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웨슬리(John Wesley)
존 웨슬리(John Wesley)는 감리교회(Methodist church)의 창시자이다.
존 웨슬리는 1703년 6월 17일 영국 링컨셔(Lincolnshire)의 엡워스(Epworth)에서 태어났다. 그는 영국 국교회 신부인 사무엘 웨슬리(Samuel wesley)와 수잔나 웨슬리(Susannah Wesley) 사이에서 19남매 중의 15번째로 태어났다.
1714년 1월 28일 웨슬리는 런던의 챠터 하우스에 입학하였다.
1720년 6월 24일 여름에 옥스포드에 있는 크라이스트 처치 대학에 입학을 하였다.
1725년 9월 19일 주일 옥스포드에 있는 크라이스트 처치의 교회당에서 웨슬리는 포터(Potter) 감독에 의해 영국 국교회의 집사사제(deacon;부제)로 임명되었다. 이 무렵 그는 토마스 아켐피스(Tomas a Kempis,1380∼1471)의 "그리스도를 본받아"(Imitatio Christi)와 테일러(Jeremy Taylar,1613∼1677)의 "거룩한 삶과 죽음의 규칙"(The Rules for Holy Living and Dying)이라는 책과 로우(William Low,1686∼1761)의 "중대한 부름"이라는 책과 "그리스도인의 완전론"이란 명저를 읽고 큰 감명을 받았다. 이러한 영향으로 그는 거룩한 삶(holy living)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결심을 하였다.
1726년 3월 17일 웨슬리는 옥스포드의 링컨 대학(Lincoln college)의 특별연구원(fellow)이 되었다. 이로부터 25년 이상을 링컨 대학에 있으면서 히브리어, 아랍어, 라틴어, 논리학, 윤리학, 철학, 물리학, 웅변학, 시가 신학등 그의 연구 방면은 상당한 범위에 걸쳐 있었다. 또한 그는 그 당시 웅변가로서도 상당한 명성을 떨쳤다.
1727년 8월부터 2년간 엡워드 교구에서 부친 사무엘 웨슬리를 도와 일했다.
1728년 9월 22일 웨슬리는 장로사제(elder:사제)로 서임되었다.
1729년 웨슬리는 옥스포드의 링컨 대학의 부름을 받아 돌아오게 되었다. 그 당시에 웨슬리는 그의 동생 챨스 웨슬리와 함께 신성 클럽(Holy Club)을 만들어서 활동했다. 이 모임의 목적은 참된 기독교적 품격을 형성하기 위해, 성경연구, 영성훈련과 명상, 기도와 예배, 사회적 실천 등을 엄격하고 철저하게 실행하는 것이었다. 동료들은 이 모임의 사람들을 규칙쟁이(Methodist)들이라고 불렀다. 이 말음 나중에 감리교회(Methodist Church)의 이름이 되었다. 이모임은 교회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 넣어줄 운동이 되었고, 감리교회를 태동하게 하였다.
1735년 4월 25일 웨슬레의 부친인 사무엘은 72세의 일기로 일생을 마쳤다. 사무엘이 죽은 이후 엡윗교회의 목사직을 웨슬레가 맞았으나 끝까지 하지 못하고 더욱더 큰 꿈을 앉고 옥스포드로 돌아오게 되었다.
1735년 10월 18일 오글레돕 장군과 함께 220톤의 "시몬즈"호를 타고 미국선교를 떠났다. 그러나 조지아(Georgia) 선교는 실패로 끝났다. 그리하여 1738년 2월 1일 웨슬리는 본국에 도착했다.
1738년 5월 24일 웨슬리는 런던의 올더스게잇(Aldersgate)가에서 모인 한 저녁 집회에서 루터의 로마서 서문을 읽는 것을 듣던 중 8시 45분경에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지는' 체험을 하게 되었다. 웨슬리는 이 체험에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의 모든 죄를 사해주신다는 확신을 선사받게 되었다. 그 후 웨슬리는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자유로운 은총에 대하여 복음을 전하였다.
1742년 7월 23일 웨슬리에게 있어서 어렸을 적부터 정신적인 지주가 되셨던 수잔나 웨슬리는73세의 일기로 일생을 마쳤다.
1742년 브리스톨에서 처음으로 속회(Class meeting) 제도를 시작하였다. 그의 신도회(Society)는 조직적이고 체계적이고 상호 유기체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하였기에 이 체계는 오늘날까지도 감리교회에 존속하고 있다. 속회는 한 신도회를 보다 작은 단위의 집단으로 나누어 거기에 지도자 한사람 씩을 두어 지도 감독하게 한 것이다.
1744년 첫 연회를 시작하였다. 이것은 감리교회의 시작이었다.
1769년에 북아메리카에 메도디스트교회를 창설하였는데 그때 나이는 이미 70고령에 이르렀다.
1791년 3월 2일 오전 6시 88세의 생을 일기로 영원한 안식의 나라로 들어갔다. 1938년부터 52년간 그는 4만회 이상의 설교를 하였다. 대체로 하루에 2회의 설교를 하였고 하루에 4-5회 설교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52년간 그가 여행한 거리는 334,672km(매년 6,436km)였다.
존 웨슬리(John Wesley)는 감리교회(Methodist church)의 창시자이다.
존 웨슬리는 1703년 6월 17일 영국 링컨셔(Lincolnshire)의 엡워스(Epworth)에서 태어났다. 그는 영국 국교회 신부인 사무엘 웨슬리(Samuel wesley)와 수잔나 웨슬리(Susannah Wesley) 사이에서 19남매 중의 15번째로 태어났다.
1714년 1월 28일 웨슬리는 런던의 챠터 하우스에 입학하였다.
1720년 6월 24일 여름에 옥스포드에 있는 크라이스트 처치 대학에 입학을 하였다.
1725년 9월 19일 주일 옥스포드에 있는 크라이스트 처치의 교회당에서 웨슬리는 포터(Potter) 감독에 의해 영국 국교회의 집사사제(deacon;부제)로 임명되었다. 이 무렵 그는 토마스 아켐피스(Tomas a Kempis,1380∼1471)의 "그리스도를 본받아"(Imitatio Christi)와 테일러(Jeremy Taylar,1613∼1677)의 "거룩한 삶과 죽음의 규칙"(The Rules for Holy Living and Dying)이라는 책과 로우(William Low,1686∼1761)의 "중대한 부름"이라는 책과 "그리스도인의 완전론"이란 명저를 읽고 큰 감명을 받았다. 이러한 영향으로 그는 거룩한 삶(holy living)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결심을 하였다.
1726년 3월 17일 웨슬리는 옥스포드의 링컨 대학(Lincoln college)의 특별연구원(fellow)이 되었다. 이로부터 25년 이상을 링컨 대학에 있으면서 히브리어, 아랍어, 라틴어, 논리학, 윤리학, 철학, 물리학, 웅변학, 시가 신학등 그의 연구 방면은 상당한 범위에 걸쳐 있었다. 또한 그는 그 당시 웅변가로서도 상당한 명성을 떨쳤다.
1727년 8월부터 2년간 엡워드 교구에서 부친 사무엘 웨슬리를 도와 일했다.
1728년 9월 22일 웨슬리는 장로사제(elder:사제)로 서임되었다.
1729년 웨슬리는 옥스포드의 링컨 대학의 부름을 받아 돌아오게 되었다. 그 당시에 웨슬리는 그의 동생 챨스 웨슬리와 함께 신성 클럽(Holy Club)을 만들어서 활동했다. 이 모임의 목적은 참된 기독교적 품격을 형성하기 위해, 성경연구, 영성훈련과 명상, 기도와 예배, 사회적 실천 등을 엄격하고 철저하게 실행하는 것이었다. 동료들은 이 모임의 사람들을 규칙쟁이(Methodist)들이라고 불렀다. 이 말음 나중에 감리교회(Methodist Church)의 이름이 되었다. 이모임은 교회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 넣어줄 운동이 되었고, 감리교회를 태동하게 하였다.
1735년 4월 25일 웨슬레의 부친인 사무엘은 72세의 일기로 일생을 마쳤다. 사무엘이 죽은 이후 엡윗교회의 목사직을 웨슬레가 맞았으나 끝까지 하지 못하고 더욱더 큰 꿈을 앉고 옥스포드로 돌아오게 되었다.
1735년 10월 18일 오글레돕 장군과 함께 220톤의 "시몬즈"호를 타고 미국선교를 떠났다. 그러나 조지아(Georgia) 선교는 실패로 끝났다. 그리하여 1738년 2월 1일 웨슬리는 본국에 도착했다.
1738년 5월 24일 웨슬리는 런던의 올더스게잇(Aldersgate)가에서 모인 한 저녁 집회에서 루터의 로마서 서문을 읽는 것을 듣던 중 8시 45분경에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지는' 체험을 하게 되었다. 웨슬리는 이 체험에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의 모든 죄를 사해주신다는 확신을 선사받게 되었다. 그 후 웨슬리는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자유로운 은총에 대하여 복음을 전하였다.
1742년 7월 23일 웨슬리에게 있어서 어렸을 적부터 정신적인 지주가 되셨던 수잔나 웨슬리는73세의 일기로 일생을 마쳤다.
1742년 브리스톨에서 처음으로 속회(Class meeting) 제도를 시작하였다. 그의 신도회(Society)는 조직적이고 체계적이고 상호 유기체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하였기에 이 체계는 오늘날까지도 감리교회에 존속하고 있다. 속회는 한 신도회를 보다 작은 단위의 집단으로 나누어 거기에 지도자 한사람 씩을 두어 지도 감독하게 한 것이다.
1744년 첫 연회를 시작하였다. 이것은 감리교회의 시작이었다.
1769년에 북아메리카에 메도디스트교회를 창설하였는데 그때 나이는 이미 70고령에 이르렀다.
1791년 3월 2일 오전 6시 88세의 생을 일기로 영원한 안식의 나라로 들어갔다. 1938년부터 52년간 그는 4만회 이상의 설교를 하였다. 대체로 하루에 2회의 설교를 하였고 하루에 4-5회 설교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52년간 그가 여행한 거리는 334,672km(매년 6,436km)였다.
다음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