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가 가까워지는 시애틀의 저녁은 선선합니다. 열어둔 창문으로 넘실넘실 넘어오는 바람이 시원합니다. 길게 끌리는 저녁의 그림자, 그리고 황금빛 저녁 햇살은 6월의 느낌을 그대로 전해주는 것 같습니다. 집안 곳곳에 부딪혀 부서지는 햇살이 만들어내는 잔잔함은 이 저녁을 더 평화로운 것으로 만들어줍니다.
그냥 자연스럽게 와인 한 잔 마시고 싶은 그런 저녁이네요. 오늘은 낮에 파스타를 만들었는데, 맛은 좋았고 같이 맞춘 와인도 좋았는데 이상하게 배가 금세 불러서 많이 먹지 못하고 와인도 두 잔 마시고 말았습니다. 나이 탓인가? 아무튼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랜만에 체육관에 가서 역기를 치고, 아령을 치고 샤워하고 들어왔더니 다시 조금 뭔가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날씨가 이래서 그런지, 산도 있는 와인들이 그동안 땡겼고, 그 때문인가? 이탈리안 와인을 꽤 많이 마셨습니다. 특히 코스트코의 커클랜드 시그내처 키안티 클라시코 리제르바 2023은 제가 코스트코 갈 때마다 한두병씩 사가지고 와서 거의 매일 조금씩 마실 정도로 입맛에 맞는 와인이 되어 버렸습니다. 늘 무거운 카버네 소비뇽이나 시라 중심의 입맛 프로파일이 조금씩 변하고 있다는 건 알았지만, 그것이 산지오베세에 가서 꽂힐줄은 몰랐죠. 아무래도 이태리로의 여행이 제 입맛을 바꿔 놓은 것이겠지요?
Qualcosa di semplice, 음식조차 뭔가 가벼운 것을 좋아하게 되고, 그러다보니 여기에 맞추게 되는 와인 역시 가벼운 것으로 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늘 스테이크를 굽고 여기에 맞출 무게 있고 구조감 확실한 와인들이 좋았는데, 지금은 토스카나의 얼굴이라 할 수 있는 산지오베세, 혹은 피노느와가 더 좋아지네요.
와인이란 술이 갖는 특징 중 하나가 '평생 배우는 술'이란 느낌을 갖게 된다는 겁니다. 오늘은 얼마 전 캐나다 국경을 넘으며 면세점에서 샀던 Batasiolo Barbera d’Alba 2023 을 뜯었습니다. 바타시올로는 피에몬테, 특히 알바 주변 랑게 지역의 바르베라 품종 100% 와인입니다. 생산자는 Beni di Batasiolo / Batasiolo이고, 바롤로·바르바레스코도 만드는 꽤 알려진 피에몬테 생산자이고, 공식 설명에서도 이 와인은 랑게 지역 와인이고, Barbera d’Alba DOC 2023은 스테인리스와 슬라보니아 오크에서 숙성한다고 나옵니다.
이 와인의 핵심은 산미예요. 네비올로처럼 장미·타르·강한 탄닌으로 가는 와인이 아니라, 바르베라는 보통 체리, 자두, 붉은 과일, 약간의 허브, 그리고 입맛을 확 돋우는 산도가 매력입니다. 탄닌은 비교적 부드럽고, 음식하고 붙으면 확 살아나는 타입이에요. 공식 수입사 설명도 루비색, 붉은 과일과 허브 향, 밝은 산미와 섬세한 탄닌 쪽으로 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럴까요. 산지오베세와는 또 다른 멋을 보여주네요. 이 와인이 이상하게 조금 더 달콤하게 느껴진달까요. 키안티 클라시코가 흙의 느낌이 조금 있다면, 바르베라는 그 부분이 체리의 느낌을 더 강하게 낸달까요. 아무튼 바롤로를 만들어내는 그 지역에서, 매일 마시긴 버거운 바롤로 대신 매일 저녁 식사에 곁들이는 와인이란 느낌을 확실하게 주네요.
파스타를 만들 때 요즘은 페코리노 로마노 치즈를 갈아서 씁니다. 양젖 치즈의 강렬함과 짭짤함이 이태리 와인의 새콤함을 만나면 그것이 입안에서 달콤함으로 변해버리는 경험을 합니다. 참 오랜만에 요즘은 와인의 세계로 다시 돌아왔구나, 그런 실감을 하는 요즘입니다.
시애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