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기
<토끼전>은 당대의 왕과 신하와 백성 모두를 비판하고, 동시에 백성들은 허황된 벼슬 생각 버리고 분수에 맞게 살라는 주제적 의미를 던져주고 있다. 이처럼 왕, 신하와 백성 모두를 비판한다는 점과 관련해서 판소리라는 예술형태에 다시 주목하게 된다. 즉 판소리는 비록 선후관계는 있지만 서민적 기반과 양반적 기반을 통하여 형성 발전하여 왔고 따라서 그 주제 역시 이와 같은 양면을 혼유, 또는 공유한다는 것이다. <토끼전>의 작품군에 나타나는 주제는 '중세적 절대개념인 충에 대한 찬양'이거나, '충을 앞세운 봉건적 지배층의 무능과 위선에 대한 풍자적 해학', 또는 이 두가지의 혼합적 주제 등 세가지 양상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토끼편에서 보면 왕과 신하가 비판되고, 왕과 신하의 입장에서 보면 토끼가 마찬가지로 비판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 셋 모두가 무리없이 풍자될 수 있다.
2.생각해보아야 몇가지 문제점
** 첫째, 용왕의 병을 고치는 데 왜 하필 토끼의 간을 먹어야 병이 낫는가 하는 점이다. **
이는 작품 해석의 가장 중요한 핵심부분이 된다. 이를 해석하기 위해서는 토끼의 간이 의미하는 상징적 의미부터 해명되어야 할 것이다.
먼저 간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한번 살펴보자.
간은 육체적으로는 눈을 나타낸다. 간의 기능이 눈과 직접 관계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시중에서도 눈이 나쁘면 동물의 간으로 만든 약인 '간유구'를 먹는다.
다음으로 한방에서 간은 바로 인간의 정신을 상징한다. 따라서 정신병 치료에는 간을 다스리는 처방을 내린다. 간과 정신이 서로 통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우리 속언에도 '마음이 맞으면 간 빼준다'거나 '마음 좋은 사람 간 빼 먹으려 한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이와 같이 간은 마음 내지는 정신을 상징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결국 간은 정신적으로는 마음을, 육체적으로는 눈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눈이 흐리다는 것이나 정신이 흐리다는 것은 서로 같은 말이 된다.
<토끼전>에서 선관의 설명에 따르면, 토끼는 새벽닭이 울때 가장 먼저 태양의 양기를 받아먹고, 또한 달나라에 들어가서 계수나무 그늘 속에 장약(長藥) 찧을 적에 음약(陰藥)을 받아먹은 동물이라는 것이다. 이렇듯 태양과 달의 음양 기운의 정기를 받아먹어 토끼의 간경(肝經)이 좋으니, 토끼의 눈이 밝아 별호를 '명시(明視)라 한다고 한다. 술로 정신도 흐려지고 눈도 나빠진 용왕이 간경이 좋은 토끼를 먹으면 병환이 즉차하고 장생불로하리라는 것이다. 여기서 보면, 토끼간의 약효는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니다. 즉, 토끼는 간경이 좋아, 눈이 밝기 때문이란 것이다. 그래서 왕이 토끼의 간을 먹으여 한다는 것은 거꾸로 말하면, 왕의 눈과 정신이 어둡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요약하자면 임금의 육체적, 정신적 눈이 흐려졌기에, 즉 성총(聖聰)이 흐려졌기 때문에 눈을 밝게 하고 정신을 맑게 하는 토끼간을 먹어야 한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결국 임금이 정신이 흐려져서 토끼의 간을 빼먹으려고 하는데서 자라와 토끼 사이에 사건이 발단되는 것이다.
** 둘째, 작품의 주인공을 누구로 볼 것인가? **
논자에 따라서는 토끼를 주인공으로 보는 사람도 있고, 아니면 용왕을 주인공으로 보는 사람도 있는 듯하다. 풍자의 측면을 어느 쪽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각자의 주장이 달라지는 듯하다.
그러나 작품을 잘 읽어보면, 작품이 용왕이나 자라, 혹은 토끼 중 어느 하나만 풍자하는 것이 아니라, 이 모두를 풍자하고 있다. 따라서 이 모두를 주인공으로 보는 것이 올바를 듯하다. 곧 이들의 역할이 작품에서는 동격이라는 말이다. 요컨대 이 작품은 용왕이나 자라로 대변되는 지배층에 대한 부정적 시각만 드러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토끼로 대변되는 서민층도 조롱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 토끼- '많은 짐승 중에 왜 하필 토끼?'
토끼가 짐승 중에서도 가장 연약하고 선량한 짐승처럼 보인다는 점을 간과할 수는 없을 것이다. 토끼는 예나 지금이나 힘없고 빽없는 민초들의 표상이라 할 수 있겠다. 약자이며서도 용왕이나 자라 같은 강자에 대항하여 승리한다. 지배층에 대한 피지배층의, 그리고 양반층에 대한 서민층의 승리를 안겨주는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당대의 최고 권력자인, 정신나간 임금과 음융한 자라의 상대역으로 다른 어떤 짐승보다도 눈망울이 크고 맑은 토끼를 설정하므로 해서, 이들간의 갈등은 더욱 애처롭고 한층 감동적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토끼는 '근본성정이 무겁지 못한' 짐승이었다. 즉 경박한 성품의 소유자라는 말이다. 이러한 측면 또한 이 작품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의 하나로 보인다. 왜냐하면 토끼는 바로 근본성정이 무겁지 못하였기에 자라의 꾐에 빠져 죽을 고비를 맞았기 때문이다. 이는 경박한 그의 욕심 때문이니, 토끼가 벼슬할 욕심에 사로잡혔을 때는 자라의 말에 속지만, 그 욕심을 버렸을 때는 자라의 말을 의심하고 또 용궁의 위기에서도 벗어난다. 이것이 이 작품의 중심적 이미이다.
토끼의 근본성정이 무겁지 못하여 수시로 마음이 바뀌는 것이, 이 작품을 읽는 독자를 즐겁게 해준다. 동시에 욕심 때문에 마음의 눈이 가리어 자라의 꾐에 빠지게 되는 토끼를 통해, 청중들은 무언가 스스로 되돌아볼 수 있는 기회도 가지게 된다.
토끼는 왜 자라를 따라 수궁으로 따라가기로 작정한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육지에서의 생활이 실제 먹고 살기 어려울만큼 궁핍했기 때문이 아닐가 생각된다. 토끼는 봄, 여름, 가을, 겨울 할 것없이 늘 배를 곯고 또 자기를 괴롭히는 무리들에게 시달리고 있어, 하늘로 가든 땅으로 꺼지든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할 가련한 신세였다. 그렇기에 그는 자라를 따라 수궁으로 갈 결심을 더욱 굳혔던 것이리라.
결국 토끼의 수궁행은 자라의 유인에 의한 것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어려운 현실을 벗어나고자 염원해 온 토끼 스스로의 결단이라고도 할 수 있다. 춥고 배고픈 토끼에게 밥주고 집주고 옷주고 여자주고 거기다가 벼슬까지 준다는데 그것을 마다할 놈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니 토끼의 수궁행은 오히려 당연하다고도 할 것이다. 이런 토끼의 모습은 조선 후기 서민의 전형화된 모습이며, 토끼의 용궁행은 바로 당시 현실에서 이농현상의 한 반영이라 할 수 있다. 조선후기의 민중들이 탐관오리들의 시달림에 못이겨 머나먼 유랑의 길을 떠나야 했던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 용왕
<토끼전>에서 주된 풍자의 대상은 주로 용왕이라고들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용왕은 물론 자라와 그 외의 모든 신하들, 그리고 토끼까지 모두 똑같은 정도로 풍자되고 있다.
먼저 왕이 정사에 힘쓰지 않고, 또한 어리석다는 것을 풍자하고 있는데, 왕이 정사에 힘쓰지 않는 것은 그가 병이 나게 되는 원인에 잘 나타나 있다. 용왕은 궁궐에 영덕전을 새로 짓고 낙성식 잔치를 베풀어 과도하게 놀아서 병이 났다. 문제는 모두 여기서 발생한다. 즉 용왕이 백성을 위한 정치는 하지 않고 궁전을 짓고 잔치를 벌여 주색에 곯아 병이 난 것이다. 곧 스스로의 욕심을 채우려다가 병이 난 것이다.
임금의 어리석음에 대한 풍자는 작품의 여러 곳에 암시되어 있다. 용왕의 병은 천년 묵은 토끼간이 아니면 구할 길이 없다는 말에서, 왕은 눈이 어둡고 우매하다는 것을 잘 비유하고 있다. 또한 어전회의에서 병든 용왕은 누가 토끼를 잡으러 갈 신하로 적당한지조차 알지 못한다. 정신나간 용왕이 자기의 신하도 알아보지 못할 만큼 어리석다는 것을 풍자하고 있다.
이러한 점은 왕이 토끼와 간의 유무를 놓고 다투는 장면에서 극대화된다. 먼저 토끼가 용왕의 무식함을 아주 노골적으로 폭로한다. 토끼는 그렇게 높은 지위에 있는 용왕이 그렇게 무식할 수 있는지를 해학적으로 비웃고 있다. 수궁에서 살아나온 토끼는 자기가 용왕같이 미련했더라면 죽었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용왕이 자기보다 더 미련함을 자라에게 말하고 있다. 이는 결국 당시 백성들의 눈에 비친 왕의 모습이라 하겠다.
일개 산중 미물인 토끼에게 우롱당하고, 충신 자라의 충간을 외면하며 간신들의 농간에 미혹당하는 용왕은, 이미 신성불가침의 존재가 아니라 서민들의 비판의식에 의해 풍자의 도마 위에 올려져 있는 존재인 것이다.
* 자라
<토끼전>에는 충신과 간신, 두 부류의 신하들이 나온다. 작품에서 용왕은 토끼간이 없으면 죽는데도, 자기 목숨이 아까운 신하들은 아무도 선뜻 나서지 않는다. 이는 당대의 모든 벼슬아치들의 불충을 단적으로 떠올리게 하는 장면이다. 작품에서 오직 유일하게 충신으로 나오는 것이 자라다. 그는 충성심은 있는 관리이다. 더구나 수궁의 관리들이 이러한 충신을 평생 멸시하고 있었다는 것은, 당대에 충신이 발을 못붙이고 간신배들만이 들끓었던 조정의 한 모습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자라 외에 용왕 주변에 있는 모든 신하들은 자기의 몸과 이익만을 생각하는 불충한 신하들이며 또 하나같이 어리석다. 자라가 잡아온 토끼의 말을 듣고 용왕과 마찬가지로 간이 출입을 하는지 안하는지조차도 알지 못했다. 이들이 이렇게 어리석은 것은 아직 젖비린내 나는 것들이 아무 사회경험도 없이 저의 집 세력으로 벼슬을 얻어 매일 탁상공론만 일삼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이는 조선후기 문벌정치의 인사등용이 정실에 치우친 것을 직접적으로 풍자하는 것이라 하겠다.
"우리 수구에도 그런 충신 혹 있을까"라는 용왕의 말처럼, 당시는 충신은 없고 간신만 있는 것을 용왕의 입을 통하여 꼬집고 있다. 이 작품의 주제를 '충'이라고 하는 것은 아마도 이런 측면을 중시한 결과라고 본다.
3. 나오기
토끼가 용궁에 들어가서 죽게 된 것은 자라 때문만은 아니다. 더욱이 그는 항상 자라를 이길 지혜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을 염두해 두면, 토끼는 자라에게 패배한 것이 아니라 그 스스로와의 싸움에서 졌던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곧 토끼의 본래 '순수한 나'가 벼슬을 하고자 하는 '욕망의 나'에게 진 것이다. 토끼는 금력, 권력, 명예 등에 의하여 순수한 그의 본성이 가리어졌기에 빗나간 죽음을 당할 뻔했던 것이다.
우리의 삶도 이와 같지 않은가. 중요한 것은 곧 나와의 싸움이다. 즉 순수한 나와 순수하지 못한 나, 가난한 나와 부자가 되려는 나, 미워하려는 나와 용서하려는 나, 이기적인 나와 사랑하려는 나, 받으려는 나와 주려는 나의 싸움이 우리의 현실적 삶의 진솔한 모습이 아닐까? 인간은 항상 이런 이원론적인 세계 속에서 갈등하면서 살아가며, 그 과정에서 어떻게 극기하느냐에 따라 스스로 인간으로서의 본분을 갖게 된다. 마음을 기르는데는 욕심을 적게 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는 것 같다. 토끼도 벼슬에 대한 욕심을 버렸을 때, 본래의 그로 돌아간다. 그래서 다시 눈이 밝아져 육지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토끼전>의 주제는 '양심의 회복'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는 왕, 자라, 토끼 모두에게 해당된다. 인간이 인간됨은 욕심을 버리고 양심을 회복하는 데에 있다고 볼 때, 인간사회가 유지되는 한 <토끼전>은 항상 우리 수양의 목표가 되어줄 영원한 고전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토끼전>은 당대의 왕과 신하와 백성 모두를 비판하고, 동시에 백성들은 허황된 벼슬 생각 버리고 분수에 맞게 살라는 주제적 의미를 던져주고 있다. 이처럼 왕, 신하와 백성 모두를 비판한다는 점과 관련해서 판소리라는 예술형태에 다시 주목하게 된다. 즉 판소리는 비록 선후관계는 있지만 서민적 기반과 양반적 기반을 통하여 형성 발전하여 왔고 따라서 그 주제 역시 이와 같은 양면을 혼유, 또는 공유한다는 것이다. <토끼전>의 작품군에 나타나는 주제는 '중세적 절대개념인 충에 대한 찬양'이거나, '충을 앞세운 봉건적 지배층의 무능과 위선에 대한 풍자적 해학', 또는 이 두가지의 혼합적 주제 등 세가지 양상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토끼편에서 보면 왕과 신하가 비판되고, 왕과 신하의 입장에서 보면 토끼가 마찬가지로 비판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 셋 모두가 무리없이 풍자될 수 있다.
2.생각해보아야 몇가지 문제점
** 첫째, 용왕의 병을 고치는 데 왜 하필 토끼의 간을 먹어야 병이 낫는가 하는 점이다. **
이는 작품 해석의 가장 중요한 핵심부분이 된다. 이를 해석하기 위해서는 토끼의 간이 의미하는 상징적 의미부터 해명되어야 할 것이다.
먼저 간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한번 살펴보자.
간은 육체적으로는 눈을 나타낸다. 간의 기능이 눈과 직접 관계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시중에서도 눈이 나쁘면 동물의 간으로 만든 약인 '간유구'를 먹는다.
다음으로 한방에서 간은 바로 인간의 정신을 상징한다. 따라서 정신병 치료에는 간을 다스리는 처방을 내린다. 간과 정신이 서로 통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우리 속언에도 '마음이 맞으면 간 빼준다'거나 '마음 좋은 사람 간 빼 먹으려 한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이와 같이 간은 마음 내지는 정신을 상징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결국 간은 정신적으로는 마음을, 육체적으로는 눈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눈이 흐리다는 것이나 정신이 흐리다는 것은 서로 같은 말이 된다.
<토끼전>에서 선관의 설명에 따르면, 토끼는 새벽닭이 울때 가장 먼저 태양의 양기를 받아먹고, 또한 달나라에 들어가서 계수나무 그늘 속에 장약(長藥) 찧을 적에 음약(陰藥)을 받아먹은 동물이라는 것이다. 이렇듯 태양과 달의 음양 기운의 정기를 받아먹어 토끼의 간경(肝經)이 좋으니, 토끼의 눈이 밝아 별호를 '명시(明視)라 한다고 한다. 술로 정신도 흐려지고 눈도 나빠진 용왕이 간경이 좋은 토끼를 먹으면 병환이 즉차하고 장생불로하리라는 것이다. 여기서 보면, 토끼간의 약효는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니다. 즉, 토끼는 간경이 좋아, 눈이 밝기 때문이란 것이다. 그래서 왕이 토끼의 간을 먹으여 한다는 것은 거꾸로 말하면, 왕의 눈과 정신이 어둡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요약하자면 임금의 육체적, 정신적 눈이 흐려졌기에, 즉 성총(聖聰)이 흐려졌기 때문에 눈을 밝게 하고 정신을 맑게 하는 토끼간을 먹어야 한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결국 임금이 정신이 흐려져서 토끼의 간을 빼먹으려고 하는데서 자라와 토끼 사이에 사건이 발단되는 것이다.
** 둘째, 작품의 주인공을 누구로 볼 것인가? **
논자에 따라서는 토끼를 주인공으로 보는 사람도 있고, 아니면 용왕을 주인공으로 보는 사람도 있는 듯하다. 풍자의 측면을 어느 쪽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각자의 주장이 달라지는 듯하다.
그러나 작품을 잘 읽어보면, 작품이 용왕이나 자라, 혹은 토끼 중 어느 하나만 풍자하는 것이 아니라, 이 모두를 풍자하고 있다. 따라서 이 모두를 주인공으로 보는 것이 올바를 듯하다. 곧 이들의 역할이 작품에서는 동격이라는 말이다. 요컨대 이 작품은 용왕이나 자라로 대변되는 지배층에 대한 부정적 시각만 드러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토끼로 대변되는 서민층도 조롱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 토끼- '많은 짐승 중에 왜 하필 토끼?'
토끼가 짐승 중에서도 가장 연약하고 선량한 짐승처럼 보인다는 점을 간과할 수는 없을 것이다. 토끼는 예나 지금이나 힘없고 빽없는 민초들의 표상이라 할 수 있겠다. 약자이며서도 용왕이나 자라 같은 강자에 대항하여 승리한다. 지배층에 대한 피지배층의, 그리고 양반층에 대한 서민층의 승리를 안겨주는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당대의 최고 권력자인, 정신나간 임금과 음융한 자라의 상대역으로 다른 어떤 짐승보다도 눈망울이 크고 맑은 토끼를 설정하므로 해서, 이들간의 갈등은 더욱 애처롭고 한층 감동적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토끼는 '근본성정이 무겁지 못한' 짐승이었다. 즉 경박한 성품의 소유자라는 말이다. 이러한 측면 또한 이 작품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의 하나로 보인다. 왜냐하면 토끼는 바로 근본성정이 무겁지 못하였기에 자라의 꾐에 빠져 죽을 고비를 맞았기 때문이다. 이는 경박한 그의 욕심 때문이니, 토끼가 벼슬할 욕심에 사로잡혔을 때는 자라의 말에 속지만, 그 욕심을 버렸을 때는 자라의 말을 의심하고 또 용궁의 위기에서도 벗어난다. 이것이 이 작품의 중심적 이미이다.
토끼의 근본성정이 무겁지 못하여 수시로 마음이 바뀌는 것이, 이 작품을 읽는 독자를 즐겁게 해준다. 동시에 욕심 때문에 마음의 눈이 가리어 자라의 꾐에 빠지게 되는 토끼를 통해, 청중들은 무언가 스스로 되돌아볼 수 있는 기회도 가지게 된다.
토끼는 왜 자라를 따라 수궁으로 따라가기로 작정한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육지에서의 생활이 실제 먹고 살기 어려울만큼 궁핍했기 때문이 아닐가 생각된다. 토끼는 봄, 여름, 가을, 겨울 할 것없이 늘 배를 곯고 또 자기를 괴롭히는 무리들에게 시달리고 있어, 하늘로 가든 땅으로 꺼지든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할 가련한 신세였다. 그렇기에 그는 자라를 따라 수궁으로 갈 결심을 더욱 굳혔던 것이리라.
결국 토끼의 수궁행은 자라의 유인에 의한 것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어려운 현실을 벗어나고자 염원해 온 토끼 스스로의 결단이라고도 할 수 있다. 춥고 배고픈 토끼에게 밥주고 집주고 옷주고 여자주고 거기다가 벼슬까지 준다는데 그것을 마다할 놈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니 토끼의 수궁행은 오히려 당연하다고도 할 것이다. 이런 토끼의 모습은 조선 후기 서민의 전형화된 모습이며, 토끼의 용궁행은 바로 당시 현실에서 이농현상의 한 반영이라 할 수 있다. 조선후기의 민중들이 탐관오리들의 시달림에 못이겨 머나먼 유랑의 길을 떠나야 했던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 용왕
<토끼전>에서 주된 풍자의 대상은 주로 용왕이라고들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용왕은 물론 자라와 그 외의 모든 신하들, 그리고 토끼까지 모두 똑같은 정도로 풍자되고 있다.
먼저 왕이 정사에 힘쓰지 않고, 또한 어리석다는 것을 풍자하고 있는데, 왕이 정사에 힘쓰지 않는 것은 그가 병이 나게 되는 원인에 잘 나타나 있다. 용왕은 궁궐에 영덕전을 새로 짓고 낙성식 잔치를 베풀어 과도하게 놀아서 병이 났다. 문제는 모두 여기서 발생한다. 즉 용왕이 백성을 위한 정치는 하지 않고 궁전을 짓고 잔치를 벌여 주색에 곯아 병이 난 것이다. 곧 스스로의 욕심을 채우려다가 병이 난 것이다.
임금의 어리석음에 대한 풍자는 작품의 여러 곳에 암시되어 있다. 용왕의 병은 천년 묵은 토끼간이 아니면 구할 길이 없다는 말에서, 왕은 눈이 어둡고 우매하다는 것을 잘 비유하고 있다. 또한 어전회의에서 병든 용왕은 누가 토끼를 잡으러 갈 신하로 적당한지조차 알지 못한다. 정신나간 용왕이 자기의 신하도 알아보지 못할 만큼 어리석다는 것을 풍자하고 있다.
이러한 점은 왕이 토끼와 간의 유무를 놓고 다투는 장면에서 극대화된다. 먼저 토끼가 용왕의 무식함을 아주 노골적으로 폭로한다. 토끼는 그렇게 높은 지위에 있는 용왕이 그렇게 무식할 수 있는지를 해학적으로 비웃고 있다. 수궁에서 살아나온 토끼는 자기가 용왕같이 미련했더라면 죽었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용왕이 자기보다 더 미련함을 자라에게 말하고 있다. 이는 결국 당시 백성들의 눈에 비친 왕의 모습이라 하겠다.
일개 산중 미물인 토끼에게 우롱당하고, 충신 자라의 충간을 외면하며 간신들의 농간에 미혹당하는 용왕은, 이미 신성불가침의 존재가 아니라 서민들의 비판의식에 의해 풍자의 도마 위에 올려져 있는 존재인 것이다.
* 자라
<토끼전>에는 충신과 간신, 두 부류의 신하들이 나온다. 작품에서 용왕은 토끼간이 없으면 죽는데도, 자기 목숨이 아까운 신하들은 아무도 선뜻 나서지 않는다. 이는 당대의 모든 벼슬아치들의 불충을 단적으로 떠올리게 하는 장면이다. 작품에서 오직 유일하게 충신으로 나오는 것이 자라다. 그는 충성심은 있는 관리이다. 더구나 수궁의 관리들이 이러한 충신을 평생 멸시하고 있었다는 것은, 당대에 충신이 발을 못붙이고 간신배들만이 들끓었던 조정의 한 모습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자라 외에 용왕 주변에 있는 모든 신하들은 자기의 몸과 이익만을 생각하는 불충한 신하들이며 또 하나같이 어리석다. 자라가 잡아온 토끼의 말을 듣고 용왕과 마찬가지로 간이 출입을 하는지 안하는지조차도 알지 못했다. 이들이 이렇게 어리석은 것은 아직 젖비린내 나는 것들이 아무 사회경험도 없이 저의 집 세력으로 벼슬을 얻어 매일 탁상공론만 일삼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이는 조선후기 문벌정치의 인사등용이 정실에 치우친 것을 직접적으로 풍자하는 것이라 하겠다.
"우리 수구에도 그런 충신 혹 있을까"라는 용왕의 말처럼, 당시는 충신은 없고 간신만 있는 것을 용왕의 입을 통하여 꼬집고 있다. 이 작품의 주제를 '충'이라고 하는 것은 아마도 이런 측면을 중시한 결과라고 본다.
3. 나오기
토끼가 용궁에 들어가서 죽게 된 것은 자라 때문만은 아니다. 더욱이 그는 항상 자라를 이길 지혜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을 염두해 두면, 토끼는 자라에게 패배한 것이 아니라 그 스스로와의 싸움에서 졌던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곧 토끼의 본래 '순수한 나'가 벼슬을 하고자 하는 '욕망의 나'에게 진 것이다. 토끼는 금력, 권력, 명예 등에 의하여 순수한 그의 본성이 가리어졌기에 빗나간 죽음을 당할 뻔했던 것이다.
우리의 삶도 이와 같지 않은가. 중요한 것은 곧 나와의 싸움이다. 즉 순수한 나와 순수하지 못한 나, 가난한 나와 부자가 되려는 나, 미워하려는 나와 용서하려는 나, 이기적인 나와 사랑하려는 나, 받으려는 나와 주려는 나의 싸움이 우리의 현실적 삶의 진솔한 모습이 아닐까? 인간은 항상 이런 이원론적인 세계 속에서 갈등하면서 살아가며, 그 과정에서 어떻게 극기하느냐에 따라 스스로 인간으로서의 본분을 갖게 된다. 마음을 기르는데는 욕심을 적게 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는 것 같다. 토끼도 벼슬에 대한 욕심을 버렸을 때, 본래의 그로 돌아간다. 그래서 다시 눈이 밝아져 육지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토끼전>의 주제는 '양심의 회복'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는 왕, 자라, 토끼 모두에게 해당된다. 인간이 인간됨은 욕심을 버리고 양심을 회복하는 데에 있다고 볼 때, 인간사회가 유지되는 한 <토끼전>은 항상 우리 수양의 목표가 되어줄 영원한 고전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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