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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 신륵사 관광

여주 신륵사 관광단지 ㅡ봉미산 157m ㅡ영월 근린공원 ㅡ영월루 여주 사암 ㅡ역사체험과 휴양을 동시에ㅡ신륵사관광지 ㅡ

작성자청 솔|작성시간22.03.15|조회수770 목록 댓글 0

여주 신륵사 관광단지 

봉미산 157m

 

영월 근린공원

영월루

여주 사암 

여주의

대명사는 단연 신륵사다.

여주읍에서 여주대교를 건너면

낮고 부드러운 곡선의 봉미산

(鳳尾山)이 나서고,

이 산 남쪽 기슭에

신륵사가 자리잡고 있다.

뒤로는 숲이 우거지고

왼쪽 곁으로는 안벽(岸壁)이,

마당 앞으론 여강(驪江)이라 부르는

남한강이 유유히 흐르는 절경이다.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하는

신륵사가 근년에 고찰과

 

어울리지 않게

일주문을 크게 세워 아쉽다.

절 바로 앞의 강상유원지가 휴일이면

매우 번잡스러워 어쩔 수 없었을까.

하기야 강줄기 위로 다리가 놓이기

전까지는 조포(潮浦)나루터가 바로

곁에 있었으니 신륵사 주변은 제법

도시 분위기가 감돌았을 것이다.


강변의 너른 마당을

지나면 왼쪽에 구룡루가 있다.

나옹선사가 아홉 마리의

용에게 항복을 받고 그들을

제도하기 위해 지었다는

전설의 누각이다.

구룡루를 돌아들면

맞은편에 극락보전이 있다.

아미타불 도량인 신륵사 금당이다.

금당 앞에는 보물 제225호인,

구름과 용무늬가 아름다운

다층석탑이 서 있고,

양 옆으로는 스님들의 선방인

선각당(禪覺堂)과 고려시대 이후

시인 묵객들이 묵어 가며 자연을

노래했던 적묵당(寂默堂)이 있다.

극락보전 왼쪽으로 비껴서서 만나는

그림 같은 단칸집이 조사당이고,

북쪽 언덕으로 올라가면

나옹선사 석종부도와 부도비,

석등이 건립되어 있는데 모두

눈여겨볼 만한 유물들이다.

구룡루 앞에서 오른쪽 언덕으로

오르면 유명한 다층전탑(塼塔)과

대장각비가 남한강을 굽어보고 서 있다.

나옹선사의 다비장에 세운 삼층석탑,

나옹선사의 호를 딴 정자 강월헌

(江月軒)이 강심을 낚는다.

강 저쪽에서 건너다보면

울창한 숲속에 떠 있는

대웅전 용마루가 고색창연하다.

7점의 보물과 유형문화재 1점의

볼거리 외에도 지치고 찌든 심신을

쉬어 갈 수 있는 곳이 신륵사이다.

봉미산  鳳尾山 ,(157m). 

Bongmisan 

 

경기도 여주군의

중앙에 위치한 산이다

남쪽 기슭에는 신라 때 처음 지어진

것으로 전해지는 신륵사(神勒寺)가 있다

.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봉미산은 주의 동쪽 7리에 있다."

고 하여 관련 기록이 처음 등장한다.

봉미라는 이름은 풍수상 비봉귀소형

(飛鳳歸巢形:봉황이 날아드는 형상)

의 산 모양새와 관련되는 것으로,

신륵사는 바로 봉황이 깃드는

명당에 자리 잡았다고 할 수 있다.

1469년(예종 1)에 영릉이 여주의 북성산

(北城山)에 자리 잡은 후 신륵사는

영릉의 원찰(願刹)이 되면서 이름도

보은사(報恩寺)로 바뀌는 것을 볼 때,

그러한 신륵사의 입지처를

풍수적으로 의미를 강화하기 위한

방편에서 주산이 되는 봉미산을

봉황에 비유한 것으로 짐작된다.

고지도에서 신륵사의 주산인

봉미산에서부터 신륵사

국면을 둘러싸고 있는

산세를 실제보다 과장되게 표현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이유로 짐작된다.

신륵사는 아름다운 경관과 많은

유물·유적들을 간직하고 있지만

정작 이 절의 내력은 소상치가 않다.

신라 진평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했다는 설이 있지만 이를

뒷받침할 유물이나 유적이 없고,

고려 우왕 2년(1376)에 나옹선사가

입적하면서 유명한 절이 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조형물도 모두

고려 말에서 조선 초기의 것이다.

양주 회암사에 머물던 나옹선사가

왕명을 받고 갑작스럽게

떠나게 된 곳은 밀양땅 형원사(瑩源寺)

였는데 얽힌 사연이 기이하다.

나옹선사가 회암사를 중수하고

낙성회를 여는데 비단과 곡식을 가져다

공양하는 여인네들이 귀천을 따질 것

없이 몰려들어 생업을 포기할 정도였다.

나중에는 조정에서 사신을 보내어

산문을 닫아도 막을 수 없는

정도에 이르렀고,

급기야 나옹선사에게 밀양땅 형원사로

한시 바삐 떠나라고 명령했던 것이다.

나옹선사의 그 진한 종교적 매력과

호소력은 다름아닌 중생구제의

원(願)이었겠으나 시대가

그를 수용하지 못했던 것 같다.

나옹선사는 이미 병이 깊었던

모양인데 왕명이 떨어졌으니

길을 달려 이곳까지 왔다.


선사는 더 이상은 못 가겠다며

신륵사로 들어갈 것을 재촉하였고,

이곳은 선사의 열반지가 되었다.

그때 하늘에선 오색구름이 산마루를 덮고

용이 호상하는 등 신이한 일이 벌어지면서

세상에 이름을 떨쳤다고 전한다.

스러져가던 신륵사를 대대적인

중창불사로 일으킬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조선의 억불정책으로 또다시

위축된 신륵사를 구해낸 것은

광주 대모산에 있던 영릉을 인근

능서면 왕대리로 이장해 오면서이다.

세종의 깊었던 불심을 헤아려선지,

왕실에서는 신륵사를 원찰로 삼았고

절 이름도 잠시 보은사(報恩寺)라 불렀으며,

전각과 당우들을 새롭게 꾸몄다.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신륵사는

500여 승군을 조직해 싸웠고,

이때 극락전을

비롯해 대부분의 건물이 불에 탔다.

현종 12년(1671) 무렵부터 다시

일으켜온 것이 오늘날의 신륵사이다.

봉미산 신륵사 현판 

 

신륵사 경기도 여주시 봉미산에 위치한 

대한불교 조계종 소속의 사찰이다 

신륵사는 아름다운 경관과 많은

유물·유적들을 간직하고 있는 사찰이다.

신라 진평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했다는 설이 있고,

고려 우왕 2년(1376년)에

나옹선사가 입적하면서

유명한 절이 되었다.

신륵사를 일명 "벽절" 이라 부르게 한

다층전탑이 묵묵히 여강을 굽어보고 있으며,

나옹선사의 당호를 딴 정자 강월헌

(江月軒)에서는 그 옛날 시인 묵객

들이 시 한 수를 읊고 있는 것 같다.

 

 쏘가리 

[ freshwater mandarin fish / mandarin fish ]

 

요약 농어목 꺽지과의 민물고기이다.

생김새가 민첩하고 아름답다.

쏘가리 매운탕이 유명하며,

회, 구이, 찜, 곰국 등으로 먹는다.

맛잉어라고도 한다.

한자어로 궐어(鱖魚),

금린어(錦鱗魚)라 하는데,

《재물보》에는 살맛이 돼지고기처럼

좋다하여 수돈(水豚)이라고도 하였다.

 

《본초강목》에는 대어(臺魚),

석계어(石桂魚)라 하였다.

예로부터 한국과 중국의 문인들

사이에서 외모가 아름답고 궐어의

궐(鱖)자와 음이 같아 고귀하게 여겼으며

시문과 도자기,

회화 등에 흔히 등장하였다.

몸길이 20cm 이상으로,

몸은 긴 편이며 옆으로 납작하다.

몸은 전체적으로 노란색을 띠며,

몸 전체에 둥글고 불규칙한

검은색 무늬들이 빽빽이 나 있다.

머리와 지느러미에는 몸통의

것보다 조금 작은 흑점이 흩어져 있다.

몸은 작은 둥근 비늘로 덮여 있으며,

지느러미에는 날카로운 가시가 있다.

언뜻 보기에는 바다볼락과 비슷하며,

다른 민물고기와는 생김새가 다르다.

여주대교[ 驪州大橋 ]

 

경기도 여주시에서 남한강을

가로질러 37번국도로

연결되는 다리이다.

서울국토관리청이

1994년 공사를 시작해,

1996년 준공하였다.

왕복 4차선 교량으로,

 

길이는 502m, 

너비는 17.5m이다.

여주대교는 원래 국가 경제개발

특별회계에 따라 1962년 5월에 착공해,

1964년 8월 10일 준공되었다.

그러나 노후화로 인해 이 다리를

그대로 놔둔 채 바로 옆에

새로운 다리를 세웠는데,

새로운 다리가

지금의 여주대교이다.

여주 마암 각자

[ 驪州馬巖刻字 ]

 

경기도 여주시의 

바위에 새겨진 글씨.

신륵사로 가는 길의 언덕 위 절벽

바위에 ‘馬巖’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조선 후기에 새겨진 것으로 추정된다.

바위 위에는 조선 초기의 문신·

학자인 임원준(任元濬)이 지은

영월루(迎月樓:경기문화재자료 37)가 있다.

평평한 바위에 크게 세로로 새겨져 있고,

그 위쪽과 왼쪽에 각각 ‘이인응(李寅應)’

‘…시월(十月) 일각(日刻)’라는 글씨가 있다.

오른쪽에 있는 다른 바위에는

‘신현태(申鉉泰)’이라는 글씨가 있다.

여주의 대표적 성씨인 여흥민씨

(驪興閔氏)는 마암 바위의 구멍

에서 시조가 탄생했다 여기고,

신라시대 경덕왕 때 마암 바위 아래

강물에서 황룡마와 여룡마(검은 용마)

 

가 나타나 고을 이름을 황려현(黃驪縣)

으로 고쳤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경기도 여주시 상동에 있다.

영월루[ 迎月樓 ]

 

경기도 여주시에 있는 누각.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37호이다.

1983년 9월 19일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37호로 지정되었다.

 

익공의 형태나 가구(架構)로 보아

18세기 말경의 건물로 추정된다.

원래 군청의 정문이었는데

1925년경 군청 이전 때 군수가

현 위치에 누각을 다시 세웠다. 

신륵사로 가는 길에 마암(馬巖)

이라는 큰 바위가 있는 언덕에 있다.

15평 정도 규모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익공계

팔작지붕집으로 2층 서향 누각이다.

 

정면 길이에 비해 측면 길이가 짧아

평면적으로는 긴 직사각형 모양이다.


장대석 기단에 놓인 높은 사각형

초석 위에 짧은 하층 기둥을 세웠으며,

누마루가 꾸며졌다.

그 위쪽에 상층 기둥을 세웠는데

이익공과 결구되어 오량(五樑)의

지붕 가구가 되었다.

창방이 굵은 부재로 보강된 것은

문루의 가구법과 비슷하다.

 

상층 누마루 사방에는 계자각

(鷄子脚) 난간이 설치되었다.

낮은 기단과 긴 몸체,

치켜 올려진 팔작지붕의

비례가 적절히 조화를 이루었다.

입구에는 비석거리가 있고 그 위쪽에

여주 창리 석층 석탑(보물 제91호)과

여주 하리 삼층 석탑(보물 제92호)이 있다.

누마루에서 바라보면 한강상류 쪽

건너편에 신륵사가 보이며 하류 쪽

으로는 흥천면마을이 보여 전망이 매우 좋다.

여주 신륵사 ㅡ
황포돛대(유람선) ㅡ

도자기 축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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