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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은 나를 몰랐다

작성자술랑이|작성시간26.06.06|조회수21 목록 댓글 0



제 1장  봄비

칠십이 넘은 노인이 처음으로 그것을 
느낀 것은 봄비가 내리던 오후였다. 

이름은 강한수. 
젊어서는 어떤 회사의 중간 
관리자였고, 

나이 들어서는 그냥 평범한 
노인이었다. 

 
평범하다는 것이 때로는 가장 묵직한 
말이라는 것을 그는 칠십이 되어서야 
알았다.

한수는 오랫동안 어느 산간 작은 
교회의 일을 도왔다. 

교회라 해도 신자가 스무 명이 채 
되지 않는 곳이었다. 

 
목사님은 몸이 좋지 않았고, 
예배당 지붕은 비가 오면 새는 곳이 
생겼다. 

한수는 자기 연금의 절반을 
그 수리에 썼다. 

 
아내는 말렸다. 
자식들도 말렸다.


'당신 능력 밖의 일 아니오.'

아내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그것은 능력 밖의 일이었다. 
그러나 한수는 그냥 했다. 
 
이유를 설명할 수 없었다. 
해야 할 것 같았다. 
마치 오래전 심어진 씨앗이 이제야 
싹을 틔우는 것처럼, 

그 일이 자신에게 왔다고 느꼈다.

수리를 마치고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한수는 창밖을 보았다. 

봄비가 내리고 있었다. 

논바닥에 빗물이 고이고, 
논두렁에는 파릇한 것들이 
돋아나고 있었다. 

 
그것들은 아무도 심지 않았는데 
거기 있었다. 

한수는 그것이 무엇을 닮았는지 
생각했지만, 

이름을 대지 못했다.
 

제 2장  모르는 번호

한 달 뒤,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경상도 말씨를 가진 여자의 
목소리였다. 

자신은 한수가 도운 그 교회 
목사님의 딸이라고 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고, 
마지막에 한수 씨 이야기를 하셨다고 
했다.


'아버지가 그러셨어요. 
저 분은 아무 이유 없이 도와주셨다고. 
그런 사람이 세상에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고.'


한수는 수화기를 들고 오래 침묵했다. 
그가 한 일은 교회 지붕을 고친 
것뿐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한 사람의 마지막 
기억에 닿아 있었다. 

사람이 한 일이 어디까지 가는지는, 
한 사람이 알 수 없는 것이었다.

전화를 끊고 한수는 마루에 앉았다. 
아내가 차를 가져왔다. 
한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내도 묻지 않았다. 
오래 함께 산 사람들은 그런 침묵을 
안다. 

무거운 것이 와 닿았을 때의 침묵. 

그 침묵은 슬프지 않았다. 
다만 깊었다.
 

제 3장  빈자리

그해 여름 한수에게 문제가 생겼다. 
오래 살던 집의 계약이 만료되었고, 
임대료가 크게 올라 더는 그 집에 
있을 수 없었다. 

 
자식들에게 손 벌리는 것이 싫었다. 
혼자 알아보았지만 서울 외곽도 
쉽지 않았다.


아내는 여동생 집에 잠시 신세를 
지자고 했지만, 

한수는 고개를 저었다. 

그것만은 하고 싶지 않았다. 
이유를 설명할 수 없었다. 
그냥 그것만은 싫었다. 
 
자존심인지 고집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그 벽 앞에 서면 온몸이 굳는 
것을 느꼈다.


기도를 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기도는 말이 아니었다. 
 
그냥 하나님 앞에 그 막막함을 
그대로 가져다 놓는 것이었다. 

해결해 달라는 요청도 아니었다. 

이것이 이렇습니다, 
라는 보고 같은 것이었다. 

부끄럽지 않은 보고였다.

며칠 뒤, 
경상도 말씨의 그 여자에게서 
다시 연락이 왔다.

아버지가 남긴 집이 있는데, 
한동안 비어 있다고. 

형편이 닿는다면 저렴하게 
쓸 의향이 있느냐고. 

한수는 처음에 거절하려 했다. 
 
그러나 목소리의 온기가 
그것을 막았다. 

그것은 호의였다. 
순수한 호의였다.
 

제 4장  다른 동네

경상북도 어느 작은 면 소재지. 
한수와 아내는 그 집으로 이사했다. 
낡은 집이었지만, 마당이 있었다. 
 
마당에 감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한수는 오랫동안 마당이 있는 집을 
꿈꾼 적이 없었는데, 

막상 마당을 갖고 나니, 
이것을 원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동네 사람들은 낯선 노인 부부를 
처음에 멀리서 보았다. 

그러나 한수는 먼저 인사를 했다. 
 
장 보러 나가다 마주치는 노인들에게, 
아침 산책 중에 마주치는 아이들에게.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냥 그리하고 싶었다.

가을이 오자 감이 익었다. 
혼자 다 먹을 수 없는 양이었다. 
한수는 감을 따서 이웃집 문 앞에 
놓아두었다. 

 
이름을 쓰지 않았다. 
누가 놓았는지 알릴 필요가 없었다. 
감은 그냥 거기 있으면 되었다. 

사람도 그냥 거기 있으면 되는 
때가 있다.


이웃집 할머니가 며칠 뒤 국화꽃 
한 단을 마당에 놓아두었다. 

역시 이름이 없었다. 

한수는 그것을 들여다보며 웃었다. 
아내도 웃었다. 

이름 없는 것들 사이에서 무언가가 
생겨나고 있었다.

 

제 5장  긍휼이 무엇인지

겨울 어느 날 저녁, 
한수는 혼자 앉아 성경을 펼쳤다. 
 
마태복음 5장. 
산상수훈. 

오래전에 읽었던 말씀들이 이제는 
다르게 읽혔다. 

글자는 같았지만 무게가 달랐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한수는 이 말씀이 한때는 도덕률처럼 
들렸다.

착하게 살면 잘 된다는 뜻으로 읽혔다. 
 
그러나 이제는 달랐다. 
이것은 마음의 구조에 관한 말이었다. 
 
긍휼한 마음은 열려 있는 마음이다. 
열려 있는 마음에는 들어올 수 있다. 
닫혀 있는 마음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못한다.


한수는 자신이 교회 지붕을 고쳤을 때, 
그것이 긍휼이었는지 확신하지 못했다. 
어쩌면 그냥 충동이었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 충동이 마음을 열게 했고, 
열린 마음이 모르는 사람의 손을 
받아들이게 했고, 

그 손이 지금 이 마당과 감나무와 
이름 없는 꽃 한 단까지 이어졌다.


하나님은 참 먼 길로 오신다고 
한수는 생각했다.

아니, 먼 길이 아니라, 
예상 못한 길로 오신다. 
 
예상 못한 길이라서 더 놀랍고, 
더 감사하다. 
예상대로 오셨다면 그냥 당연한 것이 
되었을 것이다.

예상을 벗어나셨기 때문에 은혜가
된 것이다.

 

제 6장  모르는 사람

이듬해 봄, 
한수는 동네 산길에서 지팡이를 짚은 
낯선 노인을 만났다.

발목을 다친 것 같았다. 

한수는 그를 부축해 면소재지 
병원까지 데려다주었다. 

두 시간이 걸렸다.

그 노인은 고마워하면서 물었다. 
어디서 왔냐고. 

서울에서 왔다고 했다. 

왜 여기 사냐고. 
 
한수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어떤 사람이 집을 내주었다고. 
 
왜 내주었냐고. 

이유는 없었다고. 
그냥 그리했다고.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래 산 사람의 고개 끄덕임이었다. 
많은 말이 필요 없는 고개 끄덕임. 

세상에는 이유 없이 선한 일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의 표정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한수는 걸으면서 생각했다.

자신이 교회 지붕을 고친 것. 
경상도 여자가 집을 내준 것. 
자신이 낯선 노인을 부축한 것. 

이것들이 이어져 있는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어쩌면 이어져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느낌이 있었다.


느낌이란 증명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오래 산 사람은 안다. 

증명할 수 없는 것들이 종종 
가장 진실하다는 것을. 

보이지 않는 손이 
세상을 움직인다는 것을. 

그 손이 우리를 통해 지나간다는 것을.

한수는 마당으로 들어섰다. 
감나무에 새순이 돋아나고 있었다. 

아내가 마루에 앉아 뜨개질을 
하고 있었다. 

봄 햇살이 마당 가득 내려와 있었다.
 
한수는 그 햇살 속에 잠시 서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거기 서 있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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