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6월 7일(주)
* 시작 기도
주님...
하나님께서는 가나안을 바라보고 모압 땅에 도착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세를 통하여 영생을 말씀하셨습니다.
(신 11:21) 그리하면(너희가 나의 말을 항상 기억하고 준행하면) 여호와께서 너희 조상들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서 너희의 날과 너희의 자녀의 날이 많아서 하늘이 땅을 덮는 날과 같으리라.
하늘이 땅을 덮는 날과 같을 것이라는 말씀은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날들로서 하늘의 날들과 같이 영원할 것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이는 단지 육신이 오래 사는 장수의 의미가 아니라 이 땅에서도 영생을 맛보며 살 수 있다는 영생의 약속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였지만(요 5:39), 그 말씀이 가리키는 궁극적인 지점인 그리스도께로 나아오지 않아 오히려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자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들만 아니라 바로 내가 그런 자였음을 고백합니다.
나의 어리석고 패역한 옛 사람으로 인함입니다.
이런 나는 마땅히 죽어야 할 자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나를 아주 진멸하지 않으시고 복음을 통하여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셨습니다.
하여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어주소서.
내 안에 유대인과 똑같은 성정이 있음을 인정하오니 오늘 이 하루도 나의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아 나는 죽고 오직 예수로 부요한 자로 살게 하옵소서.
주의 보혈로 나를 씻어 정결한 주의 신부로 세우소서.
오늘 하루도 주님이 주신 새 날 곧 주의 날이오니 주님과 연합하여 동행하는 시간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고전 13:1-7
제목 : 사랑이 없으면...
1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2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 나의 묵상
사도 바울은 8장부터 12장까지 여러 가지 주제를 가지고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목회적 가르침을 준다.
이는 우상 제물을 먹을 수 있느냐 하는 문제이다.
그리고 여자가 공적 모임에서 머리를 가리는 수건을 벗는 것이 옳은가 하는 문제이다.
또한 교회에서 만찬을 할 때 음식을 가져온 사람이 먼저 먹어버려서 어떤 사람은 배부르고 취하며 어떤 사람은 배가 고파서 부끄러움을 당하기도 한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주의 만찬 곧 성만찬으로 발전시켜 설명한다.
이런 것은 곧 모든 성도가 주의 몸으로써 한 몸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몸을 찢어버리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따라서 배가 고파서 먹어야 할 자는 집에 가서 먹을 것이며 교회 안에서 성만찬으로 먹으려면 서로를 기다리라고 권면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고린도 교회에는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다양한 은사 곧 성령의 선물을 주셨다.
그런데 이런 은사로 인하여 교회가 서로 질투하고 시기하며 내가 가진 은사가 더 낫다, 아니다 나의 은사가 더 낫다고 하면서 다툼의 자리가 되고 만 것이다.
그러나 주께서 주시는 이런 은사와 직분 그리고 사역은 교회를 하나 되도록 하기 위한 주님의 은혜임을 그들은 알지 못하였다.
(12:7)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몸에는 여러 지체가 있다.
물론 어떤 지체는 다른 지체에 비해서 덜 쓰이기도 하고 덜 중요해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아무리 작고 약하게 보이는 지체라 할지라도 오히려 이 지체가 더 요긴하게 쓰이는 경우가 허다하다.
따라서 큰 지체나 작은 지체, 많이 쓰이는 지체나 적게 쓰이는 지체, 중요성이 큰 지체나 중요성이 적은 지체 등 다양한 종류의 지체들처럼 보일지라도 그 어느 것 하나 쓸모없는 지체는 없다는 말이다.
아무리 크고 중요한 지체라 할지라도 자기 혼자 할 수 있는 일들도 있지만 반대로 작은 지체의 도움이 필요한 경우가 훨씬 많은 것이다.
눈이 몸의 가장 높은 곳에 있고 눈이 있어야 모든 것을 볼 수 있다 하더라도 지체의 가장 아랫부분에 위치해 있으면서 온갖 곳을 다니는 발이 없다면 눈 역시 별 의미가 없어지고 말 것이다.
발의 수고로 인하여 한 곳만 아니라 다양한 곳을 볼 수 있으며 그것을 보고 또 다른 곳을 보기 위하여서는 발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지체는 너는 쓸 데가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자격이 없다.
(12:20-21)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지 못하리라.
중요한 것은 모든 지체는 나름대로의 존재 가치를 가지고 있고 자기 나름대로 맡은 일을 수행하므로 한 몸을 더 한 몸 되게 한다.
그런데 자기의 역할을 잘 수행한다 할지라도 잘못하면 그것을 자기 자신의 의를 드러내는 모순에 빠지고 말 것이다.
바울이 몸의 지체에 대해서 장황하게 설명하는 것은 몸과 지체를 말하고자 함이 아니라 곧 그리스도와 몸의 관계를 말하고자 함이다.
그리스도는 머리요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이 몸은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여서 교회를 이루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각종 은사와 직분 그리고 사역을 통하여 교회 공동체가 한 몸으로써 아름답게 세워지는 것이다.
아무리 내가 멋지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은사를 가졌다 할지라도 그것은 나의 유익을 위함이 아니라 남의 유익을 위한 것이요 그것은 곧 교회 공동체를 온전히 세우기 위해서 필요한 유익이다.
따라서 한 사람에게 주신 은사를 자기의 뜻대로 유익하게 쓸 수 있지만 자칫 잘못하면 그것은 자기의 이름을 드러내는 자기 義의 수단으로 전락하고 말 위험도 큰 것이다.
이런 은사가 다 중요하지만 이 은사보다 더 큰 은사가 있는데 그 은사를 사모하라고 바울은 12:31절에서 강조하고 있다.
(12:31)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아무리 내게 있는 하나의 은사가 귀하고 소중해도 그 안에 더 큰 은사 곧 ‘사랑’으로 버무려지지 않으면 그것은 손가락 없는 손이 되고 말 것이다.
손이 있어도 손가락이 없다면 그 손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
사용하기도 힘들고 때로는 하고 싶은 일을 제대로 할 수 없기 때문에 짜증도 날 것이다.
그러나 내게 주신 크고 작은 은사에 주님의 사랑을 더하면 그 은사는 배가 되며 사랑이라는 시멘트가 여타 모든 은사들을 하나로 엮어주는 강력한 접착제 역할을 해 주는 것이다.
건축하는 일에 아무리 돌이 많고 모래가 많고 물이 풍부해도 거기에 시멘트가 없으면 이것들을 하나로 뭉칠 수가 없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바로 이런 시멘트의 역할을 하는 것이 곧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인 것이다.
그래서 사람의 방언, 천사의 아름다운 말을 잘 한다고 해도 사랑이 없다면 그것은 소리 나는 구리나 시끄러움만 자아내는 꽹과리 소리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예언하는 능력이나 모든 비밀과 지식을 알고 있으며 심지어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 있다 할지라도 그 안에 사랑이 없으면 그것 역시 ‘Nothing’ 곧 아무 것도 아니다.
나의 모든 재산을 털어서 구제를 하고 자신의 몸을 불사르는 데까지 내어준다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그것은 자기의 의를 드러내는 일일 뿐 아무런 유익을 나타내지 못한다.
이런 주님의 사랑은 오래 참는다.
이런 주님의 사랑은 온유하다.
주님의 사랑은 시기하거나 자랑하거나 교만하지 않는다.
주님의 사랑은 무례하게 굴지 않으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남의 유익을 구한다.
주님의 사랑은 성내지 않고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
주님의 사랑은 불의한 것들을 기뻐하지 않으며 진리를 기뻐한다.
주님의 사랑은 모든 것을 참는 오래 참음 그 자체이다.
주님의 사랑은 불신이 아니라 모든 것을 믿는다.
주님의 사랑은 모든 것을 만물 안이 아니라 만물 위의 하나님 나라를 바란다.
주님의 사랑은 그 소망을 위하여 견딜 수 있다.
나는 고린도전서 12장인 은사장과 13장인 사랑장을 따로 분리하여 생각했던 자이다.
그래서 12장의 연속선상에서 이어지는 은사의 한 종류로써 사랑을 이해하였다.
그러나 12장의 은사가 정말 중요하며 아름답고 유익한 것이지만 이 은사들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진짜 은사가 되기 위해서는 13장의 사랑, 곧 예수 그리스도의 속성인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뛰어넘는 진리를 다시 한 번 깨닫는다.
사랑이 없어도 얼마든지 사람들은 자신의 재능이나 특기를 가지고 사람들과 하나되는 공동체를 만들 수 있다.
그러나 그 공동체는 사실 무너질 위험을 늘 안고 있는 무기와 같다.
이런 것처럼 교회 공동체가 주님의 사랑으로 어우러지지 않는다면 아무리 능력 있고 앉은뱅이를 벌떡 일으키는 신유의 은사나 출중한 방언이나 방언 통역의 은사가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결국 자기 자신의 의를 드러내는 수단이 될 뿐, 하나님 나라의 유익을 위해서는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들 안에는 날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무덤에 장사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적 사랑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주님의 사랑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신 그 사랑’이다.
세상을 사랑하신 사랑이란 자기를 십자가에 걸어버린 자기희생적 사랑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요 3:16).
(요 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이 사랑 역시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신의 몸 곧 생명을 주심 같이 우리도 서로를 사랑하라는 말씀이시다.
(요 15: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는 창세전부터,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공생애의 모든 사역을 마치기까지 단 한 번도 하나님 아버지와 분리된 적이 없으셨다.
그것은 곧 아버지의 계명에 철저히 복종하셨음을 의미한다.
그런 복종에 아버지는 자기 자신을 다 내어주시는 사랑을 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아버지의 생명을 아들에게 주신 것이며, 그 사랑의 본질은 곧 영광이다.
그와 동일하게 비록 완전할 수는 없지만 우리 역시 아들의 계명을 지키며 복종할 때 아들의 사랑을 우리에게도 주신다.
그것이 바로 아들의 생명이며 그 안에 아버지의 영광이 임한다.
주님의 계명은 구약시대와 같이 율법을 하나하나 지켜서 철저한 율법주의자가 되라는 것이 절대 아니다.
주님의 계명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새 언약 백성에게 주시는 조건의 규정인 ‘새 계명’이다(요 13:34).
(요 15: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심지어 사도 요한이 쓴 요한 일서에서는 사랑하는 것이 곧 생명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요일 3:14)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형제를 사랑하는 사랑의 내용과 주체는 내가 아니라 내 안에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시다.
그분의 사랑으로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다.
이는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비추는 역할을 내가 해야 함을 의미한다.
사도 선지자 교사 목사와 같은 직분은 정말 귀하다.
말씀을 전하며 그 말씀으로 주님을 알게 하기 때문이다.
또한 병을 고치는 신유의 은사, 서로 돕는 자기희생, 잘 다스리고 이끄는 능력, 방언을 말하는 것, 방언을 통역하는 것, 예언의 은사 등은 그야말로 모두가 사모하는 은사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은사에 주님의 사랑이 어우러지지 않으면 그 은사와 직분은 주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결국 자기 자신을 위한 은사와 직분이 되고 마는 것이다.
나의 이름을 드러내고 나의 명성이 높아지며 ‘나!나!나!’ 하면서 주의 복음을 전하는 것 같지만, 결국 ‘내가복음’을 전하여 내가 주인이 되고 마는 것이다.
굳이 다른 사람의 예를 들지 않을지라도 나는 목사와 선교사로써 복음을 알기 전까지 숫자에 매몰되어 어떻게 해서든지 교회의 교인 숫자를 늘리는 것에 사명을 가지고 집중했던 자이다.
문제는 그런다고 해서 내가 원하는 대로 숫자가 늘어나는 것이 아니었다.
물론 다른 이들은 그렇게 해서 엄청난 교인 숫자를 늘리는데 성공한 이들도 있다.
문제는 내 안에 그런 사람들을 보면 시기와 질투로 가득해지는 것을 느낀다는 것이다.
겉으로 표현은 하지 않지만 나의 속에서는 부글부글 끓고 있는 것이다.
이 안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있다는 것은 거짓이요 어불성설이 아닐 수 없다.
목사니까 사랑을 말하고 사랑을 강조하지만, 내 안에 사랑, 곧 형제를 사랑하는 주님의 사랑이 없는데 어떻게 이 말이 생명이 될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허공에 날리는 티끌에 지나지 않으며 지나가는 그림자요 뜬구름을 잡는 것에 다름 아닐 것이다.
나에게도 남들에게 없는 은사가 왜 없겠는가?
그런데 그런 은사들은 정말 남의 유익을 위하여 구하거나 주님을 위하여 사용한 것이 아니었다.
성과를 나타내면 여지없이 내 이름이 드러나고, 그것으로 어깨를 으쓱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런 내가 어떻게 목사가 되고 선교사가 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다.
그런데 주님은 결코 실수하지 않는 분이시다.
비록 내가 나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기 위하여 내게 주신 선물을 나를 위하여 사용했지만, 어느 순간 주님께서는 그것이 잘못되었음을 복음을 통해서 깨닫게 하셨다.
그 복음은 내게 심판으로 다가왔으며 그 심판은 비록 내게 고통이었으나 나를 살리는 징계였음을 알게 되었다.
주님의 사랑이 내게 생명을 주심 같이 나 또한 주님의 생명의 자리 곧 십자가와 무덤의 심판의 자리에 주님과 함께 하며 그곳에서 말씀으로 주님과 교제하는 연합의 자리를 이루었다.
주님께서는 가만히 계시는 것이 아니라 그런 나를 위하여 그 무덤에서 성소를 지으셨고 그 성소는 주님과 내가 더 가까이 사귐을 가질 수 있는 좌소(座所)였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나를 온전히 내어 맡길 수 있는 주님의 품속이었다.
이제 나는 겉으로 드러나는 내 이름을 두려워한다.
내가 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하셨음을 인정하며 그것이 진짜 주님의 사랑으로 내게 주신 은사와 직분 그리고 사역이 주님의 것으로써 형제를 위하여 사용하게 하시는 주님의 강권하심이다.
한 마디로 주님의 사랑이 나를 강권하시는 것이다.
나는 날마다 죽고 오직 예수로 부요한 자가 되기를 소원한다.
날마다 말씀을 먹는 것이 생명의 양식임을 강조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콧방귀도 뀌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을 비웃거나 비아냥대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 역시 그들 나름대로 주님이 주신 은사가 있기 때문에 그 은사 안에 주님의 사랑으로 잘 버무려지길 원하는 마음 간절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다보면 말씀 곧 복음이 생명이요 이 말씀은 먹어도 되고 안 먹어도 되는 선택적 양식이 아님을 알게 될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
그리하여 주의 사랑으로 잘 버무려진 주의 자녀들이 되기를.....
* 묵상 후 기도
주님...
은사는 나를 위하여 주신 선물이 아니라 남의 유익을 위하고 무엇보다 교회 공동체가 주의 몸 된 교회로 하나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임을 믿습니다.
무지하여 나에게 주신 은사와 직분 그리고 사역을 나의 이름을 드러내는 도구로 이용했던 나는 죽기에만 합당한 자임을 고백하나이다.
말씀은 그 자체로 주님이신데, 내가 이 말씀을 이용하여 나의 이름을 드러내고 나의 유익을 위하여 사용하는데 앞장 선 것은 솔직히 주님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겉으로는 주님의 사랑을 말하고, 주님의 은혜를 말하면서도 그것에 내 이름이 드러나지 않으면 얼마나 속상해 하고 절망에 빠졌었던지요?
이런 무뢰한이 세상에 어디 있겠나이까?
이제 이런 나는 주의 심판으로 죽었사오니 오늘도 그 심판의 십자가와 무덤에 주님과 연합하여 하나 되기를 원합니다.
그곳이 주님과 함께하는 좌소가 되게 하시고 그 자리에서 날마다 말씀을 먹고 생명으로 살 수 있게 하옵소서.
주님의 사랑이 나를 강권하시오니, 나는 죽고 오직 주님만 드러나게 하소서.
그 사랑으로 다른 모든 이들이 주의 사랑 안에서 하나 되게 하시고 교회 공동체, 영생의 공동체, 주님의 생명으로 하나 된 생명의 공동체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