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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지 않는 강

작성자술랑이|작성시간26.06.23|조회수46 목록 댓글 0

비는 사흘째 내리고 있었다.

처음 하루는 반가웠다.

 

메말라 갈라진 밭두렁도,

먼지 자욱하던 골목도,

교회 마당의 잔디도 오랜만에

숨을 쉬는 듯 보였다.

 

하지만 둘째 날부터 사람들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쉬기 시작했고,

 

셋째 날 새벽이 되자 마을 어귀를

흐르는 하천은 이미 제 모습을

잃고 있었다.

 

누렇게 불어난 물이 둑 아래를

세차게 때렸고,

떠내려온 나뭇가지와 비닐 조각들이

소용돌이 속에서 부딪히며 맴돌았다.

 

새벽 다섯 시, 정이현 장로는

교회 종탑 아래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빗줄기는 가늘어질 기미가 없었다.

회색 구름이 마을 전체를

짓누르고 있었고,

 

젖은 공기는 사람의 폐 속까지

천천히 젖게 만드는 종류의

것이었다.

 

"장로님, 큰일입니다."

 

교회 관리집사 박성호가

허둥지둥 뛰어왔다.

 

우비 모자가 벗겨질 만큼

다급한 걸음이었다.

 

"지하 교육관에 물이 들이쳤습니다.

배수구가 막힌 것 같습니다."

 

이현은 대답도 하지 않고

곧장 지하로 내려갔다.

 

철문을 여는 순간 습기

섞인 냄새와 함께 찬 물이

발등을 스쳤다.

 

교회학교 아이들이 그림 그리던

낮은 책상들,

종이 상자들,

 

여름성경학교 때 쓰다 남은

현수막과 스티로폼 소품들이

물에 젖어 뒤엉켜 있었다.

 

이현은 바짓단을 걷어붙이고

물속으로 들어갔다.

종이 상자를 들어 올리자

바닥에서 검은 진흙이 번졌다.

 

성호가 황급히 대걸레와

양동이를 가져왔다.

 

 

두 사람은 한 시간 넘게 말없이

물을 퍼냈다.

 

땀이 비에 젖은 건지,

빗물이 땀과 섞인 건지

알 수 없었다.

 

"하필 이런 날 권사님은

안 보이시네요."

 

성호가 불쑥 말했다.

이현은 고개를 들었다.


"누구요?"

 

"한순자 권사님 말입니다.

늘 새벽예배 제일 먼저 오시더니,

요즘은 통 안 보이시잖아요."

 

이현은 다시 고개를 숙였다.


"사정이 있겠지요."

 

성호는 말을 멈췄다.

하지만 그 잠깐의 대화가

이현의 마음 한쪽을 건드렸다.

 

한순자.

새벽마다 맨 앞줄 왼편에 앉아

찬송을 부르던 사람.

 

남편 없이 외아들을 키우며

평생을 일했고,

교회에서는 누구보다도

지런히 봉사하던 사람.

 

그런데 한 달 전부터 눈에 띄게

수척해지더니,

최근엔 예배에도 뜸해졌다.

 

이현은 알고 있었다.
그녀의 아들 때문이다.

 

마흔을 넘긴 아들 김도윤은 몇 번의

사업 실패 끝에 빚을 짊어진 채

어머니 집에 들락거렸다.

 

처음엔 안쓰러웠다.

누구나 넘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다시 일어서게 도와주는 것이

가족이고 교회라고도 믿었다.

 

이현 역시 몇 차례 순자의 부탁을

받고 도윤에게 일자리를 알아봐

주었고, 적은 돈이나마 손에 쥐여

보낸 적도 있었다.

 

하지만 도윤은 번번이 오래

버티지 못했다.

 

직장은 상사 탓을 하며 그만두었고,

사업은 세상 탓을 하며 접었다.

실패할 때마다 그의 말은 비슷했다.


"한 번만 더 도와주시면 됩니다."

그 한 번은 끝이 없었다.

 

교회 지하의 물을 겨우 퍼낸 뒤,

이현은 젖은 셔츠를 입은 채

본당 뒷문으로 나왔다.

 

비는 여전히 쏟아지고 있었다.

새벽예배는 평소보다 훨씬

적은 사람이 모였다.

 

빈자리가 많은 예배당은 더 넓고

더 쓸쓸하게 느껴졌다.

 

그날 설교 본문은 아모스였다.
담임목사는 굵은 목소리로 읽었다.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

 

 

이현은 그 구절을 여러 번 들어 왔다.

너무 익숙해서 오히려

마음에 닿지 않던 말이었다.

 

하지만 그날은 이상하게도

"마르지 않는 강"이라는 대목이

오래 귓가에 남았다.

 

창밖으로는 넘칠 듯 비가 오는데,

자기 안에서는 오히려 무언가

바짝 말라 가고 있다는 사실을

그 말이 정확히 찔러 왔기 때문이었다.

 

예배가 끝난 뒤,

그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순자의 집으로 향했다.

 

순자가 사는 연립주택은 마을 끝,

오래된 하천 둑 가까이에 있었다.

 

계단 벽에는 비 냄새와 눅눅한

곰팡이 냄새가 배어 있었다.

 

초인종을 두 번 누른 뒤에야

문이 열렸다.

 

순자는 놀란 얼굴이었다.


"장로님이 웬일이세요?"

 

그녀는 급히 머리를 쓸어 넘겼다.

 

실내복 위에 허술하게 걸친

카디건이 젖은 손끝 때문에

군데군데 구겨져 있었다.

 

집 안은 어두웠다.

커튼도 열지 않았고,

 

부엌 식탁 위에는 먹다 만 죽그릇

하나와 약봉지들이 널려 있었다.

 

 

"예배에 안 나오셔서 걱정이

되어 왔습니다."

 

순자는 잠시 웃으려 했지만

웃지 못했다.


"감기 몸살이 좀 심해서요."

 

이현은 그녀의 거짓말을

모른 척하지 않았다.


"권사님, 무슨 일입니까."

 

순자는 고개를 돌렸다.

한동안 입술을 깨물다가

천천히 말했다.

 

"도윤이가… 또 사고를 쳤어요."

 

그 말이 끝나자마자 안방 문이

벌컥 열렸다.


퉁퉁 부은 얼굴에 수염이

덥수룩한 남자가 나왔다.

 

김도윤이었다.

반소매 티셔츠 차림의 그는

예고 없이 찾아온 이현을

보는 순간 눈빛부터 굳어졌다.

 

"장로님이 여기까지는 왜 오셨습니까?"

 

이현은 대꾸하지 않았다.
도윤의 눈은 충혈되어 있었고,

 

방 안에서는 술 냄새가

진하게 흘러나왔다.

순자가 다급히 말했다.


"도윤아, 그런 말투가 어디 있니."

 

"왜요?

교회에서 엄마한테 또

무슨 말 했습니까?

 

이 나이에 사람 하나 못 살게 굴고."

 

"도윤 씨."


이현이 낮게 말했다.


"지금 그런 태도로 말할 상황은

아닌 것 같군요."

 

도윤은 피식 웃었다.


"장로님은 참 편하시겠습니다.

남의 사정이야 늘 도덕으로

정리하면 되니까."

 

순자가 그의 팔을 붙잡으려 했다.


"그만해라."

 

그러나 도윤은 어머니의 손을

뿌리쳤다.


"엄마도 똑같아요.

사람들 앞에서는 늘 믿음 좋은 척,

희생하는 척.

 

그러면서 정작 아들이 죽게

생겼는데 돈 몇 푼도

아까워하시잖아요."

 

순자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


"내가 너 때문에 지금까지

얼마나—"

 

"얼마나요?"


도윤이 소리쳤다.


"그럼 낳지를 말았어야죠.

자식이 망했으면

살게 해 줘야지,

 

마지막까지 이런 식으로

사람 자존심 긁을 겁니까?"

 

 

이현의 목소리가 단단해졌다.


"그만하십시오."

 

잠깐 정적이 흘렀다.

빗소리가 창문을 때리는

소리만 거칠게 들렸다.

 

도윤은 이를 악물더니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문이 세게 닫히는 소리가

집 전체를 흔들었다.

 

순자는 그 자리에 주저앉듯

의자에 앉았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더니

아무 말 없이 울기 시작했다.

 

소리 없는 울음이었다.

오래 참다가 더는 막을 힘이

없어진 사람의 울음.

 

이현은 식탁 맞은편에 앉아

한동안 침묵했다.

 

쉽게 위로할 수 없었다.

얄팍한 위로는 오히려

잔인할 때가 있었다.

 

"권사님."


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얼마나 더 감당하실 생각입니까."

 

순자는 눈물 젖은 얼굴을 들었다.

"저도 모르겠어요."

 

"계속 돈을 요구합니까?"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채업자한테 쫓기고 있대요.

이번만 넘기면 된다고…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이현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 말이 얼마나 오래 반복되어

왔는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순자는 대답 대신 서랍 하나를

열었다.

 

안에는 통장 몇 개와 인감도장,

그리고 접힌 부동산 서류가

들어 있었다.

 

이현은 순간 눈썹을 찌푸렸다.

"설마…"

 

"집을 담보로 대출을 알아보고

있었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낮았다.


"이 집이라도 지켜야 하는

걸 아는데…

그런데 그 애가 잘못되면…

정말 무슨 일을 저지를까 봐…."

 

이현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이상하리만큼 차가운 분노를

느꼈다.

 

그것은 도윤에게만 향한 것이 아니었다.

 

순자를 향한 답답함,

이런 상황을 지켜보기만 해 온

자신에 대한 자책,

 

신앙이라는 이름 아래 너무 쉽게

희생을 미덕으로 말해 온 시간에

대한 불편함이 한꺼번에 올라왔다.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안 됩니다."

 

순자가 움찔했다.

"장로님…"

 

"그 집을 담보로 잡히는 순간,

권사님 삶까지 같이 무너집니다.

그건 사랑이 아닙니다."

 

"그럼 어떡하나요. 제 자식인데요."

 

"자식이라고 해서 모든 파멸을

함께 떠안아야 하는 건 아닙니다."

 

순자는 상처 입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장로님은 자식 키워 보셨으니

그렇게 쉽게 말씀 못 하실 텐데요."

 

그 말은 예상치 못한 방향에서

날아온 돌 같았다.

 

이현의 얼굴이 굳었다.

그에게도 아들이 있었다.

 

미국에 정착해 몇 년째

오지 않는 아들.

 

며느리와 손주들 사진은

가끔 보내오지만,

 

전화는 늘 바빴고 방문 약속은

번번이 미뤄졌다.

 

그리고 딸이 있었다.

다섯 살에 잃은 딸.

갑작스러운 열병으로, 하루 만에.

 

그는 그 아이의 이름을 여전히

마음속에서 크게 부르지 못했다.

 

아내가 살아 있을 때만 겨우 함께

기억할 수 있었던 이름이었다.

 

순자는 곧 실수했음을 깨달은 듯

입을 막았다.


"죄송해요, 장로님.

제가 지금 제정신이 아니라…."

 

하지만 상처는 이미 지나갔다.

이현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이만 가겠습니다."

 

"장로님…"

 

"대출은 하지 마십시오.

그것만은 약속해 주십시오."

 

그는 대답을 듣지 않고 집을 나왔다.

비는 여전히 세차게 내리고 있었다.

 

계단을 내려와 골목으로

들어섰을 때,

 

이현은 가슴 한가운데가 이상하게

저려 오는 것을 느꼈다.

 

순자의 말 때문만은 아니었다.

오랫동안 덮어 두었던 자신의

상처가 누군가의 절박함에 의해

갑자기 헤집어진 탓이었다.

 

그날 오후, 하천 수위가

위험하다는 방송이 마을에 울렸다.

 

주민센터에서 모래주머니를

나르고,

남자들은 우비를 입고

둑으로 모였다.

 

이현도 삽을 들고 나갔다.

 

흙탕물은 둑 아래까지 차올라

있었고,

물살은 이전보다 더 거칠었다.

 

그때 누군가 소리쳤다.

 

"저기 사람 있어요!"

 

둑 아래, 하천 옆으로 난

자전거길에 한 남자가 비틀거리며

서 있었다.

 

술에 취한 듯 중심도 잡지 못하고

물가 가까이 다가가고 있었다.

 

이현은 그 얼굴을 알아보는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김도윤이었다.

 

 

"도윤 씨!"

 

이현은 둑을 따라 뛰어내려갔다.

비에 젖은 경사면은 미끄러웠다.

 

도윤은 뒤를 돌아보더니

실소를 지었다.

 

"또 오셨네요, 장로님.

이번엔 저를 구하시려고?"

 

"거기서 나오십시오!"

 

"왜요?"


도윤이 비에 젖은 얼굴로 소리쳤다.


"다들 제가 문제라며요.

엄마 인생 망치는 놈,

교회 망신시키는 놈.

그럼 없어지면 되잖아요."

 

그의 발이 한번 크게 미끄러졌다.

물가의 흙이 무너져 내리며

탁한 물이 출렁였다.

 

이현은 본능적으로 달려가

그의 팔을 붙잡았다.

도윤은 몸을 빼려 했다.

 

"놔요!"

 

"정신 차리십시오!"

 

"왜요! 살려서 또 뭐 하게요?

 

또 실패하고 또 손 벌리고

또 욕먹고,

그렇게 살 바엔—"

 

도윤의 말은 끝나지 못했다.

흙이 한꺼번에 무너지며 두 사람

모두 중심을 잃었다.

 

이현은 가까스로 한 손으로 둑 아래

난 철제 난간을 붙잡았다.

 

다른 손으로는 도윤의 팔을

움켜쥐고 있었다.

 

거센 빗물과 진흙이 다리를 때렸다.

순간 손아귀 힘이 빠지는 것 같았다.

 

위에서 사람들이 소리쳤다.


"밧줄 가져와요!"

도윤은 공포에 질린 눈으로

이현을 올려다보았다.

 

아까까지의 분노도 독기도

사라진 얼굴이었다.

 

어린아이처럼 허물어진

얼굴이었다.

"장로님…."

 

그 한마디에 이현은 문득 오래전

병원 응급실에서 들었던 어떤

떨리는 목소리를 떠올렸다.

 

다섯 살 딸아이가 열에 들떠

그를 부르던 목소리.

 

그는 그 기억에 붙들리듯

이를 악물고 손에 힘을 주었다.

 

"놓지 마십시오."

 

도윤의 몸이 떨리고 있었다.

"저… 무서워요."

 

 

"그러면 올라오십시오.

살고 싶으면 붙드세요."

 

몇 사람이 내려와 두 사람을

끌어올리는 데까지는 몇 분이

걸리지 않았지만,

 

이현에게는 한 계절만큼 길게

느껴졌다.

 

둑 위로 올라왔을 때 도윤은

진흙투성이가 된 채 주저앉아

숨만 헐떡였다.

 

순자도 누군가의 연락을 받고

뛰어와 있었다.

 

그녀는 아들을 보는 순간 비명처럼

울음을 터뜨리며 달려들었다.

 

"도윤아!"

 

 

도윤은 처음엔 어머니를

피하려 했지만,

 

끝내 고개를 떨군 채

울기 시작했다.

 

삼십 대도, 사십 대도 아닌

사람처럼.

 

실패와 수치와 두려움이 한꺼번에

무너져 내리는 울음이었다.

 

이현은 몇 걸음 떨어져 서서

그 광경을 보았다.

 

팔꿈치에서는 피가 조금

배어 나오고 있었고,

옷은 흙과 빗물로 무겁게

들러붙어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의 마음속에서는 조금 전까지

그를 괴롭히던 차가운 돌덩이

같은 것이 아주 조금

녹아내리는 듯했다.

 

그러나 사건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며칠 뒤,

사채업자라는 남자 둘이 순자의 집

앞에 찾아와 소란을 피웠다.

 

고함과 욕설이 복도에 울려 퍼졌고,

이웃들이 문틈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그날 저녁 교회 권사 몇이

이현을 찾아와 말했다.

 

"장로님, 이건 그냥 넘길 일이

아닙니다.

교회 이름까지 오르내리고

있어요."

 

"도윤 씨를 계속 교회 공동체

안에서 감싸 주는 게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순자 권사님도 좀

단호해지셔야지요."

 

다 옳은 말이었다.

그런데 그 옳음들이 칼날처럼

느껴졌다.

 

이현은 그 말들을 듣고도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옳음이 사람을 살리는 순간도

있지만,

이미 물에 빠진 사람에게

더 무거운 돌이 되는 순간도

있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날 밤, 이현은 혼자 예배당에

남았다.

 

전등을 다 끄고 맨 앞자리

장의자에 앉았다.

 

빗소리는 멎었지만,

지붕 끝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한동안 이어졌다.

 

어둠 속 십자가는 희미한

윤곽만 남기고 있었다.

 

그는 오랫동안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하나님, 저는 이제 잘

모르겠습니다."

 

자기 목소리가 비어 있는

본당에 낮게 울렸다.

 

 

"어디까지가 사랑이고,

어디서부터가 방임인지

모르겠습니다.

 

붙드는 것이 옳은지,

끊어내는 것이 옳은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제 마음이 자꾸 메마른다는

것입니다."

 

그는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저 사람들을 향한 분노도 있고,

불쌍함도 있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저는 지쳤습니다.


이제는 누가 울면 같이

울 힘도 없고,

 

누가 손 내밀면 붙잡아 줄

힘도 부족합니다.


제가 믿음이 없어서입니까,

아니면 제 안의 물이 정말

다 말라 버린 것입니까."

 

아무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침묵은

비어 있지 않았다.

 

이현은 그 고요 속에서 문득

하천의 물길을 떠올렸다.

 

폭우 때만 요란하게 불어나는

물이 아니라,

 

가문 계절에도 바닥에서 조금씩

스며 나와 흐름을 이어 가는 물.

 

겉으로 보기엔 미약하지만,

끊어지지 않는 물.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자신이 지금까지 사람들을

사랑한다고 생각해 온 방식에는

어딘가 과시가 섞여 있었는지도

몰랐다.

 

그는 도움을 주는 자리,

조언을 하는 자리,

흔들리는 사람을 붙잡아

주는 자리에 익숙했다.

 

그러나 정작 하나님 앞에서는

자기 메마름을 숨긴 채

버티고만 있었다.

 

마치 자신도 누군가를 살리는

강 인 것처럼.

 

아니었다.
그는 강이 아니었다.


기껏해야 바닥이 갈라진 물길에

불과했다.


깊은 샘에 연결되지 않으면

며칠도 버티지 못하는 사람.

 

그 순간, 아주 오래 눌러 두었던

눈물이 터졌다.


아내를 떠나보낸 뒤에도,

딸을 잃은 기억을 떠올릴 때도,

 

미국에 있는 아들이 전화 한 통

제때 하지 않을 때도

그는 이렇게 울지 못했다.

 

그러나 그날 밤 그는

마침내 무너졌다.

무너진 뒤에야 비로소 알았다.

 

무너짐은 끝이 아니라 바닥을

드러내는 일이며,

 

바닥이 드러나야 물이 스며들

자리도 생긴다는 것을.

 

그 후로 이현은 순자의 문제를

다른 방식으로 다루기 시작했다.

 

그는 먼저 순자에게 말했다.

 

"권사님,

아드님 대신 빚을 갚아 주는

일은 이제 하지 마십시오.

 

하지만 아드님을 버리지는 맙시다.

둘은 다릅니다."

 

순자는 오래 울었다.
그리고 어렵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현은 몇 사람의 도움을 받아

도윤을 채무 상담 기관에 연결했고,

 

알코올 상담도 받게 했다.

도윤은 처음엔 반발했다.


"다 소용없습니다."
그러나 정말 아무도 대신 빚을

갚아 주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깨닫자,

 

그는 마침내 자기 무너진

자리와 마주하기 시작했다.

 

과정은 더디고 수치스러웠다.

여러 번 약속을 어겼고,

몇 번은 다시 술에 손을 댔다.

 

그러나 이전과 다른 점이

하나 있었다.

 

더 이상 어머니가 끝없이 대신

무너져 주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그럼에도 완전히

버려지지는 않았다는 것이었다.

 

겨울 초입,

첫서리가 내리기 전날 아침이었다.


이현은 다시 하천 둑길을 걸었다.

여름 내내 넘칠 듯 요란했던

은 많이 줄어 있었지만,

 

맑고 가느다란 물길이 여전히

돌 사이를 지나고 있었다.

 

안개가 엷게 깔린 수면 위로

차가운 햇빛이 부서졌다.

 

그곳에 순자가 먼저 와 있었다.

 

"장로님."

 

그녀는 전보다 야윈 얼굴로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에는 전처럼

허물어지는 기색이 없었다.

 

"도윤이가 어제 상담 다녀와서…

처음으로 저한테 그러더군요.

미안하다고."

 

이현은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진짜 달라질지는 모르겠어요.

아직 멀었지요."


순자가 말했다.

"그래도 처음으로 제 힘으로

살아 보겠다고 했어요."

 

이현은 물을 바라보며 말했다.
"강도 하루아침에 깊어지진

않지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찬 공기 속에서 두 사람의 숨이

가늘게 피어올랐다.

 

순자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장로님은 어떻게 그렇게 끝까지

붙들 수 있으셨어요?"

 

이현은 한참 뒤에야 대답했다.

 

"끝까지 붙든 것이 아닙니다.
저도 놓고 싶었습니다.

 

화도 났고, 지쳤고,

저 사람 때문에 권사님까지

망가지는 걸 보면서 차라리

끊어 버리고 싶었습니다."

 

"그런데요?"

 

그는 흐르는 물 위로 시선을 두었다.

 

"제가 붙든 게 아니라,

저도 붙들려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요.


제가 이미 마른 사람이라는 걸

인정하고 나니까,

 

그제야 아주 조금씩 다른 물이

들어오기 시작하더군요."

 

순자는 아무 말 없이

눈시울을 붉혔다.

 

이현은 둑 아래 흐르는

물을 가리켰다.

 

"비 올 때만 흐르는 물은

금방 요란합니다.
하지만 해가 나면 금세 바닥을

드러내지요.


반대로 정말 마르지 않는

강은 조용합니다.

 

땅 깊은 곳에서 계속 물을

받아 오니까요.


사람의 사랑도 그런 것 같습니다.
열심만으로는 오래 못 갑니다.


하나님께 연결되지 않으면

정의도 사랑도 다 감정으로

끝나 버리지요."

 

순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조금 알 것 같아요.
사랑은 다 내어주는 게 아니라,

 

오래 흐르도록 지키는 것이기도

하다는 걸요."

 

이현은 미소를 지었다.
"네. 강에도 제방이 있어야

멀리 갑니다."

 

멀리서 교회 종소리가 들려왔다.
아침 햇살이 둑 너머로

조금씩 번지고 있었다.

 

마을은 여전히 완전하지 않았다.

도윤의 빚이 하루아침에

사라진 것도 아니었고,

 

순자의 상처가 모두 아문 것도

아니었다.

 

이현의 외로움도 끝나지 않았다.

미국에 있는 아들은

여전히 멀었고,

 

떠난 아내와 딸의 빈자리는

계절이 바뀌어도 그대로였다.

 

그럼에도 그는 알았다.
삶은 문제가 사라질 때

흐르는 것이 아니라,

 

상처를 안은 채로도 다시 흐르기

시작할 때 살아난다는 것을.

 

강은 자기 존재를 떠들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흘렀다.


어제의 물을 붙잡지 않고,

오늘 새로 공급되는 물로

다시 강이 되었다.

 

이현은 두 손을 외투 주머니에

넣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발밑 자갈 사이로 흐르는

물소리가 조용히 따라왔다.

 

문득 그는 마음속으로

짧게 기도했다.

 

 

주님,
제가 사람들 앞에서 마르지

않는 척하지 않게 하시고,


정말 주님께 연결되어

흐르게 하소서.


누군가를 살린다는 교만 대신,
오늘도 제게 새로 주시는

물 한 줄기로 살게 하소서.


그리고 제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판단보다 먼저 생명이

흐르게 하소서.

 

그는 뒤돌아 마지막으로

하천을 바라보았다.

 

겨울이 오고 있었지만,

물은 아직 흐르고 있었다.


많지 않아도,

요란하지 않아도,

분명히.

 

마르지 않는 강은
자기 힘으로 버티는 물이

아니었다.

 

보이지 않는 깊은 샘에

끝내 닿아 있는 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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