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천 낙안읍성 ㅡ 전라남도 순천시 낙안면 남대리 ㅡ낙안읍성 일대에 있는민속마을 ㅡ사적 제302호이다ㅡ 임 경업 장군이 ㅡ 낙안군수로

작성자청 솔|작성시간22.02.28|조회수1,224 목록 댓글 0

순천 낙안읍성

順天 樂安邑城 

 

전라남도 순천시 낙안면 남대리

낙안읍성 일대에 있는 민속마을.

사적 제302호이다.

넓은 평야지대에 쌓은 총길이

1,420m, 높이 4m, 너비 3~4m의

네모형 석성으로 1~2m 크기의

정사각형 자연석을 이용하여

견고하게 쌓아 끊어진

곳이 없이 웅장하다.

1397년(태조 6) 일본군이

침입하자 김빈길이 의병을

일으켜 처음 토성을 쌓았고,

 1626년(인조 4) 임 경업 장군이

낙안군수로 부임했을 때 현재의

석성으로 중수하였다. 

동내, 서내, 남내 등 3개

마을을 둘러싸고 있다.

마을은 옛 모습 그대로를

지키고 있는 전통마을로

108세대가 실제로 생활하고 있어

남부지방 특유의 주거양식을

볼 수 있으며 부엌,토방 툇마루

등이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다.

 가옥 9동(중요민속자료 92~100)과

임경업군수비각(전남문화재자료 47),

 객사(전남유형문화재 170),

노거수 은행나무(전남기념물 133)

등의 문화재가 있고,

 

당시 관아였던 관청 건물들이 있다.

매년 정월 대보름에 장군

임경업의 비각에서 제를 올리고

 

널뛰기, 그네타기, 성곽돌기

등 민속행사가 열린다. 

5월에는 낙안민속문화축제,

10월에 남도음식축제가 열린다.

 주변에 조계산 도립공원,

선암사, 송광사, 동화사,

제석산, 고인돌공원,

 주암호 등의 관광지가 있다

. 1983년 6월 14일 사적

제302호로 지정되었다.

낙안읍성마을

 

노릇한 초가지붕과 사립문,

정겨운 돌담과 고샅,

 

시렁에 매달린 메주와 마루

한끝에 놓인 늙은 호박, 

동틀녘에는 닭이 울고 저녁

해거름에는 굴뚝에서 밥 짓는

 

연기가 붉은 노을 속으로

피어오르는 마을

 1960년대 근대화라는 명목으로

초가지붕이 슬레이트나 양기와로

 

교체되기 전만 해도 우리는

아주 오래도록 그렇게 살았다.

 50년도 채 지나지 않은 시절의

일인데도 그런 마을은 아득한

기억의저편에만 그리움으로 묻혀 있다. 

그러나 낙안(樂安)에 가면

그런 마을을 실제로 만날 수 있다.

낙안의 기록은

마한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니까 낙안은 1,5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백제 때에는

파지성(波知城)이라 불렸고,

 

고려 태조 23년(940)에

비로소 낙안(樂安)이라 불렸다.

 조선시대에는 주변의

여러 고을을 관장한 행정

중심지이자 남해안을 지키는

군사요지로 번화했지만 1910년

일제의 행정개편으로 폐지되어

순천군에 편입되었다. 

그후 주변의 편리한 도로교통을

따라 새로운 도시들이 성장하면서

낙안은 중심지 기능을 잃고 말았다.

그런 낙안이 민속마을로 지정된

것은 1983년 낙안읍성 옛터가

사적으로 지정되면서이다. 

낙안읍성마을은 인위적으로

조성된 민속촌이 아니라 일상생활이

 

이루어지는 실제 마을이라는

점이 여느 민속 마을과는 다르다.

낙안마을이 낙안읍성마을로 불리는

것은 마을을 둘러싼 성곽 때문이다. 

대개 성곽이라고 하면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나 산기슭에 자리잡은

산성을 떠올리게 되는데, 

낙안의 성곽은 산에 의지하지

않고 평지의 마을을 둘러싼 읍성이다.

읍성은 대개 평야지대나 산을 뒤로

끼고 앞으로 평야가 펼쳐진

준평야지대에 세워지며,

 지방행정관서가 있는 고을에

축성되게 마련이므로 성안에

민가와 관아가 공존한다. 

따라서 행정 및 군사 기능을 갖춘

읍성은 평상시에는 행정 중심지,

 

유사시에는 방어기능을

갖춘 성곽으로 이용되었다.

읍성은 고려 말에 처음

등장해 조선 초기에 널리 퍼진,

 우리나라에만

있는 특이한 형태의 성으로,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179개 읍성이 기록돼 있는데, 

당시 부·목·군·현 등의 행정구역이

330여 개였던 것으로 미뤄보면

 

조선 초기에는 앞다투어

읍성이 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낙안읍성 외에 비교적 원형이

잘 보존된 읍성으로는

 

충남 서산 해미읍성,

전북 고창 모양읍성 등이 있다.

본래 낙안읍성은 태조 6년(1397)

에 흙으로 축성되었다고 한다. 

 

이후 1424년부터 여러 해에 걸쳐 돌로

다시 쌓으면서 성의 규모가 커졌는데, 

『세종실록』에 의하면적대는 12개가

계획되었으나 4개가 만들어졌다. 

성안에는 우물 2개와 연못 2개가 있었으며,

성밖의 해자는 파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 문의 보호시설인 옹성이 설치되고,

여장은 모두 붕괴되었다.

전설에 따르면 낙안읍성은

인조 4년(1626) 낙안군수로

부임한 임경업 장군이 

 

큰 칼로 낙안마을 뒤에 있는

금전산의 바위들을 내리쳐

하루 만에 쌓았다고 한다.

이는 임경업 장군이 벌인 개축공사가

그의 공적과 뒤섞여 백성들에게

과장되게 전해진 것으로 여겨진다. 

어쨌든 당시 낙안읍성에 살던

인구가 불과 1,000명 남짓

이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그 적은 인원이 어디서 수만 개의

돌을 날라와서 어떻게 이만한

 

규모의 성을 쌓을 수 있었을까

자못 놀랍고 기이하기만 하다.

 마을 한가운데에는 지금도

임경업 장군의 선정비가 남아 있으며,

 마을사람들은 임장군을

마을의 수호신 으로 삼고 해마다

 

정월 보름에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마을제를 지낸다.

임경업 장군이 하룻밤 만에 석성을

쌓았다는 전설 속에는 지혜로운

 

임장군 누나의 아우 사랑

이야기가 곁들여 전해오고 있다. 

임장군의 누나는 왜구를 물리칠 궁리를

하는 장군이 대견하여 돕고 싶어했다. 

누나는 동생에게 성곽을 쌓도록 하고

자신은 낙안 군사들의 군복을 만드는

내기를 제안했다. 

누나가 군복을 다 지었는데도 동생이

성을 완성했다는 소식이 들리지 않자 

누나는 다 지은 군복의 옷고름을

하나하나뜯어 다시 달기를 되풀이 하였다 

그런데 누나는 동생이 성을

다 쌓았다는 소식을 듣고도

 

끝내 동생의 옷고름만은

달지 않고 남겨두었다고 한다.

 동생의 사기를 꺾지 않으려는

누나의 지혜로운 배려였던 것이다.

낙안읍성은 금전산의 남쪽 기슭

아래 펼쳐진 낮은 구릉을 포함한

 

평지에 동서 방향으로 길다란

장방형의 모습으로 자리잡고 있다. 

현재 성 전체의 길이는 1,410m,

높이는 4m이며, 동·서·남 세 곳에 

 성안의 큰 도로와 연결된 문이 있고

적을 방어하기 위한 치성이

네 군데 돌출해 있다.

 직경이 1~2m 정도 되는 큼직한

자연석으로 성곽을 쌓았는데,

아래쪽은 큰 돌을 쌓으면서 

틈마다 작은 돌을 쐐기박음하였으며

위쪽으로 갈수록 작은 석재를 썼다.

현재 읍성의 출입문으로 이용되는

동문에서 남문 사이의 성곽이 가장

온전히 남아 있는데, 

이는 남해 순천만을 통해 내륙으로

쳐들어오는 왜구를 막기 위해

쌓은 성이므로 

특히 왜구가 들어오는 남쪽 부분이

튼튼하여 지금까지도 상태가

양호한것으로 짐작된다. 

성의 북쪽 부분이 상대적으로

많이 허물어진 것은 왜적이 들어오는

 

길이 아니기 때문에 다소 약하게

지어졌으리라 여길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여순사건 때 산속에 있는

사람들이 자주 마을로 넘나들면서

파괴된 것이라 한다.

임경업장군비각

林慶業將軍碑閣 

 

전라남도 순천시 낙안면 동내리 

순천 낙안읍성 안에 있는 조선시대

낙안군수 임경업의 선정비와 비각

임경업장군비각은 낙안군수를 지낸

임경업(林慶業)[1594~1646]이

 

이임(移任)한 직후인 1628년(인조 6)

4월에 세운 선정비와 비각이다.

 임경업은 조선 중기의 명장으로

1626년(인조 4) 5월에 낙안군수로

 

부임하여 1628년(인조 6)

3월까지 재임하였다. 

낙안읍성을 수리하고

어진 다스림을 베풀었다.

 

그래서 낙안에는 임경업에 관한

많은 전설이 내려오고 있으며,

지역 수호신으로 신봉하기도

하여 매년 정월 보름이면 낙안

면민들이 제사를 모시고 있다.

임경업장군비각은 순천시 낙안면

동내리 순천 낙안읍성 내 객사로

들어가는 입구 도로가에 있다.

1628년(인조 6) 4월에 임경업군수

선정비를 세우고 1748년

 

(영조 2) 비각을 세웠으며,

1893년과 1952년에 중수하였다.

3.1운동[ 三一運動 ]

 

1919년 3월 1일 이후 전라남도

순천 지역에서 일어난 거족적인

만세운동.

당시 국제정세의 변화에 민감했던

한민족은 1919년 3월 1일을

 

기하여 민족대표와 다양한 계층이

참여하여 만세운동을 일으켰다. 

서울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은 1919년

5월에는 전국적인 규모로 확산되었다.

 

이 확산의 결정적인 역할을 한 학생과

청년들은 절대 무시할 수 없다. 

연간 집회횟수 1,542회, 집회 참여

인원 200여만 명을 기록하여

 

전국적으로 전개된 만세운동은

일제의 탄압으로

사망 7,500여 명, 부상 1,600명, 피검 4만 7,000여 명이라는 희생을 냈다.

3.1운동은 새로운 독립운동의

구심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전면에 등장하고,

역사적·민족사적으로 한민족을 국내·

외에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런 3.1운동이

순천 지역에서도 일어났다.

나는울엇네ㅡ
추억의 소야곡ㅡ

정 의송노래ㅡ
순천 낙안 읍성 영상

https://m.cafe.daum.net/rnqdmsekfl/6Fog/376?svc=cafeapp

 

 

여수오동도‘동백섬’ㅡ 

또는바다의 꽃섬ㅡ

1968년에는 한려해상국립공원ㅡ
으로 지정되었으며ㅡ

1969년에는 ㅡ
관광지로 지정되었다.ㅡ

https://m.cafe.daum.net/rnqdmsekfl/VxGT/4?svc=cafeapp

 

 

여수여행 ㅡ
한국의 섬 - 전남 여수ㅡ

한려 수도의 시작, 여수ㅡ
해상 케이블카 자산공원 ㅡ

https://m.cafe.daum.net/rnqdmsekfl/VxGT/3?svc=cafeapp

 

 


여수 아쿠아리움ㅡ
아쿠아리스트 바다
생물과 살아간다ㅡ


아쿠아리움은 ‘바다의 축소판’이다. ㅡ
아쿠아리스트의 보람과 애로 ㅡ

https://m.cafe.daum.net/rnqdmsekfl/Vwwl/14?svc=cafea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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