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03편 13절,
“아버지가 자식을
가엾게 여기듯이”
제1장. 그물보다 먼저
성칠은 시편 103편 13절 앞에서
오래 멈추어 있었다.
아버지가 자식을 가엾게 여기듯이.
활자는 작았고 종이는 누렇게
바래 있었다.
안경을 고쳐 쓰고도 그는 같은 줄을
세 번 다시 읽었다.
사랑이라는 말은 평생 너무 많이 들어서 이제는 닳은 동전처럼 표면만
반들거렸다.
그러나 가엾게 여긴다는 말은 달랐다.
그 말에는 누군가 몸을 굽혀 낮은
자리까지 내려오는 기척이 있었다.
그물에 손이 베인 아이를 향해
먼저 뻗는 손,
핑계보다 상처를 먼저 들여다보는
눈빛 같은 것이.
창밖으로 포구가 내려다보였다.
칠십을 넘긴 그의 눈에 바다는
더는 예전처럼 또렷하지 않았으나,
물비늘이 부서지는 자리만은
여전히 알아볼 수 있었다.
저물녘의 빛이 방파제 끝에 정박한
배들의 이물에 걸려 있었다.
그 배들 중 어느 것도 이제 그의 것이
아니었다.
아들이 도시에서 의사가 되고
난 뒤로 그는 배를 넘긴 지 오래였다.
그래도 매일 아침 그는 여전히
이 창가에 앉아 물때를 가늠하는
습관을 버리지 못했다.
성경을 무릎 위에 내려놓은 채로,
그는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젊은 날의 그는 그런 마음의 방향을
알지 못했다.
가엾게 여긴다는 것이 무엇인지,
누군가 자신을 그렇게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 무엇인지 짐작조차
하지 못한 채로 바다에 나섰다.
그때는 그저 손에 박인 굳은살과,
새벽마다 갑판을 적시던 찬 이슬과,
만선을 향한 조급함만이 전부였다.
열아홉의 성칠은 아버지를 따라
처음으로 먼바다에 나가던 날을
또렷이 기억했다.
안개가 짙어 뱃머리조차 흐릿하던
새벽이었다.
아버지는 말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물을 던지는 법도,
파도의 결을 읽는 법도 몸으로
가르칠 뿐 입으로 설명하는 법이
없었다.
그래서 성칠은 묻지 않고
보는 것으로 배웠다.
아버지의 손이 닻줄을 감는 모양,
바람의 방향에 따라 미세하게
기울어지는 어깨,
파도가 높아질 때 더 깊어지는 눈매.
그것이 그가 받은 유일한 가르침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성칠이 스물셋이 되던 해 풍랑 속에서 돌아오지 못했다.
그날 이후 포구의 사람들은 성칠을
다르게 보았다.
동정과 거리가 동시에
그를 향해 다가왔다.
어린 나이에 배를 물려받았다는 사실은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부러움보다는
의심을 샀다.
선단의 어른들은 그를 향해 노골적인
말을 하지는 않았으나,
말보다 더 분명한 것들이 있었다.
공동 출어를 의논하는 자리에서
슬쩍 비껴가는 시선,
그물코를 손질하는 부두에서 잠시
멈추었다가 다시 이어지는 대화,
이름은 불리지만 정작 그 의견은
묻지 않는 회의들.
젊음은 대개 세상을 단순하게 믿고
나섰다가,
그런 미세한 결들 앞에서 예상보다
쉽게 금이 갔다.
성칠도 그랬다.
그는 오래 버티지 못하리라는 것을
일찍 알아차렸다.
아버지의 배 한 척으로는 선단의 그늘 아래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고,
그 그늘은 해마다 조금씩 더
짙어지는 듯했다.
어판장 경매에서 그의 차례는
항상 가장 늦게 돌아왔다.
좋은 어장의 소식은 항상 그가 마지막으로 듣는 사람 중 하나였다.
늦어도 이삼 년 안에는 이 포구를
떠나야 한다고 그는 마음먹었다.
그러나 떠나겠다는 결심과 떠날 수 있는 형편 사이에는 늘 좁혀지지 않는
거리가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가서 무엇이 될 수 있는지,
그에게 정말 다른 길이 있기나
한지 알 수 없었다.
지금, 노년의 창가에 앉아 그는
그 시절의 자신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때의 그는 자기 앞에 놓인
좁은 수로만 바라보았지,
그 수로보다 먼저 와 있던
어떤 시선에 대해서는 짐작도
하지 못했다.
저녁빛이 방 안으로 더 깊이 들어왔다.
가구의 모서리마다 얇은 빛이
걸려 있었고,
먼지 알갱이들이 그 빛 속에서
천천히 떠다녔다.
성칠은 다시 한번 그 구절을
소리 내어 읽었다.
아버지가 자식을 가엾게 여기듯이.
그는 안경을 벗어 무릎 위에 놓았다.
눈을 감자 짠 바닷바람의 냄새와,
그물이 손바닥을 스치던 감각과,
스물셋의 자신이 처음으로 혼자 바다를 마주하던 새벽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그날 그는 누구에게도 들려줄 수
없는 말을 혼자 중얼거렸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길을 열어 주십시오.
제2장. 늦게 불리는 이름
그 무렵 성칠은 매일 새벽 가장 먼저 부두로 나갔다.
다른 배들이 출항 채비를 할 때,
그는 멀찍이 떨어진 자리에서 홀로 그물을 손질했다.
함께 나가자는 말은 누구에게서도 먼저 오지 않았다.
그는 늘 청해야 하는 쪽이었고,
청한다 해도 자리가 남았을 때에야 끼워지는 사람이었다.
선단의 우두머리 격인 백 영감은 성칠을 미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가끔은 측은하다는 듯 바라보기도 했다.
그러나 그 눈빛에는 함께 가자는 말이 담겨 있지 않았다.
아비 없이 자란 어린 선주에게 좋은 어장을 선뜻 나누어 줄 만큼 바다는 너그럽지 않았다.
"성칠이 너는 아직 멀었다."
백 영감은 그렇게 말하고는 등을 돌려 자신의 배로 걸어갔다.
그 말에 틀린 것은 없었다.
성칠은 정말로 아직 멀었다.
그러나 그 말이 가진 무게는 사실의 무게가 아니라 거절의 무게였다.
같은 말도 누구에게는 격려가 되고
누구에게는 문을 닫는 소리가 된다는 것을,
성칠은 그 시절에 배웠다.
공동 어로 구역을 정하는 모임이 있을 때마다 성칠의 자리는 늘 맨 끝이었다.
누구도 그를 향해 자리를 비키라 말하지 않았으나,
자리는 항상 좁았다.
발언의 순서가 돌아올 즈음이면 이미 논의는 끝나 있었고,
성칠의 의견은 형식적인 확인 절차로만 남았다.
그는 그것이 부당하다고 생각하면서도 항의할 말을 찾지 못했다.
항의할 자격조차 아직 그에게는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밤이 되면 그는 종종 빈 배 위에 홀로 앉아 있었다.
별빛 아래 흔들리는 파도 소리만이 유일한 말동무였다.
어머니는 그가 들어오지 않는 밤이면 등불을 켜 둔 채 잠들지 못했지만,
성칠은 그 사실을 알면서도 좀처럼 일찍 들어가지 못했다.
집으로 들어가는 길이 그날따라 유난히 멀게 느껴지는 밤들이 있었다.
그해 가을,
태풍이 지나간 뒤 어판장의 시세가 폭락했다.
선단의 큰 배들은 손실을 나누어 견딜 수 있었지만,
성칠의 작은 배 한 척으로는 그 손실을 고스란히 떠안아야 했다.
그는 처음으로 빚이라는 것을 졌다.
많지 않은 금액이었으나,
그에게는 그 숫자가 자신의 무능함을 증명하는 표식처럼 느껴졌다.
그 무렵부터 성칠은 떠남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어디로 가야 할지는 알 수 없었다.
도시로 나가 막노동을 할 수도 있었고,
다른 포구로 옮겨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어느 쪽도 선명한 그림으로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다만 이곳에서는 더 이상 자신이 자랄 수 없으리라는 것만을 분명히 느꼈다.
어느 날 저녁,
그는 어판장 한쪽 구석에서 낡은 평상에 걸터앉아 있었다.
그날도 그의 그물에는 잡은 것이 많지 않았다.
옆자리에서는 다른 선주들이 모여 다음 출어 일정을 의논하고 있었다.
그들의 대화는 성칠을 향하지 않았다.
마치 그가 거기 없는 사람처럼,
목소리들은 그의 머리 위를 그저 지나쳐 갔다.
그날 밤 성칠은 처음으로,
누구에게도 들려줄 수 없는 말을 혼자 중얼거렸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길을 열어 주십시오."
그것은 기도라기보다 거의 숨에 가까웠다.
절망이 너무 짙어 소리조차 제대로 모양을 갖추지 못하던 밤,
사람은 간신히 한 문장을 자기 밖으로 밀어낸다.
그 한 문장이 때로는 살아남고자 하는
마음의 마지막 형태가 되기도 한다는 것을,
성칠은 그날 처음 알았다.
제3장. 가느다란 금
그 후로도 여러 달,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성칠은 여전히 매일 새벽 부두로 나갔고,
여전히 늦게 출항했으며,
여전히 가장 적은 어획을 들고 돌아왔다.
어떤 날은 그물에 아무것도 걸리지 않은 채 빈 배로 들어오기도 했다.
그런 날이면 그는 부두에 배를 묶어 두고도 한참을 떠나지 못한 채 수면만 바라보았다.
물비늘이 부서지는 자리를 바라보고 있으면,
마치 그 너머 어딘가에 자신이 알지 못하는 답이 있을 것만 같았다.
설명은 늘 사후적이고,
우연은 대개 설명보다 먼저 와서 사람의 삶 어딘가를 조용히 틀어 놓는다.
성칠은 그것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그는 다만 견디고 있었을 뿐이었다.
견딘다는 자각도 없이,
그저 다음 날 새벽이 오면 다시 그물을 손질하는 일을 반복했을 뿐이었다.
어머니의 기침이 깊어진 것은 그해 겨울이었다.
의원은 큰 병은 아니라 했으나,
어머니는 부쩍 야위었다.
성칠은 빚을 갚는 일과 어머니의 약값을 마련하는 일 사이에서 매일 계산기를 두드리듯 살았다.
그 계산은 언제나 모자란 쪽으로 끝이 났다.
그러던 어느 날, 작은 일 하나가 생겼다.
굳이 이름 붙이자면 우연이라 부를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이웃 포구에서 온 객지 선원 하나가 풍랑을 피해 성칠의 마을에 며칠 머물게 되었다.
그는 원양어선을 오래 탄 사람이었다.
어느 저녁,
비를 피해 들어간 주막에서 두 사람은 우연히 같은 평상에 앉았다.
처음에는 그저 날씨와 파도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러나 술이 두어 잔 돌자 그 선원은 자신이 타던 원양어선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더 깊은 바다,
더 큰 어획,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을 가리지 않는 자리에 대한 이야기였다.
"원양은 말이오,"
그가 말했다.
"누구네 아들이냐,
누구 배냐,
그런 거 안 따져.
그물 잘 다루고 몸 성하면 그만이오."
성칠은 그 말을 흘려듣지 않았다.
그날 밤 그는 오랜만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은 절망의 불면이 아니라,
무언가 낯선 것이 마음 한구석에서 조용히 움트는 불면이었다.
닫혀 있다고 믿었던 벽에 아주 가느다란 금이 가 있었고,
어느 순간 그 틈으로 빛이 한 줄기 스며든 것이었다.
성칠은 한동안 그 빛을 바라보았다.
아직 끝난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때 처음 마음속에 작은 불씨처럼 살아났다.
그러나 불씨가 곧바로 불꽃이 되지는 않았다.
원양어선을 타려면 자격을 갖추어야 했고,
그 자격을 갖추는 데도 적지 않은 시간과 돈이 필요했다.
성칠은 그 사실 앞에서 다시 한번 막막해졌다.
길이 보이는 것과 그 길을 걸을 수 있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그는 여덟 달을 더 그 자리에서 견뎠다.
빚을 조금씩 갚아 나가며,
어머니의 기침이 잦아들기를 기다리며,
그리고 언젠가 자격증을 딸 만한 형편이 되기를 기다리며.
그 여덟 달 동안 성칠은 매일 저녁 같은 자리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기다림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견딤에 가까웠다.
그러나 그 견딤 속에서도 그는 더 이상 예전처럼 막막하지만은 않았다.
어딘가에 길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사람과,
길이 있는지조차 모르는 사람의 견딤은 같은 모양이어도 속은 달랐다.
제4장. 장날의 손
여덟 달이 지난 어느 봄날,
성칠은 장터에 나갔다.
어머니의 약재를 사기 위해서였다.
장날의 포구 마을은 평소와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좁은 골목마다 좌판이 늘어섰고,
사람들의 목소리가 비린내와 뒤섞여 공기 중에 떠다녔다.
건어물 장수의 외침과 흥정하는 소리,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한데 엉켜 시장 전체가 살아 있는 생물처럼 꿈틀거렸다.
성칠은 약재상 앞에서 줄을 서 있었다.
그의 차례가 가까워질 무렵,
누군가 그의 어깨를 가볍게 쳤다.
"자네, 성칠이 아닌가?"
돌아보니 낯익은 얼굴이었다.
한참을 생각한 끝에야 성칠은 그가 누구인지 기억해 냈다.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
한 번씩 마을에 들러 어구를 봐 주던 조선소의 박 기사였다.
아버지의 배를 손수 수리해 주던 사람이었고,
어린 성칠에게 매듭 묶는 법을 가르쳐 준 적도 있는 사람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는 발길이 뜸해져 거의 칠팔 년 만의 만남이었다.
"박 기사님……."
성칠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는 자신이 왜 그렇게 반가운지,
혹은 왜 그렇게 목이 메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장터 한구석의 평상에 앉아 막걸리 한 잔을 나누었다.
박 기사는 성칠의 안부를 이것저것 물었고,
성칠은 묻는 말에 짧게 답했다.
굳이 자신의 형편을 늘어놓고 싶지 않았으나,
박 기사의 눈빛에는 캐묻지 않으면서도 다 헤아리는 듯한 무언가가 있었다.
"요즘 통영 쪽 조선소에서 원양선 선원을 모집한다는 얘기를 들었네."
박 기사가 무심한 듯 말을 꺼냈다.
"자격증 따는 교육도 거기서 같이 해 준다더군.
비용은 일하면서 갚는 식으로."
성칠은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것은 바로 그가 여덟 달 동안 마음에 품어 왔던 그 길이었다.
그러나 그는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너무 갑작스럽게 다가온 가능성 앞에서는 오히려 말문이 막히는 법이었다.
"제가…… 그런 자격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자격이야 가서 갖추면 되는 거지."
박 기사는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마침 거기 책임자가 내 처조카일세.
원한다면 내가 한마디 넣어 줄 수도 있고."
그날 이후 일은 생각보다 빠르게 이어졌다.
한 번의 만남이 또 다른 만남으로 건너갔고,
망설임은 채 끝나기도 전에 다음 장면으로 밀려났다.
성칠이 선택했다고 믿었던 순간들 가운데는,
실은 선택이라기보다 떠밀리듯 건너간 것들이 더 많았다.
그는 그 길로 어머니의 병환을 의원에게 더 자세히 맡기고,
작은 배는 이웃에게 맡긴 채 통영으로 떠날 채비를 했다.
마을 사람들 중 몇몇은 그의 갑작스러운 결정에 의아해했지만,
백 영감만은 부두까지 나와 그를 배웅했다.
"그래, 가서 큰물에서 놀아 봐라."
백 영감은 그렇게 말하며 성칠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 손길에는 처음으로,
진심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
배가 포구를 떠나던 날,
성칠은 뱃머리에 서서 멀어지는 마을을 바라보았다.
그날 장터에서의 우연한 마주침이 없었더라면
그는 여전히 같은 자리에서 같은 시세를 기다리며
늙어 가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세상은 그것을 우연이라 부를 것이다.
그러나 닫혀 있던 벽의 가느다란 금과,
여덟 달의 견딤과,
장날의 우연한 어깨짓이 한 줄로 이어질 때,
설명은 자꾸만 늦게 도착했다.
제5장. 먼바다의 시간
원양어선을 처음 탄 날을 성칠은 오래도록 잊지 못했다.
육지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던 순간,
그는 갑판 난간을 붙들고 한참을 서 있었다.
사방이 온통 물이었다.
어디를 보아도 끝이 보이지 않는 수평선뿐이었고,
그 막막함은 그가 포구에서 느꼈던 것과는 또 다른 종류의 외로움이었다.
그곳에는 그를 알아보는 사람도,
그를 멀리하는 사람도 없었다.
모두가 처음 만난 사람들이었고,
모두가 같은 바다 앞에서 똑같이 작아지는 사람들이었다.
밤이 되면 좁은 선실 안에서 코 고는 소리들 사이로,
성칠은 종종 천장을 바라보며 누워 있었다.
한밤중 기관실에서 올라오는 낮은 진동음과,
파도가 선체를 두드리는 소리와,
낯선 사투리로 잠꼬대를 하는 동료들의 숨소리.
삶이 다른 바다로 옮겨지면 사소한 소리들까지도 처음 듣는 낯선 음색을 띠었다.
그는 그 모든 낯섦 속에서 다시 시작해야 했다.
그러나 다시 시작한다는 것은 대개 막막함의 다른 이름이었다.
어획량이 적은 항해가 몇 달이고 이어지면 선원들 사이에 날카로운 말들이 오갔고,
성칠도 그 날카로움을 피해 가지 못했다.
그는 여전히 두려웠고,
여전히 쉽게 지쳤다.
그러나 박 기사의 말처럼,
그곳에서는 적어도 그의 출신을 묻는 사람이 없었다.
그물을 다루는 손과 파도를 읽는 눈만이 그를 증명했다.
그것은 성칠에게 처음 주어진 공평함이었다.
몇 년이 지나는 동안 그는 차츰 선원들 사이에서 신뢰를 얻었다.
누구보다 먼저 갑판에 나섰고,
누구보다 늦게까지 그물을 손질했다.
선장은 그런 그를 눈여겨보았고,
마침내 그에게 작은 직책을 맡겼다.
그것은 큰 자리는 아니었으나,
성칠에게는 평생 처음 누군가 그의 이름을 앞서 불러 준 자리였다.
그 무렵 그는 한 항구 도시에서 만난 여인과 혼인했다.
그녀는 어판장에서 생선을 다듬는 일을 하던 사람이었고,
말수가 적었으나 손끝이 야무졌다.
두 사람은 서로의 고단함을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아보는 사이가 되었다.
첫아이가 태어나던 날,
성칠은 마침 먼바다에 나가 있어 한 달이 지나서야 갓난아이를 품에 안을 수 있었다.
그 늦음이 못내 미안했지만,
아이는 그의 품에서 울음을 그쳤다.
세월이 흐르며 두 아들이 자랐다.
큰아들은 어려서부터 책을 좋아했다.
성칠은 그 아이가 자신과는 다른 길을 걷기를 바랐다.
바다의 거친 손이 아니라,
글과 셈으로 사람을 살리는 손을 갖기를 바랐다.
그는 먼바다에서 모은 돈을 한 푼도 허투루 쓰지 않고 아이의 학비로 모았다.
큰아들은 마침내 의과대학에 들어갔고,
훗날 도시의 대학병원에서 의사가 되었다.
뒤를 돌아보면 성칠의 생애에는
그런 일들이 드물지 않았다.
작은아들이 조선소에서 기사로 자리 잡게 된 일도,
며느리를 만나게 된 과정도,
손주들이 태어나면서 집 안의 시간이 전혀 다른 결을 띠게 된 일까지.
하나씩 떼어 놓고 보면 그저 세상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이 한 사람의 생애 안에서 오래 이어져 하나의 결을 이룰 때,
설명은 자꾸만 늦게 도착했다.
세상은 그것을 우연이라 부를 것이다.
그러나 같은 방향의 우연이
한 사람을 평생 따라다닌다면,
그것은 점점 우연이라는
말의 바깥으로 밀려났다.
성칠은 환갑이 가까워질 무렵
마지막 항해를 마치고 고향 포구로 돌아왔다.
떠날 때 그를 외면했던 사람들은
이미 늙거나 세상을 떠났고,
남은 이들은 그를 다른 눈으로 맞아 주었다.
그러나 성칠은 그 다른 눈빛 앞에서도 예전의 서러움을 굳이 들추지 않았다.
사람은 나이를 먹으면서 비로소 자기 삶의 문장을 읽게 되는지도 모른다고,
그는 그즈음 처음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젊은 날에는 눈앞의 단어 하나가 전부인 줄 알았으나,
세월이 지난 뒤에는 그것들이 서로를 향해 기울어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당시에는 불운처럼 보였던 일이 먼 훗날 하나의 굽이였음을,
닫힌 선단의 문이라 여겼던 곳이 실은 더 큰 바다로 방향을 바꾸는 모서리였음을,
그래서 어떤 상실은 빼앗김이 아니라 이동이었음을 그는 뒤늦게 이해하게 되었다.
제6장. 길보다 먼저
부모님의 산소에 갔던 날도 그랬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마을 뒷산,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자리에 함께 묻혀 있었다.
성칠은 해마다 봄가을로 그 자리를 찾았으나,
그날만은 유난히 마음이 무거웠다.
어머니가 그렇게 야위어 가던 시절,
그가 먼바다에 나가 있느라 곁을 지키지 못했던 날들이 새삼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산자락은 조용했고 바람은 낮게 풀을 쓸고 지나갔다.
봉분 앞에 서 있으니 시간의 결이 갑자기 느슨해지는 듯했다.
살아 있는 자의 시간과 떠난 자의 시간이
그날만큼은 완전히 끊어져 있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다.
성칠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눈에 보이는 것은 흙과 풀과 멀리 반짝이는 바다뿐인데,
이상하게도 그 자리에는 그 혼자만 서 있는 것이 아닌 듯했다.
그 감각을 무엇이라 불러야 할지 그는 아직도 알지 못했다.
다만 사람의 생애에는 논리보다
먼저 와 닿는 순간들이 있고,
설명은 늘 그 뒤를 헐떡이며
따라온다는 사실만 어렴풋이 알 뿐이었다.
그는 봉분 옆에 쪼그려 앉아
손으로 흙을 가만히 쓸었다.
아버지가 닻줄을 감던 손,
말없이 바람의 결을 읽던 어깨가 떠올랐다.
아버지는 평생 그에게 많은 말을 남기지 않았으나,
그 침묵 속에는 분명 무언가가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성칠은 이제야
조금씩 알 것 같았다.
이제 와 생각하면,
그의 삶을 오래 붙들어 온 것은
그의 능력이나 결심의 단단함 같은 것이 아니었던 듯했다.
그는 자주 두려워했고,
생각보다 쉽게 지쳤으며,
길 앞에서 오래 머뭇거리는 사람이었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는 법을 배웠다기보다,
일어나지 못한 채 주저앉아 있을 때에도
이상하게 다음 계절 쪽으로 밀려갔다고 말하는 편이 더 정확했다.
누군가의 생애를 지탱하는 힘은 때로
그 사람의 강함이 아니라
약함을 오래 견디는 데서 오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 오래된 문장은
그에게 더 이상 관념이 아니었다.
그것은 해석이 아니라,
뒤늦게 제 뜻을 드러내는 기억에 가까웠다.
삶의 여러 장면 위로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떠오르는 하나의 표정.
젊은 날에는 보이지 않던 눈빛이
세월의 끝에서야 서서히 형태를 갖추는 일.
요즘 성칠은 자주 생각했다.
사람의 육신은 분명 바다의
거친 질서를 따라 늙어 가지만,
사람을 끝내 사람답게 만드는
어떤 것은 다른 데서 오는 것이 아닐까 하고.
그는 어떻게 동료의 아픔을 제 일처럼 느끼고,
설명할 수 없이 어떤 얼굴 앞에서 마음이 무너지며,
이미 떠난 아버지를 오래도록
가슴속에서 놓아주지 못하는가.
물질의 질서만으로는
다 설명되지 않는 어떤 깊이가,
사람과 사람 사이를,
그리고 산 자와 떠난 자 사이를
보이지 않게 건너다니는 것은 아닐까.
사랑한다는 것도 어쩌면
그런 일일 것이다.
눈앞의 한 사람을 끝내
사물처럼 다루지 않는 일.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방식으로 살아 내는 일.
사람은 그 일을 배우는 동안에만
가까스로 사람다워지는지도 모른다.
산을 내려오는 길,
성칠은 걸음을 멈추고
다시 한번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저녁빛이 수면 위로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문득 오래전 부둣가에서 홀로
막막해하던 젊은 날의 자신이 떠올랐다.
그때의 그는 자기 앞에 놓인
좁은 수로만 바라보았지,
그 수로보다 먼저 와 있던
어떤 시선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길보다 먼저 와 있던 시선.
세월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알아듣게 되는 말들이 있다.
어떤 보호는 기적의 얼굴로 오지 않는다.
그것은 대개 작은 우연의 형식을 빌려 온다
— 객지 선원의 무심한 말 한마디로,
장날 평상에서의 우연한 어깨짓으로,
닫혀 있던 벽의 가느다란 금으로.
사람은 모든 일을 지나온 다음에야
그 반복의 뜻을 더듬어 읽게 된다.
그때에야 비로소 알게 된다.
한 생애가 완전히 혼자였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을.
그 시선은 오래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여전히, 말없이 따뜻하다.
성칠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포구로 내려가는 길 위로,
저녁 종소리처럼
낮은 파도 소리가 따라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