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호지(水滸誌), 혼돈의 시대를 이끌다 (370)
■ 9권 피흘려 닦아가는 충의의 길 (22)
제9-8장 비릉군의 싸움 (1)
그때 적장 당창이 군사들을 이끌고 전호를 구하기 위해 쟁을 들고 말을 몰아 달려왔다.
장청은 당창이 달려오는 것을 보고 재빨리 말에 올라 돌을 날렸다. 당창은 얼굴에 정통으로 돌을 맞고 말에서 굴러 떨어졌다.
장청이 큰소리로 외쳤다.
“나는 전우가 아니라, 조정에서 보낸 송선봉의 부하 몰우전 장청이다!”
그때 이규과 무송이 5백 보병을 이끌고 성중에서 달려 나왔다.
두 사람이 큰소리를 지르면서 돌격하자, 북군의 전수장군과 금오교위 등 2천여 명은 별똥별이 떨어지듯 구름이 흩어지듯 사방으로 도망치기 바빴다.
장청은 당창을 쟁으로 찔러 죽이고, 전호를 포박하여 성중으로 끌고 들어가 성문을 닫았다.
송선봉이 북군을 완전히 물리친 뒤에 송선봉에게 끌고 갈 생각이었다.
노지심이 그곳까지 추격해 왔다가, 전호가 이미 사로잡혀 성중으로 끌려 들어간 것을 보고 방향을 다시 서쪽으로 돌려 동제산 쪽으로 달려갔다.
이때는 이미 저녁이 되었다.
송강 등 세 갈래의 군마는 하루 종일 싸웠는데, 죽인 북군 군사가 2만여 명이었다.
북군은 주군을 잃어 사면팔방으로 흩어져 도망쳤다.
범미인과 전호의 애첩들도 모두 난군 속에서 피살되었다.
이천석·정지서·설시·임흔은 3만여 명을 거느리고 동제산 위에 머물러 있었다.
송강은 병력을 거느리고 가서 사면에서 포위하였다.
그때 노지심이 달려와서 전호가 이미 장청에게 사로잡혔음을 보고하였다.
송강은 손으로 이마를 치고서, 황망히 군사를 양원성으로 보내 명을 전하였다.
무송 등은 성문을 굳게 닫고서 전호를 잘 지키고, 장청은 병력을 이끌고 속히 위승으로 가서 경영 등을 접응하라고 하였다.
원래 경영은 이미 오군사의 밀계를 받고, 해진·해보·악화·단경주·왕정륙·욱보사·채복·채경과 함께 북군으로 위장한 5천 군마를 이끌고 무향현 성 밖의 석반산 곁에 매복하고 있었다.
경영 등은 전호가 송군과 싸우러 갔다는 소식을 탐지하고, 밤을 새워 위승성으로 달려갔다.
날이 저물면서 저녁노을이 고운 빛을 띠고 있었고 초승달이 하늘에 걸려 있었다.
경영이 성 아래에서 꾀꼬리 같은 목소리로 외쳤다.
“나는 군주다! 대왕을 보호하여 왔으니, 빨리 성문을 열어라!”
후몽이 조서를 낭독하고 나자, 진관과 송강 등은 만세를 세 번 부르고 재배하면서 천자의 은혜에 감사하였다.
후몽은 금은과 비단 등을 장병들에게 차례로 나누어주었다.
진안무와 송강·노준의에게는 각각 황금 5백 냥, 비단 옷감 10벌, 비단 전포 한 벌, 명마 한 필, 어주 2병이 하사되었다.
오용 등 34명에게는 각각 백금 2백 냥, 비단 옷감 4벌, 어주 1병이 하사되었고, 주무 등 72명에게는 각각 백금 1백 냥, 어주 1병이 하사되었다.
나머지 장병들에게도 금은이 하사되었다.
진안무는 여러 고을에서 재물을 모아 장병들에게 충분히 지급하였다.
송강은 다시 명을 내려, 장청·경영·섭청으로 하여금 전호·전표·전표를 경성으로 압송해 가게 하였다.
공손승이 아뢰었다.
“형님! 오룡산 용신묘의 용상(龍象) 5개를 수리해 주십시오.”
송강은 허락하고 장인을 보내 용상을 수리하게 하였다.
송강은 대종과 마령을 여러 고을로 보내, 성을 지키는 장수들은 신관이 당도하는 대로 교대하여 병력을 이끌고 왕경을 토벌하러 오라는 명을 전하게 하였다.
송강이 군무를 처리하는 며칠 동안, 각처에 신관이 모두 당도하여 장수들이 군병을 거느리고 속속 도착하였다.
송강은 장병들에게 상을 나누어주고, 소양과 김대견에게 전호를 토벌한 공적비를 만들어 세우게 하였다.
5월 5일 천중절(天中節; 단오)이 되었다.
송강은 송청을 시켜 연회를 크게 열고 태평을 경하하였다.
진안무를 청하여 상좌에 앉히고, 신임태수와 후몽·나전 그리고 위승주의 관원들을 그 다음 자리에 앉혔다.
도성으로 올라간 장청을 제외한 송강 이하의 107명 두령과 하북의 항장 교도청·손안·변상 등 17명의 장수들이 질서정연하게 양쪽으로 나열하여 앉았다.
연석에서 진관·후몽·나전은 송강 등의 공훈을 칭찬하였다.
송강과 오용 등은 세 사람이 자신들을 알아준 것에 감격하였다.
혹은 조정의 일을 논하기도 하고, 혹은 마음속의 충정을 토로하면서 술잔을 주고받았다.
등촉을 휘황하게 밝혀놓고서 밤늦게까지 즐기다가 헤어졌다.
다음 날, 송강은 오용과 의논하여 병마를 점검하고 위승을 떠났다.
진관 등도 함께 남쪽을 향하여 출발했다.
지나는 지방마다 추호도 백성을 범하지 않았으며, 백성들은 길에 나와 향화와 등촉을 밝히고 송강 등이 역적을 쳐부수고 백성들이 다시 밝은 하늘을 볼 수 있게 해준 은덕에 감사하였다.
한편, 몰우전 장청은 경영·섭청과 함께 전호 등을 함거에 싣고 압송하여 동경에 도착하였다.
먼저 송강의 서신과 예물을 숙태위에게 바쳤다.
숙태위가 천자께 아뢰자, 천자는 경영 모녀의 정절과 효성을 가상히 여겨 경영의 모친 송씨에게 ‘개휴정절현군(介休貞節縣君)’을 추증하고 개휴현의 관원들로 하여금 사당을 짓고 그 정절을 표창하고 봄가을로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또 경영을 정효의인(貞孝宜人)에 봉하고, 섭청은 정배군(正排軍)으로 봉하여 백은 50냥을 하사하여 그 의기를 표창하였다.
장청은 원래의 직무로 복귀하게 하고, 세 사람이 송강을 도와 회서를 토벌하는 공을 세우면 벼슬을 높여주고 상을 내리기로 하였다.
도군황제는 칙명을 내려 반적 전호·전표·전표를 저자거리에서 능지처참에 처하게 하였다.
경영은 부모의 초상을 들고 가서, 사형 집행관에게 알리고 부친 구신과 모친 송씨의 초상을
사형장에 걸어놓고 그 앞에 탁자를 차려놓았다.
오시(午時) 삼각(三刻)이 되어 전호가 능지처참을 당하자, 경영은 전호의 수급을 탁자 위에 얹어놓고 부모에게 제사를 지내며 방성대곡(放聲大哭)하였다.
이때 경영의 지난 일이 동경에 널리 알려져, 그날 구경하러 온 사람이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었다.
경영이 비통하게 곡하는 것을 보고, 감읍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경영은 제사가 끝나자, 장청·섭청과 함께 궁궐을 향하여 절하며 천자의 은혜에 감사하였다.
세 사람은 송강을 도와 왕경을 토벌하기 위해 동경을 떠나 완주를 향해 출발하였다.
한편, 왕경은 원래 동경 개봉부의 부배군(副排軍)이었다.
그의 부친 왕획은 동경의 대부호였는데, 관아와 결탁하여 엉터리 송사를 벌여 양민을 괴롭혔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꺼려하던 자였다.
어느 날 왕획은, 어떤 풍수쟁이가 한 묏자리를 보고 거기에 묘를 쓰면 아주 귀한 자식이 태어날 것이라고 하는 말을 들었다. 그런데 그 자리는 이미 왕획의 친척이 묘를 쓴 곳이었다.
왕획은 풍수쟁이와 짜고서 그 친척을 해치려 하였다. 왕획은 그런 방면에 뛰어난 자였기 때문에, 그 친척을 상대로 거짓 송사를 벌였다.
그 친척은 몇 년에 걸친 송사로 인해 결국 가산을 탕진하고 마침내 동경을 떠나 먼 곳으로 가서 살았다.
후에 왕경이 반란을 일으켜 삼족이 모두 죽음을 당하게 되었을 때, 그 집안만 먼 곳에 살았고 또 왕획에게 피해를 입었음을 관아에서 알게 되어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왕획은 그 묏자리를 빼앗아 거기에 부모를 장례 지냈는데, 한 달 정도 지나 아내가 임신을 했다.
어느 날 왕획의 꿈에, 호랑이가 방안으로 들어가 서쪽 모퉁이에 웅크리고 앉았는데, 홀연 사자가 돌입하여 호랑이를 물고 가 버렸다.
왕획이 꿈에서 깨어나 보니, 아내가 왕경을 출산하였다.
왕경은 어릴 때부터 불량하였다. 16~7세가 되자 체격이 크고 힘이 셌는데, 글을 읽지 않고 오로지 닭싸움이나 말 타기, 그리고 창봉에만 열중하였다.
왕획 부부에게는 자식이 왕경 하나뿐이어서 애지중지하면서 잘못을 감싸기만 하여 못된 습관이 몸에 배게 되었다. 그러니 장성하게 되자 단속할 수가 없게 되었다.
왕경은 도박을 하고 창녀와 자고 술을 퍼마셔댔다.
왕획 부부가 때로 훈계를 해도, 왕경은 도리어 역성을 내고 난리를 치면서 부모에게 욕을 퍼부었다.
담회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