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기도)
주님,
어제 월요기도회로 모여 함께 기도하였습니다.
갖가지 사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 앞 각자의 자리를 지키게 하시고
또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는 지체들이 있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저희의 모든 간구와 중보가 주님 뜻에 합당한 것으로 응답되기를 소원합니다.
말씀 앞에 나아갑니다.
저의 편견과 부정성을 십자가 보혈로 덮어주옵소서.
정결한 마음과 정직한 영을 허락하옵소서.
성령님, 말씀을 조명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본문)
11.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새 제자와 많은 무리가 동행하더니
12. 성문에 가까이 이르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한 어머니의 독자요 그의 어머니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13.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14.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15.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머니에게 주시니
16.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 하더라
17. 예수께 대한 이 소문이 온 유대와 사방에 두루 퍼지니라
(본문 주해)
11~15절 : 나인 성은 가버나움에서 하룻길 정도이다. 예수님께서 이 나인 성 성문에 가까이 오실 때에 한 죽은 자를 메고 오는 장례 행렬을 만나게 된다. 죽은 자는 과부의 독자였으니, 그 과부는 이제 세상에서 위로받을 것이 없는 가장 비참한 지경에 빠진 것이다.
오직 정말 불쌍한 과부요 하나뿐인 아들만 바라보고 살았는데 그 아들이 죽어버린 것이다.
그런데 주님께서 이 과부를 불쌍히 여기신 것이다.
아들을 살려달라고 간구하지도 않았는데 일방적으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신 것이다.
예수님은 과부에게 울지 말라고 하시고, 관에 손을 되시니 장례 행렬이 멈춘다.
이 관이란 시체를 베로 싸매고서 들것에 들고 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들것에 손을 대는 것은 시체와 접촉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는 율법에 의하면 부정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문둥병자에게 손을 대시고서 깨끗함을 입으라고 하심으로 그 부정함을 자신에게 전가시키신 것처럼 이제는 저주의 죽음조차 자신에게 전가시키신 것이다.
그리고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니 청년이 살아난다.
16~17절 : 이것을 본 사람들이 두려워한다. 이 두려움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눈앞에서 목도한 경외감이라 할 수 있다.
그러자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났다고 한다.
구약의 선지자 중에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렸고(왕상17장)와 엘리사가 수넴 여인의 죽은 아들을 살려낸 예(왕하4장)가 있다. 그런데 이들은 다 하나님께 기도하여 죽은 자를 살렸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권위로 죽은 자를 살리신 것이다.
저자 누가는, 예수께서 비록 육신을 입고 계시지만, 신적 권위를 지니신 분이라는 것을 이방인 독자들에게 계속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고 한다.
유대인들은 400여 년 동안 선지자의 음성을 듣지 못하자,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리셨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다가 예수님의 이와 같은 이적을 목격하게 되자 하나님께서 오랜 침묵을 깨고 그들을 돌아보셨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이 소문이 온 유대와 사방에 두루 퍼지게 된다.
(나의 묵상)
나인성의 과부는 과거에 남편의 장례를 치르고, 이제 하나뿐인 아들의 장례를 치르는 비참하고 절망적인 여인이었다. 이 과부는 어떤 작은 믿음을 가진 것도 아니고, 아마 예수님의 소문조차도 듣지 못했던 여인인 것 같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여인을 불쌍히 여기셔서 아들을 살려주신다.
예수님께서는 이 과부와 아들을 구원하여 주시고자 의도적으로 나인성을 찾으셨으리라.
성경의 수많은 인물들이 주님을 만난 것은 모든 경우가 주님께서 은혜주시고자 의도적으로 그들을 찾아가 주시고 또 만나주신 것이라 생각한다. 베드로를 만나 주신 것, 삭개오를 만나주신 것, 수가성의 여인을 만나주신 것 등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리고 나를 만나주신 것까지.
불행한 인생 중에 아들 하나 바라보며 근근이 살아오던 여인, 아들이 죽어버리자 비통의 눈물을 흘리는 여인을 주님께서 친히 찾아가 주신 것이다.
그리고 울 수밖에 없는 여인에게 울지 말라고 위로하시고, 아들을 살려주심으로 여인의 오직 단 하나뿐인 소망을 들어주셨다. 믿음의 유무에 상관없이, 고통당하는 인간을 긍휼히 보시는 주님의 일방적인 사랑을 보게 한다.
여인은 그 후에 어떻게 살아갔을까?
땅만 바라보고, 아들만 바라보고 살았던 여인의 눈길이 하늘을 향하고, 예수님을 향했으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내가 오늘날 주님과 교제하며 영생의 삶을 살아가는 이 최고의 복을 누리게 된 것을 생각해 본다. 이 은혜는 내게 무슨 자격이 있어서 주어진 것이 아니다.
나인성의 과부가 오직 아들만을 바라보듯이, 세상 것에 대한 목맴만으로 살아온 내가 아니었던가? 사실 나인성 과부와는 비교할 수 없이 빤질빤질하고 세속적인 그런 존재였다.
사탄의 거짓에 완전 속았기에, 세상에 젖어 탐심이 가득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 자체가 불쌍하고 비참한 상태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 속에 취해 세상 정신으로 살아가던 내게 주님이 찾아와 주신 것이다.
그런데 나인성 과부처럼 울고 있을 때라면 조금은 말이 되는데, 나는 세상에서 하하 호호 할 때 찾아와 주신 것이다.
무슨 슬픔과 어려움과 상실감이 있을 때가 아니라, 아무 문제가 없는-세상적으로 큰 어려움이 없는-그때에 주님께서 찾아와 주셨고 그런데도 나는 큰 갈등 없이 교회를 나가게 된 것이 기적이었다.
물론 오늘에 이르기까지 부실한 믿음의 세월이 길었지만, 그 시간들도 내게는 귀한 세월이다. 그 시간들이 있었기에, 때가 차매 드디어 복음을 맞이하게 되었으리라.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
내가 여전히 죄인으로 있을 때 주님께서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나에 대한 주님의 사랑을 확실하게 증명 하셨다는 이 말씀에 ‘아멘!’ 하며 감사에 감사를 드린다.
이제 주님의 확실한 사랑 안에 거하는 나는 어찌하며 사는가?
구원 받았으니 띵까띵까 신나게 놀며 사는가?
참으로 아이러니 하게도, 주님의 사랑 안에 깊이 거할수록, 전에 보지 못했던 내 죄를 그만큼 깊이 보고 느끼는 자가 되었다. 그러니 이런 나를 불쌍히 여기시는 주님의 긍휼하심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를 날마다 실감하게 된다.
나는 매순간 주님께 불쌍히 여김을 받아야지만 살아갈 수가 있는 존재가 되었다.
“하늘에 계시는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
상전의 손을 바라보는 종들의 눈 같이, 여주인의 손을 바라보는 여종의 눈 같이 우리의 눈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바라보며 우리에게 은혜 베풀어 주시기를 기다리나이다”(시123:1~2)
(묵상 기도)
주님,
제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저를 위하여 죽으신 것을 몰랐습니다.
교회를 다니고도 상당한 세월 동안 저 자신의 죄에 대해 무감각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앞에 맹숭맹숭했던 때를 기억합니다.
그때도 저를 불쌍히 여기신 주님의 사랑을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주님,
저는 여전히 주님께서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시기를 원합니다.
하는 생각마다, 하는 짓마다 쓸 만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전적 무능의 눈으로 주님만 바라오니
긍휼히 여겨 주시옵소서.
성령님, 의지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