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단편 한구절♥
조선의 제1왕궁은 경복궁이었다. 정도전이 설계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후 왕자의 난이 일어나고, 태종 이방원이 거기서 자기 형제와 중신들을 너무 많이 죽이다 보니, (거의 백정 수준) 한양으로 들어가기도 꺼려했고 경복궁 들어가기도 싫어했다. 그래서 이방원은 제2궁인 창덕궁을 신축하게 되었다.
즉 조선은 경복궁+창덕궁 2궁 체제로 간 것이었다.
이후 성종때, 대비가 3명이나 되어 창덕궁이 그들을 모두 모시기 비좁다 해서 하나를 더 지어 창경궁이라 불렀다.
창경궁 창덕궁은 서로 연결돼 있는 구조였다.
그리고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선조가 피란갔다 돌아오니 궁이 싹 다 타버렸다.
왕이 잘 곳조차 없었다.
아쉬운 대로 월산대군(성종의 형)의 집을 궁궐로 개조해서 선조는 거기 머무르며 경운궁이라 불렀다.
그러면서 정식 궁궐을 짓기 위해 창덕궁을 보수공사 착수했지만 전란의 후유증이 크니 빠르게 진척되지 못했다.
실제 창덕궁 완공은 광해 2년차때가 되서야 이뤄졌다.
광해는 마땅히 이제 창덕궁에 들어가는 것으로 온 나라 사람들이 다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광해가 자기 들어갈 창덕궁을 둘러보며 하는 소리가 희한했다.
"여기 사방에 기운이 다 막혀 있네. 가슴이 답답하다.
내가 신병이 있어서 이렇게 기운이 막힌 곳에 있으면 안 돼.
기운이 틔어져 있는 곳으로 가야 하는데..."
이러면서 벼란간 기껏 지어놓은 창덕궁을 냅두고 새 궁궐, 창경궁을 신축하자고 떼를 쓴다.
뭐 인목대비도 모실 겸 원래 있던 궁을 되살리자는 뜻이라면 대신들도 거기까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근데 생각해 보면 광해의 말이 이상하지 않는가?
국가 예산을 집중 투입해 경제가 휘청할 정도로 돈을 들려 간신히 올린 건물을 두고 "여기 기운이 막혀서 나 저기 못 들어가, 딴 거 지어 줘."라니?
아니나 다를까 전란 때에는 그토록 총명했던 광해가 이후 행동거지가 너무 이상해졌다.
그 이유는 한마디로 음양술과 미신에 심취한 탓이었다.
그는 궁궐에 풍수가들과 점쟁이들을 불러들여 그들과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다.
풍수가 이의신이란 자는 이렇게 말했다 ; 한양은 땅의 기운이 쇠퇴했다. 교하라는 곳으로 천도를 하자. 라고.
당연히 신하들은 난리가 났다.
지금 북방 안보도 불안정하고 국내적으로 경제도 어려운데 천도 라니? 말도 안 된다.
게다가 그런 걸 풍수지리 명당 자리 그런 거 갖고 가는 게 될 일인가.
광해가 마지못해 취소하는 것같았다.
근데 연이어 풍수가 시문용이라는 자가 왕에게 고한다 ; 인왕산 인근에 왕의 기운이 자라고 있다.
거기에 대궐을 짓자.
안 그러면 큰 화를 받는다.
이 말에 광해는 진짜 인왕산 자락에 인경궁을 신축하겠다고 선포한다. 신하들은 황당해 하면서도 왕명을 두 번씩이나 막지는 못했다.
곧 대규모 공사가 시작된다.
이게 끝이 아니다.
풍수가 김일룡은 정원군의 집 (인조의 아버지)에 왕의 기운이 자라고 있다고 고했다.
이걸 듣자 광해는 정원군의 집을 뺏어서 경덕궁을 짓겠다 하였다.
8년차때 또 풍수가들 얘길 듣고 자수궁을 짓겠다며 그거마저 착공한다 ...
광해는 왜 그렇게 토목공사에 집착했을까?
많은 사람들은 광해가 대동법 등을 시행한 성군이었는데 당파 싸움에 희생된 것처럼 생각하지만 실상은 그렇게 보긴 매우 어렵다.
4개나 되는 왕궁 건축 공사의 명목은 왕권의 강화였지만, 속마음은 그게 아니었다.
전부 풍수가와 점쟁이들 말을 믿은 탓이다.
그는 서얼 출신으로 아버지인 선조의 미움을 받으면서 늘 폐서자당할 위기 속에서 자라났기 때문에 심리적으로 굉장한 트라우마를 갖고 있었다.
그게 편집증적인 자기 자리에 대한 집착으로 남았다.
누군가 역모를 꽤한다는 소리가 들리면 툭하면 대규모 옥사를 일으켰다. 그리고 점쟁이들 말을 듣고 어디서든 "왕기가 자란다"는 소리만 들으면 궁궐을 짓겠다고 날뛴 것이다.
문제는 궁궐 신축 공사는 국가 경제를 흔들 정도로 큰 공사였단 점이다. 광해가 추진한 궁 하나 하나의 사이즈가 경복궁보다 더 컸다.
그걸 4개를 한꺼번에 진행했다.
물론 이런 토목공사 중간에서 이권에 개입, 폭리를 취한 이들도 많았었다.
당시의 국가예산이 여러 사료를 찾아 어림잡으면 쌀로 계산할 때 36만석이었다 한다.
이 중 10만석을 궁궐건축에 투입한 것이다.
25% 가까운 엄청난 예산을 꼴아박은 것이다.
MB시절 사대강 사업이 국가예산의 7%를 기울인 것이었다.
그거하고 비교해 보면 아예 넘사벽 토목 공사였다.
그걸로도 조달이 안 되니 공명첩을 발행하고 공사비를 내는 자들에게 관직을 주게 되었다.
광해 10년. 후금이 발호하여 무순을 점령하고 명에 선전 포고를 한다.
명이 조선에 지원병을 요청하고 광해는 미적거렸지만 결국 파병을 결정한다.
곧 군부에서 상소가 올라온다.
전쟁과 토목 공사는 동시에 추진할 수 없으니, 궁궐 공사를 중지시키거나 축소시키라는 것이었다.
너무나 당연한 요구였다.
그런데 광해는 이런 상소도 묵살한다.
강홍립 부대가 요동에 파병 나갔다. 돈은 공사에 다 쓰고 있으니, 군대가 제대로 준비를 갖춰 나갔을 리 없다. 명의 주력 대군은 일찌감치 대패하였고, 조선군도 1만3천명 병력 중 2/3가 순식간에 죽었다.
도망쳐 돌아온 사람은 극소수였다. 강홍립 부대는 결국 누르하치군에 항복하였는데, 중요한 것은 이 부대가 제대로 싸울 상황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전쟁이란 국가 재정을 다 갖다 부어도 밑빠진 독처럼 돈이 없어지는 일이다. 이 판국에 왕은 군량 운송할 생각은 않고 경북궁 x10 사이즈의 궁궐을 짓느라 벌목을 하고 포를 거두고 백성을 죄다 토목 공사에 징발하고 있었다.
광해의 측근엔 점쟁이 복동이란 자가 있었다. 그냥 무당이었다.
광해는 이 점쟁이 말을 어찌나 믿었는지, 국사를 결정하는 때에도 틈만 나면 불러서 물어봤다 한다. 하물며 중국에서 사신이 오는데 그 칙서받는 날까지 점쟁이한테 받았다. 중국 사신들은 물론 길길이 뛰었다. 아니 사신이 오면 바로 칙서를 받아야지 뭐 무슨 날을 잡아서 받겠다고 하느냐고. 화내는 건 당연했다.
외교상 실례였기 때문이다.
광해는 이런 사신들에게 뒷돈을 줘서 무마시켰다.
이후 이게 소문이 나자 조선으로 오는 중국 사신들은 모두 이 뒷돈을 으례히 받아가는 것으로 생각하게 되어 버렸다.
글로벌 호구가 된 것이다.
근데 점쟁이 복동이조차 약과였다. 진짜 비선실세는 그 유명한 김상궁, 김개시였다.
사실 그의 이름은 김개똥이었다.
원래 신분이 비천한 여자였다. (하필 김씨.....) 김개시는 중전을 모시는 상궁이었다.
외모는 별로였으나, 머리가 좋고 말빨이 굉장했다고 한다.
왕에게 붙어서 이부자리에서 속닥거리는 송사가 장난이 아니었다. 김상궁이 뭐라고 하면 왕이 전부 다 믿으니 조선의 국정은 이후 김상궁 김개시가 좌지우지하는 것이 되어 버렸다.
사실 인조 반정에 대한 정보는 일찍부터 들어왔었다.
그런데 김개시가 이걸 중간에서 다 왜곡하고 틀어버린다.
광해는 김개시의 말을 듣고 정보부에서 들어오는 역모에 대해 개 무시해 버린다.
역모뿐 아니라, 국정의 거의 모든 상황에 대해 임금이 정세를 오판하게 만든 게 김개시였다 해도 과언 아니다.
광해는 원래 총명한 왕재였다.
머리도 비상하고, 국가를 생각하는 충정도 있었음은 일찌감치 증명되었단 바 있다.
임진왜란때 국경을 넘어 도망갈 생각이나 했던 자기 아버지와는 달리, 분조하여 함경도 등지에서 직접 말을 타고 관군과 의병들의 조율하고 7년이나 끈 전란을 극복하는 구심 역할을 18세라는 젊은 나이에 해냈었다.
온 백성이 광해를 우러러보고 신하들은 존경하였다.
그런 광해가 온갖 우여곡절 끝에 왕권을 잡게 되자, 중신들을 믿지 않고 음양술과 미신에 빠져 국정을 오판하여 수없이 많은 실정을 저지르게 된다. 그리고 이런 잘못된 믿음 속에 멀쩡한 궁궐을 놔두고 신축을 한다며 대규모 토목공사를 일으켜 국정을 거덜내고 눈앞의 전쟁조차 대비하지 않았다.
인조 반정이 일어난 날, 아들인 영창대군을 죽인 광해가 드디어 죽는 날이 왔다며 인목대비는 갇힌 방 안에서 뛰쳐나온다.
그녀는 반정군에게 피를 토하듯 이렇게 말했다.
"오늘을 보기 위해 내 지금껏 모진 삶을 감당하며 살아 왔다.
당장 광해의 머리를 잘라 와라.
내가 그놈을 자근자근 씹어서 먹을 것이다."
그러나 반정군은 대비에게 이렇게 아뢴다.
"왕을 폐위는 시키돼 시해는 하지 않습니다."
광해는 15년을 재위하고. 강화도에서 제주도로 18년 유배 생활을 한 끝에 쓸쓸히 죽었다.
그의 아들과 부인은 자결했다.
점술과 풍수, 토목공사, 그리고 비선 실세에 빠져 국운을 기울게 하고 자기 인생마저 망친, 아까운 인재의 최후였다.
(김영준의 "조선왕조실록 강좌"를 참조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