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국문학과 사상

'이용후생'의 정약용과 박지원

작성자{국어/사상}-서소정|작성시간02.08.25|조회수264 목록 댓글 0

정약용

정약용은 1762년(영조 38년) 경기도 초부면 마재(현재의 남양주군 조안면 능내리)에서 진주목사를 지낸 정재윤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네 살 때 천자문을 떼었고, 일곱 살 때는 산술(算術:수학)과 역학을 익혔고 아홉 살 때는 경서(經書)와 역사를 공부했다. 나아가 열 살 무렵에는 이미 자신의 시문집(詩文集)까지 낼 정도였으며 열 세 살 때는 사서삼경과 제자백가를 섭렵했다고 한다. 그는 민초(民草)들의 고단한 삶을 접하면서 학문의 목적은 자구(字句) 해석과 과거 시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수기치인(修己治人:자신을 잘 닦고 사람들을 훌륭하게 다스림)에 있음을 어린 시절부터 몸으로 깨달았다.
다산 정약용이 활동하던 시대-18세기 후반기∼19세기 초엽-는 우리 나라 봉건사회 발전에 있어서 봉건제도의 붕괴를 특징짓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시기였다. 주자학은 본래의 비판적이고 건전한 정치 이념으로서의 기능을 잃어버린 채 명분과 예법만을 중시하는 '학문을 위한 학문'으로 전락해 버린 나머지 끊임없는 당쟁의 빌미만 될 뿐이었다. 그는 사회를 변혁하고 백성을 구할 수 있는 새로운 학문을 끊임없이 찾고 있었는데, 이런 가운데 그의 눈에 뜨였던 것이 바로 청나라로부터 전파되어 왔던 실학(實學)과 성호 이익의 경세치용(經世致用) 사상이었다. 이로써 현실의 삶에 바탕을 두는 그의 학문체계는 비로소 그 기초를 갖추게 되었다.
이 당시 조선 사회는 경제적 모순은 더욱 격화되고 있었으며, 이것은 지배 계급의 사상체계에 있어서 심각한 위기를 초래하고 있었다. 조선왕조의 전근대적 통치 체제는 19세기 전반기에 이르러 그 모순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었는데, 이러한 시대적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한 인물이 바로 정약용이다. 다산은 그가 처한 시대적 모순을 극복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걸친 많은 혁명적인 이론들을 제기하였다. 그의 제안은 그 자신의 독창적인 사상이었다기보다는 광범위한 지식 대중들의 생각을 그가 집대성한 것이며, 또한 그 당시 사회의 벌 전도와 상호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는 것이지만, 그의 제반 이론들은 조선왕조 후기에 생존했던 어떤 사람의 주장보다도 진일보한 것이었다.
실학파 학자들의 사회, 경제, 정치, 과학,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이룩한 거대한 업적과 함께 그가 쌓아 올린 교육사상은 더욱 심화 발전되었으며 양반 통치 계급들의 교육 문화정책에 대한 비판은 더욱 신랄하여졌다. 특히 그가 당시 학생 교양사업에서 가장 핵심적인 문제였던 천부적인 본성대로 따라 가야 한다는 관념적인 교양을 반대하고 실천적인 교육, 교양의 필요성을 논증한 것은 우리 나라 교육 사상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또한 그의 자연 과학 사상은 실학파의 다른 학자들에게서와 마찬가지로 유물론적 우주관에 확고히 입각하고 있다. 천문, 기상, 지리, 물리, 화학적 및 생물학적 현상 등의 각양 각이한 자연 현상에 대하여 항상 관심 하면서 그러한 현상들이 일어나고 변화 발전하는 원인을 과학적으로 구명하려고 노력하였다.
실학자들은 봉건 지배계급의 주자학적 공리공담을 반대하고 조국의 부강발전과 민생의 향상을 위한 실용적 학문을 주장하였다. 그들은 봉건적인 제도의 폐해와 통치자들의 사대주의를 비판하고 애국적이며 진보적인 사회개혁안을 제시하였다. 다산은 이러한 실학자들의 전통을 이어 받아 조선 봉건 사회의 무너져가는 정치, 경제 등의 제도와 고루한 유교사상을 폭로하고 비판하여 사회적으로 평등권에 대한 백성의 요구를 반영해야 함을 주장하였다. 이 뿐만 아니라 교육제도, 종교사상, 국방문제, 자연 과학사상에 이르기까지 여러 분야에 걸쳐 일련의 개혁사상과 개혁 방안을 제시하였다. 이로써 그는 실학을 집대성하여 당시 학문의 최고 수준에 도달하게 되었다.

박지원

박지원(朴趾源)은 1737(영조 13)∼1805(순조 5)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이며 본관은 반남(潘南)이다. 자는 미중(美仲)또는 중미(仲 美), 호는 연암(燕巖)또는 연상(煙湘)·열상외사(洌上外史)이며, 서울의 서쪽인 반송방 야동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사유(師愈), 할아버지는 지돈녕부사 필균(弼均)이며, 어머니는 함평이씨(咸平李氏) 창원(昌遠)의 딸이다. 성장하면서 신체가 건강하고 매우 영민하여 옛사람의 선침(扇枕)과 온피(溫被)같은 일을 흉내내기도 하였다. 1752년(영조 28)에 전주이씨(全州李氏) 보천(輔天)의 딸과 혼인하면서 <맹자>를 중심으로 학문에 정진하게 되었으며, 특히 보천의 아우 양천(亮天)에게서는 사마천(司馬 遷)의 <사기(史記)>를 비롯하여 주로 역사서적을 교훈 받아 문장 쓰는 법을 터득하고 많은 논설을 습작하였다. 수년간의 학업에서 문장에 대한 이치를 터득하였으며, 1765년에 처음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이후로 과거시험에 뜻을 두지 않고 오직 학문과 저술에만 전념하였다. 그는 박제가·이서구·서상수·유득공·유금 등과 이웃하면서 학문적 깊은 교유를 가졌다. 이때를 전후하여 홍대용·이덕무·정철조 등과 이용후생(利用厚生)에 대하여 자주 토론하였으며, 이 무렵 유득공·이덕무 등과 서부지방을 여행하였다. 1780년(정조 4)에 처남 이재성의 집에 머물고 있다가 삼종형 박명원(朴明源)과 북경을 갈 때 수행하여 압록강을 거쳐 북경·열하를 여행하고 돌아왔다. 이때의 견문을 정리하여 쓴 책이 <열하일기>이며 이 속에는 그가 평소에 생각하던 이용 후생에 대한 생각이 구체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 저술로 인하여 그의 문명이 일시에 드날리기도 하였으나 문원(文垣)에서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그는 홍대용, 박제가 등과 함께 북학파를 이루었으며, 실사 구시, 이용 후생, 기술의 존중과 국민 경제 생활의 향상을 주장하고, 정치, 경제, 병상, 천문, 지리, 문학 등 각 방면에 걸쳐서 청 나라의 신 문물을 소개하여 실학 사상을 고취시켰다.
그의 작품 허생전은 <열하일기> 옥갑야화에 실려 있던 작품으로, 허생이라는 가공의 인물을 설정하여 당시의 사대부를 풍자하면서 중상주의적 경제론을 바탕으로 한 부국론을 표방했다. 이런 제안은, 모순되고 거짓에 찬 현실을 비판하는 의식에서 비롯된 것이었고, 제시된 현실 비판과 그 개선책은 허생의 시대인 17세기가 아니라 작자인 연암이 살았던 18세기를 겨냥한 것이다. 작품에서 이완이 모든 제안을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한 바와 같이, 연암의 당대에도 이러한 현실 개선책은 지배 계층에게 받아들여지기 어려웠다. 이를 수용하는 일은 곧 지배 질서의 붕괴를 뜻하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실생활에 관심을 두는 학풍은 18세기 후반에 와서는 연암 박지원을 비롯한 일군의 학자들에 의해 상공업의 유통 및 생산 기구 전반의 기술 혁신 쪽으로 관심을 돌리게 된다. 이 18세기 후반의 실학 학풍을 일컬어 이른바 '이용 후생 학파'라고도 했다. 또, 이들은 당시 우리보다 발달한 청나라의 문물을 받아들일 것을 적극 주장하였기 때문에 '북학파'라고 불리기도 했다.

<이용후생파의 박지원과 정약용>

박지원과 정약용은 이용후생에 중점을 둔 북학론자 학자였다. 박지원은 피폐한 조국을 구하려면 모름지기 경제로부터 시작해야 하고 또 경제구조를 개조하려면 외국의 실제 상황을 시찰하고 그 생활을 보아서 제도문물을 살펴 장점을 받아들이고 산업과 교통의 진보 발달된 점을 본받아야 한다는 것을 지적하고, 그 실현을 위해서는 중국을 배워야 함을 주장했다. 박지원은 <허생전>을 통해 공리공론(空理空論)과 허례허식을 물리치고 현실을 직시하여 무실(務實)에 힘쓰고 빈부의 격차나 반상(班常)의 차별이나 귀천의 간격이 없는 누구나 평등한 위치에서 인간의 대우를 받을 수 있는 사회의 실현을 이상으로 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정약용은 <경세유표>에서 국가경영에 관한 모든 제도와 법규에 대하여 적절하고 준칙이 될 만한 것을 논하였고, <목민심서>는 각지방 치민에 관한 요령과 참고가 될만한 것을 술하였으며, 흠흠신서는 치옥(治獄)에 대한 주의와 규범을 기록하였다. 애국애민과 경제부흥의 안목에서 바라본 것이었다. 이러한 그의 기본방향은 전통문화와 전통사회에 대한 고증과 혁신으로 인간을 해방시키고 민권을 회복하는 촉진제가 되어 갔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