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근대사에 가장 불행한 역사라면 6,25 전쟁이다. 6월 25일은 북한 괴뢰군이 남침 전쟁을 일으킨 지 76년이 되는 날이다. 6월은 나라와 국민을 지키다가 장열 하게 전사한 호국영령들을 추모하고 그 유가족들과 생존한 참전용사들을 보살피는'호국보훈의 달'이다.
6,25 전쟁에 참전한 호국용사들은 대부분 유명을 달리하고 있다. 일부 구사일생(九死一生) 살아남은 참전용사들도 90세가 넘은 노병(老兵)들로 전설 같은 전쟁 참화의 유일한 증인들이다.
이제는 80대 중후반 이후 노인들이 청소년시절 고향이나 피난길에 나서면서 6,25 전쟁 참상을 겪고 인민군 치하 3개월 동안 겪어온 공산주의자들의 만행과 전쟁의 참혹함을 증언할 수 있는 유일한 마지막 증인들이라 할 수 있다.
필자가 이 글을 쓰는 것은 전쟁을 겪지 않은 세대들에게 6,25 전쟁의 전말(前末)과 공산주의자들의 만행의 실상을 알림으로써 불행했던 지난날의 역사를 다시는 반복하지 않게 하고자 함이고, 유비무환(有備無患)으로 안보를 튼튼히 하고 국민들의 각오를 다지는 교훈(敎訓)으로 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6,25 전쟁은 누가일으겼나?
해방 후 한반도에는 이념이 다른 두 정부가 들어서 분단국이 되었다. 38선 이남에는 1948년 8월 15일 이승만 대통령이 건국한 자유민주주의 국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38선 이북에는 같은 해 9월 9일 김일성이 건국한 공산주의국가 조선 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우리 헌법에는 국가로 인정하지 않음)
한반도는 조선과 중국, 소련 등 공산국가들로 둘러싸였다. 정부가 수립된 지 1년 반 채 자리도 잡기 전인 1950년 1월 에치슨 미 국무장관은 미국의 극동방위선을 알류샨열도와 일본 오키나와, 필리핀을 연결하는 선으로 일명 에치슨라인을 선포했다. 이 방위선에서 한국이 제외되자 미군이 철수했고, 김일성은 남한을 침략해도 미국이 군사적 개입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오판을 낳게 했다.
6,25 전쟁은 한반도 남쪽에 유일하게 자리 잡은 자유민주주의 국가 대한민국을 공산화하기 위한 조선 김일성과 소련 스탈린, 중국 모택동이 합작한 무력 통일전쟁이었다.
무력통일을 꿈꾸어오던 김일성은 소련 스탈린과 중국 모택동을 찾아가 남침 전쟁 허락을 받아냈다. 소련의 탱크 350대를 비롯한 각종 전략무기를 지원받은 조선 인민군들은 그해 6월 25일 새벽 4시에 기습공격을 감행했다. 무방비상태에 있던 우리 국군은 사력을 다했지만 병력과 전략무기 등 군사력의 열세로 6월 28일 3일 만에 서울이 함락되었다.
한국전쟁 승패 책임진 맥아더 유엔군사령관
이승만 대통령은 일본 점령군 사령관 맥아더장군에게 한국방문을 요청했고, 맥아더 사령관은 즉시 수원비행장에 입국 한강 전선을 시찰했다. 맥아더장군은 즉시 트루맨대통령에게 보고 했다. 유엔에 의해 건국된 한반도에 유일한 합법정부 대한민국이 공산군이 침략했다는 보고를 받고,. 화가 난 트루맨 대통령은 Motoerfuckers (개자식)들이라면서 즉각 유엔대사에게 유엔안전보장회의 소집을 지시했다. 유엔총회는 유엔군이 한국참전을 가결했고, 미국을 비롯한 16개국이 참전, 유엔군사령관에 맥아더장군을 임명했다.
인천상륙작전 성공시킨 맥아더사령관
조선인민군은 7월 28일 불과 한 달 만에 대구와 부산을 제외한 전 지역을 점령했다. 맥아더 유엔군사령관은 일본에 주둔한 스미스부대 1개 대대를 선발부대로 급파 낙동강전투에 투입시켰다.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은 인천상륙작전을 계획했다. 하지만 인천은 조수의 간만의 차 (9m)가 심해 성공할 확률이 5000분의 1이라는 미 국방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했다.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9월 28일 서울을 탈환하기까지 3개월 동안 점령지역은 인민군의 공산치하에서 겪었던 그들의 만행과 국민들의 희생과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인민공화국 3개월 국민들의 고통과 시련
필자가 청소년시절 공산치하 3개월을 겪은 이야기다. 고향은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 당시 국민학교 5학년(13세) 때 6,25 전쟁이 발발했다. 어른들은 북한 김일성 군대가 쳐들어와 서울이 난리가 났다 고 웅성 거렸다.
그 시절에는 라디오를 가진 사람이 드물었다. 뉴스를 듣고, 구전(口傳)으로 전해주는 것이 유일한 정보었다. 서울이 난리가 났다는 소문을 들은 지 며칠이 안돼 우리 면에도 10여 명이 넘는 인민군이 들이닥쳤다.
지서에는 인민군 2명만 남겨두고 모두 어디로 가버렸다. 지서(현 파출소)를 내무서로 간판을 바꾸고, 면사무소도 인민위원회로 간판을 바꿨다. 우리들은 소년단에 가입했고 학교는 휴교를 했지만 매일같이 학교운동장 푸라타나스 그늘 아래로 모이게 했다. 중학교에 다니는 형들이 와서 조선인민공화국 애국가와 김일성장군을 찬양하는 빨치산 노래를 가르쳤다. 얼마나 쇠뇌가 되었는지 76년 전 가사를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면사무소에는 인민위원회가 조직되고, 인민위원들은 머슴살이를 하던 사람들이나 가난하게 살면서 소외당하고 살았거나 글도 잘 모르는 무지한 사람들이다. 이들에게 '인민위원'이라는 감투를 씌워주고 인민공화국에 충성을 바치게 했다. 이들은 하얀 헝겊에 빨간색으로 '인민위원'이라고 쓴 완장을 두르고 죽창을 들고 2~ 3명씩 한조가 되어 이 마을 저 마을을 다니면서 반동분자를 색출 내무서 인민군에게 인계하는 일이었다.
그들이 말하는 반동분자는 면장, 지서장 등 공공기관장이나 공직자가족, 경찰가족, 군인가족, 지식인, 소방대장, 양조장 사장 등 부유층으로 지방유지라는 사람들은 반동분자로 지목받았다. 인민위원들은 같은 동네 나 이웃동네에 살고 서로 아는 사이지만 세상이 바뀌자 제세상 만난 듯 돌변한 것이다. 자생적 공산당원인 이들을 일명 '빨갱이"라고 했다.
마을사람들은 인민군보다 빨갱이들을 더 두려워했다. 인민군들은 밤이면 지서 옆 공터에 모이게 하여 춤과 노래로 마을사람들의 호감을 갖게 했다. 그러면서 낮에는 인민위원들을 시켜 반동분자들을 잡아들이게 했다. 인민위원들의 기세는 등등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라고, 사리 분별을 못하고 설쳐대니 두려울 수밖에 없었다. 머슴이 주인을 잡아오는 일도 있다. 인민위원들의 눈에 거슬리거나 잘못 보여 내무서에 끌려오면 끝장이다.
인민위원들이 사람들을 포승줄로 굴비 엮듯 묶어 끌고 오면 철부지인 우리들은 큰 구경거리라도 생긴 듯 졸래졸래 따라다니며 구경을 했다. 잡혀온 사람들은 잠시 내무서에 대기하다가 차에 실려 어디론가 보낸다. 그 후 가족들은 어디로 실려갔는지 행방도 생사도 알 길이 없었다.
청년들은 인민군으로 끌려가기도 하고 40~50대 어른들은 인민군들의 군수품을 나르는 노무자로 끌려가거나 아니면 인민위원들이 언제 잡으러 올지 모르니 불안에 떨며 가족을 남겨놓고 피난을 떠나기 시작했다. 우리 아버지도 피난을 가시기로 했다. 어머니가 찹쌀 한 말을 볶아서 미숫가루를 만들어 부대에 담아 멜빵을 메고 떠나셨다.
자동차가 없던 시절이라 몇몇 어른들과 함께 걸어서 대구로 가신다고 했다. 나는 인민공화국 세상이라 아버지는 영영 못 돌아오시는 줄로만 알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는 아버지가 떠나신 후 13살 어린 나이에도 장남이라 어머니를 모시고 다섯이나 되는 어린 동생들과 살아갈 일이 걱정이 됐던 것 같다. 무슨 장사라도 해서 돈을 벌어야 살 수 있다는 생각에 같은 반 친구네 집 엿방을 찾아갔다. 친구 아버지말씀이 1,000원에 엿 15 가락이라고 했다. 엿 한 개에 100원씩 팔면 500원이 남는다. 잘만 팔면 5할 장사니 괜찮은 장사라고 생각했다. 어머니께 말씀드려 1,000원을 타서 엿을 받아가지고 목판에 담아 장터로 나갔다.
점심을 굶고도 배고픈 줄도 모르고 하루 종일 장터에 앉아있었다. 내 머릿속에는 다 팔면 500원을 번다는 생각뿐이었다. 겨우 본전을 건지고 해 가질 무렵에야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돌아오니 동생들이 목판에 남은 엿을 보고 먹고 싶은지 입맛을 다신다. 내일 팔아야 500원을 버는데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동생들이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안쓰러워 하나씩 나눠주니 그렇게 좋아들 한다. 전쟁통에 소년소녀 가장이 나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일이 또 생겼다. 인민위원회에서 우리 집을 사무실로 쓸 테니 00일까지 집을 비우라는 것이다. 우리 집은 읍내에서 전매청 지정 담배와 소금 배급소를 했다. 일본인이 살던 집인데 집터도 넓고 소금을 쌓는 40여 평 큰 창고가 있었다. 내무서는 사람들을 잡아와도 가둘 데가 없으니 우리 집과 창고가 필요했던 것 같다. 이제는 빨갱이들 세상이 되었으니 꼼짝없이 집을 뺴앗길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10여 리쯤 떨어진 송산리 할아버지댁으로 가기로 했다. 집을 비우라는 날 아침에 짐을 쌌다. 짐이래야 덮고 잘 이블과 옷가지 말고는 다른 짐은 갖고 갈 수도 없었다. 이사하는 날 인민위원이 올 줄 알았는데 아무도 오지 않는다. 이상 하다 싶어서 밖에 나가 알아보니 어젯밤에 인민군들이 모두 도망갔는 것이다. 며칠 후 아버지도 돌아오셨다. 아버지는 대전까지 가셨다가 인민군들이 후퇴했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돌아오셨다.
글을 쓰다 보니 불길 속에서 살아 나온 황인봉 어르신의 생존 이야기가 떠오른다. 황인봉 어르신은 여사리에서 농사를 짓는 부자였다. 옛날에는 논 15~20마지기를 지으면 부자소리를 들었다. 부자들은 인민을 착취한 반동분자로 낙인찍혔다. 황인봉 어르신은 인민위원들에게 잡혀와 장항에 있는 군 내무서(경찰서)에 넘겨졌다. 군 내무서 유치장에 있다가 어느 날 등기소 창고로 이동했다.
인민군들은 창고에 석유를 뿌리고 불을 질렀다. 목조건물이라 불길은 삽시간에 타오르고 창고 속에 갇혀있는 사람들은 아비규환이었다. 인명은 재천(人命在天)이라고 황 씨는 지옥 같은 불길 속에서 탈출했다. 가을철이라 인근 논 벼 속으로 기어들어가 하루 종일 엎드려 숨어있었다. 밤이 되어서야 기어 나와 50리 길을 맨발로 걸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집 땅굴에 숨어서 지내다가 인민군이 후퇴했다는 소식을 듣고 나왔다는 이야기를 황인봉 어르신으로부터 들었다. 시신을 찾지 못해 묘소도 없이 제사를 지내는 지인들도 있다.
한산면에서 기산면으로 넘어가는 경계선에 일명 돼지고개라는 높은 고개가 있다. 빨갱이들은 잡혀온 사람들에게 돼지고개 산속에 길게 호를 파게 했다. 인민군들은 퇴각하기 전 잡혀온 사람들을 팔을 뒤로 묶어 한 줄로 세워놓고, 뒤에서 다발총으로 무자비하게 사살했다고 전해 들었다. 유엔군이 인천상륙을 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퇴각하면서 인민군에 협력한 지방 빨갱이들에게 보복할까 봐 자행한 만행이라고 했다.
전쟁은 군인들만 싸우다 죽고 사는 게 아니다. 필자가 보고 들은 것처럼 민간인 피해도 적지 않다. 남과 북은 이념의 분단으로 적이 되어 생사를 가르는 전쟁을 치렀다. 6,25 전쟁으로 남한이 100여만 명, 북한이 200여만 명의 국민이 희생됐다는 추정치 통계다. 6,25 전쟁은 두 번 다시 있어서는 안 될 역사적 교훈을 남겼다. 그럼에도 김정은은 3대를 이어 무력통일 야심을 버리지 못하고 다양한 전쟁무기와 미사알 개발, 핵 실험으로 우리를 위협하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국민들은 단합된 힘을 모아 철저한 안보태세를 대비해야 하는데 '좌파' '우파'로 갈라져 이재명 같은 좌파 정부가 들어서서 중국에는 쎼쎼(고 맙 다는 뜻)하고, 북한에는 "김일성, 김정일 선대들의 공을 폄훼해서는 안된다"는 종중, 종북주의자 이재명이 '미군은 점령군'이다. '전시작전권'반환을 요구하며, 한, 미간에 마찰을 일으키며, 우리 군 전력까지 약화시켜 안보를 무력화하고 있다.
전시작전권은 왜 미군에 넘겼나?
한국은 유엔에 가입이 안돼 유엔군에 편입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한국군은 유엔군에 지원하는 전략무기와 보급품 등을 비롯해 한국군과 유엔군이 지휘권의 이원화로 각자가 독자적으로 전쟁을 치러야 할 상황이었다. 그래서 전쟁수행 일원화를 위해 이승만 대통령이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에게 전시작전권을 넘겨준 것이다. 전작권을 넘겨받은 맥아더사령관은 "각하 한국군을 지휘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전쟁은 오직 승리가 답입니다"라고 화답했다 전쟁의 승패는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갖은 미국이 책임지는 일이었다. 이보다 더 안전한 안보가 어디 있나?
그럼에도 전시작전권 반환이나 미군철수를 주장하는 자들은 빨갱이들로 군 전력 무력화로 안보를 위태롭게 하는 김정은 정권의 첩자들이다. 미국은 일제치하에서 조선을 해방시켰고, 신생국가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탄생시켰다. 6,25 전쟁 때는 공산침략을 막아냈다. 오늘날 군사력 세계 6위, 경제력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 된 것은 우리 국민들의 노력이지만 주한 미군이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전쟁을 치르고도 미군이 주둔한 나라 한국, 일본, 독일은 자유민주주의와 경제적 풍요를 누리며 잘 사는 나라가 되었다.
하지만 60 연대 아세아에서 두 번째로 잘살았던 필리핀은 왕정을 무너뜨리고, 좌파 마르코스가 정권을 잡고 수빅만에 주둔한 미군을 철수시킨 후 지금은 여성들이 외국 가정부로 수출하는 가난한 나라가 되었다. 우리나라에 장충체육관을 지어줄 만큼 잘살았던 필리핀이 한국에도 가정부를 수출하고 있다. 미군철수를 주장하는 좌파세력을 옹호하는 이재명정권을 퇴출시키지 않으면 우리나라도 제2의 필리핀이나 베네쉐엘라, 아르헨티나처럼 추락할 수도 있음을 국민들은 상기해야 한다.
[참고] 이승만 대통령과 맥아더장군의 인연
이승만이 미국 프린스턴대학교에서 국제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은 후 조선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이때 미국에는 이승만을 후원하는 기독교 단체가 조직되었다, 후원단체 한 분의 초대를 받고 집으로 방문했다. 이때 젊은 장교가 들어왔다. 이승만 박사에게 우리 사위라고 소개를 했다. 당시 맥아더는 초급장교였다. 이승만박사는 장래가 촉망되는 맥아더와 오랜 세월 교분을 쌓아왔다.
이승만박사는 유럽, 러시아 등을 여행하면서 "동양평화를 위해서는 일본으로부터 조선을 독립시켜야 한다"는 연설이나 언론 인터뷰로 국제여론을 환기시켰다. 외국에 여행할 때마다 국적이 없어 비자발급을 받을 수가 없었다. 그때마다. 미국대학 친구들의 도움으로 비공식비자를 발급받았다. 외무성이 국적을 취득하라면 나라가 망했는데 무슨 국적이냐며 귀국할 때까지 40여 년을 무국적자로 미국생활을 했다.
해방이 되어 귀국하려 해도 국적이 없어 비자발급을 받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일본에 있는 맥아더장군에게 연락을 했다. 맥아더 사령관은 전용기를 보내 귀국시켰을 만큼 각별한 사이었다고 한다. 그 후 이승만 박사는 대한민국 대통령이 되어 6,25 전쟁을 치러야 했고 맥아더장군은 한국전쟁을 승리로 이끌어야 하는 유엔군사령관으로 다시 만나게 됐다. 맥아더장군이 한국에 대한 애착은 이승만 대통령과의 개인적 인간 관계도 영향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