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원성당 - 천주교 박해의 역사를 품은 한국 최초의 시골 본당
소재지 : 강원특별자치도 횡성군 서원면 경강로유현1길 30 번지
횡성 풍수원 천주교회(풍수원 성당)는 1800년대 초, 박해를 피해 경기도 용인에서 신태보(베드로)를 중심으로 한 40여 명의 신자들이 피난처를 찾아 정착한 곳이다. 풍수원 본당은 한때 춘천, 원주, 화천, 양구, 홍천, 횡성, 평창, 양평 등 12개 군의 29개 공소를 관할하였으며, 1896년 원주 본당의 분리를 시작으로 1920년에는 춘천 본당, 1948년에는 홍천 본당이 각각 분리되었다. 강원도 횡성군 서원면 유현리에 위치한 풍수원 성당은 1982년 강원도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나지막한 언덕 위에 서남 방향으로 자리 잡은 본 성당 건물은 열주(列柱) 아케이드와 천장 구조에 의해 신랑과 측량이 구분되는 삼랑식 평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면 중앙에 돌출되어 위치한 주현관과 2층의 원형 창, 3층의 2연 아치창 및 2연 비늘창으로 이루어진 종루의 구성은 위로 갈수록 좁아지는 부벽과 함께 수직성을 강조하며 중앙 입면을 인상적으로 보이게 한다.
[순례, 걷고 기도하고] 원주교구 풍수원성당
가톨릭신문 기사 입력일 2025-09-03 08:59:24 수정일 2025-09-03 08:59:24 발행일 2025-09-07 제 3457호 13면
이승환 기자
박해 피한 신자들, 220여 년 전 정착해 성당으로 사용
47년간 주임 맡은 정규하 신부 주축…‘강원 최초 성당’
경기도 양평과 강원도 횡성의 경계인 도덕고개를 넘자, 강원도 첫 마을 ‘풍수원(豊水院)’이 한 눈에 들어온다. 장호원이나 조치원, 신례원, 이태원처럼 ‘원’(院)을 품은 곳은 예로부터 관원이나 나그네가 말을 세워놓고 쉬어가던 장소였다. 풍수원 또한 강원에서 한양으로 혹은 한양에서 강원으로 향하던 이들이 하룻밤 머물거나 잠시 숨 돌리던 고장이었으며, 이름 그대로 물이 풍부한 지역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박해를 피해 피난길에 나선 신자들이 풍수원에 정착한 것은 220여 년 전 일이다. 신유박해(1801년) 이후 경기도 용인에 살던 복자 신태보(베드로)를 비롯한 40여 명이 당시 깊은 산골이던 이곳에 터를 잡아 교우촌을 이뤘다. 그리고 80여 년간 성직자 없이 신앙생활을 이어갔다.
성당 초입에 ‘1888년, 유적지 풍수원성당’이라 새겨진 커다란 비석이 서 있다. 비석에 새겨진 그해 프랑스 선교사 르메르(Le Merre, 파리외방전교회) 신부가 초대 본당 신부로 부임해 초가집 여러 채를 이은 ‘초가 사랑방’을 성당으로 사용했다. 본당 역사의 시작이다. 당시 본당은 강원도 전역과 경기도 일부를 포함하는 12개 군 29개 공소에 신자 수는 2천여 명에 이르렀다.
입구를 지나 오르막을 한 걸음 한 걸음 걷다 보면 정면에 커다란 느티나무가 모습을 드러낸다. 걸음이 빨라진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붉은색 벽돌 옷 입은 성당이 한 뼘씩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 하늘 높이 솟은 뾰족탑과 십자가, 붉은색과 회색 벽돌이 어우러진 단정하고 고풍스러운 성당을 온전히 볼 수 있는 자리에 다다랐다.
성당과 어우러진 느티나무의 푸르름. 그리고 나무 그늘에서 묵주기도를 봉헌하며 미사를 기다리는 신자들. 늦여름 순례자의 눈앞에 펼쳐진 성당 마당은 한 폭의 그림 같다. 드라마와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것도 우리가 ‘옛 성당’ 하면 떠오르는 바로 이런 아름다움 때문일 것이다.
본당 역사를 이야기할 때 본당 2대 주임 정규하(아우구스티노) 신부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그는 1896년 강도영(마르코)·강성삼(라우렌시오) 신부와 함께 한국 땅에서 처음 사제품을 받았다. 정 신부는 수품 후 곧바로 본당에 부임해 1943년 선종할 때까지 47년간 이곳에서 사목했다.
정 신부는 자신의 돈과 신자들의 헌금으로 초가 성당을 대신할 새 성당을 짓기 시작했다. 남녀 불문하고 신자 모두 힘을 보탰다. 중국인 목수 진 베드로와 함께 서양식 벽돌을 굽고 벽을 쌓았다.
그리고 착공 1년 만에 한국인 사제가 지은 첫 서양식 성당이자 강원 최초의 성당이 하느님께 봉헌된다.
좌우 기둥과 아치형 천장이 조화를 이루는 성당 내부는 아늑하고 정겹다. 옛 모습 그대로인 ‘십자가의 길’이 따스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제대 뒤 스테인드글라스는 은은한 빛을 쏟아낸다. 미사에 앞서 묵주기도가 봉헌된다.
성당과 한 형제처럼 벽돌 옷 입은 사제관은 성당 뒤편에 있다. 1912년 지어진 것으로 현재는 역사관으로 사용된다. 본당 설립 당시 사용했던 촛대와 십자가, 성합, 기도서를 비롯해 밭에서 발견된 제작연대 미상의 예수성심상, 정규하 신부가 사용하던 책상 등 다양한 유물이 전시돼 있다.
성당 왼편으로 발길을 옮기면 커다란 예수성심상 곁에서 십자가의 길이 시작된다. 숲이 선사하는 싱그러운 공기와 어우러진 호젓한 등산길. 이철수 판화가가 표현한 예수님 수난 장면을 한 처 한 처 묵상하며 오르다 보면 묵주동산에 다다른다. 땅에 묻힌 축구공 크기 묵주알을 하나하나 지나며 성전에서 미처 하지 못한 성모송을 봉헌한다.
묵주동산을 지나 내려오면 넓은 광장 곁으로 유물전시관이 자리하고 있다. 옛 농촌의 일상에서 쓰이던 농기구와 민속품뿐 아니라 본당 설립 초기 사용하던 성광과 성합, 제병기, 정규하 신부가 사용하던 병자성사 가방, 십자가 등 신앙인들의 자취가 서린 유물도 만날 수 있다.
유물전시관 옥상에 옹기 100여 개가 햇살을 맞이하고 있다. 그 너머로는 가마터가 옛 모습 그대로 보존돼 있다. 옹기를 구워 생계를 이어가는 어려움 속에서도 신앙공동체를 이뤘던 박해시기 풍수원 교우촌의 모습이, 가마터에서 벽돌을 굽고 어깨에 지고 나르며 하느님 집을 짓기 위해 비지땀 흘렸을 옛 신자들의 헌신이 자연스레 머릿속에 떠오른다. 저 옹기들처럼 ‘옹기종기’ 모여 앉아 하느님을 찬미 찬양하며 기도했을 신앙 선조들의 모습을 가슴에 담으며 성당을 나선다.
◆ 순례 길잡이
- 강원도 횡성군 서원면 경강로유현1길 30
- 미사: 주일 오전 11시(토 오후 7시) / 화~토 오전 11시
- 성체 현시: 화~금 오후 1시30분~2시30분
- 문의 : 033-342-0035 본당 사무실
풍수원 성당(豊水院聖堂)은 강원특별자치도 횡성군 서원면 유현리에 있는 한국 천주교 원주교구의 성당이다. 1982년 11월 3일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69호로 지정되었다.
강원도에 있는 성당으로, 원래 이곳은 조선 고종 3년(1866) 병인양요로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심해지면서 천주교 신도들이 피난처로 삼아 모여 살던 곳이다.
고종 27년(1890) 프랑스인 르메르 신부(Louis Le Merre)가 1대 신부로 부임하여 초가 20칸의 본당을 창설하였다. 그 후 고종 33년(1896)에 부임한 2대 정규하(1893∼1943) 신부가 직접 설계하여 본당을 지었는데, 융희 1년(1907) 중국인 기술자와 모든 신도들이 공사에 참여하여 현재의 교회를 완공하였다.
건축 양식은 고딕식으로, 앞면에는 돌출한 종탑부가 있고 출입구는 무지개 모양으로 개방되어 있다. 지붕은 두꺼운 동판을 깔았고, 내부에는 기둥들이 줄을 지어 있는데, 벽돌 기둥처럼 보이게끔 줄눈을 그려 넣었다.
풍수원 성당은 한국인 신부가 지은 강원도 최초의 성당이며, 한국에서 일곱 번째로 건립된 유서 깊은 절충식 고딕 건축물이다.
1907년 신자들의 손에 의해 직접 지어진 본 성당은 90여 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아름다운 모습으로 건재하며, 1920년 이래 계속되고 있는 성체현양대회 때면 전국에서 1,500여 명이 넘는 신도들이 이 교회로 찾아온다.
또한 이 교회 본당 옆에 위치한 구 사제관은 원형이 비교적 잘 유지된 벽돌조 건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아 2005년 대한민국의 등록문화재 163호로 지정되었다.
역사적 배경
1801년 신유박해 이후 1802년 혹은 1803년경 경기도 용인에서 신태보(베드로)를 중심으로 하여 40여명의 신자들이 팔일 동안 피난처를 찾아 헤매다가 정착한 곳이 바로 한국 최초의 천주교 신앙촌인 풍수원이다. 이 곳 풍수원에서 80여 년 동안 신자들은 성직자 없이 신앙생활을 영위해오다가 1888년 불란서 성직자 르메르 이 신부님을 맞이하여 정식으로 교회가 설립케 되었다.
1866년(고종 3년) 교회 대박해(병인박해)와 1871년(고종 8년) 신미양요 때 신자들이 피난처를 찾아 헤매던 중 산간벽지로서 산림이 울창하여 관헌들의 눈을 피하기에 알맞은 곳이라 사방으로 연락하여 신자들을 모아 한 촌락을 이루어 일부는 화전으로, 일부는 토기점으로 생계를 유지하며 20년간을 지내다가 1888년 6월 20일 조선교구장 민 대주교께서 본당을 설립하고 초대 주임신부로 불란서 르메르(Le Merre) 이 신부가 부임하여 춘천, 화천, 양구, 홍천, 원주, 양평등 12개군을 관할하였으며 당시 신자 수는 약 2,000명이었고 초가집 20여간을 성당으로 사용하였다.
1896년 2대 주임으로 정규하(아우구스띠노)신부가 부임하여 중국인 기술자 진베드로와 함께 현재의 성당(벽돌 연와조 120평)을 1905년에 착공, 1907년에 준공하여 1909년 낙성식을 가졌다.
신자들이 벽돌을 굽고 아름드리 나무를 해오는 등 자재를 현지에서 조달했다. 강원도 전체와 경기도 일대의 성당은 풍수원 성당에서 분당된 것이다. 그런데 본 성당은 지난 1982년 강원도에 의해 지방문화재 제69호로 지정된 바 있다. 아울러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 대축일을 기해 1920년에 제1회 성체대회가 실시되어 매년 행사가 치러지고 있다.(6.25동란으로 3년간 본 행사가 치러지지 못했다.)
"잘 짓지 못했다"는 횡성 풍수원성당…'韓 성당 건축' 모델이 되다
최성욱 기자
서울경제 기사 수정 2020-11-24 17:56
국내 네번째이자 韓 신부가 지은 첫 성당
바실리카식 본체에 고딕식 기둥·종탑 등
정규하 신부 주도로 원터마을에 뿌리내려
산책로따라 강론광장·유물전시관도 볼거리
“건축을 시작했던 성당을 준공했습니다. 그러나 돈이 넉넉지 못해 잘 짓지는 못했습니다.”(1910년 2월9일 정규하 신부의 사목 서한 중)
강원도 횡성 풍수원성당(강원도 유형문화재 제69호)은 지난 1907년 지어진 건물로 서울 약현성당(1892년)과 완주 되재성당(1893년), 서울 명동성당(1989년)에 이어 한국에 세워진 네번째 성당이자 한국 신부가 지은 최초의 성당이다. 강원도에 세워진 최초의 성당인 만큼 지역에서는 중요한 문화재로 꼽힌다.
풍수원성당이 자리한 원터마을은 1801년 신유박해로 천주교 탄압이 심해지자 경기도 용인의 신자 40명이 피난처로 삼았던 한국 최초의 천주교 신앙촌이다. 지금의 성당이 들어선 것은 1896년 2대 정규하 신부가 부임한 뒤의 일이다. 초가집으로 된 본당이 있던 자리에 정 신부가 신자들과 함께 나무를 패고 벽돌을 구워 4년 만에 현재의 모습을 갖췄다.
초창기 성당 대부분이 외국의 특정 건축양식에 따라 지어진 것과 달리 풍수원성당은 다양한 건축양식을 혼합한 형태다. 정 신부는 한국 최초의 성당인 약현성당을 모델로 바실리카식 본채와 로마네스크식 천장, 고딕식 기둥과 종탑을 채용해 성당을 세웠다. 이는 이후 지어진 한국 성당의 표준 모델이 됐다. 1900년대 초에 세워진 성당들에서는 풍수원성당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성당 내부는 로마네스크 양식에 따라 지어졌다. 아치형 정문을 통과해 성당 내부로 들어가면 좌우로 늘어선 벽돌 기둥이 지붕 구조물을 받치고 있고 그 아래 신도들을 위한 의자가 놓여 있다. 성당 내부는 스테인드글라스 창을 통해 들어오는 빛으로 아늑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미사 때 신을 벗고 성당 내부로 들어가는 것도 100년 전 전통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바닥에 앉아 미사를 봤다고 한다.
정 신부는 사목활동 대부분을 풍수원성당에서 보냈다. 1912년 벽돌조 건물로 지어진 구 사제관(대한민국 등록문화재 163호)은 그런 정 신부의 생활을 엿볼 수 있는 공간이다. 정 신부는 겨울에는 온돌방이 있는 1층에서, 여름에는 2층에서 생활했다고 한다. 1평 남짓한 정 신부의 방에는 평소 그가 사용하던 책상과 오르간이 놓여 있고 성경과 미사경본·성광도 전시돼 있다. 검소했던 정 신부의 생활을 엿볼 수 있다.
성당은 주일 오전11시 순례자들을 위한 미사를 진행하고 있지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관광객 출입은 금지됐다. 성당 내부를 보려면 미사가 진행되기 전에 찾아야 하지만 시간을 맞추기 어렵다면 주변을 돌아보는 것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을 만큼 다양한 시설을 갖추고 있다. 성당 옆 산책로를 따라가면 100년 역사의 성체현양대회가 열리는 강론광장과 14개의 판화로 예수님의 수난의 길을 형상화한 십자가의 길, 유물전시관 등이 마련돼 있다.
풍수원 성당에 조성된 십자가의 길은 판화가 이철수 선생의 작품이다.
정규하(鄭圭夏) 신부
출생 연도 : 1863년 8월 8일
사망 연도 : 1943년 10월 23일
출생지 : 충청남도 아산시 신창면 남성리 남방제 마을(현, 충청남도 아산시 신창면 남성리)
성별 : 남성
본관 : 동래(東萊)
정규하(鄭圭夏, 1863~1943)는 강원도 횡성 풍수원성당에서 47년 동안 주임 신부로 재임한 천주교 사제이다. 세례명은 아우구스티노이며, 1896년에 천주교 사제로 서품되었다.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끝나고 신앙의 자유가 주어진 상황에서 천주교의 위상과 사회적 역할을 정립하였다. 풍수원성당과 사제관을 건축하고 여성 신자 단체인 안나회를 조직, 운영하였으며, 성체대회를 열어 신앙심을 고취시켰다. 일제강점기에는 의병 활동을 지원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학교를 개설하였으며, 고아들을 돕는 활동을 펼쳤다.
인적 사항
정규하는 천주교 사제(司祭)이며 세례명은 아우구스티노이다. 1863년 8월 8일, 충청남도 신창군 소동면 남방리에서 2남 1녀 중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정상묵(鄭商黙, 마태오, 1841~1906), 어머니는 청주 한씨(韓氏, 마르타, 1843~1903)이다.
정규하의 집안은 조선에 천주교가 전래된 초기부터 천주교 신앙을 가졌다. 계속되는 박해를 겪던 중에 결국 어머니 한씨가 관가에 잡혀가는 일이 있자 아버지 정상묵은 박해를 피하기 위해 가족들을 이끌고 고향을 떠나 공주와 음성, 장호원 등을 떠돌며 생활하였다. 이후 충북 중원군 소태면(현, 충청북도 충주시 소태면)으로 이주하여 살았는데, 정규하는 그곳에서 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며 사제가 될 뜻을 품었다. 소태면에서 살던 집이 화재로 불에 타자 가족들은 다시 경기도 광주로 이사를 하였고, 1883년,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서울에서 기초교육을 받은 후 1884년 2월에 말레이시아 페낭으로 유학을 갔다.
주요 활동
1891년에 귀국한 후 용산의 예수성심신학교에서 학업을 마쳤다. 1896년 4월 26일, 서울 약현성당에서 강성삼(姜聖參), 강도영(姜道永) 등과 함께 사제로 서품되었다. 이들은 김대건 신부, 최양업 신부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세 번째로 서품된 천주교 사제이며, 이날 열린 서품식은 한국에서 거행된 첫 번째 천주교 사제 서품식이다.
처음에는 강원도 평창군 하일의 주임 신부(主任神父)로 발령을 받았으나 당시 풍수원성당의 주임 르메르(Le Merre, Louis Bon Jules, 1858~1928) 신부가 원주성당을 설립하기 위해 이동하자 박해 시기 동안 형성된 교우촌을 배경으로 한 풍수원성당의 주임 신부가 되었다. 이후 1943년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47년 동안 풍수원성당에만 재직하였다.
정규하가 활동한 시기는 천주교회와 한국 사회 모두 큰 변화를 겪는 시기였다. 종교적으로는 1784년에 우리나라에 들어온 천주교가 100여년 동안 박해를 받다가 1886년, 선교의 자유가 주어지면서 그동안 숨어서 지내던 신자들이 밖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며 세상 속에서 새로운 의미의 신앙생활을 시작하는 시기였으며, 정치적으로는 일제의 강점으로 민중들이 고통을 겪고 있던 때였다.
정규하는 우선 박해 시기 동안 온갖 고통과 가난을 겪던 천주교 신자들을 위로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신앙의 보존이 가장 중요한 과제였던 박해 시기를 벗어나 새로운 환경에 부합하는 신앙의 실천과 교회의 확장을 위해 노력했다.
1910년에 건립한 고딕식 성당인 풍수원성당과 1913년에 건립한 사제관은 박해를 벗어나 신앙의 자유를 얻은 이들의 안정적 신앙생활을 드러내는 표지가 되었다. 박해 시기 동안 가난과 고통에 시달린 신자들을 위로하며 새로운 생활 기반을 함께 마련하려고 노력하는 한편, 여성 신자들의 모임인 안나회(安那會)를 조직하여 교회와 지역에서 여성 역할을 새롭게 자리매김하였다. 1920년에는 성체 거동 행사를 열어 신자들의 신심을 고취하였다. 또 성영회(聖孀會)를 조직하여 신자들의 집에서 고아들을 돌보도록 하였고, 삼위학당(三位學堂)이라는 교육 기관을 설립하여 신앙 교육과 동시에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활동을 펼쳐나갔다.
또 일제강점기 상황에서는 일제에 맞선 의병들에게 침식(寢食)을 제공하거나 훈련 장소를 제공하기도 하였으며 자금을 지원하기도 하였다.
정규하 신부는 천주교 사제로서, 식민지 시대의 지식인으로서 근대가 시작되는 소용돌이의 한복판에 있던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박해를 겪어 온 이들을 위로하는 한편, 앞으로 펼쳐질 근대라는 새로운 사회에서 종교의 역할과 신앙의 의미를 고민하며 미래의 천주교의 방향에 신앙과 실천이라는 초석을 놓는 역할을 하였다. 아울러 일제강점기에는 종교 내부의 위계질서에 따라야 하는 성직자로서의 입장과 일제에 의한 식민 통치를 겪는 식민지 백성으로서의 입장 사이에서 갈등하는 당대의 전형적 인물이었다.
1943년 10월 23일에 풍수원성당에서 세상을 떠나 성당 옆 성주산(聖主山)에 안장되었다.]
풍수원성당 위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