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05월18일(일요일) 종로구 부암동 [무계원&반계 윤웅렬 별장&자하미술관] 탐방기
탐방지 : 종로구 부암동 [무계원&반계 윤웅렬 별장&자하미술관]
탐방코스: [부암동주민센터.무계원 정류장~무계원(武溪園)~무계원(武溪園)에서 2025 무계원 기획전시 한국의 미(美) 16 [머무름에 빛을 담다]를 관람~반계 윤웅렬 별장(磻溪 尹雄烈 別莊)~자하미술관~자하미술관에서 임채욱 개인전 [무등산]을 관람~부암동주민센터.무계원 정류장]
탐방일 : 2025년05월18일(일요일)
날씨 : 청명한 날씨 [서울 종로구 부암동 최저기온 12도C, 최고기온 21도C]
탐방코스 및 탐방 구간별 탐방 소요시간 (총 탐방시간 3시간16분 소요)
12:48~12:52 연신내역에서 3호선을 타고 불광역으로 가서 불광역 2번 출구로 나옴 [4분 소요]
12:52~12:54 불광역.불광1동주민센터 정류장까지 도보로 이동
12:54~12:55 불광역.불광1동주민센터 정류장에서 부암동주민센터.무계원 정류장으로 가는 7022번 버스 승차 대기
12:55~13:08 7022번 버스를 타고 불광역.불광1동주민센터 정류장에서 부암동주민센터.무계원 정류장으로 이동 [13분, 10개 정류장 이동]
13:08~13:11 부암동주민센터.무계원 정류장에서 탐방출발하여 서울시 종로구 창의문로 5가길 2 번지에 있는 무계원으로 이동 [3분, 169m 이동]
[무계원(武溪園)
종로구 부암동에 개원한 도심 속 전통문화 공간이다.
고즈넉한 풍광 속에서 한옥을 체험하며, 전통과 문화를 통해 한국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특별한 공간이다.
“부암동 전통문화공간, 머물고 싶은 곳”
무계원의 건물은 과거 종로구 익선동에 있었던 서울시 등록음식점 1호 오진암의 건물 자재를 사용하여 지어졌으며 무계원의 대문을 비롯해 기와, 서까래, 기둥 등에 쓰였다.
조선말기 서화가 이병직의 집이기도 하였던 오진암은 1910년대 초 대표적인 상업용 도시한옥으로서 그 희소성과 함께 보존가치가 뛰어날 뿐만 아니라, 남북 냉전체제를 대화국면으로 이끈 7.4 남북공동성명을 도출해 낸 역사적인 장소였다.
무계원이 위치한 무계정사지는 안평대군이 꿈을 꾼 도원과 흡사해 화가 안견에게 3일 만에 몽유도원도를 그리게 했고 정자를 지어 시를 읊으며 활을 쏘았다고 전해지는 유서 깊은 장소이다.
무계원의 안채와 사랑채, 행랑채는 세미나, 강연, 회의실, 전시실 등으로 사용 가능하며, 안채 마루, 안마당과 뒷마당 등 부대시설에서는 다양한 전통문화 행사도 진행한다.]
13:11~13:39 무계원(武溪園)에서 2025 무계원 기획전시 한국의 미(美) 16 [머무름에 빛을 담다]를 관람
[종로문화재단] 2025 무계원 기획전시 한국의 미(美) 16 《머무름에 빛을 담다》
장소 : 무계원(서울시 종로구 창의문로 5가길 2) 안채, 사랑채, 별채
기간 : 2025-05-16 ~ 2025-07-13
시간 : 10:00 ~ 17:00
대상 : 누구나
요금 : 무료
문의 : 02-379-7132
전시 안내
무계원 기획전시 한국의 미(美)《머무름에 빛을 담다》전시를 개최합니다. ‘한국의 미(美)’전시는 한국의 무형문화유산을 계승하고 예술적 가치를 알리고자 기획되었습니다. 올해는 지속 가능한 천연 도료이자 한국을 대표하는 전통 공예 기법인 '옻칠'에 주목하여, 서울시 무형문화유산 옻칠장 제1호이자 대한민국 나전칠기 명장 제1호인 수곡(守谷) 손대현 장인의 작품 40여 점을 선보입니다. 60여 년간 옻칠에 전념해 온 손대현 장인의 작품을 통해 우리 전통문화유산의 가치를 새롭게 조명하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대한민국 1호 나전칠기 명장 손대현···세계가 주목하는 그날까지
나전칠기 외길 손대현 명장 무지개처럼 빛나는 자개에 매료
스승 민종태 선생의 호 '수곡' 그대로 물려받아 '자긍심' 높아
엘리자베스 여왕 보석함·이병철회장 선물 납품 등 고급화에 주력
기자명 이가은 기자
우리in터뷰 입력 2024.04.06. 08:00
(서울=우리뉴스) 이가은 기자 = 그저 보고만 있어도 마음을 사로잡는 매혹적인 것들이 있다. 누구라도 거부할 수 없는 매력적인 아름다움이 있다. 곤지암에 자리 잡고 있는 수곡공방 2층 전시장에는 그런 멋진 공예품들이 가득하다.
자개가 내뿜는 영롱한 빛깔과 살아 숨쉬는 듯 생동감 넘치는 문양, 머리카락 한 가닥의 흠조차 찾을 수 없는 반질반질한 검은 옻칠. 아무것도 모르는 문외한이라도 매료될 설명이 필요 없는 아름다움. 나전칠기이다.
그렇지만, 나전칠기는 보고 즐기기만 하는 예술품이 아니다. 직접 만지고 사용하면서 세월의 흔적이 묻어 또다른 멋을 만드는 귀한 생활의 동반자이다.
수곡공방 주인장 손대현 명장은 나전칠기와 평생을 함께 한 장인이다. 대한민국 1호 나전칠기 명장으로, 60년 가까이 나전칠기를 만들고 연구하고 후학을 가르치는데 몰두해왔다. 작품 한 점 한 점 모두 예술성과 실용성을 갖춘 전통 문화재일뿐 아니라 생활용품으로도 손색이 없다.
나전은 소라와 전복의 겉껍질을 갈아 내고 그 속에 조개 빛을 문양화한 공예품이고 칠기는 어떤 형태의 기물에 옻칠을 반복해 마감하는 것을 말하는데 나전칠기는 나전과 칠기의 장점을 딴 우리의 전통 공예품이다.
손대현 명장은 1949년 황해도 장연에서 태어났다. 1·4 후퇴 때 홀어머니와 월남해 전국 각지를 떠돌며 살았다. 피난민의 삶은 척박했다. 어려서부터 생활 전선에 뛰어들어야 했고 열여섯 되던 해 나전칠기와 인연을 맺게 됐다. 다니던 사무실 건물 2층에 나전칠기 작업장이 있었던 것이다.
"시간 날 때마다 작업하는 걸 구경하는 게 재미있었어요. 어느 날인가 한번은 완성품을 포장하는 걸 봤는데, 자개가 박힌 보석함과 쟁반을 상자에 넣고 있더라구요. 자개가 무지개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걸 보고는 그 매력에 푹 빠져버리고 말았죠. 그때 이 일을 해야겠다고 결심하게 됐습니다."
결국, 그 작업장에 들어가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렇게 3년 여를 보내면서 평생의 스승 수곡 민종태 선생을 알게 됐다. 제자가 되기로 하고 무작정 그 분을 찾아가 막무가내로 매달렸다. 처음부터 잘 될 리가 없었다. 그래도 한 달에 한 번씩 꾸준히 찾아다닌 끝에 간신히 허락을 받아냈다.
선생은 일본 고객과 고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의 주문을 도맡아 할 정도로 걸출한 장인이었다. 공방 직원도 서른 명이나 됐다. 일을 제대로 배우려면 그저 열심히 할 수밖에 없었다. 온 힘을 다한 노력 끝에 스물여섯이 되어서 마침내 스승님께 인정을 받게 됐다.
"하고 싶은 일을 해서였는지 정말 즐겁게 열심히 배웠던 것 같습니다. 나중에는 칠 솜씨 좋다고 소문이 났는지 다른 유명 공방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오기도 했었어요. 하지만, 스승님의 사랑이 워낙 각별했습니다."
손 명장은 1978년 가정을 꾸렸고 독립을 결심했다. 새로운 길을 개척해보고 싶었다. 스승님도 흔쾌이 허락했고 심지어 당신에게 들어온 주문의 7할을 맡기기까지 하셨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손 명장은 계속 주문받은 작품만 만들어왔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관심이 없었다. 집이 경매에 넘어가도, 월세로 살아가야 해도 작품에만 열중했다. 그 때 많은 작품을 만들었고 실력도 일취월장했다.
스승의 작품을 좋아했던 이병철 삼성 그룹 회장도 그의 고객이었다. 회장실 집기나 외국으로 나가는 선물들을 주로 맡았다. BMW 7 시리즈의 내장 데코레이션과 대형 PDP나 태블릿 PC 등의 외장을 꾸미는 일도 했다.
1989년 노태우 대통령의 유럽 6개국 순방 당시 나비 문양 서류함을 만든 것을 시작으로 김대중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할 때 기쁠 희(喜) 자와 학 네 마리를 나전으로 박은 보석함을, 엘리자베스 여왕이 한국을 찾았을 때 십장생 문양을 끊음질로 잔잔하게 꽉 채운 보석함을 만들었다.
많은 작품을 만들었지만 한 일본인 고객이 기억에 많이 남는다.
"1994년 70대의 일본인 노신사에게 가보인 보검의 칼집과 칼자루를 나전칠기로 장식해달라는 의뢰를 받았습니다. 그 일을 하는 8개월 동안 네 번이나 직접 찾아오시는 등 정성을 쏟았습니다. 완성된 날 무릎을 꿇고 완성품을 받으시더군요. 아주 근엄했던 양반이었는데, 작품을 보는 순간 소년처럼 기뻐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보상을 받은 기분이었습니다."
손 명장은 스승과 같은 수곡(守谷)이라는 호를 쓴다. 원래는 다른 호를 썼지만 스승의 호를 물려받았다. 스승님도 당신의 스승이셨던 전성규 사조(師祖)로부터 물려받아 평생 사용했다. 돌아가시기 여섯 달 전에 이런 내력을 일러주시고는 그에게 물려주셨다. 나전칠기의 종손임을 공인받은 셈이다. 곤지암에 차린 공방 이름도 당연히 수곡이라 지었다.
손 명장은 후학 양성에 진심이다. 여러 곳에서 기술을 전수하고 있다. 서울대에서 강의를 하고 문화재보호재단에서 운영하는 한국전통공예건축학교에서 옻칠반 교육을 맡았는데 제자들과 남다른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제자들이 '옻빛모임'을 만들어 늘 교류하며 전시회도 열고 좋은 일도 많이 하고 있다. 그들이 함께하는 '옻빛전 손대현과 제자들 展'은 지난여름 15회째를 맞았다. 지난 2월에는 서울 강남구 삼성2동에 '2024 희망온돌 따뜻한 겨울나기' 성금을 전달하는 등 자선사업도 하고 있다.
많은 것들을 이룬 손 명장이지만 아직도 잠자리에 들 때면 '빨리 내일이 와야 또 일할 수 있는데' 그런 생각밖에 들지 않을 정도로 일에만 매달린다. 나전칠기는 옻칠을 해나가면서 자개를 붙이고 다시 옻칠해 갈아내는 과정이다. 긴 시간 끈기 있게 작업에만 집중해야 한다. '겉칠을 번드르르하게 해놓으면 속이 보이지 않지만, 속이야말로 절대로 속이면 안 되는 것'이라는 스승의 가르짐을 지금도 금과옥조처럼 지키고 있다.
손 명장의 바람은 우리의 전통 나전칠기가 좀 더 발전하는 것이다.
"시대에 따라 디자인이나 문양은 바뀔 수 있어도 제작과정이나 기법은 바뀌면 안 됩니다. 빨리 하려 하고 쉽게 하려고 하면 근본을 잃게 돼요.
그리고 디자이너와 협업해 새로운 작품 세계를 구축해 나간다면 한국 최고의 전통 공예인 나전칠기를 세계가 주목하는 날이 올 거라고 믿습니다. 뒤를 이을 아들도 있고 좋은 제자들도 많으니 이제 우리 전통 기술이 세계에 널리 알려지기를 바랄 뿐입니다."
손대현 장인은
2004.02 서울특별시무형문화재 제1-3호 칠장 나전칠기 보유자
1980.02~ 수곡공방 옻칠장인
2018 전시회수곡 손대현 옻칠전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서울)
2018 전시회그 천년의 빛으로 평화를 담다
2017 전시회무형문화재 6인 특별기획전 (남한산성아트홀 갤러리, 서울)
2015 전시회한일 국제 칠예전 (극재미술관, 대구광역시)
2014 전시회서울의 솜씨, 서울의 장인전 (서울역사박물관 제1실, 서울)
2013 전시회한국공예의 법고창신 (밀라노 트리엔날레 디자인 전시관, 이탈리아)
2010 전시회천명전 (현대백화점 울산점, 울산광역시)
2001 전시회장인의 명품 특별초대전 (무형문화재전수회관, 서울)]
[안평대군의 별서 무계정사의 옛 활터에 세워진 ‘무계원’
K스피릿 기사 입력 2024.04.25. 10:40, 업데이트 2024.05.22. 11:56
기자명 강나리 기자
[여행자의 눈으로 본 서울] 서울 종로구 부암동 ‘무계원’
[편집자 주] 익숙해서 눈에 들어오지 않던 풍광도 ‘여행자의 눈’으로 보면 뜻밖의 특별함을 찾을 수 있습니다. 조선 건국 초부터 600년이 넘는 동안 수도 역할을 해온 서울의 숨은 명소와 보물, 그리고 사람들의 이야기를 만나봅니다.
인왕산 자락 시간의 층이 켜켜이 쌓인 부암동의 한 골목 봄철 철쭉이 핀 담장길을 따라가면 고즈넉하게 자리 잡은 ‘무계원(武溪園)’이 나타난다.
무계원은 조선 4대 세종대왕과 소헌황후 심씨 사이에서 태어난 셋째아들 안평대군 이용李瑢이 당대 문신, 학자들과 교류하던 별서인 무계정사의 활터 자리에 세워진 한옥형태의 문화체험공간이다.
무계원 인근에는 불과 몇 미터 위쪽에 근대 단편소설의 선구자로 ‘운수 좋은 날’을 쓴 현진건 선생의 집터가 나오고, 그 위로 ‘몽유도원도’를 현실에서 구현하고자 두어 칸 무계정사를 세우고 1천 그루의 복숭아나무를 심은 안평대군의 집터가 나온다.
무계원 대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계단을 따라 올라간 경사진 부지 위에 팔작지붕에 홑처마로 소박한 안채와 사랑채, 행랑채가 안마당을 둘러싸고 있다. 가장 큰 건물인 사랑채를 따라 오른편으로 돌아서면 숨은 듯 작은 공간이 펼쳐진다. 꽃들과 여러 종류 나무로 가꾼 작은 정원에 놓인 낮은 돌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사랑채의 툇마루가 있다.
이 툇마루에 앉아 눈을 감으면 숲속인 듯 새소리와 고요함이 밀려오고 책을 읽다가 기대어 깜빡 졸음에 빠지면 더없이 평안해지는 곳이다. 비 오는 날 들른다면 처마에서 떨어지는 빗소리에 복잡한 뇌 속, 가슴 속이 씻겨나갈 수도 있겠다.
다시 대문 앞쪽으로 돌아와 계단 위 핵심 공간으로 들어서면 왼쪽 행랑채 상설전시관에서 무계원 이름의 기원이 되는 조선 초기 산수화 ‘몽유도원도’의 영인본과 디지털 아트를 만날 수 있다. 몽유도원도는 대표적인 해외 반출 문화재로 진품은 현재 일본 덴리대학 부속 덴리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다.
현재 무계원은 조선 초 안평대군 당시의 한옥 형태가 아니다. 어린 임금 단종을 둘러싸고 권력의 대척점에 있던 형 수양대군(세조)에 의해 역모죄로 사사된 안평대군의 집터는 그 누구도 살지 않고 폐허로 남았다.
조선 시대 역모죄 죄인의 집터는 반역의 기운이 다시 살아날 수 있다고 하여 그 누구도 살지 못하도록 파훼하여 저수지를 만들거나 수풀로 만들었다. 일례로 양반, 상놈, 노비, 스님 모두가 더불어 사는 세상을 꿈꾸었던 조선시대 최초의 공화주의자 정여립의 사례를 들 수 있다. 선조는 정여립을 반역으로 몰아 기축옥사를 일으켰고 조정에서는 혈맥을 끊어 버린다고 정여립의 집터를 파헤치고 숯불로 지졌으며, 이후 제비산에 어떤 건물도 지을 수 없도록 했다.
그런데 무계정사를 지은 안평대군은 시와 글씨, 그림에 능한 예술가로 조선은 물론 명나라 황제와 사신들에게서 명필로 칭송받았다. 게다가 아버지 세종의 명으로 북방개척을 통해 확보한 4진 중 회령을 맡아 함경도에서 문제를 일으키던 야인들을 토벌한 문무에 다재다능한 인물이었다.
그런 이유로 안평대군이 머문 무계정사 터에는 왕기가 서렸다는 이유까지 덧붙여져 오랫동안 다 허물어져 가는 흉가로 남았다. 남은 흔적은 무계정사 안 바위에 ‘무계동’이라고 새긴 것인데 현재는 안평대군의 집터가 사유지되어 그 안에 있는 바위를 쉽게 볼 수 없다.
지금 무계원 건물은 1910년대 종로구 익선동에 지어진 유서 깊은 한옥으로, 조선말 서화가이자 미술애호가였던 송은 이병직의 집 ‘오진암’을 이축한 것이다. 오진암은 1970년대 삼청각, 대원각과 더불어 제3공화국 정치사의 중요 장소로 한 시대를 풍미한 한정식 요정으로 사용되었다. 특히, 7.4 남북공동성명을 도출한 논의가 이루어진 역사적 장소이기도 했다.
2010년 오진암 자리에 관광호텔이 신축되면서 사라질 위기에 처하자 김영종 종로구청장의 노력과 각 분야 장인들의 참여로 현재 무계원 자리로 옮겨 복원했다. 무계원을 찾은 이들 중 옛 오진암을 기억하는 이들도 있어 “예전 오진암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여기가 영화 ‘장군의 아들’을 촬영한 곳이다”라며 추억했다고 문화해설사는 설명한다.
안평대군의 꿈 속 무릉도원 무계정사는 흔적을 찾아볼 수 없지만, 그가 당시 왕실 최고의 화원 안견을 통해 구현하고자 한 세계는 ‘몽유도원도’에서 확인할 수 있지 않을까? (2편 계속)
▶ 대중교통으로 무계원(종로구 창의문로 5가길 2)을 가려면 지하철 1호선 종각역 3-1번 출구, 5호선 광화문역 2번 출구, 3호선 경복궁역 3번 출구에서 부암동주민센터 또는 무계원 정류장에서 하차하면 된다. 부암동 주민센터 오른편 골목으로 3분 정도 걸어 오르면 무계원에 도착한다.]
[“꿈에 본 이상향이런가?” 몽유도원도 속 안평대군의 무릉도원
K스피릿 기사 입력 2024.05.22. 15:26
기자명 강나리 기자
[여행자의 눈으로 본 서울] 무계원에서 엿보는 안평대군의 꿈 & 살생부가 된 ‘몽유도원도
[편집자 주] 익숙해서 눈에 들어오지 않던 풍광도 ‘여행자의 눈’으로 보면 뜻밖의 특별함을 찾을 수 있습니다. 조선 건국 초부터 600년이 넘는 동안 수도 역할을 해온 서울의 숨은 명소와 보물, 그리고 사람들의 이야기를 만나봅니다.
풍류 남아 안평대군 이용은 꿈에서 어떤 무릉도원을 만났을까? 종로구 부암동 무계원 사랑채에서 디지털 아트로 생동감 넘치게 구현된 ‘몽유도원도’를 따라 잠시 그의 세계로 떠나보자.
안평대군은 1447년 4월 20일 자신이 꿈에 거닐던 무릉도원을 당대 왕실 최고의 화원 안견을 통해 3일 만에 세상에 내놓았다. 그 3년 후인 1450년 9월 그는 유람하다가 창의문(자하문) 밖 계곡에서 물에 떠내려오는 국화를 보고 다래 덩굴과 석벽을 잡고 올라 ‘몽유도원도’ 속 풍광과 닮은 터를 찾아냈다.
“풀과 나무가 우거진 모습과 냇물과 산세의 깊숙하고 한적한 모습이 조금은 흡사했다.” 대군은 그곳에 두어 칸 집을 짓고 ‘무계정사武溪精舍’라 편액을 걸고 다섯 편의 시를 지었는데 그 서문에 이처럼 기록했다. 그는 이곳을 ‘정신을 휴양하면서 은거하기 위한 곳’이라 했다.
인적 없는 산속에서 결국 찾아낸 꿈속 무릉도원은 안평대군에게 무척 중요한 의미였던 듯하다. 안평대군이 쓴 ‘몽유도원기’와 ‘몽유도원도’ 속에 답이 있다.
‘몽유도원도’는 독특하게 왼쪽 아래 현실 세계에서 출발해 오른쪽 위 무릉도원까지 이어진다. 그리고 그 끝에 안견의 낙관이 찍혔다. 수많은 그림을 그린 안견의 작품 중 유일하게 본인의 작품임을 나타낸 것이다. 수묵화 대부분 오른쪽에서 시작해 왼쪽에 낙관을 찍는 것과 다르다.
왼쪽 현실 세계는 정면에서 바라본 풍광이지만, 이상향으로 향하는 길부터 도원까지는 위에서 내려다 본 부감법으로 그려 구도를 달리했다. 디지털 아트로 감상하면 구불구불 백 번이나 꺾인 길, 깎아지른 절벽과 기암괴석, 폭포수가 펼쳐지는 시냇물, 그리고 신비롭고도 쓸쓸한 도원을 마치 하늘 위를 나는 드론에서 촬영한 듯 역동적이다.
‘몽유도원기’를 요약하면 안평대군은 오솔길에서 산관야복 차림의 나그네가 알려준 길을 따라 인수(仁叟, 박팽년)와 말을 달려 험준한 산을 넘어 골짜기에 들어섰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며 복숭아나무 숲에 햇빛이 비쳐 연기 같은 노을이 일렁이는 곳이었다.
그리고 대나무 숲에서 사립문이 반쯤 열려 있고, 흙으로 만든 섬돌은 거의 부서져 있는 띠풀집을 만났다. 마을 앞 시내는 조각배 한 척이 물결 따라 흔들릴 뿐이어서 그 쓸쓸한 정경이 마치 신선이 사는 곳인 듯싶었다고 한다.
마침 옆에 몇 사람이 뒤따르고 있었는데 정부(貞父 최항), 범옹(泛翁, 신숙주) 등이 운을 맞춰 시를 짓기도 했다.
안평대군이 바라본 무릉도원은 소담하고 쓸쓸한 곳이었다. 그 다음 글에서 안평대군이 전하고 싶었던 마음을 짐작케 하는 이야기가 드러난다.
‘오색 찬란한 의복을 몸에 걸친 자는 발걸음이 산속 숲에 이르지 못하고, 바위 위로 흐르는 물을 보며 마음을 닦는 자는 또 꿈에 솟을대문과 고대광실을 생각하지 않는다. 이는 고요함과 시끄러움이 길을 달리하는 까닭이니 필연의 이치이기도 하다.
옛사람이 “낮에 행한 바를 밤에 꿈을 꾼다”고 했다. 나는 궁궐에 몸을 기탁하여 밤낮으로 일에 몰두하고 있는 터에 어찌하여 산림에 이르는 꿈을 꾸었단 말인가? 그리고 또 어떻게 도원에까지 이를 수 있었단 말인가? 내가 서로 좋아하는 사람이 많거늘, 도원에 노닐 적에 나를 따른 사람이 하필 이 몇 사람이었는가?
생각건대 본디 그윽하고 궁벽한 곳을 좋아하며 마음에 전부터 산수 자연을 즐기는 생각을 하고, 아울러 이들 몇 사람과 교분이 특별히 두터웠던 까닭에 함께 이르게 되었을 것이다.’
안평대군을 비롯해 당대 21명 문인들의 친필 찬시가 담긴 몽유도원도, 결국 살생부가 되었다
몽유도원도에는 대군의 몽유도원기를 듣고 그림을 감상한 박팽년, 성삼문, 신숙주 등 당대 21명 문인들의 찬시, 그 앞뒤로 안평대군의 서화 감상록인 발제(題跋)가 실려 긴 두루마리 형태로 남았다.
몽유도원도에 글을 남긴 이들은 대군의 꿈을 치세의 좋은 징조로 해석해 나라의 앞날을 축복하고 대군을 칭송했다. 또 다른 이들은 신선의 세계로 해석해 안평대군이 장수의 복을 누릴 것이라 축원하고 영원한 태평성대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그래서 ‘몽유도원도’에서 안견의 그림도 매우 뛰어나지만, 걸출한 문인들이 친필로 쓴 시와 글이 어우러져 회화와 서예, 문학적 가치가 매우 높은 작품으로 손꼽힌다.
하지만 형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안평대군이 36세 나이로 사사된 후 ‘몽유도원도’는 살생부로 불렸다. 수양대군의 편에 선 신숙주를 제외하고 이 그림에 찬시를 적은 이들 대부분 계유정난과 단종복위운동 과정에서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다.
학문과 예술에 뛰어나고 서예가로 명망이 높았던 안평대군이 꿈에 무릉도원을 보았을 때는 아버지 세종이 왕위에 있을 때이고, 무계정사를 완성했을 때는 형 문종의 재위 시절이었다. 조카 단종이 왕위에 올랐을 때는 문종이 어린 임금을 지켜달라고 고명대신으로 임명된 김종서에 의해 권력의 중심에 서 있었으며, 많은 이들이 그를 따랐다.
몽유도원기에 나타난 그의 뜻을 보면, 안평대군 본인은 늘 권력의 소용돌이 한 가운데 서 있지만 정작 고요함 속에 안빈낙도를 꿈꾸는 풍류남아로 남고 싶었다고 토로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13:39~13:42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의문로5가길 19 번지에 있는 반계 윤웅렬 별장(磻溪 尹雄烈 別莊)으로 이동
13:42~13:46 반계 윤웅렬 별장(磻溪 尹雄烈 別莊)을 사진촬영
[반계 윤웅렬 별장(磻溪 尹雄烈 別莊)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의문로5가길 19 (부암동)
반계 윤웅렬 별장(磻溪 尹雄烈 別莊) 또는 반계 윤웅렬 별서(磻溪 尹雄烈 別書)는 대한제국 시기에 법부대신과 군부대신을 지낸 반계 윤웅렬이 당시 도성 내에 유행하던 성홍열 등을 피해 지내기 위해 도성 밖 경승지로 첫 손에 꼽히던 창의문 밖 부암동에 조성한 별장이다.
1905년 6월에 착수, 1906년 3월 이전에 2층의 벽돌조 양풍 양식으로 건립되었다. 1911년 윤웅렬이 세상을 떠난 후에는 그 셋째 아들인 윤치창이 상속받아 안채 등 한옥 건물을 추가로 조성하여 오늘날과 같은 형태가 되었다.
1977년 3월 17일 서울특별시 민속자료 제12호 부암동 윤웅렬대감가로 지정되었다가, 2006년 7월 6일 반계 윤웅렬 별서로 명칭이 변경되었고, 이후 현재의 명칭으로 다시 변경되었다.
개요
독립운동가 겸 계몽사상가, 정치인 윤치호의 아버지이며 조선 말기의 무신인 윤웅렬이 조선 말기 창의문 밖 경승지의 땅을 매입하고 1906년 초, 지은 별장이다. 나중에 벽돌로 지은 서양식 2층 건물로 개조하였다가, 윤웅렬 사후 윤치창이 상속받고 안채 등 다시 한옥 건물을 추가로 지었다.
이 집은 경사진 언덕 위에 석축을 쌓고 약간 북쪽으로 방향을 틀어 동향〔庚坐甲向〕하여 자리잡았는데, 넓은 정원을 지나면 전면 높은 석축 위에 행랑채가 있고, 그 안에 사랑채와 안채가 각각 왼쪽과 오른쪽에 위치해 있다.
대문간이 있는 행랑채는 정면 5칸, 측면 1칸의 '一'자형 평면으로, 1칸 대문간 좌우로 각각 방 2칸이 있다. 막돌쌓기 기단 위에 사다리꼴 모양의 주춧돌을 놓아 사각기둥을 세웠으며, 가구(架構)는 3량이고, 홑처마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다. 대문을 들어서면 바로 앞으로 보이는 사랑채는 'ㄷ'자형 평면을 하였는데, 한옥 뒷부분에 자리한 2층 붉은 벽돌 건물이 이 별서 건물군(建物群) 가운데 가장 먼저 지어진 것이다.
안채는 사랑채 북쪽에 위치하였는데, 대문간을 들어와 오른쪽으로 꺾여 안마당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다. 안채는 전형적인 서울·경기지방의 'ㄱ'자형 평면을 바탕으로 하여 'ㄷ'자형 평면에 가깝게 구성되었다. 회첨골을 이룬 곳에 2칸 크기의 안방이 위치하였고, 안방 왼쪽으로 정면 2칸 크기의 대청과 1칸 건넌방이 차례로 있다. 안방에서 앞으로 꺾여 나온 곳에는 각각 1칸 크기의 부엌과 찬방이 차례로 자리잡았다. 대청은 우물마루를 깔았으며, 전면에는 세살덧문을 달았고 그 안에 유리분합문을 달았다.
대청ㆍ안방ㆍ부엌ㆍ찬방 앞에는 'ㄱ'자로 이어지며 좁은 널마루를 깐 쪽마루가 놓였다. 건넌방 앞에는 세살덧문을 단 누마루 반 칸이 앞으로 돌출되었고, 이 곳에 아궁이가 설치되어 있다. 건넌방 앞에 누마루를 둔 것은 대한제국시기 전통가옥의 변천 과정을 보여준다.
'반계 윤웅렬 별서'로 명칭 변경사유
서울특별시 민속자료 제12호는 윤치호(尹致昊,1865년~1945년)의 아버지로 대한제국 시기에 법부대신(法部大臣)과 군부대신(軍部大臣)을 지낸 반계(磻溪) 윤웅렬(尹雄烈,1840년~1911년)이 당시 도성 내에 유행하던 성홍열(猩紅熱, scarletfever)을 피해 지내기 위해 도성 밖 경승지로 첫 손에 꼽히던 창의문 밖 부암동에 조성한 일종의 별장 유적이다. 1905년 6월에 착수해 1906년 3월 이전에 완공되었는데 2층의 벽돌조 양풍 양식으로 지어졌다. 1911년 윤웅렬이 세상을 떠난 후 그 셋째 아들인 윤치창(尹致昌)이 상속받아 안채 등 한옥 건물을 추가로 조성했다. 이와 같은 동 문화재 조성연대, 조성자, 용도 및 성격, 문화재청의 중요민속자료 지정명칭 부여기준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문화재 지정명칭을 <부암동 윤응렬대감가(付岩洞 尹應烈大監家)>에서 <반계 윤웅렬 별서(磻溪 尹雄烈 別墅)>로 변경하고자 한다. 아울러 문화재 지정대상도 1977년 지정 당시 ‘일곽’이라는 불확정 개념으로 고시되었고, 동 유적 가운데서 최초 조성되고 유적의 성격을 가장 상징적으로 잘 보여주는 2층 벽돌조 양풍 건물은 사실상 ‘일곽’에서 제외되어 있었던 바 동 2층 벽돌조 양풍 건물을 중심으로 하여 추가 조성된 한옥까지를 포함, 문화재 지정대상을 총 3동으로 명시함으로써 문화재 관리의 정확성과 효율성을 제고하고자 한다.
기타
반계 윤웅렬 별장은 도성 밖의 인왕산 북쪽 계곡에 세워진 별장으로서 외국으로부터 도입된 근대 건축 양식이 주택에 적용되었다. 안채는 근대 서울 한옥의 변화상을 보이고 있다.]
13:46~13:51 서울 종로구 창의문로5가길 46 번지에 있는 자하미술관으로 이동
[자하미술관
종로구 부암동에 위치한 자하미술관은 서울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미술관이다. 도심에서 멀지 않으면서도 북악산과 인왕산이 한눈에 들어오는 아름다운 풍경을 자랑한다. 1층과 2층 전시실로 이루어져 있으며, 2층 전시실에서 내려다보는 인왕산 절경이 특히 아름답다.
자하미술관에서는 자연이 살아 숨 쉬는 아름다운 건축물과 더불어 미학적, 인문학적 바탕을 토대로 한 동시대 신진, 중진 작가들의 기획전을 만나볼 수 있다.
상세정보
문의 및 안내 02-395-3222
홈페이지 : https://www.zahamuseum.org/
주소 :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의문로5가길 46 (부암동)
관람요금 : 2,000원
이용시간 : 10:00~18:00 (입장마감 17:30)
휴관일 : 매주 월요일
주차 : 가능]
[자하미술관 관장 강종권이 미술관 홈페이지에서 자하미술관에 관하여 소개한 글
"문화적 역할"에 충실한 미술관
작가와 함께 능동적으로 사유하는 미술관
자하미술관은 서울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미술관입니다.
중심가에서 5분 거리에 위치해 있으면서도 북악산이 내려다보이며, 비봉능선이 병풍처럼 한눈에 들어와 아름다운 풍경을 자랑합니다.
자하미술관은 앞으로 작가들과의 만남을 지속적으로 꾸려나갈 것이며, 기존의 작품 세계를 변화시키거나 새로운 실험과 재정립을 필요로 하는 기성 작가와는 그 고민의 일말이라도 함께 하고자 합니다.
또한 가능성은 무궁하지만 상업적 테두리 안에 갇혀 자유롭지 못한 젊은 작가들의 실험작들을 집중적으로 소개하여 미술관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겠습니다.
자하미술관은 미술을 둘러싼 현실을 직시하고 그 현장에 새겨진 작가와 작품의 흔적을 항상 새삼스럽게 여겨서 그것을 효과적으로 담아낼 수 있고 다양한 이야기가 오고 가는 공간이 되고자 합니다.
감성적으로 소통하는 실험 정신 아래 다름을 만끽할 수 있는 능동적 사유를 격려하여 창의가 유발되는 공간으로 이곳을 만들어 간다면 하늘도 자줏빛 노을을 작품 삼아 이 공간을 흥미롭게 맴돌 것입니다.]
13:51~16:15 임채욱 작가 본인의 작품 해설을 들으면서 자하미술관에서 임채욱 사진전 [무등산]을 관람
[임채욱 개인전 《무등산》 2025.4.30~5.18
광주는 언제나 산의 품 안에 있었다. 이 도시가 품은 깊은 상흔과 숭고한 정신을 묵묵히 바라본 존재, 무등산은 늘 그 자리에 있었다. 이번 전시는 무등산이라는 하나의 풍경이 어떻게 시간과 역사, 정신과 생명의 상징으로 확장될 수 있는지를 예술적 시선으로 풀어낸 장대한 여정이다. 작가는 자연이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이 전시는 그 응시의 기록이자, 되새김이다.
무등산(광주의 역사를 지켜본 산)
광주의 북쪽을 굽어보며 우뚝 서 있는 무등산은 이 도시가 겪은 모든 아픔과 희망, 절망과 연대의 순간들을 묵묵히 바라보아 왔다. 5월의 광주도, 그 이전도, 그 이후도, 모두 이 산의 시야 안에 있었다. 작가는 이 무등산을 단지 자연의 풍경이 아니라, 시간과 기억의 목격자이자, 역사의 증인, 그리고 자연과 인간이 평등하게 마주서는 존재로 바라보았다.
그의 카메라는 산을 위에서 내려다보지 않고, 산의 눈높이에 서서 마주 본다. 즉 작가의 프레임 안에는 산과 인간이 함께 호흡하는 시선이 담겨 있다. 산은 어떤 말도 하지 않지만, 우리는 그 속에서 깊은 위로와 질문을 동시에 마주하게 된다.
무등산 의재길(차와 예술의 길)
무등산 자락을 따라 이어지는 ‘의재길’은 근대 한국화의 대가 허백련이 평생 자연과 함께 예술을 일구었던 길이다. 그는 평생을 무등산 아래서 차를 키워 후학을 양성했으며, 그 정신을 기려 무등산을 오르는 초입에는 그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임채욱 작가는 이 길을 따라 걸으며, 자연 앞에 겸허한 태도로 임했던 의재의 정신을 되새겼다. 그는 산이 지닌 시간과 기억, 그리고 그 안에 스며든 예술가들의 정신을 사진 속에 차분히 응축해낸다.
무등산 오월길(5.18 민주화 길)
임채욱 작가는 이번 전시를 준비하며 광주의 5월을 품은 장소들을 담았다. 금남로, 전일빌딩245, 5‧18민주광장, 전남대학교 그리고 5‧18민주묘지까지. 그 여정은 시간의 결을 따라 걷는 기억의 순례였다.
전남대학교 안에 자리한 윤상원 열사의 동상 뒤편에는 매년 봄 동백꽃이 핀다. 그 동백은 피어 있는 꽃봉오리 채로 떨어진다. 그러나 낙화는 끝이 아니며, 해마다 동백은 다시 피어나고, 그 피어남은 단순한 계절의 순환이 아니라, 윤상원과 함께하며 울고 웃은 이들의 정신이 퍼지는 순간이다.
작가는 오월길을 통해 생명의 사슬, 정신의 귀환을 담았다. 이는 역사 앞에서 예술이 할 수 있는 가장 정직한 태도이며, 시각적 헌사이다.
무등산 물들길(남도 정원의 길)
‘산은 물의 몸이고, 물은 산의 정신이다’
작가는 무등산의 5월의 정신이 끊임없이 흐르는 물을 통해 이어진다고 믿는다. 꽃잎이 떨어진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정신은 물에 실려 계속 흘러가야 한다는 것이다. 작가는 배롱나무의 붉은 꽃잎이 물 위에 떨어지고, 흘러가는 장면을 장노출기법으로 포착했다.
배롱나무는 백일 동안 피고, 지고, 또 다시 피는 꽃이다. 그 오랜 개화의 시간은 곧 생명에 대한 집념이며, 사라짐과 동시에 잔류를 상징한다.
꽃잎은 물 위에 떨어지고, 흘러가지만 그 흔적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가 포착한 존재는 단지 꽃이 아닌, 꽃이 물들인 시간인 것이다.
그러므로 물들길은 꽃이 져버린 비탄의 장이 아니라, 생명의 개화이며, 기억의 순환, 정신의 흐름, 희생의 존엄이 담겨 시간이 이어지는 풍경이다. 광주의 붉은 꽃은 아직 피어 있으며, 작가는 그 흐름이 결코 끊기지 않음을 배롱나무로 표현했다.
무등산 전시는 하나의 거대한 풍경이자, 기억이며, 생명이다.
무등산은 늘 광주를 내려다보며 고통과 희생, 연대의 시간을 묵묵히 지켜보아 왔다. 자연은 말을 하지 않지만, 모든 것을 본다. 무등산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고, 백일홍은 다시 피고, 동백은 다시 떨어진다. 그 반복 속에서 우리는 매번 새로운 삶을 살아간다.
무등산에 대한 응시는 꽃에 대한 관찰로 이어진다. 자연을 바라보는 임채욱 작가의 세계가 어떻게 확장되고 있는지, 그 확장의 중심에 있는 ‘꽃’이라는 존재에 대한 깊은 관찰과 사유를 함께 선보이고자 한다.
작가는 고유한 시선과 자연에 대한 섬세한 관계 맺기를 통해 자신만의 작업 세계를 꾸준히 구축해왔다. 사진이라는 매체를 넘어 마음과 시간의 결을 담아내려는 그의 진정성은 이번 전시에서도 깊이 있게 드러난다.
이번 전시는 단지 무등산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무등산이 지켜본 광주의 역사, 그 안에 깃든 사람들의 정신, 그리고 다시 피어나는 생명의 이야기를 전하고자 한다. 관객들에게 삶과 죽음, 기억과 재생이라는 보편적인 감각들을 다시 마주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자하미술관 큐레이터 길민영]
[전일빌딩245
‘전일빌딩 245’ Bl는 역사적 현장으로서의 건축형태와 공간을 ‘245’로 상징화하여 전일빌딩의 의미를 되새기고 미래로의 스토리텔링을 담고자 하였다. ‘245’ 정중앙의 원은 5·18 민주화운동 당시 헬기 사격의 선명한 탄흔을, 4가지 컬러 구성은 전일빌딩의 콘텐츠 공간을 형상화하였다. 전일빌딩에 헬기 사격이 가해졌다는 사실은 수많은 목격자와 증거, 탄흔이 기억하고 있다. 전일빌딩에서 발견된 245개 탄흔이 가장 명확한 증거이며 헬기 사격을 증거 하는 문서 등이 이를 뒷받침한다. 전일빌딩 245의 탄흔을 지속 가능하게 보존해야 하는 이유는 5·18 민주화운동을 후대에 온몸으로 알리는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이용안내
개장일 : 2020. 5. 11.
이용시간
[운영시간]
- 하절기 09:00~22:00
- 동절기 09:00~21:00
[관람시설(5·18 기념공간, 남도관광센터, 디지털정보도서관)] 10:00~19:00
※ 관람시설은 관람 종료 30분 전까지 입장
※ 층별 관람시간이 상이하므로 세부 운영시간은 홈페이지 참조
쉬는날 : 1월 1일 / 설 및 추석 당일]
[전남대학교 민주길
전남대학교는 교내 민주화 운동의 정신, 인물, 장소들의 기념공간을 정비하고, 이들을 하나로 잇는 둘레길 같은 문화공원 개념의 ‘민주길’을 조성했다.
민주·인권·정의, 그리고 자유와 평화라는 인류 보편의 가치를 공유하는 생활 속의 민주주의 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다.
‘민주길’은 학내에 산재해 있는 11개의 기념공간을 3개 노선으로 연결하고, 세 곳의 공간으로 나눠 구성됐다.
제1노선은 학교의 중심축으로 '정의의 길(1.7㎞)'로 이름 붙여졌다. 5.18사적지 1호인 전남대 정문을 시작으로, 박관현 언덕 - 윤상원 숲 - 김남주 뜰 - 교육지표마당 - 벽화마당 - 전남대 5.18광장 - 박승희 정원 - 용봉관(옛 본부)을 거쳐 다시 전남대 정문으로 돌아오는 코스이다.
제2노선은 캠퍼스 동쪽에 조성된 '인권의 길(2㎞)'이다. 전남대 5.18광장 - 용봉열사 추모의 벽 - 오월열사 기억정원 - 전남대 후문 - 용지 - 전남대 정문으로 이어진다.
제3노선은 학내 서편에 조성된 '평화의 길(1.5㎞)'로, 경영대 교차로 - 윤한봉 정원 - 수목원 - 전남대 정문으로 연결된다.
각각의 기념물과 기념공간에는 명칭을 새롭게 하고 소제목과 안내문, 지도, 이미지 등을 추가한 공간안내판(국, 영문)을 세워 순례객들의 이해를 돕는다. 윤상원의 숲에는 어록석 8개가, 김남주 뜰에는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이란 시를 새긴 바닥시문 1개가 들어선다.
정의의 길에는 80년 당시의 구호와 유인물 등을 새긴 바닥도판 37개가 깔린다. 인권의 길 바닥도판에는 학생들의 증언과 전남대 동문들의 묘비문 등을 새긴 39개가 배치되고, 평화의 길에는 통일운동과 관련 구호를 중심으로 17개가 설치돼 누구나 간단한 문구를 쉽게 읽으며 민주화운동 당시의 모습들을 떠올려볼 수 있도록 했다.
세 곳의 공간은 핵심지구, 역사지구, 연계지구로 나눠진다. 핵심지구는 1만5천㎡ 규모의 백도(백색 건물의 도서관 별칭) 앞 5·18 광장이다. 광장 중앙의 수변공간인 '봉지'를 광복절의 의미를 담아 지름 8.15m로 축소했다. 잔디밭과 보행로 간의 높은 턱을 없애고 전체를 대형 잔디광장으로 재편됐다.
역사지구는 1만7천200㎡에 10개의 5·18 기념공간과 시설들로 구성됐다.
5·18 발원지이자 사적 제1호인 정문 옆에는 반사 연못과 분수를 조성하는 등 규모를 넓혀 민주광장으로 조성됐다. 정문과 5·18 광장을 잇는 캠퍼스 중심축은 420m가량의 수로와 함께, 정원과 휴식·기념 공간이 어울리는 새로운 도보 진입로가 추가됐다. 연계지구(6천㎡)에는 시작, 도약, 성장 등을 주제로 한 정원들로 단장됐다.]
[민주길과 사람들
시대를 거역한 저항시인 김남주
약력
1946년 전남 해남군 삼산면 출생
1969년 전남대 영어영문학과 입학 후 3선개헌 반대운동과 교련 반대운동에 기여
1972년 유신체제를 비판한 지하신문인 "함성"지 제작.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 전남대에서 제적
1974년 [창작과 비평]에 "진혼가", "잿더미" 등 7편의 시 발표
1977년 한국기독교농민회의 모체가 된 해남농민회 결성
1979년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남민전) 조직원으로 서울에서 활동 중 구속.
징역 15년을 선고 받고 광주교도소에 수감
1988년 형집행정지로 투옥생활 9년 3개월만에 출감
1990년 5·18항쟁시선집 [학살] 출간. 1992년까지 민족문학작가회의 민족문학연구소장 1994년 췌장암으로 사망하여 광주 망월동 5·18묘역 안장
“대학생활, 실망과 좌절의 세월이었다”
"1972년 10월 초순, 수업이 없을 때나 점심시간 때면 할 일 없이 누워서 또는 앉아서 잡담을 하여 시간을 죽였다. 대학생활 4년, 그것은 실망과 좌절의 세월이었다. ‥‥수업 내용이란게 미국식 생활양식과 용어를 기계적으로 외우게 하거나 문답형식의 문장을 입으로 주고받고 하는 것이었다." ( [불씨 하나가 광야를 태우리라] 중에서 )
들불열사 윤상원
약력
1950년 전남 광산군 임곡면 출생
1971년 전남대 정치외교학과 입학, 친구 김석균, 정오현과 함께 전남대 연극반 가입
1975년 군 복무를 마치고 삶에 결정적 계기가 된 김상윤(국문 68)과 만남
1978년 ‘교육지표사건’을 듣고 근무하던 서울의 주택은행을 그만두고 광주로 귀향
1978년 광천공단에 있는 한남플라스틱에 취업
1979년 들불야학 1기 교사로 ‘일반사회’ 과목을 16개월 간 강의
1980년 인천에서 열린 전국민주노동자연맹 결성 집회에 발기인으로 참석, 광주·전남 지역을 대표하는 중앙위원으로 선임
1980년 5월 18일 광주시민을 학살하는 공수부대에 맞서 싸우기 시작. 5월 27일 새벽, 계엄군이 전남도청을 공격하자 이에 맞서 싸우다가 총에 맞아 사망했다. 이후 시신은 망월시립묘역에 관번호 57, 검안번호 4-1, 묘지번호 111로 매장되었다가 1980년 6월 22일 가족들이 망월묘역으로 가 파묘 후 봉분하였다. 이때 시신에 3도 화상과 머리 쪽 외상 및 자상까지 나서 가족들도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다.
“왜 총을 들었는가”
윤상원은 5·18항쟁이 시작되자 들불야학 식구들과 ‘일반사회투사회보’를 발행해 광주학살의 참상을 알리고 투쟁을 조직적으로 이끌었다.
26일 도청에서 시민수습대책위 대변인 자격으로 외신 기자회견을 가졌다. 윤상원은 “왜 총을 들었냐”는 물음에 다음과 같이 답했다.
“권력을 강도질하려는 전두환 쿠데타군의 음모를 만천하에 까발리고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지키기위해 광주시민은 떨쳐 일어났습니다.”
5월27일 새벽 4시 전남도청에서 공수부대에 맞서 싸우다가 최후를 맞았다.
1982년 윤상원을 들불야학에 인도한 박기순과 영혼결혼식을 가질 때 “님을 위한 행진곡”이 처음 불려졌다.
윤상원 숲
오월광주의 영원한 대변인 윤상원은 5·18민중항쟁 당시 도청에서 최후까지 민주주의를 사수했던 시민군이다.
전남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한 윤상원은 안정된 직장을 버리고 한국사회의 불의와 모순을 개혁하기 위해 운동가의 길을 걷는다. 1978년부터 들불야학의 강학으로 활동했으며, 노동운동에 투신하였다. 5·18 당시 윤상원은 광주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투사회보’를 제작·유포하였고, 새로운 항쟁지도부의 대변인으로 활동하다 5월 27일 새벽 계엄군의 총격에 31세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전남대는 ‘진실된 삶, 정의로운 사회, 더불어 사는 세상’을 만들고자 했던 윤상원 열사를 기리기 위해 2007년 사회대 앞에 그의 흉상과 비석을 세웠고, 2019년 윤상원열사 기념홀을 건립하였으며, 2020년 ‘윤상원 숲’을 조성했다.
‘님을 위한 정원’으로도 불리며 윤상원 열사에 대한 기념이 아닌 ‘기억’을 통해 당시의 윤상원 열사를 위로하고자 조성했으며 윤상원 열사의 흉상의 시선 방향으로 중심축을 선정하였다.
광주의 넋 박관현
약력
1953년 전남 영광군 불갑면 출생
1978년 군복무를 마치고 전남대 법과대학 행정학과 입학
1978년 12월 광주공단노동자실태조사 작업 참여
1979년 전남대 사회조사연구회 창립에 참여
1979년 들불야학에 참여하면서 학생운동과 사회운동에 뛰어듬
1980년 전남대 총학생회장에 선출된 후
1980년 봄 학생운동을 주도
1980년 5·17 계엄확대 조치로 신군부의 1급 체포 대상이 됨
1982년 서울서 노동자생활을 하다가 체포된 후 광주교도소에 수감
1982년 7월부터 5·18항쟁 진상규명 등을 요구하며 장기간 단식
1982년 10월 11일 건강악화로 전남대병원에서 29세의 나이로 사망
광주의 넋으로 화하다
1980년 민족·민주화 성회를 주도했던 박관현은 5월 17일 비상계엄의 전국확대와 함께 신군부의 1급 체포대상이 되었다. 오랜 피신생활을 하다 1982년 4월에 체포되어 소요죄 등의 혐의로 1심에서 5년형을 선고받고 광주교도소에서 수감된 박관현은 재소자 처우개선과 5·18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40여 일간 단식하며 민주화운동을 지속하다 건강 악화로 29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다.
민주화의 불씨 박승희
약력
1972년 전북 전주에서 출생
1990년 목포 정명여고 졸업
1990년 전남대 식품영양학과 입학. 용봉 편집위원으로 활동
1991년 4월 29일 "2만 학위 단결, 미국반대, 노태우 정권 타도"를 외치며 분신
1991년 5월 19일 21일 간의 병상투쟁 끝에 사망
1990년대 초의 학생운동과 박승희
1991년 4월 하순 명지대 학생 강경대가 노태우 정권퇴진과 반미를 외치며 시위를 벌이다 경찰의 구타로 사망했다. 전남대에서 경찰의 폭력성을 규탄하는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이 시위 도중 박승희는 독재정권 타도 등의 구호를 외치며 학생회관 앞에서 온몸에 시너를 끼얹고 분신했다. 그는 분신 후 21일 간의 병상투쟁 끝에 결국 사망했다.
"이 시대에 우리는 눈물을 흘린 여유가 없다. 지금 우리에게 열사는 필요없고 전사가 필요할 때다. 이 두 미디 말이 항상 마음에 남아 있었습니다. 끝까지 살아남아 열심히 싸우고 먼저 떠남을 그 어떤 말로도 사죄를 구할 수 없겠지요. 하지만 제 길이 2만 학우 한명 한명에게 반미의식을 심어주고 정권타도에 함께 힘썼으면 하는 마음에 과감히 떠납니다.‥‥먼저 갑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후회는 없습니다."
한평생 민주화를 위한 거름이 되다! 윤한봉
약력
1971년 축산학과 입학
1974년 민청학련 사건 피체
1979년 현대문화연구소 설립
1980년 5·18민중항쟁 관련 핵심 주동 인물, 내란 음모죄로 지명 수배
1981년 미국정치망명 신청
1984년 재미한청련 결성
1995년 민족미래연구소 설립
2007년 폐기종 투병 중 영면, 국민훈장 동백장 추서
올바른 5·18정신 알리며 인간다운 삶을 위해 투쟁
합수 윤한봉. 똥과 오줌을 섞어 만든 거름이란 뜻의 ‘합수’란 호는 자신을 낮춰 민중과 함께 살고자 했던 故 윤한봉 동문의 삶이 가득 담겨있다.
대학시절 민주화 운동에 뛰어 든 윤 동문은, 미국으로 망명해 재미동포운동 토대마련에 힘썼다. 인간다운 삶을 위해 노력했던 그는 2007년 지병으로 눈을 감았지만 올바른 5·18정신을 알리며 죽는날까지 민주화를 위해 투쟁했다.
소외된 이의 벗이 되어 살고자했던 윤한봉 동문의 삶을 회고록 <망명>과 5·18기념재단에서 발간한 <5·18의 기억과 역사> 책을 바탕으로 돌아보고자 한다.
실천하는 지식인, "털보 다윗" 명노근 교수
약력
1933년 1월 5일 광주 출생으로 전남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영문학 석사를 받은 후, 미국 미시간대학에서 교육학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1961년 전남대 조교로 근무를 시작하여 1965년에 영어영문학과 교수로 발령받았다.
교육지표 사건
상아탑의 평범한 학자였던 명교수가 지식인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것은 송기숙 전남대 교수와 함께 1978년 이른바 ‘교육지표 사건’을 주도하면서부터이다. 국민교육헌장을 전체주의의 도구라며 통렬하게 비판하고 인간화 교육을 주창한 당시 선언은, 박정희 독재에 시달리던 국민들로부터 ‘경이로운 양심의 결단’이라는 지지를 얻었다.
이 사건으로 전남대 교수직에서 해임되었다가 복직하면서 명노근 교수는 “우리 사회가 민주화되면 깎겠다”는 굳은 의지로 턱수염을 기르게 되었고 이는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다.
명노근 교수는 광주 YMCA 간사에서 시작해 전국 YMCA 연맹 이사장까지 지낸 한국 YMCA의 대표적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1979년 광주 YWCA 구국기도회 사건으로 투옥되었으며, 또한 1980년 광주항쟁 당시 송기숙 교수와 함께 시민수습대책위원을 맡아 ‘내란중요임무종사죄’로 또 다시 옥살이를 했다.
광주 보안대에 끌려간 송기숙 교수와 명노근 교수가 당시 김대중 선생으로부터 공작금을 받았다는 허위 진술을 강요당하며 고문 받을 때 서로 틀린 액수를 말해 다행히 사형선고를 피했다는 일화가 전해지기도 한다.
1980년 5월 전남대 교수평의회 부의장이던 명노근 교수는 교수들을 설득해 평화적 학생 시위에 교수들의 참여를 이끌어내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또 시민군이 전남도청을 접수한 5월 21일 이후 시민수습대책위원을 맡아 평화적 해결에 노력하다 항쟁이 진압된 뒤 내란중요임무종사죄로 1년 반 동안 옥살이를 했다.
1984년 학원 자율화 조치로 전남대 영문과 교수로 다시 복직했고, 전남대 교수평의회의장, 교수협의회장을 역임했다.
수차례의 연행과 구금, 두 차례의 긴 옥고를 치르기도 했던 명노근 교수는 부인 안성례 여사와 다섯 아이들을 곱게 키운 아버지이기도 했다. 딸들에게 잔심부름 한 번 시킨 적 없고, 반찬 타박을 하지 않았으며, 언제나 검소했던 그는 혼자 있어도 즐거워하고, 남들과 함께 있으면 더욱 즐거워한 외유내강의 인물이었다.
명노근 교수의 부인인 안성례 여사는 1980년 5월 광주기독병원 간호감독으로 계엄군의 폭력에 다쳐 실려 온 시민들을 돌보는 등 ‘오월의 어머니’로 통한다. 또한 광주 시의원으로 일하며 ‘전국 최초 3선 여성시의원’이라는 타이틀을 달기도 했다.
지식인의 사회 참여를 당연시했던 명노근 교수는 ‘5·18 광주민중혁명 위령탑 건립 및 기념사업추진위원회’ 위원장과 5·18기념재단이사를 맡아 활동하면서 5·18을 국가 기념일로 제정하고 민중 항쟁으로서 위상을 정립하는 데 힘쓰시다 2000년에 심장마비로 작고하셨다. 민주화의 큰 별, 행동하는 지식인이었던 명노근 교수는 우리 후배들에게 양심 있는 교수, 존경할만한 스승의 본을 보여주신 큰 어른이다.]
[민주길과 역사
01. 1960년대, 민주를 꿈꾸기 시작하다
4·19혁명
1960년 4·19혁명은 이승만정권의 315부정선거 및 장기 집권 음모에 맞서 민주주의를 회복시킨 우리나라의 최초의 시민혁명이다. 혁명에 참여한 전남대생들 중에서는 15명이 중경상을 입었고 37명이 군경에 연행되었다. 혁명 후 전남대생들은 민주화 결의안을 채택하였고, 교수들도 각 단과대학별로 학원민주화를 지지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한일협정 반대(6.3사태) 시위
1961년 구테타를 통해 집권한 박정희 정권은 1965년 12월 대한민국에 불리한 내용의 한일협정 비준서를 교환하여 한일국교를 정상화 했다. 그러나 대학생과 야당은 1964년부터 1965년 협정이 체결된 후까지 굴욕적인 한일협정체결 반대 및 무효화를 주장하는 대규모 시위를 전개했다. 이에 정부는 계엄령과 휴교 등 물리적 조치로 대응하였고, 전남대에서는 1964년과 1965년 두해에 걸쳐 이홍길(사학61)외 30여명의 학생들이 징계를 받았다.
3선개헌과 장기집권 음모 저지투쟁
박정희 정권은 1969년 국회에서 장기집권 음모의 일환으로 3선개헌안을 변칙 통과시켰다. 1971년에는 대학통제정책으로 교련교육을 강화하였고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부정을 저질렀다. 대학가는 박정희 정권에 맞서 3선 개헌 반대, 교련 반대, 부정선거 규탄 등 다양한 반독재 투쟁을 전개했다. 박정희 정권은 학생들의 저항에 1971년 전남대학교를 비롯 8개 대학에 휴교령을 내렸다. 이 일련의 사태로 33명의 전남대 학생들이 학사징계를 받았다.
<녹두>지 발간
1971년 10월 13일 전남대에서는 대학을 병영화하려는 박정희 정권 타도를 주장하는 최초의 지하신문 ‘녹두’지가 발행되었다.
02. ‘겨울공화국’ 유신체제에 저항하다
유신체제와 병영화된 대학
박정희 정권은 1972년 1월 17일 유신체제를 선포하였다. 유신체제는 대통령 1인에게 권력을 집중시켜 영구 집권을 가능하게 한 민주주의의 완전한 부정이었다. 언론의 자유는 억압받았으며, 대학은 반복되는 위수령과 긴급조치, 휴교령 등으로 황폐해졌다.
<함성>지 사건
유신체제 선포 직후인 1972년 12월에 유신헌법을 비판하는 지하신문인 ‘함성’이 전남대와 광주시내 일원에 뿌려졌다. 유신체제에 저항한 최초의 유인물인 ‘함성’은 이듬해 제호를 ‘고발’로 바꾸고 전국에 배포하려다 적발되어 이강(법학69)외 10명이 구속되었다.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연맹)사건
1974년 서울대, 전남대, 경북대 학생 등이 주도하여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을 조직하여 유신체제에 반대하고 경제·사회적 모순들을극복하려 했다. 정부는 긴급조치 4호를 선포하여 이 단체와 관련된 학생들을 내란음모죄로 몰아 구속하고 사형 등 중형을 언도했다. 윤한봉(축산 71, 전남북 총책), 김상윤(국문 68, 전남대 연락책) 등 18명의 전남대생들이 중형을 선고받았다.
03. 교수와 학생의 민주교육 선언
<우리의 교육지표> 선언
1978년 6월 27일 송기숙 교수를 비롯한 11명의 전남대 교수들은 "학원의 민주화와 민주교육 그리고 외부의 간섭 배제"를 주장하며 "우리의 교육지표"를 발표했다. 성명서 발표직후 서명교수들은 전원 연행되어 해직되었지만 타대학 및 단체들의 지지 성명이 이어졌다.
학생들의지지 시위
유신체제 선포 직후인 1972년 12월에 유신헌법을 비판하는 지하신문인 ‘함성’이 전남대와 광주시내 일원에 뿌려졌다. 유신체제에 저항한 최초의 유인물인 ‘함성’은 이듬해 제호를 ‘고발’로 바꾸고 전국에 배포하려다 적발되어 이강(법학69)외 10명이 구속되었다.
전남대학교 학생상담지도관실 방화사건
1979년 10월, 학원 감시 사찰기관으로 바판받아 온 "전남대학교학생상담지도관실"에 불을 질러 학원사찰에 항의한 사건이 발행했다. 이 사건으로 20여 명이 연행·구속되고, 제적 및 정학 처분을 받았다.
1970년대의 사회부문 및 서클(동아리) 운동
전남대 학생들은 사회모순을 연구하고 시정하려는 다양한 운동을 전개하였다. 민청학련의 사람들이 중심이 된 "민주 구속자 협의회" 를 비롯하여 가톨릭농민회, 민족사회연구회, 들불야학, 고전독서회(RUSA), 홍사단아카데미 등 여러 이념, 종교, 문예 운동 단체들이 생겨났다. 이런 사회부문 및 서클운동은 1980년대 초에 전개된 민주화운동의 주요한 동력으로 작용했다.
04. 1980년 봄·민족민주화 성회
유신체제 붕괴와 민주화 욕구의 분출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저격으로 사망하면서 유신체제가 붕괴되었다. 1980년 봄 국민들은 새로운 헌법에 기초한 민주주의를 갈망했다. 반면에 전두환을 중심으으로 한 신군부세력은 민주주의를 부정하고 군사독재체제의 연장을 획책했다. 이에 전국의 대학생들과 야당, 그리고 민주인사들은 신군부의 반민주적 음모를 규탄하고 민주화를 촉진하기 위한 대규모 집회와 시위를 연달아 개최했다.
총학생회 부활과 학원 자율화
1980년 3월, 서클 대표들이 모여 학자추를 구성했다. 4월에 80년 5월 민주화의 봄을 이끄는 중요한 역할을 한 총학생회가 출범하고 박관현(법학78)이 총학생회장으로 선출되었다. 학생회는 출범 후 계엄령의 즉각 해제, 어용교수와 학내 구 잔재세력 청산, 병영 집체훈련 거부, 민주 인사들의 복권 및 석방을 촉구했다.
민족·민주화 성회
전남대 총학생회는 1980년 5월 6일 비상학생총회를 개최하고 5월 8일부터 14일까지를 “민족·민주화 성회” 기간으로 정하여 학원 자율화, 비상계엄 해제, 양심있는 교수·시민 등의 동참을 요구하였다. 5월 14일 전남대생 7천여명은 도청앞 광정에 집결, 집회를 개최하였고 16일은 전남대교수·학생·시민 등 5만여명이 참여하여 횃불 시위를 벌였다. 전남대 교수들도 비상계엄의 즉시 해제, 민의를 반영한 헌법제정 및 민주 정부로의 정권이양, 학원 민주화의 달성, 학생들의 슬기롭고 평화로운 행동 등을 촉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하면서 성회에 동참했다.
05. 5·18항쟁, 민주화 운동의 분수령
비상계엄의 전국 확대
1980년 5월 17일 밤 신군부는 비상계엄을 전국에 확대하여 모든 정치활동이 중지되고, 정치 목적의 옥·내외 집회 및 시위가 금지되었으며, 언론에 대한 사전검열 조치가 강화되고, 대학에 휴교령이 발동되었다. 김대중, 문익환, 김영상 등 야당 및 재야운동 지도자들이 체포·구금 혹은 연금되었다. 김대중에게는 재판에서 "김대중 내란 음모사건" 혐의로 사형선고가 내려졌다.
전남대 정문 앞 최초 충돌
5월 18일 오전 10시, 학교에 등교한 200여 명의 전남대생들과 정문을 막아선 계엄군·경찰들이 정문 앞 용봉천 다리를 사이에 두고 대치·충돌하였다.
계엄군의 만행
계엄군은 18일 오후부터 강력한 시위 진압을 시작했다. 시위 참가자는 물론 도로 주변에 있는 일반시민들까지 곤봉을 구타하고 짓밟았으며 대검으로 찌르기도 했다.
시민들의 궐기·차량시위
계엄군의 만행에 분노한 시민들은 19일부터 시내로 나와 계엄령 해제, 전두환 퇴진, 김대중 석방을 외치며 대규모 시위를 전개했다. 20일 오후, 공수부대의 만행에 격분한 200여 대의 택시들이 버스와 함께 무등경기장에서 금남로로 경적을 울리며 차량시위를 전개했다.
계엄군의 집단 발포
전남대 총학생회는 1980년 5월 6일 비상학생총회를 개최하고 5월 8일부터 14일까지를 “민족·민주화 성회” 기간으로 정하여 학원 자율화, 비상계엄 해제, 양심있는 교수·시민 등의 동참을 요구하였다. 5월 14일 전남대생 7천여명은 도청앞 광정에 집결, 집회를 개최하였고 16일은 전남대교수·학생·시민 등 5만여명이 참여하여 횃불 시위를 벌였다. 전남대 교수들도 비상계엄의 즉시 해제, 민의를 반영한 헌법제정 및 민주 정부로의 정권이양, 학원 민주화의 달성, 학생들의 슬기롭고 평화로운 행동 등을 촉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하면서 성회에 동참했다.
06. 해방광주 대동세상을 열다
시민공동체의 형성
27일 새벽, 시민군이 지키던 도청, YMCA, YWCA, 전일빙딩, 광주공원 등에 계엄군이 진입하여 양측 사이에 총격전이 벌어졌다.이 총격전으로 많은 시민군이 사망하고 광주는 다시 계엄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사망자 207명 , 부상자 2,392명 , 기타희생자 987명(5·18민주유공자 보훈대상자 현황)
5·18항쟁의 의의
5·18항쟁은 국민의 생명과 인권, 민주질서를 유린한 국가폭력에 맞서 자신의 생명과 인권을 지키고 민주정부를 세우려한 민주·인권 운동이다. 5·18항쟁은 1980년대 반독재 민주화운동의 정신적 원천으로 한국을 민주국가로 발전시키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5·18항쟁은 시민들이 대동단결된 시민공동체를 형성하여 인간다운 삶의 공동체를 꾸려낸 성숙한 시민정신을 보여주었다.
07. 5·18항쟁의 전개 과정
계엄확대 조치와 산발적 시위 (1980.5.17 ~ 5.18)
- 5.17 비상계엄령 전국확대, 광주시내 대학에 계엄군 진주 및 학생연행
- 5.18 전남대 정문에서 학생, 공수부대 간 최초 충돌
- 5.18 오후 유동 3거리에 공수부대 등장하면서 진압작전 감행
- 5.18 시위과정에서 시민·학생 549명이 검거됨
강경진압에 대한 시위 확산 (1980.5.19 ~ 5.20)
- 5.19 시민들 광주시내 운집하기 시작. 11공수여단 광주에 증파
- 5.20 오전 가톨릭센터 앞에서 남녀 30여 명이 속옷만 입은채 구타당함 / 공수부대와 시민간의 공방전 계속
- 5.20 오후 200여 대의 택시가 전조등을 켜고 경적을 올리며 차량시위 전개
- 5.20 저녁 광주 MBC 사옥 방화
계엄군의 집단 발포와 무장항쟁 (1980.5.21.)
- 5.21 오전 실탄 지급받은 공수부대원 맨 앞으로 배치
- 5.21 도청 스피커에서 애국가 울리자 공수부대 사격시작
- 5.21 시민들이 아시아 자동차 공장에서 군용트럭, 장갑차 수십대 끌고 나옴
- 5.21 화순, 나주지역에서 무기 획득한 시위대들이 도청 앞에서 시가전 전개 / 오후 공수부대원 시 외곽으로 철수
해방광주, 시민자치 공동체 (1980.5.22 ~ 5.26)
- 5.21 오전 실탄 지급받은 공수부대원 맨 앞으로 배치
- 5.21 도청 스피커에서 애국가 울리자 공수부대 사격시작
- 5.21 시민들이 아시아 자동차 공장에서 군용트럭, 장갑차 수십대 끌고 나옴
- 5.21 화순, 나주지역에서 무기 획득한 시위대들이 도청 앞에서 시가전 전개 / 오후 공수부대원 시 외곽으로 철수
무력진압과 결사항전 (1980.5.27.)
- 5.27 새벽 탱크를 앞세우고 계엄군 시내로 진입
- 5.27 새벽 도청주변완전 포위, 시가전 전개
- 5.27 새벽 계엄군, 도청을 비롯한 시내전역 장악하고 진압작전 종료
- 5.27 새벽 계엄군 무력 진압으로 5·18항쟁 막을 내림
08. 5월운동에서 6월항쟁으로
5·18항쟁의 계승을 위한 민주화 운동
1980년대 전남대 캠퍼스에서는 5·18항쟁의 진상 규명과 학살자 처벌, 대학민주화, 구속학생들의 석방과 복학, 광주학살을 묵익한 미국의 사과, 노동자·농민 등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배려 등을 목표로 수많은 시위가 이어졌다. 또한 전남대 총학생회장인 박관현이 1982년 구속 후 사망하자 전남대와 광주시내 일원에는 5·18항쟁 이후 가장 치열한 대정부 투쟁이 전개되었다. 매년 10월 박관현 열사 추도 시위는 대학가를 달구는 연레행사가 되었다.
총학생회의 부활
1984년에 전남대생들은 대학 민주화를 위해 ""학원자율화추진위원회""(얼마후 민주회복추진위원회로 바뀜)를 구성했다. 1985년에 학도호국단제 대신 직전제에 의한 총학생회가 출범하고 학생회장에 오병윤이 당선되었다.
▶ 1985년 투쟁조직 및 전국적 연대조직 출범
● 민주쟁취·민중수호·민족통일 투쟁위원회(삼민투)
● 5·18진상규명투쟁위원회(오진투)
● 전국학생총연합(전학련)
● 호남지구학생연합(호학련)
민주화의 승리, 6월 항쟁
직선제 개헌과 민주화에 대한 열망.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전두환 대통령의 4·13호헌조치, 최루탄에 의한 이한열 사망 사건 등이 맞물리면서 1987년 6월에 전국적인 규모의 민주화운동이 전개되었다. 결국 노태우 민정당 후보는 국민의 민주화 요구에 굴복하여 직전제 개헌을 수용한 "6·29선언"을 발표했다. 이한열의 망월동 묘역 안장을 계기로 광주는 전국의 민주화운동 희생자들이 안장을 희망하는 민주화의 성지가 되었다.
전남대 교수들의 시국선언
전남대 교수들은 민주화 운동의 중요한 길목마다 시국선언문을 발표했다.
- 1986년 4월, "우리의 견해"라는 시국선언문을 발표하여 민주화와 대학의 자율을 촉구
- 1986년 6월, 전남대 교수들을 비롯하여 전국 23개 대학교수 265명이 "우리의 뜻을 다시 한 번 밝힌다" 라는 시국선언문을 발표하여 민주헌법 제정 등을 촉구.
- 1987년 5월, 60명의 교수들이 "현 시국에 대한 우리들의 견해"라는 성명서를 발표하여 직전제 개헌 촉구.
09. 민주주의의 승리 그 중심에 선 전남대
6월항쟁 후의 민주화운동
1987년 6월항쟁 후 한국사회는 정치 뿐만 아니라 교육, 노동, 문화 등 각 분야에서 민주화 운동이 더욱 거세게 일어났다. 민주화세력은 5·18 진상규명과 책임자처벌, 남북화해와 평화통일, 민중의 삶의 질 개선, 민주화 세력의 집권 등을 희망하며 민주화 운동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6월항쟁 후의 학생조직
6월항쟁 후 학생운동을 이끈 전국조직으로 전국 대학생대표자협의회 (전대협)가 출범했다. 전대협은 발족선언문에서 자주적 민주정부 수립, 조국의 평화통일, 민중연대, 학원자주화, 백만학도의 통일단결 등을 활동목표로 내걸었다. 전대협의 출범과 동시에 광주·전남지역 대학생들은 전남지역대학생 대표자협의회(남대협)을 결성했다. 전대협은 1993년에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으로 바뀌었다.
전국 학생운동의 중심지로 떠오른 전남
6월항쟁 후 전남대 학생운동의 큰 흐름은 민주화, 반미, 통일운동,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연대운동으로 1990년대 이후 전국 학생운동의 중심에 서서 활동했다. 학생들 중 여러 명이 전국학생조직의 대표를 맡았다.
치열한 학생운동과 박승희 분신
1991년 4월 26일, 전남대생이었던 박승희(식품영양학, 90)는 명지대생 강경대를 사망에 이르게 한 정부의 폭력성을 규탄하며 온몸에 시너를 끼얹고 분신했다. 전남대생들은 박승희를 추모하는 대규모 집회와 가두시위를 전개하였고, 이후 매년 4월에 박승희 정신계승 집회를 열고 있다.
교수들의 민주화운동
1987년 6월항쟁 후 전남대는 대학민주화의 일환으로 전국에서 두 번째로 총장 직선제를 관철시켰다. 또 교수평의회를 결성하여 학원민주화를 도모했다. 같은 시기에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민교협)" 라는 전국적 규모의 민주교수 조직이 출현했다.
전남대 교수들의 시국선언
전남대 교수들은 민주화 운동의 중요한 길목마다 시국선언문을 발표했다.
- 1986년 4월, "우리의 견해"라는 시국선언문을 발표하여 민주화와 대학의 자율을 촉구
- 1986년 6월, 전남대 교수들을 비롯하여 전국 23개 대학교수 265명이 "우리의 뜻을 다시 한 번 밝힌다"라는 시국선언문을 발표하여 민주헌법 제정 등을 촉구.
- 1987년 5월, 60명의 교수들이 "현 시국에 대한 우리들의 견해"라는 성명서를 발표하여 직전제 개헌 촉구.
10. 민주화운동의 미래 그리고 우리
정치적 민주화
오랜 민주화운동의 역사는 권위주의 정권을 몰아내고 민주적인 정부의 수립을 이끌어냈다. 5·18항쟁이 일어난지 16년만에 전두환 노태우 두전직 대통령을 부정부패 및 내란 목적 혐의로 법의 심판을 받게 했다.
민주주의의 제도화
‘5·18특별법’ 제정 운동은 1980년대 이후 민주화 운동의 주요 목표 중의 하나였다. 1995년 ‘5·18민주화운동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어 광주 시민들의 명예회복이 이루어졌다. 또 1997년네는 5월 18일이 ‘광주민주화운동기념일’로 제정되었으며, 국가인권위원회와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설치등 인권보호와 신장을 위한 진일보한 제도적 조치들이 속속 마련되었다.
통일운동의 큰걸음
민주화운동세력들은 정치적 민주화 외에 통일을 또 하나의 중요한 과제로 설정했다. 통일운동은 2000년 6월 15일 남북정상회담으로 큰 진전을 이루었다. 남북의 두 정상은 대립과 반목으로 점철된 남북관계의 기본 틀을 평화공존과 화해·협력으로 전환하는 남북공동선언에 합의·서명했다.
민주화운동의 승화
억압되었던 시민의 삶의 개선이 민주화운동의 새로운 목표가 되면서 노동자와 농민 운동뿐만 아니라 여성, 평화, 인권, 문화예술, 소수자, 환경운동 등 새로운 운동들이 출현하여 민주주의의 지평을 넓혀가고 있다. 이제 민주화운동은 새로운 삶의 구성원리로 승화될 것이다. ]
[광주에 생긴 '윤상원'로, 직접 다녀왔습니다
이돈삼 기자
오마이뉴스 기사 등록 : 2024. 10. 8. 10:18
1980년 5월 시민군 대변인 지낸 윤상원 열사 기리는 도로명 만들어져
'윤상원민주로'와 '윤상원길'이 있다. 1980년 5월 시민군(민주투쟁위원회) 대변인을 지낸 윤상원 열사를 기리는 길이다. 5·18 민주유공자 이름을 딴 전국 첫 번째 명예도로명이다. '명예도로명'은 지역사회 헌신도, 공익성 등을 고려해 사람이나 기업의 이름을 따 부여한다.
'윤상원민주로'는 지난 7월, 윤상원 열사 생가가 있는 광주광역시 광산구 신룡동 천동마을로 가는 임곡로의 일부 구간에 이름 붙여졌다.
진곡 교차로에서 임곡동 행정복지센터까지 5.7㎞에 이른다. '윤상원길'은 열사의 태 자리가 있는 마을길 329m를 일컫는다. 광주광역시 광산구가 5·18의 상징이 된 윤상원 열사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기 위해 주민과 유관단체 의견 수렴을 거쳐 부여했다. 지난 5일 이 곳들을 찾았다.
직접 가 본 윤상원민주로
명예도로명은 또 있다. 광주 금남로 금남공원에서 국립아시아문화전당까지 518m 구간은 '유네스코 민주인권로'로 지정돼 있다. 서방사거리에서 4·19민주혁명역사관 앞을 거쳐 광주중앙초등학교에 이르는 구간은 '4·19로'로 이름 붙여졌다.
전남대학교 정문 앞 '송현로'는 대구 달서구 송현동의 이름을 따 붙였다. 대구 달서구엔 광주 중흥동의 이름을 딴 '중흥로'가 있다. 동서 화합의 상징이다.
이뿐 아니다. 빛고을 광주엔 역사 속 인물의 이름이나 시호를 딴 도로명이 많다. 정의롭지 못한 권력에 맞선 저항의 거리인 금남로는 정충신의 군호를 딴 도로 이름이다. 정충신은 이괄의 난 때 큰 공을 세워 금남군에 봉해졌다. 충장로는 임진왜란 때 의병장 충장공 김덕령의 시호를 따 붙였다. 김덕령은 비운의 의병장에서 민중의 영웅으로 되살아났다.
제봉로는 고경명, 구성로는 전상의, 경열로는 정지, 죽봉로는 김태원, 필문로는 이선제, 서암로는 양진여, 눌재로는 박상, 사암로는 박순의 호를 땄다. 의재로는 허백련, 송강로는 정철, 하서로는 김인후의 호에서 따 왔다.
"우리는 최후의 1인까지 투쟁할 것입니다. 탱크를 동원해 진압하겠다면 우리는 어차피 질 수밖에 없겠지요. 그러나 강경 진압이 오늘의 사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패배할 것입니다. 그러나 내일의 역사는 우리를 승리자로 만들 것입니다."
윤상원 민주투쟁위원회 대변인이 기자회견에서 한 말이다. 1980년 5월 26일 브래들리 마틴, 테리 앤더슨 등 내외신 기자 10여 명 앞에서다. 기자회견을 끝내고 오후 7시, 대학생 시민군에게 총기를 지급한 윤상원은 나이 어린 고등학생과 여학생의 귀가를 강하게 권했다.
"학생들의 충정은 이해합니다. 하지만 이 싸움은 어른들이 해야 합니다. 나이 어린 학생들은 부디 살아남아야 합니다. 오늘 여러분이 목격한 이 장면을 그대로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고 들려줘야 합니다."
5월 27일 새벽, 도청 방송실에서 박영순의 애절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시민 여러분! 지금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형제, 우리 자매들이 계엄군의 총칼에 숨져가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계엄군과 끝까지 싸웁시다. 우리는 광주를 사수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를 잊지 말아 주십시오.'
새벽 4시, 3공수여단 소속 공수부대원이 도청 후문을 통해 쳐들어오기 시작했다. 후문이 뚫렸다는 함성과 함께 총성이 울렸다. 윤상원은 복부 총상으로 사망했다. 도청 회의실 2층 강당 무대 뒤에서다. 시민군의 무장투쟁도 막을 내렸다.
윤상원 열사는 1950년 8월 전라남도 광산군 임곡면 천동마을(현 광주광역시 광산구 신룡동)에서 3남 4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임곡초교, 광주북중, 살레시오고교를 거쳐 전남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했다. 1학년 마치고 입대, 하사로 복무했다.
1975년 복학한 윤상원은 외무고시를 준비한다. 김상윤(전남대 68학번)을 만난 건 그즈음이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됐다가 특사로 풀려난 김상윤으로부터 의식화 학습을 받았다. 윤상원은 4학년 때 4·19기념 시위를 계획하는 등 활동가의 길을 걷는다.
대학 졸업을 앞둔 78년 1월 윤상원은 서울 주택은행에 입사한다. 그해 6월 일어난 전남대 교수들의 교육지표사건과 학생 시위 얘기를 듣고, 6개월 만에 사직했다. 광주로 돌아온 윤상원은 광천공단 한남플라스틱 공장에 취업, 노동자 생활을 한다.
78년 5월 광천동성당 교리실에서 박기순이 이끈 들불야학이 시작됐다. 청소년 노동자 35명과 강학 8명으로 출발했다. 광주 최초의 노동야학이었다. 윤상원은 한남플라스틱 근무와 들불야학 예비교사 활동을 위해 광천동 시민아파트로 이사했다. 그의 거처는 야학 강학과 형제들 모임 장소가 됐다.
시민을 향한 공수부대의 집단 발포... 500명 이상 총상
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김재규에 총에 쓰러졌다. 유신체제의 종말이었다. 긴급조치 9호가 해제되고, 정치권은 대통령 직선제에 합의했다. 전두환과 하나회는 12·12군사반란을 일으켜 군권을 장악했다.
대학가는 80년 '서울의 봄'을 맞았다. 5월 16일 광주에선 민족민주화 대성회가 열렸다. 전두환 신군부는 5월 17일 자정을 기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국회를 점거했다. 김대중 등 정치인과 재야인사를 잡아들였다. 윤상원의 정신적 스승인 김상윤도 녹두서점에서 예비검속됐다.
김상윤이 계림동에 연 녹두서점은 사회과학 서적을 유통하며 청년들 모임과 배움터 역할을 했다. 18일 아침부터 예비검속자 가족이 모여들고, 5월항쟁의 구심점이 됐다. 윤상원, 박효선, 김상집 등이 모여 화염병을 만들고 투사회보를 작성했다. 녹두서점은 유인물과 현수막 등 시위 물품 보급소였다.
공수부대의 무자비한 진압과 참상을 지켜본 윤상원은 시민에게 상황을 알릴 소식지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투사회보는 박용준이 필경하고 서대석, 이영주 등 들불야학 강학과 형제들이 제작·배포했다. 20일 저녁 버스와 택시가 참여한 차량 시위가 벌어졌다. 시위대를 폭도로 매도한 방송국이 불태워졌다.
21일 도청 앞 금남로에 시민 10만여 명이 모였다. 항쟁 이후 최대 인파였다. 어디선가 애국가가 울려 퍼지더니, 시민을 향한 공수부대의 집단 발포가 시작됐다. 최소 54명이 숨지고 500명 이상 총상을 입었다.
분노한 시민들은 무장을 서둘렀고, 윤상원은 시민군과 함께 도청을 점거하며 '해방광주'를 맞이했다. 22일 윤상원은 가두방송을 하고 투사회보를 배포했다. 윤상원은 들불야학, 극단 광대, YWCA 송백회 청년활동가들과 함께 시민궐기대회를 계획했다.
23일 학생과 재야 수습대책위원회 주도로 무기 회수가 시작됐다. 윤상원은 정상용, 이양현 등과 함께 수습대책위원회 교체에 합의했다. 오후 3시 도청 앞에서 제1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가 열렸다. 입장문 '우리는 왜 총을 들 수밖에 없었는가?'가 발표됐다.
24일 제2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에선 전두환 화형식이 열렸다. 윤상원과 투사회보 제작팀은 광주YWCA에서 항쟁파 지도부를 결성했다. 정상용이 위원장, 윤상원과 김영철·윤강옥은 기획을 맡기로 했다.
25일 광주YWCA에 재야인사들이 모여 총기 회수 문제를 논의했다. 이성학·장두석·박석무는 회수 반대, 조비오·조아라 등은 비폭력을 주장했다. 윤상원은 대학생 시민군을 조직하고 총기 회수를 주장한 김창길 학생수습위원장을 몰아냈다. 항쟁파 중심 학생수습위원회가 탄생했다. 위원장 김종배, 내무부위원장 허규정, 외무부위원장 정상용, 대변인 윤상원, 상황실장 박남선, 기획실장 김영철, 홍보부장 박효선이 맡았다.
26일 새벽 계엄군 이동 소식이 전해졌다. 오전 8시 이성학·홍남순·이기홍·김성용·조비오 등 수습위원 17명이 계엄군의 시내 진입에 맞서 '죽음의 행진'을 벌였다. 계엄사와의 협상은 '빈 손'이었다. 자정까지 무기를 반납하지 않으면 안위를 보장할 수 없다는 최후통첩을 받았다.
제5차 범시민 궐기대회가 끝난 직후, 다시 김창길이 나타나 무기 반납을 주장했다. 윤상원은 20여 분 동안 반대 주장을 폈다. 박남선이 천장에 권총을 쏘며 "어떤 놈이 우리를 계엄사에 팔아넘기려 하느냐"고 외쳤다. 학생수습위원회는 정상용을 위원장으로 하는 민주투쟁위원회로 명칭을 바꾸고 결사항전을 결의했다.
5월 항쟁이 끝나고 82년 2월 20일, 슬픈 결혼식이 열렸다. 주인공은 들불야학에서 '아픈 시대'를 함께 고민한 신랑 윤상원, 신부 박기순이었다. 윤상원은 80년 5월 27일 계엄군의 총에 맞아서, 박기순은 78년 12월 26일 불의의 사고로 사망했다.
이들의 죽음을 안타까워 한 가족과 친지들이 광주 망월묘역에서 영혼결혼식을 올렸다. 그때 헌정된 노래가 '님을 위한 행진곡'으로 알려져 있다. '님을 위한 행진곡'은 소설가 황석영이 백기완의 장편시 '묏비나리'를 개작해 가사를 붙이고, 대학가요제 출신 가수이자 작곡가 김종률이 곡을 붙였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데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시대의 노래로 역사에 남겨진 '님을 위한 행진곡'은 그렇게 우리 곁으로 다가왔다. 지금은 80년 5월을 가장 넓고 깊게 기억하는 방식이 됐다. 각종 시위나 추모제의 시작과 끝을 함께했다. '님을 위한 행진곡'은 광주를 넘어 대한민국, 아니 세계인이 민주주의를 외치며 부르는 노래가 됐다.
윤상원 열사는 국립5·18민주묘지에 묻혀 있다. 생가와 기념관은 광주 천동마을에 있다. 기념관에 윤상원 동상이 서 있다. 왼손에 책을, 오른손엔 총을 들고 당당히 선 모습이다. 5개와 18개의 기둥으로 5월과 18일을, 그리고 백색의 전남도청을 형상화한 조형물도 있다. '윤상원민주로'를 타고 '윤상원길'을 따라가서 만난다.]
[사진작가 임채욱(1970~)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동양화과를 졸업하고 2006년부터 카메라를 이용한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처음에는 사실적인 풍경에 작가의 감정을 드러내는 컬러를 결합해 '마음으로 느끼는 이상적인 풍경'을 만드는 데 집중했다.
2011년부터는 한국의 산을 주제로 한 사진을 한지에 프린트하여 선보이고 있다.
설악산을 비롯해 북한산, 지리산, 덕유산 등을 수없이 오르내리며 한국인의 정서에 깊은 영향을 미친 산의 모습과 기운을 담아낸 그의 작품은 붓 대신 카메라로 그린 현대적 진경 산수화다. 나아가 그는 사진이 프린트된 한지를 구겨 부조처럼 만드는 입체 작품, 입체 작품과 영상을 결합한 작품, 판화, 설치 작품 등으로 작업의 범위를 넓혀가고 있다.
저서
북한산길 / 은평역사한옥박물관, 2024
블루마운틴 / 아트제, 2021
지리산 가는 길 / 아트제, 2020
인수봉 / 다빈치, 2018
낙산 / 쇳대박물관, 2017
백운산장 / 한국산악회, 2017
설악산 / 다빈치, 2016
월천리 솔섬 / 아트블루, 2010]
[임채욱(1970~)
임채욱의 사진은 한 폭의 동양화 같다. 서울대학교에서 동양화를 전공했지만, 수묵을 버리고 우리의 산수를 한지에 프린트한다. 화선지에 먹으로 그리듯 흑백으로 찍은 산과 물을 한지에 프린트해 여백이 아름다운 한 폭의 산수화를 그린다. Mind Spectrum 시리즈는 선명한 원색으로 자연계의 복잡한 형태를 최소화하고 여백이 주는 여유로움으로 피사체의 아름다움에 보다 집중하게 한다. 실존하는 자연을 또 다른 자연의 모습으로 보이게 만드는 작가의 시선이 흥미롭다. 감정이입과 상징이 색을 통해 표출되고 조화롭게 귀결된다. 임채욱의 컬러 이미지는 강렬하면서도 에너지가 넘친다. 선명한 색을 통해 감정을 환기하며 풍경에 대한 느낌을 재해석하게 한다. ‘산 시리즈’로 큰 스케일의 개인전을 여러 차례 열었고 사진을 입체화하는 새로운 작업을 통해 사진 작품의 무한한 가능성을 내보이고 있다. 2014 The Prudential Eye Awards 선정되었고, 2023년 스페인, 2024년 서울에서 개인전을 개최하는 등 왕성하게 활동 중이다. 그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 Deutsche Bank, Harbour City Hong Kong, Four Seasons Seoul, Grand Hyatt Seoul, Vision Tower, Fine Tower, 울산지방검찰청, 세브란스병원 등에 소장되어 있다.]
16:15~16:24 부암동주민센터.무계원 정류장으로 이동하여 관람 완료 [9분 소요]
16:24~16:31 부암동주민센터.무계원 정류장에서 불광역 정류장으로 가는 7022번 버스 승차 대기
16:31~16:45 7022번 버스를 타고 부암동주민센터.무계원 정류장에서 불광역 정류장으로 이동 [14분 소요]
16:45~16:55 불광역에서 연신내역으로 가는 3호선 전철 승차 대기
16:55~17:07 3호선을 타고 불광역에서 연신내역으로 가서 6호선으로 환승하여 구산역으로 이동 [12분 소요]
[무계원&자하미술관] 위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