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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서산책

피터 보드만 저 " Sacred Summits "

작성자Silver Ship|작성시간10.05.15|조회수220 목록 댓글 0

 

 

칼스텐츠 피라미드 남벽·캉첸중가 북릉·가우리샹카 남봉 초등기

 

 

 

 

에베레스트 남서벽 등정자인 피터 보드만은 조 태스커와

인도 가르왈 히말라야의 창가방 서벽 등반 중 강추위에 너무 시달린 나머지 열대의 산을 그리워하기 시작했다.

 그는 여성 클라이머 힐러리와 더불어 아프리카의 케냐와 킬리만자로를 등정한 후

뉴기니 섬에 있는 동남아 최고봉 칼스텐츠(4,883m) 피라미드 남벽 등정을 계획했다.

석회암 절벽과 빙하로 구성된 상어 지느러미 형태의 이 산은

석기시대 풍습을 여전히 답습하는 호전적인 부족들의 거주지인 밀림지대 위로 솟아 있다.

1962년 오스트리아 산악인 하인리히 하러(아이거 북벽 초등자) 일행이 서릉으로 초등한 후

1971년부터 1974년까지 5개 등반대가 초등 루트(3회), 동릉, 북벽 종횡등반으로 이 산을 등정했는데

1974년 뮌헨 등반대의 일원이 바로 라인홀트 메스너였다.

1978년 11월 보드만과 힐러리는 인도네시아에 도착했는데,

당시 뉴기니의 밀림지대에서 반정부 게릴라 활동이 전개되어 칼스텐츠 입산이 전면 금지되어 있었다.

그는 그리워하던 산의 자태나마 구경하려고,

서양 선교사의 도움을 받아 절대로 등반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고

그 산에서 가까운 빌로라이까지 여행허가를 받고 경비행기로 다가섰다.

때마침 입산 통제관인 군장교가 크리스마스 휴가 중이어서 아무도 그의 등반을 제지하지 못했다.

그는 발각되면 강제 추방될 위험을 각오하고,

11명의 현지인 포터를 고용해 케마부 계곡으로 여러 날 등반을 계속해 바코파 고개에 도달했다.

 칼스텐츠 피라미드의 북벽 아래 흰 광산 건물이 눈에 띄었다.

4명의 포터가 그곳으로 식량을 구하러 갔다가 경비병에게 발각되어 2명은 억류되고,

 2명은 보드만 일행이 있는 곳으로 군 장교를 안내했다.

에베레스트 등정자에게 군 장교가 아량을 베풀어,

그는 강제 추방을 면하고 메렌 계곡으로 등반을 계속해 BC에 도착한 다음

 2명의 포터만 남겨 놓고 나머지 포터들은 귀향시켰다.

다음날 보드만과 힐러리는 오전 5시30분에 출발해 칼스텐츠 빙하 입구의 60도 경사 빙벽을 돌파하고,

 안개 속에서 가끔 떨어지는 낙석을 피해가며 남벽으로 등반을 계속했다.

그들은 빙벽의 끝 지점인 바위 오버행 아래 베르그슈룬트(빙하 끝 크레바스)에 도달한 다음

침니로 오버행을 돌파하고 등반을 계속해 새로운 등로를 개척하며 등정하고, 서릉으로 하산했다.

이틀 후 이들은 그 산의 북쪽에 위치한 두군두구 필라 북벽을 크랙으로 등반했다.

도중에 폭우가 쏟아져 걸리(좁고 가파른 골짜기)가 폭포로 변하는 바람에

물에 빠진 생쥐 꼴로 등정하고 BC로 돌아오니,

 프랑스 산악인 장 파브레와 베르나르가 그곳에 도착해 있었다.

다음날 장 파브레는 심한 어깨 통증을 치료받기 위해 광산으로 내려갔고,

보드만과 힐러리 그리고 베르나르는 3개 설봉으로 이루어진 느가풀루(Ngga Pulu) 종주 등반에 나섰다.

그들이 구름 속으로 등반, 최고봉 순다이봉을 지나 제3봉 정상에 올라 발견한 깡통 속에는

 ‘국제등반대 라인홀트 메스너’라는 카드가 들어 있었다.

메스너는 순다이봉 북벽을 알프스 치베타 벽에 비견한 바 있다.

 그들은 빌로라이로 돌아가 귀국 길에 올랐다. 

1979년 봄 보드만은 더그 스코트, 조 태스커, 프랑스 산악인 조르주 베탕부르와

세계 제3위 고봉 캉첸중가(8,586m) 북릉을 무산소로 등반하려고 북면 팡페마 BC(5,182m)에 도착했다.

1899년 영국 탐험가 프레시필드가 시킴에서 종송라(6,144m)를 넘어 서양인 최초로 이곳을 방문했고,

1930년 독일 G. O. 디렌퍼스 교수의 국제대가 최초로 이곳을 BC로 사용했다.

디렌퍼스 대는 북서벽 아래 쿰을 등반하던 중 거대한 얼음사태가 돌발해 셰르파 체탄이 목숨을 잃었고,

 대원들도 몰살당할 위기를 겪은 후 등반을 포기했다.

보드만 일행은 튄스 피크 아래에 C1, 피크 사면의 바위 아래 C2를 구축하고

캉첸중가 빙하 상부의 빙탑 지대를 돌파하고 6,096m 지점의 베르그슈룬트를 스노브리지로 건넜다.

그들은 가파른 벽의 오버행 침니와 45도 경사의 설사면에 고정자일을 설치하며 올라 노스콜에 C3(7,010m)를 구축했다.

여기서 정상까지는 아직도 3.6km의 거리가 남아 있었다.

태스커는 심한 두통으로 인해 C2로 하산했고,

 보드만과 스코트, 베탕부르는 설릉을 오르고 북릉 7,437m 지점에 위치한

 높이 183m의 바위 버트레스 밑에 설동을 파고 C4를 구축한 후 ‘몽블랑 터널’이라고 명명했다.

그들은 고정 자일을 설치하며 버트레스 사이의 60도 경사 빙벽을 오르고

17m 높이의 바위 스텝을 돌파해 버트레스 꼭대기에 도달한 뒤 이 버트레스를 캐슬(Castle)이라고 명명했다.

그들은 시속 112km의 강풍 속에 북릉 상의 7,739m봉 울퉁불퉁한 바위 정상 능선 아래쪽으로 트래버스하며 전진했다.

이 봉우리의 정상은 시킴 쪽에서 솟아오른 북동 스퍼(Spur:옆으로 돌출한 지맥)가 북릉과 만나는 지점인데,

 1929년과 1931년 두 차례 독일 산악인 바우어가 이끄는 뮌헨 팀이 공략했던 루트로

1931년 독일대는 7,699m 지점까지 진출했다.

1977년 인도의 대규모 등반대 역시 이 루트로 등반해 프렘 찬드 대원과 셰르파 니마 도르지가 캉첸중가를 2등했다.

보드만 일행은 610m 높이의 북서벽 정상 피라미드 아래에 위치한 크루아상

(Croissant:초승달 형태의 거대한 버트레스)을 향해 전진하다가

북릉 상의 V자형 지점(7,925m)에 도달해 강풍을 피할 수 있는 능선 너머 시킴 쪽의 빙판을 깎아내고 터널형 텐트를 설치했다.

 그러나 한밤중에 풍향이 갑자기 바뀌며 허리케인이 텐트를 강타해 가운데 폴이 부러지자

그들은 부러진 폴이 텐트 천을 뚫지 않도록 손가락이 강추위에 감각이 없어질 때까지 교대로 잡고 있어야 했다.

마침내 강풍에 텐트가 찢어지기 시작했으며 텐트를 고정시킨 줄(앵커)마저 풀리고, 텐트가 60cm 이상 이동했다.

사람과 장비가 들어 있는 텐트가 통째로 강풍에 날아갈 지경이 되자 스코트가 기어나가 텐트를 움켜잡았다.

나머지 두 사람도 침낭을 챙기고 밖으로 나와 텐트를 무너뜨리고

칼로 텐트 천을 찢어 나머지 장비를 꺼내자 텐트가 바람에 날아가 버렸다.

암흑 속에서 접시 크기의 돌들이 운석처럼 날아다녀 공포감을 가중시켰다.

그들은 강풍에 날려가지 않으려고 사력을 다하며 엉금엉금 기어서 능선을 넘어

오전 8시 초주검이 되어 설동까지 내려와 하산을 계속했다.

스코트는 4개의 손가락이, 보드만은 코와 엄지손가락이 동상에 걸렸고, 베탕부루는 설맹에 걸렸다.

그들은 BC에서 사흘간 휴식을 취하며 체력을 보강한 후 재도전했다.

4명의 대원은 C4에서 강풍이 불지 않는 오후 5시30분에 출발해 헤드랜턴을 켜고

‘그레이트 스노’의 눈밭과 ‘스크리 테라스’ 지역을 지났다.

스코트와 태스커가 설동을 파는 사이

보드만과 베탕부르는 더 전진해 크루아상 가장자리에서 천연동굴 격인 베르그슈룬트를 발견했다.

그들은 장비 일부를 거기에 임시로 옮겨 놓고 등반을 계속했으나

야간에 올바른 등로를 찾아내기 힘들어 등반을 중단하고 베르그슈룬트로 돌아왔다.

 다음날 스코트와 태스커가 베르그슈룬트로 올라왔으나

심한 눈보라가 일어 C4로 하산했다. 베탕부르는 체력이 고갈돼 등반을 포기하고 하산했다.

다음날 보드만, 스코트, 태스커는 다시 베르그슈룬트로 올라가 일박하고 오전 8시 정상을 향해 출발했다.

그들은 두 개의 걸리 중 좌측 걸리로 두 피치 암벽등반을 하고,

이어 설벽을 오르고 33도 경사의 스노 램프를 6시간 만에 돌파해 오후 3시30분 서릉 상의 피너클(암탑) 옆에 도달했다.

1955년 영국 찰스 에반스 대의 조 브라운과 조지 밴드가

남서벽을 통해 웨스트콜에 올라선 다음 서릉으로 등반해 신들의 거처인 정상을 밟지 않으려고,

정상에서 몇 피트 아래 지점까지만 올라 초등에 성공했다.

다음날 스트리더와 하디 조도 등정했다.

 보드만 일행은 초등 루트인 서릉을 따라 정상 아래에서 남벽으로 트래버스해 정상 바로 아래 지점에 도달했다.

그들도 초등대처럼 이 산의 신들을 모독하지 않았다. 그들은 오후 9시 베르그슈룬트로 무사히 귀환했다.

1979년 가을에 보드만은 존 배리, 팀 리치, 거이 네이타트와 네팔과 티베트 국경선상에 위치한

 쌍둥이 봉인 가우리(남봉·7,010m)와 상카(북봉·7,106m)를 등반하려고 했다.

이 봉우리는 셰르파들의 성봉(聖峰)으로 고난이도로 유명하며 ‘히말라야의 아이거’라는 별칭을 지니고 있다.

그해 봄 미국-네팔 대가 상카, 즉 북봉을 이미 등정했기 때문에 그들의 등반 목표는 미답봉 가우리였다.

그들은 4개의 대암탑 외에도 수많은 암탑과 빙탑, 눈처마가 늘어선 4km의 기나긴 서릉을 등반하던 중

능선상의 좁은 눈처마가 통과 불가능하면 65도 경사의 측벽으로 트래버스하며 고도의 등반기술을 구사했다.

이후 존이 61m 추락하며 왼쪽 손목 골절상을 입고 왼쪽 무릎을 삐어 능선상에 설치한 텐트 속에 남겨 놓고,

셰르파 펨바를 대신 투입해 2개 자일조가 등반을 계속해 남봉의 설원에 도달했다.

그들은 빙벽의 크랙 속에 들어가 침낭도 없이 추위에 떨며 밤을 지새우고

다음날 남봉 정상 바로 아래 지점에 도달해 등반 시작 23일 만에 드디어 초등에 성공했다.

베탕부르는 알프스에서 수정을 채취하다 목숨을 잃었고,

피터 보드만과 조 태스커는 1982년 에베레스트 북동릉 숄더 아래 피너클 지대를 등반하던 중 실종되었다.

국판 264쪽. 1982년 영국 호더앤드스터턴 출반사 간행.


 


 이창기 전 강릉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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