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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생각하며

“한국전쟁, 하나님이 묻습니다.”("Korean War, God asks.")

작성자주바라기|작성시간26.06.20|조회수30 목록 댓글 0
한국전쟁, 하나님이 묻습니다.

성령강림 후 넷째주일 / 주일예배 설교문

20260621(주일)

예레미야 52:12-34

한국전쟁, 하나님이 묻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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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에 의한 평화 억압정복뿐입니다.

힘에 의한 평화는 아무리 오래 간다고 할지라도 그건 거짓 평화입니다. 그 이면에는 절대권력이 힘과 무력으로 약소국가를 억누르고 옥죄는 것입니다.

 

전쟁은 어떤 명분이 있어도 정당성을 가질 수 없습니다. 전쟁은 반드시 이익추구가 우선합니다. 세계 최초의 제국인 아시리아북이스라엘을 정복한 뒤 남 유다를 식민지로 삼았지요. 그 의도는 아마도 이집트를 방어하거나 정복하는 데 유다를 교두보로 여겼을 거예요. 뒤이어 아시리아의 수도를 무혈입성했던 바빌로니아 역시 유다에 대한 정책도 같은 맥락이었습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세계 패권 국가는 자기 이익을 우선합니다. 약소국가를 보호한다는 명분일지라도 그건 순전히 자국의 이익을 취하기 위한 핑계에 지나지 않습니다. 해방정국 이후 우리는 정치외교 경제안보 국방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간섭 아닌 간섭을 받고 있으니 실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린 세계 10대 경제 대국으로 성장했고, 세계 5대 군사 강국으로 우뚝 섰습니다. 그런데도 우린 여전히 전시작전통제권이 없습니다. 미군이 가지고 있습니다. 최근 트럼프의 무딘 망발(妄發)은 거의 날강도 같은 수준입니다. 전쟁은 미국이 벌어놓고 이란 재건 비용(450)은 한국 등 동맹국에 떠맡기고 있습니다. 이게 현재 세계 패권 국가라는 미국의 수준입니다. 미국에 어떤 인물이 대통령이 되더라도 서로의 이익을 주고받는 관계는 꿈도 꿀 수 없습니다.

 

이렇듯 강대국은 약소국가와 동맹을 맺어 경제적 군사적 협조를 받지만, 동맹은 단지 명분일 뿐입니다. 동맹은 단지 이익을 취할 수단과 목적으로 이용할 뿐입니다. 이런 관계는 고대 세계 제국이었던 아시리아바빌로니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2차 세계대전이 연합국의 승리로 끝나자 우리는 해방이 됩니다. 한반도에서 일제가 물러가자 남쪽과 북쪽에 각각 미군소련군들어와 군정이 시작되지요. 해방되었으니, 한국 스스로 국가를 세울 수 있도록 도와주면 될 것을. 왜 미국과 소련은 군대를 거느리고 진주했을까요?

소련은 한반도를 통해 동북아시아로 진출할 수 있는 교두보가 필요했습니다. 미국 역시 일본을 재건하고 한반도를 통해 소련중국을 방어할 의도가 있었던 것입니다.

 

남북한이 동시에 1948각각 정부를 수립합니다.

대한민국1948815에 정부를 세우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194899에 창건합니다. 이에 남북한에 진주해 있던 미군과 소련군이 철수하지요.

 

한국전쟁1950625일 새벽 4에 갑자기 시작된 게 아닙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인 1949118부터 1950624까지 38을 사이에 두고 남북이 벌인 크고 작은 전투는 874에 이릅니다. 이때는 전면전이 일어나기 전으로 국지적인 충돌이 자주 발생한 것입니다.

 

이때 민심을 잃은 이승만은 공공연하게 한국의 통일’, ‘전면전을 초래하더라도 북쪽을 공격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민심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전쟁밖에 없다고 여긴 겁니다. 이승만은 북한을 공격하는 자신을 구원해 줄 유일한 방법이라고 여겼지요.

 

한국전쟁은 남과 북, 미국과 소련오판이 부른 전쟁입니다. 북한의 김일성이 한국전쟁을 일으키는 데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한 애치슨 선언(애치슨 라인)’입니다.

 

1950112, 딘 애치슨 미국 국무장관이 애치슨 라인 발표합니다. 당시 미국은 소련과 중국의 팽창을 억제하기 위해 태평양 지역에 방위선을 구축하게 됩니다.

그 방어선 범위가 '알래스카-일본-오키나와-필리핀'을 잇는 선으로 설정됩니다. 여기서 한국과 대만은 방위선에서 제외됩니다.

 

애치슨 라인의 핵심은 이런 것입니다. 미국은 당시 태평양 지역에서 공산주의 확산을 막기 위해 직접 군사를 개입할 방어 지역을 정한 것입니다. 한국과 대만은 태평양 방위선의 안쪽에 있었습니다. 이에 미국은 한국과 대만에 대한 방위 의무를 명시적으로 부인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한반도가 미국의 핵심 안보 방어 구역에서 공식적으로 배제된 것입니다. 그 결과 에치슨의 선언은 한국에서 분쟁이 발생해도 미국이 즉각적으로 군사개입을 하지 않을 거잘못 판단하게 만든 것입니다. 이게 역사의 역설일까요.

 

애치슨 선언은 북한이 한국전쟁을 일으키는 데 원인을 제공했던 거예요. 북한은 미국이 한국을 방어하지 않을 것이라 여기고 중국과 소련의 지원을 받아 전쟁을 일으킨 것입니다.

결국, 애치슨 선언은 한국전쟁을 일으키는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한국 현대사의 흐름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던 것입니다이에 따라 애치슨 라인은 어쩌면 미국이 북한 김일성에게 남한을 침공하도록 미끼를 던져준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 까닭은 여기에 있습니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심각한 경제 불황을 겪고 있었습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문을 닫은 군수 업체가 활기를 뒤 찾을 필요가 있었지요. 그게 바로 한국전쟁이었습니다. 미국은 군산복합체(軍産複合體)가 아니면 심각한 경제 불황을 헤쳐나갈 방법이 없었습니다.

 

'군산복합체(Military-Industrial Complex, MIC)'란 국가의 군대(군부)와 이를 지원하는 방위산업체(군수업체), 그리고 정치권형성한 거대한 상호의존 및 유착 관계를 의미합니다. 이렇듯 그물망처럼 촘촘하게 연결된 정치와 안보, 그리고 국방체계가 오늘날까지도 미국을 떠받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반도의 전쟁 소식을 듣고 한국전쟁이 미국을 구원했다.” 하는 에치슨의 말을 생각해 볼 때 에치슨 선언(라인)‘은 분명 한국전쟁의 미끼였던 것으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듯 지구촌 곳곳에서 분쟁이나 전쟁을 벌이는 미국은 가난한 약소국가의 고혈(膏血)을 빨아먹는 전쟁에 미친 괴물과 같습니다. 약소국가는 미국의 소모품에 지나지 않아요. 동맹을 맺은 한국도 미국의 소모품인 거예요. 베트남 전쟁에서 자국의 이득이 안 되니 꽁무니 뺀 미국입니다. 이를 생각하면 답답하고 화가 치밀어 오릅니다.

 

자국의 이익을 위해 약소국가를 한낱 소모품으로 여기는 미국의 우선주의(전략)냉혹하기만 합니다. 그 우선주의에 평화 가치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습니다.

우리는 현재 한국전쟁 76주년을 통해 한국전쟁에 숨겨진 진실이 무엇인가를 똑바로 마주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전쟁의 진실을 제대로 파악하고 깨닫는 것은 우리 민족이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변곡점(變曲點)이 됩니다.

 

우리가 배운 대로 한국전쟁은 1950625일 새벽 4북한 김일성 정권이 남침을 했다는 사실만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런 단편적인 역사 인식으론 우리 민족에 엄청난 비극을 안겨준 한국전쟁의 진실을 제대로 알 수 없습니다.

 

보고(백과사전)에 따르면 3년간의 분쟁에 참여한 나라들이 총 400만 명의 사상자를 냈다고 합니다. 그중 최소한 200만 명남북한의 무고한 민간인이었습니다. 이건 전쟁이 낳은 참혹한 비극입니다. 진정한 비극은 전쟁 그 자체가 아닙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건 한국전쟁이 분쟁과 내전이란 점입니다. 만일 순전히 남북한 사이에서 벌어진 내전이었다면 식민주의와 민족 분단, 외세 개입으로 인한 엄청난 긴장을 해결했을지 모릅니다. 비극은 전쟁이 아무것도 해결해 주지 못합니다. 다만 이전 상태로 돌아갔을 뿐입니다. 현재 우린 그저 휴전을 통해 평화를 유지할 따름입니다.

 

뜻으로 본 한국역사에서 함석헌 선생“625의 폭격 소리는 새 시대가 임하는 소리였다.” 했습니다. 역사심판인 동시에 예언입니다. 비극적인 과거 역사를 얘기한들 무슨 소용인가! 하는 단세포적인 인식은 결코 내일의 희망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오늘의 문제를 현실 문제로만 해결하려는 사람은 오늘을 다음 세대에게 물려줄 수 없습니다. 한국전쟁은 그날을 예언했던 것입니다.

전쟁을 겪어봤으니 전쟁은 절대 안 돼! 우리는 한민족이다! 우리는 하나다! 하나로 죽을지라도 둘로 살지 않는다. 우리는 평화를 사랑한 민족이다.”

 

우리는 이런 믿음을 다음 세대에 예언하고 가르쳐 줄 의무가 있습니다. 죽음은 곧 삶의 시작입니다. 실패는 새 시대의 약속입니다. 씨가 떨어진 자리에 나무가 자라나고, 물이 스며든 곳에 샘물이 솟아나는 법입니다.

 

아이가 아프면서도 자라듯이 실패는 새 시대를 향해 나아갑니다. 우리 민족은 한국전쟁을 겪었지만 죽지 않고 살아남았습니다. 정말 이기는 것은 이기는 사람도, 진 사람도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실패해야 두 사람이 다 구원됩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기는 사람도, 진 사람도 있을 리 없습니다. 다 져야 합니다.

 

함께 울고 웃을 때 같이 웃고, 서로 힘자랑하지 않고, 서로 어깨동무하며 하나 될 때 오직 한길, 평화와 통일의 세상 향해 걸어가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이를 우리는 자녀들에게 가르쳐 주는 거예요. 가르침은 곧 미래를 여는 예언입니다.

 

오늘 예레미야의 부록인 52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하면 한국의 미래가 장밋빛이 될 것입니다. 한국전쟁의 비극을 겪은 우리가 성서에서 그 해답을 찾아봅시다. 성서는 우리가 내일을 여닫는 입니다. 그 문을 열어야만 내일로 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예언자가 외친 예언의 핵심은 이런 것입니다.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맡긴다. 똑똑히 보아라. 오늘 내가 뭇 민족과 나라들 위에 너를 세우고, 네가 그것들을 뽑으며 허물며, 멸망시키며 파괴하며, 세우며 심게 하였다."(1:9b~10)

이 말씀은 멸망은 새로운 시작이란 뜻입니다. 예레미야는 멸망이란 말을 예레미야에서 89이나 외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의 말에 뭇 민족의 미래를 맡기셨어요.

 

멸망예고는 실속 없는 경고가 아녜요. 이는 진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선포된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살거나 죽게 하고, 멸망하거나 새로 시작하게 합니다. 이는 유다뿐만 아니라 그 당시 세계 모든 민족에게도 해당한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예레미야는 세계 만민의 예언자인 셈입니다.

 

예레미야 52은 예루살렘이 바빌론 제국에 함락되던 마지막 순간을 담담하게 전합니다. 민족의 아픔을 짊어진 채 늘 눈물을 흘리고 탄식하던 예레미야의 평생 예언 활동에 비하면 마지막 장의 분위기는 실로 담담하고 차분합니다. 결국에 유다예루살렘함락되자 성전마저 불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새로운 미래에 대한 한가지 기대와 희망하나님이 미래를 이끄신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세우며 심는다는 말을 예레미야의 입에 맡겼다는 데서 우리는 새로운 미래에 대한 희망 엿볼 수 있습니다. 바빌론이 함락’(50:2)될 것이라는 예레미야의 선언에서 알 수 있습니다. 더더욱 명확한 건 역사를 이끌어가는 주체가 하나님이시란 사실입니다.

 

사실, 예레미야가 활동할 당시 유다의 운명바람 앞에 놓인 등불입니다. 언제 꺼져도 자연스러울 만큼 가장 위급한 상황에서 그는 예언한 것입니다. 유다 왕 시드기야는 바빌론에 반기를 들었습니다(52:3). 이는 바빌론과 전쟁하기 위해 동원령이 내리고 온 나라가 한판 전쟁을 준비하고 있던 때입니다.

 

예레미야가 입버릇처럼 외치던 선포가 "유다는 망한다.", "바빌론에 항복하라."입니다. 백성은 가뜩이나 불안과 공포의 분위기 속에 움츠려 있던 때에 예레미야는 불난 데 기름을 안고 뛰어들라격입니다. 그의 삶은 동족에게 온갖 모욕 거리가 되고, 고발당하고, 버림받는 수난의 연속이었습니다. 그의 예언이 고난받는 예언자로 만든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유다가 당면한 문제만 본 게 아니라 새로운 미래, 새로운 세상을 내다 본 거예요. 유다의 멸망 너머에 유다의 회복을 예언한 겁니다. 그는 예루살렘을 멸망으로 이끈 가장 큰 주범은 성전이라고 외쳤습니다. 또 그는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가장 하나님을 배반했던 원흉 역시 성전이라고 했습니다(7:4~15). 말하자면 성전이 종교 권력이 되어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우상숭배 한 것입니다.

 

게다가 나라의 운명이 천 길 낭떠러지 위에 서 있습니다. 백성이 온갖 억압착취로 시름시름 앓고 있습니다. 이에 하나냐같은 거짓 예언자들은 항상 괜찮다 괜찮다하며 백성의 판단을 흐리게 했습니다. 예레미야는 나라의 운명을 이 지경까지 끌고 온 주적거짓 예언자들이라고 폭로했습니다(5:26~31).

 

유다 왕 시드기야반기는 결국, 예루살렘과 성전파괴를 자초하는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약소국가가 빈틈을 이용해 반기를 들 때마다 패권 국가는 오히려 그걸 전쟁의 명분으로 삼습니다. 4년 전에 일어난 우크라이나와 최근 이란 전쟁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시드기야의 배신은 바빌론 제국에 전쟁을 선포한 거나 다름없습니다. 바빌론 왕 느부갓네살은 군대를 동원하여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공격합니다(기원588).

시드기야의 배반은 실로 참담했습니다. 성벽이 파괴되자 유다 군대는 어둠 속에서 도망치느라 북새통을 이룹니다. 누가 누구를 지켜주지 못합니다. 살려고 도망치느라 정신없는데 왕이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유다 왕 시드기야 역시 도망치다가 갈대아 군대에 붙잡히자 유다 군대는 완전히 흩어지고 맙니다. 시드기야의 말로(末老)는 실로 비참하고 끔찍했습니다. 그의 눈앞에서 아들들과 신하들이 죽임을 당하는 모습을 봐야 했어요. 그는 두 눈이 뽑히고 사슬에 칭칭 감긴 채 바빌론 땅에 끌려가 죽는 날까지 감옥에서 지냈습니다(8~11).

 

느부갓네살은 친위대장 느부사라단을 예루살렘에 보내 성전과 왕궁 불태우고 예루살렘의 모든 집불살라버렸습니다. 그리고 갈대아 군대는 예루살렘 성벽을 파괴했습니다. 그야말로 성전과 예루살렘이 폐허가 되고 만 것입니다(13~14). 예레미야 52장은 예루살렘의 마지막 날 참상을 강렬하게 보여줍니다.

 

게다가 더 비통한 건 바벨론 왕은 성안에서 끝까지 저항했던 모든 백성포로로 사로잡아 갔습니다. 기술자들을 잡아간다는 건 이해가 되지만 일반 백성까지 포로로 잡아갈 이유가 있을까요. 어쩌면 저항의 뿌리까지 용납하지 않겠다는 바빌론 왕의 치밀함이 엿보입니다.

 

그래도 한 가닥 희망은 남겨두었습니다. 성 밖에 살던 가장 가난한 이들만큼은 농사를 짓도록 놓아두었습니다. 이들은 지금껏 예루살렘 권력자들대지주들의 착취와 억압에 시달리더니 그 고통과 설움을 보상받기라도 한 것일까요. 아무튼, 그들은 포로로 끌려가지 않고 유다 땅에 남은 자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인정사정이 없습니다. 냉혹해요. 주님께서는 마침내 그들을 주님 앞에서 쫓아내셨다하는 말속에 심판의 냉혹함 숨어 있습니다(3a). 따지고 보면 하나님은 바빌론 제국을 통해 유다 심판하신 것입니다.

 

바빌론은 유다 백성을 포로로 끌고 가는 것도 모자라서 예루살렘 성전 기물을 약탈해 갔습니다. 이는 성전 도구들(19), 열두 놋 소(20), 기둥(21), 기둥을 두른 석류의 개수(23)가 그것입니다.

하나님은 성전 기물을 약탈해 가도록 내버려 두신 까닭이 뭘까요?

당시 유다 백성성전야훼의 집이라고 의지했어요. 하나님이 떠난 상황에 유다는 여전히 평화를 외치고 바빌론에 멸망 당하지 않을 거란 거짓 예언자들의 말씀을 듣고 싶었던 것입니다.

 

또 아직 나라가 완전히 망하지 않았고, 성전 기물이 남아 있었기에 그들은 회개하지 않고, 회복 구원의 말씀만 듣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성전 기물이 바빌론으로 옮겨질 거라는 예레미야의 경고가 성취된 것입니다.

 

지금껏 언급했듯이 성전과 예루살렘의 최후가 얼마나 참담했는가 보여주는 게 본문 52장의 목적입니다. 여호와의 성전이 불탄 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성전 건물이 불에 탔을망정 하나님이 유다와 함께하지 않는 건 아닙니다. 여기에 역설이 담겨있습니다. 비록 성전이 불탔을지라도 모든 건 하나님의 선포에 따른 성취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이유로 성전 기물약탈당하는 치욕스러움까지 오늘 본문은 낱낱이 보여줍니다.

 

바빌론은 유다 백성 4,600을 포로로 끌고 갔습니다(30). 포로의 사건은 비극적이지만 역설적이게도 예레미야의 선포에 따르면 그건 새로운 희망의 시작이었습니다.

"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한다. 내가 이곳에서 바빌로니아(갈대아) 사람의 땅으로 내쫓은 유다의 포로들을 이 좋은 무화과처럼 잘 돌보아 주겠다. 내가 그들을 지켜보면서 잘 되게 하고, 다시 이 땅으로 데려오겠다. 내가 그들을 세우고 헐지 않겠으며, 내가 그들을 심고 뽑지 않겠다.“(24:5~7)

 

사실, 30에 언급된 유다 포로의 수새로운 이스라엘, 회복된 이스라엘을 이루어갈 사람들임을 뜻합니다. 이는 유다 백성이 단순히 포로로 끌려간 사건만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이는 또한 이스라엘의 새로운 회복과 시작임을 가르쳐 준 사건입니다.

 

유다의 마지막 왕 여호야긴이 사로잡혀간 지 37 되던 해 12 25에 그는 감옥에서 풀려납니다.

왜 여호야긴의 이야기가 52 결론 부분에 나왔을까요?

그건 까닭이 있습니다. 여호야긴이 감옥에서 풀려난 건 개인의 회복이 아닙니다. 부록의 저자는 포로로 끌려간 유다의 회복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는 포로로 끌려간 이들을 통해 새로운 역사가 시작된다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여호야긴의 회복은 곧 어스름하게 밝아오는 새벽빛과 같은 것입니다. 새로운 역사가 밝아온다뜻입니다.

 

결국, 본문 52은 예레미야가 선포했던 말씀이 모두 성취된다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내가 뭇 민족과 나라들 위에 너를 세우고, 네가 그것들을 뽑으며 허물며, 멸망시키며 파괴하며, 세우며 심게 하였다."(1:10)

부록의 저자는 뽑고 파괴할 뿐만 아니라 건설하고 심는 일예레미야의 선포였음을 말합니다. 새로운 역사는 바빌론에 끌려간 포로들을 통해 시작될 것입니다. 이에 따라 페르시아 왕 고레스를 통한 포로 귀환 역시 예레미야가 선포한 예언의 성취가 되는 셈이지요.

 

예레미야 52장의 핵심역사의 역설을 낳았습니다. 곧 비극적인 예루살렘의 파괴(멸망)새로운 역사의 시작이 된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한국전쟁의 비극이 단지 비극으로 끝난 게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함석헌 선생은 말합니다. 한국전쟁새 시대를 미리 알리는 이라고 말입니다. 한국전쟁이 증언하는 건 소련과 미국의 잘못이란 점입니다.

 

소련과 미국이 서로 양보하지 않아서 38이 그어졌고, 그들이 세계평화와 한국의 해방을 원했다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38선은 하나님이 우리 민족을 시험하기 위한 시험 문제다. 국민의 성격을 다듬었나 보자는 게 38선이다. ∙∙∙ 38선은 무기로 해결할 선이 아니다. 이성으로, 도리로, 하늘의 이치로, 본성으로 해결할 선이다. 살 생각이 있으면, 삶이 무엇이며 어떻게 하면 사는가를 깨닫기만 하면, 이제 곧 없어지는 선이다.”

남쪽과 북쪽을 가른 38선을 함석헌 선생은 이렇게 해석한 것입니다.

 

이에 따라 한국전쟁무력으로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언해 주었습니다. 한마디로 전쟁은 안 된다는 거예요. 예루살렘 파괴(멸망)바빌론의 포로 사건새 역사의 여명인 것처럼 한국전쟁 역시 새 시대와 새 나라의 문을 여는 변곡점이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포로에서 돌아와 새 성전과 자기 집을 새로 지어야 할 사람들입니다.

 

사실, 우리 민족은 일찍이 평화를 사랑한 민족이었습니다. 우리는 1,000에 가까운 외침(外侵)으로 고난의 역사를 걸어왔습니다. 식민지도 경험했습니. 한국전쟁이란 엄청난 비극도 겪어봤습니다.

그런 이유로 왜 아직도 우리 등에 38선이 그어졌는지 깊이 생각해 봐야 합니다. 거기서 종교적 체험이 있을 때까지 말입니다.

앞에서 역사는 심판이자 곧 예언이라고 언급했습니다. 한국전쟁 그날을 예언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한국전쟁은 완전히 새것을 세우라는 예언입니다. 새로운 시작예전에 보고 들은 것을 다 잊고 버려야 합니다.

 

포로들이 바빌론의 거대한 신전에 마음을 빼앗겼을지라도 그걸 다 잊고 버려야 하듯 지금 우리 역시 한국전쟁의 진실을 깨닫고 새 말씀새 형식붙잡아야 합니다. 전쟁은 안 된다 새 말씀, 분단을  녹이는 평화라는 새 형식 붙잡고 우리는 미래를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이것은 믿음 없이는 안 됩니다. 종교적 체험이 일어날 때까지 계속해야 합니다. 무슨 말씀이냐 하면 역사를 이끌어가는 주체는 하나님이심을 기억하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한국전쟁을 통해 무엇을 원하셨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예루살렘의 파괴와 멸망 너머에 새로운 역사의 여명떠오른 것처럼, 어쩌면 한국전쟁이 새 시대와 새 나라를 여는 역사의 문임을 암시한 게 아니었을까요. 한국전쟁이 역사의 화석처럼 굳어버려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한반도에 새로운 나라대동 세상(공동체)어떻게 실현해 갈 것인지, 한국전쟁을 통해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기도 / 역사의 주체가 되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한국전쟁을 통해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이에 우리는 분명하게 대답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전쟁은 안 된다는 믿음과 평화만이 새 나라와 대동 세상을 이루는 첩경임을 깨닫습니다. 어스름하게 밝아오는 새벽빛이 우리 앞에 있음을 깨닫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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