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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솔 경운아방

5일장 이야기ㅡ성남 모란 민속장 ㅡ전통시장으로 전국 ㅡ최대 규모의 5일장이다ㅡ조선시대의 오일장 ㅡ시장은 시끄러워야 시장통이다ㅡ

작성자청 솔|작성시간22.02.14|조회수2,675 목록 댓글 0

모란 민속장 牡丹民俗場 

경기도 성남시 중원구 성남동에 있는

전통시장으로 전국 최대 규모의 5일장이다.

매달 끝자리가 4일·9일인 날

(4·9·14·19·24·29일)에 장이 열리고,

장날이면 서울·인천 등지의 수도권에서

최대 10만 명이 몰려드는 성남시의 

관광 명소이기도 하다.

한국전쟁 이후,

경기도 광주군에 속하였던 성남

지역에 북쪽에서 월남한 피난민이

대거 이주하여 인구가 급격히

증가함에 따라 곳곳에 시장이

개설되기 시작하였다.

1960년대 초반에 육군 예비역

대령인 김창숙이 다른 제대

군인들과 함께 이 지역의

황무지를 개간하여 정착하였고,

주민들의 생필품 조달과

상업 활동을 위하여 5일장이

열린 것이 모란민속장의 시작이다.

'모란'이라는 명칭은 김창숙의

고향인 평양의 모란봉에서

따온 것이라고 전한다.

1960년대에는 지금의 수정구

수진동에 있던 모란예식장

주변을 중심으로 형성되었으며,

1970년대에 서울의 도시 재개발로

인하여 성남시에 많은 인구가

유입되면서 성남시외버스터미널과

성남대로변에서 넓게 형성되었다.

1974년에는 상설 모란시장

(지금의 모란종합시장)이

개설되었으며,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수도권에서

드물게 서는 5일장을 보러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명물시장으로 번성하였다.

이에 기존의 장터가 비좁아지자

1990년 9월 24일부터 대원천하류의

복개지로 이전하여 5일장이 섰고,

장이 서지 않는 날에는

주차장으로 이용되었다.

재래시장이 쇠락하는 시대의 변화

속에서도 전통성과 고유성을 유지

하면서 전국 최대 규모의 민속시장으로

번성하여 장터가 협소해짐에 따라

2014년부터 이전 사업이 추진되었다.

총 630억 원의 사업비를 투입하여

기존 장터 바로 옆에 위치한 여수

공공주택지구 내 공영주차장을

건설하여 새 장터를 마련하였고,

2018년 2월 24일부터 이곳으로

이전하여 5일장이 서고 있다.

장터 면적은 2만 2575㎡로

종전(1만 375㎡)보다 2배

이상 커졌다.

종전 장터에는 없던 상하수도

및 전기 시설이 설비되었고,

다목적지원센터

(지하 1층, 지상 2층)와

고객 화장실, 공연장, 휴게 공간,

야간 조명탑 등의 시설을 갖추었다.

장터는 크게 진입부(할머니 장터)와

농수산품, 공산품, 음식류의 4개

구역으로 나누어 운영되며,

이전 장터와 마찬가지로 장이

서지 않는 날에는 공영주차장

으로 이용된다.

취급 품목은 화훼·양곡·약초·

의류·잡화·생선·야채·음식 등과

그밖에 일생생활에 필요한

다양한 물품들이다.

과거에는 식용견과 고추의

매출이 가장 높아 매달 끝자리가

3일, 8일로끝나는 날에 따로

도매장을 열기도 하였다 

고추의 경우, 모란장의

고추 시세가 수도권의 고추

시세를 좌우할 정도였으며,

식용견의 경우는 전국 개고기

유통의 30% 비중을 차지하였다.

하지만 동물학대 논란으로 인하여

식용견을 비롯한 가금류를 취급하는

가축시장은 모란민속장에서 분리되었다.

경기도 성남시 중원구 둔촌대로

68(성남동 4931)에 위치하며,

지하철 8호선 모란역과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의

성남 나들목을 이용하여

접근하기 편리하다.

대원천 복개지의 옛 장터와

인접하여 상설 모란종합

시장이 있으며,

주변 명소로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남한산성을 비롯하여 경기도

유형문화재(101호)로 지정된

대명광전이 있는 봉국사,

율동자연공원, 분당 공원,

신구대학식물원 등이 있다.

오일장(五日場)은

닷새마다 서는 시장이다.

한국 역사에서 근대의 상설

시장이 들어서기 전에 형성된

상거래 장소였다. 

조선 전기 무렵에는 보름,

열흘, 닷새, 사흘 등 지역마다

장이 서는 간격이

일정하지 않았으나,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

오일장이 일반적인 형태로

자리잡았다.

 영조시기 저술된 《동국문헌비고》

에서는 1770년대 당시의 전국 장시의

수를 1,064개로 헤아리고 있고,

19세기의 《만기요람》에서는

1,057개로 파악하고 있다.

오늘날에도 지방 곳곳에서

오일장이 운영중이다.

김동리의 소설 《역마》의

배경이 된 화개장터

《메밀꽃 필무렵》의 배경이

된 봉평장 등이 유명하다.

하회마을에서는 오일장이 열리던

저잣거리의 집으로 박정숙

가옥을 보존하고 있다.

조선은 초기부터 상업을 국가의

통제하에 두는 정책을 취해왔다.

서울의 육의전과 지방의 시전은

모두 관아의 허가 아래 독점적인

상권을 가지고 있었으며,

일반인들이 사사로이 거래하는

이른바 난전(難廛)을 금지하였다.

육의전과 시전이 갖는 금난전권은

18세기 신해통공이후에야

해지되었다.

그러나, 여러 이유로 일반인들의

거래는 조선 초부터 시장을

형성하여 왔다.

1470년 흉년을 맞은 전라도

백성들이 시포를 열고 서로

필요한 물품을

교환하였다는 것이

《조선 왕조실록》에서 시장

거래를 처음 기록한 기사이다.

이후 나주와 무안등에 장시가

형성되자 1473년 신숙주는 장시의

발달이 물가 상승을 부추킨다는

이유로 억제를 주장하였는데,

당시 시장은 한달에

두번꼴로 열렸다고 한다.

조선은 이렇게 시장을 국가의

통제하에 두고 억제하는

정책을 취해왔지만,

반복되는 흉년과 방나의 폐단

등으로 점차 장시의 형성을

묵인하게 되었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 송파장,

양주장, 칠패장과 같이 도성 근교에

커다란 물품 집결지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들은 도성안의 시전 상인들과

달리 금난전권이 없었으므로,

대규모 상단을 조직하여 경쟁력을

키우고 송파 산대놀이나 양주

별산놀이와 같은 볼거리를

제공하며 사람들을 끌어모았다.[

오일장은 인근 여러 지역이

날을 달리하며 열렸고,

장에서 장사이의 거리는

보통 걸어서 하루 정도였다.

보부상들은 이를 이용하여

장터를 돌며 물품을 팔았다.

장터에는 좌판을 열 공간 이외에도

숙식을 해결할 수 있는 주막과

같은 공간이 있었고,

장꾼들이 간단히 끼니를 해결하기

위해 국밥과 같은 음식이

생겨나게 되었다.

보부상은 봇짐장수와

등짐장수를 아울러 부르는 말로,

봇짐장수는 값이 비싸고 들고

다니기 쉬운 방물과 같은 물건을

팔았고 등짐장수는 소금, 미역,

생선과 같이 무게가 나가는

물품을 팔았다.

이러한 보부상을 장터와 장터를

오가며 산다고 하여 장돌뱅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상설시장의 등장과 각종 상업의

발달로 대도시에서 오일장은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그러나, 전국 각지에서

여전히 오일장이 열린다

모란 민속 5일장 

품바 노래 공연 

모란 골목시장 

 

봉평 축제ㅡ
김 보경 가수ㅡ

https://m.cafe.daum.net/rnqdmsekfl/UnJR/389?svc=cafeapp

 

 

 

하회마을 단오회 ㅡ
행사장 영상 입니다ㅡ


https://m.cafe.daum.net/rnqdmsekfl/VeFx/3327?svc=cafeapp

지중해ㅡ
박상원 노래ㅡ

주문진ㅡ
어시장 이네요 


http://m.cafe.daum.net/rnqdmsekfl/VdLV/50?svc=cafeapp

 

 

여자 이소룡

시장통의 야채 장수 자매
동네 불량배들

역이어 신나게 허벌나게
얻어 터지는 불량배들

영상이 끝나도
기다리면 연결 되

재미 있는 영상
즐감하세요

 

 

 

DOUbIe더블ㅡ

김 건모 노래ㅡ

난타 공연ㅡ
산행 하는 경운아ㅡ

https://m.cafe.daum.net/rnqdmsekfl/VeFx/312?svc=cafeapp

 

 

지리산국립공원ㅡ
화대종주 능선길 2박3일ㅡ

성삼재 천황봉1915m 대원사ㅡ
반야봉 1732m 뱀사골 산행ㅡ


무냉기 화엄사 ㅡ
피아골 단풍산행 ㅡ

https://m.cafe.daum.net/rnqdmsekfl/VdLU/34?svc=cafea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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