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도 운림삼방ㅡ 조선 후기 화가 허유 ㅡ (許維:1807∼1892)가 ㅡ만년에 기거하던ㅡ 화실의 당호.ㅡ 명승 제80호이다.
작성자청 솔작성시간22.02.26조회수1,303 목록 댓글 0 진도 운림산방
[ 珍島 雲林山房 ]
조선 후기 화가 허유
(許維:1807∼1892)가 만년에
기거하던 화실의 당호. 명승 제80호이다.
운림각(雲林閣)이라고도 하며
전라남도 진도군 의신면 사천리
쌍계사 옆에 위치한다.
조선시대 남화의 대가였던
소치 허련(小痴 許鍊)이 1856년
9월 스승인 추사 김정희가 타계하자
고향에 내려와 초가를 짓고
이름은 운림각이라고 지었고
거실은 묵의헌으로 지었다.
마당에는 연못을 만들고
다양한 화훼와 임목을 심었다.
하지만 허련이 사망하고 아들
허형이 운림산방을 떠나면서
매각되어 운림 삼바의 연못과
가옥은 예전 모습을 모두 잃어 버렸다
이후 허형의 아들 허윤대가 운림산방을
다시 사들였고 1982년 허형의 아들
허건이 운림산방의 예전모습으로
복원하였다.
1992년과
1993년에 각각 보수하였다.
운림산방이란 이름은 첨철산
주위에 수많은 봉우리가 어우러진
깊은 산골에 아침 저녁으로
피어오르는 안개가 구름 숲을
이룬 모습을 보고 이름지었다 한다.
경사지에 세워졌으며,
맨 위쪽에 허유의 화상을
모신 운림사(雲林祠)가,
오른쪽 뒤편에 사천사(斜川祠)가 있다.
돌담으로 둘러진 안쪽에 살림집이 있고
그 전면 우측에 허유가 머물던
사랑채가 있다.
살림집 앞에 1978년에
재건한 운림산방이 있다.
그 앞에는 가로 33m,
세로 27m 크기의 연못이 있고,
연못 중앙에는 작은 섬이 있다.
이 섬에는 허유가 심은
배롱나무 한 그루가 있다.
운림산방은 ㄷ자형 한식 기와로
정면 우측 3칸은 화실이며
나머지는 방으로 꾸몄다.
구조는 장대석으로 외벌대 기단을
형성하고 그 위에 초석을 놓고
네모기둥을 세운 굴도리집이다.
안채는 一자형 초가로 평면구성은
좌로부터 각 1칸씩 방, 부엌, 안방,
웃방, 광의 순으로 배치하였다.
중앙의 안방 앞쪽에는
툇마루를 설치하였다.
구조는 막돌 초석 위에
네모기둥을 세운 민도리집이다.
사랑채는 4칸 규모의
一자형 초가집이다.
왼쪽 끝 1칸은 안채로 들어가는
통로로 만들었으며 오른쪽에는
2칸의 광과 1칸의 방을 배치하였다.
구조는 안채와 비슷한 민도리집이며,
기단은 낮은 토단이다.
운림사는 1983년 건립된
정면 3칸의 맞지붕이다.
막돌허튼층쌓기 기단 위에 다듬은
원형 초석을 놓고 두리기둥을 세운
1고주 5량 구조이며,
공포는 주간마다 1구씩의
공포를 배치한 다포식이다.
처마는 겹처마이며,
내부에는 우물마루를 깔았다.
사천사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이며 구조는 막돌허튼층쌓기
기단 위에 원형 장초석을 놓고 그 위에
두리기둥을 세운 2익공식이다.
화실 안에는 허씨 집안 3대의
복제된 그림이 전시되어 있고,
기념관에도 복제화·수석·단지·그릇 등
허련의 소장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허련의 3남 미산 허형과 손자 남농
허건이 남종하의 대를 이은 곳이고,
한집안 사람인 의재 허백련이
이곳에서 그림을 익혀 한국
남종화의 성지로 불린다.
1981년 10월 20일 전라남도
기념물 제51호로 지정되었으며,
2011년 8월 8일 국가지정문화재인
명승 제80호로 지정되었다.
서화예술이 발달한 진도에서도
대표적인 인물은 조선 후기 남화의
대가로 불리는 소치 허련(小痴 許鍊)이다.
그는 나중에 당나라 남종화와
수묵산수화의 효시인 왕유(王維)의
이름을 따서 허유라고 이름을
바꾸었으므로 허유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져 있다.
운림산방은 허련이 만년에 서울
생활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와
거처하며 그림을 그리던 화실의
당호인데 달리 운림각이라 하기도 했다.
진도읍에서 바로 남쪽으로
내려오다 보면 첨찰산 서쪽,
쌍계사와 가까운 곳에 있으며 ㄷ자
기와집인 운림산방과 그 뒤편의
초가로 된 살림채, 새로
지어진 기념관으로 이루어져 있다.
운림산방 앞에는 네모난 연못이
있는데 못에는 흰 수련이 피고
연못 안에 만들어 놓은 둥근 섬에는
배롱나무가 보기 좋게 자라 있다.
허련은 순조 9년(1809)에
진도읍 쌍정리에서 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그림에 재주가
있었는데 28세부터 해남 대둔사
일지암에서 기거하던
초의선사에게 가르침을 받으면서
녹우당에 보관되어 오던 공재
윤두서의 화첩을 빌려다 보며
그림 공부를 했다.
30대 초반에 초의 스님의 소개로
서울로 가서 추사 김정희의 문하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서화 수업을
하여 남화의 대가로 성장했다.
그는 조선 말기
선비화가 가운데 조희룡,
전기 등과 함께
김정희파로 불린다.
김정희는 허련과 그의 그림을
대단히 사랑해서 원나라 4대
화가의 한 사람인 황공망을
대치라고 하는 데 빗대어서
소치라는 호도 지어주었고
“압록강 동쪽에 소치를 따를
사람이 없다”고까지 칭찬하였다.
서울에서 지내면서 이름이 난 허련은
38세 때 왕(헌종)에게 그림을 바친 이래
여러 차례 궁중을 드나들며
왕 앞에서 그림을 그리거나 왕실에
소장된 고서화를 평하기도 했다.
또 헌종의 배려로 고부 감시를
지냈고 무과에 급제하여 관직을
지중추부사까지 지냈으며
흥선 대원군 이하응, 권돈인, 민영익
그리고 정약용의 아들인 정학연,
신관호등과 사귀며
시와 그림,글을 나누었다
김정희가 죽자 허련은 서울살이를
청산하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그의 나이 49세
되던 철종 8년(1857)이었다.
그는 운림산방을 마련하고
그림에 몰두하며 만년을
보내다가 고종 29년(1892)
84세로 세상을 떠났다.
허련은 여러 그림 중에서도 특히
산수화에 뛰어났는데 「선면산수도」
(서울대학교 박물관 소장)가 대표작
으로 꼽히며 『몽연록』(夢宴錄) 등
『소치실록』을 써서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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