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바카라의 결론을 안다.
독립시행을 알고, 확률이 끝내 수렴한다는 것을 안다. 카드가 과거를 기억하지 않는다는 것도, 그 망각이 수많은 사람을 삼킨 착각의 구조라는 것도 안다. 탐욕이 빚어내는 환상을 충분히 보아 왔다.
그럼에도 어떤 날은 두려움이 찾아온다.
이 두려움은 무지에서 오지 않는다. 너무 많이 알기 때문에 생긴다.
카지노의 공기는 독특하다. 욕망과 절망이 한 공간에 응축되어 있다. 누군가는 웃고, 누군가는 침묵 속에서 무너진다. 돈은 숫자가 아니라 감정이 되고, 시간은 다른 속도로 흐른다.
이성은 말한다. "결론은 이미 나와 있다."
몸은 다른 언어를 쓴다. 본능은 그곳을 오락의 장소가 아니라 불확실성이 농축된 장소로 읽는다. 찰나의 선택이 큰 결과를 만드는 환경에서 신경계는 긴장한다.
비합리가 아니라 오래된 생존의 흔적이다.
또 다른 두려움은 유한함에서 온다.
통계는 무한한 시행을 말한다. 수렴은 충분히 긴 시간을 전제한다. 그러나 나는 무한하지 않다. 자본도, 시간도, 집중력도, 감정도 한계를 가진다.
여기서 나는 오래 속아 왔다.
유한함을 견딤의 문제로 읽었다.
거친 파도를 끝까지 버틸 수 있는가,
하고 물었다.
그러나 유한함과 음의 기댓값이 함께 던지는 질문은 견딤이 아니다. 파도는 시험이 아니라 장치다. 유한한 자를 골라내기 위해 설계된 장치.
견딤의 서사는 예정된 결과를 인내력의 시험으로 둔갑시킨다. 거기서 패배는 성격의 문제가 되고, 나는 다시 영웅이 된다. 두려움이 가장 먼저 해체해야 할 것이 바로 그 영웅화다.
그리고 가장 깊은 두려움은 언제나 안을 향한다.
카드가 두려운 것이 아니다. 변동성이 두려운 것도 아니다. 두려운 것은 감정이 이성을 앞질러 달려 나가는 순간의 나 자신이다.
원칙을 세워 두고도 한 번의 흔들림으로 그것을 무너뜨릴 수 있는 존재가 자신이라는 사실.
이 두려움은 정직하다. 그래서 단 하나의 행동을 요구한다.
많은 사람은 두려움을 극복할 대상이라 여긴다. 그러나 모든 두려움이 적은 아니다. 어떤 두려움은 멈춰야 할 순간을 알려 준다. 어떤 두려움은 선을 넘지 않게 한다.
그러나 멈추게 하지 않는 두려움은 두려움이 아니다. 곁에 두고 함께 걸어가는 두려움은 이미 통행증이 된 두려움이다. 두려움을 길들여 동반자로 삼는 순간, 그것은 나를 세우는 대신 나를 데리고 간다.
그래서 나는 두려움을 곁에 두지 않는다.
그것이 말할 때, 나는 자세를 바꾸지 않고 자리를 바꾼다.
두려움의 유일한 정직한 번역은 이탈이다. 멈춤도, 인정도, 응시도 아니다. 그것들은 모두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고, 밖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두려움이 진짜였는지는 오직 하나로 증명된다. 내가 그 자리에서 일어섰는가.
두려움이 사라진 사람은 용감한 사람이 아니라 위험을 보지 못하는 사람일지 모른다. 그러나 두려움을 인정한 채 앉아 있는 사람 또한, 두려움을 본 것이 아니라 두려움과 협상한 것이다.
진짜 이성은 두려움이 없는 상태가 아니다.
두려움을 인정한 채 앞으로 걸어가는 상태도 아니다.
그것은 두려움이 가리키는 문을 향해 몸을 돌리는, 단 한 번의 동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