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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슬리논문-협성교수님(출력 요)

작성자최용재|작성시간02.04.16|조회수1,514 목록 댓글 0
존 웨슬리의 언약의 예배

김영봉:존 웨슬리의 성서론

존 웨슬리의 회심과 복음주의 부흥운동자들

존 웨슬리와 런던-브리스톨

존 웨슬리의 기독론



죤 웨슬리 / John Wesley

신앙위인:요한 웨슬리(John Wesley)

성찬식의 신학적 의미와 웨슬리의 견해

웨슬리의 희년운동-김홍기

존 웨슬리 부흥운동의 사회개혁 활동

웨슬리의 인간론 이해

웨슬리의 선행은총론(先行恩寵論)




김영봉:존 웨슬리의 성서론


-- 이 논문은 존 웨슬리의 성서 이해를 다루고 있다. 존 웨슬리에게 있어서 성서는 매우 중요했기 때문에, 그의 성서 이해를 알아보는 것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이 논문에서는 웨슬리의 성서관과 해석 방법에 집중하고 있다. 아쉬운 것은 웨슬리의 신학이나 설교가 얼마나 철저히 성서신학적인 뿌리를 가지고 있는지를 언급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필자는 웨슬리의 설교를 읽으면서, 그가 얼마나 성서 신학적으로 바른 입장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거듭 확인하고 있다. 이 과제를 독자에게 맡긴다.


모든 종교인이 다 그렇듯이, 그 사람의 생애와 사상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그 사람이 경전으로 삼았던 문서에 대한 그의 이해와 사용 방식은 매우 중요한 열쇠를 제공한다. 그 사람이 종교적인 면에 대하여 진지한 사람이었다면, 더욱 그러하다. 진지한 종교인에게 있어서 경전은 가장 권위 있는 가르침이며 믿을만한 지침이다. 따라서 그 경전의 내용은 (그가 이해한 방식대로) 그의 생애와 사상을 크게 결정짓게 되어 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존 웨슬리는 스스로를 "한 책의 사람"(homo unius libri)이라고 말할 정도로 성서를 귀중하게 생각하였다:


바로 이것이, 내가 1725년부터 줄곧, 그리고 좀 더 결정적으로는 1730년부터 계속하여 지향해 왔던 요점이다. 그 때, 나는 homo unius libri, 즉 "한 책의 사람"이 되기 시작하였다. 성서 이외에는, 상대적으로 말해서, 다른 것을 보 지 않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물론, 이 말은 그가 성서 이외에는 아무 책도 읽지 않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위의 인용구에서 "상대적으로 말해서"(comparatively)라는 어구가 암시하듯이, "한 책의 사람"이라는 표현은 우선 순위를 말하는 비유적 표현이다. 제임스 조이(James K. Joy)가 웨슬리를 "천 권의 책의 사람인 동시에 한 책의 사람"이라고 불렀듯이, 그는 보기 드문 다독가(多讀家)였다. 그 많은 도서 목록 중에서 성서는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했던 것이다.


따라서, 웨슬리의 생애와 사상을 연구하는 작업에 있어서, 성서에 대한 그의 이해를 살피는 일은 필수적인 요소임에 틀림이 없다. 이러한 근거에서 필자는 본 소고에서, 성서의 성격에 대한 웨슬리의 이해와 웨슬리적 해석 방식을 살펴보고, 그것들이 오늘의 신자들에게 주는 의미에 대하여 논의할 것이다.


1. 18세기 영국 교회의 성서 이해

아무리 창조성이 뛰어난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가 살던 당시의 시대적 사조를 완전히 벗어나서 살수는 없다. 우리의 관심인 존 웨슬리도 역시 "그 시대의 아들"(a son of his age)이었다. 따라서, 그가 신학 수업을 하고 또한 저술 작업을 하던 18세기의 영국의 전반적인 신학 사조에 대하여 묻는 것은 당연한 순서이다. 특히, 이 논문의 주제를 위해서 우리는, "18세기의 영국 신학계는 성서를 어떻게 이해했는가?"라는 물음을 제기할 필요가 있다.


이 질문이 특히 중요한 또 하나의 이유는, 바로 이 시기에 유럽 대륙, 특히 독일에서는 합리주의와 계몽주의 사상의 영향하에 성서에 대한 비평적인 연구가 줄을 이어 출판되던 때였기 때문이다. 철학의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나 현대 신학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슐라이에르마허(Friedrich Daniel Ernst Schleiermacher, 1768-1834)의 공헌에 비견될 만큼, 이 시기의 성서학 연구에도 크나 큰 변화가 일어났다. 이미 17세기말에 리차드 시몽(Richard Simon)은 신약 문서에 대한 역사적 비평을 시도하였으며(Histoire Critique du Vieux Testament, 1678), 레씽(Gotthold Ephraim Lessing)이 그의 선생 허만 라이마루스(Herman Samuel Reimarus)의 유고집 Wolfenbuettel Fragmente(1778)를 출판하여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던 때가, 바로 웨슬리가 영국에서 부흥운동과 저술운동에 열중하고 있던 같은 시기였다. 라이마루스의 이 유작집에 있었던 소 논문 "Von dem Zwecke Jesu und seiner Juenger"는 복음서 연구와 역사적 예수 연구의 역사에 있어서 한 분수령으로 작용하였다. 미카엘리스(J. D. Michaelis)가 신약성서 개론을 펴낸 것도 이 시기이며(1750), 제믈러(J. S. Semler)가 정경의 역사적 기원을 비평적으로 연구한 것도 이 시기이다(1771-75). 얼마 후에는 아이히혼(J. G. Eichhorn)에 의해서 구약성서 개론도 출판되었다(1780-83). 이러한 역사는 18세기 후반의 독일의 성서학의 분위기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도버해협 동편에서는 성서에 대한 "역사-비평적 연구"가 활발히 전개되고 있었다.


우리의 관심은, 과연 이러한 새로운 사상적 변화를 웨슬리가 얼마나 알고 있었으며, 얼마나 받아들였는가에 있다. 이 점에 대하여 우선 지적해야 할 점은, 영국 전체가 독일의 비평적 분위기에 대하여 상당히 늦게서야 알게 되었으며, 알고 나서도 한 동안의 저항기를 거쳐서 19세기 후반에서야 보편화되었다는 점이다. 1807년에 가서야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교수인 허버트 마쉬(Herbert Marsh)가 미카엘리스의 신약개론을 영어로 번역을 하였으나, 이 책은 곧 정죄를 받았다. 이 정도로, 성서에 대한 비평 정신에 관한 한, 영국은 반세기 이상 늦게 독일을 뒤좇고 있었다. 따라서 웨슬리가 살아 있을 동안에 독일의 비평학은 영국인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고, 이 점에 있어서 웨슬리도 예외는 아니었다.


성서에 대한 웨슬리의 이해는 오히려 전통적인 보수적 이해를 수용한 것이었고, 뒤에서 보겠지만 독일의 경건주의의 경향에 가까왔다. 이 사실은 아래에서 보게 될 그의 성서관에서 드러나며, 또한 독일 경건주의 신학자 요한 벵겔(Johann Bengel)의 주석을 극찬한 데서도 드러난다. 독일의 경건주의는 18세기에 일어나고 있던 새로운 비평학의 경향을 배격하면서 전통에 충실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웨슬리의 이러한 경향을 비추어 보면, 만일 그가 독일의 비평적 경향을 알았다 하더라도,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였을 개연성은 없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정직하게 말해서, 웨슬리의 육신은 비평 시대의 초기에 살았으나, 그의 정신은 비평 이전 시대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물론, 이 말이, 웨슬리는 맹목적인 문자주의자(blind biblist)였다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그는 앞에서 말했듯이 18세기 영국의 아들이었다는 사실만을 확인하기를 바랄 뿐이다.


2. 웨슬리의 성서관: 성서는 어떤 책인가?


웨슬리는 전통적인 교회의 믿음인 "성서의 영감론"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것은 "감리교인의 특징"(The Character of a Methodist)이라는 글의 한 구절에서 확실히 표현되어 있다:


사실, 우리는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임"을 믿는다. 그리고 바 로 이 점에서 우리는 유대인이나 터어키인이나 불신자들과 구별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이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실행의 유일하고도 충분한 기준 (the only and sufficient rule)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바로 이 점에서, 우 리는 로마 교회의 교인들과 구별된다.


성서는 영감되었기 때문에 신앙과 실행의 "유일하고도 충분한" 표준이 된다. 영감에 대한 이 믿음은 그의 설교와 성서 주석에 그대로 반영되어 나타난다.


예를 들면, 고린도전서 7:25에서 바울은, "처녀에 대하여는 내가 주께 받은 계명이 없으되, 주의 자비하심을 받아서 충성된 자가 되어 의견을 고하노니"라고 말한다. 이 구절에 대한 웨슬리의 설명을 그대로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즉, (주님으로부터의) "특별 계시가 없으되." 그가 그것[직접 계시]을 받아야 할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사도들은 신적으로 영감되지 않은 것은 아무 것도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차이는 있다 -- 어떤 경우에는 특 별한 계시 그리고 특별한 명령을 가지고 썼으나, 또 다른 경우에는 그들에게 함께 했던 신적인 빛 즉 하나님의 영이 주는 영원한 보화의 힘을 빌어 썼다. 따라서, 이것도 역시 그들의 개인적인 견해가 아니라 신앙과 실행에 대한 신 적인 지침이다.


따라서, 이 구절에 표현된 견해에 따르면, 성서 저자들은 두 가지 유형의 영감에 의해 성서를 썼다. 하나는 명시적인 "특별 계시"요, 다른 하나는 암시적인 "영감"이다. 인간 저자의 소리가 표면적으로 크게 들리는 곳에서는 두 번째 유형의 영감이 작용했다고 보아야 하고, 화자가 구체적으로 하나님이나 예수 혹은 성령으로 되어 있는 본문들은 첫 번째 유형의 계시가 기록되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


웨슬리는, "거룩한 성서에 대한 신적 영감에 대한 분명하고도 간결한 증명"(Clear and Concise Demonstration of the Divine Inspiration of the Holy Scriptures)이라는 한 페이지짜리의 논문에서 독특한 영감론을 피력한다. 그에 의하면, 성서가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네 가지의 중요하고도 강력한 증거가 있다: 신적인 능력에서 온 기적(miracles), 신적인 이해에서 온 예언(prophecies), 신적인 우수성(divine goodness)에서 온 가르침의 우수성(goodness), 그리고 신적인 거룩성에서 온 인간 저자의 도덕적 품성. 이 네 가지의 증거들은 성서가 영감으로 쓰여졌다는 것을 의심의 여지없이 입증해 준다는 것이다.


이토록 위대한 성서를 누가 썼을까? 웨슬리에 의하면, 세 가지의 가능성이 있다. 1) 선한 사람이나 천사에 의해 쓰였거나, 2) 악한 사람이나 악마에 의해서 쓰였거나, 3) 하나님에 의해 쓰였거나, 셋 중의 하나이다. 선한 사람이나 천사가 자신의 말을 쓰면서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속일 수 없을 터이고, 악한 사람이나 악마가 썼다면 그 내용이 이렇게 훌륭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이, 웨슬리의 주장이다. 따라서 남는 가능성은 "하나님" 뿐이다. 이렇게, 웨슬리는 성서의 영감성에 대하여 확신하였고, 또 그렇게 강하게 주장하였다. 그의 영감성 주장에서 주목되는 점은, 전승에 대한 맹종보다는 내용의 우월성을 중심으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


성서의 영감에 관한 웨슬리의 주장 중, 눈 여겨 볼만한 것이 또 하나 있다. 그는 디모데 후서 3:16에 대한 주석에서, 벵겔의 도움을 받아서,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의 성령은 성서를 기록한 사람에게 영감시켰을 뿐 아니라, 진지한 기도 로써 그것을 읽는 사람들에게 계속하여 영감을 주고 계시며 초월적으로 도우 신다.


즉, 그는 일회적인 영감만을 믿은 것이 아니다. 성서 저자들에게 작용했던 영감은 오늘에도 계속적으로 작용할 수 있고, 또 그렇게 되어야 한다. 그래서 구약성서에 대한 주석에서 그는, "성서는 그것이 쓰여진 동일한 성령을 통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고 말한다. 또한, 그는 성서 읽기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로서 "기도"를 든다. 그러나, 그 영감은 새로운 성서를 만들어 낼 수 있는 방식으로 활동하지는 않는다. 이미 기록된 성서의 의미를 밝혀주는 방식으로만 활동할 뿐이다. 앞으로 더 자세히 논의될 것이지만, 성서 이해에 있어서의 성령의 계속적인 역할에 대한 인식은 웨슬리로 하여금 문자적인 독서와 기계적인 적용의 오류에 빠지지 않고, 심미적으로 읽고 창조적으로 적용하도록 도와주었다.


아울러서 간단히 지적하고 넘어갈 점은, 성서의 영감설이 일반적으로 수반하는 부수적인 믿음들을, 웨슬리가 보여 준다는 점이다. 성서의 영감에 대한 믿음은 일반적으로 성서의 무오성과 의미의 통일성에 대한 믿음에로 인도한다. 유대인들의 성서 이해가 그것을 잘 증명해 준다. 영감에 대한 웨슬리의 믿음도 역시 그로 하여금 "성서의 모든 부분들은 신적이며, 모든 부분이 함께 단일체(one entire body)를 이루며, 그 안에는 아무런 결함도, 과잉도 없다"고 말하게 만들었다.


성서의 모든 부분들이 단일한 메시지를 말하고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웨슬리에 의하면, 성서는 "하늘로 가는 길"(the way to heaven)을 보여준다. 그 길을, 그는 "믿음에 의한 의인(義認)"(justification by faith)의 교리에서 발견한다: "믿음을 통한 의인은 성서뿐만 아니라 교회의 중심 교리이다." 그는 또한 "성서가 말하는 구원의 길"(The Scripture Way of Salvation)이라는 설교에서 이렇게 말한다:


"믿음"과 "구원"이라는 이 두 개의 간단한 단어들이 모든 성서의 요체이며, 성경의 전체의 정수라는 사실은 쉽게 판별될 수 있다. 그것들에 대한 모든 실 수들을 피하고 이 두 단어에 대한 참되고도 정확한 판단을 하기 위해 노력하 면 할 수록 그 판별은 더욱 쉬워진다.


즉, 웨슬리는 성서의 중심을 "믿음을 통한 구원의 도리"에서 발견한다. 그리고 그 도리는 세 가지로 나뉜다: 1) 인간은 모두 죄 안에서 죽었고 따라서 진노의 자식이라는 것; 2) 인간은 믿음으로만 의롭다는 인정을 받게 된다는 것; 3) 믿음은 내적, 외적 거룩의 열매를 맺는다는 것. 그는 이 세 주제로써 성서를 읽고 해석한다. 이 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으며, 바로 이 길을 성서가 보여주고 있다고 믿기 때문에, 그는 성서를 그토록 중요하게 생각하였던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웨슬리는, 처음에 가까이 했던 모라비아 교도들과 거리를 두게 되었던 것이다.


3. 웨슬리의 성서 읽기


윌리암 아넷(William Arnett)은 그의 학위 논문에서 "웨슬리의 해석 원칙"(Wesley's Rule of Interpretation)을 여섯 가지로 요약하고 있다. 우선, 아넷의 요약을 소개하는 것으로 이 장을 시작하기로 한다.


첫째, 문자적인 의미가 강조된다.


둘째, 성서를 해석하는 데 있어서 맥락(context)의 중요성이 강조된다.


셋째, 성서를 통해서 성서를 해석한다.


넷째, 성서 해석에 있어서 경험이 강조된다.


다섯째, 이성은 믿음을 돕는 한에서 허용된다.


여섯째, 실용성을 염두에 두고 해석한다.


아넷의 분석은 웨슬리의 성서 해석 원칙의 주요 특징들을 포착했다는 점에 있어서 인정받을 만하다. 이제, 이하에서는 이러한 특징들이 가지는 심층적인 차원들과, 아직 주목되지 않고 있는 또 다른 특징들에 대하여 논의할 것이다.


우선, 웨슬리가 문자적인 의미를 강조하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벤자민 잉햄(Benjamin Ingham)은 자신의 모친에게 보낸 편지에서 웨슬리에 대하여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 계시되었다고 믿는 그것 외에는 아무런 원칙을 가지 고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도 그는 늘, 가장 문 자적인 의미를 최고의 것으로 생각합니다. 한 본문의 문자적 의미가 다른 본 문의 의미와 모순을 이룰 때만 제외하고는 말입니다.


문자적 의미에 대한 이러한 강조는 성서 해석의 긴 역사적 흐름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로버트 그랜트(Robert Grant)가 잘 소개하고 있듯이, 종교개혁 이전 시기까지 교회의 성서 해석을 지배한 것은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전통을 이은 "비유적 해석"(allegorical interpretation)이었다. 그러나 이 해석은 많은 오역을 허용해 주었고, 따라서 종교 개혁의 중요한 공헌 중 하나는 "문자적 의미"에 대한 강조였다. 웨슬리가 문자적 의미의 우선성을 강조한 배후에는 이와 같은 역사가 숨어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비유적 해석을 통한 성서의 자의적(恣意的) 해석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웨슬리의 성서 해석에 있어서 가장 두드러지게 보이는 특징은 본문의 문학적, 역사적 맥락(literary-historical context)을 강조한다는 점에 있다. 이러한 독서 방법을 우리는 "문학적 혹은 심미적 읽기"(literary or aesthetic reading)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독서 방식의 배후에는 성서 본문의 성격에 대한 나름대로의 이해가 깔려 있다. 즉, 웨슬리에게 있어서 영감은 성서의 언어적 어법에서 발견될 수 있는 것이며, 따라서 "성서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단어 각각에 주어진 의미, 그것에 의해 표현된 거룩한 감동, 그리고 인간 저자에 의해서 표현된 감정 등을 관찰해야 한다." 이런 입장에서 그는 단어의 의미에 대한 물음 뿐 아니라, 전후 문맥에 대하여 세심한 배려를 보인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본문의 언어적 표현을 꿰뚫어 보는 직관적 독서를 즐겨 한다.


그 한 예로서, 우리는 빌레몬서 9절에 대한 주석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 구절에서 바울은 오네시모에 대한 빌레몬의 너그러운 처사를 간청을 한다. 웨슬리는 이어지는 10절과 11절에서 바울이 얼마나 세심하게 표현을 하고 있는지를 지적한다. 10절에서는 "오네시모"라는 이름을 쓰기 전에 "나의 아들, 내가 옥중에서 낳은 아들"이라는 표현을 앞세운 이유는, 오네시모에 대한 빌레몬의 좋지 않은 감정을 고려한 까닭이라는 것이다. 이어서 11절에서도, 오네시모의 과거의 무익성에 대한 간략한 언급 직후에 그의 현재의 변화를 말하고 있는 것도 역시 바울의 세심한 배려에서 온 것임을 지적한다.


이런 예에서 분명해지는 것은, 웨슬리는 비평 이전의 사고 안에서 살기는 했으나, 기계적인 문자주의자는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는 오히려 성서 해석에 있어서 놀라울 정도의 창조성을 보여준다. 본문을 그것 자체로서 완전한 통일체로 보고, 그 본문 내면의 역동성(dynamics)을 고려하여 그 의미를 찾아내려는 태도는, 편집비평의 뒤를 이어서 성서학계를 지배하고 있는 현재의 "문학비평적 독서"(literary reading) 태도에 놀라울 정도로 가까이 있다.


이러한 읽기 방식과 관련하여 지적해야 할 것이 바로 "묵상적 읽기"(meditative reading)이다. 웨슬리는, 성서 읽기 방법을 소개할 때마다 "묵상"을 중요한 요소로 지적한다. {구약주석} 서문에서 그는, 효과적인 성서 읽기의 여섯 가지 요소를 열거한다. 여섯번째 항목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6) 만일 우리가 읽으면서 자주 멈추어서, 읽은 내용으로 우리 자신의 내면과 행동을 검사하는 것도 역시 도움이 될 것이다. 이러한 행동은 하나님께서 우 리를 능하게 하셔서 그의 복된 뜻에 우리가 순종할 수 있게 해 주신 것을 발 견하게 될 때 찬양할 계기를 제공해 줄 것이며, 반대로 우리의 양심이 거기에 미치지 못할 때에는 겸비와 기도의 계기를 제공해 줄 것이다.



그는 또한 어느 대화 중에 성서를 이해하는 세 가지의 주요 방식으로서 "읽기"(reading), "묵상"(meditating), "듣기"(hearing)를 제시하기도 했다. 그 뿐만이 아니라, 그가 성서 이외의 책들 중에서 가장 사랑했던 책인 토마스 아켐피스(Thomas a Kempis)의 {그리스도를 본받아}(Imitatio Christi)의 서문에서, 그 책을 읽는 방식으로서 "묵상"을 강조한 적이 있다. 이러한 묵상적 읽기의 예가 실제로 그의 {신구약 주석}에서 발견된다. 우리는, 마태복음 14:10; 16:24과 마가복음 2:6; 9:38 등을 그 예로서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구절들에 대한 주석에서 웨슬리는 신학적, 문학적 설명을 보류하고 묵상으로 대신한다. 마가복음 2:6의 주석에서 그는 이렇게 적는다: "오 하나님, 저로 하여금 이 작은 죄들 중 하나라도 범하지 않게 하소서! 속히 저의 혀가 입천장에 붙어버리게 하소서!" 묵상을 통하여 직관력으로써 본문의 의미를 꿰뚫고, 그 동일한 직관력으로 본문과 자신의 대화를 시도하는 것이, 웨슬리의 성서 읽기의 또 하나의 중요한 특징으로 지적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성서 읽기에 있어서 "실천"의 중요성을 웨슬리는 강조하고 있다. 우리는 바로 앞에서 {구약주석}의 서문의 일부를 인용한 바 있는데, 그 부분을 계속 읽어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당신이 [그 묵상을 통하여] 어떤 빛을 받으면, 최선을 다하여 그것을 사용해야 한다. 그것도, 즉시로. 조금의 지체도 없게 하라. 당신이 무엇을 결 심하였든지, 그 순간부터 실행하기 시작하라. 그렇게 함으로써 당신은, 이 말 씀이 현재의 구원과 영원한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능력임을 발견할 것이다.



실천이 없는 학문은 올바른 학문 방식이 아니라는 동양적 학문관과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음 믿음이라는 야고보의 제언(2:14)을 생각케 하는 대목이다. 앞에서 언급한 바 있는 대화에서도 웨슬리는 성서를 읽되, "계속하여"(constantly), "규칙적으로"(regularly), "세심하게"(carefully), "신중하게"(seriously), 그리고 "생산적으로"(fruitfully) 읽으라고 제안한다. 생산적으로 읽으라는 말은 읽은 것을 실행하는 데 관심을 두라는 뜻이다. 성서 읽기에 대한 이러한 태도는 중용(中庸)의 장구(章句) 20장의 내용과 신기하리만큼 놀라운 일치를 보인다. 중용은 학문하는 태도를 다음과 같이 피력한다: 넓게 배우고(博學之), 깊이 캐어 묻고(審問之), 진지하게 생각하고(愼思之), 명쾌하게 분별하고(明辨之), 돈독히 행하라(篤行之). 이 다섯 가지 요소를, 웨슬리는 성서 읽기에 있어서 적용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4. 결론: 성서학의 비평 말기적 회의와 웨슬리의 성서읽기

웨슬리는 "성서의 사람"이었다. 성서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였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성서의 세계 안에서 살았던 사람이다. 그래서 프란츠 힐더브란트(Franz Hilderbrandt)는, "그의 설교들, 편지들 그리고 일기들은 구구 절절이 성서적 용어로 말하고 성서적 방식으로 주장하고 성서적 범주 안에서 생각하는 한 사람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실로, 그는 "한 책의 사람"이 되기로 한 결심을 이루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던 사람이다. 따라서, 앞에서 지적했듯이, 그의 성서 이해를 아는 것은 그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매우 큰 역할을 담당한다. 그 뿐 아니라, 오늘의 성서 읽기에 있어서도 그의 성서 이해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웨슬리의 성서관은 그 근간에 있어서 종교 개혁적 전통에 견고하게 서 있다. 영감론에 대한 믿음이라든지, 성서에 대한 구속론적/기독론적 해석이 그 예이다. 그는 도버해협 동편에서 시작되고 있던 비평적 사조의 영향으로부터 면역되어 있었다. 말 그대로 비평 이전(pre-critical) 시대의 사람이다. 그러나, 그가 비평 이전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사실이, 그가 남겨준 모든 창조적 영감들을 모두 무시할 만한 근거는 되지 못한다. 그는 자신의 시대의 한계(constraints of his time) 아래에서 살았지만, 오늘의 성서 읽기에 여전히 중요한 영감들을 제공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자주 지적되어 왔지만, 3세기가 넘도록 역사비평방법을 전능의 도구로 사용해 왔던 성서학은 얼마 전부터 비평 말기적 회의와 무기력에 빠져 있다. 역사비평학이 시작된 이후에 이루어진 이 엄청난 학문적 발전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질문이요, 사상과 실천의 문제에 있어서 성서학이 무엇을 할 수 있느냐는 질문이다. 물론, 이 말이, 역사비평학의 학문적 정당성을 부인하자는 뜻은 아니다. 다만, 그 무미건조하고 복잡하고 무기력한 해석 작업을 보충할 만한 어떤 돌파구가 생겨나야 할 것이라는 요청이다. 이런 차원에서, 최근에 문학비평, 정경비평, 사회학적 비평 등이 새로이 제기되어 그 실용성을 검증하고 있는 중에 있다. 우리는, 웨슬리의 성서 읽기는 이러한 새로운 경향들과 매우 가까이 있음을 발견하면서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가 보여 준 심미적, 묵상적, 실천적 성서 읽기는 역사 비평 후기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좀 더 풍요롭고 생산적인 성서 읽기에 대한 하나의 대안을 제공해 준다.


마지막으로, "그렇다면, 웨슬리의 전통을 따르기를 원하는 현대인은 성서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를 물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분명히, 비평 이전의 시대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웨슬리가 그 자신의 시대의 아들이었듯이, 우리도 비판적이고도 건설적인 "우리 시대의 자식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비평 이전 시대로의 회귀는 결코 대답이 아니다. 현대인들이 계속하여 전승해야 할 웨슬리의 유산은, 그가 성서 읽기에 있어서 보여준 창조성(creativity in reading)과 실천에 있어서 보여준 신실성(faithfulness in practice)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비평주의의 유산들이 가지고 있는 한계들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결론으로서 필자는, 바로 이러한 노력이 앞으로 일어날 것을 전망하는 것이다.



존 웨슬리의 회심과 복음주의 부흥운동자들

1. 존 웨슬리의 윤리적 회심 :

2. 존 웨슬리의 복음적 회심

3. 존 웨슬리와 복음주의 부흥 운동자들


웨슬리의 삶의 전환점은 ‘회심’이다. 그리고 이 회심사건은 영국사에 새국면을 시작하게 한 혁명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웨슬리의 이 회심에 대한 이해 없이는 그의 부흥운동이나 사회개혁에 대해 참된 이해를 할 수 없다. 그런데 학자들 간에는 웨슬리의 회심에 대해 1725년과 1738년의 문제를 놓고 이견을 표출하고 있다. 본 연구자는 대다수 웨슬리 학자들의 견해를 따라 1725년을 웨슬리의 ‘윤리적인 회심’으로, 1738년을 ‘복음적인 회심’으로 구분하고자 한다. 웨슬리의 사회개혁활동에 대한 이해에 양자 모두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본다.


1. 존 웨슬리의 윤리적 회심


가. 신비주의자들의 영향과 웨슬리의 헌신의 다짐


1725년은 캐논의 말처럼 “웨슬리의 생애에 큰 빛을 준 해”였다. 웨슬리는 그 해에 성직 안수를 받기도 했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1725년에 테일러(J. Taylor)와 켐펜의 토마스(Tomas a Kempis) 그리고 후에 로우(William Law)의 저서들을 읽고 하나님께 헌신을 다짐했던 것이다.


웨슬레는 1725년에 성직을 취하기로 결심한 후 도덕적인 결함으로 갈등하며 성결을 애타게 추구하였는데, 이 시기에 일련의 신앙서적들이 가장 큰 의미를 부여해 주었다는 사실을 기독자 완전에 관한 평이한 설명(A Plain Account of Christian Perfection, 1766)에서 밝히고 있다. 여기에서 첫 번째로 거론된 책이 테일러의 거룩한 삶과 죽음의 규칙과 훈련(The Rule and Exercises of Holy Living and Holy Dying)이다. 베이커(Frank Baker)는 테일러에 대해 “17세기의 국교도 중 존 웨슬리의 영적인 아버지로 가장 가까이 다가서 있는 인물”이라고 표현했다. 그가 웨슬리에게 미친 영향의 크기를 가늠케 해주는 말이 아닐 수 없다.


웨슬리는 테일러 감독의 거룩한 삶과 죽음의 규칙과 훈련을 통해 크게 두 가지 큰 영향을 받게 되었다. 하나는 시간 사용에 관한 규칙이고, 다른 하나는 거룩한 삶을 위한 의도의 순수성에 관한 것이었다.


웨슬리는 우선적으로 그 저술을 통해 시간 사용에 대해 새로운 규칙들을 세웠다. 그는 자기의 시간 사용을 통제하기 위해 자신의 시간 사용에 대해 정확하게 기록할 것을 다짐했다. 그리고 면밀하게 시간 사용을 계획하여 그의 삶을 통제하였는데, 웨슬리는 이 원칙을 지속적으로 고수하여 메도디스트라는 이름을 얻기까지 했다.


그러나 테일러의 그 저술이 웨슬레에게 미친 더 중요한 점은 “의도의 순수성”에 관한 것이었다. 이에 대해 웨슬리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나는 23세가 되던 해인 1725년에 테일러 감독의 거룩한 삶과 죽음의 규칙과 훈련을 접하게 되었다. 나는 이 책의 여러 부분을 읽으면서 크게 감동을 받게 되었는데, 특히 의도의 순수성에 관련된 부분에서 였다. 나는 즉시 나의 생각과 말과 행위, 곧 나의 삶 전체를 하나님께 헌신하기로 결심하였다. 이것은 내가 철저하게 깨달은 바대로, 내 삶의 전부분이 하나님께 제물이 되든지 아니면 악마에게 제물이 되든지 하는 것이지 중간적 입장이란 없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테일러 감독이 주장하는 이 의도의 순수성은 웨슬리의 특징적인 교리로 알려지게 된 “기독자 완전”의 교리에 공헌을 했다. 기독자 완전에 대한 웨슬리의 정의는 여기에 뿌리를 두고 있다. 캐논의 설명에 의하면 “웨슬리에게 있어 기독자 완전은 단 한 가지 일, 다시 말해 의도의 순수성을 의미한다. 그것은 자연적인 욕망의 모든 부패성에서 온전히 벗어나고 자기 자신의 이익 혹은 하나님에게서 벗어난 어떤 다른 사람이나 일에 관한 이해 관계에서 온전히 해방된, 그러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한 사람의 생각과 행동을 이끄는 것이다.”


이처럼 웨슬리는 테일러를 통해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헌신의 강한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헌신에 있어, 웨슬리는 테일러 보다 하나님의 행위의 필요성을 더 강조한다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웨슬리가 그의 기독자 완전에 대한 평이한 설명에서 언급한 두 번째 책은 켐펜의 토마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The Imitation of Christ)였다. 그는 그 책으로부터 “진정한 종교는 마음에 자리하며 하나님의 율법은 우리의 말과 행동은 물론 우리의 모든 사고에 까지도 확대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테일러로부터 삶의 헌신에 대한 깨달음을 얻었다면 토마스로부터는 마음의 헌신에 대한 깨달음 얻게 되었던 것이다.


웨슬리는 기독자 완전에 대한 평이한 설명 서문을 통해 토마스가 종교는 형식적인 형태나 의식(ritual) 이상임을 강조한 것이 준 충격을 다음과 같이 회상하였다.



내적 종교, 곧 마음의 종교의 본질과 범위가 과거 어느 때 보다도 더 강렬한 빛으로 지금 내게 나타났다. 나는 내 삶 전체를 하나님께 드린다 할지라도 마음, 다시 말해 나의 모든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지 않는다면 내게 아무런 유익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토마스는 웨슬리로 하여금 내적 성결을 추구하게 하였고 진지하고 성실하게 그리고 희생적으로 하나님과 사람을 섬기게 하였다. 그러나 웨슬리가 토마스의 견해를 모두 다 수용한 것은 아니었다. 웨슬리가 토마스를 위대한 신비주의자의 한 사람으로 존중시 하기는 했지만 이 세상의 모든 즐거움을 죄악시하는 점과 그러한 것들을 전적으로 부정하는 수도원적인 금욕주의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았다. 하지만 웨슬리는 이 중세 수도원적인 헌신에 관한 고전을 버리지는 않았다.


웨슬리의 경건 삼두 마차의 세 번째 멤버는 웨슬리와 동시대인인 로우이다. 베이커(Eric W. Baker)는 이 세 사람 중에서 직접적인 접촉을 가진 로우가 웨슬리에게 가장 영향력이 있었을 것으로 판단한다. 아마도 이 판단은 정확할 것이다.


웨슬리는 로우의 기독자 완전에 대한 실제적인 논문(A Practical Treatise upon Christian Perfection)과 경건과 거룩한 삶에로의 진지한 초청(A Serious Call to a Devout and Holy Life)을 읽고 온전히 하나님께 헌신할 것을 더 확실하게 결심했다. 그는 이 사실에 대해 기독자 완전에 관한 평이한 설명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일 이년 후 나는 로우 씨의 기독자 완전과 진지한 초청을 접하게 되었다. 이 저서들은 나에게 반(semi)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절대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과거 어느 때보다 더 확신시켜 주었다. 그리하여 나는 그의 은총 (내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라고 심각하게 느끼고 있는)을 통하여 나의 모든 혼과 몸과 영으로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할 것을 결단하였다.



이처럼 로우의 이 저서들은 웨슬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할 것을 결단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 헌신의 결단은 그의 일기에 의하면 그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의 내.외적인 율법을 온전히 지키려는 계속적인 노력을 의미했다. 웨슬리는 로우의 이러한 기독자 완전에 대한 가르침을 그의 추종자들에게도 전달했고 읽게 하여 웨슬리와 그의 추종자들은 “로우의 사상을 따라 생겨난 무리들”이라는 오해를 받기도 하였다.


비록 1738년의 경험 후에 웨슬리는 로우가 신앙의인의 길을 보여주지 못한 점에 대해 비난하기는 했지만, 그가 그 길을 따라 그의 완전사상을 한 단계 발전시키는데 있어서 로우에게 진 빚은 결코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웨슬리는 1788년에 그의 설교를 통해 경건과 거룩한 삶에로의 진지한 초청에 대해 “표현의 아름다움이나 사고의 심오성 및 정확성에 있어서 누구도 결코 능가하기 어려운 탁월한 논문”이라고 극찬했다.


실로 위의 세 사람은 웨슬리의 경건의 지도자요 교사들이다. 그들을 통해 웨슬리는 크리스챤의 삶은 헌신, 곧 하나님과 이웃사랑에서의 헌신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그들이 종교적이며 사회적인 성격에서 불어 넣은 급진적인 변화이다. 웨슬리는 이들을 통해 신앙에 대해 내외적으로 진지할 것을 결심하게 되었는데, 아우틀러는 이를 “회심”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 때에 웨슬리는 헌신적인 사역을 영적인 건강의 결과로 보다는 수단으로 이해했다. 이는 일종의 헌신적인 율법주의였다. 이처럼 1725년의 회심은 의무감과 규율에 따라 살려는 결심에 기반을 둔 윤리적인 것이었다.



나. 신성 클럽(Holy Club)을 통한 경건과 선행 훈련



신성 클럽은 웨슬리가 테일러와 로우 등을 만난 이후로 그의 크리스챤적인 행보의 표식이 되었던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헌신을 위한 매개물을 그에게 제공해 주었다. 신성 클럽은 웨슬리에게 그러한 것을 위한 실험실이 되었던 것이다. 웨슬리는 신성클럽을 통해 헌신의 삶에 전적으로 몰입했다.


웨슬리는 신성클럽 회원들과 함께 낮에는 선행으로 저녁에는 기도와 성경연구로 시간을 활용했는데 오전 4시에 시작하여 저녁 9시에 일과를 마쳤다. 그것은 참으로 혹독한 것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신성 클럽의 일원이었던 윌리엄 몰간(William Morgan)의 동생인 리챠드 몰간 (Richard Morgan)이 보낸 다음과 같은 편지는 경사지긴 했지만 신성 크럽의 호기심을 끄는 모습을 제공해 준다.


그들은 그들 삶의 매 시간, 아니 매 분을 하나님을 섬기는데 사용하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가난한 자들을 돕고 그들의 회심을 위한 책을 구입하기 위해 거의 굶고 있다…. 그들은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는데 이로 인해 그들은 기괴한 모습이 될 정도로 마르게 되었다. 그들은 대학 전체의 조롱거리가 되었다.


하나님에 대한 헌신의 길에 있어 이러한 내적인 개인의 경건훈련 외에 신성클럽에서 웨슬리에게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 것은 선행이었다. 웨슬리는 1730년에 신성클럽 회원인 몰간(William Morgan)의 제의를 통해 교도소 방문과 그 도시의 가난하고 병든 자 돕기 등 사람들의 몸과 영혼을 직접 대면해 행할 수 있는 선한 일들을 시작했다. 이에 대해 피이트가 “지금까지 거의 배타적으로 자기자신에게만 열중해 있던 웨슬리를 하나님을 위해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하는 사도로 만드는 것”이라고 한 것은 의미 있는 평가라 하겠다.


이 때부터 자선이 웨슬리의 삶에 현저한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 웨슬리는 신성클럽 회원들과 더불어 옥스포드 교도소와 보카도(Bocardo) 교도소에 매주 3회 이상 봉사를 지속했고 재소자들의 자녀들을 교육시키며 이를 위해 학교를 세우기도 하였다. 당시 웨슬리의 옥스포드 일기에는 영혼은 물론 육신에 대한 그의 관심이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이는 웨슬리가 영적인 행복에만 집착해 있던 초기의 협소함에서 중대한 변화를 일으켰음을 나타내 주는 것으로, 미래의 메도디즘을 위해 중요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가 분명히 짚고 넘어갈 점은 신성크럽의 중요성을 과장하거나 신성크럽 자체를 메도디즘의 터전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그들의 의식과 활동은 단지 지역적인 경건의 격려 차원이었을 뿐이고, 그들의 열정과 야심은 한 순간도 더 넓은 벌판을 관찰하지 못했으며 성직자나 대중들에게 호소할 어떠한 사상도 담지하고 있지 못했다. 이 때의 웨슬리와 그의 동료들의 첫째되는 충동은 여전히 자기보존적 차원의 질을 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의무적인 접근 방식에 있어 웨슬리는 그의 두 윤리적 조력자의 충실한 제자였다. 켐펜의 토마스(Thomas a Kempis) 경우를 보면, “자비 행위에 관하여”라는 장(chapter)에서 박애에 대해 약간 언급한 것을 제외하면 그의 영성에 이르는 명상적인 길에서는 사회적 차원을 찾아 볼 수 없다. 반면에 테일러(Taylor)와 로우(Law)는 사회적인 책임성을 의무적으로 이행할 것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이러한 사회적인 민감성에 대해서는 칭찬할만하나 그 동기는 굽어 있다. 자기의 구원을 포함해 자선 행위자에 대한 이점들이 중심이 되어 있을 뿐 그러한 행위를 함에 있어 사랑은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고 있다. 선행이 회심한 삶의 결실로서가 아니라 상 받을 것으로 이해되고 있는 율법주의와 영적인 이기주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웨슬리의 옥스포드 신앙은 도의심과 의무라는 이러한 계통을 본 받은 것이었다. 그의 믿음은 여전히 사랑 보다는 의무적인 믿음을 나타내고 있었다. 게다가 테일러나 로우와 마찬가지로 웨슬리는 사회봉사인 구제로 만족해 했을 뿐, 자선을 넘어서고 그러한 자선이 필요한 상황을 만들어 내는 요건들을 변화시키려 노력하는 사랑에 대해서는 아직 알지 못하고 있었다. 비록 웨슬리와 그의 옥스포드 동료들이 풍자적으로 “개혁 크럽”이라는 명칭을 받게 되었지만 그 말은 영적 개혁에 관한 것이었지 사회적이거나 정치적인 개혁에 관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선행에 관해 주목했지만 그러한 행위의 범위는 제한적이었다.




다. 복음적인 회심의 징검다리로서의 조지아 선교



신성크럽 활동의 연장이라 할 웨슬리의 조지아에서의 경험은 결과적으로 웨슬리로 하여금 테일러와 로오의 율법의 굴레에서 벗어나 복음에로 향하게 하고, 의무적인 선행에서 사랑이 동기가 되는 선행에로 방향을 전환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조지아 선교 당시의 웨슬리를 보면 그의 율법주의적인 의식주의와 금욕 그리고 헌신이 그 절정기에 달해 있었다. 웨슬리가 오그레토프(Oglethorpe) 장군의 요청을 받아 들여 ‘복음 전파회’(The Society for the Propagation of the Gospel)의 파송을 받아 새로운 식민지인 조지아 선교를 떠나게 된 것도 자신의 구원을 위해 더 높은 단계의 성결을 성취하고 더 의미 있는 선을 이루고자 하는 동기에서 였다.


웨슬리는 이러한 의도에서 1735년 10월 14일에 동생 챨스(Charles Wesley), 잉햄(Benjamin Ingham), 그리고 델라모트(Charles Delamotte)와 함께 시몬즈 (Simmonds)라는 배에 승선했다. 벌리아미(C. E. Vulliamy)는 이를 가리켜 “물 위의 신성클럽”이라고 칭했다. 사실 웨슬리는 신성클럽을 최소한 부분적이라도 아메리카에 이식시키려는 의도를 지니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신성클럽 동료들과 함께 선상에서도 어린이들을 가르치고 병든 자들을 돌보며 승객들을 교화시키는 사역과 개인 경건생활에 힘쓰는 등 아침 4시부터 밤 9-10시까지 매일 매시간 계획에 따라 규칙적으로 정확하게 움직였다. 1736년 2월 6일에 조지아에 당도한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웨슬리의 소망과는 정반대로 조지아에서의 그의 율법주의적인 사역은 그리 전도가 밝지 못했다. 교구민들이나 인디안들에게 그의 의식주의적인 추상적인 견해와 자신의 영혼상태에 대한 문제에 사로잡혀 정통주의적인 관례를 엄격히 준수하고 정통주의적인 열렬한 신앙고백을 통해 구원을 추구하려는 그의 사역은 별 소득이 없었다. 그는 소수의 사람에게 존경을 받기는 했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인기가 없었고 오히려 적대감을 불러 일으켰다. 그에게 돌아 오는 것은 실망과 좌절 그리고 깊은 영적 무력감의 쓰라림이었다. 후에 웨슬리는 이 때의 그의 삶에 대해 다음 같이 말했다.


나는 나 자신의 행위와 의를 신봉하는 용의 주도한 방식의 삶을 살았다.… 그러면서 나는 설교를 계속했고, 육신을 지닌 자로서는 도달할 수 없는 그러한 의를 쫓았고 신봉했다.… 나는 이처럼 허공을 치고 있었다. 그리스도에 대한 산 믿음을 통해 “믿는 모든 자에게” 구원이 이르게 된다는 그리스도의 의에 대해서는 무지한 채, 나는 나 자신의 의를 세우려고 노력했다. 나날을 그렇게 불 속에서 애를 썼다.… 나는 여전히 “은혜 아래” 있지 않고 “법 아래” 있었다.…



이러한 웨슬리의 조지아 사역은 사바나(Savannah) 행정장관의 조카인 홉키(Sophia Hopkey)와의 사랑의 실패로 종막을 내리게 되었다. 일련의 그 불행은 성찬예식에서 그녀에 대한 추방과 조지아로부터의 웨슬리에 대한 추방을 결과했다. 웨슬리는 명예훼손죄로 고발을 당한 가운데 1737년 12월 22일에 낙담과 당혹감을 안고 그 식민지를 떠나 영국행 배에 오르게 되었다.


비록 이처럼 조지아의 사역이 좌절스러운 것이기는 했지만 그러나 그것은 그의 영적인 문제에 중대한 공헌을 했다. 그 경험을 통해 그는 1725-1726년의 “훌륭한 결심”으로는 충분치 못함을 인식하고 그 이상의 것을 찾아 갈망하게 되었던 것이다. 웨슬리는 그의 그러한 감정과 생각을 귀국 항해 중의 일기에 나타내 보이고 있다. 1938년1월 24일의 일기에 “나는 인디언들을 회심시키기 위해 아메리카에 갔었다. 그러나 오! 나를 구원할 자는 누구인가!”라고 했고, 2월 1일의 일기에는 “다른 사람들을 회심시키려 아메리카에 간 나 자신은 하나님께로 회심한 일이 없으니 어찌된 일인가!… 나는 진노의 자식이요, 지옥의 후사이다”라고 기술해 놓았다.


참으로 신성클럽의 경건과 박애정신은 구경꾼들에게는 인상적인 것이었으나, 웨슬리는 그것들이 궁극적으로는 불만족스러운 것이고 어떤 경우에는 오히려 더 나쁘고 비생산적인 것이라는 자각에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테일러와 로오가 그에게 해줄 수 있는 최고의 한도에 까지 도달했지만 그것은 그에게 궁극적인 것이 되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귀향 선상에서 제기했던 그러한 의문들을 해결해 줄 종교적인 체험의 출발선상에 서 있었다. 더 나아가 올더스케이트에서 그가 하나님과 만나게 된 것은 그의 사회적인 모든 활동과 의식에도 심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2. 존 웨슬리의 복음적 회심



만일 웨슬리가 ‘윤리적 회심’의 상태에만 머문 채 35세 시에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면, 그는 능력 있고 규칙적이며 열심히 일하는 인물이지만 현학적이고 율법적이며 성마르고 애교라고는 거의 없는 사랑스럽지 못한 사람이라는 것 외엔 별로 사람들에게 기억되지 않는 인물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한 시대 후의 영국 사회 전반적인 풍조를 변화시킨”, 그리고 “영국이 세익스피어 만큼이나 관심을 기울이는” 그러한 인물로 사람들에게 각인되어 있다. 그 분기점은 1738년 5월 24일에 있었던 올더스게이트의 체험이었다고 하겠다. 우리는 그것을 웨슬리의 ‘복음적 회심’이라고 부른다. 웨슬리 부흥운동의 사회개혁활동에 대한 탐구를 위해 그 배경이 되는 이 올더스게이트의 체험과 그것의 사회적인 의미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가. 올더스게이트(Aldersgate) 체험과 그 의미


조지아에서 좌절을 안고 영국에 되돌아 온 웨슬리는 당황과 심한 마음의 갈등 속에 있었다. 그는 곧바로 조지아에서 모라비안 선교사로 일했고 지금은 영국에 머물고 있는 뵐러(Peter Boehler)를 만나 신앙의 문제에 대해 대화를 나누게 되었는데, 3개월 이상 지속된 대화의 핵심은 이신득의에 관한 것이었다. 그동안 웨슬리는 로우의 두 실천적인 논문들을 모델로 하여 2년 동안 행한 설교는 자기 자신과 교구민들에게 아무런 향상도 이루게 하지 못했다는 사실로 인해 가중된 좌절과 절망 중에 있었다. 그는 사바나에서의 자신의 설교를 “허공을 치는 것”이었다고 묘사 했다. 이처럼 그의 표현대로 무거운 멍에 아래 있는 그러한 상황에서 웨슬리는 한 거룩한 사람(뵐러)을 통해 “믿으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는다”는 이신득의에 대해 듣게 되었던 것이다. 웨슬리에게 그것은 “새로운 복음”이었다. 그는 자신의 윤리적 기독교의 스승이었던 로우에게 편지를 통해 왜 자기에게 그러한 발견에로 인도하지 않았는지를 알려 달라고 하면서, “나는 당신이 내게 이것에 대해 강조하지 않는 참된 이유가 당신 자신이 그것을 소유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 아닌지를 편견 없이 깊이 숙고해 보시기를 하나님의 자비에 의해 간청합니다”라고 했다. 이후로 18세기 영국의 이 두 거인 간에는 결코 치유될 수 없는 틈새가 벌어졌다. 웨슬리는 그 동안 로우와 그의 윤리적 기독교의 제자였다. 그러나 이제는 뵐러와의 만남 속에서 새로운 스승을 얻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웨슬리는 1738년 5월 24일에 올더스게이트에서 “이상하게 마음이 뜨거워지는” 체험을 하게 되었다. 웨슬리는 그 상황에 대해 그의 저널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저녁에 나는 별로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올더스게이트 거리에 있는 한 종교 모임에 갔다. 거기에서 한 사람이 루터의 로마서 서문을 읽고 있었다. 9시 15분전 쯤 그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하나님께서 마음에 역사하사 일으키시는 변화를 말할 때에 나는 내 마음이 이상하게도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내가 구원을 위해 오직 그리스도만을 신뢰한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나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구원하셨다는 확신이 나에게 주어졌다.



이것은 웨슬리에게 있어 궁극적인 의미를 지니는 전환점이었다. 웨슬리 학자들 간에 이 올더스게이트의 중요성에 관해 의견이 다양한 것은 사실이다. 이 사건을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평가절하하며 심지어는 해로운 것이었다는 극단적인 견해를 피력하는 이들도 있다. 피이트(Maximin Piette)와 얼린(R. Denny Urlin)이 그 대표자들인데, 두 사람 모두 옥스포드에서의 윤리적 각성이 참된 회심이었다고 주장한다. 올더스게이트를 존중히 여기지마는 그것을 여러 회심들 중의 하나로 보려는 견해도 있다. 아우틀러와 슈미트가 그 대표자들이다. 리(Umphrey Lee) 같은 사람은 올더스게이트 사건을 “한 종교적인 사람의 종교적 헌신의 더 높은 단계로의 회심”으로 볼 것을 제안한다. 그러나 셀(George Croft Cell)은 웨슬레의 1738년을 중심으로 하는 이중 연대기를 지적함으로써 올더스게이트를 웨슬리에게 있어 궁극적인 의미를 지닌 전환점으로 이해한다.


물론 웨슬리가 후기에 올더스게이트 이전의 상태에 대해 의견을 수정하여 그 이전에도 종의 믿음은 지니고 있었고 종의 믿음을 지닌 자도 구원의 상태에 있는 것이라고 한 경우가 있기는 했으나 그것이 올더스게이트의 중요성을 약화시킨다고 볼 수는 없다. 올더스게이트는 분명히 웨슬리에게 있어 노력의 새로운 확대가 아니라 근본적인 방향의 전환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웨슬리의 다른 종교적인 위기들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유일한 체험이었다. 웨슬리 자신은 올더스게이트가 자신을 종의 신분에서 아들의 신분에로, 율법 아래에서 은혜 아래로, 그리고 거의 그리스도인(Almost Christian)에서 온전한 그리스도인(Altogether Christian)으로 전환시킨 것으로 피력하였다. 이러한 면에서 올더스게이트 체험은 웨슬리에게 있어 궁극적인 의미를 지닌 전환점이었다는 셀의 주장은 전적으로 타당하다 하겠다.


이 체험 전에 웨슬리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모델을 추종하는 자였다. 그는 금식, 성경 읽기, 훈련된 삶 등의 신비적인 감각체험의 수단들을 통해 구원에 도달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올더스게이트의 마음이 뜨거워지는 체험은 구원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획득되는 것이라는 결론에로 그를 인도했다. 이 전환점이 갖는 중요성은 웨슬리 한 개인의 차원을 뛰어 넘는다. 그것은 웨슬리 부흥운동의 원동력이 되어 메도디즘을 낳았고, 렉키의 말처럼 영국 사회를 혁신시킨 “신기원적인 사건”이 되었기 때문이다.



나. 올더스게이트 체험의 사회적 의미



웨슬리가 올더스게이트에 이르기까지 모라비안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은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올더스게이트는 웨슬리를 정적주의적인 모라비안으로 만들지 않았다. 오히려 올더스게이트는 웨슬리의 사회적인 관심을 더 강화시켰다. 올더스게이트를 통하여 웨슬리는 마치 따스함과 빛이 태양의 서로 불가분적인 부분인 것처럼 선행은 살아 있는 믿음의 분리할 수 없는 부분이며 참된 믿음은 거룩한 열매를 맺는다는 점을 루터보다 더 분명하게 인식하게 되었다. 이에 대해 케인즈( Earle E. Cairns)는 다음과 같이 잘 묘사하고 있다.


이 올더스케잇의 체험은 웨슬리에게 있어 바울의 다메섹 도상의 체험과 유사한 것이었다. 그것은 웨슬리에게 삶의 출발점이 되었다. 이신득의 교리는 그의 중요한 교리체계가 될 뿐 아니라 그를 사회적 특성의 일들로 인도해간 근본적인 힘이다…. 웨슬리는 또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그를 의롭게 하고 죄로부터 자유롭게 해주신 분이 그의 마음을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충만케 했다는 것을 믿었다. 하나님에 대한 이러한 사랑은 사람들에 대한 사랑으로 입증되어야 하는데 그 사랑은 사람들의 유익을 위한 행동을 낳게 된다. 그에게 있어 하나님 사랑과 인간 사랑에는 구분이 있을 수 없었다. 인간에 대한 이러한 사랑은 인간에게는 유익을, 하나님께는 영광을 가져올 사회적인 활동을 통해 최상으로 표현될 수 있다.



이처럼 웨슬리는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갈 5:6)이라는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사회봉사가 기독교의 불가결한 부분이라는 점을 확신케 되었던 것이다. 그러기에 웨슬리는 회심 후에 기대감을 갖고 찾아간 모라비안들에게 사회윤리적인 부분에서는 실망을 하게 되었고 끝내 그들과 결별할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의 신앙지상주의, 정숙주의, 그리고 율법폐기론적인 경향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벱(E. Douglas Bebb)은 만일 웨슬리가 모라비안들과 결별하지 않고 그들과 같이 머물러 있었다면 그 단체는 윤리적으로 무력함을 지니게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다음과 같이 피력하였다.



웨슬리가 모라비안들과 함께 머무르며 전가된 의의 교리와 의의 무용성 교리, 그리고 더 해로운 ‘은총의 수단’에 대한 교리를 공유했었다면, 그의 사회적인 사역의 주된 후원자요 추진력의 하나인 강력한 윤리적인 의식을 지속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사회적인 불의에 대한 강한 반대나 사회의 희생자들에 대한 동정, 의에 대한 탄원과 하나님 면전에서의 소유물에 대한 개인의 책임성에 대한 부단한 증거를 지니고 성서에 자신을 몰두시킬 수 없었을 것이다.



웨슬리가 올더스게이트 전에도 사회봉사에 열심이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앞에서 살펴 본대로 그는 전에도 교도소를 방문하여 수감자들을 도왔고 그들의 자녀들을 위해 학교도 준비하여 교육을 지원하고, 병든 자를 보살폈다. 그리고 조지아에서는 흑인노예들과 백인 노예들을 보고 도울 길을 열심히 모색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올더스게이트 전과 후에는 분명한 차이점이 있다. 내용에서는 변한 것이 없다 하겠으나 그 기초와 동기가 근본적으로 뒤바꿔 졌다. 올더스게이트 이전의 그의 사회봉사는 그 자신의 영혼 구원에 대한 깊은 관심에서 나왔다. 그러나 올더스게이트 후에는 그는 새로운 사랑의 힘에 의해 동기를 부여 받게 되었고 그리스도 안에서 알게 된 사랑으로 인해 자신을 남에게 주게 되었다. 이러한 동기의 차이점은 웨슬리의 사회적 관심의 질과 내용에 영향을 미쳤다. 거기에는 여전히 의무적인 요소가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자유에 기반을 둔 것으로 바뀌었다. 힌슨은 “사회윤리가 이기적인 터에 기반을 둘 때 에너지는 감소되고 세상변혁의 힘이 결핍된다”고 했다. 올더스게이트를 통해 웨슬리의 사회관심은 이기적인 관점에서 율법적이지 않고 무욕적이며 이타적인 것으로 바뀌었고 거기에서 세상변혁의 힘이 강화되게 되었던 것이다.


올더스게이트 사건이 웨슬리의 삶과 사역에 미친 효력을 중요시하지 않는 사람들은 웨슬리의 영적 개혁운동은 물론 그의 사회 개혁운동의 “전과 후”를 조화시키는데 어려움을 갖게 된다. 올더스게이트 사건은 분명히 그의 사회 의식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그 영향력은 사회적인 문제들과 씨름하는 광범위한 프로그램을 통해 커다란 결실들을 보게 했다. 올더스게이트는 때로 웨슬리에게 그의 다양한 종교적 유산들 곧 고교회의 경건, 청교도의 영적인 것과 육체적인 필요에 대한 민감성, 모라비안의 믿음에의 의존성, 그리고 테일러와 로우의 윤리적인 긴박성 들로 인해 상당한 혼동을 일으키게 했을 것 같아 보인다. 그러나 결과는 수직과 수평의 조화, 다시 말해 하나님에 대한 봉사와 세상에 대한 봉사의 균형이었다.



 


3. 존 웨슬리와 복음주의 부흥 운동자들



웨슬리의 부흥운동과 사회 개혁활동에는 당시 복음주의 부흥운동자들의 조력과 협력 및 활약이 큰 힘이 되었다. 웨슬리와 이들과의 관계 및 그들의 활동에 대한 간략한 고찰은 웨슬리 부흥운동과 사회개혁 활동 탐구를 위한 전이해로 도움이 될 것이다.


가. 휫필드(George Whitefield)와 챨스 웨슬리(Charles Wesley)



18세기의 부흥운동은 그 전조와 선구자들을 지니고 있었다. 예를 들어 몇몇 뛰어난 인물들의 회심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영국을 영적인 깊은 잠에서 일깨우도록 현저한 도구로 사용한 인물은 웨슬리 형제(John and Charles)와 휫필드였다. 물론 풀-콘너(E. J. Pool-Connor )가 “가장 현저하게 사용된 인물은 웨슬리와 휫필드였다”고 한 말은 맞는 말이겠지만 찰스 웨슬리의 역할 역시 가볍게 볼 수는 없다. 존 웨슬리는 조직가와 관리자로, 휫필드는 웅변가적인 예언자로, 그리고 찰스 웨슬리는 찬송가 작가로 18세기 영국의 대부흥운동에 공헌을 하였기에 그들은 어느 누구도 이 역사적인 운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들임에 틀림 없다.


이 삼총사는 모두가 옥스포드의 신성클럽 멤버들이었다. 신성클럽 시절 존 웨슬리와 그보다 11살 아래인 휫필드와의 관계는 어느 정도 선생과 학생의 관계였다. 그러나 회심체험에서는 휫필드가 웨슬리 형제보다 3년 앞섰고(1735년), 야외설교를 통한 부흥운동도 휫필드에게서 출발되었다. 머뭇거리는 웨슬리를 야외설교의 장으로 강력하게 이끈 것도 휫필드였다. 이렇게 시작된 1739년의 야외설교를 통한 전도가 크게 성공하면서 그들은 모두 함께 동역자로 긴밀한 조화를 이루어 부흥운동을 전개했다.


부흥운동에서의 존 웨슬리와 휫필드의 특성을 분석해 보면 여러 면에서 대조적이다. 예를 들어 웨슬리는 훌륭한 조직능력을 지니고 있었던 반면에 휫필드에게는 그것이 결여 되어 있었다. 양자 간에는 설교 스타일에서도 대조적이었다. 웨슬리의 설교는 명료하고 간결하며 절제력이 있었고, 감정보다는 이성과 양심에다 복음을 제시하는 스타일이었다. 반면에 휫필드는 연극적인 재능과 웅변술 그리고 강력하고 호소력 있는 목소리의 소유자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청중들의 감정을 고조시키고 주의력을 집중시키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롬 8:28) 하나님의 섭리 하에 이러한 양자의 대조적인 은사가 부흥운동에 조화를 이루어 선을 이루었다. 풀-콘너는 이 두 사람의 대조적인 면을 사도시대의 베드로와 바울, 그리고 종교개혁시대의 루터와 칼빈에 빗대 그러한 상이한 성격이 협력을 이루어 사도시대와 종교개혁 시대의 대부흥을 일으켰다고 하였다.


아마도 존 웨슬리와 휫필드 간의 가장 두드러진 차이점은 한 사람은 알미니우스주의(Arminian)이고 한 사람은 칼빈주의자(Calvinist)였다는 점일 것이다. 이 면에서 양자 간에 갈등과 논쟁이 발생했고 끝내 두 진영은 그 문제로 분열케 되었다. 그러나 양자 간에 교리적인 분열의 벽은 넘어서지 못했지만 감정적인 분열에까지는 이르지 않았다. 휫필드는 1739년 8월에 웨슬리에게 보내는 편지에 여전히 “존경하며 사랑하는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썼고, 사람들에게 “주님은 그가 가는 곳마다 나보다 우선권을 취하도록 허락하셨다”고 그에 대한 존경을 표했다. 웨슬리는 휫필드에 대해 “그는 평화와 사랑의 향기만 발하는 사람이다…. 그 앞에는 편협이 자리할 수 없다. 그가 가는 곳마다 편협이 머리를 감춘다”고 했다. 그들 간의 긴장 관계는 1749년에 휫필드가 칼빈주의적 메도디스트 신도회에 대한 공적 지도권을 포기하면서 완전히 해소되었다. 휫필드는 앞에서도 말했듯이 설교 능력에 비해 조직력이 부족했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이 목회자나 조직가로는 적절치 못하며 자신의 주된 은사가 여행전도에 있음을 깨닫고 영국, 스코틀랜드, 그리고 아메리카를 왕복 순회전도하는 전도자로 나섰고 양들을 웨슬리에게 양도했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휫필드는 씨앗을 퍼트리는 자였고 웨슬리는 알곡을 모아 저장하는 능력의 소유자였다. 이 두 사람의 그러한 대조적인 은사가 부흥운동에 있어 서로를 보완해 결실을 풍부하게 했다고 본다.


웨슬리와 휫필드의 관계는 장례식을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 1770년 9월 30일에 57세의 나이로 휫필드가 세상을 떠났을 때 웨슬리는 휫필드의 유언에 따라 그의 장례식 설교를 주관했다. 휫필드는 자신이 런던의 채플에 뭍히고 그 곁에 웨슬리가 함께 안장되기를 소망했다고 한다.


찰스 웨슬리가 존 웨슬리 운동에 미친 도움은 좀 더 직접적이다. 찰스는 존 웨슬리가 가장 깊은 애정을 지니고 있었던 인물로, 비록 메도디스트 부흥운동의 지휘자는 아니었지만 그 운동 초기에 있어서는 존 웨슬리 못지않게 중요한 공헌을 하였다. 오벌톤(Overton)은 찰스가 휫필드 보다도 더 효과적이고 영속적인 공헌을 했다고 평한다. 이 평가는 좀 과장된 면이 있다 할지라도 찬송가 작가로만 아니라 설교자로서, 그리고 존 웨슬리와 휫필드 간의 중재자로서의 찰스의 역할과 공헌이 우리의 생각 이상으로 무시할 수 없다는 사실은 이미 엘리떻-빈스를 통해 확인한 바다.


찰스는 존 웨슬리에 비해 강건치 못한 체질을 지니고 있어 육신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압박을 받으면 조울병적인 성향을 나타내는 경향이 있었던 듯하다. 그러나 회심 후 그는 존 웨슬리처럼 폭도들이나 반대자들 앞에서 담대했고 신도회나 야외설교에서 존에 못지 않은 활동력을 보이며 1750년대까지는 부흥운동에 크게 조력했다. 하지만 결혼 후에는 순회설교에 열심을 내지 않다가 1756년에는 형의 권면도 물리치고 순회설교를 아예 중단했는데 아마도 설교자들과의 유쾌하지 못한 충돌을 피하려는 것이 주원인이었던 것 같다.


찰스의 메도디즘에 대한 더 큰 공헌은 찬송가를 통해서 였다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우드의 말처럼 그의 찬송가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수 많은 심금을 어루만져 주었다. 랙은 그의 찬송가가 초기 메도디스트들에 차지하는 중요성에 대해 말하길, “초기 메도디스트들은 설교나 웨슬리의 팜프렛들을 통해서 못지 않게 찰스의 찬송가를 통해 가르침과 인도를 받았다”고 하였다. 그 찬송들로부터 그들은 신학과 심지어 문화를 흡수했다는 것이다. 그의 찬송가는 고전적인 교육을 받고 영국 국교에 정통한 성직자가 평범하고 교육이 불충분하거나 문맹인 대중들을 위해 그들에게 맞춰 만들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와 중요성이 더 크다. 이 점에서 그는 왓츠(Isaac Watts)를 닮았다 하겠다.


찰스가 1788년 3월 29일에 8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을 때 그의 죽음은 존 웨슬리에게 큰 슬픔이 되었다. 그 소식을 접한 존 웨슬리는 그의 50년 간의 사역에서 처음으로 개인적인 감정을 억제치 못하고 강단에 앉아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안고 울음을 터트렸다고 한다. 당시 존 웨슬리는 사랑받는 인물이 되어 영국 도처에 많은 친구들이 있었지만, 벌리아미의 말처럼 “누구도 초기에 모든 시련과 위험에 함께 했던 따뜻한 마음을 지닌 동생 찰스의 자리를 대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 복음주의자들(Evangelicals)



부흥운동 초기에 부흥운동 세력은 크게 두 갈래로 구분되었다. 한 편은 점차 분파(sect)의 입장에로 흘러 가고 있었다면, 다른 쪽은 압제를 당함에도 불구하고 국교회에 충실한 측이었다. 점차로 분파적 경향이 있는 측에게는 메도디스트라는 명칭이 붙게 되었고, 국교 내에 있는 부흥운동파는 복음주의자(Evangelicals)로 불리우게 되었다. 그러나 한 특정인을 어느 계열에 놓을 것인가 하는 문제는 그리 단순한 일은 아니다. 발레인(G. R. Balleine)은 교구 체계에 대한 입장에 따라 구분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에 의하면 “메도디스트들은 세계가 그의 교구라는 입장인 반면 복음주의자들에게는 교구가 세계였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복음주의자들은 순회전도 체계를 인정하지 않았고 심지어 순회하는 자들도 대부분 그들의 교구 사역을 최고의 표준으로 삼았다.


그러나 복음주의자들을 웨슬리와 분리하여 생각할 수는 없다. 복음주의자들의 운동이 직접 메도디스트들에게서 유래된 것은 아니라 해도 메도디스트들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다. 복음주의자들의 부흥운동은 국교 내에 회심을 경험한 상당수의 성직자들에 의해 시작되었는데 그들 중 대다수가 웨슬리와 휫필드와의 접촉을 통해 회심을 하게 되었다. 게다가 웨슬리와 휫필드가 그 운동의 방법에 대한 주요한 대표자요 공표자(publicist)이며 그들이 그 활동력을 고취시켰고 어느 정도는 하나로 통일 시켰기 때문이다.


이 두 지류들은 활약 무대상 각각의 특징이 있다. 메도디스트 부흥운동은 초기에 영국의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발생했고 복음주의 부흥운동은 후기에 상류층들 가운데 확대 되었다. 이러한 면에서 그들의 역할에도 서로의 특징이 있었다. 앞에서 존 웨슬리와 휫필드의 상이성이 서로 협력하여 더 큰 결과를 이끌어 낼 수 있었다고 말한 바 있듯이 여기 두 지류의 부흥운동의 경우에도 그러한 견해가 가능하다고 본다. 케언즈(Cairns)는 이 부흥운동들이 19세기 영국의 사회개혁에 공헌한 바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웨슬리와 휫필드 아래에서 영국 하류층 사람들의 지지를 얻었던 부흥운동은 19세기 사회개혁을 위한 병력을 제공했고, 18세기 말경 영국 국교 안에서 일어났던 복음주의적인 부흥운동은 많은 성직자들과 부유하고 영향력이 있으며 중상층에 속하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함으로 19세기 사회개혁의 지도자들에 대한 공헌을 했다.


적합한 평가라 하겠다. 영국의 개혁에 있어 메도디스트 부흥운동은 아래로부터 위로, 복음주의파 부흥운동은 위로부터 아래로 영향력을 발휘함으로 결국은 협력하여 선을 이룰 수 있었다. 이들은 부흥운동에 있어서도 상호 협력적이었지만, 특히 사회개혁 활동에 있어 웨슬레는 복음주의파가 낳은 상류층의 사회개혁자들을 통해 그가 뿌린 씨앗의 열매를 거두었다. 이 면에 관해서는 IV-V장에서 더 자세히 고찰하게 될 것이다.


복음주의파의 중요한 인물들로는 로메인(William Romaine), 벤(Henry Venn), 그림쇼우(William Grimshaw), 플레쳐(John Fletcher), 뉴톤(John Newton), 밀너( Milner), 그리고 시므온(Charles Simeon)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이들 성직자들 보다 이 시기의 개혁에서 더 영향력이 있었고 웨슬리의 사회개혁 활동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 인물들은 “크라팜 섹트” (Clapham Sect) 멤버들이다.


그들은 모두가 평신도들로 대부분 국교회 사람들이었으나 열렬한 복음주의자였기에 내적으로는 프로테스탄트였다. 그들 중에는 사회적으로 막중한 영향력이 있는 인도 총독, 동인도회사 사장, 식민지 책임자, 의회의원, 대은행장, 자선 사업가, 그리고 정치평론가들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가 자신들의 직업을 거룩한 “소명”으로 간주했고, 자신을 하나님 나라의 청지기요 전도자로 생각했다. 그리하여 자신이 고백한 믿음을 실제로 적용하는 일에 놀라울 정도로 솔선했다. 그들 중에는 국교도, 비국교도, 퀘이커 교도도 있었고 보수주의자, 자유주의자 중립파들도 있었으나 복음주의적인 기독교 그리고 “그리스도의 윤리를 개인적, 사회적, 정치적, 국가적, 그리고 초국가적인 일에 적용시키는 열정”이 그들을 하나로 연결해 주었다. 이들의 그러한 역할과 중요성에 대해 케언즈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거룩한 마을”은 1738년부터 1834년까지의 기간 동안에 사회개혁과 종교적인 열심의 가장 영향력 있는 중심지였다…. 이 경건한 사람들은 사회상황의 개선을 위해 기독교의 윤리를 국가의 일들에 적용시키려 노력하였다. 이러한 방법으로 그들은 그들의 개혁 사역을 충실히 후원하는 메도디스트…그리고 기타 다른 개신교파 등의 비국교도들과 자신들이 평신도로 있는 국교 사이에 가교 역할을 하였다.



이처럼 복음주의 부흥 운동자들은 웨슬리의 부흥운동 전개와 사회개혁 활동에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든든한 성이요 활력소였다.


지금까지 살펴 본 바를 정리하면, 웨슬리의 부흥운동이 전개되기 전후의 영국은 산업혁명의 여파로 발생된 많은 사회적인 문제들로 인하여 모든 면에 질병으로 만연되어 있었고 사회 전반에 걸쳐 개혁되어야 할 과제들이 편만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기존의 영국 국교는 세속화되고 부패되어 그 시대와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 줄 능력을 상실한 상태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웨슬리의 올더스게이트 복음적인 회심은 영국 사회를 새롭게 할 중대한 계기가 되었다. 웨슬리의 복음적 회심은 웨슬리의 자기 구원을 위한 이기적이고 율법주의적인 사회봉사를 사랑에 중심을 둔 사회적인 관심으로 전환케 했는데, 이로써 웨슬리의 세상변혁의 힘이 강화되었다.


그러나 웨슬리의 부흥운동은 혼자 만의 힘으로 전개된 것은 아니었다. 휫필드, 찰스 웨슬리, 그리고 ‘크라팜 섹트’를 중심으로 한 복음주의자들의 동역과 후원이 웨슬리 부흥운동의 추력에 힘을 배가시켰다. 특히 후기의 사회개혁 활동에 있어 ‘크라팜 섹트’ 멤버들은 웨슬리의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세력들이었다.


웨슬리가 올더스게이트의 복음적 회심으로 부흥운동을 전개하게 되기는 했지만 웨슬리의 그러한 부흥운동의 힘을 형성케 한 기독교적인 운동들이 그 배후에 있었다. 웨슬리의 가계에 내적 유산으로 내려 오던 청교도적 요소, 그리고 웨슬리를 회심으로 이끄는 직접적인 요인이 되었던 독일, 특히 모라비안 경건주의, 그리고 메도디스트들의 훈련을 위한 조직에 선례를 제공해 준 고교회 전통의 ‘종교 단체’ 조직이 웨슬리 부흥운동의 동인을 이루었다. 당시 이신론적 합리주의가 만들어 놓은 회의주의도 웨슬리 부흥운동의 출현을 필연화 했다.







존 웨슬리의 언약예배

(John Wesley's Covenant Service)


존 웨슬리는 초창기의 감리교 생활의 중요한 부분으로서 언약 예배를 만들었다. 그

의 일기는 웨슬리가 언약을 맺음에 많은 관심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1747년

성탄절에 "우리들 자신을 하나님에게 전적으로 드리고 그리고 매 순간 우리의 언약을 새롭

게 하여 주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셔야만 한다고 주장한다"라고 쓰고 있다. 첫 번 감리교

언약 예배는 1755년 8월 11일에 시행되었다. 그의 일기에 따르면 언약 예배는 때가 정해지

지 않고 다양한 경우에 드려졌다. 그러나 그의 말년에 이르러 언약 예배는 새해 첫날이나

새해 첫 주일에 거행되었다. 웨슬리가 언약 예배를 구상함에 있어 장로교 목사인 조셉 알레

인(Joseph Alleine)의 작품들(An Alarm to the Unconverted와 Directions for Believers

Covenanting with God)을 주로 참조하였다. 그러나 웨슬리는 무엇보다도 성경 말씀이 언약

예배 형성의 기초가 된다고 하였다. 그는 신명기 26:17-18과 예레미야 31:31-34 등의 구절들

로 언약 예배를 정당화하였다.

웨슬리는 언약 예배의 의미와 목적을 깨우쳐주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다. 처음으

로 이 예배를 드릴 때 웨슬리는 참여하는 사람들을 가르치기 위해 여러 날을 소비하였다.

웨슬리는 오직 특별한 표를 가진 사람들만 참여하는 것을 허락했는데, 이 예배는 언제나 성

찬식으로 결론을 맺었기 때문이었다. 웨슬리 시절에는 사람들이 전적으로 하나님께 헌신하

며 살도록 권면하는 조셉 알레인의 작품 가운데 긴 부분을 읽는 것이 예배의 한 부분을 이

루고 있었다. 그 뒤를 이어 오늘날 우리들이 사용하는 것과 유사한 언약 기도가 있었다.

오늘날 드려지는 예배 형태는 그 당시 영국 감리교회에서 사용되던 것을 다소 수정

한 것이다. 웨슬리가 죽고 난 후, 언약 예배는 많은 부분이 개정되었다. 그러나 언약 기도

자체는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변하지 않았다. 제시된 언약 예배 순서는 영국 감

리교회의 언약 예배로부터 대부분 인용된 것이다. 이 예배는 새해 첫 주일 예배로 사용되도

록 설계된 것이다. 그러나 새해 첫 날, 첫 시간에 드려도 무방할 것이다. 아래에 있는 설명

을 위한 머리말은 예배 시작 전에 전체 회중에게 말로 전해주어도 좋으며 주보 앞부분에 실

어도 좋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르심을 받은 우리 크리스챤들의 삶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으로

죄로부터 구원함을 받고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성별되어진 그런 삶입니다. 우리의 주님

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중재자가 되시는 가운데 주님께서 자신의 피로 봉하신 새로운 언약으

로 들어갈 수 있도록 허락을 받은 우리는 크리스챤의 삶으로 들어섰으며 그 삶은 영원히 계

속될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언약은 하나님의 약속으로 우리 신앙의 완성자이시며 조물주이신 예수 그리스

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선포하신 모든 것을 우리들 안에서 그리고 우리들을 통하여 하나님께

서 성취하시겠다고 하는 약속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선하심을 알고 날마다 우리들 삶 가

운데 하나님의 은혜가 있음을 증거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이 아직도 계속

되고 있음을 확신합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는 더 이상 우리 자신들을 위해 살지 않는다고 맹세를 합니다. 그 대

신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위해 자신을 주셨으며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이룰 수 있도록

주님을 섬기라고 우리를 부르셨던 주님을 향해 살겠다고 맹세합니다.

때때로, 우리는 성별의 서약을 새롭게 합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우리의 조상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를 하나님에게 묶어 놓은 언약을 기쁘고 엄숙하게 새롭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분

명히 합니다.

이제 하나님의 자비와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을 기억하면서 우리 자신들을 성령의 빛에 의

해 비추어 반성합시다. 그래서 우리가 어디에서 실패했으며 신앙과 실천에서 부족한 점이

무엇인가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이며, 이 언약이 의미하는 모든 것을 고려한다면, 우리 자신

을 하나님께 새롭게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 예배 순서 -


전주

예배로 부름

집례: 우리의 아버지되시는 하나님과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은총과

평화가 임하기를 기원합니다.

회중: 아멘

집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 언약을 세우시는 하나님을 경배합시다.

회중: 신령과 진정으로 우리가 주님 앞에 나옵니다.

찬송 23장, 만 입이 내게 있으면

경배의 기도

집례: 창조주이시며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께 경배를 드립니다. 하나님께서는 끊임없

이 우리를 지키시고 보살펴 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한없는 사랑

으로 우리를 사랑해 주십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께 영광을 드립니다.

회중: 주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찬양합니다. 오직 주님만이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집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에 감사하며 영광을 드립니다. 예수께서는 부유

하시나 우리를 위해 가난하게 되셨고, 아무 죄도 없으시나 마치 우리 인간

들처럼 모든 점에서 질고를 지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선한 일을 행하셨고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을 받아들

여 죽으셨고 또 영원히 살아계십니다. 주님께서는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열어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 우편에 영광스러운 모

습으로 앉아계시며 우리를 심판하시기 위해 다시 오실 것입니다.

회중: 주님은 그리스도이시며 영광의 왕이십니다.

집례: 우리 모두에게 생명을 주시는 성령과 교통하며 기쁨으로 영광을 드립니다. 성

령을 통해 우리 모두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났으며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성령의 증거가 우리를 굳게 하며 성령의 지혜로 우리

를 가르치시고 성령의 능력이 우리들로 하여금 할 수 있게 합니다. 성령께

서 우리가 생각하거나 바라는 것 이상으로 우리를 위해 역사하십니다.

회중: 우리 모두가 성령을 찬양합니다.

조용한 기도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

성경말씀(구약) 신명기 8:1-10, 전도서 3:1-13, 이사야 49:1-10 중 택일

시편 교독 시편 8편, 90:1-12, 117편 중 하나를 회중과 함께 번갈아 읽는다.

성경말씀(신약) 요한계시록 21:1-7, 골로새서 2:1-7, 에베소서 3:1-11 중 택일

복음서 봉독 마태복음 25:31-46, 마태복음 9:14-17, 누가복음 14:16-24 중 택일

설교

찬송 415장, 주 없이 살 수 없네

죄의 고백

집례: 우리들의 죄를 겸손히 하나님께 고백을 합니다. 거룻하신 하나님, 주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생명의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우

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배우는 데 너무 느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기

에 실패했고, 십자가를 지는 것도 마지못해 했음을 부끄러움을 가지고 고

백합니다.

회중: 주님,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우리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집례: 우리의 드리는 예배가 빈약했음을 고백합니다. 우리는 은총의 수단과 성도의

교제를 무시했고 그리스도에 대해 증거하기를 주저했으며 봉사의 책임을

회피하고 하나님께서 은사로 주신 청지기 직분을 제대로 완수하지 못했음

을 고백합니다.

회중: 주님,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우리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집례: 우리 각자 모두가 하나님께 고백할 것들을 조용한 기도 가운데 내놓으시기

바랍니다.

(잠시 모두 조용한 기도를 드린다) (조용한 기도를 마친 후)

집례: 주님, 우리 모두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회중: 거룩하신 하나님, 주님의 굳건한 사랑으로 우리를 품어주시사 우리에게

자비를 내려 주시옵소서. 주님의 풍성한 자비로 우리의 죄를 지워주시

고 올바르지 못한 것을 철저히 제하여 주시고 우리의 모든 죄로부터 깨

끗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사랑의 하나님, 우리 속에 깨끗한 마음을 창

조하시어 새롭고 바른 영혼을 간직하게 하시옵소서.

집례: 이제 우리를 위해 주어진 말씀은 이것입니다.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죄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라"(요한일서 1:5-9)

회중: 아멘.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의 기도 (다함께)

하나님 아버지, 주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새로운 언약을 위한 중재자로 세워주

심을 감사드립니다. 충만한 믿음으로 더 가까이 갈 수 있도록 은총을 베풀어 주

시고 영언한 언약을 맺어나가도록 인도하시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

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언약

집례: 구약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특별히 택하셔서 언약을 맺고 율법을

지키게 하셨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죽음과 부활을 통

해 그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새 언약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언약 가

운데 있으며 그 이름을 지키고 있습니다. 이 언약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그

리스도 안에서의 새 생명을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또한 우리

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서 살겠다고 맹세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이 자리에서 하나님과 우리를 묶는 이 언약을 새롭

게 하려고 합니다.

(회중은 모두 일어선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과 언약을 맺으심을 기억하

며 그리스도의 멍에를 맵시다. 그리스도의 멍에를 매는 것은 그리스도가

인도하는 대로 따라가며 그리스도만이 오직 우리의 보답임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는 많은 봉사를 원하십니다. 쉬운 것도 있고 어려운 것도 있으며

어떤 것은 우리를 칭찬하게 하는 것이기도 하고 어떤 것은 책망받게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어떤 것은 우리의 이해관계 때문에 하기를 원하는 것도

있고 어떤 것은 자연스럽지 않게 보이는 것도 있습니다. 때로는 그리스도

를 기쁘시게 하면서 우리 자신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으며, 때로는 우리

자신을 부정하지 않고서는 그리스도를 기쁘게 해 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

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강하게 하시고 이 모든 일들을 감당할 수 있

는 힘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이제 이 언약을 우리 자신의 것으로 만듭시다.

하나님의 은총에 의지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면서 우리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립시다.

회중: 저 자신을 완전히 하나님께 드립니다.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 가운데 저의

자리를 일러 지시하시옵소서. 하나님을 위해 고난받게 하시고 저가 해

야할 일을 주시옵소서. 저에게 많은 사명을 주시거나 아니면 하나님께

서 다른 사람을 쓰실 때는 제가 양보하게 하소서. 저를 앞으로 나가게

하시거나 저로 하여금 비천하게 하시옵소서. 저를 부유하게 하시거나

가난하게 살게 하시옵소서. 저 자신과 제가 가진 모든 것을 자유롭게

주님께 드립니다. 이제 거룩하신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성령께서 저의 주인이십니다. 하나님께서 항상 저와 함께 하시

며 저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확실히 그렇습니다. 이 언약이 이 땅에서

영원히 계속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회중은 자리에 앉는다)

목회 기도

성도의 교제

봉헌

성찬식 (성찬식을 생략할 경우는 찬송과 축도로 예배를 마친다)


성찬의 초대

집례: 하나님을 사랑하고 자신의 죄를 뉘우쳐 이웃과 화해하며 기쁨과 평안을 누리

며 살기 를 원하는 여러분들을 하나님의 거룩한 식탁에 초대합니다. 모두

감사와 기쁨으로 나오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와 함께 하시기

를 바랍니다.

회중: 우리의 마음을 높이 들어 하나님께 드립니다.

집례: 구원의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시다.

회중: 이는 주님의 백성들이 마땅히 해야 할 바입니다.


감사 기도 (집례자)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저희들에게 생명을 주심을 감

사드립니다. 주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사 저희를 구원하시려고 고난과 죽

음을 당하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 일으키시사 부활하게 하심으

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셨고 또한 그리스도를 통해 죽은 자들의 부활을 약속하

셨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흩어져 있던 많은 낟알들이 부숴져 가루가 된 후 성찬

의 떡이 만들어지듯 저희들 하나 하나가 그리스도 안에서 죽어 주님의 영광을 드러

내는 알곡이 되게 하시옵소서. 그리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할 때까지 주

님의 교회를 섬기게 하시옵소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를 흘리시고 보배로운 몸을 주심을 거듭 감사드립니다. 영

광이 주님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성결의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주사 저희를 구속하시려고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게 하셨습니다. 자비하신 주님, 그리스도께서 온 세상의 죄를 위하여 완

전한 속죄 제물이 되시고 성례를 정하셔서 저희에게 명하사 주님께서 강림하실 때

까지 주님의 귀하신 죽음을 기념하라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

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

를 기념하라 하셨습니다. 식후에 또한 이와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신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기억하면

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저희 자신을 거룩하고 산 제물로 찬양과 감사 가운데 드

립니다. 저희 모두가 성찬에 참여하여 그리스도께서 저희를 위해 죽으셨고 부활하

셨으며 감사와 믿음 가운데 양육하고 계심을 기억하게 하시옵소서. 아멘.


성령 임재의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성령께서 이 자리에 모인 저희들 위에 임하시고 주님의 거룩한

식탁 위에 놓인 떡과 포도주 위에 임하시옵소서. 이 성찬에 함께 하셔서 하늘의 떡

과 구원의 잔을 먹고 마시는 저희가 그리스도의 새로운 몸을 입어 세상을 변화시키

는 힘이 되게 하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최후 승리를 거두며 다시 오실 때까

지, 그리고 저희 모두가 천국 잔치에 참여할 때까지, 성령께서 저희에게 임하셔서

저희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게 하시며, 저희들 서로 서로가 하나 되게 하시고, 온

교회가 하나가 되게 하시옵소서.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께 모든 존귀와 영광이 영

원토록 있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성찬 분급

(집례자는 떡을 들고 둘로 쪼개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떡이 하나이듯이, 여기 모인 우리도 하나입니다. 이렇게 떡이 잘라지는 것은 우

리에게 나누어 주시기 위해 그리스도의 몸이 부숴지는 것입니다.

(떡을 내려 놓은 후, 잔을 들고)

우리가 감사를 드린 이 잔은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에게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성찬은 먼저 목회자(들)가 먹고 마신 후, 성찬상 앞에 서서 회중이 앞으로 걸어나

와 받아먹게 한다. 떡은 집례자가 떼어주며 회중은 이를 받아 포도주에 적셔 입에

넣는다. 성찬 분급을 할 때는 다음과 같이 말을 한다. "이는 하늘의 떡, 예수 그리

스도입니다", "이는 구원의 피 ,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또는 "이는 당신을 위해 죽

으신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이는 당신을 위해 흘리신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성찬 후 기도 (다같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자비하신 하나님의 은덕으로 주님의 겸비한 종인 저

희들이 이 성례를 행하였사오니, 우리가 드리는 찬양과 감사를 받으시옵소서.

저희들이 죄와 허물이 많아 하나님께 기도드리기를 감당할 수 없으나 감히 간

구하오니 우리의 마땅한 이 의무와 봉사를 받아 주시옵소서. 저희의 공로를 헤

아리지 마시고 저희의 죄를 사하여 주시옵소서. 정성으로 주님께 기도하오니 하

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피의 공로로 저희 모두가 죄사함과 모

든 은사를 얻게 하시옵소서. 거룩하신 주님, 또한 여기서 저희의 영혼과 몸을

주님께 당연하고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립니다. 겸손히 간구하옵기는, 이 성찬을

받은 저희들이 능히 주님의 은총과 복을 충만히 받게 하옵소서. 죽음을 이기시

고 부활하셔서 저희에게 생명과 기쁨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저희들

모두가 감격과 뜨거운 마음으로 새 시대를 열어가게 하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

를 몸으로 체험하고 영접한 저희들이 세상을 향한 증거자가 되어 사랑과 정의

와 은혜가 풍성한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청지기들이 되게 하시옵소서. 모든

존귀와 영광을 전능하신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께 영원히 돌려 보냅

니다. 아멘.


찬송 372장, 나 맡은 본분은

축도

집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원하는 사람들과 언약을 세우신 하나님께서 우리

들과 항상 함께 하시기를 간구합니다.

회중: 아멘.

집례: 십자가 위에서 희생하심으로 새 언약을 확실하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

리에게 평화를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회중: 아멘.

집례: 성령께서 우리 모두의 삶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인도하시기를 간구합니다.

회중: 아멘.

집례: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기 위해 평강 중에 세상으로 나가시기 바랍니다.

회중: 아멘.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후주



[참고]

이 예배는 신년에 드리는 것이 이상적이지만, 교회창립기념주일에도 사용될 수 있다. 이 경

우에는 성경말씀을 예레미야 31:31-35, 히브리서 12:22-29와 요한복음 15:1-8 혹은 마태복음

27-30을 사용하는 것이 좋다. 이 언약예배를 드리기 전에 웨슬리가 했던 것처럼 오랜 기간

교육하는 것을 따르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대강절기와 성탄절기에 회중들이 세례언약을 새

롭게 하도록 준비시키는 것은 매우 의미있는 일이다. 사전에 준비하여 회중들의 성숙하고

열렬한 참여가 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성찬식을 생략할 수도 있지만, 우리의 세례가 의

미하는 것이 성찬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사명을 새롭게 한다는 것과 깊게 연관을 맺

고 있다는 점에서 특별한 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첫 찬송과 경배의 기도, 복음서 봉독, 마지막 찬송과 축도 시에 회중이 일어서는 것이 좋다.





웨슬리와 런던-브리스톨


1739년 4월 2일 영국 서부의 도시 브리스톨 부근에 있는 한 들판에서 존 웨슬리라는 30대 중반 영국 국교회 사제의 야외 전도 집회가 열렸다. 청중들은 대부분 인근 광산 광부나 공장-부두 노동자들. 정해놓고 교회에 갈 수 없는 형편의 사람들이었다. 바야흐로 산업혁명이 시작되어 사람들이 농촌을 떠나 도시로 몰려들었고 이들이 사회의 하층부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들 노동 계층은 가난으로 고통을 겪었고 신앙 생활에서도 소외되어 있었다.


옥스퍼드 대학 출신 존 웨슬리(1703~1791)는 그러나 이들과 사뭇 다른 사람이었다. 청중들은 품위있는 고급 영어를 사용하는 사제가 교회에서 중산층을 상대로 목회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하층민을 찾아와 설교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웨슬리는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직접 종교적 체험을 통해 얻은 진리를 전했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은 하나님과의 직접 만남을 통해 구원을 얻는데 있으며 그리스도인들은 완전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 그것은 믿음과 성령(Holy Spirit)의 능력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라도, 가능한 모든 수단과 방법으로 선을 행하라 는 것이었다.


웨슬리는 가톨릭적 전통을 중시하는 고교회파(high church)가 지배하던 당시 영국 국교회에 불만을 갖고 있었다. 사제가 된 후에도 영국과 미국을 오가며 10년 가까이 방황하던 그는 1738년 5월 24일 런던의 한 종교 모임에서 루터의 글을 읽다가 믿음과 성령을 통해서만 구원을 얻는다 는 것을 확신하게 됐다. 그날 웨슬리는 일기에 이렇게 썼다.


"오후 8시45분쯤 나는 가슴이 이상하게 따뜻해져 오는 것을 느꼈다. 나는 내가 그리스도를 믿으며,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나의 죄를 없애주었고 나를 삶과 죽음의 법칙에서 구했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러나 영국 국교회는 개인의 직접적인 종교 체험을 강조하는 웨슬리를 좋아하지 않았다. 기존 교회들에게서 따돌림 당해 낙담해있는 웨슬리에게 비슷한 생각을 지닌 한 동료가 소외계층에 눈을 돌릴 것을 권했다. 웨슬리는 런던을 떠나 당시 신앙심이 가장 약한 지역으로 알려졌던 영국 서부로 향했다. 개신교 역사의 한 장을 장식하게 되는 웨슬리의 유명한 야외 목회(field preaching)은 이렇게 해서 시작됐다.


브리스톨 시내에는 260년 전 웨슬리의 활동 모습을 보여주는 세계 최초의 감리교 예배당 `뉴 룸(New Room)'이 있다. 웨슬리가 서부 지역에 도착한지 한달 만에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 집회 장소로 만든 곳이다. 새로운 신자를 얻는 데는 야외 목회가 효과가 컸지만 그렇게 얻어진 신자들의 신앙 생활을 위해서는 역시 예배당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정표가 워낙 잘 되어 있어 `뉴 룸'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유럽 각지를 돌아다니며 보아 온 웅장하고 화려한 교회 건물들에 비해 `뉴 룸'은 너무나도 작고 소박했다. 꼭꼭 채워 앉아도 1-2층을 합해 150명 정도가 겨우 들어갈 수 있는 정도였고 내부는 나무로 만들어져 아무런 장식도 없다. 웨슬리가 사용했다는 강단이 오른쪽에 놓여 있었는데 나무판을 다듬지도 않은 것이었다.


강단 오른쪽 뒤로 나 있는 계단을 올라가자 웨슬리와 그가 파견한 순회 설교자들이 사용했다는 `목회자의 방'이 있었다. 이곳에는 웨슬리가 입던 사제복을 비롯해서 초기 감리교의 활동을 잘 보여주는 유물들이 전시돼 있다. 1m50 남짓한 작은 키였던 웨슬리가 사용하던 방의 문이 유난히 낮아 이채로왔다. `뉴 룸'의 앞 마당에는 말을 탄 채 오른손에 성경을 들고 사람들을 바라보는 웨슬리의 동상이 서 있었다. 웨슬리는 기존 교회 밖의 소외계층을 전도하기 위해 평생토록 영국 전역을 누볐다. 누군가의 계산에 의하면 웨슬리는 약 22만5000마일 이나 전도 여행을 했고 설교 회수도 약 4만회에 이르렀다고 한다.


`뉴 룸'의 뒤쪽에는 웨슬리의 동생인 찰스 웨슬리(1707~1788)의 동상이 있다. 역시 옥스퍼드 대학을 졸업하고 영국 국교회 사제가 됐던 찰스는 형의 가장 확실한 조력자였다. 그는 유능한 설교자이기도 했지만 특히 찬송가 작가로 유명해 생전에 4500편 이상을 발표했고 3000여 편의 원고를 남겼다. 웨슬리파의 집회에서 찰스가 만든 찬송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브리스톨을 비롯한 지방에서의 성공에 힘을 얻은 웨슬리는 다시 런던으로 돌아왔다. 그는 런던 동부 시티로드의 한 버려진 주물공장을 사들여 수선해서 활동 본거지로 삼았고 이 곳은 `파운드리 채플(Foundry Chapel)'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웨슬리는 1778년 이 곳에 새롭고 산뜻한 예배당을 세웠고 새 교회는 `뉴 채플 (New Chapel)'이라고 불렸다. 이제 나이가 들어 설교 여행을 할 수 없게 된 웨슬리는 그 옆에 집을 지어 여생을 보냈다.


`뉴 채플'은 오늘날 `웨슬리 채플'이란 이름으로 전세계 감리교 신자들의 순례지가 되어 있다. 건물 지하에는 `감리교 박물관'이 들어서 있고 뒤쪽 뜰에는 웨슬리의 무덤이 자리잡고 있다. 이곳에서 얼마 멀지 않은 런던 박물관 앞에는 1738년 웨슬리의 개심을 기념하는 거대한 동판이 세워져 있어 이 일대는 감리교와 관련된 기념물을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곳이다. `뉴 룸'과 마찬가지로 `웨슬리 채플' 역시 밖에서 볼 때는 교회인지 알기 어려울 정도로 평범한 건물이었다. 그 흔한 십자가 하나 세워져 있지 않아서 정원의 웨슬리 동상과 안내판이 아니었다면 그냥 지나칠 뻔 했다. 문을 열고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입구에 꽂혀 있는 안내문 중에는 한글로 된 것도 있어 한국인 순례자도 꽤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예배당 내부는 세월이 흐르면서 하나씩 만들어진 스테인드 글라스와 장식으로 `뉴 룸' 보다는 한층 세련된 모습이었지만 여전히 소박함과 경건함이 물씬 느껴졌다. 마침 강단 앞 오르간에서 연주자가 연습을 하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 예배석에 혼자 앉아 그 연주를 들으면서 이곳을 찾는 한국인 감리교 신자들은 예배당과 웨슬리 무덤의 소박함을 보고 무엇을 생각할까 궁금해졌다.

(영국=조선일보 이선민 기자)



웨슬리의 기독론


1. 머리말

2. 기독론과 구원론과의 관계

3. 신(神)이며 인간(人間)이신 예수 그리스도

4. 성육하신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5. 속죄와 화해를 위한 제사장의 역할을 완성한 그리스도

6. 성화의 표준과 모델로서의 그리스도

7. 예언자와 왕으로서의 그리스도

8. 맺음말 - 구원자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1. 머리말

기독론은 그리스도의 인격(person)과 사역(work)에 대한 신학적 반성이다. 즉 과거에 그리스도가 누구였으며, 현재 누구이며, 미래에 누구일 것인가?, 그리고 과거에 무엇을 했으며, 현재는 무엇을 하며, 미래에는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해 연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기독교의 중심이며 기독교 신학의 핵심이다.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서 구원을 얻을 수가 없다는 것이 기독교의 본질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물음은 신학자는 물론 일반 신도들에게도 물리칠 수 없는 물음이 되었다. 초대 교회의 신학은 대부분 삼위일체 하나님의 문제와 더불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성과 인성에 대한 문제가 주로 다루어졌다. 그리스도에 대한 물음은 초대 교회 시대의 물음으로 끝나지 않고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도 물리칠 수 없는 물음으로 남아 있다. 특히 오늘을 사는 감리교인으로서 우리는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묻고 대답할 수 있는지? 그리고 감리교인의 기독론적 물음은 무엇을 강조하고 무엇을 지향하는지 그리고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는지? 살펴봄으로써 감리교인의 기독관을 보다 확고히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물음을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는 감리교회의 창시자인 존 웨슬리의 기독론을 연구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웨슬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연구함으로써 감리교인들의 기독관의 정체성을 밝힐 수가 있을 것이며, 더 나아가 오늘의 시대에 우리의 신앙을 보다 돈독하게 함은 물론 우리의 구원을 확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신학의 핵심을 인간의 구원에 둔 웨슬리의 기독론에 대한 고찰은 우리 감리교인에게는 물론 모든 기독교인들과 그 외에 구원을 희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매우 중대하고 가치있는 작업이 될 것이다.


그러나 웨슬리는 그의 기독론에 대한 논의를 조직신학적으로 다룬 저서를 남기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그의 기독론을 연구하는데 어려움이 많다. 다만 그의 '25개조 종교강령'과 그의 설교들("우리의 의이신 주님"(The Lord Our Righteousness), "그리스도의 오심의 목적"(The End of Christ's Coming), "영적 예배"(Spiritual Worship)), 그리고 신약성서 주해 및 일기, 논문 등에 기독론적 진술이 단편적으로 나타나고 있지만, 이런 진술조차도 웨슬리의 고유한 기독론적 진술이라기보다는 전통적 기독론을 에큐메니칼한 방향에서 정리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웨슬리의 기독론은 고대 기독교의 기독론과 영국교회의 '39개조 종교강령', 그리고 일반화된 개신교 정통주의 기독론을 따르고 있다. 일반적으로 감리교 조직신학자들은 기독론에 있어서 개신교 정통주의 기독론을 담습하고 있다. 그리고 웨슬리의 기독론은 추상적 또는 사변적 기독론이라기 보다는 구원의 문제를 실제적으로 다룬 현실적 기독론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2. 기독론과 구원론과의 관계


인간의 구원을 위한 관심은 불가분리적으로 기독론과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연결은 성서는 물론 기독교 역사의 전통에서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웨슬리에게 있어서 기독론과 구원론과의 연결은 1738년 5월 24일 올더스케이트의 한 작은 집회에서 경험되어진다. 웨슬리는 구원은 도덕적인 선을 통하여 얻을 수 있는 것으로 믿었으나 조지아주 선교를 통하여 그러한 믿음과 희망을 접게 되었다. 우리가 알고있듯이 웨슬리는 올더스케이트 집회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을 통하여 구원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러나 웨슬리는 이 경험 이전에 이미 지식을 통하여 믿음에 의한 구원을 확실히 알고 있었다. 웨슬리는 이 경험 후에 구원을 위한 모든 인간적인 노력을 무시하였고 구원을 위해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의지해야된다고 확신하였다. 웨슬리의 기독론에서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가 구세주라는 것이다. 웨슬리는 구원론을 설명하기 위해서 적절한 기독론을 주장하여, 시종일관되게 기독론과 구원론을 연결시킨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의 사역을 이루신다. 이미 여러 곳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웨슬리는 구원론을 중심으로 하는 신학을 하고 있다. 모든 기독론이 실제로 구원론적인 관심에서 시작하듯이 웨슬리의 구원론적 신학은 기독론에서 출발한다. 웨슬리의 신학은 구원을 말하면서 성화를 강조한다. 구원과 성화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웨슬리의 성화론은 "그리스도 중심의 삶"이다. 웨슬리가 말하는 성화는 신자는 매 순간마다 주를 의지하는 그리스도 중심의 생활에서만 가능하다. 성화는 그리스도와 끊임없는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생활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포시스(Forsyth)는 웨슬리의 완전사상은 기독론적 판단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구원론과 성화론이 웨슬리 신학의 중심과제라면 기독론은 그 핵심이 된다.


3. 신(神)이며 인간(人間)이신 예수 그리스도


웨슬리의 기독론은 성서적 구원에 대한 그의 해석과 그 자신의 구원의 경험에 따라 해석되었다. 성서와 경험에 따라 해석된 그의 기독론은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는 신(神)이며 인간(人間)이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구세주가 되기 위해서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그 자신이 완전한 사람이며 신이어야 한다. 웨슬리는 구원을 위한 그리스도의 자격은 그의 인간성과 신성에 있다고 믿었다.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전통적인 웨슬리의 관점은 그리스도는 완전한 사람이었으며 완전한 신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이러한 웨슬리의 관점은 그리스도는 구원자라는 그의 확신과 주장에서 나온 것이다. 그에게 있어 삶의 변화를 가져온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었다. 이것은 그의 경험이었으며 성서는 그의 경험을 지원하였다. "믿음에 의한 칭의"(Justification by Faith)라는 설교에서 웨슬리는 구원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가능하다는 것을 피력하였다. 웨슬리는 그의 "신약성서 주해"에서 그리스도는 '완전한 인간'인 것과 같이 '완전한 신'이었다고 분명하게 선언하였다.


웨슬리는 예수는 그 자신이 선포한 자, 즉 신-인이었다고 믿는 사람들의 전통에 서 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인간으로서 간주하고 있는 공관복음서들의 주장과 그리스도의 신성을 주장하고 있는 제4복음서와 일치하고 있다. 웨슬리는 칼게돈 신조와 영국교회의 39개조 종교강령을 고수한다. 웨슬리는 원래 예수 그리스도는 말씀이신 아들로서 성령에 의하여 인간이 되시어 신성과 인성을 가지셨다는 전통적인 기독론인 니케아-칼케돈(Nicaea-Chalcedon)의 기독론을 절대적으로 수용하여, 예수의 완전한 신성과 인성을 주장했다. 예수는 완전한 신성을 소유하여서 그가 하나님의 속성을 가진 것도 사실이지만, 그가 완전한 인성을 소유하여서 인간의 모든 속성을 가진 것도 사실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소유한 이 두개의 완전한 본성은 하나의 품격으로 나누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그는 참 하나님이시고 참 인간이다.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에의 결합에 대한 웨슬리의 입장은 1563년에 채택된 영국교회의 39개조 종교강령의 제2조를 미감리교회에 그대로 적용한 사실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말씀 혹은 하나님의 아들은 인간이 되었다. 아버지의 말씀인 아들은 아버지의 영원성으로부터 나왔으며, 진실로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며 아버지와 한 본질을 가지고 계시다. 이분은 축복을 받은 처녀의 몸을 통하여 인간의 본성을 취하였다. 그런 결과로 두 개의 완전한 본성, 곧 신성과 인성이 한 인격 안에 함께 연결되어 있으나, 이들은 서로 나누어지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이분은 실제로 신이며, 실제로 인간이신, 한 분이신 그리스도이시다. 그는 진실로 고통을 당하였으며, 십자가에 달리셨으며, 죽어 장사되었고, 우리들과 그의 아버지를 화해시키며, 우리의 원죄뿐만 아니라 우리의 실제적인 죄를 위하여 희생당하셨다.


제2조는 그리스도는 분리될 수 없는 두개의 완전한 본성, 곧 신성과 인성이 하나의 인격으로 결합되어 있어, 그리스도는 한 사람의 그리스도가 참 하나님이며 참 사람임을 표명하고 있다.


웨슬리는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 I and the Father are one) 라는 요한복음 10:30을 주해하면서 사벨리우스(Sabellius)나 아리우스(Arius)의 설을 반박하고 예수와 아버지는 의지의 일치만이 아니라 기능에 따라 합일된 본성으로서 예수는 본성에 있어서 아버지와 일치하며(아리우스설 배격), 예수와 하나님은 인격적으로 복수성을 드러낸다고 보았다(사벨리우스 배격).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 중 어느 쪽을 강조했느냐에 따라서 신학적 색깔이 드러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웨슬리는 어느 쪽을 강조했을까? 일반적으로 웨슬리의 신학에서는 예수의 인성보다는 신성의 역할을 더 강조한 것처럼 보인다. 사실 웨슬리는 『신약성서 주해』에서 '주(主)', '우리의 주', '그리스도'라는 명칭을 예수라는 명칭에 비하여 훨씬 많이 사용하였다. 웨슬리 자신도 "나의 주제는 그리스도의 신성에 관하여 강하고 명백하게 언급하도록 나를 유도하였으며" 예수 그리스도가 속죄의 직무를 수행하셨을 때의 주도권은 어디까지나 신성에 속한 것이라고 말하였다. 아네트도 웨슬리가 하나님과 사람사이의 중보자의 역할을 강조함으로 예수의 신성을 더 중요하게 보았다고 분석하였다.


그리스도의 인성보다 신성에 대한 웨슬리의 강조는 조화와 균형이란 차원에서 문제가 된다. 왜냐하면 중보자로서 신성을 중요시하면 속죄주로서 그리스도의 인성은 약화될 위험성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웨슬리의 기독론을 말할 때 주의해야 할 것은 웨슬리가 인성을 덜 강조한다고 해서 그의 기독론을 가현론적 기독론(Decetic Christology) 또는 알렉산드리아형의 기독론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웨슬리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인성은 명백하게 주장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육신 안에 완전한 신성과 동시에 인간의 모든 속성 전체를 포괄하는 완전한 인간성을 소유하고 있다. 아들이 취하는 인성은 고전적 기독론과 마찬가지로 웨슬리에 있어서 보편적인 인간성이다. 보편적인 인간성을 아들이신 하나님이 취하셨기 때문에 그 보편적 인간성은 이런 의미에서 아들이신 하나님이 인간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는 웨슬리가 신성에 치중한다고 해서 그가 인성을 경시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속단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의 신성이 아무리 중요해도 예수의 인성이 배제되면 속죄도 구원도 성화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웨슬리는 이 점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완전한 인간성을 소유하여 인간의 모든 속성을 따라 사신 예수 그리스도를 인간 성화의 표준과 모델로 받아들인 것이다.


웨슬리 신학에서 그리스도의 인성은 인간성화의 모델로서 강조되고 있다. 웨슬리의 성화론은 기독론과 관계가 있다. 그의 성화론은 그리스도를 우리의 도덕생활의 모범자로 보도록 한다. 웨슬의 성화론을 통해서 나타나는 웨슬리의 기독론은 알렉산드리 형 기독론이라기보다는 안디옥 형의 기독론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웨슬리의 기독론은 안디옥 형이냐 또는 알렉산드리아 형이냐에 대한 논의로 일본의 웨슬리 전문 신학자 노로요시오의 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노로요시오는 웨슬리의 기독론은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Cyrillus)보다는 안디옥의 네스토리우스(Nestorius)에 더 가깝다고 본다. 노로요시오에 의하면 교리사 가운데서 모범자로서 예수를 가장 잘 부각시킨 사람은 웨슬리였다. 루터나 칼빈도 엄밀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인간성을 신학적으로 부각시키지 못했다. 웨슬리의 그리스도인의 완전론에 의하면 예수는 철저하게 인간이었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와 같이 사랑에 넘친 사람이 될 수 있다. 만약 완전한 인간 그리스도를 주체적인 존재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인간 그리스도로부터 배운다는 생각을 할 수 없다. 노로요시오는 웨슬리의 기독론을 웨슬리의 그리스도인의 완전의 교리와 관련시키면서 웨슬리는 안디옥 형의 기독론에 근접하여 있다고 주장하였다. 왜냐하면 알렉산드리아형의 기독론에서는 웨슬리의 그리스도인의 완전론과 같은 교리가 발생을 할 가능성이 없기 때문이다.


노로요시오는 웨슬리의 기독론이 안디옥 형에 더 근접하고 있다는 주장을 웨슬리가 안디옥파 출신인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였던 크리소스톰(Chrysostom)을 사랑하고 존경했다는 점에서 이끌어 내고 있다. 크리스스톰의 설교는 교리적이기 보다는 그리스도인의 품성을 기르는 일을 목적으로 했다. 웨슬리는 이런 점에서 같은 관심을 가졌던 크리스스톰을 사랑하고 존경하였다. 노로요시오는 웨슬리가 크리스스톰을 사랑하고 존경한 것은 안디옥형의 기독론과 무관하지 않았다고 보고, 웨슬리의 기독론은 알렉산드리아형 보다는 안디옥 형에 더 가깝다고 결론을 내린다. 또한 웨슬리의 아르미니우스주의(Arminianism)도 안디옥 형의 기독론을 지향했다고 볼 수 있다. 실존의 세계 속에서 실존의 본질적인 모습을 지니고 끝까지 살아온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보면서 우리는 인간의 본질적인 바람직한 자세를 지니게 된다. 자신의 자유의지를 통해서 인간화의 길을 가는 것을 표방하는 아르미니우스주의는 안디옥 형의 기독론을 지향하고 있음을 본다.


웨슬리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성격을 그 사역의 맥락에서도 탐구하였다. 웨슬리는 동정녀 탄생의 교리와 그리스도의 육체적 죽음과 부활 그리고 승천을 예수 그리스도가 참으로 신(神)이며 참으로 인간(人間)이심을 보여주는 사건으로 믿는다. 다음에 논의되겠지만 예수의 동정녀의 탄생의 사건은 예수의 신성과 인성이 결합하는 성육신의 자리가 된다. 부활사건 또한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게하는 위대한 증거가 된다. 부활사건은 예수의 교훈이 신적인 교훈이었음을 확실히 증거한다. 뿐만 아니라 부활사건은 하나님의 승리를 의미한다. 웨슬리의 승천에 관한 교훈도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확신하는데 좋은 자료가 된다. 웨슬리는 그리스도께서 그의 인간성을 가지고 하늘로 승천하셨다는 전통적인 교리를 가르친다. 웨슬리에게 신학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은 승천이라는 행위라기보다는 승천하신 후의 그리스도의 상태인 것이다.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면서세상과 교회를 다스릴 권리를 가지고 계신다. 웨슬리에게 있어서 승천하여 하나님 보좌 오른쪽에 앉으신 그리스도가 강조되어있다. 성육신으로 우리의 경험을 자기의 경험으로 삼는 그리스도께서 이제 하나님 보좌 오른쪽에 앉아서 우리를 위한 중보의 역할을 담당하시면서 교회와 세상을 지배하시는 지배자이심을 강조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웨슬리의 기독론이 그리스도의 인성보다 신성을 더 강조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그의 기독론이 가현설이나 알렉산드리아형의 기독론이라고 규정하지 않았다. 웨슬리가 인성보다 신성을 더 강조하는 것처럼 보인 것은 그리스도의 인격에 의한 통일로서 그리스도의 인성이 언제나 신성의 주도 아래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인간 예수는 언제나 하나님에게 전적으로 복종하였기 때문이다. 웨슬리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로서 예수의 사건은 그 의미에 있어서 하나님의 행위이며 이 하나님의 행위는 현재의 신자와의 교제를 중심으로 삼고 있다. 그러므로 웨슬리가 하나님 보좌 오른 편에 좌정하셔서 오늘 신자들과의 교제를 가지고 계신 그리스도를 그의 기독론에서 강조하는 것은 지상에서의 인간의 경험을 자기의 것으로서 삼고 또한 우리를 사랑하기 위하여 구속의 업적을 성취하신 그 하나님이 현재 신자들과 마주 향해 계시면서 우리와 오늘도 교제하시고 계시기 때문이다.


4. 성육하신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구원은 인간이 은혜 안에서 성화에까지 성장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영원으로부터 그의 독생자들 보내셔서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신 것은 그리스도가 성육신해서 이루어야 할 유일한 과제를 말하는 것이다. 웨슬리는 이사야 53장을 통하여 성육하신 그리스도를 진술한다. 웨슬리에게 성육신은 종으로 오셔서 죄인들을 위하여 고통을 받으시고 그들을 대신하여 하나님 전에 제물이 되시는 것을 의미한다. 성육신은 육체를 취하는 신의 행위, 즉 신성이 나눌 수 없는 합일 안에서 인간성과 결합하는 것이다. 칼빈은 하나님은 인간의 아들이 되시기 위해 동정녀의 태반을 택하셨지만 그는 이런 행위를 함으로써 자신의 본질을 전혀 손상시키지 않고 성육하셨다고 보았다. 성육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에서 시작되기 때문에 동정녀 탄생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인정하는 기본신앙이 된다. 따라서 동정녀 탄생의 교리는 성육신의 장이 된다. 동정녀 탄생설의 의도는 예수의 완전한 인간성과 신성을 인정하는데 있다. 웨슬리는 동정녀 탄생의 교리를 인정하였는데 이는 이 교리가 예수의 완전한 인간성과 신성을 주장하는 일에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웨슬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신성과 인성을 위하여 성육신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노로요시오는 웨슬리가 생각하고 있었던 성육신의 필연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먼저 웨슬리는 예정론을 거부하고, 하나님이 인간의 자유의지에 따른 의향과 행위가 현실화 되기 전에 인간의 의향과 행위를 미리 알고 계신다는 예지론(豫知, foreknowledge)을 주장한다. 예지론은 인간의 구원의 유무는 인간 자신의 자유의지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본다. 예지론은 하나님은 아담의 자유를 침범하지 않는 범위에서 인간이 범죄하지 않도록 노력하지만 최종적으로 아담이 어떻게 행동하는가는 하나님도 예측할 수 없었다고 본다. 그러나 아담의 범죄를 알고 계셨던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 당시의 상태보다 더 행복한 상황으로 들어가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의 성육신을 생각하고 계셨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생각은 하나님의 창조와 아담의 범죄 이전에 이미 하나님에게 주어져 있었다. 웨슬리는 예지론에 의거하여 하나님은 아담의 타락이 인간을 보다 더 행복하게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아담의 범죄를 저지하지 않았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대한 생각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세상을 창조하시기 이전에 장만해 놓은 계획에 따라 하나님은 당신의 형상대로 인류의 시조를 창조하셨다. 또한 하나님은 이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는 것을 허락하신다. 그것은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값없이 베푸는 은혜를 받아 영원토록 이전보다 더 깨끗하고, 더 행복하게 되게 하기 위함이다."


왜 웨슬리는 성육신이 온 인류를 보다 더 행복한 상태에 이르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노로요시오가 바르게 대답한바와 같이 웨슬리는 그리스도 성육신의 방법을 통해서 인간이 구원을 얻게 됨으로, 인간은 자신의 연약함과 무가치함을 알고 인간 본래적인 오만함으로부터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타락이전의 아담보다 더 행복하고 더 거룩하게 만들기 위하여 창조와 타락과 성육신을 결의하고 예지하고 허락하신 것이다.


5. 속죄와 화해를 위한 제사장의 역할을 완성한 그리스도


웨슬리의 기독론은 속죄와 화해를 위해 제사장의 역할을 담당하신 그리스도를 강조하고 있다. 완전한 신과 완전한 인간으로 성육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중보자'로서 인간과 하나님을 화해하는 일에 참여한다. 화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이루어졌다. 따라서 십자가 위에서의 구속 사건은 기독교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해를 주도하기 위해 내재하셨다. 그리스도는 중보자로서 십자가 위에서 화해를 위한 제사장의 기능을 완성하신 분이다. 인간의 구원은 예수의 활동과 인격을 통하여 성취된다. 그리스도의 죽음 없이 구원의 희망이 없다.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신 사건은 하나님께서 구원을 제공하기 위한 최후, 최고, 궁극적 노력이다. 역사적인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 부활을 통해서 우리들의 구원이 확정된다. 하나님의 거룩하고 정의로운 분노는 불순종을 통하여 타락한 인간에 의하여 유래되어진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분노 진정시킬 수 없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의 분노를 진정시킬 수 있었다. 하나님의 분노를 진정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죽음이었다.




속죄의 필요성


속죄론은 웨슬리의 구원 신학에서 중추적이며 필수적인 주제가 된다. 웨슬리는 속죄론은 기독교와 자연신교를 구별하는 표준이라고 말하였다. 아담으로부터 전가된 인간의 죄는 속죄를 필요로 한다. 웨슬리에 속죄론에 의하면, 첫째로, 인간의 공로를 통해서 속죄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인간은 속죄를 지불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중보적 공로가 인간 구원에 필수불가결이다. 들째로 속죄의 동기를 일으키는 하나님의 본성인 거룩한 사랑은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에서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본성인 사랑에서 속죄가 출발하기 때문이다. 셋째로, 그리스도의 희생을 죄인을 구원하기 위한 유일한 근거로 간주한다. 그리스도의 속죄사업이 구원(의인과 중생)의 유일한 기초가 된다. 여기서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웨슬리의 속죄관과 윌리암 로(William Law)의 속죄관에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로(Law)는 극기의 생활 또는 십자가지는 생활 통해서 속죄 관념을 해결하려 하였다. 그러나 웨슬리는 로의 속죄 관념을 거부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와 희생이 배제된 속죄 관념으로는 해결될 수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와 희생을 통한 속죄 관념만을 주장하였다. 웨슬리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화해한 구원받은 자의 대표자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과 화해할 수 은총을 마련하셨다. 인간에게는 하나님과의 화해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의 아들의 희생을 통하여 화해의 길을 마련하셨다. 웨슬리는 "그리스도의 피를 통한다면 어떠한 죄인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과 화해할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다. 윌리암즈(Colin W. Williams)는 웨슬리가 인간이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밝히기 위하여 원죄론을 강조한 것과 같이,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할 수 있는 은총을 희생적으로 준비하셨다는 사실을 밝히기 위하여 속죄를 강조하였다고 말하였다.


웨슬리의 속죄론에서 제사장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직능(The priestly office)은 속죄론의 중심이 된다. 전통적 구분에 따라 인간으로서의 그리스도가 하나님께 복종한 것은 수동적 복종과 적극적 복종이 있다. 수동적 복종은 인류가 마땅히 받아야만 하는 하나님의 진노에 따른 형벌을 그리스도가 온 인류 대신하여 받는 그러한 복종이다. 적극적 복종은 온 인류로서는 할 수 없는 일, 곧 하나님이 기뻐하실만한 의로운 행위를 그리스도가 온 인류를 대신하여 행하셨다는 의미로서의 복종이다. 웨슬리가 궁극적으로 받아들인 것은 그리스도의 수동적 복종이지 적극적 복종이 아니다. 웨슬리는 온 인류가 마땅히 받아야 할 형벌을 그리스도가 대신 받는 다는 점에 집중시켜 이해한다. 웨슬리 속죄론의 중점은 하나님 자신이 우리를 위해 희생을 치루시고 인간의 죄를 용서받게 한다는 것이다. 웨슬리는 인간으로서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진노의 형벌을 받아들인 것이 하나님 자신이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속죄의 행위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행위로 이해되어진다. 그런 까닭에 웨슬리의 속죄론은 철저한 아가페의 사랑의 동기로 관철되어진다.


웨슬리는 신자가 현재 누리고 있는 하나님과의 사귐 속에서 그의 속죄론을 이해하고 있다.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사귐을 형성함에 있어서 용서해서는 안될 것을 용서하기 위해 하나님은 괴로워하게 되는데 그 괴로움을 하나님 자신이 담당하게 된다는 일이 속죄론의 표현인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 자신이 죽음을 경험하고 또한 괴로움을 짊어지셨다는 사상이 웨슬리의 속죄론에 존재한다고 볼 때, 우리는 결코 그가 하나님의 본질에 관계되는 죽음이나 괴로움을 주장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자신의 영원한 본질가운데서 일어나는 사태가 아니고 시간안에서 역사하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사태이다. 그러므로 웨슬리에 있어서 하나님의 사랑이라든가 고뇌라든가 하는 것은 관계 개념이지 본질 개념이 아니다.



속죄의 보편성


웨슬리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속죄 사건은 모든 인간들의 구원을 위한 사건이었다. 웨슬리는 "이 속전은 … 온 인류를 다 구원하고도 남음이 있다"고 하였다. 구원의 가능성이 모든 인간에게 있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에게는 저항이 가능한 은혜(resistible grace)였다. 따라서 웨슬리에게 속죄의 보편성은 존재하지만, 누구든지 최종적으로 모두 구원을 얻게 된다는 보편적 구원설(Universal salvation)은 존재하지 않는다. 웨슬리의 속죄의 보편성은 칼빈주의의 제한된 속죄 사상을 반대한다. 웨슬리는 그리스도는 일정한 수효의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충분한 하나님의 형벌을 받고 그 사람들만을 구원하기에 충분한 피를 십자가 위에서 흘리셨다는 주장에 정면으로 반대한다. 웨슬리는 칼빈주의의 이중 예정론(double predestination))을 공격한다. 이중 예정론은 인간은 자신의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결정을 변경하거나 인간에게 구원을 선택할 자유의지의 존재를 용납하지 않는다.


1740년 9월 25일 웨슬리에게 보낸 편지에서 조지 휫필드(Georgr Whitefeild)는 믿는 자가 이 세상에서 죄없는 완전(sinless perfection)에 도달할 수 있다고는 믿지 않으며, 인간들은 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인간 안에 내주하는 죄로 고통을 받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는 죽음에 이를 때까지 하나님의 불가항력의 은혜(irresistible grace)에 눌려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최후까지 견인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휫필드의 주장은 이중 예정론의 제한된 속죄론에 해당하는 것이다. 휫필드는 존 웨슬리의 설교 "자유로운 은총에 대답하는 서신에서" (free Letter to the Rev. Me. John Wesley: in answer to his sermon, entitled 'Free Grace, 1740년 12월 24일)에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선택한 사람들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셨고, 그 나머지 사람들은 아담의 범죄 이후 죄 가운데 계속 걸어가도록 하나님에 의하여 남겨진 결과로 당연히 받아야 할 형벌인 영원의 죽음을 맞게 된다고 하였다. 이 편지의 내용으로 보아 휫필드는 이중 예정론자였음이 틀림이 없다.


웨슬리는 1740년 브리스톨(Bristol)에서 행한 '자유로운 은혜'라는 설교에서 예정론의 반대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 첫째로, 예정론은 모든 설교들을 무용지물로 만든다. 설교를 듣건 말건 선택된 자는 구원을 얻기 때문에 설교와 함게 교회의 모든 사업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둘째로, 예정론은 성화를 망쳐 놓을 경향이 있다. 예정론은 미래의 보상인 희망과 형벌을 받을 자가 이미 결정되었기에 사람들은 성화를 위해 힘쓰지 않는다. 예정론 변호자들은 사람이 자기의 영원의 삶과 죽음 어느 편으로 결정되었는지 현재로서는 알지 못하기 때문에 역시 성화를 구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셋째로, 예정론은 종교적인 위로와 기독교가 주는 행복을 소멸할 경향이 있다. 하나님께 버림받았다고 믿는 사람들 그리고 버림받을까 의심하여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경향을 갖게 된다. 넷째로, 예정론은 선행을 위한 우리의 열심을 소멸할 경향이 있다. 사람들을 위로해도 소용히 없다. 왜냐하면 이미 그들은 선악을 행하기 이전에 영원히 멸망해 버린 자들로 결정되었기 때문에 그들이 멸망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섯째로, 예정론은 기독교의 계시의 불필요성을 조장한다. 이미 구원이 결정되었다면 계시는 있으나 마나 하다. 그러므로 웨슬리는 예정론은 계시 그 자체가 모순된 것이라는 것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에 계시는 불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예정론자들이 선호하는 구절들 - 예를 들어, "내가 야곱을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도다."(롬 9:13)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였다"(엡 1:4) - 들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란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롬 10:12)란 말씀과 모순된다. 따라서 예정론자들은 성서를 모순 된 것으로 만들어서 사람들이 계시에 거는 기대를 감축시킨다고 웨슬리는 주장한다. 마지막으로, 예정론은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다. 왜냐하면 예정론은 우리의 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선자로 만들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예수는 성서 여러 곳에서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내가 왔노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마 11:28). 이미 구원에서 제외되도록 결정된 자에게 이 말을 예수가 했다면 예수는 웃기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웨슬리가 이토록 이중 예정론을 반대하고 공격한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은 모두에게 관계된다는 속죄의 보편성을 믿기 때문이다. 웨슬리는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는 모든 이들을 위한 것으로 이 피의 효과는 사람의 믿고 아니 믿음에 달려있다고 보았다. 이런 견지에서 그리스도에 대하여 충분히 들어 본적이 없는 유대인과 이교도에게 있어서, 웨슬리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속죄는 간접적인 유효성 밖에는 없다. 하나님은 이교도들에게 태초부터 선행은총을 부여했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속죄를 예상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웨슬리에 의하면 그 도덕성에 의해서 판단되는 이교도들도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덕을 입고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웨슬리는 그리스도인은 물론 유대인 이교도들에게까지 적용되는 속죄의 보편성을 강조한다.




웨슬리의 속죄론


웨슬리의 속죄론을 논하기 전에 여기서 잠시 전통적 속죄론의 유형을 살펴보기로 하자.


1) 배상설 (The Ransom Theory)


이 속죄설은 이레네우스(Irenaeus), 어거스틴(Sgustine), 루터(M. Luther)가 주장한 속죄설로 그리스도의 속죄사업을 보상금의 지불로 간주하였다. 인간은 속죄를 위한 지불능력이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모든 사람을 위한 보상금(희생제물)이 되었다는 설이다. 보상의 개념은 값의 지불을 의미한다. 이 값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라고 믿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업에 보상적이며 공로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하나님이 인류를 마귀로부터 석방시킬 때 강제적인 방법을 쓰지 않고 마귀에게 값을 치루고 인류를 석방하는 방법을 취하셨다는 것이다. 마귀는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을 요구했고, 하나님만이 그 배상을 제공할 수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죽음으로써 배상이 주어져 인류가 마귀에게서 해방된다.


2) 만족설(The Satisfaction Theory)


안셀름(Anselm)에 의해서 주장된 학설로 하나님은 자기의 의를 확립하고 인간의 죄를 벌하고 상처입은 영예를 회복하는 길을 택하셨는데 이 일은 신 이외에 어느 누구도 할 수 없어 예수가 십자가에 돌아가셨다. 예수의 십자가의 공로로 하나님의 영예가 회복되고, 인간이 구원받고, 신이 민족하셨다는 설이다.


3) 도덕적 영향설(The Moral Influence Theory)


중세 신학자, 아벨라드(Abelard)에 의해 제기된 설이다. 안셀름에 반대하여 예수의 십자가는 신의 만족을 주기 위한 사건이 아니라 사람에 감화를 주기 위한 것, 즉 하나님의 사랑의 크심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이 사건은 우리로 하여금 사랑의 생활을 하도록 감화를 준다. 하나님의 사랑에 응답하는 방법으로 인간과 화해하게 한다. 이 설은 "인간을 하나님의 길로 인도하는데 있어서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이 모범의 능력을 지니고"있다고 본다.


4) 통치설(The Governmental Theory)


그로티우스(Hugo Grotius)에 의해 주장된 통치설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우주 통치의 배상이라고 본다. 통치설은 신의 통치권을 재확립하기 위해 신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셔서 그의 무너진 통치권을 회복하신다고 믿는다. 인간이 죄를 지음으로 하나님의 통치나 권위가 손상 입었는데,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손상된 권위는 회복되었고, 인간에게는 속박이 풀리는 은총을 얻게 되었다는 설이다.


5) 고전적 속죄설 (Classical Theory)


스웨덴의 학자, 아울렌(G. Aulen)에 의해서 제기된 학설로 십자가의 사건은 아벨라드 처럼 도덕적 감화를 주기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마귀의 세력과 신의 사랑의 투쟁에서 신의 사랑의 승리를 의미하는 사건으로 본다.


상술된 속죄론 가운데 웨슬리는 어떤 유형의 속죄론에 근접하여 있을까? 웨슬리의 속죄론이 어떤 유형에 속해있다고 규정하는 일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교부시대의 속죄론은 하나님이 악마에게서 인간을 해방하였다는 점, 이를 위해 값을 치루었다는 점을 속죄론의 근거로 삼고있다. 그러나 웨슬리의 속죄론은 하나님과 악마와의 관계라기보다는 우선 인간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화해를 이룬다는 사실, 즉 인간 구원을 속죄론의 근거로 본다. 웨슬리는 악마가 인간에 대하여 지배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인간의 죄 때문이기 때문에, 인간과 하나님의 화해가 성립되면 악마의 문제는 스스로 해결된다고 본다.


웨슬리의 속죄론은 도덕감화설에 가깝다는 주장이 있다. 속죄에 의한 죄의 용서는 성화의 제 일보이다. 인간의 성화도 인간이 하나님에 의하여 서서히 구원에 이르는 과정으로 본다면 하나님의 구속의 직무라고 말할 수 있다. 웨슬리의 속죄론 가운데 도덕감화설이 큰 역할을 차지하고 있음은 분명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도덕감화설은 형벌 대상설을 입구로 하고 있다. 형벌 대상설은 예수 그리스도가 먼저 인간의 형벌을 받아들이는 객관적인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과 인간을 화해하여 주셨다는 설이다. 웨슬리는 아벨라드(Abelard)의 속죄론의 중심사상인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의 생활과 죽음에서 절정에 이르렀다는 데에 동의한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기 위하여 아버지가 보낸 모형이 되시는 분이다." 우리가 앞서가신 모형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필연적으로 따라야 한다는 점에서 도덕적 감화설은 웨슬리에게 기독자의 생활과 직결된다. 윌리암즈는 그 증거로 "웨슬리의 44편의 설교 중의 13편 정도가 산상설교에 대한 해설"로 되어있음을 상기시킨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인간에게 주로 도덕적 감화력을 설득력 있게 이야기한다. 속죄사건에서 인간에게 일어나는 영향은 바로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라는 것이다. 웨슬리는 아벨라드의 속죄론의 중심사상인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의 생활과 죽음에서 절정에 이르렀다는데 동의하지만 올더스게이트에서 그리스도를 신뢰함으로써 신의 용서를 체험하였던 웨슬리는 그리스도를 하나의 도덕선생으로 보는 이신론적 시각에 동의하지 않는다.


웨슬리의 속죄 이해는 대체로 안셀름의 사상에서 나타나고 기독교회는 대체적으로 안셀름의 속죄설인 만족설( Satisfaction Theory)을 정통신학으로 받아들였다. 하나님은 자기의 의를 확립하고 인간의 죄를 벌하고 상처입은 영예를 회복하는 길을 택하셨다. 이 일은 신 이외에 어느 누구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예수가 십자가에서 돌아 가셨다. 그리스도의 희생 통하여 인간이 구원받고, 하나님의 손상된 영광이 회복되었고 하나님은 만족하셨다. 만족하신 하나님은 그리스도에게 어떤 상급을 내리려했으나 그리스도는 그 상급이 필요치 않으므로 대신 인간에게 상급 즉 구원이 주어진 것이다. 이것이 안셀름의 만족설의 논리이다. 만족설은 웨슬리에게 아주 중요하다. 웨슬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하나님에 대한 채무의 변제와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만족이라고 보았다.


아네트(Arnett)는 웨슬리의 속죄론은 역사상 저명한 몇개의 속죄론의 흐름을 혼합한 것과 같이 보여진다고 했다. 웨슬리는 골 1:14("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사함을 얻었도다")을 주석하면서 "우리의 주님이 스스로 자진하여 겪으신 고난이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의 진노를 무마하여 용서를 얻도록 하여 하나님이 우리를 받아들이시도록 하였다. 그리고 그 때문에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우리를 부르고 있던 악마의 지배와 그 힘이 파멸되었다"고 하였다. 안셀름의 '만족설'과 교부시대의 하나님과 악마와의 '투쟁설'의 반영을 보는 듯하다. 롬 3:25의 주해에서 웨슬리는 화목제물을 상처입은 하나님을 달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하였고 요1서 2:2("그리스도는 … 화목제물이니")의 주해에서 화목제물은 하나님의 진노를 무마할 수 있는 희생의 제물이라고 보아서 안셀름의 '만족설'을 반영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마 27:46의 주해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모든 신자들이 구원을 얻게하셨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죽으셨으며 그리스도가 다른 사람들을 위해 자기 생명을 버렸다는 것은 '대상설'을 반영한다. 웨슬리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죽음은 속전(노예가 자유의 몸이 되기 위해 지불하는 몸값)이며 온 세상의 죄를 위하여 충분히 만족할 만한 속전을 치루었다는 것이다(만족설).


노로요시오는 아네트의 웨슬리 연구결과를 들어 웨슬리는 속죄에 대한 독특한 이론을 강조하는데 연연하지 않고 속죄의 사실(the fact of the atonement)을 주장했다고 하였으며, 속죄의 사실이 가지는 여러가지 측면을 어느 하나의 특정된 면만을 강조하는 것으로서 희생되어버리는 위험으로부터 빠져나왔다고 하였다. 그러나 아네트는 웨슬리의 속죄론이 다양한 속죄론이 섞여있는 혼합한 속죄론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노로요시오는 웨슬리의 속죄론은 형벌대상설 계열에 속한 것으로서 그것을 중심으로하여 그 중심과 유기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여러가지 다양한 속죄론이 지니는 진리 계기를 주변에 배치해 둔 것이라고 보았다. 노로요시오는 웨슬리의 속죄론이 아네트가 말한대로 각종 속죄론에 관한 설명을 혼잡하게 섞어 놓은 것이 아니라는 주장을 하면서도 우리는 웨슬리의 속죄론이 그의 기독론 만큼 그 주장이 명확하지 못하다는 점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고 하였다.


이미 속죄의 보편성에서 논술되었듯이, 웨슬리는 하나님의 사랑은 속죄의 범위를 제한하지 않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웨슬리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만인을 구원하기 위하여 오셨고, 죽으셨으며, 모든 이를 위해 대속하였다. 웨슬리가 속죄의 범위를 제한하지 않는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의 속죄 사업 때문에 자동적으로 구원받는다는 말이 아니다. 웨슬리가 의도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총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지마는 누구든지 믿는 자만을 구원하신다는 것이다. 따라서 웨슬리의 구속론은 소시니스파(Socinian)나 일위론자(Uniterianist)들이 주장하는 만인구원설(The Universalism)과는 다르다.


그리스도의 속죄의 보편성에도 불구하고 왜 모든 인간이 구원을 얻지 못하는가? 칼빈은 하나님의 영원한 뜻, 하나님의 예정에 그 답을 두고 있으나 웨슬리는 보편적 은혜개념의 아르미니우스(Arminan)적 선택관에 따라 인간의 자유로운 응답에서 해답을 발견한다. 구원의 전체 과정은 하나님의 은총에 관한 것이지마는 이의 수용이나 거부는 인간의 자유로운 응답에 맡겨져 있다. 따라서 인간이 구원받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이 예정해 놓으셨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구원받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웨슬리의 속죄관은 역사적으로 여러 가지 속죄론이 다양하게 포함된 복합적인 것이다. 웨슬리는 전통적인 정통 속죄관을 따르고 있다. 영국교회의 39개조 중 3조항에서 취급하는 것을 그대로 인용한다. 전통적인 안셀름의 만족설이 지배적이다. 웨슬리는 만족설의 변형인 칼빈의 형벌대속설에도 접근해 있고, 고전적인 속죄성인 교부들의 배상설과 아벨라드(Abelard)의 도덕적 감화설도 기독자의 삶의 모델로서 제시된다. 따라서 종합적인 속죄관이다. 웨슬리의 속죄관은 여러 전통적인 교리들의 다양한 요소들을 보여주면서 그 강조점은 칼빈의 형벌대속설에 두고있음은 매우 흥미있는 사실이다. 또한 후대의 웨슬리 신학자들(Watson, Miley)이 웨슬리가 거의 언급이 없는 통치설을 웨슬리주의의 대표적 속죄설로 주장하였다. 웨슬리의 속죄론 방법론은 둘중에 하나((either /or)가 아닌 둘다(both/and)의 방법을 쓰고 있다. 종합적으로 볼 때, 웨슬리의 속죄론은 십자가의 사건을 통해서 우리의 죄가 사하여지고, 이 속죄를 위해 하나님이 얼마나 큰 고통을 당하셨는가를 강조하고, 오늘도 예수를 통하여, 예수 안에서 고통을 당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제사장의 직분으로서의 직분은 구속과 중재(intercession)의 직분이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의 속죄와 화해의 사역은 그리스도의 제사장의 직분에 해당한다. 타락한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대리로 형벌을 받은 사건이 십자가의 사건이다. 이 사건은 하나님이 원하셨던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께 드리는 순종이었다. 이 순종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희생과 고난을 당한 예수 그리스도의 자발적인 행위, 즉 예수 그리스도의 능동적인 순종이었지만 이것은 우리의 죄를 담당하신 형벌로서는 수동적 순종이다. 십자가상에서 이루신 그리스도의 제사장적 행위는 인간을 위한 대리적 형벌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들의 구원을 이루기에 충분한 보상이 되는 희생을 하나님께 드렸다.


제사장의 직분은 대리적 형벌 외에도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중재하시는 그리스도의 사역도 포함된다. 그리스도의 중재는 십자가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중재에 대한 웨슬리의 두 가지 강조점은 아버지께로 나가는 것과 모든 신령한 축복이다. 웨슬리는 대리 형벌의 개념을 안셀름(Anselm of Cantebery)의 충족설의 입장에서 이해하였다. 그리스도는 희생뿐만 아니라 그의 구원자들을 위한 계속적인 구원의 은혜를 부여하기 위하여 하나님께 지속적으로 청원한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희생과 중개의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하신다. 이 점이 웨슬리의 기독론에서 두드러지게 강조되고 있다.


6. 성화의 표준과 모델로서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적 활동을 믿고 받아들이는 일은 기독교 신앙이다. 이 구속은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사건 통해서 일어난다. 구속의 신앙은 죄를 시인하고, 성령의 선험적 은혜를 통하여 하나님께 돌아가고, 죄를 고백하고 새로운 계약을 유지하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남에 대한 개인적인 결단을 하게 한다. 웨슬리는 "그리스도의 인격을 자신의 특이한 가르침인 기독교인의 완전과 연결시킨다." 새로운 성서 연구를 통하여 웨슬리는 기독교인의 완전은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사는 것임을 더욱 강하게 의식하였다. 웨슬리 신학에서 아담으로서의 그리스도는 형벌을 받아 칭의의 근거를 제공하고,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는 성화를 위한 규범이 된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성서적 약속의 성취로 이해되고, 그리스도가 신적인 스승임을 입증하였으며, 사탄과 죄를 정복하여 그리스도의 승리와 영원한 영광을 드러낸 사건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부활은 칭의의 근거이며 우리의 신생의 기초이고, 성화와 칭의 근저에 놓여있다. 웨슬리의 부활 교리의 특징은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을 의인과 성화에 관련시킨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으로 신앙을 가질 수 있게 되었으며 이 신앙으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속을 얻게 되었고, 그리고 의롭다고 일컬음을 받게 되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부활은 성화의 기초이기도 하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이 우리의 부활을 우리 안에 성취하도록 도와준다. 그러므로 웨슬리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부활은 단순한 과거의 역사적인 사건이 아니라 신자들의 현재적인 삶에 관계가 있는 실존적인 사건인 것이다. 웨슬리만이 아니라 칼빈과 루터도 예수의 부활은 육신의 부활만 아니라 영혼도 함께하는 부활로 이해한다. 부활하신 예수의 육신은 돌아가시기 전의 그 육신으로 돌아 간 것이 아니라 새로운 정신과 몸의 관계를 소유하고 새롭게 변이되신 육신인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는 영과 육으로 부활하신 인격적인 분이다. 부활하신 예수는 영광스러운 아들로 변이된 분이다. 부활하신 예수는 모든 신자들을 똑같은 부활로 안내하시고 초청하시는 분이다.


웨슬리의 성결은 순간 순간 주를 의지함으로써 유지되는 완전이다. 성결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리스도 중심적인 것이 특색이다. 그리스도는 언제나 인간의 구속과 관련되어 있다. 그리고 그 핵심은 성결(성화, 그리스도인의 완전)로 이어진다. 웨슬리 신학에서는 그리스도가 품으셨던 마음을 우리가 품고 그리스도가 행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성결의 중심으로 보았다. "성결은 그리스도가 품으셨던 마음 전체가 내안에 있어 나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행하신 대로 행하게 하는 상태이다." 성결의 조건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성결함을 받는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성결을 인간에게 전해주시는 중보자이시다. 이런 점에서 웨슬리의 성결론은 기독론 중심의 성결론이다. 성결의 유지도 기독론 중심적이다. 순간 순간 주를 의지하는 그리스도 중심의 생활에서만 성결이 가능하다. 성결한 자라도, 아무리 완전한 자라도 그리스도의 대속의 보혈을 순간 순간 필요로 한다. 따라서 우리는 언제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대로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기도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은 성결한 삶의 모델이요 목표가 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가운데 내주하심으로 이 모든 삶을 가능하게 한다. 웨슬리의 성결은 그리스도 중심적이고, 기독론은 성결의 출발점이 된다.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숙고에서 웨슬리가 가장 중심을 두고 있는 부분은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과 성결의 삶이었다. 사실 웨슬리는 그리스도의 인격(person)보다는 사역(work)에 비중을 두어 그리스도의 인격론은 웨슬리에게 있어서 속죄론의 각주정도로 취급되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진정한 기독교의 본질은 철학적 사변보다는 실제적 삶에 더 초점을 두는 웨슬리 신학에서 나오는 것이다. 웨슬리는 논쟁적 신학은 교화로 이끄는 힘이 적다고 하였다.


웨슬리는 그리스도는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가져다주신 분, 죄의 권세와 죄책으로부터 구원하신 분, 의롭다함을 받은 사람을 믿음과 사랑으로 충만케 채우시는 분이며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새 인간존재를 가능하게 하시는 분으로 확신했다. 그러나 웨슬리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산성설교에서 그렇듯이 하나님의 계명을 분명하게 권위있게 해석하시는 위대한 선생이기도 했다. 또한 그리스도는 웨슬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실현할 수 있도록 돕는 분이다.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행동들을 반복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처럼 사랑으로 충만해지고 이 사랑으로 하여금 자신의 모든 행위를 결정하도록 하는데 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은 자기 자신의 이익을 생각하지 않고 모든 이웃에 대하여 친절하고, 도와줄 자세가 되어 있으며 동정심이 가득차 있으며 관대하다. 그는 그리스도처럼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충만하다. 이렇게 되는 것은 거듭난 이후에야 가능하게 된다고 웨슬리는 확신했다. 웨슬리는 예수의 행위들을 뒤따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의 자세를 갖고서 하는 행동을 중요시했다. 예수가 무제한적인 사랑, 가장 가난한 이들과 가장 천대받는 이들을 사랑하신 것처럼 예수를 따르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날마다의 삶 속에서 이러한 이웃사랑을 선포하고 그러한 삶의 태도를 가지고 살아야 한다.


웨슬리의 성결론과 구원론은 그리스도와 끊임없는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생활이기 때문에 웨슬리의 구원론과 성화론은 그리스도 중심이며 그리스도 중심적 삶이다. 구원과 성화의 조건은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다. 우리는 믿음에 의하여 구원함을 받으며 우리는 믿음에 의하여 의롭다하심을 받으며, 우리는 믿음에 의하여 또한 성결함을 받는다. 믿음은 성화를 얻는 오직 하나의 길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성결을 인간에게 전해주시는 중보자이시다. 이런 점을 잘 알고 있는 웨슬리는 그의 성결론은 기독론 중심의 성결론으로 전개하였다. 성결의 유지도 그리스도 중심적이다. 이는 순간순간 주를 의지하는 그리스도 중심의 생활에서만 가능하다. 웨슬리의 성결은 순간 순간 주를 의지함으로써 유지되는 완전이다. 기독론은 언제나 인간의 구속과 관계되고 그 구속적 핵심은 성결로 이어진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으로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가 되었다. 완전무결하게 죄가 없다. 따라서 속죄하실 수 있다.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어 중보자가 필요하다. 인간은 속죄가 필요하다. 속죄의 필요로 예수 그리스도가 화목제물이 되었다. 왜냐하면 인간의 죄 때문에 하나님이 진노하셨다. 그 아들의 죽음으로서 인간들과 화해가 이루어진다. 그 아들을 믿기까지는 신의 진노가 계속된다.


웨슬리의 기독론은 영국교회의 전통보다 더 이상적인 기독론으로 기독교인의 완전에 대한 진정한 체험을 강조하는 기독론이라 볼 수 있다. 웨슬리는 기독교인은 은총 안에서 성장하여 그리스도의 완전한 특성을 나타낸다고 보고, 그것의 표준과 모형으로서 그리스도를 제시하였다. 따라서 웨슬리의 기독론은 그의 성화론과 연결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성화론에서도 중심적인 역할을 맡고 있다.





7. 예언자와 왕으로서의 그리스도





그리스도의 임무는 제사장의 임무 외에도 예언자로서의 임무(The prophetic office)와 왕으로서의 임무(The kingly office)가 있다. 웨슬리에 있어서 예언은 단순히 미래의 일을 미리 말하는 것으로 이해하지 않고, 하나님의 오묘한 뜻이 사람들에게 선포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는 이와 같은 의미에서 예언적 활동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리스도의 삶 전체가 하나님의 오묘한 계시라고 웨슬리는 이해한다. 즉 그리스도의 삶 전체가 예언이라고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노로요시오는 웨슬리에 있어서 성육신 그 자체가 하나님의 구속의 행위라고 본다. 우리가 예수를 보는 것은 인간을 구원하려고 인간의 행위를 기다리지 않고 하나님 편에서 먼저 주도권을 가지고 그리스도라는 존재를 역사 안에 보내신 하나님의 아가페로 넘치는 의지를 보는 것이다. 웨슬리에게 있어서 성육신론은 속죄론에 우선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웨슬리는 예언자의 직분을 스승으로서의 직분으로 보고 그리스도는 율법과 복음의 스승이라 하였다. 복음과 율법의 스승인 그리스도는 그분의 생애와 죽음과 승차의 상태에서 각각 스승이 되신다. 그분의 생애가 신적인 스승 즉 완전한 스승의 예언자적 직분의 사역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리스도는 구약의 예언을 성취시킨 스승이시고 그분의 말씀은 십자가의 죽음에서 하나님의 계시로 확인되었고, 교회와 신자들에 의해서 우리의 구원을 위한 스승이심이 입증되었다. 그리스도는 율법의 입법자인 동시에 해석자이다. 웨슬리에 의하면 율법은 그리스도의 영광의 광채이고 그리스도의 인격의 명확한 형상이다. 모세에게 주신 율법은 양심의 법만으로 살지 못하는 인간을 위하여 하나님이 주신 율법이다. 모세의 율법을 새롭게 해석한 그리스도의 예언은 율법의 완전한 성취를 의미한다. 예언자의 직분을 성화에 관련짓는 것보다 죄를 깨닫게 하는 스승에 연관시키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예언자로서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들에게 전달하신다. 그리스도는 현재와 미래를 위한 하나님의 말씀을 중개하신다.


그리스도는 예언자의 역할만이 아니라 왕으로서의 역할을 한다. 왕의 직분은 그리스도의 승리와 통치 혹은 권세와 능력으로 만물을 지배하시는 다스림을 뜻한다. 성화는 그리스도의 왕의 직분과 관련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승리와 영광은 과거의 것만이 아니라 현재와 장래에 나타날 것이다. 그리스도의 승리는 사탄과 죄와 죽음을 결정적으로 무력화시키는 현재적인 것만이 아니라 종말론적 결과를 인도한다. 그리스도는 메시아, 주님, 왕의 왕으로서 다시 온다. 그 때는 아버지의 오른 편에 앉아 계시다가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왕국을 통치하시는 분이다. 웨슬리 신학에 있어서 승천하여 하나님 보좌 오른편에 앉아 계시는 그리스도는 교회와 이 세상의 지배자이시며 이런 의미에서 왕이신 것이다. 왕이신 그리스도는 교회에 성령을 보내어 교회의 구성원인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의 생활을 성화시켜 주신다. 왕이신 그리스도의 역할 가운데 중요한 것은 악마와의 투쟁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악마와 싸우게 되는 것은 인간과 화해를 이루기 전이 아니라 화해된 이후이다. 인간 안에 있는 악마의 역사를 인간과 화해한 후에 하나님이 멸하신다. 인간이 하나님과 화해하기 이전에 있어서는 악마는 단순히 하나님의 진노의 공의에 대하여 복수하는 실행자에 불과하다. 웨슬리가 과거의 역사적인 그리스도 사건에 있어서 하나님이 악마에게 승리를 거두었다는 일을 생각지 않고 오히려 악마에 대한 하나님의 승리를 성화라는 현장의 신자의 체험으로서 이해한 것은 웨슬리의 체험론적 신학태도로부터 나온 것이다. 웨슬리의 기독론은 속죄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역과 더불어 성화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역을 강조한다. 성화의 은혜는 그리스도의 왕적 직분을 통하여 인간에게 주어진다. 웨슬리는 그리스도의 영광화된 인간성(glorified humanity)을 말하였다. 그리스도의 육신승천이 영광화된 인간성이다. 그리스도가 인간으로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으로 하늘로 올라가셨다(눅 19:12).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에 참여하신다. 그리스도는 우주와 교회를 다스리시고 성령을 부어주신다. 그리스도는 신자들 속에서 승리의 통치를 하신다. 또한 그리스도는 심판을 위하여 영광중에 다시 오신다.


그리스도의 삼직분에 대해서 웨슬리는 로마 카톨릭 교회에 편지를 썼는데 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나사렛 예수는 세상의 구세주이며, 그렇게 오랫동안 예언되었던 메시아이며,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자이며, 하나님의 뜻을 우리들에게 계시하시는 예언자이며, 그 자신을 죄를 위하여 희생하시는 제사장이며, 죄인을 위하여 간청하시며, 땅과 하늘에 있는 모든 능력을 소유하시며, 모든 만물을 그 자신에게 복종시키기까지 통치할 왕이심을 믿는다."





예수는 굴욕에 상태에 있었을지라도 궁극적으로는 영광의 상태에 있게 된다. 영광의 상태는 예수 그리스도가 승천하여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영광의 상태는 그의 승천과 함께 그의 재림을 통해 완성된다. 승천을 통해 주님은 진실로 영광받으시는 분임을 증거하였고 재림을 통해서 그가 왕들의 왕으로 주님들의 주로서 영광 가운데 통치할 것임을 증거할 것이다.


웨슬리에게 있어서 제사장의 직분과 칭의를 동일시하고 왕의 직분과 성화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승차하신 그리스도(the exalted Christ)는 지상에서 받았던 상처의 흔적을 가지고 계신다(계5:6).


8. 맺음말


구원은 그리스도와의 만남에서 시작된다. 웨슬리의 복음적 회심체험은 그리스도와의 만남이었다고 볼 수 있다. 웨슬리를 뜨겁게 한 분은 예수 그리스도였다. 그는 회심체험에서 그리스도만을 의지했고,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죄를 거두어, 자신을 구원해 주셨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따라서 구원은 용서하시고 구원하시는 그리스도와의 만남의 체험 속에서 시작된다. 그리스도를 만나느냐하는 것은 중요하다. 만남의 결과는 그리스도의 생애와 죽음과 부활의 공로에 대한 신뢰로 나타난다. 웨슬리의 기독론이 무엇보다도 말하고자 하는 것은 구원자로서의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웨슬리의 통찰은 그리스도는 구원자라는 그의 확신과 주장에서 온 것이다. "믿음에 의한 칭의"라는 설교에서 구원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가능하다는 것을 말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에 의한 구원의 경험을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신-인(神-人)이기 때문에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신다. 예수가 굴욕의 상태에 있게 되는 것은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필요한 것이었다. 예수는 굴욕의 상태에 있을지라도 그는 완전한 하나님이셨다.


웨슬리는 그리스도의 음부하강설(Descent into Hell)을 거부하였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후에 음부에 내려가셨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영국국교회 종교강령 39개조에서 25개조 종교강령을 만들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음부에 내려가셨다는 부분을 삭제하였고, 또한 사도신경에서도 이 고백을 삭제하였으며 1786년 미국 감리교 총회도 이를 따랐다. 왜 삭제했느냐? 아마도 사후 생활에 있어서 인간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연옥설 거부). 왜냐하면 때로는 인간이 죽은 이후에도 그리스도를 통하여 음부에서도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 이 '그리스도의 음부 하강설'이 이용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웨슬리는 인간의 구원 여부는 인간의 지상생활에 전적으로 관계되어 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은 죽음의 순간에 하나님에 대한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는가에 따라 구원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로는 엘리자베스 치하에서 그리스도의 음부하강설의 교리에 대한 논쟁이 너무 치열하여 이를 피하기 위하여 이를 삭제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웨슬리에 의하면 그리스도가 무덤에 매장되어 있는 동안 그리스도의 영은 지옥 혹은 음부에 가신 것이 아니라 부활의 때까지 의인들의 영혼들이 죽지 않는 채로 남아있는 낙원에 계신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리스도의 낙원행은 특별한 신학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 이전에 죽은 의인들, 또는 익명적 그리스도인들을 하나님께 화해시키기 위한 것이다.


웨슬리는 전통적인 기독론인 칼케돈 신조와 영국교회의 39개조 종교강령을 고수한다. 기독론을 취급하는 웨슬리의 저작들이 특별한 주목을 받지 못한다 할지라도, 기독론은 그의 신학에서 중심을 차지하고 있고, 모든 다른 교리 가운데 본질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올더스게이트에서의 그리스도의 용서하심에 대한 웨슬리의 체험은 전통주의에 새로운 삶과 활력을 공급해 주는 데 있어서 아주 큰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웨슬리의 후예인 우리는 그의 사상과 정신 그리고 학문적인 열정을 그대로 이어받기보다는 그가 미흡했던 점을 더욱 발전시키고 연구해 내는 일련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본다. 웨슬리는 기독론에 대하여 생각한 일이 없으며, 단지 영국국교회의 종교강령에 나타나 있는 기독론을 채택했을 뿐, 개인적인 깊은 기독론적 고백을 갖고 있지 않은 신학자라고 말하는 것은 웨슬리를 바로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노로요시오는 말한다. 웨슬리는 고전적인 기독론을 내적으로 자신의 것으로 삼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우리가 감리교의 기독론을 연구함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성서에 기초해야 한다는 것과 상황에 적절한 창조적인 작업 즉, 예수는 철저하게 현재 공동체 안에서 경험되어지는 실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웨슬리는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시는 구원과 성결의 삶에 중점을 두었기에 그리스도의 인격보다는 그리스도의 사역에 보다 큰 비중을 둔다. 인격보다 사역을 더 중요시하는 웨슬리의 자세는 진정한 기독교의 본질을 설명함에 있어서 의식적으로 모든 철학적 사변을 피하고 실용적인 면에 그의 관심을 두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한 업적은 인간적 의와 성결의 최고의 현현으로써 인간이 표현할 수 있는 지상의 도덕적 및 영적 표본 - 구속과 화해의 본바탕 - 을 제시하여 준 점이다. 인류의 대표자로서 아담이 선택한 죄와 저주를 위하여 그리스도는 자신을 바치고 인간의 죄악을 걸머지셨다. 그리스도의 업적의 결과로 피조물의 구속과 회복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러나 인간의 구원은 믿음으로써 그리스도의 피 값을 받아들이는 자에게만 부어진다.





죤 웨슬리 / John Wesley


죤 웨슬리는 1703년 6월 28일 영국의 소읍 에보트(Epworth)에서, 영국국교회(Anglican Church)의 목사이던 아버지 사무엘 웨슬리 (Samuel Wesley)와 엄격하면서도 슬기로운 신앙의 여인이었던 어머니 수산나(Susanna) 사이에서 태어났다.


웨슬리의 부모는 열 아홉 명의 자녀를 낳았으나 열명은 어려서 죽고 여섯 명의 딸은 뛰어난 교육을 받았으나 빈한한 가정에서 자라난 이유로 평범한 사람들과 결혼했다. 세 아들 사무엘, 죤, 챨스는 모두 목사가 되었다. 죤 웨슬리는 15번째이며, 찬송가 작가이고 죤의 동반자가 되었던 챨스는 18번째 였다.


죤이 다섯 살 때인 1709년 2월 9일 한밤에 돌연 불이 났다. 죤은 무사히 구출되었으나, 이 사건 이후 어린 죤은 양친에게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수산나 부인은 생전에 그 밤의 일을 잊을 수 없었다고 한다. 그는 죤을 '타는 불에서 끄집어낸 부지깽이' (스가랴 3:2)라고 부르며 그의 영혼을 특별히 보호하기로 결심 하였고, 하나님께서 어떤 특별한 일을 시키기 위해 그를 구출 하셨다는 섭리와 소명을 강하게 느꼈다.


화재 사건후 부모의 특별한 배려로 자라온 죤은 그가 10세 때인 1714년 런던의 챠터 하우스(Charter House)에 입학하게 된다. 집을 떠나 16세에 졸업하기 까지 이 학교에서 공부하였다. 챠터 하우스의 6년은 그렇게 행복스럽지는 못하였는데, 이유는 그가 어려운 처지의 학생이었기 때문에 부유한 학생들로부터 가끔 모욕을 당하기도 하고, 또한 식사 때에 고기는 모두 큰 학생들에게 빼앗기고 야채만 먹었다. 후일 그는 채식으로써 건강의 근원을 삼았다. 그는 그리 튼튼치 못하였으므로 아버지는 그의 폐를 걱정하여 매일 아침 교정을 세번씩 뛰라고 했으며 그는 이를 잘 실행 하였다.


이 시기의 종교생활에 대하여 그는 이렇게 썼다. '나는 성경을 읽고 아침 저녁으로 기도를 하였다. 나는 다른 사람들 처럼 불량하지 않고, 종교에 대하여 선의를 가지며, 성경을 읽고 교회에 출석하며 기도함으로 구원 얻기를 바랐다'


웨슬리는 16세에 챠터 하우스를 떠나 옥스포드(Oxford) 대학으로 향하였다. 당시의 옥스포드는 학교라기도 어려울 정도로 심히 미약하였다. 그러나 웨슬리는 스스로 훈련하고 스스로 수양하였다. 그는 어머니의 무릎에서 얻은 교훈, 챠터하우스에서 받은 수양을 그대로 계속 실행 하였다.


그 후 15년 동안은 대부분 옥스포드에서 학생으로 혹은 조수로 있었는데 그 동안에 그는 목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21세 때 영국교회의 안수를 받았다.


또한 여기서 유명한 옥스포드 구락부 곧 신성회(Holy Club)를 조직하여 자기 자신과 그의 전도인들의 독특한 생활 습관을 형성하였다. 사람들은 그 클럽을 가리켜 '규칙벌레','성경클럽','엄격한 종교 주의자 (Methodist)'라고 놀렸는데 후일에 '감리교회'라는 이름이 여기서 유래 되었다.


당년 31세의 웨슬리는 15년 동안 옥스포드 생활을 하여왔다. 이제는 주님을 위하여 좀 더 열성 있고 희생적인 활동을 하려는 생각이 났다. 그리하여 그는 1735년에 선교사로 자원하여 당시 영국의 식민지였던 미국 죠지아주로 가서 아메리칸 인디언에게 선교를 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북미 선교 활동은 제대로 되지 않았고, 마침내 2년 만에 웨슬리는 중생의 대 경험을 앞에 두고 다시 영국으로 돌아왔다.

1738년은 웨슬리 형제에게 중요한 해가 되었으니, 동생 챨스 웨슬리가 먼저 마음에 큰 감동을 받고 구원의 확신을 얻게 되었다.




1738년 5월 24일 수요일, 죤 웨슬리는 엘더스게이트(Aldersgate)의 한 집회에 참석했다.


거기서 그는 인도자가 마틴 루터의 로마인 서 서문을 낭독하는 것을 들었다. 9시 15분 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앙을 통하여 하나님이 그 심령 속에 역사하시는 변화에 대한 부분을 읽을 때에 웨슬리는 '그의 심령이 이상하게도 뜨거워 짐을' 느꼈다. 그때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음을 깨달았으며, 또한 자기 죄가 속량 되어지고 구원 받은 줄 확신하게 되었다.


1738년 엘더스게이트 경험으로 부터 1791년 임종 시 까지의 웨슬리의 생활은 항상 말 타고 여행하며 기회 있는 대로 복음을 전하였다고 할 수 있다.


웨슬리는 성령의 능력, 곧 인간생활에 들어와 그 인격과 경험을 새롭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전파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목사님들이나 일반회중은 이러한 설교를 싫어하여 교회의 사용을 허락하지 않았다.

1739년 4월 2일 월요일 밤 브리스톨(Bristol)에서의 첫 노천 전도 이래 50여년간 그는 매주 열 다섯번 설교하며 3,4백리를 여행하였는데, 교회를 얻어 쓸 수 없으므로 옥외나 감리교인 들의 집이나 집회소에서 전도 하였다. 그가 자라난 에보트에서도 교회사용을 거절 당하여 웨슬리는 부친의 묘석 위에 올라서서 밤마다 집회를 가지기도 했다.



웨슬리는 찬송에 힘을 썼다. 영국교회의 성가란 옥외 대중용으로는 적당치 않으므로 웨슬리와 그 동생 챨스 웨슬리는 특별히 찬송을 지었다. 챨스 웨슬리의 지은 찬송이 6천편 이상이라 한다. 웨슬리 형제는 해마다 찬송가를 발행하였으며 감리교인은 노래 잘하기로 유명하여졌다. 그 노래들은 대개 개인의 종교적 경험을 표시하는 것으로 '만 입이 내게 있으면/23', '천부여 의지 없어서/338', '구주여 크신 인애를 /170' 등이다.



웨슬리는 새 교회를 세우려는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자기 전도를 듣고 들어온 사람들을 붙잡기 위하여 그들을 어떤 단체로 든지 조직해야 할 필요는 느끼었다. 옥외 전도, 즉석기도, 평신도 전도, 찬송, 연회, 속회, 전도인의 안수 등 이 모든 것은 영국교회가 웨슬리의 구령 사업을 찬성하지 않기 때문에 필요에 의하여 생긴 계단이다. 이 각 계단을 밟아 나가는 것은 곧 영국교회와의 인연이 멀어지는 것을 의미하게 되었다. 웨슬리는 자기가 살아있는 동안 영국교회와 분리하지 않겠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신앙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의 수가 점점 늘어나자 이와같은 운동은 신대륙 미국에까지 건너가 감리교회가 조직 되었다. 이제 죤 웨슬리는 갔지만 그가 세운 교회는 확연한 존재를 가지게 된 것이다.



챨스 웨슬리의 찬송가 영국 김동일 전도사 / 웨슬리및 영국사에 관한 자료




1738년 5월 24일 (수)

그날 저녁에 나는 올더스게이트 가에 있는 기도모임에 별로 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으나 참석했다.

거기서 어떤사람이 루터의 로마서 강해 서문을 읽고 있었다. 밤 9시 15분 쯤, 그 낭독자가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을때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변화를 가져 오시는 일을 묘사하는 말을 듣는 중에 나는 내 마음이 이상스럽게 뜨거워 짐을 느꼈다.

나는 내가 그리스도를 참으로 믿고 있음을 느꼈고 구원을 위해서 그리스도만을 의지한다고 느꼈다. 그리고 주께서 내 모든 죄를 없이 하였다는 확신이 생겼고 나같은 자의 죄를 다 사하시고 죄와 죽음의 법에서 나를 구원해 주셨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죤 웨슬리의 일기)





신앙위인:요한 웨슬리(John Wesley)


요한 웨슬리는 영국에서 지금부터 300년전인 1703년 6월 28일에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목사였고 할아버지도 목사였고 증조할아버지도 목사였습니다. 이런 뼈대있는 집안에서 19명의 자녀중에 15번째 아이요 아들로는 두번째로 태어났지만 그의 가정은 급속도로 늘어나는 아이들로 인하여 항상 빈곤에시달렸습니다. 어느 해에는 통털어 6실링밖에 없는 판국에 쌍둥이가 태어나기도 하였습니다.


웨슬리가 태어난 영국은 당시 국교도 즉 지금의 성공회와 청교도사이에 싸움이 벌어져 뒤숭숭하였고 게다가 산업혁명이 끼친 사회혼란등으로 술취함, 싸움질, 도박, 도적질, 자살등이 마치 전염병처럼 퍼지게 되었습니다. 신앙은 도리어 미신처럼 여겨지고 각처에서 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심지어 교회의 지도자들까지도 사람들을 회개시키는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도리어 사람들에게서재물을 빼앗아다가 자기들 배를 채우는 일에만 바빴습니다. 시대는 희망이 안보이고 더욱 암울해 가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복음진리를 전파할 시대의 등불로 요한 웨슬리를 예비하고 준비시키고 계셨습니다.


요한 웨슬리는 신앙심이 많았던 어머니 수잔나 부인에게서 엄격한 교육을 받으며 자랄 수 있었습니다. 요한 웨슬리는 10살 때 런던에 있던 챠더하우스 학교에 입학하였지만 갑자기 엄격하게 다스리면서 가르쳐주셨던 부모님이 안 계시자 자연히 신앙생활이 게을러지게 되었습니다. 이때가 그의 생애중에 가장신앙적으로 잠들어 있던 시기였다고 그는 후에 고백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그는 차터하우스에 들어갈때는 성자였으나 나올때는 시커먼 죄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1720년 초여름 챠터하우스 학교를 마치고 옥스퍼드 대학교에 들어갔을때에도 습관적인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어느날 밤이었습니다. 뜻밖에 숨이막힐 지경으로 코에서 피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얼마후에는 목구멍에서 직접입으로 피를 토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일이 밤마다 계속되다시피 하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육신이 쇠약해진데다가 극심한 궁핍을 겪는동안 하나님의 사랑의 징계를 깨닫고 아버지처럼 훌륭한 목사가 되겠다는 그의 어릴적 기억을되살려 회개하고 목사가 되고자 결단하였습니다. 이때부터 하루 2시간씩 구별하여 열심히 기도하였고 영적인 진보와 실천적인 삶을 위해 나름대로 20가지의규칙을 정해놓고 투쟁하였습니다. 22세의 나이로 옥스퍼드대학교를 졸업하고 3년후 마침내 목사안수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날 웨슬리는 너무나 감격하여 눈물을 쏟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요한 웨슬리의 설교는 신통치 않았습니다.


설교시간에 꾸벅꾸벅 조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이후 잠시 아버지 사무엘목사를대신하여 고향에서 설교하였는데 그의 설교는 역시 신통치 못하여 신자들은 또졸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때 옥스퍼드에서 공부하고 있던 동생 찰스웨슬리는 신앙이 뜨거워져 매주일 한번씩 몇몇 친구들을 모아 놓고서 성경공부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후 동생의 요청으로 요한 웨슬리가 이 모임을 주관하게 되었고 날로 성장해 갔습니다. 이 소문은 삽시간에 학교안에 쫙 퍼져 나갔습니다. "우리대학교안에 불이 붙었다, 성경말씀을 글자 그대로 실천하는 학생들이 생겨났다, 그들이야말로 메도디스트들이다" 메도디스트(methodist)는 감리교도라는뜻으로 요한 웨슬리는 성경이 가르치는 것들을 그대로 따라서 사는 사람들이라고 정의하여 오늘의 감리교라는 말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이들의 모임은 '거룩한 클럽'이라 불리웠는데 한결같이 기도와 성경공부 그리고 구제에 헌신하였습니다.


얼마후 버튼박사의 추천으로 요한 웨슬리는 동생과 '거룩한 클럽'회원인 벤자민 잉헴과 함께 1735년 10월 18일 미국을 향하여 그레이브샌드 항구를 출발하였습니다. 이때 요한 웨슬리는 일생에 또 한번 큰 변화를 겪게 되는 사건을만나게 되었습니다. 시몬즈 호가 넓은 대서양을 가로질러 가던 어느날 이었습니다. "앗, 태풍이닷!!" "쏴-- 꽈르릉 꽈당,꽝" 캄캄한 밤, 순식간에 배는 하늘이 터진 듯한 소낙비와 무서운 파도속에서 진퇴양난의 상황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곳저곳에서 거센 파도소리를 뚫고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습니다. "이젠상어밥이 되는 구나" 웨슬리도 어느새 부들부들 떨고 있었습니다. 이때 어디선가 은은하게 하나님을 찬양하는 소리가 들여왔습니다. 이 찬송을 듣는 웨슬리는 너무나 놀랐고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그들은 모라비안 성도들이었습니다.


이를 통해 웨슬리는 자신이 삶속에서 주님의 구원을 믿지 못함을 깨닫고 후에자신의 구원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4개월만에 마침내 미국대륙에 도착하여목회를 시작하였지만 한 부도덕한 여인의 모함을 계기로 미국에서의 사역에 종지부를 찍고 2년만에 영국으로 되돌아 왔습니다. 그는 이 모든 사건을 통해 아주 겸손하게 하나님의 음성에 귀기울이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후 그는 모라비안교의 지도자 피터볼리로부터 도움을 받아 오직 믿음으로구원받는 진리를 깊이 마음에 새기게 되었습니다. 이후 1738년 그는 '올더스게이트사건'이라 불리는 가슴이 타오르는 뜨거운 거듭남의 체험을 하고 이때부터무서운 열심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맨 처음 설교는 옥스퍼드대학생들 앞에서 하였습니다. "확실한 믿음으로 완전한 구원을 받는다" 이것이 설교내용의 전부였습니다. 사람들은 가슴을 움켜잡고 데굴데굴 구르며 회개하였습니다. 뉴게이트의 감옥에서도 '거저 주시는 구원'이라는 제목으로 수많은 죄수앞에서 설교하였습니다. 웨슬리가 크게 믿음의 구원을 외치자 여기서도수많은 사람들이 데굴데굴 굴렀습니다. 그의 말은 칼날처럼 사람들의 가슴에박혀들고 많은 나무를 태우는 뜨거운 불길과 같았습니다. 그러자 대부분의 목사들이 웨슬리에게 비웃으며 구원이 믿음으로만 된다면 교회제도나 성찬식은쓸데없는가 반문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요한웨슬리를 비방하는 근본이유는실제 요한 웨슬리가 교회의 사치와 목사들의 타락을 사정없이 후려쳤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요한 웨슬리의 모든 교회에서의 설교를 일체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를 계기로 더 큰 성령의 역사가 있게 되었습니다. 친구 화이트필드의 도움으로 그는 킹스우드지방 광부들에게 교회대신 넓은 언덕에서 즉석 설교를 하였습니다. 그의 설교는 설교가 아니라 그대로 불덩어리였습니다.


막혔던 화산이 터져오르듯이 그의 입에선 불덩어리가 뿜어나왔습니다. 처음 모인 사람들이 200명정도밖에 안되었는데 5번째 설교할때는 그곳에 1만명이 훨씬넘었고 다음엔 1만 8천명이 몰려왔습니다. 그때부터 말씀에 굼주린 사람들이설교를 사방에서 요청해 왔습니다. 어떤 지방에서는 2만명이 넘는 숫자가 가득집회장을 메우기도 하였고 가는 곳마다 사람들은 홍수를 이루었습니다. 1739년11월 11일 그는 낯선 두 신사의 기증으로 대포공장을 개조하여 훌륭한 예배당을 만들었습니다. 사람을 죽이는 대포를 만드는 공장을 사람을 살리는 대포를만드는 공장으로 만들어 이곳을 중심으로 감리교단이 성장하였습니다. 모이는사람이 점점 늘자 웨슬리는 그 많은 사람을 다 돌볼 수 없어 구역마다 '속회'라는 것을 조직하여 일을 나누어 맡겼습니다. 이런 조직적인 체계를 이루자 그후에는 사람이 아무리 늘어도 빈틈없이 착착 모임이 커가게 되었고 이 무렵 비로소 '감리교도'라는 말을 정식으로 쓰기 시작하였습니다. 요한 웨슬리는 감리교도를 이끌며 무엇보다도 신자들에게 '예수님과 같은 사랑의 실천'을 가르치며 설교하였습니다. 모임이 더욱 커지자 국교회에서는 깡패를 동원하여 핍박을본격적으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모임이 줄어들기는커녕 더욱 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웨슬리를 납치한 깡패들은 '이 자식! 너 말씀 전할래, 안 전할래' 협박하였습니다. 그러나 웨슬리는 말씀을 전함으로 그들을 변화시켰습니다.


또한 '나의 교구는 전 세계요, 세계는 나의 일터다.' 외치며 세계선교를 위해 기도하였고 '이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단 한 사람만 남아있더라도나는 그 사람을 위하여 땅끝까지 달려갈 것이다' 이렇게 자신을 채찍질하였습니다. 1753년 그는 직접 발벗고 세계선교에 뛰어들기 시작하였습니다. 맨 먼저와이트 섬으로 가서 전도운동을 벌여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이어서 만섬과실리에 전도하였습니다. 다음으로 아일랜드에 갔습니다. 국교파신자들이 모조리 나서서 난리를 치기도 하였지만 그의 설교는 아일랜드 전체를 복음의 물결로 뒤덥이게 하였습니다. 스코틀랜드에 가서도 무뚝뚝하게 듣던 그들이 웨슬리의 설교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글래스고우와 아버딘, 그리고 더딘을 이어 웨슬리는 계속하여 웨일즈, 카아디프 그리고 리메리크까지 널리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치밀한 계획가운데 미국의 복음역사를 시작하여 1769년 미국에 세 개의감리교 단체가 만들어지게 되었고 그안에 5명의 설교자가 활동하였습니다.


요한 웨슬리--- 그는 외소하였지만 그처럼 작은 몸 안에 세계를 흔드는 힘이들어있었습니다. 요한 웨슬리는 전도하기 위하여 50년동안 말을 타고서 지구10바퀴이상되는 거리를 돌아다녔습니다. 그 틈에 2백권이 훨씬 넘는 책을 펴내었습니다. 50이 넘은 나이에도 하루 평균 32km를 다니며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60년동안 한번도 걸러본적이 없이 새벽 4시면 일어나 기도하고 설교하였고 동생과 만든 수많은 찬송가중에 1778년에는 좋은 것만 뽑아 525곡의 커다란 찬송가를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성경이 만든 사람'이라고하였습니다. 정말 요한 웨슬리는 성경밖에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80세가 되었을 무렵 그가 전도를 다닌 곳마다 어느새 교회가 세워지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는 86세의 나이에 자신을 핍박했던 아일랜드 콘웰에서 2만5천명이넘는 사람들 앞에서 설교를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말년일지라도 자신에게남은 한순간 한순간을 쓸모없이 살아가지 않고자 촌음을 아껴서 복음 전파에힘을 기울였습니다. 그가 쇠약하여 죽기 5일전까지도 그는 32km 떨어진 곳에가서 복음을 전할 정도였습니다. 그가 89세의 나이로 죽을때 두 개의 숟가락과하나의 찻 주전자, 그리고 다 낡아빠진 코트 한 벌밖에 없을 정도로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의 임종을 안타까와 하는 수많은 사람들이몰려들었고 웨슬리는 평안한 가운데 멀고 먼 인생의 길을 다 마치고 천국의 영광의 문을 열고 들어갔습니다. 웨슬리가 이땅을 떠날 당시, 영국에는 294명의설교자와 71668명의 회원이 있었으며 선교부에는 19명의 선교사와 5300명의 회원이 있었고 미국에는 198명의 설교자와 43265명의 회원을 가질만큼 그의 인생은 큰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성찬식의 신학적 의미와 웨슬리의 견해


기독교인들은 성찬식의 의미를 다양하게 이해해왔으며 신약성경은 그러한 이해의

근거를 제공해 준다. 첫째, 성찬식의 이름(Eucharist)이 뜻하듯이 성찬의 중심적인 의미는

감사드림이다. 성찬을 제정하는 성경 구절들(마 26:26-30, 막 14:22-26, 눅 22:14-22, 고전

11:23-26) 모두가 예수께서 하나님께 축사와 사례를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감사는 기쁨

에 가득찬 것이었음을 사도행전(2:46,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은

잘 보여주고 있다. 둘째, 성찬은 하나님께서 이미 하신 일에 대한 기억과 기념을 뜻한다. 누

가복음과 고린도전서에 "나를 기념(anamnesis)하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성찬식을

거행하는 주요 목적 가운데 하나이다. 기념 또는 기억한다는 것은 과거를 단순히 떠올린다

는 것이 아니라 '행하면서' 구체적 사건을 다시금 체험하는 것을 의미한다. 기념하는 것은

창조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하나님께서 하신 모든 일--특히 그리스도 사건--과 그리스도

의 다시 오심(고전 11:26)과 연결되어 있다. 셋째, 성찬은 교제(communion)를 뜻한다. 바울

은 "우리가 축복하는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koinonia)이 아니며 우리가 떼

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고전 10:16)라고 하며 성찬의 뜻을 분명히 하고

있다. 한 덩어리의 떡은 공동체원들 모두가 하나인 것을 상징하며, 성찬에 참여하고 나눔으

로 기독교 공동체가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이다. 열두 사도의 가르침이라고도 불리우는

Didache는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 5:24)는 주님의 말씀을 상기

시켜 이웃과 불화가 있는 사람은 화해할 때까지 성찬에 참여함을 금지시켰는데, 이는 바치

는 예물이 더럽혀지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넷째, 성찬이 갖고 있는 의미는 희생(sacrifice)

이다. 예수께서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눅

22:20)고 말씀하시며 희생의 모습을 보이셨다. 성찬과 직접적인 연관은 없다 할지라도 말

1:11(깨끗한 제물, pure sacrifice), 히 9: 14(흠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요 1:29(하나님의

어린양) 등의 구절은 성찬의 희생적 이미지에 부합하는 것이다. 다섯째, 성찬은 그리스도의

현존이다. 성찬 제정사에서 예수께서는 떡을 그의 몸으로, 포도주를 새 언약을 위해 흘리는

피로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요 6:51-58의 구절이 성찬과 관계된 구절인지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으나, 요 6:51("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에서 보듯 성찬

의 의미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여겨지기도 한다. 여섯째, 성찬은 성령의 역사이다. 고전 12:13

의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라는 세례에 관한 구절을 성찬의 의미를 주는 것으로

확대해 해석하기도 한다. 비록 성경에 직접적인 언급은 없지만, 많은 교부들과 신학자들이

성찬에 있어서 성령의 역사에 대해 깊게 다루었다. 마지막으로 성찬은 종말론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눅 22:16("하나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와 고전 11:26("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

지")에서 언급되듯 성찬은 종말론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 이것은 마지막 때에 그리스도께서

사랑하는 사람들이 천국 잔치에 참여하여 누리게 될 축제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메시

아적인 대망은 기념하여 행한다고 하는 성찬의 의미와 함께 강한 주제를 형성하고 있는 것

이다.

웨슬리는 성찬식에 대해 사변적이기 보다는 실제적이고 실용적인 면에서 접근했다.

그는 자신의 주장대로 일생을 통해 자주 그리고 계속적인 성찬식을 행했다. 그는 성찬식에

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참예하는 높은 특권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실천적인 면과 함께

성찬식에 대해 나름대로 분명한 견해를 갖고 있었다.

1). 웨슬리는 성찬식을 은총의 한 수단(a Means of Grace)으로 여겼다. 성찬식이 내적 은총

의 외적으로 나타나는 표식일 뿐만 아니라 그 은총이 제공되는 방법이라고 했다. "은총의

수단(The Means of Grace)"이란 설교에서 웨슬리는 "떡을 먹고 잔을 마시는 것이 밖으로

드러난 보이는 수단, 즉 그 수단에 의해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우리들의 영혼에 모든 영

적 은총과 의로움, 평화 그리고 기쁨을 부어주시는 수단, 그리고 또한 한 번 부숴진 그리스

도의 몸과 우리를 위해 흘리신 그리스도의 피에 의해 마련된 그런 수단이 아닌가?"라고 말

하고 있다.

2). 웨슬리는 성찬식에서의 그리스도의 실재(the real Presence of Christ)를 믿었다. 웨슬리

에 있어서 그리스도가 현존하는 것은 실제적인 것이나 오직 떡과 포도주 같은 요소에만 한

정되어 위치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웨슬리가 이해한 성찬에서의 실재는 그리스도의 영

광스러운 인간의 몸이 아니라 성찬식의 행위 가운데 우리에게 역사하시는 성령에 의해 주어

지는 능력이었다. 그리스도가 실제 존재하나 그것은 제단에 육체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

라 언제나 인격적인 존재(a personal Presence)이다. 떡과 포도주는 그것들이 상징하는 바를

실제적으로 전달한다. 그 요소들은 하나님의 은총을 전달하는 기관(organs)이며 실제적인

도구로 이 도구에 의해 하나님의 의롭게 하시고 성화시키시는 은총이 믿는 사람들에게 전달

되는 것이다. 웨슬리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살아계신 인격적인 그리스도에 의해 항상 행해지

고 있으며 성찬식에서 능력이 전달되는 것은 성령의 역사라고 믿었다.

3). 웨슬리 또한 성찬식을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에 대한 기념(a Memorial)으로 보았다. 그

러나 이것은 단순하고 의미없는 기억이 아니고 현재 존재하는 구속적인 의미와 직접 연결되

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찬식의 행위는 단지 과거의 역사적 사건을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성

찬에 참여하는 믿는 사람들에게 지금 여기서 그리스도의 수난을 다시 재현하는 것이다. 비

록 웨슬리가 그리스도의 죽음에 주로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그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과

지식의 깊이를 보면 그가 성찬식을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기념과 함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기쁨이 넘치는 축하로 여겼음에 틀림없다.

4). 웨슬리는 성찬식을 하나의 상징(a Symbol)으로 보고 있다. 웨슬리는 하나님께서 성례전

을 주신 것은 인간의 이익을 위함이며 인간이 사용하도록 하기 위함임을 명백히 하면서 하

나님의 말씀과 은사들을 확증하시기 위해 상징으로 인간에게 약속하시고 허락하신 하나님의

통상적인 방법이었다고 강조한다. 우리 인간의 연약함과 결점, 그리고 천상적이고 영적인 것

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무능력 때문에, 하나님께서 밖으로 드러나며 보이는 상징

(outward and visible sign)을 정하셔서 우리들로 하여금 그러한 연약한 것들을 극복하도록

도와주신다고 하였다. 웨슬리는 떡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상징임을 분명히 했으

며 그리스도인들이 그 상징들을 받는 것을 통해서 영적인 영양의 상징들을 받아들인다고 하

였다. 즉 한 분이신 주님께서 성찬식을 주관하시고 그 속에서 하나님 자신을 우리의 양식으

로 주신다는 것이다. 웨슬리는 성찬을 우리 영혼의 양식이라고 하였고, 상징으로서의 떡과

포도주가 단순한 상징 그 자체만이 아니고 오히려 우리들을 위한 생명의 떡, 생명의 양식의

담지자가 된다는 의미에서 웨슬리는 성찬 요소들의 본질보다는 그들의 기능에 보다 관심을

기울였음에 틀림없다.

5). 웨슬리는 성찬식을 종말론(Eschatology)과 밀접하게 연관시켰다. 떡을 떼는 것의 중심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죽음, 부활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의 코이노니아를 통한 성령

안에서의 삶이란 주제들은 사도시대부터 종말론적인 구조에서 이해되어져 왔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도래하고 영원한 사랑에 참여하는 것을 통해 화해의 완성을 이루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교회는 기다려 왔다. 웨슬리가 지은 성찬 찬송들 중 기쁨에 찬 것으로

성찬식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천국과 지상이 만나는 곳에 서 있음을 깨닫게 해주는 것들이

적지 않다.

6). 웨슬리는 성찬식을 성자들과의 교제(the Communion of Saints)로 여겼다. 성찬식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살아계신 그리스도와 함께 하며 그리스도를 통해 다른 사람들과도 함께 한

다. 그러나 이것은 현재에 존재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의 전체 군사들로 영

광 중에 살았던 모든 성자와 믿음의 조상들과 함께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역사와 하나님의

영원한 섭리가 만나고, 시간과 영원이 교차하며,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나눌 수 없는 사랑의

한 교제로 엮어지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웨슬리가 "모든 성자들의 날(All Saint's Day)"을

소중히 했던 것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7). 웨슬리는 성찬식을 그리스도의 희생(a Sacrifice)으로 보았다. 웨슬리에게 있어서 구속과

성찬은 분리될 수 없는 관계를 가진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영혼을 희생 제물로 삼으셨고

하나님의 유월절 양, 흠없는 양이었으며 인류를 위해 희생적으로 죽으심이 성찬식에 드러나

있다고 웨슬리는 묘사했다.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 두 본성이 희생, 즉 인간에 대한 하나님

의 계시와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표현 이 두 가지를 가능케 하였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제사장인 동시에 희생적 제물이었다고 웨슬리는 설명한다.

8). 웨슬리는 성찬식을 또한 우리들의 희생(our Sacrifice)이라고 보았다. 이것은 우리 그리

스도인들이 할 수 있으며 또 해야만 하는 희생을 의미한다. 우리를 희생하는 것으로 성찬식

은 우리를 부르고 있으며 또한 그리스도의 은총을 통해서 성찬식은 우리들로 하여금 희생하

는 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 그리스도의 몸을 드림으로 그리스도

와 연합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없이는 드릴 수도 없고 감히 아무것도 드리지 못하는 것이

다. 로마 카톨릭이 오용하거나 남용했던 것과는 달리, 웨슬리는 성찬식에 대한 희생적인 해

석 가운데에서 매우 가치있는 것을 찾아 발전시킨 것이다.

9). 웨슬리는 성찬 참여자들에 대해 언급하며, 우리들이 갖추어야 할 자세로 죄에 대한 슬

픔, 용서함을 받고자 하는 간절함, 하나님의 법을 지키고자 하는 의지, 그리고 우리의 확신

으로 그것은 은총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의로운 뜻을 이행할 수 있도록 하기에 충분하

다는 확신이라고 하였다. 아무도 성찬을 받을 만한 가치가 없지만, 오직 그리스도를 신뢰하

는 것으로 가치를 얻게 된다. 그렇다고 믿는 자들의 신앙이 그리스도의 현존에 영향을 주지

는 않으며, 오히려 그리스도는 자신의 말씀과 성령에 의해 실제 존재하는 것이다. 주도권은

항상 하나님께서 갖고 있는 것이다. 그와 함께 성찬식에서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기에는 믿음

이 절대 필요한 것이다. 웨슬리는 성찬식을 믿음을 굳게해 주는 의식으로 뿐만 아니라 회심

을 위한 의식으로 여겨 모두에게 개방된 성찬식(Open Table)을 주장하였다. 완전한 기독교

신앙은 우리들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일이지 인간의 일이 아니기 때문에 교회에 들어

오는 것이나 교회의 성찬식에 참여하는 데 있어서 어떤 필수요건도 성립될 수 없다는 것이

다.




웨슬리의 희년운동

-김홍기: [존 웨슬리의 희년사상] 발췌요약-


1. 웨슬리의 사회성화와 희년사상

1. 사회적 성화와 희년사상

① 지상 천국 실현 가능 - 은총의 낙관주의에 의해(상대적 의미의 지상천국)

- 희년사상으로 나타남

② 희년실현을 위한 실천 - 세금제도 고용제도의 개혁, 노예해방, 여성해방, 청지기 의식에 의 한 경제적 분배와 나눔, 재산 상속 반대, 노동조합운동 등

- 실현될 종말론을 믿음

③ 사회성화 및 희년설교

ⅰ. 눅4:18-19의 "은혜의 해"는 "희년"이라고 풀이

-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ⅱ. 산상수훈 강해 - 하나님 나라의 현존을 사회적으로 경험하는 복음

ⅲ. 주기도문 해설 - 지상에서의 하나님 나라 시작(회개하고 믿을 때부터)

ⅳ. 성서적 구원의 길 - 구원의 현대적 의미 강조

- 구원은 영혼의 첫 여명에서부터 영광으로 완성되는 때까지의 하나님의 모든 사역에로 확장되어짐


ⅴ. 마3:2 주석 - 하나님 나라는 지상에서 형성되어 후에 영광 속에 완성됨

- 미래적 구원을 바라기 보다 현재 여기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 가 는 것이 중요


④ 현재적 천국개념과 희년사상은 완전교리와 연결된다.

- 역사 속에서도 완전한 사랑을 실현할 수 있다.

- 완전한 사랑의 승리를 믿는다.

- 희년생활은 마25:35-40의 소자에 대한 사랑이다.(행동 실천을 요구)


2. 해방의 희년사상

① 웨슬리의 사회적 행동주의적 성화사상은 해방의 희년사상으로 나타남

- 성화 : 역사 속에 성육신하는 사랑운동

- 희년운동 : 역사 속에 억눌린 노동자, 농민, 여성 등을 해방시키는 운동

→ 즉, 사랑운동은 예속과 억압에서 해방시키는 운동

② 성화는 성결과 사랑이면서 자유와 해방을 의미한다.

③ 가난한 자들의 투쟁은 신앙의 확신에서 비롯

- 해방의 신앙, 자유의 신앙

- 정치적 실천과 신앙의 표현 동일시

- 정치적 각성과 행위는 회심 이후 즉각적으로 시작됨

④ 성화는 삶의 풍성함을 위해 하나님 나라의 현세적 실현을 위해 투쟁할 것을 요구

- 사랑과 정의의 왕국이 실현되기까지 투쟁하신 예수그리스도를 따라야 한다.

⑤ 웨슬리의 완전이해

ⅰ. 그리스도의 의와 사랑의 실현

ⅱ. 성도의 완전을 개인차원에서 사회적 차원으로 연결

-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일치

ⅲ. 웨슬리의 사랑은 계급과 지위를 무시한 모든 사랑을 대상으로 함


3. 웨슬리의 희년운동과 18세기 영국의 역사적 상황

① 최초의 산업혁명

② 산업화로 인한 노동자의 처후개선을 위해 노동운동 발생

- 지도자는 감리교도가 대부분

③ 계급성을 띈 종교로써 감리교는 민중의 치유와 희망이었다.

- 성공회는 귀족 중심, 청교도는 계급적 지지를 얻지 못함


2. 희년운동에 대한 신학적 가르침

1. 고용체제의 개혁(고용안정화)

① 가난과 실업은 사회적 불평등체제의 결과

- 가난이 게으름 때문이라고 하는 것은 사악하고 악마적인 거짓말

- 일거리가 부족하기 때문에 가난

② 경제적 빈곤의 해결을 위해 잘 조직된 고용체제를 만드는 사회변혁의 필요성을 주장

2. 시장경제의 부당성

① 자본의 독점화를 지적 - 실업증가, 가난, 사회적 불평등, 독점화

② 초대교회 소유의 공유개념에 관심

③ 칼빈적 자본주의 윤리 비판

3. 세금제도의 개혁

① 높은 세금의 원인 - 불, 물, 토지, 국가적 빚을 세금으로 받고 있기 때문

- 곡식과 토지의 착취로 인한 물가상승

② 해결 - 국가적 빚의 해결, 낮은 세금을 내는데 익숙한 부자들과 정치가들에게 큰 세금을 부과

③ 국가경제가 가난한 민중을 위해 발전해야 함을 강조 - 민중의 세금부담으로부터의 자유

4. 민중경제와 경제악의 치유

① 민중을 위한 상품시장의 확보로 일자리를 창출하여 소비확대와 고용안정추구

② 생필품의 가격을 낮추어 민중의 소비공간을 넓힌다.

③ 가난한 민중들의 경제적 곤경을 지적하고 알려낸다. - 민중의 분노표현, 대정부 항의편지

④ 상속의 해악성을 지적 - 후손의 필요외에는 하나님을 영광을 위해 특히 구제에 사용해야 한다.

⑤ 웨슬리의 직업에 대한 가르침과 태도

- 희생의 정신으로, 하나님의 뜻에 내 뜻을 포기함으로써 행해야 한다.

- 향락이나 부에 목적을 두어서는 안되고 하나님의 영광에만 목적을 두어야한다.

5. 돈 사용의 3대 원리

① 열심히 벌어라

- 사는 것 없이, 이웃에게 상처를 주는 것 없이, 이웃의 사업을 해치는 것 없이 벌어라

- 이웃에 해를 입히는 것은 곧 이웃의 피를 흘리는 것과 같음

- 부지런히 돈 벌어라, 오늘 일을 내일까지 미루지 말라.

② 할 수 있는대로 많이 저축하라. - 욕망을 위해서나 사치를 위해서나 낭비하지 말라.

③ 할 수 있는대로 많이 주어라.

- 1, 2원리는 3원리 위에 존재한다.(3원리를 가장 중요시)

- 경제적 재분배가 가장 중요

6. 청지기 의식

① 하나님을 대신하여 하늘과 땅을 다스리는 책임을 맡은 청지기로서의 인간

② 우리는 우리 자신이 먹고 옷 입는 것을 위해 돈을 써야 한다.

③ 우리는 우리의 아내, 자녀 그리고 우리 집에 딸린 사람들을 위해 돈을 써야 한다.

- but 더 안일하고 편리하게 그리고 사치하게 살도록 돈을 써서는 안되며

꼭 필요하고 필수적인 것을 위해서만 돈을 써야 한다.

- 그 외의 모든 소유는 하나님께 돌려야 한다.

④ 청지기의 의무

- 우리는 갖고 있는 모든 것을 주님께 빚지고 있으며 그 빚을 갚을 의무가 있다.

- 청지기는 오직 주인의 기쁨을 위해, 주인의 뜻대로 사용해야 한다. 우리의 기쁨을 위해 사용할 권리가 없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7. 재산상속의 반대

① 재산상속에 반대, 경제적 분배운동 주장

② 필수적인 것은 상속해야 하지만 그 나머지는 모두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

③ 재산의 사회화는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로 헌납하는 것을 의미하며, 동시에 하나님 께 꾸어 주는 것이고 영원한 상급과 이자를 하나님께 받을 것이라고 주장

8. 돈 사랑의 위험 - '부에 관하여'

① 돈 사랑은 무신론의 유혹을 받을 위험이 있다. (돈을 사랑하여 하나님을 보지 못함)

- 어리석은 자여, 당신이 하나님을 볼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도 당신을 볼 수 없다 고 상상하는가? 웃어라! 놀아라! 노래하라! 춤추어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대하여 하나님이 당신을 심판하실 것이다.

② 돈 사랑은 무신론에서 우상숭배로 쉽게 전이된다.

- 창조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피조물을 사랑하게 된다.

③ 돈 사랑은 안목의 정욕에 휩싸이게 한다.

- 부자들은 눈을 즐겁게 하는 새 것과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는 심미주의에 빠진다.

④ 돈 사랑은 이 생의 자랑 속에서 행복을 추구한다.

- 런던 사람들은 부와 선을 동일시했다.

⑤ 돈 사랑은 자기의지와 이기주의에 빠지게 한다.

-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는다.

⑥ 교회가 물량화 되고 부를 축적하면서 성령이 떠난 교회가 되었다.

9. 하늘 나라의 저축

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보물을 하늘에 저축 - 헌금, 이웃을 구제하고 나누어줌을 뜻

② 마25:34-46의 소자들에게 나누어주고 베풀기 위해 항상 준비해야 한다.

③ 억눌린 자를 변호하고 고아를 위로하며 과부에게 남편이 되어 주어 마음속에서 기쁨 의 노래가 나오도록 도와야 한다.

④ 평신도 설교자들에게 부를 추구하는 부자들을 경고하는 설교를 하도록 가르침

10. 민중경제 : 민중을 위한 복음

① Albert Outler - 웨슬리는 민중의 신학자

- 평범한 백성을 위해 평범한 진리를 선포

② 개인적 성화 뿐 아니라 사회적 해방과 역사적 변혁의 의미에서 보편적 성결과 행복 에 대하여 강조

③ 인간존재에 대한 관심을(교육, 가난, 참여, 기본적 요구 등) 성화의 과정의 한 부분으 로써 승화시킴

11. 희년의 목표 : 그리스도를 본받는 사회

① 천국관과 희년사상의 핵심 - 그리스도를 본받는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성화와 완전

② 산상수훈의 핵심 - 사회적 성화의 완성(그리스도를 본받아 사회변혁을 목표로 한다)

③ 성화사상의 중심 - 그리스도를 본받는 모방의 윤리

- 마5:48 성도는 하나님께서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하게 되어야 함

-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은 완전하게 되어 가는 과정 중에 있다

④ 성도의 목표 - 단순함과 순수함

- 완전이란 단순함과 순수함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

- '건강한 눈'(마6:19-23)은 목적의 순수성, 즉 한가지 일에 눈을 고정시 키는 것을 의미

⑤ 자비와 평화조성과 온유함과 인내와 심령의 가난은 인간사회 속에서 그 미덕을 발휘

⑥ 세상 속에서의 신앙훈련과 성화훈련을 주장


3. 희년운동의 실천

1. 노동운동

2. 여성해방운동

3. 노예해방운동

4. 교도소개혁운동

5. 사회봉사운동




존 웨슬리 부흥운동의 사회개혁 활동

1. 병자와 가난한 자 구호 :

2. 교육활동 :

3. 교도소 개혁 활동

4. 여성의 지위 향상과 지도력 배양 :

5. 노예제도 반대 투쟁


1. 병자와 가난한 자 구호

웨슬리는 가난한 자들에 관해 구호 차원을 넘어 이들의 비참한 상황을 개선하고 제거하는 것을 기독교의 참된 사명으로 강조하고 실행한 영국의 첫 번째 인물이며, 이를 통해 영국의 사회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웨슬리의 가난한 자들에 대한 사역에 관해 믹스(M. Douglas Meeks)는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웨슬리의 사역은 가난한 자들을 먹여주고 입혀주며 거처할 곳을 제공해 주는 일, 실직자들에게 일자리를 찾아주고 일자리를 마련해 주는 일, 가난한 병든 자들과 수감되어 있는 자들을 방문하는 일, 곤궁에 처한 자들을 위해 새로운 형태의 건강교육을 고안해 전달해 주는 일, 가난한 자들에게 책을 배포해 주는 일, 그리고 가난을 낳는 경제문제에 대한 구조적인 질문을 제기하는 일들을 포함했다. 그러나 웨슬리의 가난한 자들에 대한 행위는 단순히 가난한 자에 대한 봉사가 아니라 가난한 자들과 함께 한 삶이라는 더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그는 실제로 그들의 침상으로부터 병에 전염되기까지 하는 의미심장한 방식으로 그들과 삶을 공유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 자신의 가난한 자들을 위한 그리고 그들과 함께 한 삶의 형태를 취하는 것을 의미했다.



참으로 웨슬리는 에드워즈의 말처럼, “가난한 자들을 발견했고…가난한 자들의 가장 중요한 친구였다.” 그는 일생 가난한 자들을 보살폈고 그들에게 모든 것을 다 주었다. 그는 1743년에 “만일 내가 내 뒤에 10 파운드를 남겨 둔다면 당신과 모든 사람들이 내가 강도와 도둑으로 살았다고 내게 대해 증거하라”고 했다. 이는 가난한 자들에게 모든 것을 다 주겠다는 그의 결심임을 1776년의 다음과 같은 언급이 뒷바침 해준다: “나는 런던과 브리스톨에 은수저 둘씩을 소지하고 있다. 이것이 현재 내가 가지고 있는 금은제 식기류 전부이다. 나는 내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빵을 필요로 하는 동안에는 더 이상 어떤 것도 사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세상을 떠나기 전날밤에, “86년 넘게 나는 정확하게 나의 셈을 해왔다. 나는 할 수 있는 한 저축했고, 될 수 있는 대로 내 가진 모든 것을 주었다고 확신 되기에 만족스럽다”라는 말로 그의 회계장부를 마감함으로써 그 약속을 충실히 지켰다. 그는 마지막 길도 가난한 자들과 동행하길 원했던 그의 뜻에 따라 “6명의 가난한 사람들”에 의해 무덤으로 운구 되었는데, 그는 그 몫으로 그들에게 각 1 파운드씩을 남겨 두었다. 이처럼 웨슬리는 가난한 자들에게 모든 것을 주는 정신으로 살았고 또 그렇게 죽었다.


웨슬리의 가난한 자들에 대한 이러한 애정과 관심은 본질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정신에서 연유된 것이겠지만, 그들과의 밀접한 접촉을 통해 그들의 비참한 상황을 목격함으로 더 심화되고 활력화 되었다 하겠다. 그가 가난한 자와 병든 자에 대한 구호를 새롭게 시작한 1740년 후반부와 1741년 초의 저널과 일기에는 이러한 접촉에 대한 언급들로 가득하다. 이러한 접촉을 통해 그는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벌레가 끼고 난방이 안되며 의류와 음식이 제대로 없는 지하실과 다락방에 거주하고 있고, 병이 들었으나 도움의 손길은 물론 의약품도 없이 지내는 비참을 체감했다.


이러한 곤궁에 처해 있는 자들을 돕기 위해 메도디스트들은 매주 모금을 했다. 그것이 메도디스트들이 구호활동을 위해 시도한 최초의 그리고 가장 일반적인 방법이었다. 추수작황이 나쁘거나 혹독한 추위 또는 다른 갑작스러운 상황으로 어려움이 야기된 경우에는 구제를 위해 특별모금이 행해졌고, 때로는 웨슬리가 직접 거리에 나가 모금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웨슬리와 메도디스트들은 이러한 협의적 의미의 자선만으로 만족해 하지 않았다. 그들은 가난한 자들에게 적극적인 기회를 만들어 주기 위한 어떤 제도적인 해결책을 모색했다. 그 결과로 모금을 통한 긴급구제에 덧붙여 가난한 자들을 돕기 위한 적극적인 두 방법이 시도되었는데 하나는 실업자 고용 프로젝트이고 다른 하나는 대여금고(lending- stock) 프로그램이었다. 이러한 계획의 진의에 대해 브레디는 “특혜를 입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진취적인 기상과 독립심 표출에 자극을 주고, 특권층들에게는 사회적인 책임성 분출에 자극을 주고자 하는 의도였다”고 적합하게 해석했다. 웨슬리의 1740년 11월 25일자 저널에 보면 그 실업자 고용 프로젝트의 시도에 대한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실업자들을 고용하기 위한 몇 몇 방안이 제안된 후에 우리 형제 몇이 추천한 것을 시도하기로 결정했다. 우리가 목적하는 바는 가능한 적은 비용으로 그들을 가난과 나태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었다. 그것을 위해 우리는 가장 가난한 자 12명을 교사 1명의 지도 하에 봄이 오기까지 4달간 신도회의 방에서 목화 손질과 방적 일을 할 수 있도록 고용하기로 했다. 그 계획은 이루어져 그들은 고용되었고 자신의 노동력을 통해 생산을 했다.


이러한 영역에서의 노력은 남자들에게만 그치지 않고 여자들에게도 다음과 같이 확대 되었다. 웨슬리는 1741년 5월 7일의 저널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현재 일거리가 없으나 고용을 희망하는 여인들을 뜨개질하는 일에 모두 고용할 것을 그들(연합 신도회 회원들)에게 말했다. 우리는 이들에게 처음에는 그들이 일한 것에 상응하는 품삯을 지불할 것이고 후에는 그들 생활의 필요에 따라 더 주도록 할 것이다.



이 일들이 얼마나 오래 지속되었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로써 도움을 받았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웨슬리가 이 일을 시도한 주된 가치는 그 규모나 물질적 성공의 측면보다는 수반된 문제들에 접근해 간 그의 인도주의적인 정신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웨슬리는 이 일로 인하여 공개적인 모욕과 의심을 감수해야 했다.


‘대여기금’(Benevolent Loan Fund) 프로젝트는 더 흥미롭다. 이 프로그램은 3개월간 무이자로 돈을 빌려주는 긴급지원 제도로, 웨슬리가 1746년 6월에 30파운드의 기금으로 시작했다. 대출 한도는 처음에는 20실링이었는데, 기금이 1767년에 120파운드로 증가되면서 대출액도 5 파운드로 인상되었다. 이 대여기금으로 래킹톤(James Lackington) 같은 사람은 서적상으로 성공하여 유명한 인물이 되기도 했고, 많은 사람들이 혜택을 입어 곤경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웨슬리는 가난한 병자들에 대해서도 기금을 통한 후원을 넘어 더 근본적인 도움을 주고자 다방면으로 인도주의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병자들을 방문하고 보살핀 것은 물론, 1746년 12월에 ‘무료 진료소’(dispensary)를 열고 이듬 해 6월에는 원시 의학(Primitive Physic)을 출판했다. 이는 진료도 받지 못한 채 황폐화 되어가는 많은 가난한 병자들에게 더 전문적인 도움을 제공해 주고자 하는 결심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영국 최초의 것으로 평가되고 있는 이 ‘무료 진료소’를 통해 메도디스트들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의학적인 혜택을 입었다. 웨슬리의 원시 의학에 대해서는 여러 해 동안 비난과 조소가 있었으나, 영국의 공중보건 감시인인 의사 뉴맨(George Newman)은 이 책이 영국인들의 가정 위생, 개인의 청결, 가정의 건강법과 일반 건강에 현격한 공헌을 했다고 높이 평가했다. 위어마우스에 의하면 런던의 한 신문도 그 책의 처방전을 높이 추천했다고 한다. 이 책은 웨슬리의 생존 시에 23판이나 출판될 정도로 폭 넓게 순환되었고, 1828년에 마지막으로 32판이 출판되었다. 웨슬리의 이러한 가난한 병자들에 대한 뜨거운 관심과 애정은 그가 1747년에 스미스(John Smith)에게 보낸 그의 의학에 대한 관심과 유의를 정당화하는 다음과 같은 편지에 잘 드러나 있다.



내가 정규 의사가 아니라는 이유로 저 가난하고 불우한 사람들이 죽게 내버려 두어야 하는가? ‘나는 당신을 치료할 길을 알고 있지만 나는 의과대학 출신이 아니니 당신은 미드(Mead) 박사에게 사람을 보내야 합니다’라고 말하라는 것인가? 미드 박사가 그의 마차를 타기도 전에 그 사람은 죽어 관속에 들어가 있을 수도 있다. 그리고 의사가 도달 했다해도 사례비는 어디에서 마련할 것인가?… 그러므로 합당한 치료대신 환자는 죽고 하나님은 그의 피 값을 내 손에서 찾으실 것이다!



이러한 것들과 연관되어 1785년 9월에 “메도디스트 고유의 독창적이라 할” ‘나그네 우호 신도회’(Strangers’ Friend Society)가 메도디즘 내에 등장하였다. 이것은 가난하고 병들고 친지가 없는 일반 사람들을 위한 봉사 센터로, 이후에 메도디스트 신도회가 설립되는 곳마다 함께 세워졌다.


웨슬리와 메도디스트들은 이처럼 가난한 자와 병든 자에 대해 다방면의 구체적이고 인도주의적인 도움의 손길을 폈다. 그리하여 그린은 이 메도디스트 운동에 관해 “가난한 자들의 죄, 무지, 육신적인 고통, 그리고 사회적인 퇴화를 치유해 주려는 한결 같은 시도가 그 부흥운동의 고귀한 결실이었다”고 했다. 참으로 웨슬리와 그가 중심이 되어 추진한 이러한 그의 운동은 영국의 무시당해 온 대중들에게는 희망과 포부 그리고 자기존중과 통제라는 돈으로 살 수 없는 은택을 가져다 주었다.


그러나 우리가 더 눈여겨 보아야 할 점은 그가 빈곤의 원인을 분석함으로 가난한 자들의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접근을 시도했다는 점이다. 당시 사회적인 상황에 대한 장기적인 개선을 방해하는 주요인들 중의 하나는 앞에서도 언급한 바 있듯이 가난을 신적인 형벌의 징표 혹은 게으름이라는 자기책임의 결과로 보는 잘못된 견해였다. 이 때문에 가난한 자에 대한 무관심이나 냉대가 팽배하여 문제해결을 어렵게 했다. 그러나 웨슬리에게 있어 가난의 진정한 원인은 신의 형벌이나 가난한 자들의 게으름 때문이 아니었다. 그에게 있어 그것은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극복해야 할 불행이었다. 그의 다음과 같은 기록은 가난은 그들의 게으름 때문이라는 전통적인 견해를 강하게 부정한다.



나는 할 수 있는 한 많은 사람들을 방문했다. 나는 지하의 작은 방에 있는 사람들을 발견했다. 어떤 사람들은 다락방에서 추위와 굶주림, 게다가 허약과 고통으로 반쯤은 기아상태에 있었다. 그러나 그들 중 방 둘레를 기어 다닐 수 있는 실직자는 발견치 못했다.


나는 가난하고 병든 많은 사람들을 방문했다. 간신히 걸을 수 있는 몇 사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을 했다.



그리하여 그는 그들이 게으르기 때문에 가난하다는 일반적인 견해를 악의적이고 악마적인 거짓말이라고 반박했다. 더 나아가 그는 1772년에 작성된 현재의 생필품 부족에 대한 사고들(Thoughts upon the Present Scarcity of Provisions)이라는 글을 통해 자신의 대중 경제적 지식과 스스로 체험한 목격에 근거하여 일반적인 빈곤의 원인들을 밝혀내려 노력했다. 마르크바르트의 말처럼, 이것은 웨슬리의 “뜨거운 항의”였다. 웨슬리는 그 글에서 일자리 부족의 문제, 밀을 술제조에 소비함으로 생기는 곡물부족의 문제, 상당량의 곡물들이 부자들의 말사육에 소요됨으로 생기는 곡물 결핍의 문제, 농장에 대한 소수 자본가들의 독점 문제, 과도한 세금부과의 문제들을 지적했던 것이다. 그는 그 글을 결론적으로 요약하길, “식량이 부족하여 전국에서 수 천명이 죽어가고 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원인들이 있겠지만 특히 양조, 세금 및 사치가 주요인이다”라고 했다. 이러한 웨슬리의 노력, 곧 전통적인 견해를 수정하며 사회적인 불의를 근본부터 찾아 내려는 웨슬리의 문제제기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입장을 철저히 변화시켰고 사회적인 문제의 해결책을 비로소 해결 가능한 영역으로 이끌어 내는 중대한 영향력을 이룩했다.


이처럼 메도디즘은 가난하고 병든 자들에 관해 처음에는 기금을 통한 구호로 출발했으나, 점차 새로운 제도를 통해 그들의 상황을 호전시키고 타개해 나가려는 적극적인 사회활동으로 차원을 높였고, 후기에 들어서는 가난을 만들어 내는 불의한 구조를 개선하려는 단계로 발전해 나갔다.



 


2. 교육활동



복음화 사업, 사회구호활동과 더불어 웨슬리와 그의 운동에 걸출한 특징을 이루는 것은 교육적인 활동과 공헌이다. 웨슬리와 그의 운동이 당시 영국의 상황에 기여한 교육적인 공헌은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영국의 대중들에게 보편적인 교육의 기회를 증진시킨 개척자라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대중교육의 질을 높였다는 점이다.


웨슬리 운동의 교육적인 업적은 당시의 교육적인 이상과 실천을 비교해 보면 뚜렷이 드러난다. 18세기 영국의 상황을 보면 교육은 특수 계층을 위한 것이었다. 대중, 특히 가난한 자들은 교육적인 혜택에서 철저히 배제되어 있었는데, 이것은 하나의 어떤 조직적인 정책에서 기인된 것이었다. 당시 유럽에는 교육을 소수의 계층에만 제한시켜야 한다는 사상이 지배적이었다. 그 이유는 아마 소수 지배계층의 영속적인 특권화에 있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영국에서는 베이컨(Francis Bacon)이 교육을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제한시키자는 견해를 표명한 후 이것이 교육적인 상황을 지배했다. 1714년에 맨데빌(Bernard de Mandeville)은 그의 악명 높은 자선과 자선학교들에 대한 소론(Essay on Charity and Charity Schools)에서 가난한 노동자의 자녀들에게 읽고 쓰는 것을 가르치는 관례를 강하게 비판했다. 그에 의하면 이러한 재능들은 경건심을 저하시키고 게으름과 악행을 촉진시키며 범죄율을 증가시킨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가난한 노동자의 지식 정도는 그들 직업의 테두리 내에 제한되어야 하며 그들 직업에 관련된 것 이상을 능가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1763년에 이르러 좀더 개혁적인 성향의 넬슨(James Nelson)이 어린이들의 관리에 관한 소론(An Essay on the Government of Children)에서 하층민들에게 읽기 교육을 시키면 그들이 머물고 있는 암흑과 무지를 제거해 줄 수 있게 될 것이라는 제안을 하면서 그러한 생각이 교육 개혁자들의 마음을 지배하게 되었다. 그로 인해 가난한 자들은 쓰기와 산수의 기초를 배울 수도 있다는 사상은 바람직한 정책영역에서 완전히 배제되어 버렸다. 소위 개혁적인 교육가로 유명한 한웨이(James Hanway)는 1786년에 그 당시 편만해 있던 견해를 표명했는데, “읽기는 사람들의 도덕에 도움이 되지만 쓰는 것은 불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러기에 당시 영국에는 가난한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자선학교들이나 기타 사설 기관들이 있기는 했지만 그 운영체계나 교육의 질적 내용에 있어서는 크게 평가할만한 정도가 못되었다. 바디(Alfred A. Body)는 “노동 계층들에게는 18세기 말까지는 교육이라는 개념조차도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자선학교는 그 목표조차 노골적으로 공리주의적이었을 뿐이다”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웨슬리와 그가 중심을 이룬 부흥운동은 영국의 대중 교육사에 새롭고 중대한 전기를 이룩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에드워즈는 말하길, “조지 왕조 시대에 영국에서 누구도 대중교육의 성장을 그처럼 촉진시킨 자는 없었다”고 평했다. 브레디는 이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교육이 인격을 확립시키고 삶을 고귀하고 유용하게 그리고 협동적으로 영위할 수 있는 능력을 분급해주는 것을 의미한다 할 것이면, 그런 측면에서 웨슬리는 당시대의 비할 바 없는 가장 위대한 교육자요 전 시대를 망라해 가장 훌륭한 교육자의 한 사람이었다.



웨슬리와 그의 설교자들은 많은 사람들이 반(semi)미개인적인 상태에 있고 무지와 부도덕에 깊이 빠져 있으며, 더러움과 비참함 속에 내던져져 있음을 발견해 그 시대의 그러한 사회적 상황에 주의를 기울여 그것에 훌륭하게 대처했다는 것이다.


그러면 메도디스트 운동의 교육개혁을 위한 구체적인 활동은 무엇이었는가? 웨슬리의 교육적 관심은 그의 옥스포드 신성클럽 시절에 가난한 자들과 수감자 자녀들을 위해 세웠던 학교들에로 거슬러 올라간다. 하지만 웨슬리의 대중 교육에 대한 구체적인 공헌은 그가 1739년 6월에 설립을 추진한 브리스톨 킹스우드(Kingswood)의 광부들을 위한 학교로부터 출발한다. 웨슬리는 이 학교에 연이어 브리스톨(1739년), 런던(1739년), 뉴캐슬(Newcastle)과 다른 지역에도 영세민과 고아들을 위한 학교를 설립했다. 물론 이 학교들이 가난한 자들을 위한 유일한 것은 아니었다. 18 세기 영국에는 자선학교들이 산재해 있었고 종교적인 기숙사 학교들도 새로운 현상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웨슬리가 설립한 이 학교들은 그가 기울인 교육적 노력을 통해 교육의 태도를 변화시키고 교육에 있어서의 계층적인 편견을 제거하는데 중대한 기여를 하게 되는 기틀이 되었다는 점에서 기존의 학교들과는 구별이 된다. “이 학교들은 18 세기 말의 영국국교와 비교해 메도디즘을 영국 대중교육의 가장 중대한 힘이 되게 한 많은 주간 학교들(day schools)의 선구자였다”는 말드윈의 평가가 이를 뒷바침해 준다.


이 학교들은 어린이들은 물론이고 성인 교육에도 기여를 했다. 웨슬리는 킹스우드 첫 번째 학교를 설립한(1739) 후 이 학교의 본분에 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평상적인 시간에는 주로 가난한 자의 자녀들에게 주로 읽고, 쓰고, 셈하는 것을 가르치도록 계획되어 있다.… 어린이들과 한자리에서 교육시키기에 적합치 않은 나이든 사람들은(우리는 회색의 머리가 된 자를 포함한 모든 연령층의 학생들을 기대했다) 그들의 일에 지장을 받지 않게끔 이른 아침이나 밤 늦은 시간에 교육을 받게 된다.



여기에 언급되고 있는 사람들은 어린이들과 마찬가지로 하위 계층 출신의 성인들이 분명하다. 특히 광산 노동자들과 서민들로서 유년기에 학교교육을 받을 수 없었고 그래서 문맹으로 남을 수 밖에 없었던 사람들이었다. 웨슬리는 이들에게 인간의 존엄한 삶과 새로운 자의식 및 더 분명한 자기고찰을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려고 했던 것이다. 바디는 이를 “최초의 정규 성인 야간학교”로 평한다.


웨슬리가 기숙사 학교제도로 1748년에 설립한 새로운 킹스우드 학교는 교과과정상의 괄목할만한 점을 보여 준다. 거기에는 읽기, 쓰기, 셈하기는 물론 영어, 불어, 라틴어, 희랍어, 히브리어, 수사학, 역사, 작문, 지리, 대수, 물리, 원예, 음악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는 당시의 관점으로 볼 때 매우 혁신적인 것으로서, “참된 교육의 목표에 대한 선각자로서의 웨슬리의 식견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할 것이다. 이 학교는 시설이나 수준 등 여러 면에서 훌륭했으나, 휴일도 없고 노는 행위도 금지된 채 아침 5시에서 오후 8시까지 엄중한 스케줄에 따라 움직여야 하는 규율의 지나친 엄격성에 대해서는 후대 학자들에게 공격을 받았다.


웨슬리는 또한 대학을 설립하여 가난한 계층 출신들도 최고 지성의 자리에 접근할 수 있는 길을 예비하기도 했다. 그는 6명의 메도디스트 학생들이 옥스포드 대학에서 붸겨나고 한 명이 입학 거부를 당했을 때, 이를 전화위복으로 삼아 킹스우드에 대학을 세웠다. 이 킹스우드 대학에서 학생들은 3년 동안에 대다수 옥스포드 학생들이 7년 동안 배우는 것보다 더 많이 배울 수 있도록 열심히 공부해야 되었다. 교과과정은 신학분야와 고전어 뿐만 아니었고 고대 저술가들, 역사, 철학, 수학, 물리학, 지리학, 및 고전과 현대문학까지도 포괄함으로써 성공적으로 졸업하게 되면 상당한 학문적인 수준에 도달될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가난한 가정 출신의 대다수에게 기초적인 학교 교육, 특히 대학 교육을 받을 수 없게 했던 계층간의 장벽을 극복하는 젊은이들이 나타날 수 있는 원칙적인 길이 열리게 되었다.


그러나 웨슬리의 교육활동에 있어 더 중시해야 할 점은 어린이 교육과 양육에 대한 책임의식을 일깨우고 유지하려 했던 그의 넓고 깊은 의식의 측면이다. 웨슬리는 메도디스트 단체를 통해 어린이 교육에 대한 당시의 결핍된 자리를 보충하여 메꾸려고 노력했다. 이를 위해 웨슬리가 노력한 구체적인 부면들에 대해 마르크바르트는 다음과 같이 열거했다.



그는 어린이 양육과 교육에 대하여 반복하여 설교하고 대화를 나누었으며, 그가 설립한 학교들을 정기적으로 점검했고, 어린이들과 대화를 나누었고, 스스로 수업을 진행하기도 하며, 독자적인 교과서를 저술했고, 수업과 교과과정을 구상했으며, 부모들과 교육문제에 대한 상담을 했고, 교사들을 찾아가서 나타나는 모든 종류의 어려운 점들을 해결해 나가곤 하였다. 학교의 운영은 처음부터 여러 사람들에게 맡겨 졌으나 그렇다고 그의 학교에 대한 상급 감독권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설교자들은 정기적으로 교육문제를 그들의 설교 주제목록에 넣었다.…


이렇게 해서 영국의 모든 메도디스트 신도회들에서는 이 분야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고, 하나님 앞에서의 책임감 속에 어린이들의 교육 장소와 주의 깊은 교육에 힘을 기울여야 된다는 의식이 일깨워 졌다. 이로 인해 가난한 가정의 자녀들에게 거의 유일한 교육 기회를 제공하던 소규모의 기초 학교들이 지역 공동체의 차원에서 수 없이 세워지게 되었던 사실은 결코 기이한 일이 아니었다.


웨슬리는 주일학교와 문서 교육이라는 두 가지 다른 면을 통해서도 대중 교육에 기여 했다. 그 주일학교는 오늘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는 개념이 다른 것으로 어린이들에게 읽기와 쓰기, 교리 공부, 그리고 셈하기 등을 가르치는 일반 교육과 종교교육을 병합시킨 것이었다. 이 주일학교 활동은 다른 교육적인 조치들을 효과적으로 보충할 수 있었다. 평일에 수업하는 학교를 다닌다는 것은 어린이들이 돈벌이가 필요 없다는 전제 하에서만 가능했다면 주일학교는 평일의 돈벌이에 관계 없이 모든 어린이들에게 개방되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면에서 이 주일학교는 대다수의 많은 어린이들에게 유일한 교육의 기회를 제공했는데, 웨슬리의 죽음에 이르러서는 메도디스트 신도회의 그러한 주일학교가 영국 전역에 산재해 있었다. 물론 웨슬리가 이 주일학교를 창안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그 길을 다졌고 메도디스트들이 그것을 발전시켰으며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것을 장려하였다. 메도디스트들은 웨슬리로 하여금 영국 전역에 이 제도를 개척하도록 후원하였고, 그 주일학교들은 대중 교육에 많은 효력을 발휘했다.


웨슬리가 교육의 성장을 촉진시킨 또 다른 길은 대중들에게 읽고 지식을 얻을 문서들을 출판하고 또 그것들을 저렴한 가격으로 널리 배포시킨 것이었다. 그린(Richard Green)에 의하면 웨슬리 형제들은 생애 동안 453편의 작품을 출판하였는데 그 중 233개는 자신들의 직접적인 저작이고 220편은 편집이나 발췌한 것이었다. 이 작품들은 종교와 윤리로부터 과학, 의학, 역사, 그리고 영어 드라마까지를 망라하고 있다. 그 중 가장 두드러진 것은 웨슬리가 1749-1755년 사이에 고전과 현대문헌을 망라해 50권으로 편집해 출판한 “기독교 총서”(Christian Library)였다. 이러한 그 자신의 저작들, 정기 간행물들, 그리고 50권으로 된 그의 기독교 총서는 대중들에게 유용한 문헌을 덧붙여 주었다. 낮은 가격에도 불구하고 구입할 능력이 없는 이들에게는 이 책들이 선물로 주어지기도 했다.


이 책들과 독서를 통해 메도디스트 모임이 교육의 증진에 미친 영향 또한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 메도디스트 모임들은 웨슬리를 통해 교육의 장이 되었으며 이곳에서 웨슬리가 출판한 책들에 대한 체계적인 독서가 행해졌다. 이러한 독서를 통해 이들은 삶과 신앙의 문제들에 대해 생각하고 또 서로 간에 대화를 나누도록 유도되었는데, 마르크바르트는 그로 인해 “이들의 종교적, 도덕적, 정치적, 그리고 문화적 지식의 지평은 확대되었고 이로부터 영국 전체의 교육제도에 일련의 충격과 자극을 주게 되었다”고 한다.


18세기의 영국의 사회적 상황에서 반추해 볼 때, 웨슬리와 메도디스트들이 대중 교육에 남긴 이러한 자취들은 사막의 오아시스에 비견될 수 있을 것이다.


 


3. 교도소 개혁 활동



교도소 방문과 수감자들에 대한 구호는 옥스포드의 신성크럽 시절부터 웨슬리의 사역에 있어 중요한 국면이었다. 그러나 그의 교도소 사역은 복음적인 회심 이후 더욱 밀도 있게 실행되었다. 단순한 구호 차원을 넘어 교도소 개혁을 위한 노력에로까지 발전해 나가게 되었던 것이다.


복음주의 운동 속에서 웨슬리가 행한 교도소의 첫 번째 활동은 수감자들을 위한 설교였다. 하나님의 은혜에 관한 그의 설교는 사형선고를 받은 많은 이들에게 기독교 신앙을 갖게 했고, 그 신앙은 그들로 하여금 영생에 대한 희망을 갖게 하여 죽음의 공포를 이겨내고 내적인 평화 속에서 단두대로 가게 하는 힘이 되었다. 봉사와 복음선포라는 웨슬리 운동 전체를 포괄하는 의미로 볼 수 있는 이 교도소 설교 활동은 웨슬리에게 남다른 의미를 주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웨슬리는 1738년 9월 이후 9개월 동안에만 런던, 브리스톨, 그리고 옥스포드에 있는 교도소에 67회 이상 방문 및 설교를 수행했고, 80세가 넘어서도 그 일을 지속했다. 그리고 1778년의 연회에서는 메도디스트 설교자들에게 교도소 방문을 의무로 규정했다.


‘모든 인간에게 무제한으로 부어지는 하나님의 사랑과 오직 은혜로 말미암는 의인’에 관한 웨슬리의 설교는 수감자들로부터 조소를 당하기도 했으나 거의 항상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그리하여 수감자들은 그와 대화하길 원했고 설교해 주기를 간청했다. 그러나 국가 관리들과 교구 목사들의 방해가 웨슬리로 하여금 수감자들의 바라는 바에 자유롭게 응할 수 없게 했다. 웨슬리가 자주 방문 금지를 당한 이유는 웨슬리가 대상자들을 “악하고 미치게 만든다”는 억지스러운 것이었다. 그러나 마르크바르트는 웨슬리가 단순한 임석을 넘어 수감자들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심지어는 몇몇 수감자들의 사면을 위해 노력을 하는 것이 싫었고 또한 그의 다른 활동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에 국가 관리들과 교구 목사들이 웨슬리의 교도소 활동을 차단하려 했다고 더 설득력 있는 지적을 하였다.


다음으로 우리가 살펴 볼 것은 웨슬리 운동의 수감자들에 대한 인도주의적인 구호 활동이다. 웨슬리의 모범에 따라 수감자들에 대한 활동은 병들고 가난한 자에 대한 활동과 마찬가지로 메도디스트 내에 자동적인 활동이 되었다. 메도디스트들의 수감자들에 대한 활동은 설교와 위로 권면에만 머물지 않고 필요한 물품 전달, 병간호, 석방을 위한 탄원서 제출, 그리고 사형수들에 대한 형장까지의 동행과 보호 등을 수반했다. 이 일들은 물질적인 부담, 건강의 위협, 그리고 공개적인 조소를 감내할 헌신이 필요했는데, 피터스(Sarah Peters)와 톨드(Silas Told)는 그러한 수행과 헌신의 대표적인 실례였다.


웨슬리와 메도디스트들의 이러한 활동은 사람들로 하여금 아무리 낮은 처지에 있는 자라도 그의 영혼의 고귀성으로 인해 고귀한 존재라는 인식을 가지게 했고, 빚진 자들이 더 이상 비속한 짐승이나 무도하고 헤픈 무뢰한으로 간주되지 않는 분위기를 조성했다. 그러나 그들의 활동은 이러한 간접적인 효과만으로 끝난 것은 아니라, 교도소 상태를 개선시킨 실질적인 결과를 낳기도 했다. 메도디스트의 부흥운동에 영향을 받은 데이지(Abel Dagge)라는 간수가 브리스톨의 뉴게이트 교도소를 개선케 되었던 사실이 이를 증명해 준다. 데이지는 존슨(Samuel Johnson) 박사의 칭찬을 받았던 인물로 그의 교도소 개선사업은 웨슬리의 충심어린 찬탄을 불러 일으켰다. 그리하여 웨슬리는 1761년에 [런던 신문](The London Chronicle) 편집자에게 편지를 보내 브리스톨의 뉴게이트에서 발생한 변화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지옥의 가장 저주스러운 자리들 중에서 나는 (런던의) 뉴게이트와 동등하거나 능가하는 곳은 거의 없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만일 그 곳을 능가하는 가공스러운 지역이 있었다면 바로 몇 년 전 브리스톨의 뉴게이트였을 것입니다. 조금이라도 인간성의 흔적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충격을 금치 못할 정도로 불결하고 악취가 진동하며 비참함과 사악함이 대단한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몇 주 전에 그 곳을 방문했을 때 나는 얼마나 크게 놀랐던지요! 1. 그 곳의 모든 부분들은…신사의 집처럼 청결하고… 2. 싸움질이나 소란스러움이 없으며… 3. 싸움의 일상적인 원인들이 제거되었고… 4. 술취함도 없고… 5. 매춘도 없어졌고… 6. 자신의 직업적인 일을 하길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부분적으로는 그 간수가 합당한 이윤으로 빌려주는 신용대부에 의해,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최대한 공평하게 분배되는 의연금에 의해 연장과 재료가 제공되는 등 게으름을 방지하기 위한 가능한 모든 배려가 취해집니다. 7. 주일날에는 그들은 일하거나 놀거나 하지 않고 최대한 깨끗한 옷으로 갈아 입고 모두가 예배실의 공적인 예배에 참석합니다…. 8. 영적인 문제나 세상적인 문제를 돕기 위해 주일과 목요일마다 설교가 행해집니다. 예배당 한편에는 수감자 누구나 읽을 수 있도록 큰 성경을 줄로 매어 놓았습니다….



그러면서 웨슬리는 그 메도디스트 간수에 대해 “누가 그의 모범을 따를 수 있겠는가?”라는 경탄의 말로 끝을 맺었다. 실로 데이지의 이러한 사역은 18세기의 부패하고 암울한 상태에 있는 영국의 교도소들이 닮아야 할 개선의 모델이었다. 벱은 데이지의 그러한 노력을 평하여, “하워드(John Howard)의 기념비적인 교도소 개혁운동 보다 15년 이상 앞선 것이었고 하워드 사상의 많은 부분을 예기한 것이었다”고 했는데 합당한 지적이라고 본다. 브레디는 “데이지의 사역이 하워드에게 도전과 영감을 주었음이 확실하다”고 보고 있다.


웨슬리와 메도디스트들의 인도주의적이고 개혁적인 교도소 활동은 동족들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외국인 수감자들, 특히 사람들이 대체적으로 꺼리는 영국의 적군들에게까지도 확대되었다. 웨슬리는 1759년 10월에 브리스톨 근방의 노울(Knowle)에 수감되어 있는 7년 전쟁의 프랑스 포로군 교도소를 방문했다. 거기에는 1,100여명의 프랑스 포로수들이 불결하고 얇은 넝마조각들만 걸친 채 밀짚 위에 누워 추위에 떨며 허약한 양처럼 죽어가고 있었다. 이를 목격한 그는 브리스톨의 저녁집회에서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라. 너희가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었은즉 나그네의 정경을 아느니라”(출 23:9)는 본문을 택해 학대를 비난하는 설교를 통해 전형적인 방법으로 대응하였고 그것의 시정을 위해 대중들을 조직화 하였다. 그 결과 의복구입을 위해 24 파운드가 모금되었고, 브리스톨 시당국으로부터 많은 양의 매트리스와 담요가 제공 되었으며, 런던과 영국 각지에서 기부금 모금이 이루어 졌다. 그는 1779년 8월에는 펨브로크(Pembroke)에 있는 미군 죄수들과, 1783년 10월에는 윈체스터(Winchester)의 독일군 죄수들도 방문하였다. 이러한 일들은 인도적 구호는 물론 포로 교도소의 개선을 위한 웨슬리의 관심과 노력의 일단을 보여 준다.


웨슬리의 교도소 개혁을 위한 더 강력한 노력은 불의한 상태에 대한 그의 공개적이며 분명한 항의제기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는 하워드가 1777년에 분노에 찬 영국과 웨일즈의 교도소 상황이라는 보고서를 발표하기 이전에 이미 교도소의 상태들을 알아보기 위해 여러 교도소들을 방문하여 자세히 탐사한 바 있다. 그리하여 그는 불의한 면들을 공개적으로 널리 알리고, 시정되어야 할 상황개선을 위해 가능한 조치들을 강구하고 시행했던 것이다. 마르크바르트에 의하면 웨슬리가 여러 신문이나 단행본을 통해 발표한 항의 내용은 크게 다섯 가지이다. 첫째는 지옥을 방불케 하는 교도소 환경에 관한 것이고, 둘째는 오히려 악을 배우게 되는 교도소의 도덕적 자세에 관한 것이며, 셋째는 몇 달 혹은 몇 년씩 걸리는 긴 시민 재판과정에 관한 것이요, 넷째는 가난한 자와 부자에 관한 불공평한 처리에 관한 것이며, 마지막으로는 전쟁포로에 대한 비인간적인 대우에 관한 것이다. 웨슬리는 이러한 항의들을 통해 대중들의 관심을 촉발하고 의식을 일깨워 교도소의 상태를 개선시키려 노력했다.


이러한 여러 면에서 볼 때, 웨슬리는 교도소의 개선을 위해 아무런 새로운 방법을 개발하지 않았다는 비난은 타당하지 않다. 물론 웨슬리가 당시 교도소와 형법의 문제들에 대해 근본적인 책임이 있는 국회의 입법이나 왕과 각료들의 행정에 대해 직접적인 공격은 하지 않았다는 점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러한 면에서의 개혁활동은 하워드를 중심으로 프라이(Elizabeth Fry), 그리고 그녀의 시동생인 박스톤(T. Fowell Buxton)에 의해 전개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웨슬리가 하워드의 그러한 눈부신 사역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점을 유의해야 할 것이다. 이는 하워드 자신이 다음과 같이 인정하는 사실이다.


나는 그(웨슬리)의 격려로 내 계획을 활기차게 계속할 수 있었다. 나는 그에게서 한 사람이 열심과 인내심에 의해 얼마나 많은 일을 이룰 수 있는가를 보았다. 그리고 내가 열심과 인내심을 발휘할 수 있다면 웨슬리 씨가 그의 삶에서 행한 것처럼 나의 길에서 많은 것을 나는 왜 행하지 못하겠는가?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하여 나는 이전보다 더 민활하게 내 일을 수행할 결심을 했다.



브레디는 하워드를 가리켜 “웨슬리의 열성적인 제자”라고 까지 평한다. 이런 면에서 웨슬리의 교도소 개혁 사역은 하워드를 통해 결정적인 결실을 맺었다고 볼 수 있다. 하워드를 통해 이룩된 교도소 개혁활동과 그 결실들에 대해서는 다음에 구체적으로 보게 될 것이다.





4. 여성의 지위 향상과 지도력 배양



웨슬리와 메도디즘은 여성들의 지위향상에도 많은 기여를 하였다. 런연은 주장하길, “여성들이 종교에서 지도적인 역할을 취하는 것에 반대하는 전통적인 장벽이 메도디즘에서 허물어 지기 시작했다”고 하였다. 당시 영국 국교내의 여성은 그들의 남편과 목사와의 관계에 있어 종속적인 위치에 있었고 교회 내에서 극소수의, 그것도 종속적인 것 외에는 거의 지도력을 지니고 있지 못했다. 그것이 통념이고 관례였다. 그러나 웨슬리는 초대 기독교의 선례를 모범으로 하여 그러한 관례를 거부했다. 그리하여 그는 여성들로 하여금 메도디즘 속에서 다양한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기회를 부여하여 여성들의 지위향상과 지도력 배양에 혁신적인 계기를 제공해 주었다. 이러한 면에서 벱은 웨슬리를 “18세기에 가장 두드러진 페미니스트”로 평한다. 당시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기회가 부여되지 못했던 여성들에게 기회를 제공해 주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메도디즘에서 여성들이 지도력을 발휘하게 된 출발점은 조장과 속장의 역할을 통해서 였다. 여성들은 처음에는 여성들로 형성된 속회에서만 속장으로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었으나, 어떤 여성들은 남성들에게도 영적인 안내와 양육을 제공하는데 비범한 능력을 나타냈기에 여성이 남성에 대해서도 영적인 리더로 봉사하는데 대한 반대는 점차 극복되었다. 그 결과 메도디즘에서 여성 리더가 남성 리더보다 18세기 내내 항상 2배가 넘었다. 1742년의 파운더리 신도회(Foundery Society)를 보면 총 66명의 리더 중 여성이 47명 남성이 19명이었다. “교회 역사상 ‘예수의 어머니’인 마리아 이래로 메도디즘보다 여성적 특색이 더 풍부했던 때가 있었는지 의심스럽다”라고 한 스티븐스(Abel Stevens)의 단언은 과장 만은 아니라 하겠다.


속회원들을 지도하며 성경공부와 기도회를 인도하는 여성의 이러한 지도력은 설교라는 영역에로까지 여성들의 참여 폭을 증진시켰다. 당시 영국 국교의 전통에서는 설교는 오직 성직안수를 받은 남성만의 범접할 수 없는 권위였다. 평신도에게는 남성이라 해도 결코 설교자로서의 역할이 허용되지 않는 것이 당연한 관례였다. 그러기에 평신도 여성의 설교는 그야말로 당시 사회의 관례를 대혁신하는 것으로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다. 웨슬리는 평신도 남성의 설교문제에 대해서는 어머니 수산나의 충고와 자신이 직접 그 설교의 열매들을 목격하여 1744년 연회에서 공식적으로 승인하였다. 그러나 여자들의 설교 문제에 대해서는 처음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저희의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고전 14:34)라는 사도 바울의 주장을 근거로 하여 허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입장을 점차 철회하게 되어 1761년에 크로스비(Sarah Crosby)의 간증사역을 허용하였고, 1771년에는 보산큇(Mary Bosanquet)의 요청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응답하므로 여성 설교의 특수소명을 인정하게 되었다.


나는 당신이 특별한 소명을 가지고 있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우리의 평신도 설교자들이 모두 그러한 소명을 가지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내가 어떻게 그들 각자의 설교를 지지할 수 있겠습니까? 내게 있어 메도디즘이라는 하나님의 전적인 역사는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의 시여임이 분명합니다. 따라서 일반적인 계율 아래에서는 일어나지 않는 몇 가지 일들이 메도디즘 안에서 일어난다는 사실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여자들이 교회에서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바울 사도의 규율은 일반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특수한 경우, 특히 고린도 교회에서 몇 가지 예외규정을 두었습니다.


다시 말해 성령은 교회가 부과한 경계표를 뛰어 넘으실 수 있다는 것이다. 웨슬리는 하나님께서 여성 리더들의 사역을 축복하셨고 그들의 효력이 의심의 여지 없다는 것을 인정하였기에 점차 많은 수의 여성들에게 설교사역의 권위를 부여하였다. 런연은 모두 27명쯤 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는데 그들 대다수는 정식적인 임명을 받지는 않았으나 설교를 원하는 신도회들의 요청에 응했고 영국, 웨일즈, 스코틀랜드, 그리고 아일랜드에까지도 활동하면서 명성을 드높였다. 그리고 마침내 1787년 맨체스터(Manchester) 연회에서는 사라 말렛이 설교자로 다음과 같이 공식 승인되었다.



우리는 사라 말렛이 메도디스트 교리를 설교하고 규율에 순응하는 한, 그녀를 우리의 동역자로 삼으며 우리와 함께 설교하는데 대해 아무런 반대도 없습니다.


당시 영국의 모든 종교 단체 중에서 오직 퀘이커 교도들만이 이와 유사한 약속을 천명할 수 있었다.


메도디스트 여성들은 다른 리더십에도 참여 했다. 그들은 학교를 세워 교육활동을 이끌고 또한 자선사업 단체도 창설하여 병원이나 교도소의 병든 여성들에 대한 구제활동도 전개하므로 여성들의 지도력을 확대하였고 여성들의 역할을 증대시켰다.


웨슬리의 남녀 평등의 관념을 보여주는 또 다른 현저한 측면들이 있다. 그것은 용어를 통해 표현된 그의 의식이다. 두 가지의 예를 들 수가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여성 메도디스트들에 대한 웨슬리의 ‘자매’라는 용어 사용이다. 잉글리쉬(John C. English)는 웨슬리가 그 용어를 사용한 의도는 남성은 물론 여성도 교회의 온전한 일원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남녀 간의 사회적인 거리감도 좁히려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녀에 의하면 당시에는 성직자와 여성 성도들 간의 영적인 관계를 표현하기 위해 ‘아버지와 딸’이라는 용어가 종종 사용되었는데, 그 용어는 어버이라는 남성의 능력을 강조하고 자녀라는 여성의 허약성을 단정하는 것이라고 한다. 때문에 웨슬리는 그 용어 대신 자매라는 용어를 즐겨 사용했다고 한다. 물론 18세기 영국은 형제와 자매가 동등하지 않고 남성으로서의 형제가 자매보다 우위를 점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 거리감이 아버지와 딸 간의 것보다는 크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른 경우는 웨슬리가 아메리카에서 사용하기 위해 39개조를 편집할 때, “크리스챤 멘” (Christian Men)이라는 용어를 “크리스챤”(Christian)으로 바꾸었고, 하나님께 간구할 때의 “아버지”(Father)라는 용어를 “거룩하신 어버이”(Divine Parent)로 대치시켰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것은 역시 여성 차별을 완화시키고 여성의 위치를 높이려는 웨슬리의 노력을 보여 준다 할 것이다.


웨슬리는 1788년에 “병자 방문에 대하여”(On Visiting the Sick)라는 설교에서 오늘날에도 급진적으로 들릴 정도의 그러한 급진적인 여성 해방론을 다음과 같이 펼쳤다.


여자는 남자처럼 이 명예로운 봉사의 일부를 감당할 수 없다는 말입니까? 여자들도 분명히 할 수 있습니다. 아니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남성과 여성이 구별이 없습니다.” “여성은 단지 눈요기일 뿐 귀기울여 들어줄 필요는 없는 존재다”라는 말이 실로 오랜 동안 많은 사람에게 격언으로 통해 왔습니다. 따라서 많은 여성들은 마음에 드는 노리개로 만들어졌을 뿐인 것처럼 양육됩니다! 그러나 이것이 여성을 존중하는 일입니까? 혹은 그것이 그들에게 진정한 친절을 베푸는 일입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가장 철저한 불친절이며, 무섭도록 잔인한 것입니다. 그것은 터키인처럼 야만스러운 것일 뿐입니다. 또한 나는 분별력 있고 정신이 올바른 여성이 어떻게 거기에 복종할 수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자연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여러분 모두에게 권리를 부여해 주셨습니다. 그 권리를 단호히 주장하십시오. 그 비열한 노예상태에 더 이상 굴복하지 마십시오. 여러분도 남성들과 같은 이성적인 피조물입니다. 여러분은 남성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여러분도 동등한 영생의 후보자들입니다.



웨슬리는 여성들에게 스스로 책임의식을 가지고 그들이 속한 사회의 일원들에게 기여하도록 그들의 잠재력을 실현하는 능동적인 행위자가 될 것을 권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위어마우스는 “여성해방이 웨슬리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약간 과장된 느낌이 있다 할 것이지만, 웨슬리와 메도디즘이 18세기에 여성들의 지위를 향상시켰고 후세대에게 그 유산을 넘겨 주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할 것이다.



 


5. 노예제도 반대 투쟁



18세기의 영국은 앞에서 본 바처럼 가난, 부족한 교육, 그리고 형법과 교도소 상태의 열악성 등 해결해야 할 많은 난제들을 안고 있었지만 그보다도 더 큰 난제는 18세기 최대의 스캔달이라할 노예제도 문제였다. 웨슬리는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도 중대한 공헌을 하였다. 비록 웨슬리가 이 문제에 대해 다른 것들 보다 늦게 대응하긴 했지만, 공격의 강도 면에서는 가장 강렬했다. 웨슬리는 1774년에 출판된 그의 노예제도에 대한 사고(Thoughts upon Slavery)라는 소책자를 통해 노예제도를 생생하게 비판했다. 그렇다고 하여 그가 1770년대 이전에는 노예제도를 악으로 탄핵하지 않았다고 비난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단지 노예제도에 대한 그의 사적, 공적인 반감이 1770년 대에 전시체제로 바뀌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 공정한 평가일 것이다.


웨슬리의 노예제도에 대한 관심은 조지아 선교사 시절의 경험에서 기인되었다. 1736년 7월말 남부 캐롤라이나(South Carolina) 챨스톤(Charleston) 방문에서의 흑인 노예들과의 직면과 그 해 8월 20일의 흑인 옹호자(The Negro’s Advocate)라는 책자를 통한 노예제도의 잔인성에 대한 자각은 그에게 노예매매에 대한 “더할 나위 없는 증오심”을 불러 일으켰다. 그러한 체험은 웨슬리로 하여금 흑인 노예들에게 목회적, 교육적인 접근을 체계적으로 시도하고자 하는 열망을 촉발시켰고, 조지아에 노예제도를 금하는 오글레토프 장군의 정책을 강력히 지원케 했다.


웨슬리는 영국으로 되돌아 온 후 그의 부흥운동 전개 속에서 노예들에 대한 목회적이고 교육적인 사역의 열망을 실행에 옮겼다. 그는 목회사역에서 흑인과 백인 그리고 자유자와 노예 사이의 구별을 철폐시켜 노예들에게도 세례를 베풀고, 흑인 노예들로 하여금 백인들과 함께 성만찬에 참여할 수 있게 했다. 또한 흑인 노예들의 교육에도 관심하여 그는 1740년 6월에 흑인학교를 위한 모금운동을 전개했고, 1755년에는 버지니아(Virginia)에서 노예들을 위해 일하고 있는 데이비스(Samuel Davies)를 후원하여 그들의 교육에 필요한 책들을 공급해주는 운동도 전개 했다. 이러한 일들은 소수의 퀘어커 교도들 이외에는 거의가 노예문제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지 않던 시기에 참으로 빛나는 것이었음에 틀림 없다. 그러나 웨슬리와 메도디즘이 이 초기 단계에서는 노예제도에 대한 공개적인 저항으로까지는 나아가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메도디즘의 노예제도 폐지를 위한 적극적인 투쟁은 웨슬리가 퀘이커교도인 베네제트(Anthony Benezet)의 기니에 대한 역사적인 설명(Some Historical Account of Guinea)이라는 책을 읽게 된 1772년을 기점으로 출발되었다 하겠다. 웨슬리가 그 책을 통해 얼마나 자극을 받게 되었는가는 1772년 2월 12일자 저널의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잘 드러내 준다.



나는 한 정직한 퀘이커 교도가 일반적으로 노예매매라 불리는 가장 저주스러운 악행에 대해 출판한 아주 색다른 책을 읽었다. 나는 고대나 현대를 막론하고 이방세계 안에서도 그와 같은 것에 대해 읽어 보질 못했다. 그것은 야만성 면에서 마호멧 국가의 기독교인 노예들이 겪을 수 있는 어떠한 것도 분명히 능가하는 것이었다.



웨슬리가 노예매매에 대해 역사상 그렇게 나쁜 것은 없을 것이라고 분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그는 곧바로 베네제트에게 감사를 표하는, 그리고 노예제도 폐지 운동의 아버지라 할 샤프(Granville Sharp)와 연합해 그 운동을 함께 전개할 것을 제의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리고 웨슬리는 그 일에 동참한 2년 후인 1744년에 “사람들에게 노예 소유자의 비인간적인 모습과 무방비적인 노예들의 모습을 응시하게 해주고 그 가공할 불의에 더 이상 냉담할 수 없게 만든” 노예제도에 관한 사고(Thought upon Slavery)라는 소책자를 출판했다. 이 책이 노예제도 폐지 운동에서 점하는 가치는 샤프와 베네제트의 평가에서 잘 드러난다. 샤프는 베네제트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이 책에 대해 말하길, “그는(웨슬리) 노예매매의 불법행위 전반에 관한 논의의 요점을 간결하게 잘 간추려 놓았다”고 했다. 베네제트는 웨슬리가 그에게 보낸 그 책자에 대한 답신에서 “시대의 정황이 저 비중 있는 주제(노예매매)에 대한 크지 않으면서도 인상적이고 감동적인 어떤 것을 필요로 하는 시점에 그 책을 대하게 되어 특히 더 기쁘다”라고 했다. 브레디나 워너 같은 후대의 학자들도 그 책에 대해 높이 평가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브레디는 이 책에 대해 “아마도 이제까지 노예제도에 반대해 쓰여진 것 중 가장 영향력 있는 논문일 것”이라 했고, 워너는 “노예제도 반대 문헌 중 하나의 가장 효력적인 작품”이라고 평했다.


노예제도에 관한 사고를 통해 표현한 노예제도에 반대하는 웨슬리의 논증은 구체적으로 어떠한 것이었는가? 노예제도에 관한 사고는 크게 다섯 부분으로 구성되어 노예제도의 불의성을 체계적으로 지적하며 설득력 있는 호소를 통해 노예매매 철폐를 요청하고 있다.


이 책 첫 단원에서 웨슬리는 노예제도에 대해 정의를 내리고 노예제도의 역사를 간략히 개괄한 다음, 두 번째 단원에서는 노예들이 붙잡혀 오는 나라의 상황과 관습, 그리고 그 사람들의 성품에 대해 당시 널리 퍼져있던 선입견들을 반박한다. “그 곳은 끔찍하고 메마르고 황량한 곳이며… 그들은 어리석고, 분별력이 없고, 우둔하고 게으르고, 사납고, 잔인하고, 불성실한 야만인”이라는 당시의 선입견들에 대해, 그는 아프리카 여행기 등의 자료를 근거로 하여 “그 곳은 풍요롭고 유쾌한 곳이며… 그들은 분별력이 있고, 근면하고, 공정하고, 정의롭고 정직하고…사랑이 많으며, 온순하고, 우호적”이라고 반박을 가하고 있는 것이다.


세 번째 단원에서는 노예들의 포획과 수송과정, 그리고 그들이 농장주들로부터 받게 되는 대우의 잔인성과 비인간성에 대해 다루고 있는데, 노예들에게 가해지는 그러한 잔인함과 비인간적인 행위들에 대한 웨슬리의 분개는 “조물주께서 세상의 가장 고귀한 피조물들이 이와 같은 삶을 살도록 의도하셨는가?”라는 물음에서 절정을 이룬다.


네 번째 단원에서는 웨슬리는 어느 정도 자연법적인 정의, 그리고 자비심을 토대로 하여 노예제도가 합법적인 상거래라는 주장을 반박한다. “부도덕한 상거래를 하느니 차라리 상거래를 하지 않는 것이 더 낫다. 덕을 희생시켜서 부를 획득하는 것보다 부를 소유하지 않는 것이 훨씬 더 낫다. 같은 피조물인 인간 동료들의 눈물과 땀, 그리고 피로 얻어지는 온갖 부보다 정직한 빈곤이 더 낫다”는 것이다.


마지막 다섯 번째 단원에서는 앞의 언급들을 노예선 선장들, 노예 상인들, 그리고 미국에 농장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적용시킨다. 그는 그들에게 “영혼을 잃지 말고, 인간을 삼키는 늑대가 되지 말며, 더 이상 사자나 곰보다 야만적이 되지 말라”고 호소한다.


이 책은 큰 반향을 일으켜 많은 부수가 팔려 나갔고, 웨슬리의 책들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던 월간 평론(The Monthly Review)으로 하여금 그 책에 대해 세 페이지나 할애해 호의적인 논평을 게재하게 했으며, 조지아의 노예들을 과도한 잔인성에서 법적으로 보호받게 했다. 이 책은 미국에서도 같은 해인 1774년에 출판되어 30년이 지나는 동안 13판 이상을 거듭하며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또한 이 책이 메도디스트들에게 미친 여파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이 책은 1780년에 미국에서 열렸던 메도디스트 첫 연회의 노예제도에 대한 공개적인 반대 선언과, 모든 메도디스트들은 소유하고 있는 노예들을 해방시킨다는 1784년 총회의 결의를 이끌어 낸 초석이기도 했다.


웨슬리는 이 후에도 노예제도의 불행한 상황과 타락성을 상기시키는 책자들을 출판하여 노예제도 반대 운동의 강도를 높여 나갔다. 특히 미국혁명 전쟁의 격정이 최고조에 달했던 1778년에 쓴 국가의 상태에 관해 영국 사람들에게 드리는 진지한 요청(A Serious Address to the People of England, With Regard to the State of the Nation)에서 그는 아래와 같이 노예매매에 대해 통렬히 탄식하며 탄핵하였다.



나는 흑인 노예매매가 더 이상 결코 발견되지 않게 되길 하나님께 간구한다! 그리고 우리가 더 이상 우리의 형제들을 짐승처럼 도둑질해 파는 일과 그들을 수천 수만 명씩 살해하는 일이 없게 되길 간구한다! 오 회교나 이교적인 것보다 더 악하고 혐오스러운 이 일이 우리에게서 영원히 제거될지어다! 영국이 설립된 이래 영국에 이와 같이 저주스러운 매매에 손을 대는 치욕스럽고 불명예스러운 일은 없었다.



웨슬리는 글을 통해서만 노예제도 탄핵 운동을 전개한 것이 아니라 설교를 통해서도 그 운동을 지원했다. 그 중 1788년 3월 3일에 브리스톨에서 행한 설교가 가장 기억에 남고 담대한 것이었다 할 것이다. 항구도시인 브리스톨은 왓슨(Watson)이 “노예매매자들의 음침한 소굴”이라고 칭했을 정도로 노예무역의 요충지였기에 적대감이 예상되는 곳이었다. 그러나 웨슬리는 노예제도에 관해 설교할 것임을 예고했고 그 집회장은 상류층, 하류층, 부자, 그리고 가난한 자들로 대만원을 이루었다. 유일한 방해가 있었다면 그 집회를 일시적으로 혼란스럽게 만든 무시무시한 뇌우 뿐이었다. 다음날 그는 금식을 선포하고 “노예들이 벗어날 길을 찾고 그들의 사슬이 분쇄되기를 하나님께 간구하는” 기도회를 열어 노예제도 폐지운동을 확산시켰다.


웨슬리는 이처럼 노예해방을 위해 다양하게 활동했다. 그러나 그가 노예해방을 위해 남긴 간과할 수 없는 또 다른 큰 공헌은 그가 노예제도 폐지를 위해 입법적인 활동을 벌려 끝내 법적인 승리를 일궈낸 노예제도 폐지를 위한 활동가들을 길러냈고, 또한 그들의 힘을 북돋우어 주었다는 점이다. 그 대표자라 할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는 브레디의 지적처럼 “웨슬리의 영적인 아들”이었다 할 것이다. 웨슬리는 세상을 떠나기 1주일이 채 못 되는 때에 쓴 그의 마지막 편지에서 윌버포스의 노예제도 폐지 투쟁을 다음과 같이 격려했다.



하나님의 능력이 당신을 아다나시우스(Athanasius)로 불러 세우지 않으셨다면, 종교와 영국, 그리고 인간성의 수치인 저 저주스러운 악행을 대적하는 당신의 영광스러운 일을 어떻게 완수할 수 있을지 나는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바로 이 일을 위해 당신을 불러 세우지 않으셨다면 당신은 사람들과 악마들의 반대에 의해 기진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이 당신을 위하신다면 누가 당신을 대적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 모두를 합친들 하나님보다 강하겠습니까? 선행을 행함에 있어 염려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의 전능하신 능력 안에서 계속해 나아 가십시요. 온 세계에서 가장 악한 미국의 노예제도마저도 사라져 없어지게 될 때까지 말입니다.



윌버포스는 웨슬리의 이 편지에 대해 비망록에 “존 웨슬리, 그의 마지막 말들. 노예매매”라고 메모해 놓았는데, 이는 윌버포스에 대한 웨슬리의 영향력을 입증해 준다 할 것이다. 윌버포스는 그 두 달 후에 의회로부터 자신의 탄원에 대해 거부를 당했지만, 웨슬리의 격려대로 “사람들과 악마들의 반대에 의해 기진”하지 않고 1807년에 노예매매 금지 조치가 내려질 때까지 행진을 지속했다. 이러한 긴 행진의 여정에 메도디스트들은 윌버포스의 든든한 동맹군이 되었고, 웨슬리의 노예제도에 관한 사고는 사람들에게게 지속적으로 도전을 던져 주었다.


지금까지의 고찰 결과 웨슬리와 그의 부흥운동이 18세기의 제반 사회적인 문제들 속에서 개혁을 위해 다방면의 노력을 기울였고 또 큰 결실들을 이루었음을 볼 수 있다. 실로 웨슬리에게 있어 성결은 사회적인 성결이었고, 그의 종교적인 열정과 사회적인 열정은 궁극적으로 서로 분리할 수 없는 것이었음을 확인케 된다.






웨슬리의 인간론 이해


I. 들어가는 말

독일의 세계적인 신학자 판넨베르크(Pannenberg)는 우리들은 인간학의 시대에 살고 있으며, 오늘날 시급하게 제기되는 문제는 도대체 인간이란 무엇인가? 묻는 것이라고 하였다. 우리는 인간학의 시대에 살고 있으면서 과연 인간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을까? 인간의 정체는 무엇인가? 인간은 어디서 왔는가? 인간이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런 물음들은 인간이 언제나 추구해온 물음이지만 아직도 계속해서 묻고 있는 물음이기도 하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여섯째 날에 인간을 창조하셨다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다. 그러나 그 창조된 인간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존재인지 제대로 듣지 못했다. 많은 학자들은 인간이 무엇인지 파악하려고 하였다. 그래서 인간을 생물학적으로 이해하려는 생물학적 인간학, 타인과 비교함으로써 인간을 이해하려는 문화적 또는 인류학적 인간학, 신과 비교함으로써 인간을 이해하려는 신학적 또는 종교학적 인간학 등 다양한 인간학이 우리 시대에 연구되고 있으나 모든 인간이 만족할 만한 결과를 아직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최근의 생명공학 기술은 인간 게놈(genome) 지도를 완성하여 인간을 보다 생물학적으로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었으나 인간은 단지 생물학적으로만 생각되어질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이런 이해의 시도 역시 인간 이해를 위한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겠다.


인간학적 관점에서 볼 때 우리가 인간에 대하여 갖고 있는 가장 오래되고 믿을 만한 정보는 초기 원시인들이 고대의 동굴 벽에 그려 놓은 자신들의 그림과 동물들의 그림들뿐이다. 인류학적 관점에서 인간이 언제 어떻게 기원했는가의 문제에 대해서 확증적인 결론을 맺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인간의 기원과 연대에 대한 수많은 과학적 이론들은 매우 사색적이고 억측에 가까운 것들로서, 고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골 몇 개를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법으로 분석한 결과에 근거하고 있거나 유전학적 연구 결과에 의존하고 있는 실정이다.


인간의 이성은 인간을 본질적으로 이해하는데 제한되어 있다. 인간 이해의 이성적 제한은 신학적 인간학에 귀를 기울이게 하였고 또한 신학적 인간학에 의존하게 하였다. 신학적 인간학은 인간의 기원과 본성, 운명, 존재의의, 가치, 사명, 죄와 악 그리고 죽음 등에 대하여 성서적으로 이해한다. 웨슬리의 신학적 인간학은 인간의 기원과 성격에 대한 이해를 성서적 이해로부터 출발한다. 웨슬리 당시 이성은 진리의 기준과 심판이었다. 이성에 기초한 합리주의가 시대정신이 되었고, 그 결과 기독교에도 이신론(Deism)이 성행하였다. 그러나 웨슬리의 인간론의 대원칙은 자연질서가 아닌 영적질서 안에서 인간을 이해하는 것이다. 웨슬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 이해를 기본구조로 하여 인간의 타락으로 하나님의 형상이 상실되고 하나님의 선행은총에 의하여 다시 그 형상이 회복되는 구원론적 인간론을 전개한다. 웨슬리는 인간을 구원의 대상(사랑의 대상)으로 보면서, 인간이해의 핵심을 '하나님의 형상'에 두고 있다. 이런 웨슬리의 인간 이해는 그의 복음사역의 동기와 목적을 제공한다. 감리교회의 창설자인 웨슬리의 인간에 대한 이해는 오늘의 신앙적 삶의 현장에서 우리의 삶을 진단하게 하고 우리의 삶의 방향을 바르게 제시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웨슬리의 인간론에 대한 연구는 현대를 사는 감리교인의 인간관의 본질을 조명해 주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본고에서는 웨슬리가 이해한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이란 개념을 통하여 조명해보고자 한다.





II.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본래적 인간





우리가 인간을 이해하려 할 때 어떤 기준을 가지고 이해할 수 있을까? 덴마크의 철학자이며 신학자인 키에르케고르(S ren Kierkegaard)는 "사람이 사람됨은 그가 하나님과 관계를 갖고 있다는데 있다"고 하였다. 신학적 인간학이 이야기하고 있는 인간은 하나님과 관계를 가지고 있는 존재이다.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을 심미적 존재, 윤리적 존재, 종교적 존재로 구분하여 설명하였다. 이와 마찬가지로 웨슬리는 그의 설교 "종의 영과 양자의 영"(The Spirit of Bondage and Adoption)에서 자연적 인간의 상태와 율법아래 있는 인간의 상태 그리고 은총아래 있는 인간의 상태로 구분하여 서술하였다.


자연적 상태(Natural State)에 속한 인간은 죄의 종으로서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 죽음에서 잠자고 있는 상태의 인간이다. 이 상태의 인간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사랑하지도 않는 암흑상태에 있는 인간이다. 이 상태의 인간들은 죄에 대한 싸움도 없으며 또한 그로 인한 승리도 없다. 이들은 거짓 평화를 누리며, 고의로 죄를 범한다. 웨슬리는 자연적 상태를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자신이 함정에 빠져있음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두려움을 느끼지 못한다. 그는 세상의 쾌락을 탐한다. 그는 날마다 죄를 짓기에 언제나 죄의 종이다. 그러나 그는 마음의 근심이 없다. 왜냐하면 그는 '얽매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율법적 상태(Legal State)의 인간은 죽음의 잠으로부터 깨어난 상태의 인간으로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고의로 죄를 범하지 않는다. 이들은 죄와 싸우기는 하나 죄를 극복 또는 정복하지는 못한다.


복음적 상태(Evangelical State)에 있는 인간은 하나님의 아들이 된 인간의 상태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늘의 기쁨으로 가득찬 빛을 보고, 평화와 자유를 즐기면서, 죄를 범하지 않고, 죄와 싸워 이긴다. 그러나 복음적 상태에 있는 사람들도 어떤 때는 율법적 상태에 있으면서 동시에 그 이전 단계인 자연적 상태의 특징을 경험한다. 따라서 복음적 상태의 인간은 선천적 상태(자연적 상태), 율법적 상태로 전락하여 다시 한번 이전의 회개를 필요하게 될 위험성과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상태로 갈 위험성을 언제나 지니고 있다.





1. 인간 창조와 하나님의 형상





전술한 바와 같이 웨슬리의 인간론의 관심은 인간이 하나님과의 불가분리적인 관계를 맺고 있음을 보는 것이다. 이런 관계성의 출발은 웨슬리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존재로 이해하고 있는데서 찾아볼 수 있다(창 1:27). 웨슬리는 하나님은 인간을 '자신의 영원성의 형상' 즉 부패하지 않는 영광의 하나님의 모습대로 지으셨다고 하였다.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은 웨슬리 인간관의 핵심이라고 웨슬리 연구의 대가인 아우틀러(Albert Outler)는 주장하였다.


인간의 창조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창조사역을 의미한다. 인간 창조에 앞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협의가 있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창1:26,27)라고 말씀하셨다. 인간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협의대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다. 이로서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 형상을 갖고 창조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여기서 주목 할 사항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입었다고 해서 하나님을 그대로 복제해 놓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이 아니며 또는 하나님이 될 수도 없다.





2. 하나님의 형상의 의미





웨슬리 연구의 대가인 데오도레 런연(Theodore Runyon)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인간을 통한 새로운 창조가 바로 기독교의 핵심임을 웨슬리를 통하여 알 수 있다고 하였다. 데오도레 런연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은 타 피조물과는 달리 인간만이 지니는 어떤 재능이나 능력, 즉 이성이나 양심 등으로 인식하고 있는데 웨슬리가 이해하고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란 이와는 달리 인간이 소유하고 있는 어떤 재능이라고 보다는 하나님의 은혜로 부르심을 받은 살아있는 관계성이라고 보았다. 런연은 웨슬리가 의미하고 하고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하나님과 관계를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관계적인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런연은 하나님의 형상이란 비록 하나님께서 주신 재능이긴 하지만 그 자체에 의해서 영위되는 독립된 인자(因子)가 아니라, 그것을 전달하기 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끊임없이 받아야 할 어떤 인자로 본다.


웨슬리는 창조된 인간이 지닌 하나님의 형상을 세 가지 형상으로 설명한다. 첫째 형상은 자연적 형상(the natural image of God)으로 인간은 영원한 존재로서 불사(不死)의 존재이며, 이해력과 의지의 자유 그리고 사랑의 감정의 기능을 지니고 있는 영적 존재(Spiritual Being)로서 고통을 경험하는 일이 없는 존재임을 말하는 형상이다.


런연은 하나님의 형상의 제1의 특성이 자연적 형상이라고 하였다. 그에 의하면 자연적 형상이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의식적인 관계에 들어갈 수 있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영이신 것과 같이 자연적 형상은 영으로서의 형상을 말한다. 이 형상의 기본적인 자질로서 '이해'(understanding 혹은 이성) '의지'(will, 혹은 결단), '자유'(freedom, 혹은 해방)를 들 수가 있다. 이러한 자질과 기능들은 사물의 본질과 선과 악을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이다.


웨슬리는 아담이 자연적 형상의 첫째 기능인 '이해력'(understanding)에 있어서 완전하였다고 보았다. 만물을 분명하게, 신속하게, 그리고 포괄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고 보았다. 그러나 아담의 완전은 하나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에 그의 이해력이 절대적으로 완전한 것이 아니고 그의 이해력은 한계가 있어서 한편으로는 무지하여 실수하거나 유혹 당할 수 있다고 보았다.


자연적 형상의 둘째 기능은 아담이 가지고 있는 '의지(will)'인데 이 기능은 다양한 감정을 유발하는 기능으로서 사랑과 미움, 기쁨과 슬픔, 절망과 희망 등을 유발한다. 모든 인간은 이 의지를 통하여 감성의 활동을 한다. 이 중에서도 사랑의 감성은 모든 감성 중에 으뜸가는 감성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이 사랑이듯이 태초의 인간은 사랑이 충만한 인간이었다.


자연적 형상의 셋째 기능은 '자유'(freedom)이다. 이 자유는 외적인 압력이 없이 스스로 선택하고 거절할 수 있는 능력이다. 의지는 감성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데 반하여 자유는 선택과 결단의 기능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본다. 자연적 형상의 둘째 기능과 셋째 기능인 의지와 자유 이들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만일 인간에게 자유가 없다면 인간은 선택과 결단의 능력이 없기 때문에 이러한 인간은 바람직한 인간이 될 수 없다. 그래서 진정한 자유가 있는 인간이야말로 사랑의 인간이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자유가 없는 인간은 사랑의 사람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이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이 자유가 있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다. 자유가 배제된 행위에 대하여 인간은 책임을 질 수 필요가 없 다. 자유하지 않은 사람은 단지 대리인에 불과하다. 후에 논의되겠지만 이 자유의지는 칸트(I. Kant)가 의도한 바와 같이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초자연적인 것으로 신의 선물이며 타락한 피조물을 책임적인 존재로 설 수 있는 힘을 준다. 이런 자연적 형상들은 하나님을 형상화하고 반영해야 하는 소명을 위해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에 이것을 남용하거나 오용하면 이것들은 쉽게 왜곡될 수 있다.


둘째 형상은 정치적 형상(the political image of God)으로 하나님의 형상의 제2의 형상이다. 이 형상은 인간은 다른 피조물을 관리하는 능력(창 1:28), 즉 인간이하의 피조물들 - 즉 바다의 고기와 땅위에 있는 것들 - 을 다스리고, 인간들 사이의 교제를 합리적으로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을 수행하는 존재임을 말하는 형상이다.


웨슬리에 의하면 다른 피조물(동물)도 어느 정도 하나님의 자연적 형상- 이해력과 감정과 의지- 을 공유하고 있지만 정치적인 형상은 인간에게만 주어진 자질이라고 하였다. 정치적 형상은 한편으로 하나님이 이 세상의 치리자라는 것을 증거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이 다른 피조물들의 치리자가 된다는 것을 증거한다. 정치적 형상이 주는 중요한 의미는 인간은 하나님의 축복을 다른 피조물에게 중개하는 사명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이 정치적 형상의 기능이 바르게 행사될 때 짐승은 인간을 통해 행복을 누릴 수가 있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인간은 하나님께 순종하고 짐승은 인간에게 순종함으로써 만물은 행복을 누리게 된다. 이런 본래의 정치적 형상은 오늘의 생태신학과 생명신학의 현장에서 서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신학적 틀을 제공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셋째 도덕적 형상은 하나님의 형상의 제3의 형상이다. 도덕적 형상은 인간이 하나님과 같이 의롭고 거룩한 존재임을 말하는 형상이다. 도덕적 형상은 하나님이 사랑이신 것과 같이 인간의 시조 아담에게도 사랑의 기질이 침투되어 아담의 사고와 행위의 지배적인 원칙이 사랑이었으며 죄에 대하여 무구(無垢)하였음을 말하는 형상이다. 따라서 도덕적 형상은 인간이 하나님과 같이 사랑, 자비, 정의, 진리, 그리고 성결의 품성을 지닌 존재로 창조되었음을 뜻하고 있다.


도덕적 형상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최고의 형상으로서 아주 민감하여 손상 받기 쉬운 형상이다. 이 도덕적 형상이야말로 인간을 타 피조물로부터 결정적으로 구별하는 형상이다. 인간은 이 도덕적 형상 때문에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고 예배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이 형상은 인간의 거룩성을 의미하는 상징이기 때문에 인간의 자연적 형상과 도덕적 형상의 기능이 왜곡될 때 이들 형상은 완전히 상실되지 않지만 도덕적 형상은 완전히 상실된다. 따라서 도덕적 형상은 죄에 대하여 매우 민감한 형상이라 할 수 있다.


"도덕적 형상은 인간성 안에 있는 재능도 아니고 창조주를 떠나 독립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기능도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피조물들이 창조주로부터 지속적으로 받아야 하고, 그 받은 것을 중개해야 하는 관계성 안에서 성립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형상은 영적 호흡에 해당되는 형상이다. 이 형상은 끊임없이 하나님으로부터 사랑, 정의, 자비, 진리를 받아들이고 이것을 계속적으로 행사하고 더욱 교통해야 하는 형상이다.


웨슬리는 이 세 가지 하나님의 형상 가운데서 도덕적 형상을 인간의 본래적 형상으로 보아 중시하였다. 왜냐하면 도덕적 형상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맺게되기 때문이다. 인간의 고유성들 중에 가장 중요한 사실은, 인간은 우주 속에서 홀로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인간의 특수성에 해당된다. 타 피조물들은 이 형상을 가지고 있지 않다. 동물과 인간의 차이도 이 형상을 가지고 있느냐의 유무에 달려 있다. 인간만이 하나님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하등의 피조물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바로 이것이 인간과 동물의 진정한 차이이다. 하나님에게 복종하는 것이 인간의 완전이라면, 사람에게 복종하는 것은 동물의 완전이다.





3.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본래적 인간의 특징





타락 이전의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의 상태는 어떠하였을까? 타락 이전의 인간은 하나님이 그가 만든 세상에서 보시기를 원하는 가장 바람직한 인간 즉 본래적인 인간이었다. 사랑의 주체인 하나님은 사랑의 객체로서 우리 인간을 그의 사랑의 대상으로 창조하셨다(요일 4:16).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하나님을 사랑해야 되는 존재가 되었다. 따라서 인간은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자유, 이성 등의 기능을 바르게 사용하여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를 유지하였다. 바로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를 나눌 수 있다는 이점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본래적 인간의 첫째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인간과 동물의 차이점은 이성, 감정, 의지가 아니라 인간만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존재라는데 있다.


본래적 인간의 두번째 해당하는 특징은 거룩하고 무죄한 인간이었다는 점이다. 창조시 인간은 거룩하고 의로운 존재로 창조되었다. 창조시 인간의 본성은 거룩하고 성결했다. 따라서 창조 당시의 인간은 거룩한 인간이었다. 창조된 원 상태로서의 인간 즉, 타락이전의 인간은 의롭고 성결하였으며, 사랑이 충만하였기 때문에 타락 이전의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본래적 인간은 최초의 아담으로서 무죄한 인간이었다. 즉 최초의 아담은 원죄와 함께 태어나는 모든 인류와는 달리, 원죄 없이 창조되었다.


세번째 특징은 모든 피조물 가운데 가장 으뜸가는 존재라는 것이다. 하나님과 사랑의 교제를 나눌 수 있으며 원죄 없이 태어난 본래적 인간은 신보다는 못하지만 모든 피조물중의 으뜸가는 존재로 창조되었다. 따라서 본래적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가운데서 무죄한 인간으로 모든 피조물을 다스릴 책임과 권리가 있었다. 웨슬리에 의하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은 모든 피조물의 으뜸이며, 모든 피조물을 다스릴 수 있었다.


전술한 바와 같이 타락 이전의 인간의 원 상태는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 그분과 사랑의 교제를 나누며, 거룩하고 무죄한 인간으로서 원의를 즐기며 피조물을 돌볼 책임과 권리를 갖고 있는 피조물 중 최고의 존재였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가치를 발견하게 된다. 인간의 가치는 그가 하나님의 창조의지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유일한 존재로서 하나님과 영적 교제는 물론, 하나님과 사랑의 교제 나눌 수 있는 존재라는데 있다. 여기에 더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유일한 존재로서의 인간은 타 피조물에 대한 책임과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존재의 가치를 지닌다.





4. 인간 창조의 목적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의 목적은 무엇인가? 하나님은 왜 인간을 창조하셨는가? 웨슬리는 인간 창조의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데 있다고 보았다. 인간은 이런 목적을 위해 영광스럽고, 신비스럽게 창조된 피조물이다. 웨슬리는 "어떤 목적 때문에 생명이 사람의 자녀들에게 수여되었는가? 왜 우리는 세상으로 보내졌는가?"라는 물음에 "그것은 한 가지 목적, 즉 '영원을 준비하기 위하여"라고 대답한다. 우리는 오로지 이 목적 때문에 사는 것이고 그리고 이 목적 때문에 "생명이 주어졌고 계속 되는 것"이라고 웨슬리는 주장한다. 이처럼 웨슬리에게 있어서 인간의 창조 목적은 영생을 준비하기 위해 창조되었기 때문에, 인간은 위대한 창조주를 알고, 사랑하며 그를 섬겨야 한다. 따라서 인간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맡긴 자연세계와 은사를 활용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종교개혁자이며 장로교의 창시자인 칼빈도 웨슬리와 같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인간 창조의 목적으로 보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방법을 이렇게 설명한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으로 우리의 모든 삶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을 배우며, 우리를 강권하는 어떠한 궁핍에서도 언제나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그 안에서 온갖 선한 일들을 찾으며, 마음과 입으로 하나님만이 모든 선한 것의 창조자이심을 인정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경외하는 것이다. 그러나 칼빈에 의하면 극소수의 인간들만이 하나님을 진심으로 신뢰하고 경외한다고 보았다.





5. 인간의 구조





웨슬리는 인간은 몸(Body), 혼(Soul), 영(Spirit)의 세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삼분설(Trichotomy) 보다는 육과 영혼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종교개혁자들의 이분설(Dichotomy)을 주장한다. 웨슬리는 인간 육체의 구성성분은 만물의 4성분인 흙, 물, 불, 바람으로 되어 있으며, 혼(Soul)은 생각, 판단, 상상, 기억 등의 오감의 능력을 갖는다고 보았다. 웨슬리는 인간은 물질적 존재만이 아니라 영적인 존재라 보고 인간은 인간의 육체와 구별되는 영혼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웨슬리는 인간을 구성하는 영혼의 정체를 '하나님의 형상'에서 찾는다. 하나님이 물질이 아니라 영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은 영에 속한다. 그런 까닭에 혼은 육(Body)과는 다른 존재로서 육체의 사멸 후에도 계속 존속된다. 육과 혼은 서로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부활 후에도 몸과 혼으로 구성된 존재로(영적인 몸) 있게 될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웨슬리는 영혼과 육체는 분리되지 않지만 구별되는 것으로 보면서 이 영혼이 불멸을 확증해 주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현재 육체와 영혼이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듯이 부활할 그 때에도 다시 서로 밀접하게 연결될 것이라는 점을 웨슬리는 수용한다.


웨슬리는 육과 혼 이외에도 '영'의 요소를 추가하고 있다. 그는 그리스도인에게는 '영'이라는 요소가 있다고 본다. 바울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혼(Psyche), 육(Soma), 영(Pneuma) 중에서 영은 기독교인에게서만이 발견되는 하나님의 은사이고 이것은 초자연적 요소인 성령이라고 했다. 웨슬리도 바울과 같이 혼과 육을 인간의 자연적 구성 분자로 보고, 영은 기독교인에게만 발견되는 하나님의 초자연적 선물이라고 하였다.





6. 인간의 의지와 자유





웨슬리는 인간 영혼의 여러 속성들- 생각, 판단, 상상, 기억 등- 외에 '의지와 자유'를 또 하나의 심적 요소로 보아 이것으로 행동의 결단과 선악간의 선택을 한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의지(will)는 인간의 육체적 요소와 연관된 감정에 속하고, 인간의 자유(freedom)는 인간의 자기 결단의 능력에 속한다. 자유는 의지의 작용이 아니라 인간 영혼의 독립된 속성으로서 영혼의 모든 심리작용과 신체의 동작을 관장하는 능력이다. 자유가 결단의 능력이라면 의지는 행동의 능력이라고 볼 수 있다. 자유는 행동을 결단하며 선과 악을 선택한다. 인간은 자신의 운명을 선택할 자유가 있다. 웨슬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선이나 악을 택한 자유가 있다고 보았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지만 불변하게 창조된 것 아니다. 따라서 인간은 시험에 견딜 수는 있으나 타락하기 쉬운 존재다.


웨슬리는 본래적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 속에 있었다고 생각했다. 하나님은 이 완전한 인격적 피조물에게 완전한 법을 주시어, 그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한 완전한 복종을 하도록 요구하였다. 사랑의 법에 복종하면서 인간은 영원한 생명을 경험하였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 자신의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하게 된다. 웨슬리에 의하면 인간의 하나님의 형상의 상실은 인간의 자유 남용에 의해 즉, 인간의 자유 의지를 바르게 행사하지 못함으로써 비롯된 것이라고 보았다. 여기서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의지의 자유가 악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오용한 인간이 악하다는 것이다. 인간의 의지의 자유의 오용으로 비롯된 인간의 하나님의 형상의 상실의 문제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관점을 인간의 타락과 죄의 문제로 돌려놓는다.





III.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한 타락한 인간





1. 인간의 타락








타락 이전의 인간의 모습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는 인간이었다. "인간에게는 창조주를 반사하고 반영하며 그리고 하나님의 축복을 중개하는 자연적 형상, 정치적 형상, 도덕적 형상으로서의 최고의 역할이 주어졌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형상을 상실하게 되었다. 보다 현실적인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인간의 타락과 원죄에 대한 웨슬리의 이해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처음 인간은 사랑이 충만하였으며, 그 사랑은 인간의 본성, 사고, 언어, 그리고 행동의 유일한 행동의 원리가 되었다. 사랑과 진리가 충만하신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인간은 거룩하고 무죄한 인간이었다. 따라서 창조시의 인간들은 하나님께서 부여해 주신 자유, 이성 등의 기능을 바르게 사용하여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를 나누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은 시험에 견딜 수는 있을지라도 불변하게 창조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타락할 가능성이 있는 인간이었다. 창조시의 인간은 하나님의 특별한 명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서 타락하게 되었다. 선악과를 따먹은 행위는 하나님의 통치에 반역하는 행위가 되기 때문에 인간은 더 이상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를 나누지 못하게 되었다.


웨슬리는 인간이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지 않고 거역했다는 것은 인간이 타락하기 전에 선과 악을 선택할 수 있는 의지의 자유가 있었다고 보았다. 따라서 인간이 자신의 자유의지의 결정으로 창조주의 뜻 대신에 인간 자신의 뜻을 택하였다는 것은 곧 악을 택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선택은 하나님을 불신하는 행위이며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행위이다. 따라서 이러한 행위는 자신에게 수여된 자유의지를 오용하여 취해진 어리석은 행동이었다.


이러한 인간의 불순종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어지게 하였으며, 이 관계를 깨어지게 한 인간의 불순종은 인간의 원죄가 되었다. 따라서 웨슬리는 죄의 기원을 에덴 동산에서의 아담의 불순종으로 보며 그것을 인간의 원죄로 보았다. 웨슬리는 죄의 도입에 관하여 마귀에게 그 원인을 돌린다. 웨슬리는 인간이 타락하기 전에 천사들 중 일부가 타락하여 사탄이 되었고 이 사탄은 뱀의 몸 안에 자신을 감추고 하나님의 창조물인 인간의 행복을 질투하여 인간을 유혹했다고 본다. 만약 인간의 범죄가 사탄의 유혹에 위한 것이라면 인간의 범죄에 사탄이 책임이 있느냐?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그러나 웨슬리는 비록 뱀이 유혹했을지라도 인간이 스스로 선택할 때까지는 유혹은 단지 유혹(temptation)일 뿐이며, 하나님은 아담에게 절대적인 자유를 주었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선택은 인간의 책임적인 결단에 해당된다고 보았다. 죄는 인간 본성의 창조적인 독립적인 행동이며 자유로운 선택의 결과이다. 따라서 죄의 기원은 하나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인간 자신 안에 있는 것이다.





2. 인간의 원죄와 유전





아담은 전 인류의 시조이기 때문에 전 인류의 운명은 아담에게 의존되어 있다. 모든 인류의 대표자인 아담이 범한 최초의 범죄는 모든 인류를 대표해서 지은 죄였다. 따라서 아담의 타락과 그 죄책은 전 인류에게 전가되었는데 이것이 곧 인간의 원죄이다. 웨슬리는 이 원죄를 계속번지는 고집스러운 악이라 했다. 원죄는 하나님의 영광을 찬탈하려는 인간의 오만스러운 죄악이며 인간의 활동을 통해 죄를 창조하는 죄이다. 웨슬리는 모든 죄의 뿌리는 하나님에게서 독립하려는 욕망이라고 말한다. 독립과 자기충족은 하나님의 뜻을 싫어하여 하나님보다는 피조물 속에서 자기 자신을 성취하려는 고집으로 귀착된다(롬1:25). 인류의 대표자 아담이 계약한 하나님과의 약속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이고, 순종하지 않으면 영원한 죽음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아담이 하나님과의 약속에 실패하게되자 전 인류는 아담과 함께 타락하게 되었으며, 원죄로 인하여 모든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하였으며, 하나님의 진노와 형벌의 자식이 되었다고 보았다. 그래서 아담의 모든 후손들은 그들 스스로 어떤 죄를 범하기 전에 이미 원죄성을 지니게 되었다.


원죄에 대한 교리의 중요성을 위해 웨슬리는 존 테일러(Dr John Taylor of Norwich)가 1750년 런던에서 출판한 "원죄의 성서적 교리"(The Scripture Doctrine of Original Sin)에 대한 답으로서 약 272쪽이나 되는 분량의 "원죄의 교리"(The Doctrine of Original Sin according to Scripture, Reason and Experience)란 책을 쓴 것으로도 알 수 있다. 테일러(Taylor)는 죄를 개인의 행위로부터 보려한다. 개인의 행위는 반복을 통해 습관이 되고, 이 개인의 행위는 인간의 성향과 기질에 영향을 끼쳐 사람의 독특한 성격을 형성한다. 테일러는 인간의 죄는 환경의 영향으로 조성된 나쁜 습관의 결과라고 보았다. 나쁜 습관은 나쁜 교육에 영향을 받았다고 보았다. 그는 죄는 인간 본성이 물려받거나 타고난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테일러는 타락 이전의 아담의 상태는 악도 아니고 의도 아닌 중립적인 것이며, 중립에서 선과 악은 자유로운 선택에 의하여 어느 한 쪽의 계속적인 습관을 만들어 낸다고 하였다. 그는 이성과 의지의 힘이 어떤 모델이나 도덕적인 덕을 따른다면 죄로 향한 인간의 경향성은 극복되고 따라서 악의 세력은 점점 제거될 것으로 보았다. 테일러는 원죄는 인간의 책임성을 회피하게 하는데 인간의 책임성을 주장하기 위하여 이 원죄의 교리는 사라져야 할 교리로 보았다. 그러나 웨슬리는 테일러와 같이 인간의 자유성과 책임성을 강조하지만 테일러와 같이 원죄의 교리를 사라져야 할 교리로 보지 않고 오히려 중시하였다. 웨슬리의 논리는 선한 행위가 행해지기 전에 인간 그 자체가 선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현실적인 인간은 악한 행위만 반복한다. 이것은 인간 안에 원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웨슬리의 원죄사상은 일반적으로 전통적인 견해, 즉 바울, 어거스틴, 루터, 칼빈의 사상과 거의 동일하다. 웨슬리는 인간이 타락함으로써 그 성품과 영혼이 완전히 부패하였으며, 그 마음의 생각과 계획이 악하게 되었다고 보았다. 즉 인간은 범죄로 본래 소유한 하나님의 형상인 원의에서 떠나 본질상 악한 성향을 갖게된 것이다. 이렇게 타락한 인간은 자신을 구원하지 못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수도 없고 하나님께 나갈 희망도 없다.


타락한 인간의 인간성 그 자체로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형상을 수여한 그 분과의 관계 복원이 없이는 회복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시 한번 인간이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질 때에야 비로소 하나님의 형상이 다시 회복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은 새로운 창조이며, 새로운 인간의 출현이다. 다시 인간들이 인간 창조의 원초적인 목적에 합치하려는 협력작용(synergy)이 존재할 때 새로운 인간의 출현이 가능하다. 그러나 인간성 그 자체로는 이 협력작용을 주도해 나갈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주도권은 인간편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 있기 때문이다.


원죄에 대해서 웨슬리와 칼빈은 같은 견해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원죄는 하나님이 미리 예정해 놓으신 것이 아니라 인간의 타락으로 인간에게 유전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웨슬리와는 달리 칼빈은 원죄는 하나님이 미리 계획적으로 예정해 놓으신 것이라고 하였다. 웨슬리도 칼빈과 같이 인간의 전적타락(Toatal depravity)을 주장한다. 이에 대한 어거스틴(Augustine) 견해는 타락 이전의 아담은 순수한 자연 상태에 놓여있었던 것이 아니고 은혜의 도움 아래 있다고 보았다. 은혜의 도움이 아담을 그와 같이 하나님을 향하여 살아남을 수 있도록 하였다. 타락 이전의 아담은 항상 죄를 범할 위험에 처해있는 위태로운 존재였다. 이에 반하여 웨슬리와 종교개혁자의 견해는 타락 이전의 아담은 초자연적 도움이 필요하지 않은 선의 상태 즉, 아담의 완전한 상태(Adamic perfection)를 주장한다. 타락 이전의 아담은 죄가 없는 전적으로 무흠한 존재, 이해력과 사랑 그리고 의에 있어서 완전한 존재, 타 피조물을 완전히 지배할 수 있었던 낙원에 사는 사람,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하심같이 거룩한 존재였다.


원죄론은 웨슬리 신학에 있어서 중심적인 교리 가운데 하나로 취급되고 있다. 웨슬리는 구원론을 전개하면서 인간의 범죄사실을 중요시하며 인간의 죄의 진상과 범람하는 죄와 그 기원을 원죄로 설명한다. 웨슬리는 자신의 원죄를 아는 것은 은혜를 받은 이들에게만 알려진 진리라고 보면서, "이방인들은 전혀 자기의 원죄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웨슬리는 자기의 원죄를 아느냐의 유무가 이방인과 기독교인을 구분하는 근거가 된다고 하였다. 웨슬리는 자신의 죄를 자각하게 될 때에 구원이 시작된다고 보고, 그는 그의 설교 "원죄"(Original Sin)에서 '원죄'를 부정하려고 하는 자들은 이교도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따라서 원죄설은 기독교 교리의 중심교리이며 이것을 신앙하는 여부로 기독교와 이교를 구분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웨슬리는 복음 선교를 할 때에 항상 청중이 죄인이라는 것을 입증하고 여기에 기초해서 그 다음에 하나님의 은혜를 제시하였다.


아담은 인류의 원형 또는 대표이므로 모든 인류의 상태는 아담에게 달려있다. 그의 의지적 범죄로 모두가 타락하였고 고통, 슬픔, 온갖 불행을 상속하였으며, 또 죄성을 얻어 세상을 더럽히는 모든 죄와 악덕을 낳았다. 죄의 결과로 인간에게 죽음이 왔다. 어린이가 아직 범죄하지 않았어도 아담안에서 함께 죽음을 당한다. 이 죽음에는 영혼의 영원한 죽음도 포함된다. 이 퍼져나가는 원죄의 저주는 아담을 넘어 모든 사회적 관계와 조직 및 피조물을 함께 타락시켜 고통을 겪게 한다. 모든 피조물에 번지는 악은 타락의 직접적 결과이고 증거이다.


우리가 원죄를 가지고 있다면 원죄는 어떻게 유전되었을까? 웨슬리는 아담이 전 인류를 대표하는 시조로서 그의 후손들의 운명을 결정하는 대표로서 행동하였는데 아담 한 사람의 타락으로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죄로 말미암아 죽음이 들어왔으며 그 죽음은 온 인류에게 임하게 되었다고 본다. 그러나 웨슬리는 실제로 원죄가 어떻게 유전되는지 설명할 수 없다고 하였다. 하지만 그는 원죄의 유전을 설명할 학설이 없다고 하여도 문제시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성서와 체험에 의하여 그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웨슬리는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전달되는지에 대하여 알고있지 않으며 또 알려고도 하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원죄는 어떻게 유전되었을까? 하는 질문은 무익한 호기심의 충족을 일삼는 것으로서 대답할 필요조차 없는 일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웨슬리는 일반적으로 원죄는 성적인 결합에 의하여 유전된다고 보았다. 원죄는 인간성을 통하여 육체적으로 출생할 때에 부모로부터 아이에게 옮겨진다. 아이의 순수한 영혼이 수태시에 여자의 태 속에서 인간적으로 생겨난 육체와 결합되면, 아이의 영혼은 그러한 결합으로 더렵혀지게 되며 타락한 인간 본성에 참여하게 된다. 부모는 그들 자신의 본성을 아이에게 전달해 주면서 자식을 낳는다.


"아담의 죄로 인하여 죄책이 모든 사람들에게 전가되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죄의 값은 사망(롬6:23)인데 영아가 죽는다는 사실은 영아의 원죄를 입증하는 것이다. 웨슬리는 영아도 원죄를 물려받은 죄인이며 그리스도의 속죄 없이는 구원받을 수 없기 때문에 어린아이도 원죄의 사슬 아래 있다고 보았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아담의 죄의 댓가인 사망이 영아들에게까지 선고될 수 없을 것이다."





3. 원죄와 특수한 죄





웨슬리는 죄를 원죄와 특수한 죄로 구분하는데 양자간의 관계는 유기적이고 밀접하다. 원죄는 인간본성의 내적 타락으로 열매맺게 하는 악의 뿌리이며 특수한 죄는 원죄에서 나온 악한 싹이다. 웨슬리는 특수한 죄 즉, 자범죄(voluntary transgression)를 둘로 나눠 내적인 죄(inward sin)와 외적인 죄(outward sin)로 본다. 내적인 죄는 유혹을 받을 때 물리치지 못하고 싹트기 시작하는 죄이며 외적인 죄는 죄의 싹이 성장하여 구체적 행동으로 나타나는 죄를 말한다. 자범죄는 하나님에 대한 법을 고의적으로 범하는 죄로서 인간을 사망에 이르게 하는 죄이다. 인간을 실제로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은 원죄가 아니라 자범죄 때문이다. 그러나 무의식적인 죄와 비고의적인 죄로 웨슬리는 무지, 오류, 이해력의 결여, 상상력과 기억력의 빈곤, 실언, 실수 등이 있는데, 이들을 실제로 죄로 보는 것은 부적절하지만 이러한 죄들도 모두 속죄의 보혈을 필요로 한다고 보았다. 모든 잘못된 것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를 필요로 한다. 따라서 누구든지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웨슬리는 자범죄 가운데 소극적인 내적인 죄가 있는데 그것은 무관심의 죄와 태만죄라 하였다. 이는 인간의 하나님과 멀어짐과 형제의 죄를 책하지 않음과 경건의 훈련을 게을리 하는 것 등이다. 무관심의 죄와 태만죄를 방치하면 결국에는 신앙과 사랑이 사라져 범죄하게 된다. 또 다른 내적인 죄는 자랑, 성냄, 하나님 이외의 것을 지나치게 사랑하고, 피조물에서 행복을 얻으려는 욕망 등에서 나타난다. 인간의 내적 죄는 성장하여 결국 영혼을 어둡게 만들어 외적인 죄로 노출된다. 곧 특수한 죄는 인간 본성에 잠재한 죄성에서 나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원죄 즉 죄성은 모든 다른 죄의 씨앗이며 인간 마음과 생활에 나타나는 모든 특수한 죄의 원인이 됨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중생한 신자는 이 죄성을 발견하고 이 죄성의 퇴치를 위해 하나님의 은총을 요청하여 사랑으로 충만하여 성결된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 인간들은 하나님을 무한히 사랑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진 존재로 창조되었다. 그러나 우리 인간들은 자기자신과 자신의 성취를 무한히 사랑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이야말로 원죄의 실제성을 보여 주는 것이다. 웨슬리에 있어서, 죄는 하나님 혹은 하나님 형상으로 피조된 다른 인간에 대하여 사랑의 원리를 침해할 때 죄이다.


원죄의 해결로서 웨슬리는 '선행은총'(prevenient grace)의 교리를 강조하였다. 선행은총이 아담의 후손에게 전가된 죄보다 우선하거나 앞서며, 아담의 후손을 사면해 주신다. 이러한 선행은총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에 의해서 가능하게 되었으며, 모든 사람들에게 유효하다.


마틴 슈미트(Martin Schmidt)는 기독교와 이교의 차이점은 죄의 보편성에 대한 교리에 있다고 하였다. 모든 사람은 아담 안에서 그리고 자신의 인격 안에서 죄된 본성, 기질, 행동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에서 떠나있다. 인간의 원죄성은 죄의 보편성을 의미한다. 웨슬리는 인간의 죄의 보편성과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의 보편성과 그리스도의 속죄의 보편성을 강조한다. 웨슬리에게 있어서 복음의 출발점은 죄인으로서의 인간은 자기의 구원을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능력자임을 전제한다.





4. 인간의 타락의 결과





아담이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나타난 타락의 결과는 너무나도 가혹하게 나타났다. 타락으로 인하여 인간은 지음 받을 때 지녔던 자연적 형상은 비록 완전히 사라져 버리지는 않았을지라도 부패되었고, 정치적 형상도 그 재능은 유지하고 있을지라도 그 통치가 부패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큰 결과는 아담이 지니고 있었던 도덕적 형상은 완전히 소멸되고 대신에 악마와 짐승의 형상을 입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 날 그 시간부터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됨으로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게 되었고, 하나님의 형상이 박탈당하자 곧 불행하게 됨과 동시에 악마의 형상인 교만과 아집에 빠지게 되었고, 멸망할 짐승의 형상인 관능적인 욕망과 정욕에 빠지게 되었다.


아담의 타락으로 하나님의 형상인 도덕적 형상과 자연적, 정치적 형상이 비뚤어져 버렸다. 이로 인해 아담의 혈통을 이어받는 모든 인류의 자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생명을 상실하였고, 그들이 지니고 있었던 이성과 의지의 자유의 기능은 부패되었으며,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사랑은 자기사랑으로 바뀌었다. 또한 아담이 창조되었을 때 가지고 있었던 모든 의와 성결의 모습을 잃어버린 채로 태어난다. 따라서 아담의 후손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하고 악마의 형상과 짐승의 형상을 지니게 되었다.


둘째로 아담의 타락의 결과로 인간은 하나님과 교류할 수 있는 접촉점을 상실했다. 만일 인간이 타락시에 하나님의 전체 형상을 완전히 훼손했거나 상실했다면, 하나님이 인간에게 이를 수 있는 또는 인간과 교류할 수 있는 접촉점이란 존재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아담의 범죄는 인류에게 전적인 부패를 가져다주어 온 인류가 타락하게 되었다. 웨슬리는 타락이후 인간의 완전성은 변하였고 그 본성도 완전 부패한 것으로 본다. 물론 타락이전의 아담은 공의(original righteousness)하였다. 그러나 아담이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공의의 관계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파괴되었다. 하나님과의 관계 파괴는 생명의 근원인 하나님으로부터의 단절로 연결되고 이로서 인간은 육체적, 영적 죽음을 보게 되었다


셋째로 타락의 결과는 죄책과 악에로의 경향을 지녀 행복을 상실하고 고통과 죽음을 맛보게 되었다. 죄는 인간들 사이의 교제(Communion)를 침해하며 인간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웨슬리는 하나님과의 접촉점을 상실한 인간은 하나님께 버림받아 이미 영적으로 죽어있으며, 죄 가운데 있는 인간은 계속해서 죽음을 재촉하여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 속에서 육체와 영혼의 파멸을 서두른다고 하였다. 죄의 저주로서 사망이 왔다. 사망은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형벌이다. 물론 웨슬리는 육적인 죽음만을 말하지 않고, 영적인 죽음 -하나님의 생명과 형상을 잃어버림- 까지 말했다.


아담의 타락의 결과는 죽음만이 아니라 이 세상에 고통을 가져와 인간의 행복을 거두어 가버렸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의지에 복종할 때만이 행복하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타락의 결과로 인간의 정신생활과 인간의 육체적 생활의 모든 분야에 걸쳐 도덕적인 죄와 무서운 오점이 나타나게 되었다. 육체적 약함과 결함이 나타나게 되었다. 육체는 영혼을 압박하여 영혼의 활동을 방해하고 인간의 지력은 오류와 무지를 초래하였다.


하나님이 창조시 창조한 세계는 결함과 오점, 부패, 파괴, 죽음, 죄, 고통이 없었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 이외의 것에서 행복을 찾아보려는 시도 속에서 자신과 모든 피조물을 죽음 속에 쓸어 넣었다. 하나님이 지배하는 이 세계에 왜 고통이 존재하느냐? 그것은 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악을 택하여 죄가 이 세상에 들어와 죽음과 여러 고통이 오게 되었다.


넷째로 아담의 타락의 결과는 인간과 다른 피조물과의 관계를 흐트러지게 하였다. 인간에게는 정치적 하나님의 형상이 있었다. 하나님의 정치적 형상이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인간 이하의 피조물과의 교제의 매개자가 되게 하였다. 인간 이하의 피조물은 운동의 방향을 조장할 수 있는 원리와 어느 정도의 이해력과 그리고 행복과 불사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타락으로 인간이하의 피조물과의 관계가 단절되어 땅은 저주받아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게 되었고 인간과 자연의 조화가 파괴되고, 동물과의 신뢰관계가 파괴되는 등 모든 피조물은 죽음과 고통에 내던져지게 되었다. 웨슬리는 그의 설교에서 이렇게 말한다; "수 많은 피조물들이 인간에게서 달아나고 있으며, 인간의 증오스런 현존을 피하고 있습니다. 나머지 피조물들은 인간에게 공공연히 반항하며 그들에게 힘이 주어진다면 인간을 파멸시키려고 합니다." 인간의 죽음과 고난의 원인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 아담의 타락의 결과이다.


인간의 타락의 결과에서 보듯이 자유의지를 남용한 결과 타락한 아담에 의해 죄성을 지닌 자연인은 영적 수면 상태에 있다. 그는 하나님이나 그의 법도, 영적 선물, 영적 사건을 전혀 모르며 항상 위기 가운데 있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고 자신에 대해서도 무지하며 범죄하면서도 자책감이 없는 죄의 종이다. 웨슬리는 자연인을 우상숭배자로 규정한다. 그것은 마음속에 하나님 보다 자신을 더 섬기고, 세상을 더 사랑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타락 이전에 완전한 자유를 지녔으나, 타락이후 자연인은 원하는 대로 악을 선택할 자유는 있어도 선을 택할 자유는 잃었고, 하나님 대신 마귀의 속성이 그에게 있는 것이다. 이런 자연인은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고 사형선고를 받은 것이며 하나님과 관계회복을 위해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이다.


아담은 인간을 죽음으로까지 몰고 간 악을 어떤 것인지 알고 선택했을까? 웨슬리는 아담은 악을 선으로 착각하였을 것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아담은 절대 무오의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아담이 악을 선으로 착각한 것은 그 이전에 이 세상에 악이 존재하였을 것이라는 전제가 따라 온다. 이 전제는우리로 하여금 인간의 시조 아담을 그처럼 타락으로 이끈 정체는 어디로부터 왔는지에 대하여 묻게 한다. 과연 아담의 타락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웨슬리는 악에서 오는 것이라고 대답한다. 그렇다면 악은 어디로부터 온 것일까? 웨슬리는 타락한 천사 루시퍼(Lucifer)를 악의 기원으로 보고 있는 듯하다. 새벽별 루시퍼는 자유를 행사하여 최초에 죄를 범하여 이 세상에 악을 끌어들인 존재이다. 루시퍼는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오만과 자기 뜻대로 하려는 욕심을 가지고 죄에 떨어져 그 자신뿐만 아니라 천사의 1/3을 길동무로 삼았다. 그 결과 영광된 행복을 상실하고 하늘에서 추방당했다. 추방당한 루시퍼는 하나님께서 창조한 인간의 행복을 부러워하고 질투하여 인간의 행복을 빼앗기로 결심하고 자신을 뱀의 모습으로 숨겼다(창 3장). 하나님을 위해 창조된 인간의 영혼이 하나님의 존전에서 추방되었다는 점에서 지옥의 형벌의 본질이 존재한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창조 안에 있으므로 악도 하나님이 창조했다고 말할 수 있지 않는가? 그러나 전파의 법칙을 만드신 분은 하나님이지마는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는가의 책임은 사람에게 있다. 악마는 그의 자유와 책임으로 타락했다. 웨슬리는 이에 대한 논리적인 설명은 하고있지 않다.


우리는 위의 문제에 이어서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아담의 타락을 저지하지 않았을까? 물어 볼 수 있다. 웨슬리의 대답으로는 아담의 타락으로 인간의 부패와 고뇌를 체험한 제2의 아담인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에 대한 신앙으로 구원을 얻게 되는 편이 아담이 타락하지 않았던 경우보다는 인간에게는 더 큰 이익이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웨슬리에 의하면 아담의 타락이 없다면, 첫째로 하나님의 아들이 희생되는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 역사 속에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인간의 신앙, 이웃 사랑도 없을 것이다. 둘째로 아담의 타락으로 고난과 죽음이 와서 그 덕분에 우리는 인내의 신앙을 기를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셋째로 인간의 고난은 이웃을 향한 봉사의 기회를 만들어 주고, 사랑의 성장을 가능케 하고 하늘의 상급을 더 풍성케 했을 것이다.


웨슬리의 인간이해는 타락한 인간 이해에서 뚜렷해진다. 웨슬리에게 있어서 죄의 기원과 인간 타락의 원인은 하나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인간에게 있으며, 죄에 대한 책임도 역시 인간에게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인간의 불순종은 인간의 자유를 남용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 타락의 책임은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있다. 웨슬리는 펠라기우스(Pelagius)에 빠지지 않으면서 인간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인간의 책임을 주장하였다. 웨슬리 신학에서 인간이 구원을 못 받았으면 그 책임은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자신에게 있다.





5. 타락한 인간과 하나님의 선행 은총





만약 우리가 계속 인간이 되려고 한다면, 즉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기를 원한다면, 인간으로서의 우리는 생명이신 하나님과 계약(covenant)을 맺어야 한다. 웨슬리는 이것을 '은총의 계약'(the covenant of grace)이라고 부른다. 이 은총은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a gift of God)인 것이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사명을 실현하도록 초대하는 하나님의 초청인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물인 은총으로 인해 이 사실을 깨닫게 된다. 웨슬리는 그것을 '선행은총'이라고 부른다. "구원은 이른바 일반적으로 일컫는 선행은총과 함께 시작된다."


하나님은 타락한 사람들을 그대로 내버려두시지 아니하고, 선행적 역사를 통하여 인간을 율법 아래로 끌어들임으로써 그들의 타락을 인식하게 한다. 하나님은 그의 선행은총으로써 인간의 타락을 인지하게 하시고 그 다음에 회개로 이끄신다. 웨슬리는 율법의 첫째 목적은 죄의 세계를 인식하는 것이지만 율법으로 죄인들을 확신시키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하였다.


웨슬리는 인간은 전적으로 원죄 아래에 있어서, 나면서부터 선이 부패되어 있어 많은 악덕을 소유하고 있으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대속을 필요로 한다고 주장하였다. 웨슬리는 올더스게이트의 회심 전까지는 18세기의 합리주의 영향력 아래에서 낙천적인 인간관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회심 이후에는 죄인으로서의 인간이라는 인간관을 지니게 되었다.


인간의 유일한 희망은 타락으로 인한 영원한 죽음의 죄책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총으로만 가능한 것이다. 인간의 희망 또는 구원은 하나님의 은총에서만이 가능하다. 계속 역사 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믿음으로 수용하느냐의 여부를 스스로 결정하는 자유의지는 원죄에도 불구하고 남아있다는 것을 웨슬리는 "선행은총"의 개념을 가지고 설명한다. 타락으로 인간이 지녔던 하나님의 형상을 모두 잃어버렸다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인하여 인간은 그의 원죄를 용서받게 된다.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하여 원죄의 죄책을 해결받게 된다. 따라서 "모든 하나님의 형상도 부분적으로 회복되고, 선택의 자유의지도 부분적이나마 회복된다."


웨슬리의 인간관은 아담의 죄로 인하여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임을 말하면서도 다른 한편 하나님의 은혜아래 있는 존재임을 말한다. 타락한 인간도 하나님의 선행은총을 받고 있다. 따라서 타락한 인간도 선행은총에 의하여 원죄의 죄책이 제거된다고 믿었다. 웨슬리의 인간관은 하나님의 은총을 강조하는 구원론적인 관점에서 설명되고 있다. 비록 인간이 타락하였을지라도 하나님은 그 타락한 인간과 관계를 맺으신다. 이 관계는 선행 은총의 개념을 통하여 설명될 수 있다. 웨슬리에 의하면 선행 은총은 사람이 의롭다함을 얻기 이전에도 모든 인류에게 역사하고 있었다고 본다. 인간이 먼저 타락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먼저 모두에게 값없이 은혜를 주심으로 모든 인간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은혜를 예비적으로 받고 있다는 것이다.


웨슬리 신학에서는 인간이 은혜가 없어서 타락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받고 있음에도 인간이 그것을 거부하기 때문에 타락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웨슬리는 하나님의 은총의 역사는 모든 인간에게 미친다고 강조한다. 하나님께서는 선행은총을 모든 사람에게 값없이 주셨다고 웨슬리는 말한다. 웨슬리는 아담이 선이나 악을 선택할 자유의지가 있었던 것으로 보았다. 웨슬리는 인간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는 어느 정도의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다면 이것은 선행은총으로 인한 것이라고 보았다. 웨슬리의 인간관은 인간을 추상적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인간론을 펼치고 있기 때문에 그의 인간론은 단순한 인간론이 아니라 신학적 인간론이다. 웨슬리가 이해하는 인간은 "부패성을 가지고 있으나 원죄의 죄책에서 해결되어 있으며, 자유의지가 부분적이나마 회복되어 있어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함께 협동할 수 있으므로 자기 구원을 위해 일해야 할 책임이 있다고 보았다."


구원에 있어서 인간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에 의존하면서도 동시에 인간은 그 하나님의 은총에 호응하며 함께 일하여야 하는 책임이 있다. 이를 신인협동설(Synegism)이라 한다. 그러나 웨슬리가 주장하는 신인협동설은 인간이 절반, 하나님이 절반 나누어 맡는 식의 협동이 아니라, "인간 의지가 성령의 역사에 대해 수동적으로 협동함으로써, 하나님의 '이니시어티브'에 아무런 이의 없이 협동하는 것"을 말한다.


웨슬리 신학은 하나님의 은총과 인간의 책임의 관계에 있어서 이중택일의 원리를 적용하지 아니하고 양자를 택하고 창의적으로 종합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이 관계의 주도권을 인간의 책임에 두기보다는 하나님의 은총에 둠으로써 인간은 그의 의를 주장할 수 없게 만든다. 웨슬리는 오늘날 인간과 하나님의 양극단의 모습을 지양하고 복음적 신인협동설을 주장함으로써 인간이 신 앞에서 성실히 순응하는 삶을 살게하는 신학을 제공해주고 있다.


웨슬리는 은혜만을 강조하는 신학과 인간의 의를 강조하는 신학의 양극단 신학의 갈등에 빠지지 아니하였다. 그는 인간의 죄의 심각성에 빠져 비관주의에 빠지지 아니하였고, 오히려 하나님의 은총의 역사에 의한 인간의 낙관적 삶을 제시하였다. 왜냐하면 웨슬리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은총의 역사로 말미암아 구원은 시작되고 완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 구원받기 위해서는 누구나 하나님의 은총을 필요로 한다. 하나님의 은총은 누구에게나 임한다. 그러므로 누구나 구원에 대한 가능성과 희망을 가질 수 있다. 이런 가능성과 희망은 인간의 책임을 요청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웨슬리는 만인구원설과 예정론에 빠지지 아니하고 인간의 책임을 요청하는 은총으로만의 구원의 교리를 확립하였다. 웨슬리는 하나님의 은총과 인간의 책임 사이의 변증법적인 긴장을 유지하면서 이 양자를 창의적으로 종합하는 복음적 신학을 정립하는 공헌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웨슬리의 선행은총과 칼빈의 예정론은 하나님의 은총에 의한 구원에 대해서는 같은 견해를 지니고 있지만 웨슬리는 칼빈의 무조건적인 이중예정은 성경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없다"고 하여 받아들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칼빈의 "무조건적인 선택의 교리"는 구원을 희망하는 사람들의 동기를 차단하고 그들의 자유의지 행사권을 무효화시켜 버리기 때문이다. 이미 여러 곳에서 진술한바와 같이 웨슬리는 모든 사람에게 우주적으로 주어지는 선행은총의 교리를 통해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선물을 인간이 자유의지로 받아들여 구원을 얻을 수 있음을 강조한다. 그렇다고 웨슬리가 성경에 나오는 예정에 대해서는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웨슬리도 하나님은 그의 예지(foreknoweledg of God)로 많은 사람들을 택하셨음을 알고 있다. 웨슬리에 의하면 고레스 왕은 성전 건축을 위하여, 사도 바울은 선포를 위해 선택되었으며, 또한 어떤 사람으로 하여금 영원한 복을 누리도록 택정하기도 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삭이 출생하기 전에 아브라함을 "열국의 아비"라고 하셨고, 그리스도를 "창세부터 죽임을 당한 어린 양"(계13:8)이라고 하였으며, 아직 택정되지도 않은 신자를 "창세 때부터 택한 자"라고 하셨다. 그러나 그들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갈3:26)가 되었을 때 비로소 실제적으로 택함을 받은 자가 되는 것이며, 또한 베드로의 말대로 "하나님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으로 거룩하게 되는"(벧전1:2) 때에만 실제로 택함을 받는 자가 되는 것이다. 웨슬리가 예지론을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믿는 자는 구원을 받지만 믿지 않는 자는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웨슬리의 예지론(Foreknowledge)은 다음과 같은 논법을 따른다. 하나님은 영원에서 영원에 걸쳐 아들을 믿는 모든 사람들만이 구원을 얻고 믿지 않는 자는 멸망한다는 결정을 하셨다. 이 결정을 기초로 하나님은 창세 이전에 하나님의 행동 계획을 세웠다. 그 행동 계획 중에 예정된 사람들을 구원의 자리로 부르셨는데 이 사람들은 그들의 자유의지에 의하여 그리스도를 믿게 된다는 것을 예지하셨다. 웨슬리의 예지론에 따르면 1) 하나님은 인간이 죄를 범한다는 것을 알고 계셨다. 2) 그러나 인간이 죄를 범하는 것은 그것을 하나님이 알고 계시기 때문은 아니다. 3) 인간은 행동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있는 자유로운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보상과 형벌을 받게 된다. 4) 하나님은 영원에서 모든 일을 동시에 아신다. 따라서 하나님에게 후지(afterknowledge)도 없고 예지(foreknowledge)도 없다. 하나님에게 있어서 영원은 현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한 가지 일을 다른 한 가지 일 이전에 알게 되는 것도 아니고, 다른 한 가지 일 이후에 아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은 어디서나 일하고 계시면서 인간의 자유를 파괴시키지 않고 감독하신다. 웨슬리의 예지론의 약점은 자유는 예지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만약 하나님이 미리 안다면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라고 말할 수 없다는데 있다.


웨슬리는 칼빈과는 달리 이방인과 유태인을 막론하고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롬9:30-33)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미 멸망 받기로 예정되어 하나님의 은총이 역사하지 않는다는 예정의 교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에 어긋난다고 보았다.





IV.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새로운 인간





하나님은 자신을 거역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한 인간과 사랑의 교제를 끊고 인간을 고통과 죽음의 상태로 남겨두지 않고 선행 은총을 베푸셔서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여 새로운 인간, 즉 구원을 받을 수 있게 하였다. 하나님의 선행은총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속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시는 사건을 통하여 우리를 의인과 성화의 사람으로 만든다.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능력을 통하여 자신의 형상대로 새로운 인류를 다시금 창조하고 계신다. 모든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그의 구원사역에 복종하게 될 때 우리가 아담을 통하여 상실한 본래의 완전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웨슬리는 타락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한 인간이 선행 은총으로 인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여 새로운 인간으로 거듭나게 됨을 주장한다.





1.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인간





이미 전술한바와 같이 웨슬리는 선행은총으로부터 구원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인간은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죄책과 형벌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원죄를 용서받고, 그 원죄의 죄책은 인간이 태어나자마자 제거된다. 웨슬리는 원죄로 인한 죄책은 하나님께서 값없이 모든 인간에게 주시는 선행은총 곧 그리스도의 대속의 무조건적인 공로로 해결된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 웨슬리는 "하나님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의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셨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구원하기시 위해서 돌아가셨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은혜로 당신은 믿음을 통하여 구원을 얻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은혜는 구원의 근원이요, 믿음은 구원의 조건"이라고 말하였다. 이 말은 곧 선행은총에 의한 그리스도의 대속의 공로로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웨슬리 신학에서는 사람이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은 그 사람이 은혜를 받지 못해서가 아니라 은혜를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그리스도의 구원의 공로를 믿지 않기 때문인 것이다.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에 의해 다시 태어나야 한다. 그리고 다시 태어나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될 수 있다. 인간은 본래 완전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비록 부분적으로 그 형상을 상실했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여전히 완전한 하나님의 형상이 남아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완전한 형상을 회복하여 구원받는 새로운 인간을 이루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완전한 형상을 지상에서 지니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의존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2. 성화의 길을 가는 존재로서의 인간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워진 인간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워진 인간은 성화의 길을 가는 존재로서 새로운 인간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인간은 성화의 길을 가는 존재이다. 웨슬리의 인간관에서 가장 강조되고 있는 인간은 바로 이 성화의 길을 가는 존재로서의 인간이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원형적(prototypical)인간, 즉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인간으로 생각하고 있다. 볼리비아 감리교회는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다.





모든 인간은 자신의 소명(vocation), 사명, 운명을 완전히 깨닫고 발전시킬 수 있는 자유로운 인간이다. 인간은 하나님께 완전히 복종하며 인류에게 전적으로 헌신하는 인간이다. 인간들이 하나님을 닮고 변화를 받아 그에게 헌신한다면 그들은 진실된 인간이 될 것이다.





위의 선언서는 하나님을 닮고 변화를 받아 그에게 복종하고 헌신하는 인간을 진실된 인간으로 선언하고 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워진 인간이 지향해야 할 인간관을 선언한 것이다. 일본의 웨슬리 전문 연구 신학자인 노로요시오는 알미니안주의(Arminianism)에 기초를 두고 일생 동안 성화의 과정을 걸어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웨슬리의 인간 이해에는 시시각각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응답의 관계 속에서 사는 인간으로 파악되어질 수 있다고 하였다. 따라서 웨슬리 신학에서의 인간은 하나님에 대하여 자기의 삶의 모양을 어떻게 형성해야 하는가의 책임을 져야하기 때문에 인간은 매 순간마다 사랑에 의해 지배해 나가는 실존적 결단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986년 나이로비에서 있었던 세계 감리교회 대회에서는 "감리교인들은 뜨거운 마음을 가진 사람들로 알려져 있다. … [우리는] 완전을 위한 성결을 추구하고 있다. 그러나 비록 이것이 우리의 목표가 되어야 하지만 우리는 그것에 미치지 못했음을 유감으로 여기고 있다"고 선언하였다. 같은 선언서에서 "감리교인들로서 … 성화의 문제는 단순히 숨겨지거나 묻혀져 있는 보물처럼 우리가 간직하려고 하는 우리의 유산의 일부일 수는 없으며, 우리가 매일 매일 먹는 … 삶을 위한 식량"이라고 하였다.


상기한 선언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웨슬리의 후예들의 인간관은 성결의 추구에 목표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감리교는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 개인적 그리고 공동체적 훈련의 생활,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생활 즉, 성결로 나타날 것을 요구한다. 특히 이웃에 대한 사랑의 생활을 요구한다.


"웨슬리는 첫 창조의 인간을 완벽한 도덕적 순결의 대표자로 이해하였다. 도덕적 순결로서의 인간 이해는 웨슬리로 하여금 죄의 실재에 대한 예리한 통찰을 가능케 했다." 린드스트롬(H. Lindstrom)은 웨슬리의 죄관이 죄책관념에 집중되어 있으면서 언제나 죄를 선천적 타락으로 본다고 한다. 인간은 죄책에서 해방됨으로써 선천적 죄의 지배에서 벗어난다. 죄는 그리스도안에 있는 자에게 그 권세를 상실한다. 인간은 그리스도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로 죄사함을 받는 동시에 그리스도안에 있는 믿음으로 성화될 수 있다.


웨슬리는 죄를 질병으로 보고 구원은 질병을 치유받는 것으로 본다. 웨슬리가 질병을 죄로 간주하는 경향은 질병이 서서히 치료되는 것과 같이 성화의 과정을 그 배경으로 한 죄의 이해로부터 나온 것이다. 웨슬리는 원죄를 문둥병으로 다른 죄들은 원죄에서 기인하는 상처, 질병, 타락으로 묘사한다. 인간은 자신의 질병을 의식하기 전에 의원되시는 그리스도께 나올 수 없다. 웨슬리에게 있어서 인간본성의 타락에 대한 지식이 성화의 주관적 조건임과 동시에 구원과정의 첫단계이며 그 구원의 목적은 성화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일은 인간은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도 없고 그 자신의 죄성과 죄책, 그리고 무력함을 깨닫기 전에는 그리스도를 신앙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온 인류를 위한 치유자요 의원이 되신다. 웨슬리가 죄를 질병으로 보며 구원은 그 질병을 치유하는 보는 것은 웨슬리가 인간을 성화의 길을 가는 존재로 보는 것과 무관하지가 않다.


인간의 삶 속에서 재현되고 있는 타락의 여러 양상들로 인해 사람들은 죄를 짓고 있다. 오늘날 아무리 죄를 질병이나 질환으로 이해하고 의학이나 정신의학적 처방으로 치료해 보려고 애쓰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치유책이 발견되기까지 죄는 계속해서 존재할 것이다. 치유책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적 사역을 분명하게 받아들이는 곳에서 발견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믿음은, 인간의 치명적인 도덕적 병폐에 대한 유일한 치유책이며, 지금까지도 유일한 치유책이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치유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그의 구원사역에 복종하게 될 때에야 비로소 하나님이 본래 아담의 인격 속에 만들어 두신 완전한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될 것이다.





3. 새로운 관계 속에 있는 희망의 인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인간은 상실하였던 하나님의 형상을 다시 회복하면서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는 물론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도 다시 사랑의 관계로 회복된다. 웨슬리는 인간을 하나님의 선행은총에 근거를 두고 아담 안에서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회복함으로서 새로운 관계를 맺는 인간으로 이해한다. 웨슬리의 인간론은 그리스도인에게 우리의 죄가 용서되고 우리가 다시 새로워 질 수 있다는 희망을 주는 복음이다. 우리는 웨슬리의 말에서 타락한 인간에게 완전한 절망을 느끼고 있지 않음을 볼 수 있다; "사실상 인간은 자신이 창조될 때 지니고 있었던 하나님의 형상의 상당부분을 다시 획득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무엇을 다시 획득하게 되든지 간에 우리는 이 흙으로 만들어진 우리 안에 이 보물을 아직도 갖고 있다." 웨슬리는 하나님을 등진 타락한 인간들에게도 아직 기회가 있다고 여긴 것으로 생각되어진다. 왜냐하면 인간들에게 하나님의 형상이 들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웨슬리는 타락한 인간 속에 하나님의 형상이 계속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인간의 철저한 타락은 믿지 않았다. 인간이 비록 타락했을지라도 하나님의 형상이 심각하게 훼손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인간이 창조될 때 지니고 있던 자연적이고 정치적인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다고 확신했다.


우리 인간들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회복하면서 상실하였던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다. 웨슬리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은 하나님과 인간이 어떠한 관계를 맺느냐에 달려있다. 타락으로 단절된 하나님과의 관계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다시 회복될 수 있다. 이 회복의 사건은 모든 인간에게 열려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형상 자체인 예수 그리스도에게 달려와 관계 -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속하고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속하는 관계 - 를 맺으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여 생명과 행복을 다시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는 것은 인간의 자유 의사에 달려있다. 하나님은 그의 선행은총에 의하여 모든 인간이 자유롭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길을 터놓았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 개선은 인간의 선택에 달려 있게 된다. 선재은총을 통하여 인간의 도덕적 형상을 어느 정도 회복시켜 놓고 하나님은 친히 이 땅에 오셔서 인간과 관계를 맺으시기를 요청하고 계시다. 이제 인간은 이 땅에 오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데서 비로소 관계가 형성되어 진다. 이 관계는 곧 신앙의 관계인데, 이 신앙의 관계 속에서 인간의 절망은 사라지고 희망이 오게 된다. 따라서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통해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며 생명과 행복을 희망할 수 있게 된다.


이 관계 회복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로 끝나지 않고 인간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세계와의 관계까지 확장되어져야 한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있는 인간은 자기와 다른 존재와의 관계 속에서도 살게 창조되었다. 인간이 하나님과 가지는 관계가 사랑의 관계이듯이 인간이 타인과 자연에 대한 관계도 역시 사랑의 관계이어야 한다.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은 사랑의 회복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인간은 하나님은 물론 형제와 이웃 그리고 인간 이하의 피조물을 사랑으로 다스려야 한다. 인간이 이렇게 하나님, 형제와 이웃 그리고 자연에 대한 사랑의 관계 속에 있을 때 인간은 하나님이 창조시에 원하셨던 본래적인 참 인간을 실현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마치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 듯이 살아간다. 인간은 태초에 인류가 저지른 잘못을 다시금 열심히 반복하고 있다. 매일 매일의 뉴스 속에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등지고 도저히 하나님의 형상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잔인한 죄악을 범하는 사람들을 보게 된다. 그들은 악마와 짐승의 형상을 따름으로서 하나님의 형상을 훼손시키고 있다. 하지만 웨슬리의 인간론에 따르면 그들도 하나님께서 흙으로 창조하신 인간이기에 그들 역시 보물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웨슬리의 인간론은 타락한 인간들이 다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여 새로운 인간으로 살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 하나님은 실패와 변절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버리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지금도 신실하고 의로운 남은 자를 두시고, 그 신실한 남은 자를 통하여 하나님은 세계 복음화와 그의 의로운 나라를 건설하고 계신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우리들은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지음 바 된 새로운 재창조의 인간으로서 곧 이해와 의지의 자유와 여러 능력들을 부여받은 영적인 존재로서 "의로움과 참된 성스러움"(엡4:24)의 상으로 원 창조의 모습인 사랑이 가득 찬 흠 없는 하나님의 나라가 다시 이 땅에 도래할 수 있도록 그 본래적인 모습을 다시 찾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V. 나오는 말





웨슬리는 본래적인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거룩한 인간, 무죄한 인간임을 전제한다. 그러나 인간은 인류의 시조 아담의 타락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하여 악마와 짐승의 형상을 입어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되어 사망은 물론 의지의 자유까지 상실하게 되었으나 하나님의 선행은총으로 회복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통한 하나님의 형상을 다시 회복하는 새로운 인간을 말하였다. 이런 웨슬리의 인간론은 인간의 자유와 책임을 강조하는 인간론이다. 그의 인간론과 죄론에는 실존주의적 경향이 농후하다. 은총에 대한 지금 여기서(here and now)의 응답의 강조는 실존주의적이다. 인간은 주체적 단독자로서 하나님 앞에서 책임있는 존재로 서있는 동시에 인간은 예수 안에 있는 새로운 인간으로서 성화의 길을 가야 하는 존재다.


인간은 한편으로는 훌륭한 하나님의 창조물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너무나도 나약하고 죄에 빠질 수밖에 없는 미천한 존재이다. 그러나 인간은 틀림없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으며 하나님과 관계를 맺으며 살 수 밖에 없는 존재들이다. 인간은 하나님과 교통하지 않으면 한시라도 살 수 없는 존재들이지만 진정 자유로울 수 있는 존재이다. 웨슬리가 가르쳐 준바와 같이 "구원은 하나님의 선행하는 은총과 인간이 그 은총에 적극적인 응답에 의하여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될 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웨슬리의 인간론은 은총 안에서 비관주의가 아닌 낙관주의 인간론을 표방하고 있다. 웨슬리의 인간론은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 희망을 가진 인간론을 목적하고 있다. 인간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인간이 영적인 존재라는 것이고 또한 영으로 하나님과 만나 인격적인 관계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들은 하나님이 부여해 주신 영적이고 윤리적이고 현세적인 목표들을 실현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여섯째 날 인간을 창조하시고 심히 보시기에 좋았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자신이 만든 인간을 보시고 너무도 좋아 하셨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하나님의 미소를 외면하고 악마와 짐승의 형상을 입고 삶을 살아왔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미소를 돌려드려야 한다. 우리가 상실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날 하나님께서는 또 한번 미소를 지으시며 좋아하실 것이다. 오늘의 웨슬리안들은 물론 모든 기독교인들도 하나님을 웃기셔야 할 과제를 가지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화의 참된 길을 가는 희망의 인간이 됨으로서 그래서 완전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을 웃기실 수 있을 것이다.





웨슬리의 선행은총론(先行恩寵論)


1. 머리말

2. 은총의 개념

3. 선행은총의 의미

4. 웨슬리와 선행은총

5. 구원을 위한 예비은총으로서의 선행은총

6 선행은총의 작용

7. 선행은총의 요소

선행은총과 원죄

선행은총과 이성

선행은총과 율법

선행은총과 양심

선행은총과 자유의지

8. 선행은총의 보편성

9. 선행은총과 구원

이방인의 구원

어린아이와 정신이상자의 구원

10. 선행은총과 신인협력설

11. 맺음말



1. 머리말

선행은총은 구원론을 중심으로 하는 웨슬리 신학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신학적 개념중의 하나일 뿐만 아니라 웨슬리 신학을 특징짓는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이다. 웨슬리에게 하나님의 은총은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필수적이다. 특히 웨슬리는 은총의 화두로 선행은총을 말하고 있다. 선행은총 없이 웨슬리 신학에서는 인간의 원죄의 문제는 해결될 수 없다. 그리고 인간은 이성, 율법, 양심, 그리고 자유의지 등과 같은 속성들도 소유할 수도 없다. 이같은 인간의 속성들은 모든 인간에게 에외없이 보편적으로 주어진다. 그리고 이런 속성들은 인간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관계할 수 있는 접촉점을 구성한다. 이렇게 구성된 접촉점들을 통하여 인간은 하나님에 대하여 응답할 수 있게 된다. 웨슬리에 의하면 이러한 모든 속성들은 하나님의 선행은총으로 주어진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웨슬리 신학의 체계는 원죄와 선행은총을 근간으로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이 장에서는 웨슬리 신학의 특징 가운데 하나인 선행은총론의 내용을 살펴서 차후에 논의될 인간론의 전이해로 삼고자 한다.





2. 은총의 개념





웨슬리 전문 신학자 아우틀러(A. Outler)가 진술한바와 같이 은총이란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의 실제적인 활동"이다. 은총은 인간의 실존을 향한 하나님의 행동하는 사랑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은총'을 이야기할 때에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역사 하시는 '사랑'을 전제한다. 따라서 은총은 우리를 하나님과 화해시키기 위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행동하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리고 우리를 전적으로 성화시키기 위해서 성령 안에서 활동하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정의 될 수 있다. 웨슬리도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을 은총으로 보았다. 은총의 본질은 사랑이다. 사랑은 강제하거나 강요하지 않는다. 강제하거나 강요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의 본질도 아니고 사랑의 본질도 아니다. '사랑으로서의 은총'은 일반적으로 '신적인 사유와 용서', 또는 '우리 본성을 갱신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볼 수 있다. 사람이 은총을 받으면 하나님의 용서와 사유가 있게되고 또한 인간의 갱신을 동반한다.


하나님의 용서와 사유 그리고 인간의 갱신을 동반하는 은총은 인간의 구원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러므로 은총없이 구원을 받을 수가 없다. 구원받은 자는 어느 누구나 다 하나님의 은총아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은총은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우선적으로 요청된다. 은총이란 죄인인 인간이 구원을 얻을 수 있도록 '하나님이 베푸시는 지배적이며 무조건적인 사랑'을 뜻하기 때문에 웨슬리에게 있어서 은총은 구원의 근원(foundation)이요. 신앙은 구원의 조건(condition)이 된다.





3. 선행은총의 의미





선행은총에서 '선행'의 의미는 착한 행위의 의미가 아니다. 이것은 '보다 앞서, 먼저, 예비하는' 뜻으로서의 선행(先行)을 의미한다. 따라서 선행은총은 보다 먼저 오는 은총(grace that goes before), 우리의 회심이전에 작용하는 하나님의 은총, 구원받기 이전에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어 가는 은총, 즉 아직 우리가 죄인되었을 때 우리에게 주어지는 은총이다(롬 5:8). 인간이 구원받기 이전에도 하나님의 은혜는 이미 인간에게 역사하고 있으며 인간을 구원으로 이끌며 구원을 준비시킨다. 이러한 은혜를 웨슬리는 선행은총(prevenient grace)이라 한다. 또한 선행은총은 만인을 위한 은총(universal grace)이며 만민 안에 작용하는 보편적 은총이다. 뿐만 아니라 거저 주시는 은총으로 모든 사람에게 값없이 골고루 주시는 은총이다. 따라서 인간이 간구하기 이전부터 이미 인간 자체 안에 주어져 존재하는 은총, 즉 미리 역사하는 은총이다. 타락한 인간일지라도 이 은총밖에 있는 사람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선행은총 없이 존재하는 인간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하나님이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선행적으로 값없이 만인에게 주시는 선행은총은 주로 이성 또는 자기결정을 위한 자유의지 등의 '정신적인 본성'과 도덕적으로 선한 것과 악한 것을 어느 정도 구분할 수 있는 '자연적 양심' 그리고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는 어느 정도의 욕망을 말한다.


아담의 타락으로 원죄아래 있는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을 지향할 수 없으므로 구원을 얻으려면 하나님의 은총에 전적으로 의존해야 한다. 왜냐하면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에게 유일한 희망은 인간 자체에게는 없고 오직 하나님의 은총에 의존해야 하기 때문이다. 선행은총은 타락한 인간이 하나님께 의존해야 하고 하나님께 응답하기 위한 최소한의 은총이다. 따라서 선행은총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끄시는 역사와 성령께서 때때로 모든 사람에게 역사하며 깨닫게 하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4. 웨슬리와 선행은총





역사적으로 선행은총에 대한 구체적 신학적 개념은 터툴리안(Tertullian), 클레멘트(Clement of Alexandria), 오리겐(Origen), 키프리안(Cyprian) 등과 같은 초대 교부들의 신학자들에게서 찾아 볼 수 있다. 펠라기우스(Pelagius)는 "선을 향한 인간의 본래의 타고난 능력"을 선행은총으로 생각하였으며, 어거스틴(Augustine)도 역시 은총은 모든 것에 선행한다는 선행은총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어거스틴에 의하면 은총은 인간이 선을 행하기 이전에 선행하며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선행하는 은총에 뒤따른다. 따라서 하나님의 은총이 먼저 선재하고 그 다음에 그 은총에 대한 인간의 긍정적 반응의 결과로 인간은 선을 행할 의지를 얻게된다.


웨슬리의 선행은총에 대한 사상은 초대고부로서 콘스탄티노플의 감독인 크리소스톰(Chrysostom, c. 347-407), 16세기 화란의 신학자인 아르미니우스(Jacobus Arminius(1560-1609), 그리고 16-17세기의 영국 국교회의 신학적 전통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웨슬리는 크리소스톰으로부터 거저 주시는 은총(Free grace), 은총에 대한 응답의 필요성, 은총 안에서의 성장과 퇴보, 그리고 은총의 보편성에 대한 것들을 배웠다 그리고 칼빈의 예정론이 성서의 가르침과 모순된다고 주장한 16세기 화란 신학자 아르미니우스로부터 예지에 기초한 조건적 선택과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반응에 따라 제한되는 만인구속설을 배웠다.


웨슬리의 선행은총의 교리는 먼저 인간의 전적 부패와 함께 모든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선행은총을 소유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칼빈주의를 떠나 아르미니우스주의에 입각해서 웨슬리는 전적으로 부패한 인간은 자유의지가 결여된 상태에 있다고 보았다. 자연인(The natural man)은 완전히 타락하여 전적으로 부패하였으며 하나님에 대하여 죽은 인간이며, 이들은 구원의 능력이나 가능성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보았다. 이들의 자유의지는 악을 선택하는데만 자유롭기 때문에 이들은 진노의 자식이며 죄의 종이다. 그러나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간섭에 의하여 인간에게 어느 정도의 자유의지와 통찰력이 부여되었다. 따라서 인간은 하나님이 배푸시는 구원에 대한 수용여부를 자유롭게 결단 할 수 있었다.


우리가 알고있듯이 칼빈주의의 이중예정론은 하나님의 자유로운 결정에 의하여 구원받은 인간과 멸망받을 인간을 구별한다. 그러나 아르미니우스주의는 칼빈주의와는 달리 하나님은 인간이 멸망받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한다. 웨슬리는 아르미니우스의 이러한 견해는 성서가 말하고 있는 바와 일치한다고 보았다. 웨슬리는 성서도 하나님은 모든 인간이 구원받기를 원하시고 계심을 말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멸망을 받았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선행은총으로 주신 우리의 자유의지를 인간이 올바르게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웨슬리는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주장과 같이 인간은 선행은총에 의하여 도덕적인 상을 어느 정도 회복할 수 있어서 하나님에 대한 어느 정도의 지식을 소유하게 되었다고 보았다. 그리스도의 계시와는 별도로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선행은총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하나님을 알려고도 하지 않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책임이 아니고 인간의 책임이라는 것이다.





5. 구원을 위한 예비은총으로서의 선행은총





웨슬리는 인간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데 신학적 관심을 두고, 인간이 택해야 할 길을 보여주며, 그 길을 걷도록 도와주는 '은총'을 제시해 준다. 웨슬리는 선행은총이 구원의 출발점으로서 기능한다고 생각하고 "구원은 일반적으로 선행은총과 함께 시작된다"고 말하였다. 의심할 바 없이 "웨슬리 신학의 핵심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과 이에 대한 인간의 적응에 관한 것이다." 웨슬리 신학에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은 하나님의 선행 은총으로부터 시작된다. 하나님은 양심과 같은 선행 은총을 통하여 자기 자신을 간접적으로 계시하시고, 그 다음에 복음의 은총을 통하여 직접적으로 자기 자신을 계시하신다. 따라서 선행은총은 하나님의 구속 사업의 출발점이 되기 때문에, 웨슬리에게 있어서 구원은 선행은총과 함께 시작된다. 실제로 구원의 과정에서 은총의 역사는 선행은총(Prevenient grace)으로부터 시작한다. 웨슬리 신학에서 구원의 순서는 1) 선행은총의 역사, 2) 칭의 전의 회개, 3) 칭의, 4) 신생, 5) 칭의 후의 회개와 점진적 성화, 6) 완전성화의 순서를 따른다. 구원의 순서에서 보듯이 선행은총은 구원의 첫 단계에 서있다. 따라서 선행은총은 웨슬리의 구원단계를 이해하는데 필수적이다.


구원의 시작이 선행은총이라면 선행은총의 목표는 구원이다. 선행은총은 넓은 의미에서 구원의 시작일 뿐이지 실제적으로 구원의 사건(칭의, 중생)을 일으키는 은총이 아니며 더군다나 구원의 완성을 가져오지 않는다. 선행은총은 인간의 구원을 위한 사역에 있어서 일시적이고 제한된 정도에서만 적용된다. 인간의 본질적인 변화는 선행은총을 넘어서 하나님이 인간을 신앙으로 일깨워 사랑의 힘을 갖게 하는 새로운 은총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따라서 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 비추는 선행은총의 빛으로 구원의 완성은 불충분하다. 웨슬리는 영국교회의 열번째 조항에 의거하여 선의 실행은 선행은총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그 선행은총은 신앙에 의해서 시작된 은총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의 구원을 위한 예비적 은총에 불과하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충분한 은총은 될 수 없다. 선행은총은 단지 구원의 시작과 완성 전체에 역사하는 하나님의 보편적인 은총으로서 구원을 위한 예비은총으로 기능하지 구원 자체를 위한 충분한 은총으로 기능할 수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6. 선행은총의 작용





하나님의 선행은총의 작용으로 나타난 결과 가운데 무엇보다도 제일먼저 나타나는 현상은 깨달음을 촉발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필요성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선행은총이 가져오는 것은 우리의 영적인 감각을 일깨워서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이로서 우리의 찬송과 기도가 살아나고 성경 말씀이 역동적으로 우리의 삶에 다가오게 된다. 뿐만 아니라 율법과 양심과 이성 등을 통하여 하나님의 계시를 깨닫게 하는 것은 선행은총의 작용에 의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둘째로 선행은총은 인간이 하나님의 은총에 응답할 수 있는 능력을 준다. 선행은총의 작용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역사에 우리 자신의 의지를 구사하여 은총에 응답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졌다. 선행은총의 작용으로 받은 능력은 부정적 능력과 수용적 능력 모두를 포함한다. 따라서 인간은 매순간마다 은총에 순종할 수 있고 반항할 수 있는 자유와 능력을 갖게된다. 이런 능력으로 인간은 회개에 이르게 되어 구원을 향한 첫 걸음을 시작할 수 있게 된다. 만약 어떤 사람이 구원받지 못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주신 은총을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선행은총의 작용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응답의 능력은 인간을 책임적 존재가 되게 한다.


셋째로 선행은총의 작용으로서 우리의 양심과 이성, 그리고 의지의 자유 등이 회복되어있다. 인간이 현재 가지고 있는 자유의지, 양심, 선악 개념, 하나님과 내세(구원)에 대한 소망 등은 선행 은총에 의해 회복된 은혜의 선물이다. 성령을 통하여 활동하는 은총은 인간으로 하여금 선행은총으로 이를 수 없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게 한다. 타락에 의하여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은 선행은총에 의하여 부분적이나마(자연적, 정치적 형상) 회복되어 타락전후의 인간성은 연속성을 지니게 된다. 선행은총은 사실상 아담 이후 인간이 의롭다고 인정되기 전부터 역사하고 있었으며 그 결과 그리스도의 대속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값없이 주어져 타락으로 완전파괴된 하나님의 형상이 부분적이나마 회복된 것이다. 선행 은총은 하나님은 모든 인간들이 예외없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도록 먼저 선택하셨다는 사실을 가르쳐 준다.





7. 선행은총의 요소





선행은총의 요소들은 주로 인간의 자유의지, 분별력, 양심, 율법 등을 들 수가 있다. 웨슬리에 의하면 인간은 이러한 하나님이 주신 선행은총의 요소들을 가지고 인간이 하나님을 선택하고 그를 영접하며, 의와 불의, 진리와 비진리를 식별하고, 양심을 통하여 악을 깨달아 구원의 길을 갈 수 있다고 하였다. 회심 또는 회개는 하나님이 주신 선행은총에 의해 시작된다. 즉 선행은총에 의하여 진리이신 예수님을 분별하고 영접하여 죄사함을 받고 의인으로 칭함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그러므로 회개와 의인의 반열에 이르도록 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행은총에 의한 것이다. 그러면 선행은총으로 회복된 요소들과 그 관계성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선행은총과 원죄





웨슬리에게서 원죄는 인간의 죄책과 죄성을 말한다. 이 원죄는 영원한 사망을 초래한다. 그러나 웨슬리에 의하면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원죄 때문에 죽지 않는다. 만약 죽게 된다면 그것은 원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인간 개인이 의도적으로 지은 자범죄로 인한 것이다. 따라서 개인이 영원한 죽음을 당하는 것은 원죄 때문이 아니라 자범죄 때문이다. 선행은총에 의하여 원죄의 죄책은 태어나자마자 제거되었다. 원죄의 죄책은 나의 의지와 상관이 없이 지워진 연대책임이라면 원죄의 죄책 역시 선행은총에 의하여 나의 의지와 관계없이 연대사면된 것이다. 원죄의 죄책이 연대 사면될 수 있는 근거는 그리스도의 대속의 공로이다. 선행은총이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만인에게 적용되게 함으로써 만인은 원죄의 죄책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선행은총과 이성





아담의 범죄로 하나님의 형상이 완전히 상실되었을 때 이성도 본래 기능을 상실하였으나 선행은총으로 어느 정도 회복되었다. 이성은 이해력, 판단력, 토의력의 기능을 수행하는 능력이다. 선행은총으로 회복된 이성을 통해 인간은 어느 정도 신을 알게 된다. 회복된 이성이 신인식의 근거가 되는 것이다. 이성은 인간으로 하여금 성경을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선행은총 안에서의 이성은 계속되는 하나님의 은총인 믿음을 통하여 일깨워지는 이성이 되어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 통찰하게 한다.


이성은 다음의 세 가지 면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첫째, 지각(perception)으로서 마음에 사물을 느끼게 한다. 둘째, 판단(judgement)으로서 인식을 서로 비교한다. 셋째, 담화(discourse)로서 하나의 판단으로부터 또 다른 판단에 이르는 마음의 진보를 이룬다. "이성은 어떻게 사물들이 서로 작용하는지를 파악하게 한다. 즉 질서와 관계를 식별하게끔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올바르게 판단을 하도록 하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하게 한다."


선행은총에 의하여 인간은 어느 정도 합리성을 가지게 된다. 하나님과 세계를 향한 인간 실존이 취해야 할 태도는 신앙과 합리성이다. 인간이 합리성이 있다고 하여 모든 것에 대하여 합리성을 추구할 수 없다. 인간은 세계에 대해서 신앙적 태도를 취해서는 안되며 하나님에 대해서 합리적인 태도로 접근해서도 안된다. 인간의 세계에 대한 태도는 합리성에 있다. 세계는 피조물이지 신이 아니다. 따라서 세계에 대한 신앙적 태도는 상대의 절대화, 우상숭배인 것이다. 그러나 세계관리는 신앙적이 아닌 합리적으로 해야한다. 따라서 인간은 세계와 하나님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 이성으로 판단하여야 한다. 여기서 주목할 사항은 선행은총으로 주어진 이성은 기독교 진리를 해석하는데 필요불가결의 도구이기는 하나 기독교 진리의 내용을 제공할 수 없다는 점이다.





선행은총과 율법





타락한 인간은 스스로 선이 무엇인지 분별할 능력이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간의 마음속에 부분적으로 다시 하나님의 법을 주셨다. 하나님은 아담의 타락과 동시에 내면의 율법인 도덕법을 어느 정도 회복하게 하셨다. 이것이 선행은총이다. 어느 정도 회복된 도덕법은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선행은총이 작용한 결과이다. 선행은총이 구원의 충분한 은총이 아니듯이 선행은총으로 주어진 율법도 죄를 깨닫게하며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역할만 하지,. 죄인을 의롭게하여 구원을 얻게 하지는 못한다.





선행은총과 양심





우리는 본질상 죄 중에 죽어있는 상태에 있지만 어느 누구도 자연적 양심을 져버린 사람은 없다.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으로부터 우리는 양심을 찾아 볼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은 누구에게나 양심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양심이 모든 사람에게 발견된다는 의미에서 양심은 자연적인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자연적 인간이 지닌 양심은 웨슬리에 의하면 자연적이 것이 아니라 자연적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초자연적 선물인 선행은총이다. 따라서 웨슬리는 양심과 선행은총을 동일시하고 죄인이 지닌 양심을 선행은총의 증거로 본다. 웨슬리에게 양심이 모든 사람에게 발견된다는 점에서 자연적이라고 말할 수 있겠으나 사실상 자연적 양심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양심은 우리의 기질, 생활, 사고, 언어, 행동의 본성과 본질을 통찰하고, 어떤 기준에 의하여 우리가 행동해야 할지를 인지한다. 양심은 하나님의 명령과 관계되어 자기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게 하는 능력이다. 양심은 제한된 정도로 의와 불의를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이다. 웨슬리는 이 양심을 "세상에서 온 모든 영혼에게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진, 그들의 마음이나 삶, 그들의 견해, 사상, 말과 행실에 있어서 옳고 그름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 혹은 힘"이라고 정의하였다.


웨슬리는 선과 악을 구분하여 선을 위하여 자신을 결단하는 인간의 능력은 좌우간에 하나님의 은사임을 확신한다. 양심은 인간 자신의 견해와 행동에 대한 판단의 능력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쓰시는 도구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인간이 자신의 양심을 따를 때 만족감을 얻으며, 거부할 때 불안을 느끼게 함으로써 어떤 방향으로의 행동을 유도하는 도구로 양심을 사용하신다. 그러나 인간이 양심을 지속적으로 거부하면 양심은 무디어 지고, 양심에 순종하면 그 양심은 더욱 새로워진다.


웨슬리는 양심을 선한 양심(good conscience)과 부드러운 양심(tender conscience), 그리고 굳어진 양심(harden conscience)으로 나누어 설명하였는데 선한 양심은 하나님을 향한 양심으로 하나님과 인간을 가로막는 것을 피하는 양심이다. 부드러운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벗어날 때 즉각적으로 후회하고 자기를 반성하여 탄식으로 크게 부르짖게 하는 양심이다. 굳어진 양심은 하나님의 금하신 것을 행하는 화인맞은 양심이다.


윌리암즈(C. Williams)는 인간은 선행은총에 응답하고 자기의 양심에 복종하는 것만으로는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피력하였다. 웨슬리에 의하면 양심을 가진 인간이 범죄하는 것은 그 사람에게 은총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지니고 있는 은총을 사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선행은총의 사용이 인간의 공적이라고 믿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총으로 보급된 능력에 의해서만 가능한 응답이 되고, 또한 구원의 길은 하나님이 그의 은총으로 우리를 계속적으로 북돋우어 줄 때에만 열려질 수 있다." 인간은 선행은총으로 주어진 양심을 부인하면 구원에서 멀어진다. 양심도 이성이나 율법처럼 구원의 은총이 아니다.


런연(Theodore Runyon)은 선행 은총 안에서의 양심의 역할을 이렇게 말한다; "양심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 있으며, 우리 죄의 심각성과 회개의 필요성을 일깨움으로 건강한 역할을 감당한다." 양심은 회개를 유발시킨다. 따라서 양심은 구원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한다. 이로서 양심은 성령의 목적에 봉사하며 선행은총에 의해 사용되는 하나의 도구가 된다.





선행은총과 자유의지





웨슬리에 의하면 인간은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 앞에서 책임적이며 하나님을 용납 또는 배격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즉 인간은 선행 은총을 통하여 응답 또는 반항 할 수 있는 능력을 갖는다. 선행 은총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용납 또는 거부할 수 있는 능력을 우리 속에 창조한다.


선행은총으로 우리는 선과 악을 택하는 자유, 즉 의지의 자유(Freedom of will)를 가지고 있다. 의지의 자유는 단순히 의지의 작용이 아니고 인간 영혼의 한 속성으로 각 영혼의 정서와 이성, 그리고 의지를 관장하는 능력이다. 이 자유는 인간의 영혼의 본성에 속하며 모든 인간- 신자이건 불신자인건-이 이 본성을 가진다. 이것은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선행은총에 의하여 회복된 것이다.


선행은총에 의해서 회복된 의지의 자유의 유용에 따라 선악의 행위가 결정된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기행동에 책임적인 존재가 된다. 인간은 강요받은 선택에 책임지지 않는다. 인간은 계속해서 도덕적 결정을 내리지 않으면 안된다. 선행은총에 의하여 인간은 자신의 원죄에 저항할 수 있는 힘이 주어진다. 따라서 인간이 원죄에 눌려 구체적으로 악한 마음을 가지고 죄를 범하게 되면 그 책임은 인간에게 있다는 것이다. 육체의 죽음은 거쳐야 하지마는 영원의 죽음을 피할 수 있는 힘이 주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힘을 행사하지 않은 인간의 무책임 때문에 그 형벌을 받는다. 인간의 주체성의 강조와 자유의지에 의한 결단에 대한 강조가 웨슬리 신학에서 눈에 띄게 나타난다.


신앙은 철저히 하나님의 은총에 의하여 주어지는 것이지 하나님과 인간의 협력으로 되어지는 것은 아니다. 웨슬리의 선행은총의 교리는 트렌트공의회(Council of Trent, 1545-1563)의 카톨릭 교회의 선행은총의 교리는 아니다. 로마카톨릭 경우는 인간이 하나님의 선행은총과 협력함으로서 사랑에 의하여 형성되는 신앙을 획득하게 된다는 다분히 사변적이다. 웨슬리의 경우는 유대교 신학자 마틴 부버(Martin Buber)의 이해와 비슷하다. 자유와 결단과의 역설은 '나와너'의 만남의 중심에 존재한다. 자기결단의 한 복판에서 그 결단 자체가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혜의 선물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웨슬리는 그리스도의 속죄는 오직 택함을 받은 자에게만 유효하다는 칼빈의 예정설에 반대한다. 구원을 받음에 있어서 인간의 자유의지와 개인의 책임을 주장한다. 인간이 자력으로 구원을 받을 수는 없으나 구원받으려는 열망을 가지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개인의 책임과 자유의지가 중시된다. 의지의 확립이 없는 어린아이에게는 선악에 대한 책임이 없다고 본다. 인간은 누구에게나 하나님의 선행은총을 받았기 때문에 그들이 구원받지 못하는 책임은 전적으로 그들이 져야한다. 웨슬리는 알미니우스주의의 신인협력설을 따라, 무조건적 선택설이 아닌 조건적 선택설을 수용하였다. 선행은총과 의지의 자유의 문제는 하나님의 은총과 인간의 응답에 대한 문제로 발전하여 웨슬리의 신인협력설로 발전된다.





8. 선행은총의 보편성





타락으로 인하여 도덕적 형상이 상실된 인간은 죄짓는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개입 없이, 인간 자신의 어떠한 종교적 또는 도덕적인 노력을 통해서 자신의 본질적 변화를 시도할 수 없다. 자연적 인간은 사랑에 대해 무능력하며 하나님에 대하여 무지하다. 자연적 인간의 상태를 웨슬리는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1) 영적으로 선과 악을 구별하지 못한다. 2) 신적인 것에 대한 어떤 인식도 불가능하다. 하나님에 관하서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 3) 복음적 성화에 관하여 어떤 표상도 갖고 있지 못하다. 3)그리스도와 더불어 하나님 안에서 발견되는 행복을 알지 못한다. 따라서 이런 결과는 자기 자신이 죄인이라는 점을 모르고 따라서 그가 파멸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웨슬리는 선행은총이 없는 자연적 인간은 이 세상에 없다고 말한다. 모든 인간은 선행은총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웨슬리 신학에 의하면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멀리 떠나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완전히 이탈된 자연적 상태의 인간은 없다. 따라서 "인간이 죄를 범하게 되는 것은 선행은총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받은바 은혜를 올바르게 간직하여 이를 활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을 따르고 악을 버리라는 요청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라는 요청도, 이성과 합리성을 존중하라는 요청도, 이 요청을 수용할 것인가에 대한 결정도 모두 선행은총의 활동인 것이다.


종교개혁자들은 성령의 선행적 역사를 회심 시기에 한정하고 있는데 웨슬리는 사람이 세상에 출생할 때에 이미 인간 안에 성령이 역사하고 있다고 보았다. 즉 선행하는 성령의 역사가 회심에로 인도한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은 신앙을 성령을 통하여 처음으로 주어지는 선물이라고 이해한 까닭에 신앙이전에 생기는 죄의 확신과 회개를 설명하기가 어려웠다. 칼빈은 회개를 중생과 동일시하고 그 양자를 신앙 이후에 주어지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웨슬리는 인간이 회심하기 이전에 이미 하나님과 접촉할 수 있는 접촉점을 가지고 있다고 확신하였다. 그래서 인간은 보편적으로 주어진 접촉점 즉, 선행은총을 통하여 하나님의 주도적인 구원의 행위에 응답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은사는 성령의 임재로 말미암아 각각 모든 사람들이 이 세상에 태어날 때에 부여되어졌다는 것이 웨슬리의 확신이다. 기독교적인 선행들의 어느 정도는 하나님의 선행은총의 활동에 의해 의롭다함을 받기 이전의 인간들에게서도 발견된다. 양심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물론 모든 이슬람교도들과 모든 이교도들 심지어 야만인들도 가지고 있음을 보게 된다. 전술한 바와 같이 양심은 선행은총으로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선행은총에서 제외된 인간은 이 세상에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웨슬리 신학은 인간이면 누구나 선행은총을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다는 선행은총의 보편성을 주장한다.





9. 선행은총과 구원





이방인의 구원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만으로 인간이 의인(義認)될 수 있다면 복음을 듣지 못한 이들의 구원의 문제는 어떻게 될 것인가? 이방인의 구원에 대해서 웨슬리는 어떻게 생각하였을까? 웨슬리는 세상에서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그리스도는 그들 속에 감추어진 방법으로 역사하신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들은 이 은총에 대한 반응에 따라 심판을 받게 된다고 믿었다. 도덕은 그리스도인은 물론 기독교권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존재한다. 그러나 도덕은 그리스도인에게는 구원을 위해 힘을 발하지 못한다. 성서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는데 관심을 두고 있다. 하나님은 기독교의 하나님만이 아니라 이교도의 하나님이시기도 하다. 우리는 기독교 밖에 있는 사람들 - 이교도나 이슬람교 등 - 이 모두 저주를 받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들의 운명은 하나님께 있다. 기독교권 밖의 사람들, 복음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근거를 웨슬리는 그들의 도덕성에 두고 있다. 웨슬리는 이에 대한 근거를 그의 선행은총의 교리로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은 분명히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들은 받으실" (행 10:35) 것이기 때문이다.


런연은 웨슬리가 미국 감리교회에 보낸 종교강령(the Articles of Religion)에서 영국 교회의 제18조 강령("오직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만 얻는 영원한 구원에 관하여")을 뺀 것으로 보아 하나님은 이교도들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냐 거부하느냐에 따라서 심판하지 않고 그들이 받은 은혜로운 계시의 빛에 어떻게 응답하느냐에 따라서 심판하실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세상에서 복음을 듣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도 역사 하신다고 본다. 복음을 듣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그들 속에 감추어진 방법으로 역사하시는 이 은총에 대한 그들의 반응에 따라 심판된다고 믿는다. 웨슬리는 복음을 들은 적은 없으나 그들의 영혼 속에 작용하는 그리스도의 선행 은총의 역사에 응답한 자들은 그 응답의 열매로 의인 받는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고백하기 이전의 인간도 성령의 예비적인 역사에 응답함으로 자기의 죄를 깨닫고 회개할 것을 종용받는다. 그러나 익명적 그리스도인은 구원의 주님의 완전한 계시에 의하여 구원을 받게된다. 이런 면에서 린드스트롬(Lindstrom)이 말한 바와 같이 웨슬리에게서 자연신학은 찾아볼 수 없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 계시 이외에 다른 어떤 것으로도 구원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웨슬리에게서 찾아 볼 수 없다.


웨슬리의 선행은총은 모든 이에게 역사하신다. 웨슬리는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그들 속에 감추어진 방법으로 역사하시는 선행은총에 따라 심판된다고 믿었다. 즉 복음을 들은 일이 없으나 그들의 영혼에서 활동하는 그리스도의 선행은총에 응답한 자들은 그들에게 종말에 나타날 그리스도를 대망하는 신앙으로 칭의된다는 것이다.





어린아이와 정신이상자의 구원





어린아이는 원죄에 저항할 힘도 없으며 도덕적 분별력이 없으며, 의지적으로 죄를 범하지 않는 상태에 있다. 만약 이 상태에서 어린이가 죽는다면 그 어린이의 구원의 문제는 어떻게 되는가? 웨슬리에 의하면 어린아이는 원죄를 지니고 있을지라도 이 경우의 어린아이는 선행은총에 의해서 구원받는다고 보았다. 그 까닭은 선행은총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속죄 공로가 온 인류(어른, 어린아이 모두)의 죄책을 사면해 주기 때문에 어린아이에게는 선행은총이 구원의 은총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원리는 도덕적 무능력자, 정신박약아, 정신이상자에게도 적용된다. 왜냐하면 이런 사람들은 실제로 어린아이에 해당되기 때문에 구원받는다고 본다. 따라서 선행은총이 어린이에게 구원의 은총이듯이 이들에게도 선행은총은 구원의 은총이 된다.





10. 선행은총과 신인협력설





이미 구원의 출발점이 하나님의 선행은총임을 밝혔다. 그러나 선행은총은 구원을 위한 예비은총이지 구원의 충분은총이 아니다. 선행은총의 개념은 인간이 구원을 얻기위해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인간의 책임성을 강조한다. 인간은 자신의 구원을 이룸에 있어서 책임을 진다. 왜냐하면 선행은총으로 누구나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으므로 인간의 멸망에 대한 책임은 자신이 지게 되기 때문이다. 은혜를 받고도 활용하지(응답하지) 않는 것은 인간의 책임이다. 웨슬리는 칼빈주의의 예정론도 선행은총론으로 인하여 배격한다.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점에서 칼빈과 웨슬리 차이가 없다. 그러나 은혜의 역사 방법에서 다르다. 칼빈에게 은혜는 제한적이며 특수적이다. 웨슬리와 칼빈의 차이점은 선행은총으로 하나님의 구원에 응답할 능력이 인간에게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구원의 책임이 칼빈은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에 좌우되므로 인간에게 책임이 없으나, 웨슬리는 모든 사람이 선행은총으로 자기의지의 결정에 따라 책임을 지게 된다는 것이다.


선행은총의 개념은 인간이 구원을 얻기 위해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존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인간의 책임성을 강조한다. 누구나 하나님의 선행은총을 이미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께 나갈 수 있으므로 인간이 구원받지 못하는 것은 인간의 책임이다. 은총에 응답하면 구원이요, 거절하면 멸망이다. 이 점에 있어서 인간은 하나님과 협력한다. 은총에 적극적으로 응답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구속사업에 협동하는 것이다. 인간이 선행은총을 상실하지 않으려면 인간 스스로 하나님의 선행적인 활동에 상응하게 행동해야 한다. 따라서 웨슬리에게 하나님의 은총을 통한 구원의 작업에 인간의 동참은 필연적이다. 웨슬리의 사상은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먼저 하나님의 선행은총이 있어야 하고,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의 의지 속에서 응답해야 한다. 성령은 인생의 각가지 단계에서 죄로부터 성결에 이르기까지 지도하신다. 인간은 성령의 역사에 협력해야 한다. 이처럼 하나님의 은총과 자유의지 사이에 조화를 이루는 것이 바로 복음적 신인협력설(Evangelical Synergism)이다. 그러나 웨슬리가 주장하는 신인협력설은 반펠라기우스주의나 중세 카톨릭의 주장처럼 하나님의 협력과 인간의 협력이 절반씩 나눠 맡는 협력이 아니다. 웨슬리의 신인협력설은 구원의 주도권은 언제나 하나님에게 있으며 인간은 그 주도권에 대한 인간의 응답적 능력을 강조한다.


콜린 윌리암즈(Coollin Williams)는 인간이 선행은총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에 응답하는 것을 인간의 공적이나 수고의 행위로 보아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복음적 신인협력설은 인간이 하나님의 은총으로 하나님의 구원하심에 책임있는 위치에서 함께 호응하여 구원을 이루어나가는 것을 말한다. 선행은총은 구원의 시작이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으며 웨슬리의 구원론은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어거스틴이나 종교개혁자들의 신앙과 상통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웨슬리는 기본적으로는 칼빈주의의 하나님으로부터 오시는 은총에 대하여 동의하지만 칼빈주의적인 은총관은 자유를 포함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려는 하나님의 목적에 합당하지 않을 수 있음을 말하였다. 웨슬리는 일방적인 하나님의 은총이 아니라 동방교회 교부들에게 나타나는 '협동적인 은혜'를 추종하였다. 즉 "우리 없이 우리를 창조하지 않으신 하나님께서는 우리 없이 우리를 구원하지 않으실 것이다"라고 말한 어거스틴과 같이 구원의 모든 단계마다 하나님과 인간이 함께 협력하는 신인협력(synergy)을 주장하였다.


청교도들은 39개조 종교강령 중 제17강령, "예정과 선택에 관하여(이 강령은 웨슬리가 미국 감리교회가 사용하도록 보낸 종교강령에서는 제외시켰다)"라는 교리에 의해서 예정론의 합당함을 주장했다. 웨슬리의 추종자들 가운데서도 이 예정론에 설득당한 사람들이 있었다. 예를 들면, 조오지 휫필드(G. Whitefield), 헌팅톤 여사(Huntington), 웰쉬의 칼빈 감리교 연회(Welsh Calvinist Methodist Conference)와 후에는 찬송가 작가인 어거스트 톱 레이디(A. Toplady) 등이 있다.


"하나님은 영원하시고 불변하시며 불가항력적인 칙령의 능력에 의해서 한 부류의 인간은 확실히 구원되고 나머지 사람들은 확실히 멸망한다"는 예정론을 우리가 받아들일 때 나타나는 약점에 대해서 웨슬리는 다음과 같이 분석하였다. 1) 모든 설교가 헛될 것이다. 설교에 상관없이 선택받은 자는 구원받을 것이요 선택받지 못한 자는 구원받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예정론은 모든 설교를 헛되게 만들 것이라고 보았다. 이것은 하나님의 법령인 설교를 무효화시키는 것이다. 2)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청한 거룩성을 파괴시킬 것이다. 예정의 교리는 사람들로 하여금 거룩한 삶에 대한 지향성을 삭감시킬 수가 있다. 3) 기독교의 행복과 종교의 위로를 파괴할 것이다. 이미 예정되었다고 믿는 이들에게는 행복과 위로를 찾을 수 없다. 4) 선한 일을 위한 열심을 파괴하여 버릴 것이다. 우리의 선행과 사랑을 줄어들게 한다. 왜냐하면 이미 멸망으로 예정된 자들에게 도움을 준다는 의미는 물론 열매도 없기 때문이다. 5) 예정의 교리는 우리의 복되신 주님을 위선자요 백성을 속이는 분으로 나타낸다.


웨슬리에 의하면 칼빈주의자들의 근본적인 잘못은 하나님이 주권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미리 결정하신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은 인간의 자유를 위한 준비도 포함하고 있다. 하나님은 사람이 죄를 지을 것을 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전지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죄를 짓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가 죄지을 것을 아시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죄를 짓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것을 아시는 것이다.


상술한 바와 같이 웨술리는 선행은총을 통하여 인간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자유로이 응답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으며 그 자유의지의 결단에 따라 하나님께 협력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음을 시사하였다. 물론 구원의 주도권은 하나님께 있으나, 웨슬리는 칼빈주의에서 보는 것처럼 하나님의 주도권에 대한 강조에만 머무르지 않고 그 주도권에 대한 인간의 협력적 응답을 강조하여, 구원의 각 단계마다 인간과 신이 함께 협력하는 신인협력의 길을 열어 놓고 있다.





11. 맺음말





웨슬리의 은총 개념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개념으로 출발한다.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서의 은총은 무조건적으로, 값없이, 선행적으로, 보편적으로 인간에게 주어진다. 이러한 은총의 개념을 가지고 있는 것이 웨슬리의 선행은총이다. 웨슬리의 선행은총론은 구원을 위한 예비은총의 성격을 지닌다. 그리고 이 예비은총은 만인에게 주어진다는 의미에서 보편적 은총의 성격을 지닌다. 웨슬리의 선행은총론에서 중시되는 것은 하나님의 선행은총에 대한 인간의 응답적 책임이다. 인간이 선행은총으로 회복된 형상들을 통해서 인간이 응답하고 그에 대한 책임을 지는 책임 사상은 기독교 신학의 중심이 된다. 웨슬리의 신학을 인본주의로 오해하는 것은 은총안에서의 응답을 모르기 때문이다. 인간의 응답인 책임은 언제나 은총안에서 이다. 인간의 자력에 의한 회개의 행위에 의하여 구원이 성취되지 않는다. 죄의 자각을 획득하는 것도 하나님의 선행은총에 의한 것이지 인간의 자력적 행위는 아니다. 선행은총은 모든 외적인 경건, 회개와 선행을 가능케 한다. 그러나 그러한 행위는 잠정적이고 상대적이다. 그렇게 때문에 선행은총은 구원을 위한 예비은총에 머물러 있게 된다. 그러므로 구원을 위한 보다 큰 은총이 요구된다. 이 은총은 영구적이며 절대적이며 지속적이다. 성령의 은총이 그것이다. 이미 부여된 선행은총 위에 그리스도의 영(성령)이 구원을 얻도록 하는 믿음과 성화를 촉진시킨다. 이로서 선행은총은 구원을 위한 준비를 마치고 보다 계속적인 구원의 완성을 위하여 성령의 역사 속에 종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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