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2월 1일(목)
* 시작 기도
주님...
지난 2주 정도 매서운 북극 한파로 인하여 이곳 베트남에도 북쪽 산간 지역에는 영하 2도 정도로 떨어졌는데 그로 인하여 집에서 기르던 가축들이 250마리 정도 죽었다는 보도를 봤습니다.
지금은 우기여서 매일 새벽에 가랑비가 내립니다.
이제 기온은 좀 올라서 추위는 가셨지만 우중충한 날씨가 마음을 적잖이 우울하게 합니다.
이런 환경에 지배를 받지 않고 넉넉히 이를 헤쳐나갈 수 있는 마음을 주옵소서.
무엇보다 내 마음의 상태가 땅의 것 곧 만물 안에 있는 것에 지배를 당하지 않도록 성령께서 나를 장악하여 주옵소서.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주의 십자가 보혈로 나를 씻어 정결한 주의 신부로 세워주옵소서.
오늘 하루도 주님과 함께 아버지 품에서 거하는 승리자가 되기를 원하오니 나의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고 오직 예수로 부요한 자 되게 하소서.
거룩한 불구자가 되어 영적 하루살이의 삶을 살기 원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막 11:1-10
제목 :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타신 예수님.
1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2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3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렇게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하시니
4 제자들이 가서 본즉 나귀 새끼가 문 앞 거리에 매여 있는지라. 그것을 푸니
5 거기 서 있는 사람 중 어떤 이들이 이르되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 하려느냐 하매
6 제자들이 예수께서 이르신 대로 말한대 이에 허락하는지라.
7 나귀 새끼를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이 겉옷을 그 위에 얹어 놓으매 예수께서 타시니
8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또 다른 이들은 들에서 벤 나뭇가지를 길에 펴며
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 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10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 나의 묵상
본장에서부터 마지막 16장까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3년간의 공생애 대미를 이루는 수난 주간에 있었던 사건과 부활 승천에 대한 내용을 다룬다.
그 중에서도 오늘 본문은 수난 주간 첫날에 이루어진 예루살렘 입성으로 시작된다.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동안에 자신의 메시야되심을 제자들을 제외한 일반 사람들에게는 거의 은폐하셨다.
하지만 예루살렘 입성을 시작으로 이제 공식적으로 만천하에 선포하신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당신이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신 목적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려주기 위함이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십자가 죽음을 통하여 구속사역을 온전히 이루시는 것이며 이제 그 시점이 다가왔음을 알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만왕의 왕으로 오신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세상의 군주들처럼 호화로운 왕이나, 군림하는 왕으로 오셔서 세상을 힘과 무력으로 통치하는 왕으로 오신 것이 아니다.
주님은 당신의 몸을 십자가에 내어주심으로 이 땅에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믿는 참 그리스도인들에게 당신의 생명을 주어 그 생명으로만 들어갈 수 있는 하나님 나라로 초청하시기 위함이다.
그 일을 위하여 오늘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직전에 여리고에서 고침을 받고 주님을 따랐던 소경 바디매오 그리고 많은 사람들도 함께 예루살렘 가까이 곧 감람산에 있는 벳바게와 베다니에 오셨다.
감람산은 예루살렘 동쪽 약 800m의 구릉으로, 당시 감람나무로 우거진 숲이 많았기 때문에 감람산이라 불렸다.
감람산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방문하실 때마다 예루살렘과 베다니를 오가며 지나셨던 언덕이다.
예수께서 낮에는 예루살렘 성에서 사람들을 가르치고 밤이면 쉬던 곳이 바로 이 감람산이었다(눅 21:37).
또한 부활하신 주님이 다시 오실 것을 말씀하시면서 승천하셨던 장소 역시 감람산이었다(행 1:6-12).
이렇게 주님의 사역과 아주 밀접한 연관이 있는 감람산에서 구속 사역의 시작이 이루어진다.
예수님은 이곳 감람산에서 제자 둘을 맞은편 마을로 보내신다.
여기 보내다는 말의 헬라어는 ‘아포스텔로’인데 그냥 보낸다는 의미의 펨포와는 달리 보내는 자와 보냄을 받는 자의 긴밀한 관계와 그 임무를 함축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창세전 아버지가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실 때도 바로 이 ‘아포스텔로’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막 9:37).
또한 아들이 오셔서 제자들을 사도로 보내실 때도 ‘아포스텔로’를 사용하신다.
그래서 사도가 된 모든 제자들과 특히 바울이 자기 자신을 가리켜 예수의 사도가 된 바울이라고 표현을 하는 것이다.
(딤후 1: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대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은
여기에 사용된 ‘사도된’이 바로 ‘아포스톨로스’로서 ‘보냄을 받은 자’란 뜻이다.
예수님은 여기서 제자 둘을 맞은편 마을로 보내시면서 임무를 주신다.
그것은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풀어서 끌고 오라는 것이다.
만약 사람들이 왜 그것을 푸느냐고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고 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그들이 즉시 이리로 보낼 것이란다.
임무를 받은 제자들이 갔더니 과연 나귀 새끼가 문 앞 거리에 매여 있었다.
그것을 푸니까 근처에 있던 사람들이 왜 푸느냐고 물어서 주가 쓰시려고 한다고 하자 그들은 잠잠히 허락을 하였다.
나귀 새끼를 끌고 온 제자들이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덮었다.
그 외에 다른 사람들은 들에 있는 종려나무의 가지들을 꺾어 길에 펼쳤다.
이들은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며 호산나 하고 외쳤다.
호산나는 히브리어로서 그 뜻은 ‘지금 우리를 구원하소서’ 또는 ‘원컨대 우리를 구원하소서’이다.
호산나 뒤에 붙는 수식어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로서 이는 시편 118:26절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를 인용한 것으로, 하나님에 의해 보내심을 받은 메시야가 바로 예수님이며 또한 그가 하나님의 사명과 권세와 축복을 가졌음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본문 10절에서는 이렇게 찬송을 한다.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고 외쳤다.
여기서 ‘오는 나라’란 오시는 이인 메시야에 의해서 통치되는 나를 뜻한다.
그런데 그 나라가 곧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라는 점에서 더 크게 부각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군중들의 외침은 그들이 예수를 다윗 왕국의 계승자로 인정하고 있음을 확실히 보여준다.
그렇기에 그들은 쌍수를 들어 예수를 환영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환호성을 질렀던 군중들은 권능과 영광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셔서 가시적인 다윗 왕국을 회복할 메시야를 기다린 것이다.
그들은 로마로부터 해방을 가져다 줄 정치적 메시야, 경제적으로 풍요를 가져다 줄 경제적 왕으로서의 메시야, 사회적으로는 정의를 가져다주는 메시야를 고대하고 환영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정작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고난의 메시야’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를 왕으로 환호하던 그들 가운데 일부는 며칠 지나지 않아서 ‘그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치는 군중으로 변하고 만다(막 15:13-14).
창세전 말씀으로 계셨던 하나님의 아들은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셨다.
그의 오심은 만왕의 왕으로 오신 것이다.
그러나 그 왕의 개념은 우리 사람들의 개념과는 전혀 달랐다.
왕이라고 하면 개선장군과 같은 백마를 타고 오실 것이지만, 주님은 멍에를 메는 짐승 곧 나귀의 새끼를 타고 오셨다.
(마 21:5)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이 말씀은 구약성경 스가랴 9:9절의 말씀을 마태가 인용한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타시는 나귀는 멍에를 메는 짐승이다.
그 멍에를 멘다는 것은 곧 예수님이 그렇게 멍에를 메는 것에 대한 예시라 할 수 있다.
그 멍에는 다름 아니라 십자가 죽음이다.
제자들과 수많은 이들은 예수를 가리켜 자기들의 필요와 욕구를 채워줄 평화의 왕 메시야로 바라보았지만, 정작 예수님은 멍에를 메는 새끼 나귀를 타고 지극히 겸손한 모습으로 오신 것이다.
여기에서 제자들을 비롯한 자기들의 욕구와 필요를 채우기 위하여 철저하게 민속 메시야로, 평화의 메시야로만 고대했던 군중들처럼 그 안에서 나를 본다.
그들은 적어도 현실적으로 로마의 속국으로 억압을 받으며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정치적인 해방을 가져다주는 메시야를 충분히 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런 나라와 민족을 위하는 거창한 목적이 아니라 그저 나의 지극히 사적인 탐욕과 정욕을 위하여 메시야를 구하는 그런 치졸한 자였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창세전에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시기로 작정하셨고 때가 되어 여자의 후손으로 보내셨다.
그렇게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주님도 사도들에게 사명을 주시고 보내셨다.
사도는 아포스톨로스로서 보냄을 받은 자이다.
보냄을 받은 자는 보내신 이의 뜻대로만 하면 된다.
그런데 나는 말씀을 가르치는 사역자라고 자부하면서도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내 맘대로 내 뜻대로 행하며 내가 좋은 것만 구하는 죄인 중에 괴수가 되고 만 것이다.
이런 나는 주의 공의로 심판을 받아 마땅한 자이다.
그렇게 공의의 심판을 받아 나는 멸하여졌다.
나의 그 멸망은 곧 나의 무덤이 되어 나를 장사하였다.
그 장사됨은 나 혼자만 있는 무덤이었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었을 터이지만, 그 무덤에 우리 주님이 먼저 오셔서 나와 함께 거할 성전을 지어놓으셨다.
나는 주님이 지으신 그 성전에서 주님과 함께 교제와 사귐을 갖게 되었다.
그 교제와 사귐이야말로 나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게 해주신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것이 영생이며 진짜 복음 중에 복음이다.
복음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님을 안다.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복음은 하나의 수단일 뿐이다.
이 복음을 통하여 생명으로 인도하기에 나는 오늘도 이 복음을 전하여 많은 이들을 영생으로 이끌고자 한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우리 주님께서 이 세상의 왕으로 오셨다면 당연히 휘황찬란하게 꾸민 백마를 타고 오셔서 이 세상을 호령하며 군림하셨겠지요.
하지만 주님은 사람들이 보기에 그런 왕이 아니라 가장 연약하고 겸손한 왕으로 오셨습니다.
그렇기에 멍에를 메는 짐승인 나귀를 타시되 그것도 새끼 나귀를 타셨습니다.
그 모습 자체만으로 사람들은 실망했을 터이나 그럼에도 그 예수님이 자기들을 정치적으로나 경제적 사회적으로 완전한 자유와 평화를 줄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이런 메시야를 가리켜 민속 메시야라고 하지요.
하지만 우리 예수님은 그런 민속 메시야로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고자 당신이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대속하셨습니다.
그것이 우리 주님이 육신을 입고 오신 최고의 목적이었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무덤에 장사되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부활하셨습니다.
이제 그런 구속 사건을 믿는 이들은 주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 곧 영생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주님과 함께 날마다 말씀과 기도로 교제와 사귐을 갖는 이들에게 영생의 현재성 곧 지금 이 시간 누리는 영생을 주십니다.
그리고 종말 곧 주님이 재림하시는 그 날에 백마를 타고 진짜 왕으로 오실 줄 믿습니다.
(계 19:11)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그것을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연약하고 부족한 나는 오늘 이 시간 그렇게 백마를 타고 진짜 왕으로 오실 우리 주님을 기대하며 소망합니다.
따라서 죄인 중에 괴수에 지나지 않는 나이지만 오늘도 우리 주님과 함께 멍에를 메는 새끼 나귀를 타고 주님과 함께 연합할 것입니다.
나를 생명으로 인도하신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