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가 함평을 떠난 이 후,
가끔 씩 전화가 걸려 왔지만 자기 번호는 알려주지 않은 채
동생 네 안부와 더불어 다른 일은 없느냐고 묻는 안부 전화였다.
혹시 우리가 자기 동생으로부터
무슨 서운한 소리라도 안 들었나 걱정돼서 전화를 하신 모양이었다.
할머니 걱정처럼 동생 네는 우리와 마주친 적이 없었고
달리 남을 통해서 들리는 소문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봄 날,
아내와 함께 우연히 감매 마을을 지나쳐 오는데
할머니네 동생이 아내와 함께 길가에서 차를 기다리고 서있었다.
그래서 나는 차를 세우고 어디 가실 거냐며 타라고 했다.
"돌포리를 가려고 하는데 차가 안 오네요"
얼마간 같은 마을에 살았으니 굳이 할머니가 아니더라도 얼굴은 아는 터,
서로 반갑게 인사를 한 후 차에 두 분을 모셨다.
두 분은 이제 막 딴 싱싱한 딸기를 두 박스 들고 타셨다.
하우스 농사를 지어서 처음 딴 첫 물이라고 했다.
돌포리는 우리 집보다 좀 더 먼 마을이라서 일부러 더 돌아가야 했는데도
그들은 딸기 하나 먹어 보라는 소리도 하지 않고 그냥 차에서 내렸다.
"우리 애들 있는 줄 뻔히 알면서 어떻게 저럴 수 있어요?
돈을 주고 사가는 것도 아니고 자기들이 농사를 지었다면서요"
아내의 서운함은 나보다 훨씬 컸다.
"생각을 못했겠지.
자기들에게 너무 흔한 거니까 남들도 그렇게 생각할 거라고 생각할 수 있어
설마 달래면 안 줬겠어?"
그렇게 말은 했지만 왠지 두 분의 태도에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었다.
그리고 더 많은 세월이 흘러서
두 딸이 서울에 가 있어서 우리 역시 더 이상 함평에서 살 까닭이 없어 졌을 때
그 때까지도 할머니는 가끔 씩 전화를 해서 우리의 안부를 물었다.
"할머니, 우리도 어쩌면 서울 쪽으로 이사를 가게 될지 모르겠어요"
그렇게 이야기했을 때, 할머니는 거의 울음 섞인 목소리로
"그러면 내 집까지 좀 알아 봐 주오.
나 원선이 아빠에게 한 푼도 피해 안 입힐 거요.
나 입고 먹을 것 충분히 있는 사람이니까
혹시 집을 지으면 내 방도 하나 들여 줘요.
나 정말 원선이네랑 함께 살고 싶어서 그래요.
제발 부탁이에요"
절박하리 만큼 간절하게 거듭 부탁을 하셨다.
"그래요. 우리 식구들도 할머니랑 함께 살기를 원해요.
집을 지으면 꼭 할머니 걸로 이쁘게 방 하나 더 들여서 오시라고 할게요"
그렇게 위로를 드리는 걸로 전화를 끊었다.
그래서 우리의 미래 설계에는 늘 할머니가 계셨다
그런 대화가 있은 후에는 좀 더 빈번하게 통화가 되었고
어디를 가든 할머니와 함께 사는 것은 규정 사실이 되었다.
할머니 생각으로는 남동생이 있는 함평만 아니라면
억지를 써서라도 우리와 함께 살고 싶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얼마 후,
할머니의 마지막 전화가 걸려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