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텅 빈 잔에 고이는 만나

작성자술랑이|작성시간26.06.09|조회수23 목록 댓글 0

 


그날 오후, 도시는 바람 한 점 없이 고요했다.
고요하다는 말은 대개 평화롭다는 말과 함께 묶여 다니지만,
그녀는 이제 그 둘이 같은 뜻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창밖 아파트 단지의 나무들은 잎새 하나 흔들지 않았고,
먼 회색 하늘 아래 사람들은 저마다의 속도로 걸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녀는 알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날들이야말로,
가장 천천히 무너지는 날들이라는 것을.

식탁 위에는 반쯤 식은 보리차 한 잔이 놓여 있었다.
잔의 표면은 미동도 없이 고여 있었다.

 


그녀는 한참 동안 그 물을 바라보았다.
흔들리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저것을 평화라고 부를 수 있을까.

아니, 저것은 그저 움직임을 멈춘 상태일 뿐이었다.
생명이 아니라 정지, 화해가 아니라 보류, 사랑이 아니라 유예.

정연은 천천히 의자에 기대앉았다.
나이 들어 간다는 것은, 마음의 사전이 바뀌는 일인지도 몰랐다.

젊은 시절의 자신은 다투지 않으면 평화로운 줄 알았다.
목소리를 낮추고, 서운함을 삼키고, 관계의 금이 더 벌어지지 않도록 가만히 있는 것.


그것이 어른의 지혜이고 신앙의 인내이며 삶의 품위인 줄 믿었다.
그러나 그 오래된 믿음은 해마다 조금씩, 아주 조용히 무너졌다.

사람의 마음은 방치된 정원과 같았다.
처음에는 아무 일도 없어 보인다.


그러나 하루, 이틀, 한 달, 일 년이 지나면 잡초가 먼저 자란다.
돌보지 않은 틈으로 습기가 스며들고,
오해가 뿌리를 내리고, 침묵은 점점 차가운 이끼처럼 관계의 벽을 덮는다.

 


싸우지 않았는데 멀어지는 사람들이 있었다.
상처 주지 않았는데 사라지는 마음들이 있었다.


평화라고 믿었던 침묵이 실은 무질서의 다른 이름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정연은 오래도록 창밖만 바라보았다.

그녀의 전화기에는 며칠 전부터 같은 이름이 떠올랐다가 사라지곤 했다.
'문희 언니.'

교회에서 한때 누구보다 환하게 웃던 사람이었다.
꽃꽂이를 맡아 예배당 앞자리를 늘 향으로 채우던 손,
누군가의 생일이면 가장 먼저 미역국을 끓여 문 앞에 놓고 오던 마음.

그런데 남편을 먼저 보내고 난 뒤,
문희는 조금씩 자취를 감추었다.
예배에도 드문드문 나오더니, 이제는 연락조차 쉽지 않았다.

 


사람들은 말했다. 시간이 필요하겠지요.
혼자 있고 싶으시겠지요.
조용히 두는 것이 배려겠지요.

정연도 한동안 그렇게 생각했다.
어쩌면 그 '조용히 둠'이 문희를 더 깊은 적막 속으로 밀어 넣고 있었는지도 모른 채.

그녀는 전화기를 손에 쥐었다가 내려놓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잘 지내세요, 라고 묻는 말은 너무 얇았다.
힘내세요, 라는 위로는 때로 상대의 슬픔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의 조급한 주문처럼 들렸다.
기도하고 있어요, 라는 말조차 상대의 방 안까지 들어가지 못한 채 문 앞에서 맴돌다 돌아오는 것 같았다.

정연은 자신의 망설임을 오래 바라보았다.
그것은 배려가 아니라 두려움이었다.
타인의 슬픔 앞에서 자신이 무력한 존재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될까 두려운 마음.


차라리 가만히 있으면 실패하지 않는다.
그러나 가만히 있는 동안 누군가는 점점 더 깊은 어둠 속으로 가라앉는다.

창밖의 회색 빛이 방 안으로 번져들었다.
그녀는 문득 오래전에 읽은 과학책의 한 구절을 떠올렸다.

닫힌 계는 저절로 무질서해진다.
정돈된 것은 스스로 유지되지 않는다.


에너지가 공급되지 않으면,

모든 것은 흩어진다.

 

별의 불빛도,

정원의 꽃도,

사람의 관계도.


"그래, 그렇구나…"
그녀는 낮게 중얼거렸다.

 

평화는 정지 상태가 아니었다.
평화는 애써 가꾸는 질서였다.


무너져 가는 마음을 향해 한 걸음 더 다가가는 노동,
식어 가는 관계에 온기를 불어넣는 선택,
타인의 침묵 속으로 조심스럽게 들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는 용기.

피스키퍼(peacekeeper)는 흔들리지 않기를 바라지만,
피스메이커(peacemaker)는 흔들리는 세상 속으로 제 발로 들어간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그녀에게는 그럴 힘이 없었다.


정연은 손바닥으로 눈가를 눌렀다.

요즘 그녀 자신도 쉽게 지쳤다.

 


아침에 일어나 기도하다가도 마음이 흩어졌고,
식탁 앞에 앉아 있다가 문득 이유 없는 허기에 잠겼다.

사람들을 위로하려고 만나고 돌아오면, 정작 자신의 가슴에는 재만 남았다.
누군가의 슬픔을 조금 덜어 준 것 같다가도,
집으로 돌아와 혼자 불 꺼진 거실에 앉으면 자신이 텅 빈 그릇 같았다.

그녀는 그것을 나이 탓으로만 돌릴 수 없었다.
본래 인간이란, 스스로 빛나는 원천이 아니었다.
누군가를 데울 불이 되겠다고 나설수록 오히려 자신의 냉기를 깨닫게 된다.

 

타인의 마음을 살리고 싶다는 열망이 클수록,
내 안에 생명을 지속시킬 연료가 얼마나 적은지 더 선명하게 보였다.

정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작은 기도방으로 갔다.
기도방이라 해도 거창한 곳은 아니었다.

방 한쪽 벽 아래 낡은 나무 의자 하나,
성경책 한 권, 무릎담요,
그리고 창문 틈으로 오후의 빛이 조금 들어오는 자리.


젊은 날부터 그곳은 그녀가 가장 자주 무너지고,

또 가장 자주 다시 일어서는 자리였다.

 


의자 앞에 무릎을 꿇자 오래 묵은 나무 냄새가 났다.
말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그저 마음속에 메마른 돌밭 같은 침묵만 펼쳐졌다.

그녀는 두 손을 모은 채 한참을 있었다. 그러다 겨우 입술을 열었다.
"아버지…"
그 한마디를 꺼내는 데도 시간이 필요했다.


그녀는 갑자기 눈물이 났다.
남을 위해 우는 눈물보다,

자기 자신의 바닥을 볼 때 흘리는 눈물이 더 뜨겁다는 것을 그날 알았다.

선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누군가에게 평화를 전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정직하게 말하면,


그녀는 자주 인색했고

자주 피곤했고

자주 도망치고 싶었다.

 

"제 안에는… 제 힘만으로는…"

말끝이 떨렸다.
기도는 대개 원하는 것을 구하는 행위라고들 하지만,
정연에게 기도는 먼저 자기가 누구인지 들키는 일이었다.


얼마나 빈약한지,

얼마나 쉽게 마르는지,
얼마나 사랑하고 싶으면서도 사랑할 수 없는지.

사람 앞에서는 차마 보일 수 없는 결핍이 하나님 앞에서는 문장보다 먼저 눈물로 번져 나왔다.
그녀는 오랫동안 고개를 숙인 채 있다가,
아주 천천히 말했다.

"오늘도 피스메이커로 살게 하시려면…
제 영혼에 만나를 내려주세요."

이상하게도 그 순간,
그녀의 마음에는 어린 시절 주일학교 벽그림 속 하얀 들판이 떠올랐다.

 


새벽마다 땅 위에 내려앉던 하늘의 양식.
사람이 땀으로 빚지 않은 것,
그러나 살아가기 위해 꼭 필요한 것.


노력과 공로가 아니라 은혜로만 받을 수 있는 것.
정연은 눈을 감은 채 속으로 셈했다.

하나, 둘, 셋… 열.
"만나 열 개를 주세요."

 


그 기도는 우스울 만큼 구체적이어서 오히려 진실했다.


막연히 힘을 달라고,
은혜를 달라고 하는 대신,
그녀는 자기 하루를 견디고 누군가에게 건넬 몫까지 계산하고 있었다.

열 개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홉 개는 오늘 자신의 마음을 다시 정돈하는 데 쓰고,
하나는 누군가에게 내어줄 수 있기를.

자신의 영혼이 먼저 정갈해져야 타인의 무질서를 끌어안을 수 있다는 것을,
그녀는 이미 여러 번의 실패 끝에 배웠다.


기도를 마치고 일어났을 때, 방 안의 빛은 조금 달라져 있었다.
세상이 갑자기 눈부셔진 것은 아니었다.

문희의 외로움이 사라진 것도 아니었고,
그녀 자신의 피로가 기적처럼 증발한 것도 아니었다.


다만 바닥이었던 마음 한쪽에,
설명할 수 없는 미세한 온기가 고이기 시작했다.
꼭 텅 빈 잔 바닥에 물 한 방울씩 모여드는 것처럼.

정연은 거실로 돌아와 다시 전화기를 들었다.
이번에는 내려놓지 않았다.


수신음이 두 번, 세 번 갔다.
끊길까 싶던 찰나, 아주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정연은 갑자기 준비해 두었던 말들을 모두 잊어버렸다.
잘 지내냐는 안부도, 교회 식구들이 보고 싶어 한다는 말도,
함께 식사하자는 제안도.


그 모든 적절한 문장들이 입안에서 부서졌다.
대신 그녀는 숨을 한번 고르고,
오래된 우물에서 길어 올리듯 조용히 말했다.

"언니, 오늘 하루가 너무 길지 않았어요?"

전화기 너머에서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처음에는 신호가 끊긴 줄 알았다.


그러나 이내 낮고 얕은 숨소리가 들려왔다.
사람은 슬플 때 대답 대신 숨으로 먼저 무너진다는 것을 정연은 처음 알았다.

한참 뒤, 문희가 말했다.
"응… 오늘은 좀 그랬어."

그 한마디에 정연은 알 수 있었다.
이 전화는 누군가를 구원하는 전화가 아니었다.
다만 깊은 물가에 홀로 앉아 있는 사람 곁으로 작은 의자 하나를 가져다 놓는 일에 가까웠다.

 

그날 그녀는 문희와 긴 통화를 하지 않았다.
찬송가를 부르지도 않았고,

섣부른 성경 구절을 꺼내 들지도 않았다.

그저 문희가 지난밤 잠들지 못했다는 이야기,
냉장고에 넣어 둔 반찬이 상해 버렸다는 이야기,
비어 있는 집이 저녁마다 너무 커 보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통화를 마칠 무렵, 정연은 말했다.

"내일 내가 국 끓여 갈게요.
문 앞에 두고 그냥 갈 수도 있고,
같이 먹을 수도 있고…


언니가 정해요."

문희는 잠시 침묵하다가,
아주 희미하게 웃는 소리를 냈다.
"국은… 같이 먹자."

전화를 끊은 뒤,
정연은 소파에 앉아 한동안 손에 쥔 전화기를 내려다보았다.
아무것도 대단한 일을 한 것 같지 않았다.


세상의 무질서를 줄이는 거대한 업적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녀의 마음은 조금 환해져 있었다.

자신이 문희에게 무언가를 준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늘로부터 받은 그 작은 만나 하나가 자신을 통과해 흘러간 것 같았다.

그녀는 문득 깨달았다.
피스메이커(peacemaker)란 세상을 통째로 고치는 사람이 아니라,
하루치 은혜를 받아 하루치 평화를 나누는 사람이라는 것을.

내일의 몫까지 쌓아둘 수는 없고,
평생의 어둠을 한 번에 밝힐 수도 없지만,
오늘 한 사람의 쓸쓸함 곁에 앉아 줄 수는 있다.


그것이면 충분할지도 모른다고,
그녀는 처음으로 생각했다.

다음 날 아침, 정연은 일찍 일어나 냄비에 국을 끓였다.
무를 썰고 파를 다듬고, 

소고기를 넣어 은근한 불에 오래 끓였다.
국물이 맑아질수록 그녀의 마음도 조금씩 투명해졌다.


창문으로 들어온 햇살이 싱크대 위에 흩어졌다.
어젯밤의 기도가 아직 사라지지 않은 듯,
그녀의 가슴 한쪽에는 잔잔한 질서가 자리 잡고 있었다.


문희의 집에 도착했을 때,

복도에는 오후의 빛이 사선으로 기울어 있었다.
문이 열리고,

수척해진 얼굴의 문희가 서 있었다.


두 사람은 한동안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다.
위로의 말은 여전히 많지 않았다.
그러나 말보다 먼저 전해지는 것이 있었다.

당신을 잊지 않았다는 사실.
당신의 쓸쓸함이 이 세상에 묻혀 버리도록 내버려두지 않겠다는 조용한 결심.

식탁에 마주 앉아 국을 떠먹는 동안,
문희는 몇 번 울었다가 몇 번 웃었다.
정연은 그 모든 순간을 조용히 받아냈다.

창밖에는 바람이 불기 시작했고,
나무 잎들이 서로의 몸을 스치며 아주 작은 소리를 냈다.
살아 있는 것들은 그렇게 미세한 떨림으로 존재를 증명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정연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도시는 여전히 복잡했고, 

길 위의 사람들은 각자의 근심을 안고 걸었다.
세상은 여전히 거대한 엔트로피의 강을 따라 흘러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녀는 더 이상 압도되지 않았다.
혼자서 그것을 거슬러 오르려 하지 않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자신은 원천이 아니었다.
다만 위로부터 내려오는 생명의 질서를 받아,
오늘 필요한 곳에 조금씩 흘려보내는 통로일 뿐이었다.


그 사실은 그녀를 겸손하게 했고,
동시에 자유롭게 했다.

그날 밤, 정연은 다시 기도방에 앉았다.
낮보다 더 짙은 고요가 방 안에 내렸다.
그러나 그 고요는 어제의 정지가 아니었다.


그것은 생명이 숨을 고르는 침묵,
사랑이 다음 걸음을 준비하는 여백이었다.

그녀는 두 손을 무릎 위에 포개고,
아주 천천히 속삭였다.

"아버지, 오늘도 감사합니다.
제게 내려주신 만나로 제가 살아났고,
그중 하나를 건넬 수 있었습니다."

잠시 후, 

그녀는 미소처럼 옅은 숨을 내쉬며 덧붙였다.

 

"그러니 내일도…

열 개만 더 주세요."

창밖 어둠 속 어딘가에서 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들었다.
보이지 않는 손이 세상을 조금씩 다시 정돈하는 것만 같았다.
정연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 순간,
자신이 더 이상 텅 빈 잔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잔의 바닥에는 오늘 하루를 견디고도 남을 만큼의 은혜가 조용히 고여 있었다.

평화는 소란이 없는 상태가 아니었다.
평화는 사랑이 무질서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용기였다.


그리고 그 용기는 인간의 힘이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오는 만나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그녀는 이제 믿을 수 있었다.

그렇게 그녀는 또 하루,
쓸쓸한 누군가의 얼굴을 향해
작고 환한 만나 하나를 들고 걸어갈 준비를 했다.

 


"Blessed are the peacemakers,
for they will be called the children of God."
- Matthew 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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