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강림 후 셋째주일(총회선교주일) / 주일예배 설교문
2026년 06월 14일(주일)
사도행전 11:1-18
“성령, 새로운 삶의 전환!”
평소 차를 타고 지나치던 길을 천천히 걸어가 본 적이 있습니다. 가까이서 보니까 나무들과 꽃들과 들풀들이 나를 위로하는 것 같았어요.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는 어느 시인의 말이 실감 났어요. 정말 자세히 보니까 뭐든 예뻐 보인 거예요. 시인의 관찰력이 틀리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길가로 뻗어 나온 칡넝쿨이 친근하게 느껴졌고요. 여느 때 같으면 이마에 스치는 칡넝쿨을 손바닥으로 제쳐버렸을 텐데 살짝이 밀쳐 주었지요. 새소리도 반가웠습니다. 이름 모를 꽃향기가 가슴팍까지 스며들었어요. 순간 정신을 잃을뻔했지요.
울타리에 매달린 때늦은 빨간 장미도 사랑스러워 보였어요. 언덕배기를 타고 오르는 담쟁이 넝쿨이 정다웠어요. 하얀 머리카락을 드러낸 띠, 이른바 ‘삐비꽃’이 어린 시절 추억을 떠오르게 했어요. 길가로 뻗어 나온 풀을 어루만지니 반갑다는 듯이 인사하는 것 같았어요. 노란 민들레와 이름 모를 들꽃이 카메라에 예쁘게 담겼지요.
길가에서 만난 정경들이 모든 이들에게 너무나 귀하고 소중한 경험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까이서 또 자세히, 그리고 오래 보고 있으니, 눈에 들어온 모든 풍경이 예쁘게 보이고, 사랑스러워 보였어요.
전 결코, 돈 주고 살 수 없는 초록의 정경을 마음껏 누렸지요. 길을 걸으니까 생각이 정리되고, 싱그러운 풀 내음이 코끝을 간지럽히고, 콧노래가 절로 나면서 전 뭔가 새로운 경험을 했단 생각이 들었어요. 이게 뭘까? 뭔가 느껴지는 게 있는데 뭘까, 싶었습니다.
그날 늦은 저녁에 무릎을 치며 쾌재(快哉)를 불렀어요.
“아, 그래! 이 새로운 경험이 바로 성령체험이구나!” 일상에서 경험할 법한데 우리는 그냥 지나치고 말아요. 전 신선한 느낌을 받았거든요. 성령체험이 어떤 초자연적인 체험이라고 여기면 우린 죽을 때까지 느껴볼 수 없을 거예요. 바쁜 시간에도 조금만 신경 쓰면 일상이 영리해질 수 있어요. 안 보인 것들이 보이고, 평소 들을 수 없었던 소리가 들리고, 맡아보지 못했던 향기가 나기 시작해요. 이건 분명히 하나님의 영, 곧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속에 부어지는 경험입니다(롬 5:5).
따지고 보면 성령은 전혀 믿기 어려운 대상이 아니라 눈과 코와 입과 귀 그리고 피부, 곧 오감(五感)이 경험할 수 있는 새로운 삶의 원리란 느낌이 듭니다. 일상 가운데 바람처럼, 공기처럼, 향기처럼, 새소리처럼, 풀 내음처럼 성령은 오늘도 우리가 느낄 수 있는 분이세요. 하나님은 성령을 통해서 일하시고, 우리 마음에 사랑을 부어 주십니다. 그걸 일상에서 경험하시기를 소망합니다.
성령은 히브리말로 루아흐(רוּחַ, Ruach), 곧 '바람(Wind)', '숨(Breath)', '영(Spirit)'을 뜻해요. 이는 보이지 않지만 강력하게 역사하는 생명력과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해요. 헬라말로 성령은 프뉴마(πνεῦμα), 곧 '바람', '호흡', '숨', 그리고 '영(Spirit)'이나 '성령'을 의미해요.
우리가 교리로써 하나님, 예수, 그리고 성령을 ‘삼위일체’(三位一體)라고 말합니다. 이건 후대 학자들이 만들어놓은 교리입니다. 이를 딱히 구분해서 말하는 것도, 한 몸이라고 말하는 것도 명확하지가 않아 보여요. 성서는 분명 하나님은 영을 통해서 일하시고, 예수는 그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을 보여주시고, 성령은 하나님을 떠올리게 하거나 예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한다고 했거든요.
우리가 날마다 일상에서 경험하고 겪게 되는 수많은 크고 작은 일들 가운데 보이지 않지만, 성령을 느낄 수 있습니다. 분명 내게 주어진 하나님의 사랑이 가득할 때 스치는 일상이 새롭고 놀라워요. 이걸 느끼게 해주시고 깨닫게 해주시는 분이 누굴까요?
그렇습니다. 일상의 감수성을 영리하게 하시는 분, 곧 성령이십니다.
사실, 맞춰 놓은 알람 소리에 새 아침을 맞는다는 건 신비입니다. 황혼이 짙게 깔리는 저녁을 본다는 것도 그저 신비입니다. 피곤이 쏟아지는 저녁 시간에 잠이 든다는 것도 어쩌면 신비인지 몰라요. 하루하루 새날을 맞는다는 것 역시 기적이 아닐까요?
무심코 흘려보낸 시간이 때로는 하나님이 내게 보내신 신호인지 몰라요. 때로는 하나님이 말을 걸어오시듯, 때로는 함께 걷자고 다가오시는데 우리는 하나님을 밀어내고 있지는 않았는지요. 사소한 일상과 대수롭지 않은 하루하루 순간들을 예민하게 자세히 들여다보십시오. 그러면 귀하고 소중한 일상이 아닌 게 없을 거예요.
사람은 누구나 자기만의 규칙적인 생활 방식과 원리가 있을 것입니다. 사람은 익숙한 것에 길들어지기 마련입니다. 그러다 보면 그게 자칫 고질적인 문제가 되기도 하지요.
고지식하다, 융통성이 없다, 재미없다, 편향적이다, 배려가 없다 등 비판의 목소리가 들릴 수 있어요. 또는 익숙한 것에 길들어지다 보면 차이와 차별을 구별하지 못하고 자기 기준에 타인을 맞추려는 부정적 시각이 생길 수 있지요.
차이와 차별을 구별하지 못하게 되면 그때부터 사람은 독선(獨善:도그마/Dogma), 맹목적인 믿음에 빠지게 됩니다. 이는 곧 고정관념이나 맹목적인 믿음에 자신을 가두고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게 되지요. 신앙적으로 말하면 교리의 원리/원칙에 사로잡혀 융통성이 없는 자기 독단과 아집에 빠지는 겁니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경계해야 할 게 바로 교리의 원리 원칙을 맹목적으로 믿는 거예요. 이게 얼마나 무서운 거냐 하면, 다른 사람의 말이나 주장을 들으려고 하지 않아요. 고집불통이 되지요. 이게 사람을 미치게 하고 결국에 사람을 극단으로 몰고 가 불행하게 만듭니다.
정치나 종교가 본연의 목적을 잃고 극단적인 ‘원리 원칙’과 맹목적인 믿음에 빠지면 유연성과 타협이 사라집니다.
정치는 ‘절대 악’이냐 ‘절대 선’이냐는 이분법만 남아요. 근본주의에 빠지게 됩니다. 배타성과 폭력이 난무하게 되지요. 민주주의가 마비(痲痹)가 와요. 의견 수렴이 안 되고, 대화가 단절됩니다.
그리고 종교는 배타적인 권력이 생겨나고 부패하게 됩니다. 종교가 권력을 쥐면 중세시대의 마녀사냥처럼 다른 믿음을 가진 사람들을 탄압하거나 급기야 종교로 인해 전쟁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비극이 발생하게 됩니다. 이를테면 종교의 정치화가 되는 거예요. 이는 종교의 본질을 잃고 세속 권력과 결탁해 부패하게 되지요. 이는 또한 도덕적 권위를 잃고 사람들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전락하기 쉽지요.
정치와 종교가 만났을 때 극단적인 원칙이 권력이 됩니다. 그 권력이 한 시대를 부패하게 만들고 수많은 억압과 탄압으로 이어지지요. 이런 극단의 전통과 통념이 한 사회의 지배이념이 되면 그 사회는 돌이킬 수 없게 됩니다. 이게 바로 패망의 지름길이 된다는 걸 과거 역사가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를 돌이켜보면 예수의 십자가는 유대교의 전통과 통념, 원리 원칙과 근본주의를 깨뜨린 사건이지요. 예수의 십자가는 처절한 실패와 절망의 끝판을 보여주지만, 역설적이게도 그건 새로운 시대를 여는 여명(黎明)과 같은 거예요. 그게 바로 예수가 전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지요.
그 복음을 들고 유대와 예루살렘과 사마리아 땅끝까지 달려갔던 제자들, 곧 사도들의 활약상이 그려진 게 바로 사도행전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가이샤라 지방에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한 베드로의 사역입니다. 이런 복음 사역을 촉발하게 한 사건이 바로 오순절 날 예루살렘 다락방에 모인 백 이십 명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임한 성령의 기적 사건입니다. 이때 성령 받은 사람들은 유대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사도행전 10장은 베드로가 이방지역(룻다/욥바/가이샤라)에서 복음을 전할 때 놀라운 사건을 보여줍니다. 그게 바로 이방인들이 성령을 받은 사건이에요(행 10:45). 그들도 오순절 날에 성령 받은 예루살렘 교회의 유대 그리스도인들처럼 방언을 말하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10:46). 이게 마치 제2의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처럼 보여요.
이에 예루살렘 공동체의 사도들과 유대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11:1) 하는 소식을 듣습니다. 여기서 누가는 가이샤라에 사는 고넬료와 이방인들의 회심(悔心)이 사소한 일이 아니라 근본적인 새로운 삶의 전환임을 말하고 싶은 거예요.
사실, 베드로는 현재 예루살렘 교회공동체의 수장(首長)입니다. 그가 이방지역 선교 활동으로 예루살렘 교회를 비운 사이 교회의 수장으로서 권위가 흔들렸을까요. 그가 예루살렘에 올라간 걸 보면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과 그리스도인들을 무시할 수 없었나 봅니다. 여하튼 베드로의 가이샤라 선교 활동과 관련하여 예루살렘에서 제기된 의혹 때문에 제1차 예루살렘 공의회가 불가피했던 모양입니다.
당시 예루살렘 교회 안에 엄격한 유대 그리스도인들, 곧 이른바 할례파(수구파) 그리스도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방인들과의 교제를 부정하게 여겼습니다. 그들은 부정한 이방인들과 더불어 식탁에서 음식을 함께 먹는 것과 서로 사귀어 가까이 지내는 것을 율법에 중대한 위반으로 여겼지요. 이에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건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는다고 여긴 거예요.
수구파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대부분, 사도들과 일반 그리스도인들과는 구별됩니다. 그들이 앞장서서 베드로와 이방인들 사이에 자유로운 교제를 정식으로 문제 삼은 거예요.
그들은 제1차 예루살렘 공의회가 열리는 동안에 구체적으로,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것에 의혹을 제기합니다. 이 기간에 그들은 교회 안에서 처음으로 이방인들과 교제를 나눈 베드로를 비판하는 데 앞장섭니다.
수구파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이방인들과 함께 더불어 먹고, 서로 사귀는 것을 그토록 금지한 까닭이 있습니다.
그건 그들과 음식을 나누게 되면 영적으로 교제하는 것과 동시에 그들의 우상숭배에 가담한 것으로 여긴 보수적 전통 때문이었습니다. 다만 그들은 이방인들이 세례받는 것에 대해 드러나게 문제 삼지 않아요.
이에 베드로는 결코, 자신을 변명하거나 변호하지 않습니다(4절). 대신 그간 일어났던 일에 처음부터 차근차근 설명하는 게 필요했습니다. 그는 약간 무겁고 엄숙한 말투로 그들에게 설명해 나갑니다.
사실, 4~17절에 나온 베드로의 연설은 이방인 백부장 고넬료를 만나기 전 욥바에서 본 환상(10:9~16)을 다시 말하면서 사건의 순서를 차례로 설명한 겁니다. 본문에서 다시 언급한 환상의 내용은 약간 수정된 것이지만 주목해 보면 이렇습니다.
그 환상에는 동물과 파충류, 새와 들짐승이 등장합니다(6절). 이를 베드로에게 잡아먹으라는 명령이 떨어집니다(7절).
이에 베드로는 음식 법에 근거해 그럴 수 없다고 반대합니다(8절). 그 뒤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신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9절)과 이 일이 세 번 일어난 뒤에 모든 게 “다시 하늘로 끌려 올라갔다.” 하는 설명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렇듯 누가는 약간 변경된 순서 외에 그대로 반복 설명된 베드로의 환상을 중요한 사건으로 부각시켜요.
사실, 베드로의 연설은 단순히 사건의 요점을 설명한 게 아닙니다. 이 사건이 하나님의 주도 아래 일어났음을 강조합니다. 이에 베드로는 고넬료가 자신에게 보낸 사람들을 전하면서 ‘아무 의심 말고 함께 가라’는 성령의 명령을 설명하지요. 성령의 명령을 강조하면서 베드로는 성령의 역할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런 다음 베드로는 고넬료가 본 환상, 곧 천사가 고넬료에게 한 말을 전달하지요. 가이샤라에서 베드로가 한 연설의 핵심은 “너와 네 온 집이 구원받을 말씀”입니다(14절). 여기서 강조하는 건 연설의 내용이 아니라 천사가 이 말씀을 베드로에게 주어 말하게 했다는 거예요(14절).
이에 따라 베드로는 성령이 그들, 곧 이방인들에게 임했다고 말합니다(15절). 이는 성령이 오순절 날에 자신들에게 임했던 것과 같았어요. 이는 이미 성령이 선물로 주어졌다는 사실을 설명한 거예요(10:45). 이에 베드로는 예수의 예언, 곧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11:16) 하는 말씀이 성취된 걸 강조합니다.
여기서 베드로는 이방인들에게 성령이 임한 일(15절)을 오순절에 자신들에게 일어난 사건과 두 번 비교해요.
하나는 성령이 처음에 우리에게 내려오셨던 것과 같이 그들 위에도 내려오셨다고 설명한 거고요(15절).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우리에게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 주셨다.”(17절) 하는 것입니다.
이에 베드로는 수구파 유대 그리스도인들에게 단호하면서도 신실한 말투로 질문을 던집니다.
“내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을 가로막을 수 있겠습니까?”(17절b)
이렇듯 베드로는 하나님을 감히 가로막을 수 있겠느냐, 하며 가이사랴에서 있었던 사건에 정당성을 부여합니다.
이 정당성은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 이방인들에게 역사하신 것이며, 또 베드로가 망설임 없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른 것으로 인정된 것입니다.
이는 누가가 이방인 선교를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했는가를 명확히 보여주는 겁니다. 이는 뒤에 이어지는 18절에서 이방인 선교의 중요성을 더욱 명확히 합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에게도 회개하고 생명에 이르는 길을 열어 주셨다.”(18절b)
결국에 그들(청중)은 베드로의 연설을 듣고 처음엔 비판(2절)하다가 침묵하고, 이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18절). 청중의 반응은 누가의 마음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18절) 이는 곧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을 구원해주셨다는 겁니다. 이는 천사를 보내시고, 성령을 선물로 주시고, 이방인들을 회개하게 하신 분이 하나님임을 강조한 거예요. 청중의 반응은 이방인 선교에 대한 누가의 이해와 해석임을 알 수 있습니다.
청중의 반응은 반대와 비판의 목소리가 잠잠해지고 대신 하나님에 대한 찬양으로 바뀝니다. 청중의 반응은 곧 제1차 예루살렘 공의회의 중요한 결단과 같습니다. 이는 이방인 선교의 신호탄이랄 수 있습니다.
성령이 처음에 유대 그리스도인들을 생명으로 부르신 것과 같이(15, 17절) 이젠 이방 그리스도인들도 그렇게 부르신 거예요. 이것은 하나님이 하신 겁니다. 사람이 그것을 막을 수 없었던 거지요. 이는 또한 예루살렘에서 오순절 날 임한 성령 기적 사건 이후 유대인 선교가 시작되었다면 성령이 이방인들에게 내리신 이후 이제부터는 이방인 선교가 공식적으로 시작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생명에 이르는 회개’는 구원의 길을 의미합니다.
참된 회개란 인간이 스스로 얻을 수 있는 어떤 ‘업적’이 절대 아닙니다. 그러니 회개는 하나님께서 주셔야 합니다. 여기서 생명 역시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거예요.
이제 예수를 믿고 회개한 이방인들은 유대 그리스도인들과 똑같이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이루게 된 것입니다.
베드로의 이방인 선교가 제1차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인정됨으로써 이방인 선교는 본격적으로 탄력을 받게 됩니다. 이는 할례와 율법 전통에 매여 있던 예루살렘 교회가 회개한 이방인들을 포용하는 공동체가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게 교회가 항상 복음화되어야 할 이유입니다. 교회가 어떤 독선과 독단, 교리와 전통, 통념과 편견에 빠지지 않고 다른 생각과 문화와 관습을 가진 사람들도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는 열린 자세가 필요하지요.
“내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을 가로막을 수 있겠습니까?”(17절b)
이렇듯 단호하고도 무게감 있는 베드로의 말투는 당시 청중도 그렇지만 오늘날 교회공동체에 몸을 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도 어쩔 수 없는 겁니다. 하나님을 감히 누가 막을 수 있겠는지요. 교회공동체는 늘 세상을 향해 열린 공간입니다. 이게 바로 교회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방향으로 변화되어야 할 사명과 활동입니다.
공동체의 독선과 독단이, 꽉 막힌 교리와 전통이, 관습화된 통념과 차별이 열린 공동체를 피 멍들게 하고, 온갖 상처와 고통과 아픔을 남기게 합니다. 이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가로막는 것입니다. 이는 성령을 거역하는 행위입니다.
교회공동체는 이단과 그 사상을 제외한 세상 모든 걸 포용하는 공간입니다. “하나님이 깨끗하게 한 것을 우리가 속되다.”(9절b) 할 수 없습니다. ‘아무 망설임 없이 가라’는 성령의 지시대로 행동하면 그만입니다. 그리스도인들과 교회공동체는 이러쿵저러쿵 따져서 타인을 판단하거나 정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유대인과 이방인이 구별될 수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 앞에 하나같이 귀하고 소중한 존재요, 평등한 존재입니다. 성적 지향이 다르다고 해서 그걸 교회가 판단하고 정죄하는 건 하나님을 가로막는 것입니다. 그건 성령을 거역하는 것입니다.
성적 지향이 달라도, 사회적 신분이 달라도, 직업이 달라도, 생각이 달라도, 주장이 달라도, 이념과 사상이 달라도, 사람이 사람을 비방하거나 차별하거나 혐오할 수 없습니다. 이미 성령이 선물로 주어졌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베드로가 단호하게 던진 질문은 지금 우리에게도 큰 감동과 적잖은 울림을 줍니다.
“내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을 가로막을 수 있겠습니까?”(17절b)
그런 까닭에 우리가 교회공동체를 열린 공간으로 풍성하게 채워가는 기쁜 소식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열린 공간에 생명을 살리는 기쁜 소식이, 하나님을 향한 새로운 삶이 가득가득 채워져 독선과 독단, 맹목적인 믿음과 원리 원칙, 통념과 편견, 차별과 혐오를 밀어내는 거예요. 이게 바로 예수 안에서 ‘돌이킴’(회개:메타노에오/μετανοέω)입니다. 이때 성령이 임하는 거예요. 말하자면 성령을 받는 겁니다.
어쩌면 마음과 생각을 바꾸어 삶의 방향을 하나님께로 돌이킬 때마다 우린 성령을 선물을 받는지 모릅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해서 우리는 성령을 받는 거예요.
그러고 보면 성령은 우리를 회개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영입니다. 그런 이유로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이미 성령이 선물로 주어졌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예수의 복음을 받아들이고 세례를 받으면 성령은 선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행 2:38). 이게 초대교회가 신앙을 삶으로 살아내는 방식이었습니다. 성령을 받는 건 새로운 삶의 전환입니다. 그때야 비로소 바울이 말한 것처럼, 우리가 온전한 사람이 되어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엡 4:13).
성령 받은 이의 눈에는 모든 게 예뻐 보입니다. 사랑스러워 보입니다. 그의 마음에는 어떤 독단과 독선이, 어떤 차별과 혐오가, 어떤 통념과 편견이 들어설 자리가 없습니다. 그 마음은 성령이 함께하시는 자리입니다. 그러기에 사람이 무슨 일을 하든지 베드로와 같이 단호하고 신실함으로 행동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늘 항상 세상을 향해 열린 자세로 좋은 소식과 기쁜 소리가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우리의 열린 마음에 성령이 언제까지나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빕니다.
기도 / 사랑의 주님!
생각과 의견, 주장과 이념이 달라도 우린 주안에서 하나임을 믿습니다. 우리는 자기 독선과 아집과 통념으로 타인을 재단하고 정죄할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이건 하나님을 가로막는 일이며 성령을 거역하는 행위입니다. 늘 열린 자세와 삶으로 성령이 지시하는 일에 신실한 자세로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