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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교 산행일기

한양 삼십리 누리길 ㅡ남한산성 남문 ㅡ검단산 524mㅡ한양 누리길 ㅡ검복리 ㅡ불당리ㅡ오전리 직거래 장터 산행ㅡ

작성자임 경운|작성시간22.04.07|조회수411 목록 댓글 0

한양 삼십리 누리길 

남한산성 남문 

 

검단산 정상 524m 

검복리 버스정류장 

불당리 버스정류장 

오전리 직거래 장터 

 

목현회1동 마을회관 

약 12km 삼십리길 

남한산성 지화문

[ 南漢山城至和門 ]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에 있는 남한산성의

남문(南門)이다.

남한산성 서남쪽

해발 370m 지점에 있다.

선조 때 남문·동문 등을 수축(修築)

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아

그 이전부터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남한산성의 사대문 중 가장 크고

웅장하며 병자호란으로 인조가

산성으로 피신할 때 이 문을 통과하였다.

정조 3년(1779년) 성곽을 개축

하면서부터 지화문이라 불렀다.

 성문은 홍예문으로,

높이 4.75m·폭 3.35m·

길이 8.6m이며 홍예기석 위에

17개의 홍예석을 쌓아 만들었다.

홍예문 좌우 성벽은 자연석을 수평줄에

맞춰 막돌 쌓기로 축조한 것이다.

1976년 복원된 문루는

정면 3칸·측면 3칸 규모이다.

검단산 黔丹山 523.9m

 

 경기도 성남시와 광주시의

경계를 이루는 산으로 남한산성과

연결되는 산줄기를 이룬다.

태백산맥의 철령(鐵嶺) 부근에서

분기하여 서울 부근에 이르는

광주산맥의 지맥으로서

남한산성과

연결되는 산줄기를 이루며,

높이는 534.7m이다.

경기도 성남시 동쪽으로

광주시와 경계를 이루며,

 

전체적으로 '凹(요)' 자

모양의 산지를 형성한다.

이 산을 중심으로 하는 성남시의

동쪽 산지는 남쪽으로 갈수록

 

해발고도가 낮아지며 완만한

사면이 발달해 있다.

이러한 지형조건 때문에 성남을

계획도시로 조성할 때 태흥동·신흥동·

 

단대동·금광동·상대원동·중동·성남동·

수진동 등의 시가지가 입지했고,

이후 분당구 신도시도 모두

탄천과 동쪽 산지에 조성되었다.

산 정상은 면적이 넓지는 않지만

평탄하여 헬리콥터 이착륙장이

건설되어 있으며,

남한산성부터 등산로와

작업용 도로가 이어져 있다.

이밖에 정상부에는 케이티(KT)

중계소와 공군 통신부대가 위치해 있다.

경기도 하남시에도 높이 657m인

같은 이름의 산이 있다.

한양 삼십리 누리길이란?

한양삼십리길은 조선시대 선비들이

한양으로 과거시험을 보러가던 옛 길로,

광주시 목현동에서 남한산성 방향

산길을 따라 올라가면 오전리와

불당리, 검복리를 거쳐 산성리까지 이르며,

이 길이 약 30리(12km)에 이른다.

 

광주시 목현동에서 남한산성면

산성리까지 총 4개의 구간

12㎞(30리)에 이른다.

1구간 목현동∼오전리 구간

(3.37㎞)은 목현동 한옥마을에서

남한산성 오전리를 연결하는

아름다운 역사탐방 길이다.

이 구간은 임오군란 당시 여주로

피신하던 명성황후가 1박 했다고

전해지는 새오고개,

오전리 마을의

전경 등을 즐길 수 있고,

 

오전리 농산물 판매장

이용도 가능하다.

2구간 오전리∼불당리 구간

(2.44㎞)은 합격기원 특별구간으로

아들의 합격을 기원하던 어머니의

이야기가 전해지는 합격바위

(몽돌바위)와 낙방을 거듭하던

선비가 심어놓은 다섯 그루 소원나무,

고인돌과 연자방아를 볼 수 있다.

3구간 불당리∼검복리 구간

(2.67㎞)은 마을 길이 아름다운

산책코스로 족두리 바위,

불당리 장승, 도자기

풍경소리길이 있다.

4구간 마지막 검복리∼산성리 구간

(3.52㎞)은 남한산성을 밖에서

조망하며 걷는 길로 철쭉군락지와

서흔남이 놀았던 매형상의

매바위가 주요 볼거리다.

  

명성황후 피난지

 明成皇后避難地 

명성황후가 임오군란을 피해

몸을 숨긴 곳으로 충청북도

충주시 노은면 가신리에 있다.

조선시대 고종의 황후인

명성황후(明成皇后 1851~1895)는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 때

궁궐을 탈출해 경기도 광주와

여주 그리고 충청도 충주 등지에서

51일 동안 피신해 있었다.

당시 명성황후는 현재의

충청북도 충주시 노은면

가신리 558번지에 있었던

이음성이라는 이의 집에

잠시 은거하였다고 한다.

현재 그 자리에는 신축가옥이

들어서 있는데 마을에서는

이곳을 예로부터 ‘이음성집’

또는 ‘대궐터’라고 불렀다.

집 주변에 남아 있는 주춧돌

10여 개가 간이행궁을 짓기

위한 것이었다 하나

정확히 밝혀진 바는 없다.

마을 뒤쪽의 산은 원래 금방산

(金傍山)이라 하였는데

명성황후가 매일 산마루에 올라

한양 쪽을 바라보며 좋은 소식을

기다렸다 하여

국망산(國望山)

이라 부르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2008년 9월 6일 마을에

명성황후피난유허비

(明成皇后避難遺墟碑)

가 건립되었다.

화강석으로 만든 이 비석은 높이

4.46m, 폭 1.5m 규모로,

명성황후의 피난과정과

유허비 건립경위 등이 적혀 있다.

명성황후는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에 반대하였다.

때문에 정권을 다지고 일본과

수교하였으나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이 일어나 다시

청나라의 도움을 받았다.

러시아의 힘을 빌림으로써 일본

세력을 추방하려하자 일본

낭인에 의해 살해되었다.

이를 을미사변이라 한다.

참혹히 살해당한 명성황후의

시신은 근처의 숲속으로 옮겨

장작더미 위에 올려 놓고

석유를 부어 불태워 버렸다.

그런데 사건의 배후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이견이 분분하다.

명성황후는 생전 1879년(고종 16)

계룡면 양화리에 위치한 신원사

내에 중악단을 다시 건립하였는데,

이는 1394년(태조 3) 이성계가

창건한 것으로 신원사의 산신각이었다.

1651년(효종 2)에 폐지되었는데

구국과 국태민안을 염원하던

명성황후가

계룡산 산신에게 제를 올리며

기원하기 위해 재건하였고

세차례에 걸쳐 기거해

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명성황후는 궁궐양식

그대로 축소해 건립하고

산신도(山神圖)도 모셨다.

명성황후는 조선 후기

제26대 고종의왕비이다.

청나라와 일본의 간섭으로 인한

정변이 거듭되는 혼란스러운

시기를 살았다.

1895년 일본에 의해

경복궁에서 시해되었다.

명성황후가 남긴 다수의 한글 편지는

역사적 · 미술사적으로 의미가 있다.

 

 

 

 

 

 

 

남한산성 영화 ㅡ

병자호란 치옥의 삼전도 

https://youtu.be/Qt67Vgl3lsY

 

 

 

기우제ㅡ
인조때 큰가뭄ㅡ

하눌이 감동을 하였는가요ㅡ
하늘에 먹구름이 몰려 오더니 ㅡ

굵은 빗방울의 소나기가 ㅡ
내리기 시작 했습니다.ㅡ


https://m.cafe.daum.net/rnqdmsekfl/VQoX/1571?svc=cafeapp

 

 

 

영장산 정상 ㅡ
조선 시대의 유적과 망경암 ㅡ

성남 누비길 제1구간 ㅡ
영장산 마실길 ㅡ

약진로 등산 육교 ㅡ
산성역 남한산성 입구역 ㅡ

https://m.cafe.daum.net/wkwl/YC3O/55?svc=cafeapp

 

 

 

그여인ㅡ
유상록 노래ㅡ

남한산성 텃새ㅡ
딱따구리ㅡ

곤줄박이 쇠박새ㅡ
직바구리 비둘기 ㅡ

https://m.cafe.daum.net/wkwl/YCXj/126?svc=cafea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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