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새벽 5 시 30 분쯤이었다. 아침 운동을 위해 아파트를 나서다가 모퉁이에서 고양이 세 마리를 보았다.
어미 한 마리와 제법 자란 새끼 두 마리였다. 몸을 웅크린 채 앉아 있었는데, 길고양이라고 하기에는 셋 다 지나치게 건강해 보였다. 털에는 윤기가 있었고, 몸은 통통했다.
순간 집에 있는 닭고기를 가져다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 그것을 챙겨 나왔지만, 몇 분도 지나지 않아 그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처음에는 아쉬웠다. 그러나 곧 질문이 생겼다.
어미 고양이는 왜 그토록 빨리 자리를 옮겼을까.
생각해 보면 그 이유는 어렵지 않다. 새끼를 거느린 어미에게 낯선 존재는 우선 위험이다.
선의는 확인하기 어렵지만 위협은 한 번만 잘못 판단해도 돌이킬 수 없다. 그러므로 의심은 과장일 수 있어도, 경계는 대개 유리하다.
진화의 관점에서 보면 이런 반응은 일종의 합리성이다. 위험을 조금 지나치게 감지하는 편이 위험을 과소평가하는 것보다 생존 가능성을 더 높였을 것이다.
어미는 아마 나를 미워한 것이 아니라,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떠났을 것이다. 그 짧은 이동 속에는 설명 이전의 지혜, 사유 이전의 판단이 들어 있었다.
우리는 흔히 그런 것을 본능이라 부른다. 그러나 본능이라는 말은 때로 너무 쉽게 쓰여 사태를 단순하게 만든다.
그것은 단순한 충동이 아니라, 오랜 시간에 걸쳐 생존에 유리했던 반응들이 몸에 새겨진 결과일 것이다.
수많은 세대 동안 새끼를 더 잘 보호한 개체들이 살아남았고, 그 축적이 오늘의 어미 고양이 안에서 거의 자동적인 판단으로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그 새벽의 장면은 단지 한 마리 고양이의 조심성이 아니라, 생명이 오래도록 써 내려온 학습의 한 문장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자 시선은 자연스럽게 내 쪽으로 돌아왔다.
나는 왜 그들에게 먹이를 주고 싶었을까.
그 마음을 선의라고 부를 수는 있다. 그러나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보면, 그것 역시 순수한 결심이라기보다 인간이라는 종이 오랜 시간 형성해 온 심리적 경향의 표현일 수 있다.
연민, 공감, 보호 본능, 약한 존재를 보면 도우려는 충동 같은 것들 말이다. 인간은 홀로 살아남은 존재가 아니라 협력과 돌봄 속에서 생존해 온 존재다.
타인의 고통을 감지하고, 약한 개체를 보호하고, 서로의 취약성을 보완하는 능력은 단순한 도덕 감정이 아니라 종의 지속에 기여해 온 적응적 성향일 가능성이 크다.
이쯤 되면 한 가지 불편한 질문을 피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우리가 자신의 선택이라고 믿는 많은 것들은 과연 얼마나 자유로운가.
우리는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유전자, 초기 애착, 성장 환경, 반복된 경험, 사회적 학습, 심지어 그날의 몸 상태까지 우리의 반응에 개입한다.
누군가를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일, 위험 앞에서 움츠러드는 일, 약자를 보고 마음이 움직이는 일은 상당 부분 이미 형성된 회로를 따라 일어나는 것일 수 있다.
현대 뇌과학과 인지과학이 거듭 보여 주는 것도 비슷하다.
많은 결정은 의식이 자신을 설명하기 전에 이미 몸과 뇌의 더 깊은 층위에서 준비된다. 의식은 때로 결정의 창시자라기보다, 이미 일어난 일에 뒤늦게 의미를 부여하는 해설자에 가까워 보이기도 한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면 자유의지는 허상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만일 내가 느끼는 연민마저 진화의 산물이고, 내가 보이는 반응마저 신경 회로의 결과라면, 나는 어디까지 나 자신인가.
하지만 바로 그 지점에서 인간은 다시 하나의 독특한 가능성을 드러낸다.
인간은 자신의 반응을 반응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것을 다시 바라볼 수 있다.
고양이는 경계심이 생기면 몸을 옮긴다.
그러나 인간은 몸을 옮기기 전에, 혹은 옮긴 뒤에라도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왜 지금 이렇게 느끼는가.
이 감정은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가.
이 충동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이 물음은 단순한 지적 호기심이 아니다. 그것은 의식이 자기 자신을 대상으로 삼는 순간이며, 본능과 충동 위에 하나의 간격이 생기는 순간이다.
철학은 오래전부터 인간의 자유를 바로 그 간격에서 찾으려 했다. 완전히 원인으로부터 벗어난 자유가 아니라, 자신을 규정하는 힘들을 부분적으로라도 인식하고, 그 인식 속에서 응답 방식을 새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 말이다.
어쩌면 자유의지는 아무 영향도 받지 않는 순수한 독립성이 아니라, 영향을 받는 존재가 그 영향을 성찰함으로써 획득하는 2차적 능력인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은 다시 사람들에 대한 이해로 이어진다. 살아가다 보면 꽤 오랜 세월을 산 사람들 가운데서도 여전히 자기 욕심만 좇는 듯한 모습을 볼 때가 있다.
예전에는 그런 모습을 보면 답답했다. 왜 저 나이가 되도록 저토록 좁은 반응에서 벗어나지 못할까 싶었다.
그러나 이제는 조금 다르게 생각하게 된다.
사람은 생각보다 쉽게 변하지 않는다.
그럴 수밖에 없는 면이 있다. 반복된 생각과 습관은 신경학적으로도 하나의 경로를 만들고, 심리적으로도 익숙한 자기 구조를 형성한다.
오래 걸은 길이 점점 길이 되듯, 오래 반복한 감정과 판단은 마침내 성격처럼 굳어진다.
그래서 어떤 사람의 인색함이나 과도한 자기방어, 혹은 집착처럼 보이는 태도도 그 내면을 조금 더 들여다보면 단순한 악의라기보다 오래된 결핍과 불안의 부산물인 경우가 많다.
그는 욕심을 선택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오래전에 형성된 두려움의 체계를 반복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 사실은 인간을 무죄로 만들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해 가능하게는 만든다.
그리고 이해 가능성은 판단을 멈추게 하지는 않더라도, 판단의 온도를 바꾸어 놓는다.
중요한 것은 상대를 이해하려 애쓰되, 그가 반드시 변하리라고 과신하지 않는 일인지도 모른다.
변화는 가능하지만, 결코 간단하지 않다. 인간은 자기 삶의 궤도를 쉽게 수정하지 못한다.
기대가 지나치면 실망도 커진다. 그러나 기대를 조금 내려놓고 나면, 비로소 우리는 상대를 교정의 대상으로 보기보다 하나의 형성된 존재로 바라보게 된다.
그때 연민은 감상이나 관용의 포즈가 아니라, 인간 조건에 대한 인식에서 비롯된 태도가 된다.
오늘 새벽 그 어미 고양이는 나를 믿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나를 거부해서가 아니라 새끼를 지키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 반응은 적대가 아니라 보호였고, 불신이 아니라 생존의 언어였다.
사람도 어쩌면 크게 다르지 않다. 누군가의 날 선 말투, 과도한 경계, 좀처럼 고쳐지지 않는 욕심 뒤에도 언제나 설명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어떤 오래된 구조가 있다.
본능이라 불러도 좋고, 상처라 불러도 좋고, 생애의 누적된 학습이라 불러도 좋다. 이름은 달라도 그것은 한 인간이 오래 살아오며 몸과 마음에 새겨 놓은 반응의 지도일 것이다.
결국 오늘 새벽의 짧은 만남은 고양이에 대한 생각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것은 곧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생각으로 옮아왔다.
우리는 본능을 지닌 존재이면서, 동시에 본능을 돌아볼 수 있는 존재다.
우리는 프로그램된 반응 속에 살면서도, 그 프로그램을 부분적으로나마 의식할 수 있다.
아마 인간의 존엄은 완전한 자유에 있지 않고, 자신을 구속하는 조건들을 어렴풋이 알아차리면서도 끝내 더 나은 쪽을 향해 마음을 기울일 수 있다는 데 있을 것이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바로 그 사실을 깊이 이해하게 될 때, 우리는 사람을 더 차갑게가 아니라 더 따뜻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새벽의 고양이 가족은 이미 사라졌지만, 그들이 남긴 질문은 아직도 내 마음속을 조용히 걸어 다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