다시 태어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나를 “우리의 주시요,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 안에서 매일 매일 성장하도록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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