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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에서 온 편지-20] 귀국하지 못하는 두 한국인의 슬픔

작성자황사 人-박준호|작성시간21.06.09|조회수79 목록 댓글 0

임 씨, 코로나19로 판로 막혀 송 씨, 사고로 장기입원 끝에, 귀국 결심
오버차지 5천만원에 발목잡혀 오도가도 못하고 극빈자로···도움 절실

(위)양곤 국제공항에서 떠나는 한국행 특별기 모습. 일주일에 3번 운항한다. (아래)두 한국인은 새해를 맞았지만 오랜 오버스테이를 해결하지 못해 비참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왼쪽은 송 씨, 오른쪽은 임 씨. /사진=정선교

2020년. 모든 이들에게 특별한 한해였습니다. 먹고 자고 만나고 여행하는 평범한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 가를 깊이 느끼게 한 시간입니다. 그럼에도 새해가 우리 곁으로 왔습니다. 그래서 기대도 큽니다. 해외로 흩어진 가족들. 장기휴교한 학교. 재택근무가 반복되는 직장. 이곳으로 돌아가 건강한 모습으로 만나길 소망합니다. 그러나 이런 평범한 소망마저 꿈꾸지 못하는 절박한 두 재외교포가 있습니다. 현재 양곤에 있는 임모씨와 송모씨의 이야기입니다.

지난 크리스마스. 한 대의 앰블런스가 비상음을 울리며 양곤으로 진입했습니다. 시골마을 힌드라에서 5시간을 달려왔습니다. 차 안에는 한국인 임모씨가 실려 있었습니다. 그러나 급한 환자는 아니었습니다. 마을에서 결정한 방법입니다. 임씨는 이곳을 떠나야만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는 이 오지마을에서 10년 넘게 살았습니다. 여권도 만료되고 비자도 없이. 코로나 급증으로 외국인은 어디서나 신분이 확실해야 합니다. 조사대상이 됩니다. 또한 마을간 이동이 금지되어 자유롭게 오갈 수도 없습니다. 친한 마을 어른들은 의논 끝에 국제공항이 있는 양곤으로 우선 보내게 된 것입니다. 그는 앰블런스에 실려 그렇게 정든 힌드라를 떠났습니다.

 

임 씨는 사업에 실패한 후 양곤에서 5시간 걸리는 오지마을 힌드라 농촌에 들어가 10년을 살았다. 마을에 달팽이 키우는 일을 보급하며 이웃들과 친하게 지냈다. 코로나로 중국상인들의 거래가 끊기면서 끼니를 굶는 일이 지속되었다. 게다가 오버스테이가 겹쳐 앰블런스로 양곤으로 와야만 했다.

68세 나이의 임모 씨. 그는 20년 전인 40대 후반 전기기술자로 미얀마 양곤으로 이주했습니다. 전기, 통신, 유통 등 사업이 실패를 거듭하자 신변을 정리하고 농촌도시 힌드라의 깊은 오지로 들어가 새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특히 이 마을에 달팽이 키우는 일을 보급, 마을 사람들과 친한 이웃으로 지내게 됩니다. 길고긴 코로나 시기에 이 마을은 가난이 찾아들고 황폐한 모습이 되었습니다. 달팽이를 사러오는 중국상인들의 판로가 막혔기 때문입니다. 그는 귀국을 결심합니다. 더이상 버틸 수가 없습니다. 양곤 시내에 도착한 그에겐 우선 먹고 자는 일이 걱정입니다.

 

66세 나이의 송모 씨. 그는 미얀마에 정착한 교민 1세대입니다. 35년 전 봉제공장 라인을 설치하는 기술자로 양곤에 왔습니다. 당시엔 교민이 세 사람뿐이었다고 합니다. 그 긴 세월 동안 봉제공장도 운영하고, 여러 공사도 따내는 등 사업은 순탄했습니다. 아내와 자녀들도 양곤으로 이주시키고. 아이들이 중고등 과정을 잘 마친 후 가족들은 모두 귀국하게 됩니다.

 

35년 전 미얀마로 온 교민 1세대인 송 씨. 순탄한 사업 끝에 공장에 화재가 나고, 교통사고가 발생해 대퇴부살이 모두 찢겨나가는 부상을 입었다. 현재 양곤에 움막을 짓고 하루 6만원 정도의 생활비로 힘겹게 살고 있다. 돼지를 키워 오버스테이를 해결하려 했지만 강이 범람해 모두를 잃었다.

그러던 어느 날 공장에 화재가 나면서부터 그의 삶은 힘겹게 됩니다. 무너진 사업을 되살리기 위해 돼지도 키우고, 농산물도 재배했습니다. 무슨 일이든 해나가던 그에게 큰 사고가 났습니다. 재작년의 일입니다. 오토바이와 트럭이 충돌한 교통사고입니다. 깨어나보니 한쪽 다리의 대퇴부살이 모두 찢겨 나갔습니다. 양곤 한 병원에서 코로나 사태 직전까지 8개월을 누워 지냈습니다. 병원비가 없어 그는 처음으로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그는 결국 병원의 할인혜택과 주위의 도움으로 퇴원할 수 있었습니다. 살 집이 없어 아는 분의 땅에 움막을 짓고 살았습니다. 먹고 자는 일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회복이 덜 된 다리의 통증이었습니다. 그는 아직도 잊지 못하는 일이 있습니다. 누워 있는 움막에 누군가 3개월간 쌀, 빵, 고기들을 매일 갖다놓고 갔다고 합니다. 그는 코로나 비상 기간에 양곤의 움막에서 한달 7만짯(원화 약 6만원)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다리가 불편해 텃밭을 가꾸는 일도 쉽지는 않습니다. 그는 하루빨리 귀국해 다리 이식수술을 받고싶어 합니다.

두 사람의 안전한 귀국을 위해 남몰래 애써 온 사람이 있습니다. 지난 연말 임기를 마친 전성호 전 한인회장입니다. 그는 코로나 비상 시기에 미얀마 교민 중 극빈자가 약 62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지난 해 한인회의 조사입니다. 그중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수준에 건강상태까지 안 좋은 초극빈자가 2명 있는데, 그 사람이 임 씨와 송 씨라고 합니다.

그러나 두 한국인의 귀국에는 여러가지 장애가 있습니다.
우선 오버차지 비용입니다. 미얀마는 비자기간이 지나면 1년 기준 약 1800불의 오버차지를 내야 출국이 가능합니다. 하루 5불에 해당됩니다. 공항에 창구도 있습니다. 한국서 외국인에게 적용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두 사람의 오버차지 합산은 약 4만 8000불, 약 5000만원에 해당되니 본인들은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미얀마 정부는 오버차지 문제만큼은 원칙을 지킵니다.
그간 한인회에서 구호단체와 종교단체에 호소했지만 성사가 되지 못했습니다. 당사자들이 저지른 일이니 스스로 감당해야 할 일이지만, 지금은 그걸 따지기엔 너무 늦은 시간이 되었습니다. 또 다른 문제는 귀국 후 치료, 생계에 대한 대책입니다. 이것 또한 너무나 절망적인 상태입니다. 우선은 귀국부터 해야 할 것입니다.

 

'코로나 나르기스'의 지난 해. 우리 교민들은 어려운 속에서도 힘든 미얀마 가정을 돕는 일을 지속해왔다. 쌀 나누기, 무료검진, 장학지원 등. 이젠 해외에서 희망을 잃어가는 우리 국민도 함께 돌봐주어야 할 때다.

송 씨는 양곤에 기거할 집이 있지만 임 씨는 시골에서 왔기 때문에 기거할 곳이 없습니다. 이 사정을 안 우리 대사관에서 임 씨에게 임시거처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우선은 무방비 상태의 재외동포를 보호해주는 배려입니다. 두 사람의 귀국은 이제 외교적인 협력이나 요청을 통해 가능한 상황입니다. 이 나라는 외국인 죄수일지라도 해당국 대사관의 인도요청이 있어야만 출감시키는 관례법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외국인은 형기를 더 산 사례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간 미얀마 대도시에서 우리 교민들은 어려운 미얀마 가정을 돕는 여러 행사를 꾸준히 해왔습니다. 쌀 나누기, 진단키트 공급, 무료검진, 마을소독, 결손아동 돕기, 장학금 지급 등. '코로나 나르기스'가 덮친 2020년. 미얀마에서의 일입니다. 새해가 시작되는 오늘. 두 사람을 만났습니다. 우리 국민 극빈자를 위한 기금으로 산 쌀 푸대. 두 사람이 쓰러질 듯 어깨에 메고 가는 뒷모습을 바라봅니다. 고국이든 타국이든 우리는 우리 국민의 눈물도 닦아주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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