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호지(水滸誌), 혼돈의 시대를 이끌다 (371)
■ 9권 피흘려 닦아가는 충의의 길 (23)
제9-8장 비릉군의 싸움 (2)
왕획은 어찌할 수가 없어 그저 자신을 탓할 뿐이었다.
6~7년이 지나자 가산을 탕진하고, 왕경은 다만 자신의 무예 실력으로 개봉부의 부배군이 되었다.
돈이 조금이라도 손에 들어오면 삼삼오오 모여서 종일 술 마시고 고기를 먹다가, 사소한 일이라도 뜻대로 안 될 때는 주먹질을 하기 예사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두려워하기도 하고 그에게 얻어먹는 자들은 좋아하기도 하였다.
어느 날, 왕경은 새벽에 관아에 들어가 점호를 받고 일을 마친 다음, 한가롭게 성 남쪽으로 걸어가서 옥진포에서 놀고 있었다.
이때는 휘종황제 정화 6년 봄날이었는데, 놀러 나온 사람들이 개미 떼처럼 많고 군마가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왕경은 혼자서 한가하게 돌아다녔다.
연못가의 수양버들에 기대어 있다가 아는 사람이라도 만나면 함께 주점으로 들어가 술이나 몇 잔 마시고 성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얼마 후, 연못 북쪽에 간판·우후·하인·하녀 등이 가마 하나를 호위하면서 오고 있었는데, 가마 안에는 꽃처럼 아리따운 처녀가 하나 타고 있었다.
그 처녀는 경치를 구경하느라 대나무 주렴도 드리우지 않고 있었다.
왕경은 여색을 좋아하는 자여서, 그처럼 아리따운 처녀를 보자 넋이 나가 버렸다.
가마를 호위하는 간판과 우후를 보니, 추밀사 동관의 부중 사람이었다.
왕경은 멀찌감치 가마를 따라갔는데, 이윽고 가마는 간악(艮嶽)에 당도하였다.
간악은 경성 동북쪽에 있는 동산으로 도군황제가 만든 곳이었다. 기암괴석과 고목 및 진귀한 날짐승이 있었으며, 정자와 객사들이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많았다. 둘레에는 붉은 담장을 두르고 붉은 문을 세워 마치 궁궐과 같았으며, 안에는 금군(禁軍)들이 지키고 있어 보통 사람들은 감히 문 앞에 얼씬도 하지 못했다.
가마가 간악 문 앞에 멈추자, 하녀들이 처녀를 부축하여 가마에서 내리게 하였다.
처녀는 사뿐사뿐 걸어서 문 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지키고 있던 금군과 내시들이 길을 열어주어 그녀가 안으로 들어가게 하였다.
원래 이 처녀는 동관의 동생 동세의 딸이며 양전의 외손녀였다.
동관이 그녀를 수양딸로 길러 채유의 아들에게 허혼하였으므로 채경의 손부감이었다.
어릴 적 이름은 교수였고, 나이는 이팔청춘이었다.
천자가 이틀 동안 이사사의 집으로 놀러간 틈을 타서, 동관에게 부탁하여 간악으로 놀러 나온 것이었다.
동관이 미리 금군들에게 분부해 두었기 때문에 아무도 막지 않았던 것이다.
교수는 간악으로 들어가 두 시간이 지나도록 나오지 않았다.
왕경이란 놈은 바깥에서 하릴없이 서성거리다가, 배가 고파서 동쪽 거리에 있는 주점으로 들어가 술과 고기를 사서 예닐곱 잔을 황급히 마셨다.
처녀가 가 버릴까 염려되어 계산도 하지 않고 전대에서 2전 짜리 은자를 꺼내 점원에게 주면서 말했다.
“잠시 후에 와서 계산하겠다.”
왕경이 다시 간악 앞으로 가서 한동안 기다렸더니, 처녀가 하녀들과 사뿐히 걸어 나왔다.
그녀는 가마에 오르지 않고 주변 경치를 구경했다.
왕경이 다가가 엿보았더니, 처녀는 참으로 아름다웠다. 작은 입술은 앵두처럼 붉고, 두 눈동자는 가을물처럼 영롱하였다. 맑게 갠 밤하늘에 밝게 빛나는 초승달 같고 은은한 향기를 풍기는 연꽃과도 같았다.
왕경은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뛰고, 마치 눈사람이 불을 쬐는 것처럼 삽시간에 뼈와 근육이 녹아 버릴 것만 같았다.
교수도 사람들 속에서 왕경을 발견하고 그 모습을 눈여겨 살펴보았다. 봉의 눈에 그린 듯한 짙은 눈썹, 수염이 적게 난 하얀 얼굴에 뺨은 붉었다. 7척의 키에 건장한 체격이었다.
그런 남자가 넋을 잃고 자신을 바라보니 더욱 멋있어 보였다.
두 사람은 눈빛으로 이미 정을 통했다.
간판과 우후가 사람들을 물리치고 하녀들이 교수를 부축하여 가마에 태웠다.
그리고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다가 산조문 밖의 악묘로 향을 사르러 갔다.
왕경은 또 가마 뒤를 따라 악묘까지 갔다.
악묘 앞은 인산인해를 이루어 길을 뚫고 나가기가 어려웠지만, 사람들이 동추밀 부중의 간판과 우후를 보고서 모두 길을 양보하였다.
교수는 가마에서 내려 향을 살랐다.
왕경은 사람을 비집고 앞으로 나아가기는 했지만 감히 가까이 다가가지는 못했다. 그리고 교수의 수행원들에게 쫓겨날까 두려워, 사당지기와 친한 척하면서 촛불을 들고 향에 불붙이는 것을 도와주면서 눈으로는 교수를 흘끔거렸다.
교수도 자주 눈길을 주었다.
원래 채유의 아들은 날 때부터 멍청했다.
교수는 중매쟁이로부터 몇 번 그 얘기를 듣고서 밤낮으로 한탄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오늘 왕경의 멋진 모습을 보고서 춘심이 발동한 것이었다.
그때 동관 부중의 동우후란 자가 눈치를 챘다.
그는 부배군 왕경임을 알아보고 뺨을 한 대 때리면서 꾸짖었다.
“저분이 어느 댁 사람인지 아느냐! 네놈은 개봉부의 한낱 군졸 주제에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끼어드느냐! 내가 상공께 말씀드리면, 네놈 대가리가 목에 붙어 있을 성 싶으냐!”
왕경은 감히 찍소리도 못하고 머리를 감싸고 도망쳤다.
악묘 문을 나와서 땅바닥에 침을 뱉으면서 말했다.
“쳇! 내가 진짜 어리석구나! 두꺼비가 백조 고기 먹을 생각을 어찌한단 말이냐!”
왕경은 그날 저녁 분노를 삼키면서 집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누가 알았으랴? 교수는 부중으로 돌아오자, 밤낮으로 왕경을 생각했다.
그러다가 시비에게 뇌물을 주고 동우후에게 가서 왕경에 대해 상세히 알아오게 하였다.
시비는 친한 설노파와 함께 뚜쟁이가 되어 왕경을 뒷문으로 끌어들여, 사람도 모르고 귀신도 모르게 교수와 밀통하게 하였다.
왕경이란 놈은 뜻밖의 행운에 너무나 기뻐 종일 술을 마시며 즐거워했다.
세월은 빨리 흘러 석 달이 지났다.
쾌락이 극에 이르면 슬픔이 생기는 법이었다.
왕경은 어느 날 술에 진탕 취해서 개봉부 정배군 장빈의 면전에서 마각을 드러내고 말았다.
그 얘기는 마침내 사방으로 퍼져나가 동관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동관은 크게 노하여, 왕경에게 죄를 씌워 작살을 내려고 벼르고 있었다.
한편, 왕경은 일이 발각되었음을 알고 감히 다시는 동관 부중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어느 날 집안에 한가하게 앉아 있었는데, 때는 5월 하순이라 날씨가 아주 무더웠다.
왕경은 걸상을 뜰에 내놓고 앉아 선선한 바람을 쐬고 있다가, 걸상에서 일어나 부채를 가지러 방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그때 걸상이 네 다리로 걸어서 방안으로 들어왔다.
왕경은 놀라서 소리쳤다.
“기괴하다!”
그러면서 오른발로 걸상을 걷어차고는, ‘아이고!’ 소리쳤다.
걸상이 네 다리로 걸어오는 기괴한 일을 보고 오른발로 걸상을 걷어찼는데, 힘을 갑자기 많이 쓴 탓에 옆구리가 결려 바닥에 주저앉으며 비명을 질렀다.
“아이고!”
그러고는 한동안 몸을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왕경의 아내가 비명을 듣고 달려 나와 보니, 걸상은 한쪽에 쓰러져 있고 남편은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아내는 왕경의 뺨을 한 대 때리고서 말했다.
“쓸모없는 괴물아! 종일 바깥으로만 나돌고 집안은 돌아보지 않더니, 오늘 늦게야 겨우 들어와서는 또 이게 무슨 짓거리야?”
왕경이 말했다.
“여보! 장난이 아니야. 옆구리가 결려서 움직이지도 못하겠어!”
그제야 아내는 왕경을 부축해 일으켜 주었다.
왕경은 아내의 어깨에 기대어 일어나다가 머리를 흔들고 이를 악물면서 비명을 질렀다.
“아이고! 아파 죽겠네!”
아내가 욕을 했다.
“이 바람둥이 몹쓸 놈아! 허구한 날 발길질과 주먹질만 좋아하더니, 오늘 드디어 일을 냈구먼.”
아내는 자신이 한 말이 우스워 적삼 소매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왕경도 ‘일을 냈다’는 말을 듣고서 옆구리가 아프면서도 웃음을 참을 수 없어 낄낄거리며 웃었다.
아내가 또 왕경의 따귀를 한 대 때리면서 말했다.
“이 좆같은 괴물아! 또 뭔 생각을 하는 거냐?”
담회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