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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이야기

풍류인열전(18) 평강공주와 온달장군

작성자평해거사|작성시간16.03.21|조회수122 목록 댓글 0

풍류인물열전(18) 평강공주와 온달장군

황원갑 <역사소설가>

 

나는 대고구려의 제25대 임금 평강상호태왕(平岡上好太王)의 딸 평강공주(平岡公主)야. 부왕의 존호는 평원태왕(平原太王)이라고도 하지. 다들 잘 알고 있겠지? 우리나라 역사상 ‘바보’로 가장 유명했던 온달(溫達) 장군의 아내가 된 ‘울보공주’가 바로 나잖아? 그래요, 나, 지금은 이렇게 태연히 옛날이야기를 하지만 아주 어렸을 적에는 걸핏하면 울어댔다고 해서 별명이 ‘울새’였어. 잘 우는 새라는 뜻이지.

나와 내 남편 온달님의 이야기가 세상에 널리 알려지고 후세에 길이 전해지게 된 사건은 내가 열여섯 살 되던 해에 나의 혼사 이야기가 계기가 되어 본격적으로 벌어졌어. 아, 글쎄 어느 날 내전의 시녀들이 몰래 하는 말을 우연히 엿들어보니까 부왕께서 나를 다른 사람에게 출가시키려 한다는 거지 뭐야! 꿈에도 그리는 나만의 온달님이 아니라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엉뚱한 남진(사내)에게 날 시집보내겠다는 거지 뭐겠어! 세상에 이럴 수가! 그래서 난 부왕께 달려가 울며불며 이렇게 따지고 들었지.

“아바지! 소녀를 다른 곳으로 얼이시겠다니(시집보내시겠다니) 그것이 무슨 말쌈이시와요? 소녀는 골백번 고쳐죽어도 다른 데로는 시집가지 않겠사와요!”

갑작스러운 나의 선언에 부왕와 모후께서는 펄쩍 뛸 듯이 놀랄 수밖에 없었지.

“아니, 공주야! 너 지금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고 있는 기야? 다른 곳으로 시집가지 않겠다니, 그렇다면 네가 이미 점찍어둔 남진이라도 있다는 말이야 뭐이야?”

“아바지께오서 소녀가 아주 어렸을 적부터 니르지(이르지) 아니하셨사와요? 네가 자꾸 울기를 좋아하니 이다음에 크거들랑 바보 온달의 가시(아내)로 주마고 아니하셨사와요? 그리하시고도 이제 와서 다른 사람에게 얼이시겠다면 그 말쌈이 거짓말쌈이 아니고 무엇이와요? 소녀는 죽어도, 고쳐 죽어도 온달님을 샤옹(낭군)으로 섬기고자 하나이다!”

내가 이렇게 아뢰자 그제서야 부왕께서는 내 말이 실없는 농담도 아니고 단순한 생떼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불같이 노하셔서 대궐이 떠나가도록 이렇게 고래고래 소리치시더군.

“예끼, 이 천하에 고약하고 발칙하고 무엄한 간나희(계집애)같으니라구! 네 어찌 그토록 방자하게 주둥이를 함부로 나불거린단 말인고? 너는 대고구려국의 공주가 아니냐? 그럼에도 어찌하여 거렁뱅이나 마찬가지인 미천한 자의 가시가 되겠단 말이더냐?”

“대고구려국 태왕이신 아바지께옵서 하신 말쌈이오니 더욱 중하지 않사와요? 저자의 이름 없는 필부도 한 입으로 두 말을 하지 않는 법이온데, 하물며 태왕께옵서 어찌 거짓말쌈을 하시오리까? 소녀는 태왕이신 아바지의 딸자식인 까닭에 태왕의 말쌈에는 거짓이 없음을 만천하에 널리 알리고자 더욱더 온달님의 가시가 되고자 하나이다!”

그러자 말꼬리가 잡힌 데다 말문까지 막혀버린 부왕께서 말이야, 아 글쎄 온몸을 부들부들 떠시더니 분노에 못 이겨 냅다 이렇게 고함을 치시는 게 아니겠어.

“고얀 년! 넌 이제부터 내 딸이 아니다! 너 같은 겨집아희(계집애)는 애시당초 낳지도 않은 것으로 칠 터이니 썩 물러가 다시는 내 눈앞에 나타나지도 말라우야! 아이구 마리(머리)야! 아이구 골치야! 아, 썩 나가지 못할까?”

 

그 다음에 어떻게 됐느냐구? 그렇게 해서 난 대궐에서 쫓겨나고 말았지. 그런데 그때 나는 금은 반지와 팔찌, 옥가락지 같은 패물 수십 개를 몸에 지니고 궁궐을 나왔어. 어찌 된 노릇이냐구? 그런 말씀을 여쭙게 되면 당연히 부왕의 노여움을 사서 쫓겨날 것을 예상하고 미리부터 대궐에서 나가 살 수 있는 재물을 준비하고 있었던 거였지 뭐. 내가 이처럼 대궐에서 쫓겨난 까닭은 부왕이 정해주는 신랑감을 마다하고 바보로 소문난 온달에게 시집가겠다고 고집을 부려 노여움을 샀기 때문이었지. 그렇다면 나는 무엇이 부족하여 고귀한 공주의 신분도 버리고 부왕의 내침을 자초하여 화려한 대궐을 등졌을까. 까닭 없이 나를 미워하는 여우같은 계모가 밉기도 했고, 계모 편만 드는 부왕이 밉기도 해서였지.

그 이야기에 앞서서 나 어렸을 적 이야기부터 들려줄게. 난 어머니 얼굴도 모르고 자랐어. 모후께서 나를 낳으시고 그 산고로 이내 돌아가시고 말았거든. 내 위로는 오라버니 한 명이 있지. 나중에 제26대 태왕 영양왕(영양왕)으로 즉위하는 태자 고원(高元)이야. 우리 어머니는 그렇게 남매를 남기고 돌아가셨지. 아버지는 다시 새로운 부인을 맞아들여 이복동생인 고성(高成)과 대양(大洋) 두 아들을 더 낳았어. 미리 가르쳐주는데, 이 이복동생 성이 나중에 제27대 태왕 영류왕(嬰留王)이 되고, 대양은 제28대 보장왕(寶藏王)의 아비가 되지.

이런 이야기는 나중에 다시 들려주기로 하지. 천하 만방의 중심국인 우리 대고구려가 서울을 평양성에서 장안성으로 천도하기 전이었다네. 평양성 하부(下部)에서도 매우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변두리 마을에 온달이라는 이상한 이름의 한 총각이 살고 있었다네. 온달이란 이름은 몸집이 장대해서 마치 산과 같다고 해서 사람들이 붙여준 이름이었어. 옛말에 온은 백(百)이란 뜻이고, 달은 곧 뫼를 가리켰거든.

온달님은 그렇게 몸집도 크고 얼굴도 울퉁불퉁 우습게 생겨 사람들로부터 늘 웃음거리가 되었지만 속마음만큼은 한없이 순박했어. 그래서 바보라는 놀림을 받기도 했던 거지. 온달님은 늙고 눈먼 홀어머니와 단둘이 살고 있었는데, 몹시 가난해서 매일같이 도성 안팎으로 돌아다니면서 물 긷고, 장작 패고, 무거운 짐을 들어주는 등 허드렛일을 하여 홀어머니를 봉양했지. 또 한편으로는 산에서 해온 나무를 저자에 내다 팔기도 하고, 또 숯을 구워서 팔기도 했지.

그렇게 가난해서 다 떨어진 옷과 해진 신발로 이 거리 저 거리를 돌아다녔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가리켜 ‘바보 온달’이라고 불렀어. 사실은 바보가 아니었는데 말야. 그때 내 나이 일곱 살, 부왕이신 평강태왕은 어린 딸이 울기를 잘하니 내가 울 때마다 이렇게 놀려대고는 했지.

“네가 그렇게 늘 울기만 하여 내 귀를 시끄럽게 하니 크더라도 반드시 좋은 가문으로 얼이기는 틀렸구나! 내 반드시 너를 바보 온달에게 얼이고야 말리라.”

그건 정말이었어. 난 어려서부터 잘 우는 버릇이 있었지. 그 이유는 나를 낳아주신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셔서 어머니의 정에 굶주렸기 때문이었지. 계모가 처음에는 내 환심을 사서 어미 노릇을 해보려고 잘 대해주었지만 내가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생모의 정과 계모의 정조차 구분 못 하겠어. 그러자 계모도 포기하고 나를 무시하기 시작하더군. 그리고 나중에는 점점 미워하니 나로서도 갈수록 정이 더 멀리 떨어져버리게 되고 만 거지. 좌우지간, 지금 돌이켜 생각해도 난 잘 울어댔어. 재미있게 잘 놀다가도 울고, 멀쩡하게 밥 먹다가도 울고, 한밤중에 자다가도 울고, 걸핏하면 앙앙 소리치며 울어대니 부왕의 걱정이 여간 큰 게 아니었지.

“저 아이가 큰일이구려. 혹시 무슨 몹쓸 병이라도 걸린 것은 아닐까?”

그날 저녁에도 남당(南堂)에서 정무를 마치고 내전으로 들어오던 부왕이 나의 울음소리를 듣고 제2황후인 계모에게 이렇게 물었어.

“글쎄, 오늘은 왜 저 나무에 곳고리(꾀꼬리)가 날아와 노래를 하지 않느냐면서 생떼를 쓰지 않사와요?”

“허허, 어저께는 가얌벌게(개미)가 무섭다고 울고, 그저께는 돌욤질(말달리기)이 하고 싶다고 울었다면서? 어허, 참! 간나희가 내일모레면 열 살이 다 되는데, 거저거저 툭 하면 울음보를 터뜨리니 저걸 어쩌면 좋을꼬?”

계모가 나를 그렇게 나쁘게 일러바치는 데도 부왕은 그 말만 믿는 거야. 그러고 나서 울고 있는 나를 데려오게 하여 이렇게 달래보기도 했지.

“울지 말라우야, 우리 예쁜 공주야! 그까짓 곳고리야 안 오면 어떠냐? 이 아바지가 그 대신 바올(방울)을 주랴? 아니면 거우루(거울)를 주랴, 응?”

그렇게 달래고 꾀어도 한 번 터진 나의 울음보는 막힐 줄을 몰랐어.

“오냐 오냐. 자꾸만 그렇게 울어라. 그렇게 울면서 나날과 다달을 보내보려므나. 널 어떤 남진이 가시로 데려 갈까보냐. 그렇게 자꾸만 울기만 한다면 이다음에 커서 좋은 샤옹에게 얼이기는 다 틀린 줄 알아라. 자꾸 그렇게 울기만 한다면 저기 저자를 헤매고 다니며 비럭질하는 바보 온달이란 녀석에게 얼이고 말 터이니라. 아이구, 우리 공주 우리 울새! 바보 온달이를 샤옹 삼으면 참도 좋겠구나야. 아하하하!”

그러자 이상한 일이 벌어졌지 뭐야! 내가 갑자기 울음을 뚝 그치더니 새까만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부왕을 쳐다보며 이렇게 물어본 것이었어.

“아바지. 바보 온다리가 누구야요?”

아마도 온달이란 이상한 이름을 처음 듣기에 신기해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으나 온달의 이름을 듣자마자 신통하게도 나의 울음이 뚝 그쳤던 것이야.

“오오! 우리 울새공주가 울음을 뚝 그치는 것을 보니까 정말로 바보 온달에게 얼이고 싶은 모양이구나. 응?”

사실 그 당시에 온달 모자가 사는 형편은 매우 가난했어. 김 아무개란 자가 나 죽고 나서 700년쯤 뒤에 지은 <삼국사기> ‘열전’ 온달 편은 엉터리더라. 온달이 집이 몹시 가난하여 날마다 다 떨어진 옷과 해진 신으로 저자를 헤매며 밥을 빌어 눈먼 노모를 봉양했다고 썼더군. 그리고 속마음은 순박했지만 얼굴이 멍청하게 생겨 사람들로부터 바보라고 놀림을 받았다고 했는데, 그거 다 맞는 말은 아니야.

그대들도 이 대목에서 의문이 생기지 않아? 온달이 산처럼 장대하고 당당한 체격을 지닌 젊은이였다면 하다못해 산에서 땔감나무를 해다가 팔거나, 공사장에서 막노동을 하거나, 아니면 군대에 들어가 군인 노릇이라도 할 수 있었을 것이 아닌가 말이야. 그렇다면 사지가 멀쩡하고 힘 좋은 젊은이가 굳이 바보 소리까지 들으며 구걸은 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 아닌가 그 말이야.

온달의 이름은 그렇게 해서 유명해졌고, 평양 성중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던 거야. 그리고 마침내 대궐까지 들어가 우리 아버지 평강태왕의 귀에도 그의 이름이 전해지게 되었던 거야. 그래서 내가 울 때마다 온달에게 시집보내겠다는 소리로 울음을 그치게 했던 것이지. 거짓말도 자꾸 하면 참말처럼 들리기 마련이 아닌가. 날이면 날마다 울 때마다 바보 온달에게 시집보내겠다는 소리는 마침내 나 울보공주, 울새공주의 귀에 못이 박힐 정도가 되었고, 결국은 그렇게 해서 온달이란 이름이 내 어린 머릿속에 단단히 뿌리박아 자리 잡기에 이르렀던 것이지.

세월이 흘러 어느덧 내 나이 꽃다운 열여섯 살이 되었지 뭐야! 어린 시절의 울보공주가 어여쁜 처녀로 자라서 시집갈 나이가 되자 부왕은 나의 혼처를 물색했지. 귀족 대가(大加)와 명문 욕살(褥薩)들 가문에서 마땅한 배필을 물색했던 거야. 그런데 <삼국사기> ‘열전’ 온달 편은 이 대목에서 대왕이 상부(上部)의 고씨(高氏)에게 출가시키려고 했다고 썼는데 이것도 터무니없는 소리지. 고씨라면 우리 고구려의 왕성(王姓)인데 우리가 동성 동족간의 혼인을 한 적은 없거든. 왜냐? 우리 고구려는 본래부터 5개 부족 간의 유대를 혼인관계를 통해 굳게 다지기 위해 족내혼을 금지시켰기 때문이지. 이는 신라와 고려가 타성받이에게 왕권을 넘겨주지 않으려고 근친혼을 한 것과는 전혀 반대의 경우였다네. 그대들은 이런 사실도 잘 알아두어야만 해.

그렇게 궁궐에서 쫓겨난 나는 뒤따르는 시녀 하나만 데리고 사람들에게 길을 물어물어 마침내 온달님의 집으로 찾아갔다네.

내가 온달님의 집으로 찾아갔더니 어머니 혼자 집을 지키고 있더군. 나는 장차 시어머니로 모실 터이라 그 분이 눈이 멀어 앞을 보지 못해도 사뿐히 절을 올리고 이렇게 물었지.

“오마님, 오마님! 온달님은 어디 계셔요?”

“거기 뉘시우? 내 아들놈은 가난하고 못생겼으니 귀인이 가까이할 사람이 못 된다우. 지금 댁의 몸 냄새를 맡아보니 향기가 이상하고, 손을 만져보니 부드럽기가 마치 솜과 같구랴! 틀림없이 귀하신 분 같은데 누구에게 속았기에 여기까지 찾아온 거유? 내 아들놈은 땔감을 팔아 굶주림을 면하려고 나무를 해오겠다며 산에 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우.”

그리하여 내가 기다리기 무료하여 시녀를 데리고 집 뒤로 난 길을 따라 산 밑으로 갔더니 마침 온달님이 나무를 한 짐 잔뜩 짊어지고 내려오고 있더군. 내가 반가운 마음이 앞서 이렇게 소리쳐 물었다네.

“여보세요. 거기 오시는 분은 온달님이 아니세요?”

그러자 온달님이 걸음을 멈추고 이렇게 대답했어.

“내가 바로 온달인데 댁은 뉘시우?”

그래서 내가 궁궐에서 쫓겨나 여기까지 찾아온 사연을 자초지종 이르고 나서 그대의 아내가 되고자 한다고 말하자, 아니 이게 웬일이야! 온달님이 느닷없이 왕방울 같은 두 눈을 부라리고 쇠북이 깨지듯 커다란 목소리로 골짜기가 울리도록 소리치는 게 아니겠어!

“야, 이거 쌍! 네가 과연 사람이야 귀신이야? 이제 해가 지니 내게 덤비는 걸 보니끼니 너는 사람이 아니라 여우나 도깨비가 분명하구나야! 빨리 물러가지 않으면 단매에 때려 죽이구 말갔어! 저리 가! 아, 가까이 오지 말라우야!”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잽싸게 산길을 타고 내려가 버리더군.

내가 마구 울면서 시녀와 함께 그 뒤를 쫓아갔지만 그 걸음을 따라잡을 수가 있나! 온달님은 그렇게 단숨에 집안으로 들어간 다음에는 내다보지도 않았어. 나와 시녀는 사립문 밖에서 쪼그려 앉은 채 그 밤을 샐 수밖에 없었지. 이튿날 아침, 나는 또다시 온달님 모자에게 애원과 하소연을 되풀이하며 함께 살기를 청했어. 그러자 온달님의 어머니께서 마침내 방문을 열고 이렇게 말씀하시더군.

“공주님의 말씀이 진정인 줄은 알겠사오나 보시다시피 내 아들이 천하고 못생겼으니 어찌 금지옥엽같은 분의 배필이 되갔소이까? 또한 이처럼 집안이 누추하고 가난하니 도저히 함께 사실 수가 없갔습네다. 그리니끼니 기냥 돌아가시라요!”

“오마님께선 아무 걱정 마시라요! 온달 님이 몸 튼튼하고 마음 착하니 무엇을 더 바라갔시요? 가난쯤이야 어찌 이겨내지 못 하갔시요? 우리 세 식구가 몸과 마음을 합쳐 즐겁게 살면 그뿐, 그저 이 한 몸 받아주시고 한평생 버리지만 마시라요!”

이러한 우여곡절 끝에 나 평강공주는 마침내 온달님의 색시가 되어 함께 살게 되었던 것이야.

 

‘바보’ 온달은 이렇게 해서 하루아침에 팔자를 고쳐 비록 몰래 한 결혼이지만 고구려의 부마, 곧 태왕의 사위가 된 셈이었다네. 하지만 온달님이 정녕 바보는 아니었으니 혹시라도 태왕이 이런 사실을 알게 되면 불같이 노해 당장 목을 치고 공주를 잡아가지나 않을까 하고 불안스레 생각하기도 했지. 나는 출궁할 때에 가지고 나온 금팔찌며 보석을 팔아 집과 땅과 노비와 소 따위를 사들여 집안을 새롭게 일으키고 가꾸었지. 땅을 사서 집을 짓고, 노비들도 사서 그들로 하여금 밭을 가꾸게 한 나는 온달님도 그저 놀고먹게 내버려두지는 않았지. 바보 소리를 들을 만큼 우직한 온달님을 고구려의 그 어떤 사내보다도 더욱더 날쌔고 용감한 장수가 되게 하고 싶었어. 그래서 나는 터를 고르고 마구간을 지은 다음, 온달님에게 돈을 주고 저자에 나가서 말을 사오라고 시켰지. 그때는 거의 해마다 전쟁이 끊이지 않던 시대였으므로 고구려 사내로서 불구자가 아닌 다음에 말도 못타면 사람 취급도 못 받았다네. 서쪽과 북쪽으로는 툭 하면 서토의 한족(漢族)이나 유목민 오랑캐들이 침범해왔고, 남쪽에서도 신라와 백제가 틈틈이 쳐올라와 괴롭혔기 때문에 우리 고구려는 늘 강병을 유지해야 했고, 따라서 군마는 국방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지. 당시 우리 고구려에는 키가 3척밖에 되지 않지만 매우 힘이 강해 갑옷 입고 무기 든 군인을 태우고도 험한 산길을 잘도 오르내리는 삼척마(三尺馬) 또는 과하마(果下馬)라는 말이 유명했다네. 과하마란 말은 과일나무 밑을 그대로 지나갈 정도로 키가 작다는 뜻이지.

나는 궁중에서 자라 어려서부터 대부분 명마라고 할 수 있는 국마(國馬)를 많이 보고 타보아서 말을 고를 줄을 알았어. 그래서 온달님에게 이렇게 말 고르는 법을 가르쳐주었지.

“마장(馬場)에 가시면요. 흥정바치(장사치)들의 말이 아니고 꼭 나라에서 내놓은 국마를 사오시라요. 아시갔지요? 여윈놈(말라깽이)도 좋고 전말(다리 저는 말)도 좋으니 꼭 국마를 사오시라요 네?”

그리하여 온달님이 시키는 대로 마장에 가서 병들어 보잘것없어 보이나 나라에서 못쓰겠다고 내놓은 말을 사왔는데, 난 그 말을 손수 먹이고 정성껏 돌본 끝에 마침내 건강하고 늠름한 준마의 모습을 되찾았게 만들었다네. 온달님은 그로부터 자고 일어나면 말달리고 활쏘고 창검 휘두르며 열심히 무술을 익혔지. 그리고 그동안은 일자무식으로 학문과는 담쌓고 살아왔으나 밤이면 내가 글선생이 되어 글공부도 했다네.

 

그렇게 갈고 닦은 실력이 마침내 빛을 보게 되었으니 그것은 우리 고구려에서 해마다 음력 3월 3일이면 낙랑의 언덕에서 태왕이 친히 주재하는 사냥대회에서 두각을 드러낸 것이었어. 우리 고구려의 이런 풍습은 까마득한 오랜 옛날 (고)조선과 부여시대부터 전해내려온 것이지. 온달님이 그 대회에서 내가 가꾸어준 그 말을 타고 출장하여 그동안 연마한 무술 솜씨를 한껏 발휘하니 말달리기도 으뜸이요, 날짐승이든 들짐승이든 활시위를 당겨 쏘면 쏘는 대로 모조리 잡는지라 보는 사람마다 놀라 혀를 내둘렀지 뭐야! 온달님의 눈부신 솜씨는 마침내 나의 부왕이신 태왕의 눈에도 띄어 비상한 관심을 끌게 되었다네. 그 삼월삼짓날 낙랑언덕의 사냥대회는 우리 고구려에서 인재 등용의 무대가 되기도 했거든.

“어허, 근래에 보기 드문 용사로다! 저기 저 한쇼(황소)처럼 억세고 웜(범)처럼 날쌘 남진이 어느 부에서 온 누군고? 이리 데리고 오도록 하라. 내 친히 만나보겠노라.”

그렇게 해서 온달님은 생전 처음으로 자신의 가시아바지(장인)인 평강태왕과 대면하게 되었던 것이야.

“그래, 이리 가까이 와보라. 네 이름이 무엇이며 어디에 사는고?”

“네이! 이 천한 것의 이름은 온달이라 하옵고 하부에 사는 줄 아뢰오!”

“아니 뭐라구! 네가 바로 그 바보 온달이란 말이냐? 세상에 이럴 수가!”

태왕은 놀란 입을 다물 줄 몰랐지. 생각해 봐. 옛날부터 입버릇처럼 ‘바보 온달 바보 온달’ 하다가 사랑하는 외동딸을 빼앗아간 바로 그 녀석이 아닌가 말이다. 그런데 태왕은 그때까지도 아비의 뜻을 어기고 제멋대로 대궐을 뛰쳐나간 나에 대한 분이 덜 삭고 화가 덜 풀렸음인지 그 자리에서는 온달님을 부마로 선뜻 받아들이지 않았어. 아니, 황실의 체통을 깎아내렸다는 죄목으로 잡아 죽이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었지.

하지만 기회는 또다시 찾아왔으니, 그것은 북주(北周) 무제(武帝)의 군대가 요동으로 침범해 전쟁이 벌어진 것이었어. <삼국사기> ‘온달 편’에는 이때 쳐들어온 나라가 후주(後周)라고 했는데 이것도 틀린 소리야. 후주는 우리 고구려가 없어진 다음인 서기 951년부터 960년까지 존재한 중국 오대(五代) 최후의 왕조였고, 실은 선비족(鮮卑族)의 한 갈래인 우문씨(宇文氏)가 세운 북주(北周)로서 556년부터 581년까지 겨우 25년간 지탱하다가 수 문제(隋文帝) 양견(楊堅)에게 망한 하루살이 제국이었지. 중국 북방을 석권하여 한때 강성을 뽐내던 이 북주의 무제 우문옹(우문옹)이 고구려를 노략질하러 쳐들어오자 평강태왕이 친히 군사를 이끌고 배산(拜山)의 들판에 나아가 적군을 여지없이 물리쳤던 것이야.

이때 범처럼 날쌘 용사가 있어서 스스로 선봉이 되어 적진을 종횡무진으로 누비며 용감하게 오랑캐들을 무찌르니 싸움이 끝난 뒤에 논공행상을 하는데 그 용사의 전공이 단연 으뜸이었다. 태왕이 불러보니 이번에도 또 온달이 아닌가! 태왕이 그제서야 무릎을 철썩 치며 이렇게 소리쳤다고 하네!

“바보, 아니 온달아! 과연 너는 내 사위로다! 내 이 자리에서 너를 고구려의 대형(大兄)으로 삼겠노라!”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나 중국의 사서들에는 온달님의 이름이 단 한군데도 나오지 않지만 <동사강목>에는 온달을 대형으로 삼았다는 이야기가 평강태왕 19년(577년)의 일로 기록되어 있다. 부왕이신 평강태왕으로부터 마침내 사위로 인정받고 대형이란 벼슬까지 받은 온달님과 용서를 받은 나는 그때부터 도성의 변두리인 하부에서 살지 않고 상부로 옮겨가 살기 시작했다네.

 

그럼 여기서 그 무렵 우리 고구려를 둘러싼 주변 여러 나라의 사정을 되새겨볼까. 나는 부왕이신 평강태왕께서 태자로 책봉되시기 한 해 전에 태어났어. 그해가 할아버지 양원태왕(陽原太王) 12년(556년)이야. 아버지는 태자로 책봉된 이듬해 3월에 할아버지께서 재위 14년 만에 돌아가시자 즉위하셨지. 내가 태어날 무렵 우리 고구려는 국력이 전과 같지 않았어. 100년 전 광개토태왕(廣開土太王)과 장수태왕(長壽太王) 시절의 전성기와는 비교도 할 수 없었어.

반면 남쪽의 신라는 진흥왕(眞興王)이, 백제는 위덕왕(威德王)이 다스리고 있었는데, 신라가 건국 이후 국력이 급신장하여 영토 확장에 열을 올리고 있었지. 우리 고구려가 남동부 지역인 오늘의 함경도 지방을 모두 빼앗긴 것도 그 무렵이었다네. 또 서쪽으로는 북주와 돌궐로부터 걸핏하면 침략 위협을 당하고 있었지. 그래서 하루도 국방에 대한 경계의 눈길을 늦출 수가 없는 형편이었어.

그런 까닭에 부왕은 즉위하자 전쟁보다는 외교를 통해 난국을 타개하시려고 했다네. 즉위 이듬해에 북제(北齊)와 진(陳)과 외교관계를 수립하신 것도, 나중에 왜에 사신을 보내신 것도 모두가 외환(外患)은 외교관계로 에방하고, 안으로 국력을 기르기 위한 정책이었던 거지. 그런데 하늘이 우리 고구려를 돕지 않으신 탓일까. 국경의 방비는 그런대로 해놓았는데, 해마다 무서운 흉년이 계속된 거지 뭐겠어! 즉위 3년째 되던 해 여름에는 대홍수로 수많은 이재민이 생겼고, 그 이태 뒤인 재위 5년(563년)에는 큰 가뭄이 들어 모든 농사를 망쳤지 뭐야!

그래서 백성의 참상을 보다 못한 부왕께서는 궁궐에서도 내핍생활을 해야 한다고 엄명을 내리셨지. 그래서 하루 세 끼 먹던 식사를 아침저녁 두 차례로 줄이고, 음식의 가짓수와 얄도 크게 줄여야만 했지. 그때 내 나이 일고여덟 살쯤 될 때였어. 내가 울새공주란 별명을 얻은 것도 그 무렵이었어. 무서운 계모와 사이가 아주 틀어진 것도 그 무렵이었지. 계모가 제가 낳은 자식인 성과 대양이만 귀여워하고, 친오라비 원과 나는 갈수록 미워하는 게 아니겠어?

나중에 돌이켜보니 우리 남매를 제쳐두고 제 소생을 태자로 세우려는 음흉한 욕심 때문이었지 뭐야. 그래도 우리 부왕께서는 사리판단이 분명하신 분이라 오라비 원의 나이가 열다섯이 된 재위 7년(565년)에 태자책봉식을 거행해 다른 음모가 발붙이지 못하게 하셨지.

내가 대궐에서 나와 온달님의 아내가 된 것은 부왕의 재위 14년(572년)이었지. 그해에는 그동안 부왕께서 내실을 다져오신 효과가 나타나 오랫만에 내정이 안정된 해였지. 그 이태 전에 왜국에 보냈던 사신들도 성공적으로 임무를 마치고 무사히 귀환했고. 부왕께서는 그해에 낡은 궁궐을 중수하고,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패하에서 사냥을 하시는 등 황실의 권위를 세우려 하셨지. 그런데 여름에 가뭄이 드는 바람에 또다시 흉년이 들어 내핍생활을 하게 되었지.

그런 무렵에 황궁을 나온 나는 온달님과 가시버시가 되었던 것이야. 그리고 다시 해가 두 차례 바뀐 부왕 재위 16년(574년)에 북주의 무제가 요동으로 쳐들어왔을 때 내 낭군 온달님이 선봉에 서서 오랑캐들을 여지없이, 통쾌무비하게 무찔러 으뜸가는 전공을 세우고 마침내 부왕의 눈에 들어 인정을 받고, 또 대형 벼슬에 올랐던 것이야. 그건 아까 이야기했지?

그때 내 낭군 온달님의 나이 스물아홉, 나보다 열한 살 위였지.

평강태왕 28년(587년)에 평양성에서 장안성으로 천도했을 때에 우리 가족도 상부의 귀족들과 함께 이주했다네.

그런데 새 서울로 옮긴 지 3년 뒤인 서기 590년 10월에 친정아버지이신 평강태왕께오서 재위 32년 만에 돌아가시고 오라버니가 새로운 태왕으로 즉위하였지. 후세에 영양왕이라고 부르는 분이야. 이무렵 그대들이 주체성 없게도 중국이라고 부르는 서토에서는 위와 진의 남북조시대가 끝나고 양씨(楊氏)의 수나라가 등장하여 주변 여러 나라를 위협하고 있었으므로 우리 고구려로서도 새로운 강적의 등장에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지.

 

그럼 여기서 그대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수나라의 건국에 대해 간단히 설명을 해줄까. 왜냐하면 이 수나라가 우리 고구려의 역사와는 뗄 수 없는 악연이 있거든. 그 왜 잘 알잖아? 수 양제(隋煬帝)란 자가 우리나라를 침략해서 을지문덕(乙支文德)과 강이식(姜以式) 장군 등에게 전멸당한 전쟁 말이야. 수나라는 본래 우문씨(宇文氏)의 나라 북주에서 나왔어. 전에 우리나라에 쳐들어왔다가 부왕께서 친히 군사를 거느리시고 맞서나가 내 낭군 온달님이 선봉에서 용감히 싸워 여지없이 무찌른 그 나라 말이지. 수나라를 세운 양견(楊堅)이란 자는 본래 북주의 건국공신인 양충(楊忠)의 아들로서 아비의 후광 덕분에 재상이 된 자지. 이 자가 외척으로 권세를 움켜쥐자 그것으로도 성이 차지 않아 어린 황제를 협박하여 제위에 올라 국호를 수나라로 바꾼 거야. 고구려는 이 수나라가 이른바 중원을 통일하고 우리나라를 호시탐탐하는 것도 문제였지만, 근래에 들어 팽창한 국력을 주체하지 못하고 걸핏하면 남쪽 국경을 침범하는 신라 역시 골칫거리였지. 불과 백 년 전만해도 우리 고구려의 속국 주제였던 신라가 말야.

영양태왕이 등극할 무렵 우리 고구려는 등과 배 양면의 적을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물리칠 수 있을까 그것이 당면 최대의 안보문제였지. 이에 따라 새로 즉위한 영양태왕은 남당에서 어전회의, 요즘으로 치면 국가안보회의를 주재했는데 이 자리에서 태왕과 처남 매제간인 내 낭군 온달님이 앞으로 나서서 이렇게 아뢰었다네.

“신 온달이 한 말씀 아뢰고자 하나이다. 이제 수나라 오랑캐는 통일전쟁을 마무리한 지 얼마 안 돼 또다시 대군을 일으키려면 쉽지 않을 것이니 우리에게는 방비할 시간의 여유가 있다고 보나이다. 그동안 후방의 적을 제압하여 후환을 없애는 것이 상책인가 하나이다.”

“신라를 먼저 치자는 말이구려? 하지만 군사를 양분하면 힘도 그만큼 쪼개질 것인데 그래도 괜찮겠소?”

“태왕폐하! 계립현과 죽령 서쪽은 본래 우리 고구려의 영토인바 신라 간적들에게 빼앗긴 이래 그 땅의 백성이 늘 통분히 여기며 부모의 나라인 우리 고구려를 잊지 못하고 있으니 어찌 두고만 보리까? 대왕께서 신을 불초하다 마옵시고 군사를 맡겨주신다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옛땅을 회복하여 대왕의 심려를 덜어드리고자 하나이다!”

그 자리에는 영양태왕 8년(598년) 수 문제의 30만 대군과, 영양태왕 12년(612년) 수 양제의 백만대군을 여지없이 무찌른 주역인 태왕과 나의 이복동생 성을 비롯하여 강이식․을지문덕 같은 명장들도 배석하고 있었는데 모두가 온달 장군의 말이 옳다고 동의했다더군. 그래서 그날 국가안보회의는 온달 장군을 총수로 하는 남정군(南征軍)을 파견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네.

대궐을 물러나 집으로 돌아온 온달님은 나와 아이들을 불러 놓고 작별을 했지. 그때 시어머니는 이미 세상을 떴지만, 사랑하는 아내인 나 평강공주와 귀여운 자식들과는 그것이 영원한 이별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지 뭔가! 이튿날 아침 군사들을 점고하고 출정식을 거행하는 자리에서 온달님은 이렇게 맹세했어.

“들어라, 고구려 무사들아! 우리에겐 승리 아니면 죽음뿐이다! 신라 놈들이 아리수(한강) 이북 우리 땅을 빼앗았으니 이번 싸움에서 모조리 다물리지 못한다면 내 결코 살아서 돌아오지 않겠노라!”

 

그리고 군사들을 이끌고 도성을 출발하여 질풍노도처럼 남쪽으로 진격해 내려갔다네. 그때 온달님이 되찾고자 출전한 계립현 이서, 죽령 이북, 고현 이내는 오늘날의 강원도 지방 대부분이지. 고구려가 이 지역을 신라에게 빼앗긴 것은 40여 년 전인 양원태왕 7년(551년) 9월이었어. 그해에 우리 고구려는 내정은 안장되지 못 하고, 밖으로도 돌궐의 침략을 받는 등 내우외환에 시달리고 있었다네.

돌궐군이 신성과 백암성을 포위하여 요동이 위급하자 황족인 고흘(高訖) 장군이 출전하여 돌궐군을 무찌르고 4천여 명을 포로까지 이끌고 개선했지만, 그 틈을 노린 백제의 성왕(聖王)이 고구려 남부의 10개 성을 쳐서 빼앗았으며, 뒤이어 신라의 거칠부(居柒夫)가 또다시 이를 암습하여 탈취한 것이었어. 신라 진흥왕은 여세를 몰아 연합전선을 펼쳐 함께 북진한 백제군이 수복한 한강 하류 지역까지 탈취․장악함으로써 이후 삼국 혈전사를 주도하는 결정적 계기를 마련했던 것이야.

내 낭군 온달님이 거느린 고구려의 남정군이 어떤 지역을 거쳐 아단성에 이르렀는지 그대들은 아직도 잘 모르고 있지? 기록이 없으니까. 오늘의 한강 하류인 서울 지역은 당시 신라군이 강력한 방어선을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온달님의 군대는 강원도 내륙지방인 철원- 춘천- 홍천- 원주- 신림- 주천- 영월- 단양으로 진격했다네. 그 대신 고구려군의 남정을 감추기 위해 일부는 한강 쪽에서 양동작전을 펼치기도 했지.

한강의 옛 이름은 고대에 우리 선조들이 개척한 다른 여러 가람과 마찬가지로 아리라- 아리수였다네. 한강이니 한성이니 한산주니 하는 지명은 모두 뒷날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우리 고유의 지명을 중국식 주․군․현처럼 바꿀 때에 개명한 것이지.

진격을 거듭한 온달님의 고구려군은 신라군의 완강한 저항을 받아 악전고투를 거듭했다더군. 그리하여 마침내 운명의 땅 아단성(阿旦城)에 이르렀다네. 김부식은 <삼국사기> ‘열전’에서 이렇게 썼더구나. ‘드디어 떠나 신라군과 아단성 밑에서 싸우다가 유시에 맞아 길에 쓰러져 죽었다.’ 그렇다면 내 낭군 온달님이 실지회복의 한을 품고 전사한 아단성은 지금 어디일까.

지금까지 아단성은 서울 성동구 광장동과 구의동에 걸쳐 있는 백제의 옛 성터 아차산성(阿且山城 : 峨嵯山城)으로 비정해온 것이 학계의 정설이 되다시피했지? 워커힐 뒤의 아차산성을 온달님의 전사지 아단성으로 추정하게 된 이유는 첫째, 아단의 단(旦)과 아차의 차(且) 두 글자의 모양이 비슷한 데서 비롯된 착각과 견강부회의 결과요, 두 번째는 위치가 한강 북쪽에 위치하기 때문이었어. 즉, 온달님이 출정에 앞서 한 말 가운데 ‘신라는 우리 한수 이북의 땅((漢北之地)을 빼앗아 군현으로 만들었으므로…’한 구절을 들어 온달님의 마지막 싸움터를 서울 한강 북쪽 아차산성으로 추측한 것이었지.

 

하지만 그대들이 <삼국사기>를 비롯한 어느 사서나 지리지를 찾아보아도 ‘아차산성이 곧 아단성’이라는 대목은 없다네. 아차성은 백제가 책계왕(責稽王) 원년(288년)에 오늘의 풍납토성의 일부인 사성(蛇城)과 함께 쌓은 것인데, 475년에 우리 고구려 장수태왕의 대대적 정벌로 백제의 도성이 함락될 때에 개로왕(蓋鹵王)이 참살당한 곳이지. 또한 ‘한수 이북’을 두고 말하더라도 한강 하류인 오늘의 서울 강북만이 아니라 남한강 상류 이북은 모두 해당되는 말이니, 온달님이 가리킨 한북의 땅은 곧 죽령 이북, 고현 이내의 10군인 오늘날 강원도 대부분과 충북 일부를 가리킨 것이었어.

남한강 상류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강을 끼고 늘어선 충주․청풍․단양․영춘․영월 등지는 하나같이 고구려의 대 신라 방어요충으로 산성과 봉수터가 잇달아 늘어서 있다네. 이 가운데 충북 단양군 영춘면은 본래 우리 고구려의 을아단현(乙阿旦縣)이니, <삼국사기> ‘잡지’ 지리편에서 ‘내성군(奈城郡)은 본래 고구려의 내생군(奈生郡)을 경덕왕이 개명하였는데 지금 영월군이다. 그 영현은 셋으로 자춘현(子春縣)은 본래 고구려의 을아단현을 경덕왕이 개명하였는데 지금 영춘현이라 부르고…’한 바로 그곳이야.

다시 강조하거니와 ‘아단’이란 두 글자가 붙은 지명은 오로지 이곳밖에는 없다는 말이야.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이와 같은 건치 연혁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대들이 옛 지명이 을아단인 영춘면에 가면 성산이 있고, 그 정상부에 온달 장군이 쌓았고, 온달 장군이 이곳을 되찾기 위해 싸우다가 전사했다는 전설에 따라 오래 전부터 사람들이 ‘온달성’이라고 부르는 고구려 산성을 볼 수 있을 거야. 이 온달성 아래에는 온달동굴이 있고, 근처에는 온달 장군의 묘라고 전해오는 고구려식 대형 적석총도 있으며, 활고개․진거리․쉬는돌․비마루․대진목․군관나루 같이 온달 장군과 평강공주의 전설이 서린 지명이 많다네.

기록에는 온달님이 유시, 곧 눈먼 화살에 맞아 죽었다고 했으나 웬만한 강궁이 아니고서는 고구려 장수의 철갑을 뚫지 못했을 것이고, 그것은 신라가 진흥왕 19년(559년) 신득(身得)이란 자가 발명했다는 신무기, 즉 성위에 설치하여 덫으로 화살을 쏘아갈기는 노포(弩砲)에 맞았기 때문이지. 그렇다고 해서 우리 고구려군이 아단성을 탈환하지 못한 건 결코 아니야! 성을 함락하고 점령하는 과정에 우리 온달님이 노포에 맞아 불의에 전사를 하신 거지. 우리 고구려는 그렇게 신라에 빼앗겼던 실지를 회복했던 거라네!

비록 성은 점령했지만 총수를 잃은 고구려군이 내 낭군 온달님의 유해를 군영으로 옮겼다가 도성으로 환장(還葬)하려고 했으나 영구가 땅에 얼어붙은 듯 꼼짝하지 않았다고 하더군! 오오, 가여운 내 낭군!

이런 급보를 받은 나는 태왕의 허락을 받아 바람처럼 아단성으로 말을 달려 내려갔지. 그리고 며칠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정신없이 달려 성 밑 군영에 다다라 사랑하는 낭군의 관을 어루만지며 이렇게 비통하게 울부짖었어.

“아아, 낭군이시여! 죽고 사는 것은 이미 결정되었습니다. 이제 돌아갑시다!”

그러자 마침내 관이 움직이기 시작하더군. 아아, 그래 맞아! 물론 관이 땅에 붙박혀 움직이지 않았을 리는 없고, 이는 온달장군이 고토회복의 한을 품은 채 전사하자 너무나 원통하게 여긴 군사들의 발길이 차마 떨어지지 않았다는 표현이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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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고구려 백성은 그들의 임금을 중국의 황제와 같은 의미에서 성왕(聖王)․대왕(大王)․호왕(好王), 또는 태왕(太王)이라고 부르며 일월신(日月神)과 천제(天帝)의 자손으로 받들어 모셨다. 이는 고구려가 고조선과 부여를 이은 천손족(天孫族)의 나라라는 자부심과 자존심의 발로였다.

평강태왕의 성명은 고양성(高陽成). 양원태왕의 맏아들로 태어나 양원태왕 13년(557년)에 황태자로 책봉되었고, 2년 뒤인 559년 3월에 부왕이 돌아가자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다른 고구려 임금들의 경우에 비추어볼 때 평강상호왕은 능호, 평원왕은 <삼국사기>에는 그의 시호라고 했는데 평원이 곧 그의 연호로 추정된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는 평강태왕이 담력이 있고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했다고 전한다. 그는 즉위 이듬해 2월에 나라의 첫 도읍지 졸본으로 행차, 시조신과 선대왕들의 사당을 찾아 제사를 올리고, 3월에 돌아오는 길에 각 주․군에 갇힌 죄수들에게 대사령을 내려 참수형과 교수형을 당할 중죄인을 제외하고는 모두 풀어주었다.

기록에 따르면 평강태왕의 가족으로는 두 명의 황후와 세 명의 태자, 한 명의 공주가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고구려본기’ 평원왕조에는 재위 7년(565년) 정월에 왕자 원(元)을 세워 태자로 삼았다고 했고, 제27대 영류왕 조를 보면 ‘왕의 이름은 건무(建武) 또는 성(成)이라고도 하며 영양왕의 이복동생이다’ 라고 했으니 최소한 두 명의 부인이 있었다는 말이 된다. 또 제28대 보장왕조에는, ‘왕의 이름은 장(藏) 또는 보장(寶藏)이라고도 하며 나라를 잃었으므로 시호는 없다. 건무왕(영류왕)의 아우인 대양왕(大陽王)의 아들이다’라고 되어 있다. 따라서 평강태왕에게는 뒷날 그의 뒤를 이어 영양태왕으로 즉위하는 맏아들 고원, 영양태왕의 뒤를 이어 영류태왕이 되는 고성(고건무), 그리고 연개소문(淵蓋蘇文)의 쿠데타에 의해 태왕위에 올랐다가 고구려의 마지막 임금이 되는 고장(고보장)의 아버지 대양왕 등 세 아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평강태왕에게는 이 세 아들 말고도 외동딸이 또 하나 있었으니, 바로 우리 고대사를 빛낸 여걸의 한 사람인 평강공주이다. ‘고구려본기’에는 나오지 않지만 우리가 그녀의 존재를 알 수 있는 것은 <삼국사기> ‘열전’ 온달 편에 실려 전해오기 때문이다.

낙랑공주와 마찬가지로 평강공주의 이름도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성은 고구려의 왕성(王姓)인 고씨라는 사실이 분명하지만, 평강공주란 다만 ‘평강태왕의 딸’이란 뜻이지 그녀의 이름은 아니기 때문이다. 낙랑공주에게는 호동왕자가, 선화공주에게는 서동왕자가 있었듯이 평강공주에게는 온달이라는 낭군이 있었다.

그런데 평강공주의 남편 온달은 호동이나 서동처럼 왕손으로 태어난 고귀한 신분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가문 좋은 귀족 집안에서 태어난 사람도 아니었다. 더군다나 <삼국사기> ‘열전’ 온달편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그는 뭇사람에게 바보라고 놀림 받던 미천한 사람이었다. 돌이켜보건대 오랜 세월을 이어온 우리 민족사에서 빛나는 이름을 남긴 영웅․호걸․기인․재사는 많고도 많지만 바보 소리를 듣고도 역사의 무대를 유유히 가로질러간 사람이 고구려의 온달 말고 누가 또 있었던가.

어렸을 때 울보 공주로 유명했던 평강공주와 거리를 헤매며 구걸하던 바보 온달의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평강공주가 무슨 까닭에 잘 울었으며, 온달은 어찌하여 구걸하는 바보에서 하루아침에 공주의 신랑이 되는 행운을 잡을 수 있었는지 그 까닭을 깊이 생각해본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삼국사기> ‘열전’ 온달 편이 전하는 설화의 요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평강공주는 어렸을 때 매우 잘 울었다. 둘째, 온달은 바보 소리를 들으며 구걸하는 천민이었다. 셋째, 그러한 신분의 장벽에도 불구하고 공주는 온달과 결혼했다. 넷째, 공주는 바보 온달을 용감무쌍하고 충성스러운 고구려의 장수로 만들었다. 다섯째, 온달이 신라군과 싸우다가 전사했다는 사실이다.

이 가운데서 가장 큰 의문점은 당시 동아시아의 강대국으로서 서토의 숱한 하루살이 제국의 황제쯤은 우습게 여기던 대고구려국의 공주가 무엇이 부족하고 아쉬워 다 해진 누더기를 걸치고 저자를 헤매면서 동냥하던 바보 온달에게, 그것도 제 발로 찾아가 아내가 되었을까 하는 점일 것이다. 과연 이러한 일이 엄격한 신분제도의 절대왕권시대에 어떻게 가능할 수 있었을까. 추측하건대 그녀는 이미 오래 전부터 새장 속에 갇힌 새와 다름없는 궁중 생활이 싫어 넓디넓은 바깥세상의 자유를 그리워하지 않았을까. 게다가 잘 울면서 큰 아이는 원래 고집이 센 편이 아닌가. 그리고 평강태왕에게는 부인이 두 명이 있었다고 하니 어쩌면 공주의 생모는 제1왕비로서 일찍 돌아갔고, 계모인 제2왕비가 저세상으로 먼저 간 어머니 자리를 차지하자 매일같이 떼쓰고 울면서 자랐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또는 평강태왕은 젊은 후비에게 한창 사랑을 쏟고 있는데 공주가 계모라고 싫어하며 따르지 않았으며, 그 결과 가정불화가 끊이지 않자 마침내 화를 참지 못해 공주를 쫓아내버렸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어쩌면 공주는 어린 시절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그 이름을 들어오던 온달을 만나고 싶어서 대궐을 몰래 빠져나가 온달을 만나보았으며, 그렇게 몇 차례 만나다가 마침내 정분이 싹터 남몰래 사랑을 키워왔는지도 모른다. <후한서>에 이르기를, ‘고구려 풍속은 남녀가 무리지어 춤추고 노래하며 즐긴다’고 했고, <남사>에서도 ‘고구려는 가무를 좋아하여 국중(國中) 읍락에서 남녀가 무리지어 밤마다 노래하고 즐긴다’고 했다. 그렇게 놀다가 눈도 맞고 마음도 맞으면 서로가 짝이 되기도 했을 것이다.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의 경우도 중매쟁이가 따로 없었고 양가 부모의 합의가 없었음에도 쉽사리 혼인을 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온달이 <삼국사기>의 기록과는 달리 구걸하던 바보는 아니었을 것이다. 천민은 아니고, 적어도 평민이었을 것으로 본다.

그런데 고구려의 옛 수도인 평양 도심에서 동남쪽으로 22km 지점인 평양시 력포구역 룡산리 동명왕릉 인근에 진파리4호무덤이 있는데, 북한에서는 이것이 바로 평강공주와 온달장군의 합장묘라고 주장하고 있다. 또 하나, 당시 아단성전투에서 온달이 전사함으로써 온달 자신은 물론 고구려가 실지회복의 한을 풀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신라와의 옛 국경인 남한강 상류 일대는 회복했으므로 실지회복의 한을 품고 전사했다는 것은 사실과 전혀 다르다는 것이 저자의 의견이다.

천대받던 하급 무사를 낭군으로 삼아 고구려 제일의 용장이 되도록 정성껏 내조한 적극적 성격의 고구려 여걸 평강공주와 신분의 벽을 뛰어넘어 고구려 태왕의 사위가 되고 실지회복을 위해 목숨을 바친 온달장군의 진정한 사랑은 오랜 세월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여전히 크나큰 감동을 안겨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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