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에는 건국설화는 있되 건국신화는 없다.>
백제의 건국설화는 온조와 비류가 유리왕에게 제거될까 저어하여 한산으로 내려와서는 미추홀과 하남위례에 각각 도읍을 세우는 내용이다. 결국 미추홀에 도읍을 삼은 비류가 온조세력에 복속되어 모든 백성이 즐거이 따르니, 이것이 백제의 시작이다. 하지만, 여기서의 백제란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백제(百濟)가 아닌 백제국(伯濟國)이니, 이는 온조에 의해 세워진 백제가 아직 소국에 불과하였다는 것이다.
백제가 속하였던 마한은 당시 삼한 중에서도 가장 많은 소국들이 난립해 있었으므로 아무래도 각 세력간의 다툼이 가장 치열했을 터라고 여겨진다. 또한 미추홀에 세워진 비류의 국가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자, 신하와 백성들이 위례로 돌아오며 기뻐했다라는 구절을 보았을 때 백성들로 상징되는 기존세력들의 세력도 무시할 수 없는 형세였으리라고 짐작된다.(이를테면 부여의 왕이 흉년등의 책임을 물어 살해되듯)
이처럼, 많은 소국들이 난립해 있던 상황에서 토착세력과 어려운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면 지배의 당위를 밝히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던 신화는 탄생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설혹 신화가 있었다 하더라도 제대로 기능하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그랬으므로 백제의 건국담, 곧 건국설화는 있지만, 그것은 건국의 신성함을 밝히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건국신화가 되지는 못하였던 것이다.
<백제의 용신설화, 그것은 백제만의 신화>
신화는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다. 특히 지배세력에 의해 만들어진 신화의 경우 지배력을 다지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지는데, 이 경우 일부는 신화를 자신의 불리한 출신을 감추거나 미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삼았다.
삼국유사 무왕조에 등장하는 용신설화도 그러한 측면이 크다. 먼저 여기서 무왕은 무령왕의 오기라고 한 일연의 견해에 동의하고 싶다. 백제 30대 왕인 무왕은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의 전대 왕으로 신라와의 대규모 전쟁을 지속적으로 벌인 왕이다. 그렇기 때문에 서동설화에서 유추 가능한 백제왕과 신라왕실간의 긴밀한 관계는 성립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일연의 주(註)를 따라 무왕조의 서동설화를 무령왕의 이야기라 결정짓는 것은 그리 큰 무리는 아니라고 본다. 왕릉에서 발굴된 유물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 무령왕의 치세기간은 백제문화의 안정기이자 황금기였다. 또한 여러 차례 중국 남조에 사신을 파견한 기록도 보이는데 이는 당시 정세가 안정되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하지만, 무령왕의 즉위과정은 온전한 것이 아니었다. 전대 왕인 동성왕을 죽인 백가세력을 자신의 즉위 후에도 제거하지 않았었다는 사실은 백가라는 반역세력과 무령왕이 어떠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고 생각해 볼 수 있는 일이다. 더군다나 무령왕은 고구려에 의해 전사한 개로왕의 아들로 동성왕계로 돌아간 왕위를 다시 찾고자 했을 테니 말이다.
이처럼 온전치 못한 방법으로 왕위에 오른 무령왕은 자신의 지위를 보다 완벽한 것으로 만들고자 했을 테고, 당시의 사회의 안정은 그러한 무령왕의 시도를 인정했을 것이다.(신화를 인정) 그같은 배경에서 용신설화, 즉 백제만의 신화가 탄생한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 백제의 신화는 천신과 난생등의 신화적 모티프들은 이용하지 않았던 것일까. 용이라는 모호한 성격의 대상을 등장시켜 신화도 아닌 전설도 아닌 설화를 만들어 낸 것일까. 어떠한 시대의 요구가 용이라는 신에 이르지 못한 존재를 만들어 내게 한 것일까.
서동설화에는 유난히 불교의 내용이 많이 등장한다. 서동의 아내인 선화공주의 아버지인 진평왕도 자신의 휘를 백정(석가의 아버지)이라 할 정도로 불교적인 인물이었으며 서동이 신라에 갔을 때에도 머리를 깎았다는 내용으로 보아 승려의 행색을 한 듯 하다. 또한 용화산의 금을 옮길 때에 그 방법을 가르쳐 준 이가 바로 사자사의 지명법사이며 용화산(미륵보살이 앉아있다는 용화수와 이름이 비슷) 앞 못가에서 미륵삼존을 만난 계기로 미륵사를 세우게 되었다. 이처럼 불교와 관련된 다양한 요소가 등장하고 있는 것은 당시 백제사회 곳곳에 불교문화가 뿌리깊게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한다.
그렇다면 불교적인식이 신화생성 과정에 어느 부분 관여했으리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본래 신화에 흔히 등장하는 천손(天孫), 난생(卵生), 수신(水神) 등의 요소들은 일정한 신앙체계가 아직 세워지지 않은 원시사회에서 자연에 대한 외경에서 비롯되었다. 허나, 역사가 진행되며 불교나 유학이념과 같은 일정한 관념체계가 지배층의 필요에 의해 받아들여졌고, 그 과정에서 샤머니즘이나 토테미즘같은 자연외경사상은 점차 밀려나게 되었다.
이를 통해 불교적 인식이 일반화되고 신성한 영역을 점하게 되자, 그러한 불교의 내용이 신화에도 반영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랬으므로 왕을 천신과 같은 불확실한 대상의 자손이라 칭하는 것보다는, 천왕팔부중의 하나로서 불법을 수호하는 호법신의 지위를 가지고 있는 용과 출생을 관련짓는 편이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또한 용은 사바세계와 극락정토를 연결시키는 통로(반야용선)라는 상징도 지니고 있는데, 이러한 사실은 용의 자손인 왕이 반야용선이 되어 백성들을 피안의 세계로 이끌겠다라는 민본정치의 이념을 반영했을 수도 있는 것이다.
백제의 경우, 건국초기 원시적 자연외경이 아직 존재할 때에 신화가 형성되지 않았으므로 불교가 유입되고, 유교이념에 따른 정치체제가 확립된 후 만들어진 신화가 이전의 그것과 똑같은 모습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백제인들은 그들만의 신화를 만들었고, 그것은 불법을 보호하는 용을 통해 이루어졌다. 이러한 백제의 용신설화를 두고 성격을 구분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노릇이나, 이 무령왕의 신화는 축소된 신화라기보다는 시대의 변화에 따른 새로운 사상과 이해가 반영되어 만들어진 백제만의 신화라고 하는 것이 옳겠다고 여겨진다.
<무너진 백제의 신화>
신화는 그 자체가 일종의 규제로서 작용한다. 신화에는 나름의 질서가 담겨있기 마련이고 그것은 백성들에게 규범체제가 된다. 그러므로 만들어 진 때가 가까울수록 신화의 지배력, 강제력은 더욱 강한 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백제는 무령왕과 성왕대를 지내며 옛 영화를 복원하고자 하는 기대로 중흥의 깃발을 높이 올린다. 특히 성왕은 잃은 영토를 회복하고자 하는 의지가 남달라 여러 차례 정복전쟁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백제의 백성들 역시 용신의 후예라 하는 왕에 지휘에 따르며 부흥의 의지를 다졌을 것이다.
하지만, 백제는 무왕과 의자왕을 거치며 극도로 쇠하게 되었고 결국 신라에 의해 멸망하였다. 이후 고구려도 마찬가지지만, 백제의 경우 많은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이러한 부흥운동은 단지 백제 땅에서 뿐만 아니라 중국남조에서도 진행되었을 정도로 끈질긴 것이었다.
이러한 부흥운동의 정신적 믿음을 훼손하기 위해, 혹은 부담이 되는 당의 군대를 내쫓기 위해(당세력을 내쫓기 위해 신라는 일부 부흥운동을 후원하였다) 신라는 백제의 신화의 왜곡, 변형할 시도를 했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조룡대 설화이며, 백제신화의 주인공인 용을 낚아 무릎 꿇인 이가 바로 당나라의 장수 소정방이다.
그러나 조룡대설화에서 용이 무릎을 꿇거나 죽임을 당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백제의 백성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면 아직 신화는 사라진 것이 아니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랬으므로 백제의 용신신화는 무너졌으되 사라지지 않았고, 백제부흥의 기수 견훤이 나타났을 때 다시금 나타났던 것이다.
<신화와 전설의 경계에 선 견훤설화>
통일신라의 지배력이 느슨해지자 각지에서는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이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궁예와 왕건, 견훤이 그 대표적인 예로서 이들은 신라와 함께 후백제시대를 개막하며 통일을 다퉜다. 호족이라 불리는 이들은 자신이 근거한 지방을 풍수지리에 따르자면 기막힌 명당이라 선전하여 자신의 지배의 당위를 확보하려 하였다. 특히 반도 남쪽에 자리잡은 견훤은 그러한 성향이 더욱 강하여 세력 내에 있는 지리산의 동리산문과 도선의 제자인 경보를 적극적으로 후원한 것으로 보인다. 아마, 지금은 남아있지 않았겠지만, 당시에는 완산주를 중심으로 한 풍수설화가 존재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견훤일진데, 옛 백제 땅에 전승되던 용신설화에 주목하지 않았을 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자신의 고향인 상주를 버리고 광주 땅을 바탕으로 한 용신설화를 만들어 자신을 백제신화 속으로 대입하였던 것이다. 백성들은 그러한 견훤을 지지하였으며 용신설화가 다시금 신화로 빛나길 기대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견훤은 후삼국간의 패권다툼에서 패배하였고, 더군다나 고려로 귀부하여 왕건과 함께 백제공략에 앞장서기까지 하였다. 이는 백제지역 출신이 아닌 견훤에게 백제의 옛 신화인 용신설화를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한 토착집단에게 있어서는 믿음과 기대의 방향을 잃은 것이었다. 더구나 차현이남의 사람은 쓰지 말라는 태조의 유훈은 이들에게 실제적인 불리로 작용했으므로 그러한 좌절은 더욱 격화되었다. 그리하여 그들 스스로 자신들만의 신화의 주체를 비하시켜 사라지도록 하였으니, 그것이 용을 지렁이로 만들어 바늘로 죽여버린 견훤설화이다.
신화의 세계를 부정할 때 신화는 현실을 변화시킬 힘을 잃는다. 현실에 더 이상 작용하지 못할 때 그 이야기는 신화로서의 이름을 잃고 비극적인 형태로 변환되어 전설의 모습으로 전하게 되는 것이다. 신화와 전설의 차이는, 경계는 모호한 것이지만, 어찌보면 뚜렷한 것으로 여겨진다. 현실을 바꿀 수 있는 힘을 잃은 이야기 그것이 신화가 되지 못한 이야기, 곧 전설이라고 불려지는 것이라 생각한다.
백제의 건국설화는 온조와 비류가 유리왕에게 제거될까 저어하여 한산으로 내려와서는 미추홀과 하남위례에 각각 도읍을 세우는 내용이다. 결국 미추홀에 도읍을 삼은 비류가 온조세력에 복속되어 모든 백성이 즐거이 따르니, 이것이 백제의 시작이다. 하지만, 여기서의 백제란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백제(百濟)가 아닌 백제국(伯濟國)이니, 이는 온조에 의해 세워진 백제가 아직 소국에 불과하였다는 것이다.
백제가 속하였던 마한은 당시 삼한 중에서도 가장 많은 소국들이 난립해 있었으므로 아무래도 각 세력간의 다툼이 가장 치열했을 터라고 여겨진다. 또한 미추홀에 세워진 비류의 국가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자, 신하와 백성들이 위례로 돌아오며 기뻐했다라는 구절을 보았을 때 백성들로 상징되는 기존세력들의 세력도 무시할 수 없는 형세였으리라고 짐작된다.(이를테면 부여의 왕이 흉년등의 책임을 물어 살해되듯)
이처럼, 많은 소국들이 난립해 있던 상황에서 토착세력과 어려운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면 지배의 당위를 밝히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던 신화는 탄생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설혹 신화가 있었다 하더라도 제대로 기능하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그랬으므로 백제의 건국담, 곧 건국설화는 있지만, 그것은 건국의 신성함을 밝히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건국신화가 되지는 못하였던 것이다.
<백제의 용신설화, 그것은 백제만의 신화>
신화는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다. 특히 지배세력에 의해 만들어진 신화의 경우 지배력을 다지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지는데, 이 경우 일부는 신화를 자신의 불리한 출신을 감추거나 미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삼았다.
삼국유사 무왕조에 등장하는 용신설화도 그러한 측면이 크다. 먼저 여기서 무왕은 무령왕의 오기라고 한 일연의 견해에 동의하고 싶다. 백제 30대 왕인 무왕은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의 전대 왕으로 신라와의 대규모 전쟁을 지속적으로 벌인 왕이다. 그렇기 때문에 서동설화에서 유추 가능한 백제왕과 신라왕실간의 긴밀한 관계는 성립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일연의 주(註)를 따라 무왕조의 서동설화를 무령왕의 이야기라 결정짓는 것은 그리 큰 무리는 아니라고 본다. 왕릉에서 발굴된 유물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 무령왕의 치세기간은 백제문화의 안정기이자 황금기였다. 또한 여러 차례 중국 남조에 사신을 파견한 기록도 보이는데 이는 당시 정세가 안정되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하지만, 무령왕의 즉위과정은 온전한 것이 아니었다. 전대 왕인 동성왕을 죽인 백가세력을 자신의 즉위 후에도 제거하지 않았었다는 사실은 백가라는 반역세력과 무령왕이 어떠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고 생각해 볼 수 있는 일이다. 더군다나 무령왕은 고구려에 의해 전사한 개로왕의 아들로 동성왕계로 돌아간 왕위를 다시 찾고자 했을 테니 말이다.
이처럼 온전치 못한 방법으로 왕위에 오른 무령왕은 자신의 지위를 보다 완벽한 것으로 만들고자 했을 테고, 당시의 사회의 안정은 그러한 무령왕의 시도를 인정했을 것이다.(신화를 인정) 그같은 배경에서 용신설화, 즉 백제만의 신화가 탄생한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 백제의 신화는 천신과 난생등의 신화적 모티프들은 이용하지 않았던 것일까. 용이라는 모호한 성격의 대상을 등장시켜 신화도 아닌 전설도 아닌 설화를 만들어 낸 것일까. 어떠한 시대의 요구가 용이라는 신에 이르지 못한 존재를 만들어 내게 한 것일까.
서동설화에는 유난히 불교의 내용이 많이 등장한다. 서동의 아내인 선화공주의 아버지인 진평왕도 자신의 휘를 백정(석가의 아버지)이라 할 정도로 불교적인 인물이었으며 서동이 신라에 갔을 때에도 머리를 깎았다는 내용으로 보아 승려의 행색을 한 듯 하다. 또한 용화산의 금을 옮길 때에 그 방법을 가르쳐 준 이가 바로 사자사의 지명법사이며 용화산(미륵보살이 앉아있다는 용화수와 이름이 비슷) 앞 못가에서 미륵삼존을 만난 계기로 미륵사를 세우게 되었다. 이처럼 불교와 관련된 다양한 요소가 등장하고 있는 것은 당시 백제사회 곳곳에 불교문화가 뿌리깊게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한다.
그렇다면 불교적인식이 신화생성 과정에 어느 부분 관여했으리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본래 신화에 흔히 등장하는 천손(天孫), 난생(卵生), 수신(水神) 등의 요소들은 일정한 신앙체계가 아직 세워지지 않은 원시사회에서 자연에 대한 외경에서 비롯되었다. 허나, 역사가 진행되며 불교나 유학이념과 같은 일정한 관념체계가 지배층의 필요에 의해 받아들여졌고, 그 과정에서 샤머니즘이나 토테미즘같은 자연외경사상은 점차 밀려나게 되었다.
이를 통해 불교적 인식이 일반화되고 신성한 영역을 점하게 되자, 그러한 불교의 내용이 신화에도 반영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랬으므로 왕을 천신과 같은 불확실한 대상의 자손이라 칭하는 것보다는, 천왕팔부중의 하나로서 불법을 수호하는 호법신의 지위를 가지고 있는 용과 출생을 관련짓는 편이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또한 용은 사바세계와 극락정토를 연결시키는 통로(반야용선)라는 상징도 지니고 있는데, 이러한 사실은 용의 자손인 왕이 반야용선이 되어 백성들을 피안의 세계로 이끌겠다라는 민본정치의 이념을 반영했을 수도 있는 것이다.
백제의 경우, 건국초기 원시적 자연외경이 아직 존재할 때에 신화가 형성되지 않았으므로 불교가 유입되고, 유교이념에 따른 정치체제가 확립된 후 만들어진 신화가 이전의 그것과 똑같은 모습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백제인들은 그들만의 신화를 만들었고, 그것은 불법을 보호하는 용을 통해 이루어졌다. 이러한 백제의 용신설화를 두고 성격을 구분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노릇이나, 이 무령왕의 신화는 축소된 신화라기보다는 시대의 변화에 따른 새로운 사상과 이해가 반영되어 만들어진 백제만의 신화라고 하는 것이 옳겠다고 여겨진다.
<무너진 백제의 신화>
신화는 그 자체가 일종의 규제로서 작용한다. 신화에는 나름의 질서가 담겨있기 마련이고 그것은 백성들에게 규범체제가 된다. 그러므로 만들어 진 때가 가까울수록 신화의 지배력, 강제력은 더욱 강한 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백제는 무령왕과 성왕대를 지내며 옛 영화를 복원하고자 하는 기대로 중흥의 깃발을 높이 올린다. 특히 성왕은 잃은 영토를 회복하고자 하는 의지가 남달라 여러 차례 정복전쟁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백제의 백성들 역시 용신의 후예라 하는 왕에 지휘에 따르며 부흥의 의지를 다졌을 것이다.
하지만, 백제는 무왕과 의자왕을 거치며 극도로 쇠하게 되었고 결국 신라에 의해 멸망하였다. 이후 고구려도 마찬가지지만, 백제의 경우 많은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이러한 부흥운동은 단지 백제 땅에서 뿐만 아니라 중국남조에서도 진행되었을 정도로 끈질긴 것이었다.
이러한 부흥운동의 정신적 믿음을 훼손하기 위해, 혹은 부담이 되는 당의 군대를 내쫓기 위해(당세력을 내쫓기 위해 신라는 일부 부흥운동을 후원하였다) 신라는 백제의 신화의 왜곡, 변형할 시도를 했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조룡대 설화이며, 백제신화의 주인공인 용을 낚아 무릎 꿇인 이가 바로 당나라의 장수 소정방이다.
그러나 조룡대설화에서 용이 무릎을 꿇거나 죽임을 당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백제의 백성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면 아직 신화는 사라진 것이 아니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랬으므로 백제의 용신신화는 무너졌으되 사라지지 않았고, 백제부흥의 기수 견훤이 나타났을 때 다시금 나타났던 것이다.
<신화와 전설의 경계에 선 견훤설화>
통일신라의 지배력이 느슨해지자 각지에서는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이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궁예와 왕건, 견훤이 그 대표적인 예로서 이들은 신라와 함께 후백제시대를 개막하며 통일을 다퉜다. 호족이라 불리는 이들은 자신이 근거한 지방을 풍수지리에 따르자면 기막힌 명당이라 선전하여 자신의 지배의 당위를 확보하려 하였다. 특히 반도 남쪽에 자리잡은 견훤은 그러한 성향이 더욱 강하여 세력 내에 있는 지리산의 동리산문과 도선의 제자인 경보를 적극적으로 후원한 것으로 보인다. 아마, 지금은 남아있지 않았겠지만, 당시에는 완산주를 중심으로 한 풍수설화가 존재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견훤일진데, 옛 백제 땅에 전승되던 용신설화에 주목하지 않았을 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자신의 고향인 상주를 버리고 광주 땅을 바탕으로 한 용신설화를 만들어 자신을 백제신화 속으로 대입하였던 것이다. 백성들은 그러한 견훤을 지지하였으며 용신설화가 다시금 신화로 빛나길 기대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견훤은 후삼국간의 패권다툼에서 패배하였고, 더군다나 고려로 귀부하여 왕건과 함께 백제공략에 앞장서기까지 하였다. 이는 백제지역 출신이 아닌 견훤에게 백제의 옛 신화인 용신설화를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한 토착집단에게 있어서는 믿음과 기대의 방향을 잃은 것이었다. 더구나 차현이남의 사람은 쓰지 말라는 태조의 유훈은 이들에게 실제적인 불리로 작용했으므로 그러한 좌절은 더욱 격화되었다. 그리하여 그들 스스로 자신들만의 신화의 주체를 비하시켜 사라지도록 하였으니, 그것이 용을 지렁이로 만들어 바늘로 죽여버린 견훤설화이다.
신화의 세계를 부정할 때 신화는 현실을 변화시킬 힘을 잃는다. 현실에 더 이상 작용하지 못할 때 그 이야기는 신화로서의 이름을 잃고 비극적인 형태로 변환되어 전설의 모습으로 전하게 되는 것이다. 신화와 전설의 차이는, 경계는 모호한 것이지만, 어찌보면 뚜렷한 것으로 여겨진다. 현실을 바꿀 수 있는 힘을 잃은 이야기 그것이 신화가 되지 못한 이야기, 곧 전설이라고 불려지는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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