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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 광장

‘요절한 천재 화가’ 최욱경

작성자soomountain|작성시간25.05.07|조회수273 목록 댓글 0

최욱경(崔郁卿)

해방 이후 「나부 이인」, 「작품 E」, 「산」 등을 그린 화가.

성별 : 여성

출생 연도 : 1940년

사망 연도 : 1985년

출생지 : 서울

최욱경은 해방 이후 「나부 이인」, 「작품 E」, 「산」 등을 그린 화가이다. 1950년대 김기창·박래현 부부와 김흥수 화백 등에게서 그림을 배웠다. 1963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추상표현주의를 학습했다. 1973년 개인전에서는 단청의 색채와 민화적 모티프, 한지 재료들을 이용한 실험적 작품을 제작했다. 1980년대에는 한국의 산, 바다, 섬의 자연적 곡선에서 차용한 구불거리는 선과 밝은 색채가 결합한 추상화가 등장한다. 최욱경은 조지아 오키프의 영향을 자기화하여 특유의 여성적 색채 추상의 세계를 구현한 작가로 평가 받는다.

개설

1960~70년대 미국에 유학하여 추상표현주의를 학습했으며, 조지아 오키프(Georgia O’keeffe)의 작품과 한국의 자연에서 영감을 받아 날렵한 곡선과 아름답고 강렬한 색채를 사용하는 독자적 색채 추상화를 구축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생애

최욱경의 생애는 유년 시절부터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시절까지를 성장기로, 1963년 미국으로 건너가 1971년 일시 귀국까지를 1차 유학 시기, 1974년 다시 미국으로 건너간 후 1981년 영구 귀국까지를 2차 유학 시기, 이후 국내에서 자리를 잡고 1985년 45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기까지의 국내 정착기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최욱경은 출판업을 하는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그림에 재능과 의욕을 보였으며 1950년대에는 김기창과 박래현의 부부화실에서 그림을 배웠다. 이화여자중학교 미술반에서 김흥수와 장운상에게, 서울예술고등학교에서 문학진, 정창섭, 김창렬 등에게 배웠으며 1959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에 입학하였다.

미술대학 3학년 때에는 한국미술협회전에서 「정물」로 국무총리상을,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는 반추상과에 「나부 이인(裸婦 二人)」으로 입선을 했다. 1962년에는 5.16 1주년기념 신인예술상에서 「작품 E」로 장려상을 받았고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 입선하는 등 일찍 두각을 나타냈다.

대학원 재학 중 1963년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크랜부룩미술아카데미(Cranbrook Academy of Art)에서 서양화를 전공하고 부전공으로 조각과 도자기를 배웠으며, 뉴욕의 브루클린미술관(Brooklyn Museum) 미술학교, 메인(Maine) 주(州)의 스코히건미술학교(Skowhegan School of Art) 등 여러 미술학교에서 학습했다. 1968년부터는 뉴햄프셔(New Hampshire)의 프랭클린피어스대학교(Franklin Pierce University)에 교수로 재직하다가 1971년에 귀국했다.

1971년에는 신세계 화랑에서 귀국 개인전을 열었고, 1972년에는 파리 비엔날레 출품작가로 선정되기도 했다. 시집 『낯설은 얼굴들처럼』을 출간했고, 한국 아메리카 학회가 주최한 한미문화교류세미나에 미술부문 강사로 참석하기도 했다. 1973년에는 미도파 화랑에서 ‘재료의 실험전’을 열었다.

1974년에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1976년에 로스웰미술관(Roswell Museum and Art Center)의 연구비 수상자로 선정되어 뉴멕시코(New Mexico)에서 일 년간 지원을 받으며 안정적인 작품활동을 했다. 이때 제작된 작품들은 1977년 로스웰미술관과 1978년 서울의 미국문화원에서 전시되었고 이어 부산과 대구에서도 순회전을 개최했다.

1977년부터 위스콘신주립대학교(Wisconsin State University)의 교수로 있다가 1979년 귀국하여 영남대학교 교수, 1981년부터는 덕성여자대학교 교수로 재직했으며 1985년에 사망했다.

작품세계

최욱경의 작품세계는 단색화와 민중미술로 이어지는 1970~80년대 국내 화단의 흐름과는 거리를 두고 있다. 그는 국내에 추상표현주의의 영향이 사실상 사그라든 시점에 미국 본토에서 이를 본격적으로 학습했다는 점과 남성 중심의 추상화단에서 술과 담배를 즐기는 낭만적인 성격의 독신 여성이라는 이색적인 존재로서 주목받았다.

학습기를 지나 점차 자신만의 독자적 양식을 구축하던 때에 조지아 오키프의 영향을 받고 이를 자기화하였으며, 한국의 자연에서 추출한 형태와 강렬하고 아름다운 색채를 구사하는 고유의 능력으로 독자적인 색채 추상화의 양식을 완성한 것으로 평가된다.

미국 유학 시기에 윌렘 드 쿠닝(Willem de Kooning), 마크 로스코(Mark Rothko), 로버트 마더웰(Robert Motherwell) 등 추상표현주의 대가들의 작품을 연구했다. 특히 크랜부룩에서는 윌렘 드 쿠닝의 인체 드로잉을 집중적으로 학습하여 많은 누드 드로잉 작품을 제작했다. 마크 로스코의 색채의 아름다움과 숭고의 미학에 대해서도 존경의 글을 남겼으며, 로버트 마더웰의 작품에 보이는 표현적이고 서예적인 격렬한 터치를 따라하기도 했다.

추상 작업으로 일관하던 1960년대 말에는 로버트 라우센버그(Robert Rauschenberg)의 컴바인 페인팅(combine painting: 이차원 또는 삼차원의 물질을 회화에 도입)의 영향을 받아 콜라주 작업을 보여주기도 했으며 반전(反戰) 메세지를 담은 작품을 시도하기도 했다.

귀국 후 1973년 개인전에서는 단청의 색채와 민화적 모티프, 한지 재료들을 이용한 실험적 작품을 제작하면서 한국적 요소들을 탐구하기도 했다.

2차 유학기의 뉴멕시코에서는 사막, 소뼈 등의 자연 형태들이 탐구되었으며 특히 뉴멕시코에 거주했던 여성 작가 조지아 오키프의 영향을 받았다. 이 시기에는 형상이 복원되면서 강렬하고 파괴적인 추상적 터치가 줄어들고 화면 내에 공간감을 남기며 형태를 구성하는 등 보다 차분한 화면으로 변모하게 된다. 최욱경은 이때에 내면의 여성성을 처음으로 탐구하기 시작했다고 이야기한 바 있으며, 그 결과 작품에는 곡선이 강조되고 색채도 부드러운 파스텔톤을 보여준다.

귀국 후 1980년대의 작품은 독자적 양식기로 평가된다. 한국의 산, 바다, 섬의 자연적 곡선에서 차용한 구불거리는 선과 밝은 색채가 결합하여, 기쁨과 환희를 전달하는 춤을 추는 듯한 형태의 추상화가 등장한다. 색들의 대비와 충돌이 강렬한 감정을 표현하고 날렵하고 부드러운 형태들이 속도와 움직임을 만들어내는 화면은, 추상표현주의와 조지아 오키프의 영향을 자기화하여 만들어낸 특유의 여성적 색채 추상의 세계로 평가된다.

추모

1987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추모전이, 1989년 호암갤러리에서 유작전이 개최되었으며 1996년 갤러리현대, 2005년 국제갤러리, 2013년 가나아트갤러리에서 회고전이 열렸다.

 

 

시대가 작아… 미처 품지 못한 이야기 [국현열화]<3>

△광활한 대작 만든 작은 거인 '최욱경'

'미술 천직'이라 믿은 열정의 화가

한국·미국 재료·기법 다 포용했으나

고국에서조차 이방인 취급 당하기도

자연·추상 조화 이룬 초대형 작품들

폭2.6m '미처 못 끝낸 이야기' 대표적

이데일리 기사 등록 2025-03-28 오전 7:40:00, 수정 2025-03-28 오전 7:56:19

오현주 기자

[정하윤 미술평론가] 작열하는 태양같이 강렬하게 타오르던 불꽃이 사그라졌다. 폭발하는 에너지도 한순간에 꺼져버렸다. 화가 최욱경(1940∼1985)이 세상을 떠난 것이다. 고작 마흔다섯 살. ‘무무당’(無無堂)이라 이름 붙인 작업실에서 맞은 갑작스럽고 이른 죽음이었다. 황망한 마음에 어쩔 줄 모르던 사람들이 허둥지둥 준비한 장례식장에는 흑장미로 덮인 관이 놓였다. 자신이 죽으면 장미를 놓아 달라고 흘린 그 말은 그대로 유언이 됐다. 1985년 여름의 일이었다.

이후 최욱경은 줄곧 ‘요절한 비운의 독신 여류화가’라고 불리곤 했다. 그러나 그렇게 진부하고 자극적인 단어로만 박제해버리기엔 너무 아깝다. 최욱경은 누구보다 열정적인 화가였다. 어릴 때부터 미술이 천직이라 믿었고, 다시 태어나도 그림을 그릴 거라 말하곤 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하루에 여섯 시간은 반드시 그림을 그렸다. 155㎝ 43kg 체구의 맨발로 사다리를 오르내리며 5m에 육박하는 그림에 몰두할 때면 마치 활화산 같았다. 맥주와 담배, 커피를 들이부어가며 작품을 몰아쳤고 “한 줌의 흙으로 변할 때까지 나는 이 길을 쉬지 않고 가리라”고 다짐했다.

한국서 엘리트 코스 밟은 뒤 미국행

1940년 서울에서 태어난 최욱경은 또래에 비해 꽤 특별한 행보를 밟았다. 홀로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것이 스물셋이던 1963년. 선진교육에 대한 갈망 때문은 아니었다. 미술에 재능과 관심을 보이는 딸을 전폭적으로 지원하려는 부모 덕분에 한국에서도 일찍부터 미술계의 엘리트 코스를 차곡차곡 밟아온 터였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에 어머니 손을 잡고 한국화 대가인 김기창·박래현의 부부 화실에 등록한 것을 시작으로 이화여중, 서울예고, 서울대 미대를 거치며 한국미술사 거장들의 제자가 됐다. 그럼에도 더 큰 세계에 대한 욕구와 변화에 대한 열망이 일었다. 그래서 떠난 거다. 당시 미술의 메카였던 미국으로. 언제나처럼 당찬 발걸음으로.

미국시절 최욱경의 작업은 스펙트럼이 넓다. 소묘력이 돋보이는 사실적인 드로잉, 초현실적인 분위기가 서린 흑백의 구상회화, 강렬한 색을 처바른 커다란 추상미술까지 망라한다. 재료도 여러가지다. 캔버스에 문자를 넣고, 신문·잡지를 붙이는 콜라주를 제작하며, 입체작품을 만들기도 했다. 문학에도 관심이 많아 시집도 출간했다. 미국의 인권운동, 히피문화, 반전운동에도 관심을 표했다. 미국 각지의 레지던시에 참여하고 여러 대학에서 강의하며 현지 미술계와 적극적으로 교류했다. 마치 그 땅의 모든 것을 흡수하려 달려드는 듯했다.

하지만 백인남성이 중심인 미국 미술계를 아시아 여성이 뚫기는 녹록지 않았다. 작품만 보고 노련한 40대 남성화가의 것이려니 생각했던 미국인들은 최욱경을 직접 만나고는 “조그만 동양 여자가!”라며 놀라곤 했다. 당시 미국에서 빈번히 열리던 추상회화 단체전에는 한 차례도 초대받지 못했다. 물론 최욱경만의 일은 아니었다. 미국인 여성화가들의 처지도 비슷했다. 최욱경은 종종 “미국사회에서도 외국인과 여성을 차별하는데, 남녀를 구별하는 건 싫은 일 중 하나”라고 말하기도 했고, 작품 귀퉁이에 “때가 되면 해가 뜰까, 과연 내게 때가 오긴 할까”라고 끄적이기도 했다.

미국에서 고군분투하던 최욱경이 한국으로 향한 것은 1971년. 첫 고국 개인전을 위해서였다. 1000점이 넘는 작품 중 30여 점을 선별해 들고 온 9년 만의 귀국길이었다. 당시 국내 화단의 화두는 전통문화였다. 정부는 전통문화 관련 전시나 문화사업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는데, 1971년 백제 무령왕릉이 발굴되며 전통유물·유적 전시가 열렸고, 1972년에는 국립중앙박물관이 경복궁에 개관했다. 이런 분위기에 과연 최욱경의 작품은 어떤 평을 들었을까. 싸늘했다. “미국 체취가 너무 강하다”는 보통이고 심지어 “버터냄새가 진동한다”’는 말까지 들었을 정도다.

여느 작가라면 낙담에 빠졌을 법도 한데, 최욱경은 좀 달랐다. 아예 한국문화까지 끌어안아버린 거다. 한국화와 서예를 배웠고, 캔버스 대신 종이에 작업했으며, 낙관처럼 서명했다. 단청과 민화를 참고해 색도 한층 완화했다. 일차적으로는 새로운 재료에 대한 호기심이 작용했겠지만, 한국미술계에 녹아들고자 했던 바람 때문이기도 했을 거다. 하지만 그 노력도 바람도 그저 한 이방인의 치기로만 비쳤나 보다.

1974년 다시 미국으로 떠나는 최욱경을 두고 평단은 “고독하고 내성적이어서 한국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탓”이라고, “부드러운 대인관계를 지속하지 못한 성격 탓”이라고 수군댔다. 하지만 글쎄. 1970년대 초반, 우리 미술계는 과연 얼마나 포용적이었던가. 학연·지연의 파벌이 지배하던 그때 요란한 색채로 대작을 과감히 그려대는, 미국물까지 잔뜩 먹은 젊은 여성을 용납할 여유가 얼마나 있었을까.

200여 색으로 가득 채운 벽화만한 화면

답답한 한국을 뒤로하고 다시 미국행을 택한 최욱경은 이후 미국뿐 아니라 캐나다·노르웨이 등에서 개인전을 여러 차례 열었고, 미국 대학에서 강의하며 작업을 이어갔다. 1976년부터 1년 동안은 뉴멕시코의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했는데, 이때 자연과 추상이 조화를 이룬 역작을 만들어낸다. 여기서 만든 작품이 바로 ‘미처 못 끝낸 이야기’(1977)다. 폭 2.66m, 길이 1.47m, 최욱경은 그 큰 화면 위로 꽃망울이 터지는 듯 이파리가 나부끼는 듯, 색채의 폭죽을 터뜨렸다.

끊임없이 기회를 찾고,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던 최욱경이었기에 만들어낼 수 있었던 에너지 가득한 초대형 회화다. 200여 개의 색을 사용해 벽화만한 화면을 가득 채우고도 최욱경은 ‘미처 못 끝낸 이야기’라는 작품명을 붙였다. 여전히 그리고 싶은 것, 날아오르고 싶은 세계가 남아있다는 뜻이었으리라. 1970년대, 아니 그 이후에도 어떤 우리 작가가 그렇게 거침없이, 이토록 다채로운 색으로, 이만큼 커다란 그림을 그렸던가.

1979년 영구귀국해 시작한 영남대 교수 시절, 대개 소품 위주로 출품하던 교수 전람회에도 최욱경은 자신의 키보다 훨씬 큰 작품을 준비했다. 그림이 전시장 출입문을 통과하지 못하자 그 자리에서 패널을 분해해 들인 뒤 다시 짜맞춰 200호(259.1×193.9㎝)짜리 그림을 기어코 전시했던 사람이 바로 최욱경이었다. 그럼에도 최욱경에겐 끊임없이 ‘규수화가’ ‘한국 최대의 그림을 그린 조그마한 아가씨’ ‘전혀 여성적이지 않은 그림을 그리는 여류화가’로 소개됐다. 1930년대 나혜석(1896∼1948)에게 씌우던 여성미술가를 향한 불편한 시선은 50년이 지나도 계속되고 있었다. 그 비겁한 시대에 대한 항거였을까. 세상을 뜨기 한 해 전 최욱경은 불타오르는 꽃 한 송이를 기어이 캔버스에 피워내기도 했다(‘빨간꽃’ 1984).

살아 있었다면 올해로 85세다. 세상이 달라져 오래도록 비주류였던 여성미술가에게 전례 없는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지는 시대다. 작은 거인 최욱경이 계속 작업을 하고 있었다면 얼마나 독보적인 존재로 떠올랐을까. 미국이든 한국이든 재료와 기법을 다 포용하며 실험했던 최욱경. 태평양을 가로지르며 씩씩하게 세상을 누비던 용감한 화가. 한국미술사에서는 보기 드문, 밝은 기운이 요동치는 압도적인 크기의 작품을 제작하던 최욱경을 담기에 그 시대는 너무 작았다.

△정하윤 미술평론가는…

1983년생. 그림은 ‘그리기’보단 ‘보기’였다. 붓으로 길을 내기보단 붓이 간 길을 보려 했다는 얘기다. 예술고를 다니던 시절 에른스트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에 푹 빠지면서다. 이화여대 회화과를 졸업했지만 일찌감치 작가의 길은 접고, 대학원에 진학해 한국미술사학을 전공했다. 내친김에 미국 유학길에 올라 캘리포니아주립대 샌디에이고 캠퍼스에서 중국현대미술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귀국한 이후 연구와 논문이 주요 ‘작품’이 됐지만 목표는 따로 있다. 미술이 더 이상 ‘그들만의 리그’가 아니란 걸 알리는 일이다. 이화여대·국립중앙박물관 등에서 미술교양 강의를 하며 ‘사는 일에 재미를 주고 도움까지 되는 미술이야기’로 학계와 대중 사이에 다리가 되려 한다. 저서도 그 한 방향이다. ‘꽃피는 미술관: 가을·겨울’(2025 출간 예정), ‘꽃피는 미술관: 봄·여름’(2022), ‘여자의 미술관’(2021), ‘커튼콜 한국 현대미술’(2019), ‘엄마의 시간을 시작하는 당신에게’(2018) 등을 펴냈다.

 

 

그림으로 이병철 회장을 사로잡은 여성 추상화가 최욱경의 ‘풍경’ [이번 주 경매 Pick]

서울경제 기사 입력 2024-03-20 14:54:11 수정 2024.03.20 14:54:11

김도연 기자·조상인 미술전문기자

미술 경매에 관심은 있지만 뭘 살지 고민되는 분들을 위해 서울경제신문 아트 큐레이션 아트씽이 매주 소개하는 한 점의 미술 경매품. 이번 주 추천작은 최욱경의 ‘풍경’이다.

‘요절한 천재 화가’로 잘 알려진 최욱경은 소위 부잣집 딸로 태어나 당대 최고의 엘리트 교육을 받았다. 일찌감치 그림에 재능을 보여 10살 때부터 운보 김기창·우향 박래현 부부의 화실에서 그림을 배웠고, 이화여중과 서울예고를 거쳐 서울대 회화과에 입학했다. 미대를 졸업한 뒤엔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뉴욕에서 최신 추상표현주의를 배웠다. 그러다 1963년, 미시간주에 있는 크랜브룩 아카데미에 입학해 서양화를 전공하고 부전공으로 조각과 도자기를 공부했다.

미국에서 미국식 미술 공부를 했지만 한국적인 색채미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을 한 최욱경 작가. 그래서 그의 작품엔 단청에 주로 사용되는 청·적·황·백·흑색의 한국적인 오방색이 두드러진다. 특히 그의 1970년대, 1980년대 작품을 보면 ‘풍경’처럼 화려하다 못해 다소 강렬하게 느껴지는 색채가 자유분방한 물질로 표현돼있다.

케이옥션(102370) 메이저 경매에 출품된 ‘풍경(1984)’은 가로 116.5cm, 세로 54cm 크기의 직사각형 캔버스에 그려진 작품으로, 전체적인 형태는 반원형의 구도를 보여주고 있다. 제목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푸른 산의 풍경, 해질녘 노을 같은 하늘이 그려지는 추상 작품이다. 붓질의 표현만으로 마음의 움직임 혹은 산의 형상을 그려냈는데, 중간중간 직선을 넣어 조형적인 긴장감도 느껴진다.

최욱경 작가는 ‘빅 컬렉터’ 이건희 전 삼성그릅회장에게 컬렉션의 태도를 가르친 이병철 삼성 창업회장이 “그림 좋다”고 칭찬하며 단번에 그림을 구입한 작가이기도 하다. 2021년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에서 열린 최욱경의 대규모 회고전 ‘최욱경, 앨리스의 고양이’에는 최욱경 작품 중 이병철 회장이 좋다고 칭찬했던 작품들부터 리움 소장품까지 많이 걸리기도 했다.

작가 인생의 전성기라 할 수 있는 45세에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일찍 세상을 떠난 최욱경 작가. 최욱경의 ‘풍경’은 오는 20일에 열리는 케이옥션 메이저 경매에 출품번호 42번으로 출품됐다. 추정가는 8500만~1억5000만원이다.

 

최욱경의 ‘미처 못 끝낸 이야기’(1977)

 

최욱경의 ‘빨간꽃’(1984). 

[세상을 떠나기 한 해 전 그린 불꽃같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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