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 비움에서 사랑으로, 사랑에서 만남으로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특별히 각 본당에서 죽은 이를 위하여 봉사하시는 위령회장님들과 회원 여러분께 깊은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전합니다.
오늘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봅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는 단순히 고통의 상징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하나의 길이며, 하나의 여정입니다. 그 길은 바로 비움에서 사랑으로, 그리고 사랑에서 만남으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먼저, 십자가는 비움의 자리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셨습니다.”(필리 2,7) 예수님의 십자가는 자신의 뜻을 내려놓고,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신 사건입니다. 이것이 바로 케노시스, 곧 자기 비움입니다. 십자가는 힘을 행사하는 자리가 아니라, 자신을 내려놓는 자리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위령회장님들의 봉사는 바로 이 비움에서 시작됩니다. 이름 없이, 드러나지 않게, 때로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자리에서 묵묵히 봉사하십니다. 장례를 준비하고, 죽은 이를 위해 기도하고, 유가족을 위로하는 그 모든 일은 바로 자기 자신을 비우는 행위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봉사는 이미 십자가를 사는 삶입니다.
둘째로, 십자가는 사랑의 자리입니다.
요한 복음은 말합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요한 13,1) 십자가는 고통이 아니라, 사랑의 극치입니다.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 아무 조건 없이 내어주는 사랑, 그것이 바로 아가페입니다.
위령회 봉사의 본질도 여기에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미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해 봉사합니다. 아무 보상도 받을 수 없고, 아무도 갚아줄 수 없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고 섬깁니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순수한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계산이 없고, 조건이 없습니다. 그래서 위령회 봉사는 교회 안에서 가장 복음적인 사랑의 형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셋째로, 십자가는 만남의 자리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하느님과 인간이 만납니다. 인간은 고통 속에서 하느님께 나아가고, 하느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하여 인간 안으로 들어오십니다. 십자가는 단절의 상징이 아니라, 일치의 자리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봉사는 바로 이 만남을 이루는 봉사입니다. 죽은 이와 산 이, 그리고 하느님이 만나는 자리, 그것이 바로 위령회 봉사의 자리입니다. 장례의 순간은 단순한 이별의 시간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거룩한 시간입니다. 여러분은 그 만남을 돕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비움을 통해 사랑에 이르고, 사랑을 통해 만남에 이르는 길입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나는 얼마나 비우고 있는가?
나는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가?
나는 그 사랑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있는가?
사랑하는 위령회장님 여러분,
여러분의 봉사는 단순한 일이 아니라, 하나의 영성이고, 하나의 사명입니다. 여러분은 십자가를 가장 가까이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죽음을 마주하는 자리에서 생명을 증언하고, 슬픔의 자리에서 희망을 전하는 사람들이 바로 여러분입니다.
오늘 이 미사 안에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청합시다.
주님, 저희가 비울 수 있게 하소서.
주님, 저희가 사랑할 수 있게 하소서.
주님, 그 사랑 안에서 당신을 만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