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06월06일(토요일) [대관령 옛길&강릉 안목해변 카페거리] 탐방기
회비 33,606원 5월11일 국민은행 노블레스클럽 계좌 578601-01-308843으로 송금 완료,
3열2번 좌석 예약
탐방지 : 대관령 옛길
[영동지방과 영서지방을 잇던 대관령 옛길
아흔아홉 굽이 대관령 옛길은 강원도의 영동지방과 영서지방을 연결하는 백두대간의 4대 고개 가운데 하나이다. 고개가 너무 높아 고개 위 겨우 석 자가 하늘이라는 말이 전해질 정도로 높고 험준했다. 오래전부터 대관령은 영동지방 사람들이 내륙으로 드나드는 관문이었고, 대관령 옛길은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 이래 영동지방과 영서지방을 잇는 교역로이자 교통로로 이용되었다. 새롭게 개통한 영동고속도로가 별도의 구간으로 개설되면서 도보로 이동하던 옛길은 과거의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대관령은 강원도의 영동지방과 영서지방을 연결하는 백두대간의 4대 고개 가운데 하나이다.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에서 평창군 대관령면 횡계리를 잇는 구간이다. 대관령 고갯길은 아흔아홉 굽이라고 알려져 있을 정도로 굽이진 골짜기를 돌고 돌아 이어진다. 대관령 동쪽의 강릉에 살던 선비가 곶감 한 접을 지고 과거를 보러 가면서 고갯길을 넘으면서 하나의 굽이를 돌 때마다 곶감을 하나씩 빼 먹었다고 한다. 정상에 도착해보니 남은 곶감이 한 개인 것을 보고 대관령이 아흔아홉 굽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대관령 옛길은 강원도의 강릉시 성산면에서 평창군 대관령면을 연결하는 고갯길로, 정상의 해발고도는 832m이다.
고개가 너무 높아 고개 위 겨우 석 자가 하늘이라는 말이 전해질 정도로 높고 험준했다. 주민들은 대관령 고개가 너무 험해서 고개를 올라가거나 내려 올 때 대굴대굴 구른다는 의미를 가진 대굴령에서 지금의 대관령이라는 이름이 유래한다고 말한다. 영동지방과 영서지방을 연결하는 큰 관문에 있던 고개라는 의미로도 알려져 있다.
오래전부터 대관령은 영동지방 사람들이 내륙으로 드나드는 관문이었다. 이 길은 사람 한 두 명이 가까스로 지나갈 수 있을 만큼의 아주 좁은 길이었다. 조선 중종 때 강원도 관찰사를 지냈던 고형산이란 사람이 비좁고 험했던 길을 넓히고 고쳤으며, 이 덕분에 한양으로 가는 길이 편리해졌다. 병자호란 당시에는 청나라 군대가 강릉의 주문진에 상륙하여 이 길을 통해 쉽게 한양에 진출할 수 있었고 그 때문에 한양이 일찍 무너졌다고도 한다.
이 길은 조선시대 강원도 강릉 출신인 신사임당이 그의 아들 율곡을 데리고 함께 넘나들었던 길로도 잘 알려져 있다. 또한 대관령 동쪽 영동지방의 선비들이 과거를 치르기 위해 한양으로 이동하던 길이기도 하고, 보부상들이 동해의 해산물과 영서지방의 토산품을 지고 오르내리던 고갯길이기도 하다. 대관령 옛길은 울고 넘는 길이기도 하다. 한양에서 근무지인 강릉으로 향하던 관리들이 고갯마루에서 멀리 동해 바다가 보이자 세상의 끝에 도착했다고 눈물을 흘렸고 강릉을 떠날 때는 정들었던 생각을 하며 울면서 갔다고 한다. 신사임당이 율곡 이이 선생의 손을 잡고 한양으로 가기 위해 험준한 산길을 오르면서 오죽헌을 향해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대관령 옛길은 고개 중간에 있는 반정(半程)에서 내려가거나 대관령박물관에서 올라가는 길이 있다. 반정은 길의 반이 되는 위치로, 강릉과 평창 지방의 사람들은 반쟁이라고 부른다. 반정은 옛 영동고속도로와 대관령 옛길이 만나는 곳이며, 그곳에 가면 ‘대관령 옛길 반정’이라는 표지석을 볼 수 있다. 강릉에서 시행되는 강릉단오제의 첫 제례는 대관령 옛길에 있는 산신각과 국사성황당에서 시작될 정도로, 대관령 옛길은 강릉 지방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자동차 도로가 개통하고 차를 타고 대관령을 넘게 되면서, 대관령 옛길은 이용 빈도가 감소하였다. 그러나 새롭게 개통한 영동고속도로가 별도의 구간으로 개설되면서 도보로 이동하던 옛길은 과거의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새롭게 개통한 영동고속도로 대관령6터널이 대관령 옛길과 교차하는 부분이다. 대관령 옛길은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 이래 영동지방과 영서지방을 잇는 교역로이자 교통로로 이용되었다. 대관령의 빼어난 자연경관과 함께 대관령 옛길의 모습이 그대로의 상태를 유지하면서 잘 보존되어 있어 519,156㎡에 달하는 면적이 2010년 11월 15일에 명승 제74호로 지정되었다.]
탐방코스: [대관령옛길 반정~(3.2km)~옛주막터~(1.5km)~우주선화장실~(1.5km)~대관령박물관] [총 6.2km]
탐방일 : 2026년06월06일(토요일)
날씨 : 청명한 날씨 [강릉시 성산면 어흘리 최저기온 17도C, 최고기온 23도C]
탐방코스 및 탐방 구간별 탐방 소요시간 (총 탐방시간 3시간5분 소요)
07:40~11:15 “노블레스 클럽” 버스를 타고 교대역 13번 출구 앞에서 출발하여 강원특별자치도 강릉시 성산면 어흘리 산 2-21 번지에 있는 반정(半程)으로 이동 [3시간35분, 185.2km] [고속도로 교통정체로 도착시각이 지연되었음]
[대관령 옛길
고려시대부터 이어진 천년의 역사를 가진 길 자체가 문화재인 대관령 옛길은 조선시대 서울에서 평해(경상북도 울진의 옛 지명)로 연결되는 주요 교통로였다.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풍부한 문화자원을 보유하고 있어 명승 제74호(2010.11.15)로 지정되었다. 신사임당이 어린 율곡의 손을 잡고 친정어머니를 그리며 걸었던 길이고 송강 정철이 이 길을 걸어 관동별곡을 썼으며, 김홍도가 대관령의 경치에 반해 그림을 그렸던 유서 깊은 길이다. 영동지방의 선비들이 과거를 보기 위해 넘었던 길이며 보부상들이 물산을 지고 오르내리던 삶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길이기도 하다. 계곡을 옆에 끼고 걷는 쾌적한 길로 국사성황사, 유혜불망비*, 주막터 등 볼거리가 많다.
*유혜불망비: 대관령은 길이 험준하여 겨울이면 험난한 고개를 지나다 목숨을 잃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강릉부의 향리 이병화는 개인의 재산을 내어 대관령 중턱 반정에 주막을 설치하였다. 이를 감사하게 여긴 대관령을 지나는 행상인들이 순조24년(1824) 이병화의 공덕을 기리는 비석을 반정 아래 세웠다.]
[축제따라 걷기 | 강릉단오제와 대관령옛길] 유네스코가 인정한 최고(最古)의 축제… 신사임당이 걸었던 최고(最高)의 옛길
월간산 기사 입력 2013.06.18. 10:48
6월 9~16일 남대천 일원서 축제 열려… 율곡 흔적도 볼 수 있어
강릉단오제와 대관령옛길. 전혀 상관없는 것 같지만 상당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우선 둘다 국가 지정 ‘문화재’다. 강릉단오제는 1967년 지정된 중요무형문화재 제13호이자 2005년 11월 한국 문화의 전통이 가장 잘 살아 있다는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으로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에 등재된 한국 고유의 문화축제이고, 대관령옛길은 2010년 11월에 명승으로 지정된, 한 손가락 안에 드는 유적지다. 강릉단오제는 이 대관령옛길을 통해서 성대한 행사를 치른다.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수천 년 이상 이어온 문화재, 즉 옛길과 축제인 것이다.
단오는 음력 5월 5일로서, 설·한식·추석과 더불어 우리나라 4대 명절 중의 하나다. 단(端)은 ‘처음’, ‘시작’이라는 뜻이고, 오(午)는 ‘초닷새’라는 의미다. 조상들은 이 날을 1년 중 양(陽)의 기운이 가장 성한 날이라 하여 으뜸 명절로 여겼다고 전한다.
으뜸 명절인 단오제가 강릉에서 언제부터 개최됐을까? 이를 살펴보기 전에 강릉이라는 지명과 문화를 먼저 파악할 필요가 있다. 강릉을 지칭하는 말로 ‘관동’과 ‘영동’이 있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관동은 철령 동쪽을 가리키는 용어이고, 영동은 백두대간 대관령 동쪽 지역을 말한다. 관동 지역은 아홉 곳으로 흡곡과 통천·고성·간성·양양과 옛날 (동)예국의 수도인 강릉, 그리고 삼척·울진·평해의 각 군·현을 지칭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기록에서 보듯 강릉은 삼국시대 이전 동예국의 수도였다. 당시 지명은 명주(溟洲)로서 독자적인 행정체계를 유지했다. 고려시대에는 선종을 받아들여 불교문화를 번성시켰고, 고려 말에는 유교의 양반문화를 형성했다. 조선 후기에는 다양한 민중문화를 발달시켰다. 이러한 문화가 지금의 ‘강릉단오제’로 통합되어 축제로 탄생한 것이다. 동예국은 기원전이니 지금으로부터 2,000년이 넘었다는 얘기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 됐고 가장 규모가 큰 축제인 강릉단오제가 언제부터 열렸는지에 대한 기록은 분명치 않다. 부족국가였던 동예시대부터 있었던 제천행사가 발전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한반도 부족국가 역사를 기록한 중국의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따르면 ‘동예에서는 해마다 10월에 신께 제사하고 밤낮으로 술을 마시고 춤을 추는데 이를 무천이라고 한다’고 돼 있다. 안타깝게도 우리 최초의 역사서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어떠한 기록도 남아 있지 않다.
이어 <고려사>에 ‘935년 강릉 사람 왕순식이 왕건(태조)을 도와 신검을 토벌하러 가는 길에 대관령에서 산신께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처음으로 나온다. 대관령 산신제를 지낸 첫 기록으로, 지금 ‘천 년 단오’라고 말하는 근거가 된다.
조선시대에는 추강 남효온(1454~1492년)이 쓴 문집에 ‘영동에서는 매년 3, 4, 5월 중에 날을 받아 무당들이 산신을 맞아 신에게 제사한다. 부자들은 제물을 말바리에 싣고, 가난한 사람은 이고 지고 대관령에 올라가 제사를 차리고…’라고 기록하고 있다. <홍길동전>의 작가로 유명한 허균(1569~1618)의 <성소부부고>란 책에도 강릉에 갔다가 직접 보고 들은 내용을 전하고 있다.
곡식의 성장과 결실 기원한 공동체 행사
10월 무천은 추수감사제의 성격이고, 5월 단오는 곡식의 성장과 결실을 기원하는 파종축제의 성격이 짙다. 따라서 강릉단오제의 기원은 ‘마을의 안녕과 풍농·풍어·풍림’을 신에게 기도드리던 것으로 보인다. 즉 각 마을 주민의 건강과 질병퇴치, 1년 농사의 풍년, 풍성한 고기잡이와 가축번식, 수해와 관련되는 산림의 풍성함, 대관령 산행길의 안전 등을 기원한 것이다.
단오절에는 여러 풍속을 즐겼다. 여자들은 창포물로 머리를 감고 몸에 이롭다 하여 창포 삶은 물도 먹었다. 단오장이라 하여 창포잎의 이슬을 받아 화장하고 창포물로 세수를 하는 동시에 목욕재계도 했다. 또 창포가 무성한 못가나 물가에 가서 물맞이하는 풍습도 있었다. 크게 자란 고목거수의 옆가지에 그네를 매어 남녀노소가 즐겼으며, 남자들은 씨름을 겨뤘다. 그 외에도 가면극, 민요, 무속제 등 명실공히 종합예술축제로서 자리매김하고 있다.
올해 강릉단오제는 6월 9~16일까지 강릉 남대천 일원과 대관령 국사성황당, 산신각 등지에서 열린다. 매년 100만 명 이상의 인파가 몰리는 명실상부 한국 최고 최대 축제다.
강릉단오제는 단오 한 달 전인 음력 4월 5일 ‘신주(神酒)빚기’로부터 시작된다. 술은 신에게 바치는 가장 중요한 제물이다. 단오제례에 쓸 술을 만드는 일을 ‘신주빚기’라 한다. 강릉의 옛 관청이었던 칠사당(七事堂)에서 강릉시장이 내린 쌀과 누룩으로 신주를 담근다. 신주가 잘 익어야 단오제를 무사히 치르고 국사성황신과 국사여성황신이 강릉시민들에게 풍요와 안녕을 내려줄 것이라고 믿는다.
‘대관령산신제’와 ‘국사성황제’는 음력 4월 보름날 올려진다. 김유신 장군을 산신으로 모신 산신각에서 ‘대관령산신제’가 올려지고, 범일국사를 모신 국사성황사에서 ‘국사성황제’를 지낸다. 성황제가 끝나고 신목잡이가 신목(神木)을 베면 사람들은 신목에 청홍색의 예단을 걸어 국사성황의 행차를 준비한다. 신목은 단풍나무만 쓴다.
국사성황 행차는 대관령 아흔아홉 굽이를 내려와 구산에서 ‘구산서낭제’를 받는다. 구산을 떠난 국사성황 행차는 고향인 학산에 이르러 ‘학산서낭제’를 거친다. 학산은 국사성황신인 범일국사의 고향이다. 학산 서낭제 이후 강릉 시내에 돌아온 국사성황 행차는 국사여성황사에서 ‘봉안제’로 받는다.
유네스코, “인류에 이런 축제 남은 건 기적”
국사성황 내외를 강릉단오제 가설 굿당으로 모셔가는 ‘영신제(迎神祭)’는 음력 5월 3일 저녁에 이루어진다. 대관령국사여성황신에서 ‘영신제’를 마친 국사성황 행차는 ‘정씨가의 제례’를 받고 ‘영신행차’를 맞이해 남대천 제당으로 향한다. 음력 5월 4일부터 7일까지는 아침마다 ‘조전제(朝奠祭)’가 열린다. 이 유교적 제의가 끝나면 밤늦게까지 단오굿이 뒤따른다. 강릉단오제의 마무리인 ‘송신제(송신제)’는 음력 5월 7일 저녁에 올려진다. 이어 다음날인 5월 8일에 축제의 피날레를 장식한다.
세계무형유산 목록으로 선정된 강릉단오제를 본 유네스코위원들은 심사평에 ‘인류에게 이런 축제가 남아 있다는 것은 기적이다’라고 적고 있다. 바로 인류 기적의 축제가 한국에서, 그것도 강릉에서 열린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대관령옛길 따라서 축제의 흔적을 좇아가 보자.
대관령옛길 출발지를 대관령휴게소로 잡았다. 대관령옛길은 강릉바우길의 14개 구간 중에 2구간으로, 강릉바우길을 조성하고 관리하는 (사)강릉바우길의 이기호 사무국장이 직접 길을 안내했다. 대관령휴게소~양떼목장 옆~국사성황당과 산신각~KT송신탑~반정(산불감시초소)~이병화 유혜 불망비~옛날주막~하제민원(산불감시초소)을 거쳐 대관령박물관까지 총 11.5㎞를 5시간 45분 걸렸다.
대관령은 영동지방과 영서지방을 잇는 고갯길이다. 선비와 보부상 등이 넘나들던 숱한 사연을 안고 간직한 길이다. 강원도 관찰사 정철이 이 길을 지나 <관동별곡>을 쓰고, 한국의 어머니인 신사임당이 여섯 살밖에 안 된 아들 율곡을 데리고 이 고개를 넘어 한양으로 오갔다.
강릉에서 생산되는 해산물, 농산물이 이 길을 통해 영서지방으로 넘어갔고, 영서지방에서 생산되는 토산품이 이 길로 구산리의 구산장, 연곡장, 우계(옥계)장 등으로 팔려나갔다. 이 물산의 교역은 ‘선질꾼’들이 담당했다. 그 선질꾼들이 넘나들던 길이 대관령옛길이다. 또한 괴나리봇짐에 짚신 신고 오르내리던 옛 선비들의 역사적 향취가 서려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 길은 조선 초기만 해도 사람 한둘이 간신히 다닐 정도였으나 조선 중종 때 강원관찰사인 고형산이 사재를 털어 우마차가 다닐 수 있도록 넓혔다.
16세기부터 대관령이란 지명 기록 나와
대관령이라는 지명이 처음 나온 것은 대략 16세기부터다. 그 전에는 대관(大關)이라 불렀다. 큰 고개를 의미하는 ‘大’자를 붙이고 험한 요새의 관문이라는 뜻으로 ‘關’을 사용한 것으로 추측된다. <삼국사기>에서는 ‘大嶺(대령)’이라고 쓴 기록이 나온다. 고려사에서는 ‘大峴(대현)’으로 기록돼 있다. 두 개념 모두 큰 고개라는 뜻이다. 조선 초기까지 대관령이라는 지명이 보이지 않는다. <태종실록>에도 ‘大嶺山(대령산)’으로 돼 있다. 조선 중종에 이르러서야 대관령이란 기록이 처음 등장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대관령’이라고 처음 언급하면서 ‘이를 대령이라고도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대관령이라는 기록이 분명히 나온다. 따라서 대관령이란 고갯길은 오래된 역사만큼이나 숱한 사연을 간직할 수밖에 없다.
대관령휴게소를 나서자 양떼목장과 선자령 가는 길을 가리키는 양 갈래의 이정표가 나온다. 평창과 강릉의 경계다. 선자령 가는 길로 접어들면 푹신한 흙길에 만발한 야생화에 흠뻑 빠져든다. 누구나 “이렇게 좋은 길이 있었다니!”라고 감탄한다고 이기호 국장이 전한다. 보라색의 얼레지, 노란색의 괭이눈, 또 다른 모양의 노란색의 개별꽃, 연보라색의 현호색 등 형형색색의 야생화들이 방문객들의 눈을 휘둥그레지게 한다. 습지식물인 속세도 유달리 눈에 띈다.
이 국장은 “높지도 않은 길, 푹신푹신한 흙길, 야생화 만발한 길을 들어서면 누구라도 감탄하는 길이 대관령옛길”이라고 소개했다.
야생화는 끊임없다. 서서히 고도를 올리면서 수종도 조금씩 변한다. 구상나무와 일본잎갈나무, 전나무가 혼재림을 이루고 있다. 시원하다. 중간 중간에 한국의 대표 수종인 소나무와 참나무도 빠지지 않고 있다.
시원한 길을 지나 한국에서 가장 음(陰)기운이 강하다는 성황사와 산신당에 도착했다. 사방은 숲으로 둘러싸인 계곡 지대라 여성의 음부와 비슷한 느낌이다. 산신당과 성황사는 대관령산신과 대관령국사성황신을 모신 사당이다. 두 사당이 10여 m 거리를 두고 있다. 이곳에서는 1년 내내 굿이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국사성황사 뒤에서 강릉단오제에 쓰일 신목을 고른다. 여기서 자른 신목은 대관령옛길을 따라 강릉시내까지 운반된다.
잠시 고갯길을 올라서면 능선이다. 대관령옛길 구간에서 가장 높은 곳이다. GPS가 고도 962m를 가리킨다. 백두대간이 이곳으로 연결된다. 능선 위에선 강릉방향인 동쪽으로는 가파른 급경사 지형이고 올라온 왼쪽은 완만하다. 그만큼 강릉사람들은 대관령 고갯길을 오르기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이제부터는 가파른 고갯길을 구불구불한 길로 연결시킨 아흔아홉 굽이길 그대로 간다. 경사는 있지만 길은 굽이져 별로 가파른 느낌을 받지 않고 걷는다. 크게 자란 나무들이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이 국장은 “봄에는 야생화 만발하고, 여름엔 시원하고, 가을엔 단풍으로 아름답고, 겨울엔 눈이 쌓여 더욱 운치 있는 길”이라고 자랑했다. 이 말을 보증이라도 하듯 ‘한국의 아름다운 길’로 선정된 이정표가 나온다.
반정(半程)이다. 반정은 시내에서 대관령 정상까지 대략 20㎞의 중간지점이라고 해서 붙은 지명이다. 반쟁이라고도 부른다. 웃반쟁이와 아랫반쟁이가 있으며, 상반정은 대관령의 중턱이다.
걷는 길 내내 형형색색의 야생화 만발
숲속의 초본식물들은 파릇파릇한 녹색으로 치장하며 봄의 절정으로 치닫는 반면, 나무들은 높은 위도와 고지대탓인지 아직 전혀 신록의 기운을 받지 못하고 있다. 초본과 목본식물들이 완전히 대비된다. 엘레지, 현호색, 개별꽃, 개망초 등 만발한 야생화는 자태를 뽐내며 방문객의 눈길을 끄는 듯하다.
김시습 시비에 이어 단원 김홍도의 대관령 그림이 나오더니 곧이어 신사임당 시비도 나온다. ‘대관령을 넘으며 친정을 바라보다’란 제목의 시(詩)다.
‘늙으신 어머님을 고향(강릉)에 두고/ 외로이 한양으로 가는 이 마음/ 돌아보니 북촌은 아득도 한데/ 해 저문 산에 흰구름만 날아 내리네.’ 신사임당의 지극한 효심을 잘 표현한 시다.
대관령옛길을 얘기하면서 신사임당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사임당이 여섯 살 율곡과 막 세 살 된 동생을 데리고 오랜 친정생활을 마치고 시댁으로 가는 길이었다. 이제 떠나면 언제 다시 돌아올지 알 수 없는 이별이었다. 가마 타고 아흔아홉 굽이를 넘던 사임당은 고갯길에서 내리더니 산 아래 마을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때 바로 이 시가 나온 것이다.
한국의 옛길엔 어디를 가나 돌무덤을 볼 수 있다. 돌무덤 있는 길엔 대개 서낭당도 같이 있으나 지금 서낭당은 흔적 없이 사라진 곳이 많다. 돌무덤은 과객들이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돌을 하나씩 쌓은 관습에서 비롯됐다. 그 돌에 무사귀환을 당부하고 자신을 보호해 줄 것을 산신에게 기원하는 형식인 것이다. 그래서 마을 어귀나 특히 고갯길에 돌무덤이 아직 많이 남아 있다.
대관령옛길도 예외는 아니다. 여러 개의 돌무덤을 지나친다. 대관령은 특히 험준한 산세여서 그 옛날 호랑이가 득세하던 시절, 개인의 안전을 기원하는 관습이 더욱 강했다고 볼 수 있다.
길 중간 중간에 쉼터와 의자가 구비돼, 방문객이 힘들면 쉬어가도록 하고 있다. 옛날 주막도 복원했다. 널찍한 마당에 연못까지 조성해서 운치 있는 주막 그대로의 모습이다. 주모와 막걸리만 있으면 영판 옛날 주막 분위기다.
조그만 계곡이 나온다. 이 국장에게 계곡 이름이 뭐냐고 묻자, “이런 정도는 강원도에서 계곡이라 할 수도 없는 그냥 흐르는 물”이라고 답했다. 다들 한바탕 웃고 지나쳤다. 이 국장은 “이 계곡에서 여름이면 탁족도 한다”고 덧붙였다.
대관령 이정표는 자주 나온다.
‘대관령옛길은 영동과 영서를 잇는 영동지방의 관문역할을 하던 곳으로서, 예로부터 이 길을 이용한 수많은 사람들의 애환이 서린 곳이기도 하며, 또한 천년의 역사가 이어져 오는 강릉단오제가 시작되는 시발지로서 백두대간의 뿌리인 태백산맥의 수려한 자연경관이 빼어난 곳입니다. (중략) 문화재청으로부터 역사적 문화적인 가치를 인정받아 국가 지정 명승 제75호(2010,11,15)로 지정된 길이기도 하며, 강원도 명품 산소길 18선으로 선정된 길로서… (후략)’
그냥 흐르는 물이 점점 계곡으로 커진다. 이 국장도 제법 커진 물줄기를 보고 “이 정도 되면 계곡이라 할 수 있죠”라며 한마디 한다. 그 옆으로 하제민원마을이 있다. 그냥 흐르는 물에서 제법 커지더니 이름까지 붙은 용암계곡이 계곡의 모습을 갖춰 흐르고 있다.
대관령박물관이 저만치 보인다. 대관령박물관은 선사시대부터 현대까지 한 개인이 수집한 민속 역사 유물을 기증한 것을 강릉시에서 박물관을 건립해서 전시하고 있는 것이다. 가히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유물이 많다.
오전 10시 조금 못 돼서 대관령휴게소에서 출발한 옛길을 걸어 오후 4시 가까이 돼서야 박물관에 도착했다. 아흔아홉 고개 따라 걷던 선비들의 자취가 느껴지고, 그들이 남긴 역사가 되새겨지고, 대관령의 역사가 떠오르는 명품 옛길이다. 사계절 언제 걸어도 흠 잡을 데 없이 만족할 만했다.
교통(지역번호 033)
승용차는 서울에서 외곽순환도로를 잠시 타다 중부고속도로로 바꾼다. 중부고속도로 호법분기점에서 영동고속도로를 간다. 횡계IC에서 빠져나와 경강로를 따라 가면 대관령휴게소가 나온다. 고속버스는 동서울터미널에서 강릉고속버스터미널까지 하루 40회 운행한다. 문의 동부고속 647-3181, 중앙고속 648-5897~8. 횡계읍에서 택시를 타고 대관령휴게소로 접근하면 택시비 8,000원 남짓. 문의 횡계 개인택시 335-6263 또는 횡계택시 335-5596. 강릉 콜택시 653-2288 또는 651-1155. 강릉 시내버스 교통 문의는 동진버스 653-8011~2. 동해상사 653-0320.
숙식(지역번호 033)
대관령옛길이 있는 대관령박물관에서 승용차로 불과 10여 분 거리에 있다. 1988년 전국에서 가장 먼저 조성된 휴양림이나 최근 새로 리모델링했다. 문의 641-9990. 한옥은 선교장전통문화체험관(648-5303)과 현덕사 템플스테이(661-5878)가 있다. 강릉 별미로는 초당순두부정식과 감자옹심이 등이 있다. 관광문의 종합관광안내소 640-4414, 640-4531.
INFORMATION
단오제에 어떤 신들을 모시나?
대관령산신 김유신 장군과 국사성황신 범일국사
강릉단오제에는 대관령산신으로 모신 김유신 장군과 대관령국사성황신으로 모신 범일국사가 있다. 강릉단오제의 대표 설화이기도 한 인물이다. 설화이기는 하지만 신화에 가깝다. 실제 인물이 신격화된 ‘인격신(人格神)’인 것이다. 김유신과 범일국사 외에도 강릉에는 여러 신들이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강릉에서 살았고, 강릉과 관련 있는 인물’이라는 데 있다. 이들이 어떻게 해서 산신과 국사성황신이 됐을까?
김유신 장군은 잘 알다시피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데 최고의 수훈을 세운 인물이다. 가야국 김수로왕의 13대손으로, 강릉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 다만 허균의 책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신라 장군 김유신은 어려서 명주(강릉의 옛 지명)에 유학하여 대관령 산신에게 검술을 배웠다. 그는 강릉 남쪽에 있는 선지사에서 명검을 만들었고, 그 신통한 검으로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켜 삼국통일을 이루었다. 사후에 대관령산신이 되어 이 지방을 보호해 주었다. 임진왜란 때에는 대관령과 송정의 모든 소나무를 군사와 노적가리로 보익하여 왜군이 근접치 못하게 했다.’
화부산사에 있는 ‘순충장렬흥무대왕화산재기공비’에도 김유신 관련 기록이 있다.
‘말갈이 신라의 북변을 침입해 괴롭히므로 문무왕은 원년(661년)에 김유신에게 명하여 말갈을 정벌케 했다. 이에 김유신은 하슬라주(강릉)에 출병해 화부산 아래에 주둔하고, 오대산에서 무기를 만들고, 군대의 훈련을 팔송(송정동)에서 시키는 등 무력을 크게 과시했다. 이에 말갈이 두려워 도망치고 말았다. 김유신을 보자마자 말갈이 도망갔으므로 현지 주민들은 평안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 김유신의 공덕을 잊지 않았다.’
이와 같이 강릉사람들은 김유신이 어려서 강릉에 거주했던 인연이 있고, 자신들을 외적으로부터 보호해 줄 수 있다는 믿음에서 수호신으로서의 자격을 갖췄다고 여겼던 것 같다.
반면 범일국사는 강릉 학산이 고향이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설화가 범상치 않다. 강릉의 <臨瀛誌(임영지)>에 ‘굴산의 한 양가 처녀가 석천의 물을 먹고 잉태하여 14개월 만에 옥동자를 낳았는데, 그가 곧 범일’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 ‘곱슬머리의 특이한 자태와 정수리가 진주 모양을 한 기이한 형상이었다’고 전한다.
15세에 출가해서 20세에 경주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흥덕왕 6년(831)에 당나라로 건너가 마조선사의 제자인 염관 제안선사에게 “도를 닦는 것이 아니라 더럽히지 않는 것이다. 부처나 보살에 대한 소견을 내지 않는 평상의 마음이 곧 도”라는 깨우침을 얻고, 문성왕 6년(844)에 신라로 돌아왔다.
신라 말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사굴산파의 창시자가 됐으며, 동해 삼화사와 강릉 신복사를 창건하고 양양 낙산사를 중창해 영동 지방 선종 보급에 힘을 기울였다. 당시 경문왕, 헌강왕, 정강왕이 국사로 모시려 했으나 모두 마다하고 오로지 지역민들과 함께함으로써 영동지방의 정신적 지주가 됐으며, 진성여왕 3년(889) 굴산사에서 입적했다.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범일국사를 정신적 수호신에서 대관령 국사성황신으로 추앙받게 된 것으로 보인다.
강릉단오제 어떤 행사 열리나
한국 전통 민속행사 총 망라해서 보여줘
‘강릉단오제’의 행사는 종합적이고 복합적이다. 그리고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화해와 열린 공간 그 자체다. 한국 전통의 민속행사를 총망라해서 보여 주면서 현대인들이 참여해서 경연하고 실제 체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행사 한 달 전 신주빚기로 시작된 단오제는 대관령산신제, 대관령국사성황제, 영신제, 조전제, 단오굿, 관노가면극, 농악경연대회, 어린이 농악경연대회, 학산오독떼기 등 지정문화재 행사를 잇달아 개최한다. 신주빚기로 강릉단오제의 축제분위기는 서서히 달아오르기 시작한다.
지정 문화재 행사와 동시에 다양한 민속행사도 열린다. 한시백일장, 향토 민요경창대회, 전국 시조경창대회, 줄다리기 대회, 씨름대회, 그네대회, 강릉 사투리 경연대회, 궁도대회, 투호대회, 단오장기대회, 이리농악, 북청사자놀음, 중국 형주시 기예단, 태국 민속춤 등 전문가와 일반 참가자 누구나 즐길 수 있는 풍성한 행사다.
단오체험촌에서는 창포머리감기, 단오부채만들기, 신주 시음 및 수리취떡 시식 등을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실시한다. 뿐만 아니라 신통대길 길놀이, 단오등 걸기 행사에서는 시민들이 함께하는 한마당으로 치러진다. 8일간의 축제 기간 중 100만 명이 훨씬 넘는 내외국인이 방문해 축제를 더욱 빛낸다.]
11:15~11:18 대관령 옛길의 반정에 있는 대관령옛길표지석을 사진촬영
[매월당 싯길 (24) 대관령] 김유신 대신 국사성황이 대관령 지키는 이유
이한성 옛길 답사가
문화경제 기사 업데이트 2025.12.11. 10:03
오대산 운수행각(雲水行脚)을 마친 매월당은 바닷가 강릉 땅으로 발길을 향한다. 오대천을 돌아 내려오면 다시 성오평(省烏坪)을 지나고 이어서 월정사 입구 삼거리에 닿는다. 이곳에서 추령(杻嶺) 넘어 횡계(橫溪)에 닿았으니 우리 시대에 평창 동계올림픽이 열린 곳이다. 횡계에는 대관령을 넘는 길손을 위한 역(驛)이 있었다. 안흥의 문재를 넘으면 운교역 ~ 방림역 ~ 대화역 ~ 진부역 ~ 횡계역에서 마지막 준비를 마쳐야 길고 긴 대관령을 넘을 수 있었다. 매월당이 횡계역에 도착한 때는 1460년. 전 시대부터 있던 옛 횡계역을 지났을 것이다. 매월당이 지나간 2년 뒤, 1462년(세조 8년)에 새로 역이 정비되었다.
지금은 평창군이 되었지만 이 지역은 본래 강릉도호부 도암면(道岩面)이었다. 벽촌 중에 벽촌, 겨울이면 눈에 쌓이는 눈 고장이었다. 근세에 들어서면서 생긴 우리나라 스키장의 원조 대관령스키장도 이곳 지루메산 경사를 슬로프로 사용한 스키장이었다. 용평스키장이 생기고 동계올림픽과 관광 붐을 타면서 지금은 대관령면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매월당을 따라 횡계를 지나면서 동계올림픽 현장도 둘러보고 스키박물관도 들러 본다. 상전벽해도 이런 상전벽해가 있을까? 황태를 말리던 덕장은 펜션과 호텔이 되었고 논밭은 상가로 바뀌었다. 호구지책의 언덕 밭에는 관광객용 교회도 들어서 있다. 배도 곯고 짚신도 떨어진 채 이곳을 지났을 매월당을 생각하면 모시고 와서 시원한 황태해장국이라도 대접하고 싶구나.
횡계에서 이제 대관령으로 향한다. 고속도로는 대관령 나들목에서 직진하여 터널을 통과해 강릉 방향으로 내달리니 대관령에는 오를 수가 없다. 옛 고속도로(456 번 지방도)와 그 옆길 작은 포장도로 두 길이 대관령과 연결되어 있다. 이제는 차를 타고 오르는 대관령이지만 1900년대 초까지는 걷거나 또는 말이 아니면 갈 수 없는 곳이었다. 1911년부터 이천 ~ 강릉간 신작로를 뚫었는데 대관령 구간은 1913년부터 1917년까지 구불구불 차량 통행이 가능한 대관령 고갯길이 열렸다. 현재 고속도로의 대관령 터널이 뚫리기 전까지 우리가 달리던 길이다. 이때의 일을 대관령 고개에서 반정 내려가는 길옆 바위에 ‘준공기념(竣工記念)’이란 각자를 새기고 내용을 가록했는데 1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이 각자(刻字)는 선명하게 남아 있다.
그러면 매월당이 넘어간 대관령 길은 어디였을까? 신라에서도, 고려에서도, 조선에서도 1917년 이전까지 넘어 다닌 대관령 고갯길은 이제 ‘대관령 옛길’이라는 이름으로 트레킹 명소가 되어 우리 곁에 남아 있다. 물론 매월당도, 허균도, 난설헌도, 사임당도, 율곡도 넘었던 그 길이다.
굳센 기운 가득했던 옛 대관령 정상
옛 고속도로 옆 작은 포장도로를 따라 오르면 대관령 정상에 닿는다. 옛 영동고속도로 대관령 휴게소가 있던 광장이다. 그때의 영동고속도로 대관령은 추억을 찾는 이들이 많이 찾는 명소였는데 혹서기에는 더위를 피해 오르는 이들의 피서지가 되기도 한다. 고갯마루에는 고속도로 준공비가 아직도 위용을 자랑한다. 가난하던 시절 ‘민족의 대동맥’이라는 벅찬 글귀도 선명하고 ‘고속도로 준공 기념비’라고 쓴 박정희 대통령의 강기(剛氣) 가득한 추억의 글씨도 남아 있다.
이곳은 백두대간이 지나는 길이다. 고루포기산 ~ 능경봉 ~ 대관령 ~ 선자령 ~ 소황병산으로 이어지는 한반도 산줄기의 대동맥이다. 또한 옛사람들은 함부로 넘어 다닐 수 없는 공포의 길이기도 했다. 우리에게는 낯설지만 숙종이 총애하고 다산이 인정한 문신이 있었다. 희암(希菴) 채팽윤(蔡彭胤). 그의 문집 속 기록인데 이 지역 고개를 넘으면서 범에 대한 공포를 기록했다.
정사년(1717년)에 새벽밥을 먹고 강릉을 향해 출발했다. 성오평(省烏坪: 월정사 입구)부터 꾸불꾸불 동쪽으로 가서 추현(杻峴) 고개로 들어섰다. 빽빽한 교목들이 숲을 이루고, 골짜기는 깊고 그윽했다. 지나가던 행인이 말하기를, “이 고개는 바로 호랑이와 표범의 소굴입니다. 올봄에 행인들이 많이 죽어, 봄부터 여름까지 길이 막혔습니다”라고 했다. 이어서 나무가 쓰러져 있는 곳을 가리키며 “저것이 호랑이 발자국입니다”라고 한다.
이에 동행하던 사람들이 모두 놀라 두려워했다. 바람이 조금만 불어 나무 흔들리는 소리가 나도, 번번이 말고삐를 쥐고 좌우를 둘러보며 소리쳤다. 말 위에서 시 한 수 읊는다.
말에 채찍질하며 앞뒤를 둘러보니,
행인의 마음과 간담이 서늘하네.
깊은 숲에 아침 해 숨어 있는데,
호랑이 발자국이 쟁반만큼 크구나.
策馬前後顧. 行人心膽寒. 深林隱朝日. 虎跡大如盤.
이렇듯 두렵던 범도 이제는 시베리아로 쫓겨 갔다. 지리지는 대관령을 어떻게 기록했을까?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보자. 강릉대도호부 편에, “대관령(大關嶺)은 부 서쪽 45리에 있으며, 이 주(州)의 진산이다. 여진(女眞) 지역인 장백산(長白山)에서 산맥이 구불구불 남쪽으로 뻗어 내리면서 동햇가에 자리 잡은 것이 몇 곳인지 모르나, 이 영(嶺)이 가장 높다. 산허리에 옆으로 뻗은 길이 아흔 아홉 구비인데, 서쪽으로 서울과 통하는 큰 길이 있다. 부의 치소에서 50리 거리이며 대령(大嶺)이라 부르기도 한다”면서 고려조 문신 김극기의 시를 소개하고 있다.
그 시(詩) 속 한 부분이 대관령의 형세를 읊었는데 그 표현이 참으로 절묘하다.
아슬아슬 길 한 가닥 높은 나무에 걸렸는데,
긴 뱀처럼 구불구불 무릇 몇 겹인지.
畏途一線掛喬木 脩蟒縈紆凡幾重.
이제 대관령 옛 고속도로 휴게소를 벗어나 매월당이 넘었을 대관령 옛길로 향해 간다. 휴게소에서 북쪽으로 가면 대관령 성황당을 만나는데 재궁골 삼거리에서 1킬로 남짓 거리에 있다. 포장이 되어 있지만 버스는 들어갈 수 없고 승용차는 비껴서면 교행이 가능하다. 길 끝에는 작은 주차장도 있고 화장실도 있다. 치성을 드리는 이, 대관령 옛길 넘는 이, 백두대간 길 가다가 잠시 들르는 이, 관광객 등 많은 이들이 들르다 보니 편의시설을 갖춘 것이다. 매월당이 범의 무서움을 이기고 오른 길, 고려의, 조선의 많은 이들이 넘던 고개를 이제는 차로 지나가는 시대가 되었다. 그곳에는 두 채의 당집이 있다.
큰 집은 대관령 성황님의 집이고 작은 집은 대관령 산신님이 계신다. 대관령 성황님은 범일국사(梵日國師)이니, 그는 신라말(新羅末) 당나라에 유학하고 이곳 명주(강릉)에서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사굴산파를 개창한 당대의 선승이다.
또한 대관령 산신님은 신라의 명장 김유신(金庾信)이니 대관령 고개가 “쎄긴 쎄다”고 느끼게 해준다.
이곳에 들러 글을 남긴 강릉 출신 교산 허균의 글을 보자. 그의 문집 성소부부고에 실린 글이다.
대관령 산신 찬양과 설명글(大嶺山神贊 幷序)
계묘년(1603, 선조 36) 여름, 나는 명주(溟州, 지금의 강릉)에 있었는데, 고을 사람들이 5월 초하룻날에 대령신(大嶺神)을 맞이한다. 하기에, 그 연유를 수리(首吏: 윗 아전)에게 물으니, 아전이 이렇게 말하였다.
“대령신이란 바로 신라(新羅) 대장군(大將軍) 김유신(金公庾信) 공입니다. 공이 젊었을 때 명주에서 공부하였는데, 산신(山神)이 검술(劍術)을 가르쳐 주었고, 명주 남쪽 선지사(禪智寺)에서 칼을 주조(鑄造)하였는데, 90일 만에 불 속에서 꺼내니 그 빛은 햇빛을 무색하게 할 만큼 번쩍거렸답니다. 공이 이것을 차고 성을 내면 저절로 칼집에서 튀어나오곤 하였는데, 끝내 이 칼로 고구려를 쳐부수고 백제를 평정하였답니다. 그러다가 죽어서는 대령의 산신이 되어 지금도 신령스러운 이적이 있기에, 고을 사람들이 해마다 5월 초하루에, 번개(旛蓋: 깃발과 일산)와 향화(香花: 향과 꽃)를 갖추어 대령에서 맞아다가 명주 부사(溟州府司: 강릉도호부 관사)에 모신답니다. 그리하여 닷새 되는 날, 여러 놀이(雜戲)로 신(神)을 기쁘게 해 드린답니다. 신이 기뻐하면 하루 종일 일산(蓋)이 쓰러지지 않아 그 해는 풍년이 들고, 신이 화를 내면 일산이 쓰러져, 그 해는 반드시 태풍이 불거나 가뭄이 든다 합니다.”
이 말을 듣고, 나는 이상하게 여겨, 그날 가보았다. 과연 일산이 쓰러지지 않자, 고을 사람들이 모두 좋아하고 환호성을 지르며, 경사롭게 여겨 서로 손뼉 치며 춤을 추는 것이었다. 내 생각하건대, 공은 살아서는 왕실에 공(功)을 세워 삼국 통일의 성업(盛業)을 완성하였고, 죽어서는 수천 년이 되도록 여전히 이 백성에게 화복(禍福)을 내려서 그 신령스러움을 나타내니, 이는 진정 기록할 만한 것이기에 이에 기록한다. (찬/贊은 글이 길어 줄입니다.)
大嶺山神贊 幷序
歲癸卯夏. 余在溟州. 州人將以五月吉. 迓大嶺神. 問之首吏. 吏曰. 神卽新羅大將軍金公庾信也. 公少時游學于州. 山神敎以釗術. 鑄釗於州南禪智寺. 九十日而出諸爐. 光耀奪日. 公佩之. 怒則躍出韜中. 以之滅麗平濟. 死而爲嶺之神. 至今有靈異. 故州人祀之. 每年五月初吉. 具旙蓋香花. 迎于大嶺. 奉置于府司. 至五日陳雜戲以娛之. 神喜則終日蓋不俄仆. 歲輒登. 怒則蓋仆. 必有風水之災. 余異之. 及期往看之. 果不俄. 州人父老悉驩呼謳詩. 相慶以抃舞. 余帷公生而立功於王室. 成統三之業. 死數千年. 猶能福禍於人. 以現其神. 是可紀也已.
그랬었구나. 허균의 시대에는 강릉단오제의 신령님이 대관령 산신인 김유신 장군이었구나. 그런데 우리 시대에 강릉단오제 신령님은 대관령 성황님(범일국사)로 바뀌어 있다. 단오제는 국가무형문화유산이면서 유네스코의 ‘인류 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으로 우리나라 봄철 큰 굿판이 벌어지는 신나는 행사로 자리 잡았다.
당대의 선사께서 성황님이 되어 개울가 집 여성황과 합방(合房)하러 내려오시는 테마 굿이니 아니 신날 수 없다. 그렇지, 어느 날부터 관(官)에서 행사하기 시들해지니 무가(巫家)에서 맡아 명주의 대표 인물 범일국사를 성황신으로 모시고 장가들이는 행사로 신나는 한판 굿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사람 사는 일, 다산(多産)과 풍요(豊饒)만한 일이 어디 있을까 보냐?
매월당이 지나갔을 그때에는 성황당과 산신각이 다 있었는지 모르겠다. 고려사(高麗史)에도 왕순식 장군이 후백제 토벌 전 대관령에서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고, 조선 초 남효온의 문집 ‘추강냉화’(秋江冷話: 1477년)에도 강릉단오제 관련 기록이 있다. 물론 매월당도 이곳 당집을 지나가며 시 한 수 읊었다.
대관령에서
(고개 동쪽은 영동, 서쪽은 영서라 함)
대관령에 이제 구름 걷히니
가파른 고개에 눈은 아직 남아 있네.
양장(羊腸)처럼 산길은 험하고
새나 나는 길 역참(驛站)은 멀기만 하네.
늙은 나무 신당을 에워싸고
맑은 이내는 바닷가 산에 이어졌네.
높이 오르며 한 수(首) 짓기 참으려 하건만
풍경은 사람 마음 들뜨게 하네.
大嶺
(嶺以東稱嶺東. 以西稱嶺西)
大嶺雲初捲. 危巓雪未消. 羊腸山路險. 鳥道驛程遙. 老樹圍神廟. 晴煙接海嶠. 登高堪作賦. 風景使人撩.
그는 가파른 고개, 구불구불 구절양장(九折羊腸)을 보며 저 아래 먼 역참을 걱정하다가 역시나 풍광에 빠져 시 한 수 잊지 못했다.
이제 매월당이 넘었을 대관령 옛길 출발이다. 성황당 옆에는 안내 지도도 잘 그려 놓았고 선자령 가는 길 방향 나무 데크도 훌륭하게 설치해 놓았다. 고개 정상에 닿으면 옛길이 오솔길로 이어져 내려간다. 이윽고 신작로(1917년 준공 대관령 포장도로, 옛 고속도로)를 건넌다. 어머니를 그리며 대관령 길에서 읊은 사임당의 사친시비(思親詩碑)가 거대하게 서 있다. 서울 가며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딸의 마음이니 다소곳하게 앉혀 놓았으면 좋았으련만….
조금 아래 공터에 차 몇 대는 세울 수 있는 편의 공간이 있는데 그곳에는 반정(半程) 안내문이 있다. 반정이란 영서 쪽의 횡계역과 영동 쪽(강릉)의 구산역을 잇는 길의 중간 지점에 해당하는 위치란 뜻이다. 대관령 정상은 바람도 심하고 터진 공간임에 비해 이곳은 대관령 고갯길에서 아늑한 곳 중 하나다. 순조 24년(1824년) 이곳에 사재를 털어 주막을 연 이가 있었다. 강릉부 향리 기관(記官: 기록 담당) 이병화(李秉華). 그의 은혜로움을 기록한 유혜불망비(遺惠不忘碑 : 끼친 은혜를 잊지 못한 비)가 조금 아래 옛길에 남아 있다. 아랫마을 어흘리 주민들이 세웠다 한다. 감사한 마음 가득하다.
많은 돈 내어 이자 늘려 이 주막 여는 은혜 베푸니
(우리 주민은) 이로써 생활하고 농사 없이도 잘 살 수 있네.
길손은 휴식할 수 있고 사는 이는 쉴 곳 있어
이 사실 한 조각 돌에 새겨 영예로움 길게 전하리.
百緡殖利惠此店幕 賴以資生不耕猶食 行旅得息居者有廬 銘之片石以永來譽
아쉽게도 우리 시대까지 저 주막이 남아 있지 않아 옛가수 박재홍은 대관령 고개에서 애타게 노래한다.
대관령 길손
1. 끝없이 가는구나 님 없는 타향 길을
오늘도 해는 지고 주막집은 멀고 멀어
방울새만 히죽히죽 나그네 울리는데
정든 고향 왜 버렸나 대관령 길손
2. 갈 곳도 없는 몸이 쉴 곳이 있을소냐.
떨어진 보따리를 베게 삼고 벗을 삼고
별을 보고 눈물 짓는 나그네 외로운 밤.
어머님을 불러보는 대관령 길손
반정에는 대관령 옛길 안내석이 듬직하게 서 있다. 이곳에서 내려다보면 강릉 시가지가 한 눈에 들어온다. 그 앞 푸른 바다. 가슴이 뻥 뚫린다.
단원도 정조의 명(命)을 받아 금강사군첩을 그릴 때 이쯤 되는 위치에서 그렸을 것이다. 구절양장 고갯길과 아련한 명주가 내려다보인다.
걸어 내려가는 옛길에는 가을이 깊이깊이 내려앉았다. 가다가 어디든 털석 앉으면 낙엽 방석이다. 고갯길이 생각보다 넓고 평탄하다. 또 한 사람, 정성과 사재를 내어 백성을 사랑한 이가 있었다. 성종 때 관에 진출해 중종 때 강원도 관찰사를 지낸 고형산(高荊山)이다. 그는 대관령 길이 너무 좁고 험난한 것을 보고 작은 수레라도 다닐 수 있게 길을 다시 닦았다. 곳곳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그런데 이 일로 해서 큰 욕을 보았다는 항간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병자호란 때 청군의 일부가 바닷길로 주문진에 상륙하여 대관령을 넘었다는 것이다. 이들이 인조를 압박한 청군의 일부였으니 대관령을 넓힌 고형산에게 부관참시하라는 명을 내렸다는 것이다. 역사에 기록이 없으니 썰(說)일텐데 길을 바라보던 옛사람들의 생각과 암군(暗君)을 보는 백성의 눈이 무섭다.
물 소리, 새 소리, 낙엽 밟는 소리 들으며 내려오면 주막을 만난다. 옛 주막 터에 재현한 주막 건물이 있다. 옛 명주의 주모와 너스레떨며 막걸리 한 잔 했으면…. 생각이 간절하다.
고개 아래 마을 어흘리 지나 내려오면 구산 서낭당이 있다. 강릉단오제 날 대관령에서 내려온 성황님이 잠시 머물면서 서낭제를 받고 가는 곳이다. 그 아래에는 대관령 박물관이 정성스레 모은 콜렉션을 보여준다. 길 아래 로타리를 지나면 매월당이 산 위에서 그린 구산역(丘山驛)이 있었던 성산면이다.]
[최동열의 요산요설(樂山樂說)] 41. 대관령 불망비(不忘碑)
최동열
강원도민일보 기사 입력 2025.09.02.
대관령은 영동지역에서 외부로 통하는 가장 낮은 고갯길이다. 해발 865m. 동해안은 백두대간 험산준령이 ‘산의 장막’을 친 곳이니, 대관령이 없었다면 주민들이 외부와 소통하는 일은 훨씬 더 힘겨웠을 것이다.
그러나 해수면에 잇닿은 동해안에서 보자면 대관령 또한 거대한 성벽처럼 엄두를 내기 어려운 높이다. 그래서 강릉에 관향(貫鄕)을 두고 있는 매월당 김시습은 조도(鳥道), 즉 ‘하늘을 나는 새나 넘나드는 길’이라고 했고, 교산 허균은 잔도(棧道)라고 표현했다. 이따금 백수의 왕으로 불리는 호랑이도 출몰하고, 겨울철에는 살을 에는 엄동의 한파 때문에 길손들의 고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오늘은 그 대관령 옛길에 서 있는 작은 비석 얘기를 해보려 한다. 비석의 이름은 ‘기관 이병화 유혜 불망비(記官李秉華遺惠不忘碑)’. 대관령 고갯길의 중간 휴식처인 ‘반정(半程)’에서 300여m 아래 등산로 숲속에서 만날 수 있다. 1m 남짓 크기의 비석 윗부분에 갓을 씌우고 주변의 잔돌을 모아 나지막하게 담을 둘렀다. 등산로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발견할 수 있지만, 워낙 소박하게 세워진 비석인지라 존재 자체를 모르고 지나치는 등산객들이 더 많다. 그냥 흔한 무덤 앞의 묘비 정도로 생각하기에 십상이지만, 비석이 전하는 뜻은 오늘날 그 어떤 웅변보다 우렁차다. 비석이 세워진 때는 1824년 9월, 조선 순조 임금 때다. 대관령 깊은 산 속에 비석이 세워진 연유는 비석 앞면의 명문을 통해 알 수 있다.
‘많은 돈으로 은혜롭게 점막을 지었네/(중략) 오가는 길손은 휴식할 곳을 얻었고, 머무는 자는 숙소를 마련하게 되니/ 조각돌에 아름다운 행적을 새겨 오래 기리고자 하노라.’ 강릉 관아에서 기관(記官) 벼슬을 하던 이병화라는 향리가 거액의 사재를 들여 대관령 옛길에 길손들이 안전하게 묵어갈 수 있는 여각을 지었고, 주민들은 그 고마움을 잊지 않기 위해 고갯길 한켠에 불망비를 세웠다는 아름답고 정겨운 내용이다.
당시의 지방 향리들은 대부분 양반이 아닌 중인 신분이었으니, 이병화 또한 중인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런 그가 재산을 내놓아 불특정 다수의 안전을 챙기는데 힘썼으니, 현세에 전하는 애민(愛民)과 휼민(恤民)의 메시지가 더 감동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등산의 또 다른 즐거움은 이야기를 챙기는 것이다. 산이 전하는 이야기는 그 산에 기대어 살아온 우리네 민초들의 애환을 담은 생생한 현장 증언이고, 풀뿌리 생활문화의 교본이다. 그러하니 오늘 산행에 나선다면 자연을 즐기는 것에 더해 꼭 그 산의 이야기를 담아 올 일이다.]
[최동열의 요산요설(樂山樂說)] 45. 험산 고갯길을 넓힌 죄를 묻다니
최동열
강원도민일보 기사 입력 2025.09.30.
대관령 옛길은 영동∼서를 잇는 관문답게 수많은 옛이야기를 품고 있다. 조선 중기에 강원도 관찰사를 지낸 고형산(高荊山·1453∼1528년)과 관련된 얘기는 대관령 고갯길이 전하는 스토리 중 압권이라고 할 만하다. 그는 조선 중종 임금 때 호조·형조·병조판서와 우찬성 등 요직을 두루 거친 청백리이다. 1511년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한 뒤에는 강릉성과 삼척진 등 동해안 5개 지역과 해안가 포진에 성을 쌓고 왜적의 침입에 대비하는 선견지명까지 실행에 옮겼으니, 국토방위와 백성의 평안을 위해 노심초사하는 목민관의 전형을 보여줬다고 평가할 수 있다.
강릉에서 한양으로 통하는 관동대로를 정비한 일도 그의 공적이다. 그런 그가 대관령 길을 넓힌 죄로 사후(死後)에 부관참시라는 극형을 받았다는 얘기가 전해지니, 요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다. 험준한 산길을 백성들이 편하고 안전하게 이용하도록 정비하는 데 사재(私財)까지 썼다면 애민(愛民)의 정이 돋보이는 행적이다. 그런데도 형을 받은 이유는 그의 사후에 발생한 전란 중에 침입한 적군의 일부가 강릉에 상륙, 대관령을 넘어 한양으로 직행하는 상황이 빚어지면서 대관령 길을 넓힌 일이 임금의 진노를 산 때문이라고 한다.
나중에 물산과 사람의 왕래가 빈번해지고, 대관령 길의 활용도가 높아지면서 목민관으로서 백성들의 고충과 불편을 살핀 그의 공적을 재평가해 조정에서 위열공(威烈公)이라는 시호를 추증하고 포상하지만, 대관령 길에 전해지는 이 일화는 과거 왕조시대에 ‘무도즉안전(無道則安全)’ 인식이 얼마나 팽배했는지를 확인케 하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무도즉안전은 ‘길이 없으면 안전하다’는 뜻이다. 곧게 펴진 좋은 길은 적의 침입로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예로부터 병가(兵家)에서는 길을 내는 것은 걱정을 더하는 것으로 인식했다. 수많은 외침에 시달린 국난 극복사를 살펴보면 한편으로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소극적 방어책으로 인해 우리의 육로 교통은 근대에 이르기까지 열악한 사정을 벗어나지 못했다.
‘성(城)을 쌓는 자는 망하고, 길을 내는 자는 흥한다’고 했다. 사통팔달 가도를 연결한 로마는 ‘팍스 로마나(Pax Romana)’로 불리는 평화의 전성기를 구가한 반면에 동시대 중국의 통일제국 진(秦)나라는 만리장성을 쌓는데 국력을 허비하고 민심이 이반되면서 결국 단명 제국으로 무너졌다. 개인이든, 국가든, 벽을 치고 보신에 급급하기보다는 길을 닦아 외부와 소통·교류하는데 힘써야 미래가 열린다는 것을 오늘 대관령 옛길을 등산하며 다시 진중하게 되새긴다.]
[강릉단오제
단오는 음력 5월 5일로 ‘높은 날’ 또는 ‘신 날’이란 뜻의 수릿날이라고도 한다. 강릉단오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역사가 깊은 축제로, 마을을 지켜주는 대관령 산신을 제사하고, 마을의 평안과 농사의 번영, 집안의 태평을 기원한다. 강릉단오제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매년 3, 4, 5월 중 무당들이 산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3일동안 굿을 벌였다는 남효온(南孝溫)의 문집(『추강냉화(秋江冷話)』) 기록과, 1603년(선조 36년)에 강릉단오제를 구경하였다고 기록한 허균(許筠)의 문집(『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등이 있다.
마을사람들은 단오제를 드리지 않으면 마을에 큰 재앙이 온다고 믿어 대관령서낭당에서 서낭신을 모셔와 강릉시내의 여서낭신과 함께 제사를 드리는데, 대관령산신은 김유신 장군으로 전해지며, 단오제에서 주체가 되는 서낭신은 범일국사이고, 여서낭신은 강릉의 정씨처녀로 전해진다.
단오제는 신에게 드릴 술을 담그면서 시작된다. 대관령산신당에서 제사를 올리고 신성시하는 나무를 모시고 내려와 국사성황당을 거쳐 강릉시 홍제동에 있는 국사여성황당에 모셨다가 행사 전날 저녁 영신제를 지내고 남대천 백사장에 마련된 제단에 옮겨 모심으로 강릉단오제의 서막을 올린다. 단오장에서는 5일간 아침, 저녁으로 제를 올리고 굿을 하며 농사의 번영과 마을의 평안을 기원하며 모두 한마음이 되어 제를 올린다. 이밖에 양반과 소매각시, 장자머리, 시시딱딱이가 가면을 쓰고 말없이 관노가면극놀이를 하거나, 그네뛰기, 씨름, 농악경연대회, 창포머리감기, 수리취떡먹기 등 다양한 행사가 개최된다. 단오 다음날에 신성시하는 나무를 태우고 서낭신을 대관령으로 모시면서 단오제는 막을 내린다.
강릉단오제는 제관의 의해 이루어지는 유교식 의례와 무당들의 굿이 함께 거행되는 동해안에서 가장 규모가 큰 마을축제로 수많은 군중이 모여들고 난장이 크게 벌어진다. 특히 관노가면극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무언극으로 대사없이 몸짓으로 관객을 웃기고 즐겁게 한다. 민간신앙이 결합된 우리나라 고유의 향토축제이며, 지역주민이 화합하고 단결하는 협동정신을 볼 수 있다.]
11:18~12:25 대관령 옛길의 옛주막터로 이동
[복원한 옛주막에는 아쉽게도 주모는 없다. 주모 없는 주막에서 산객의 갈증을 달래는 건 이가 시릴 정도로 차가운 약수뿐이다. ].
12:25~12:55 대관령 옛길의 우주선 화장실로 이동
[우주선 화장실은 아름다운 화장실 공모전에서 동상을 차지했다.]
12:55~13:25 강원특별자치도 강릉시 성산면 대관령옛길 1 번지에 있는 대관령 박물관으로 이동
[대관령박물관
대관령 박물관은 영동고속도로변에 위치하여 교통상의 접근이 용이하며, 대관령을 뒷배경으로 산에서 굴러 내린 돌 한 점의 느낌을 주는 고인돌 형태의 건물로 지어졌다. 1993년 5월 15일 개관한 이후 10년 동안 사립박물관으로 운영돼 왔으나, 문화재를 공공재화 하여 항구적인 서비스가 가능토록 하겠다는 설립자 홍귀숙의 뜻에 따라 2003년3월13일 강릉시에 기증되었다. 전시실과 야외 전시장을 정비하여 같은 해 11월 28일 재개관하였으며, 현재 오죽헌․ 박물관의 산하기관으로 관리되고 있다.
박물관은 한국건설협회와 설계사 협회에서 선정한 우수건축상 및 강원도 최우수상을 수상한 건축물로, 자연림으로 숲을 이룬 주변과 어울려 전혀 손색 없는 단아한 한 폭의 산수화의 구도와 같다. 태백산맥 대관령 산자락에서 흘러 내리는 맑은 물과 오염되지 않은 깨끗한 자연 경관을 벗 삼아 사계절 풍광을 고스란히 마음에 얻어갈 수 있는 곳일 뿐만 아니라, 역사의 향기를 느끼며 한 컷의 사진으로 추억을 담아가고 싶은 곳이다.
전시관은 전통적 사방을 상징하는 좌 청룡, 우 백호, 북 현무, 남 주작의 4개 전시실과 토기실 및 민속품이 전시된 우리방의 2개 전시실을 포함한 총 6개의 전시 공간이 있으며 방마다 특징적인 장식과 색으로 구성되어 있다. 청동기 시대에서 근세에 이르기까지 총 2,000여 점의 유물이 관람하기에 편리한 동선 구조와 더불어 전시되어 있다. 야외 전시장에는 장승을 비롯한 동자석, 문관석류 등이 풀밭에 제멋대로 놓여진 듯 치장되지 않은 어울림 그대로의 멋을 간직한 채 놓여져 있고, 다산과 풍요의 옛 성문화를 볼 수 있는 아름답기까지 한 남근석 앞에서 득남의 소원을 슬며시 기원해 볼 수도 있다.
주소 강원특별자치도 강릉시 성산면 대관령옛길 1
문의 033-660-3830~2
홈페이지 http://www.gn.go.kr/museum/index.do
휴무일 1월 1일 / 설·추석 당일
이용시간 09:00~18:00 (입장 마감 17:00)
이용요금 [개인]
- 어른 1,000원
- 청소년 / 군인 700원
- 어린이 400원
[단체(30인 이상)]
- 어른 700원
- 청소년 / 군인 500원
- 어린이 300원
※ 무료
- 만 6세 이하 / 만 65세 이상 / 국가유공자 / 장애인 / 강릉 시민
※ 이용요금은 변동될 수 있으므로 자세한 사항은 홈페이지 참조 또는 전화 문의 요망]
[홍귀숙 강릉시 대관령박물관 명예관장 별세
이연제 기자
강원도민일보 기사 입력 2026.01.05.
강릉시 대관령박물관의 홍귀숙 명예관장이 지난 2일 별세했다. 향년 91세.
홍귀숙 관장은 평생 수집한 문화유산을 조건 없이 강릉시에 환원한 수집가이다.
홍 관장은 과거 서울 청계천에서 처마 밑에 버려진 채 비를 맞고 있는 토기를 발견하고, 우리 선조의 유산이 방치된 것을 안타깝게 여겨 평생에 걸쳐 고미술품과 민속품들을 사모았다.
이후 지난 1993년 5월 대관령 옛길 입구에 고인돌 형태를 본뜬 독특한 외관의 대관령박물관을 개관해 지역 문화 유산을 국내외로 널리 알리는데 앞장서왔다. 해당 건물은 강원도 건축 대상을 받기도 했다.
또 홍 관장은 역사적 자료들이 개인의 소유가 아닌 모두가 향유하고 교육 자료로 쓰여야 한다는 신념으로 지난 2003년 3월 박물관 건물과 토지, 총1853점의 소장품 전체를 강릉시에 기증했다.
당시 박물관 매수 제안도 있었으나 거절했으며 개인이나 친족에게 물려줄 경우 박물관의 형태가 변질되거나 자료들이 흩어질 것을 우려해 이 같은 결정을 내리며 문화유산을 대하는 진심을 전했다.]
13:25~14:20 대관령 박물관 관람
14:20~15:17 대관령 박물관 쉼터에서 휴식
15:17~15:55 “노블레스 클럽” 버스를 타고 대관령 박물관을 출발하여 강원특별자치도 강릉시 창해로14번길 20 번지에 있는 강릉 안목해변 커피거리로 이동 [38분, 25.5km]
[안목해변 커피거리
강릉 송정동 안목해변에 커피거리는 유명 바리스타들이 정착하면서 자연스럽게 조성되었다. 예전에는 조용한 해변가에 불과하던 곳에 최근 커피바람이 불면서 유명 관광지로 재 탄생되고 있다.
관광가이드
1980년대 초부터 커피 명소로 명성을 얻어온 안목 카페거리는 1990년대 들어서면서부터 국내 최고의 커피 명장들이 하나 둘씩 모여들어 관광 명소로 떠올랐다. 로스팅 기계를 들여놓고 자신만의 손맛을 낸 원두를 볶아내는 커피숍이 늘어나면서 전국 커피 마니아들의 눈과 입을 사로잡기 시작하여 이 곳은 전국적인 명소로 거듭났다. 커피거리로 자리매김한 안목해변 일대에서는 바다를 그윽하게 바라보며 직접 내린 커피 한잔을 맛볼 수 있는 카페들이 계속 늘어나고 있다. 커피축제를 개최하는 등 최근 커피 도시로 급부상한 강릉지역의 커피숍이 횟집 수에 근접하는 등 강릉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커피 도시로 성장하고 있다.
관광팁
원래 강릉커피거리는 자판기커피가 유명했던 곳이다. 자판기 커피 한잔을 마시며 한적한 안목해변을 벗삼을 수 있어서 좋았던 시절이 있엇다. 그렇게 탄생된 강릉커피거리이다. 강릉커피거리에 이는 커피 전문점들은 저마다 아름다운 경치를 벗삼아 이색 테마 매장들을 선보이며 강릉을 찾는 관광객들을 유혹하고 있다. 강릉커피거리에는 드립커피뿐 아니라 수제 디저트까지 있어 브런치를 즐기기에도 안성맞춤인곳이다. 유명 프랜차이즈 커피 전문점까지 입점해 있어 멋진 동해바다를 감상하며 향긋한 커피도 즐길 수 있다. 어느 상점을 들어가느냐 하는 것은 여러분들의 몫이다. 티비 방송프로에서도 소개되어 더욱 유명해진 곳에서 강릉 먹거리들도 즐기면서 따뜻한 커피 한잔도 즐길 수 있는 여유를 가져볼 수 있다.]
15:55~16:32 강릉 안목해변에 있는 안목애(강원특별자치도 강릉시 창해로14번길 34 1층) 식당에서 얼큰초당순두부(12,000원)로 식사
16:32~17:10 [강릉 안목해변에 있는 ‘안목애’ 식당~솔바람다리~남항진 바다소공원~남항진 해수욕장~솔바람다리~강릉 안목해변에 있는 산토리니 강릉안목본점]의 동선으로 탐방
[강릉 안목해변에 있는 카페거리
안목 카페거리는 1980년대 초부터 커피 명소로 명성을 얻어왔다. 1990년대 들어서면서부터 국내 최고의 커피 명장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어 자신만의 손맛을 낸 원두를 볶아내는 커피숍이 늘어나면서 전국 커피 마니아들의 눈과 입을 사로잡기 시작하였다. 최근 커피 도시로 급부상한 강릉지역의 커피숍이 횟집 수에 근접하는 등 강릉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커피 도시로 성장하고 있다. 다양한 개성이 담긴 커피와 디저트를 맛볼 수 있으며 매년 커피 축제도 개최하고 있어 즐길거리도 더해졌다.]
[솔바람다리
주소 : 강원특별자치도 강릉시 병산동
남항진과 안목을 잇는 인도교인 솔바람다리는 2010년 4월에 완공되었다. 총길이 197m의 보행자·자전거 전용 다리로, 높이는 3층 건물 정도이며 전망도 매우 뛰어나다. ‘솔향 강릉’의 솔과 바람이 많은 지역 특성을 반영해, 개통 당시 ‘솔바람다리’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바다와 강 사이에 놓인 다리라는 특성상 바람이 많이 불어 여름철 피서지로 인기가 높고, 야간에는 조명이 더해져 아름다운 야경을 즐길 수 있다. 연인들에게는 데이트 코스로, 가족들에게는 나들이 장소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다리를 건너 북쪽으로는 요트를 탈 수 있는 강릉항 요트 마리나가 있으며, 인근에는 강릉 카페거리도 있어 낭만적인 카페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가족이나 연인과 함께 잊지 못할 시간을 보낼 수 있다.]
[남항진 해변
주소 : 강원특별자치도 강릉시 공항길127번길 67 (남항진동)
남항진해변은 길이 600m, 2만 4천㎡의 백사장이 있는 간이해수욕장이며, 강릉시 동쪽 남대천 하구의 섬석천이 바다와 만나는 곳에 있는 포구이다. 남항진 해변은 맑고 푸르기로 유명하다. 주변에는 울창한 소나무 숲과 깨끗이 정비된 민박집이 있어서 조용하게 며칠쯤 쉬어가기에 적당하다. 요즘 캠핑 인구가 늘면서 남항진에도 캠핑을 할 수 있는 솔밭이 생겼고 방파제를 하나 두고 커피 거리로 유명한 강릉항이 있다.]
17:10~17:30 강원특별자치도 강릉시 경강로 2667 1-4층에 있는 산토리니 강릉안목본점에서 노블레스클럽 회원인 하몽님이 사준 아메리카노 아이스(5,800원)을 마시면서 휴식
17:30~17:33 강원특별자치도 강릉시 견소동 286-4 번지에 있는 안목해변 주차장으로 이동하여 “노블레스 클럽” 버스에 승차
17:33~20:31 “노블레스 클럽” 버스를 타고 안목해변 주차장을 출발하여 서울 교대역으로 귀경 [2시간58분, 212.3km]
대관령옛길 안내도
[안목해변 카페거리] 지도
[솔바람다리&남항진 해변] 위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