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포상고 시절의 소년 김대중

1943년 목포상고 재학시절, 학예제를 마친 뒤 동료, 선후배와 함께. 그는 연극반이었다. (뒷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

1971년 5월 24일 8대 국회의원 선거 지원유세를 위해 전국을 돌던 중 목포~광주간 무안 부근 국도에서 14톤 트럭 압살 기도로 중상을 입었다. 사고 직후 응급치료를 마치고 기차편으로 상경하는 모습

1976년 3.1민주국선언 후 명동에서 유신 철폐를 위한 촛불사위를 하고 있다.

정치 입문 시절의 김대중

1954년, 목포 민의원 선거에 첫 출마한 뒤 찍은 기념사진

1959년, 자유당 당원이었던 김수진 씨가 제4대 민의원 선거에서의 자유당 선거부정을 폭로하고 있다. 민주당 후보였던 김대중은 선거무효 소송에서 승소, 재선거를 했으나 자유당 측의 용공조작으로 결국 지고 말았다.

1962년, 신랑 김대중과 신부 이희호가 하객들에게 인사하는 모습

1969년, 국회본회의에서 대정부 질의를 하는 김대중 의원

1966년, 미국무성 초청으로 미국을 방문하여 제럴드 포드 전 미국 대통령 (당시 미 하원 공화당 원내총무)과 만나 환담하고 있다.

1970년, 효창운동장 대통령 선거유세에서 공화당의 실정을 공격하는 김대중 후보

1971년 5월, 박정희 정권의 교통사고를 가장한 살해기도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뒤 깁스를 한 채 서울 영등포역 앞에서 국회의원 선거지원 유세를 하고 있다.

1970년대 초, 아내 이희호와 세 아들과 함께

1973년 8월 동경납치 사건 뒤 생환하여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1979년 어느 날 자택연금 263일째를 표시하며

1976년 '3.1민주구국선언' 직후 정일형 박사 등과 함께 명동성당 앞에서 촛불시위를 하고 있다. 이 선언은 유신치하에서 박 정권을 처음으로 정면에서 비판한 의거였다.

1978년 12월 27일, '3.1 민주구국선언' 주도혐의로 복역중이던 그는 박정희 대통령의 마지막 특사로 수감 2년 9개월 만에 형집행정지를 받았다. 가석방 직후 기자회견하는 모습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재판정에서

1983년 5월, 미국 망명중이던 그는 한국의 김영삼 총재가 민주화를 요구하는 무기한 단식투쟁에 돌입했다는 소식을 듣고 워싱턴, 뉴욕 등지에서 재미 한국인들과 그 투쟁을 지원하는 가두시위를 벌였다. 그의 옆에 문동환 목사도 보인다.

1987년 여의도에서 열린 대통령 선거유세 장면

1987년, 광주망월동 묘지를 찾은 김대중. 그는 구금과 망명, 연금 등으로 인해 7년만에야 망월동 묘지에 올 수 있었다.

1990년 지자제를 요구하는 단식투쟁의 초입 당시와 후반. 그는 13일간 투쟁했다.

1989년 유럽 순방중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예방하였다.

틈나는 대로 운동을 하는 것이 김대중 전 대통령의 건강비결이다.

수영장에서 아이들과 함께

김대중 전 대통령은 꽃중에서 진달래와 코스모스를 가장 사랑한다. 가냘프면서도 강인함을 품고 있는 게 코스모스의 매력이라고 한다.

종로구 청운초등학교를 방문하여 급식시간에 배식하고 있는 모습

목동의 한 아파트를 방문하여 직접 만든 과일주스를 주부들에게 권하고 있다.

1997년 한국을 방문한 팝 가수 마이클 잭슨을 만나고 있다. 그는 이 자리에서 '경천애(敬天愛)'라는 휘호를 선물했다.

정계은퇴 후 영국에서 귀국한 그는 1994년 1월 '아시아―태평양 평화재단' 을 설립했다. 그 옆의 코라손 아키노 여사는 공동의장을 맡고 있다.

대통령 당선 후인 1997년의 크리스마스날, 청소년재활시설 '교남 소망의 집' 을 방문하여 정신지체장애아동에게 귤을 까서 입에 넣어주고 있다.

손자, 손녀들과 고궁을 찾은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

그는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이 가장 행복하다. 7명의 손자 손녀들을 바라보면 그의 입은 절로 벌어져 다물 줄 모른다.

1997년 12월, 조지 소로스 등과 화상회의를 하는 모습

1997년 12월 19일, 대통령 당선이 확정된 후 유권자들에게 인사하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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