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의 인간들이 부르는 노래들[제4편]
시는 씌어지면서 지워진다. 이것이 시가 품은 비밀스러운 내면성의 원리이다. 정작 시에서 씌어진 것들, 언표된 표면은 아무 의미도 갖지 못한다. 겨우 문자나 깨친 무지몽매한 이류 비평가들은 씌어진 표면에서만 시를 읽는다. 시들의 표면은 심층을 갖지 않는 한에서 명료하고, 무의식의 외침 같은 다양한 선을 머금은 심층을 갖는 한에서 모호해진다. 시력이 나쁜 비평가들은 그 난해와 모호함이 만드는 강렬함을 견디지 못한다. 눈은 흐릿하고 의식은 물렁물렁하기 때문이다. 비평가들은 자주 시를 읽는다고 하면서 시를 고갈시킨다. 비평가들은 시를 읽으면서 의미의 고갈, 행복의 고갈에 이를 뿐만 아니라 더 자주 과잉의 의미부여로 시들을 질식에 빠뜨린다.
무엇이 장미인가? 참수된 뒤 자라는 머리.
무엇이 먼지인가? 대지의 허파가 뿜어낸 탄식 일성.
무엇이 비인가? 먹구름의 열차에서 내린 마지막 승객.
무엇이 애탄 근심인가? 구김살과 주름살, 신경의 견직물 상의.
무엇이 시간인가? 우리가 입고 있는 옷, 다시는 벗어버릴 수 없는.
- 아도니스, 「의미의 숲을 여행할 때 필요한 몇 가지 지침」 부분
좋은 시는 젊다. 그것은 감각의 쇄신을 이루고, 세계의 쇄신을 의미의 살[肉]로 드러낸다. 시들은 저를 둘러싼 모르는 세계라는 외부성에 의해서만 성립되고 의미를 품는다. 시인의 상상력은 그 세계와 부딪칠 때 동심원을 그리며 펼쳐진다. 그런 까닭에 좋은 시를 읽는 것은 세계의 확장이자 의미 영역의 확장이다. 시인들은 끊임없이 묻는다. 그들은 우리를 대신하여 장미가 무엇이고, 먼지가 무엇이고, 비가 무엇이고, 애탄 근심이 무엇이고, 시간이 무엇인가를 묻는다. 이제 우리 차례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아직도 시가 가능한가를 물어야 한다. “서로 다른 사랑을 하고/서로 다른 가을을 보내고/서로 다른 아프리카를 생각했다/우리는 여러 세계에서/드디어 외로운 노후를 맞고/드디어 이유 없이 가난해지고/드디어 사소한 운명을 수긍했다”(이장욱, 「우리는 여러 세계에서」) 사소한 운명을 노래하는 시, 외롭고 달콤한 사랑을 노래하는 시, 서로 다른 황혼이 되어 다른 계절을 맞는 시가 아직도 가능한가? 우리는 여러 세계에서 모여들고 각자 다른 계절에서 돌아오지만 시인들은 여전히 상상력의 천재로 군림하고, 이들의 상상력은 창의성의 원천이지만 시인들이 ‘최후’를 향하여 다가가고 있음을 느낀다. 우리는 여러 곳에서 시가 사멸하고, 시인이 사라지는 징후들을 감지한다. 시는 이미 수없이 많은 곳에서 살해되고, 매장되었으며, 더러는 화석이 되었다. 시는 교과서, 수험참고서, 수험생의 필답고사 시험지, 고서박물관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 오늘날 시인은 멸종될 위기의 생물종으로 대접받는다. 시인이 멸종되면 시는 사라진다. 지금 읽는 시들은 불가능성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멸종 위기에 직면한 시인이라는 종족이 제출하는 최후의 서정시들이다.
장석주 「은유의 힘」
맹태영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