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기도)
주님,
어제 공원 연주 보고 계셨지요?
무척 힘들었습니다.
우리를 보면 늘 ‘재수 없다’고 욕하는 사람도 만났고,
소주 두 병을 마신 영감은 술주정으로 한 시간 동안 아예 연주를 같이 하였습니다.
너무 정신이 사나워 연주가 틀리기도 했습니다.
어쩔 방법이 없는 것은 공연히 시비가 붙어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교회에 덕이 되지 않을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때면 예수 믿는 것이 무슨 큰 약점이나 잡힌 것 같습니다.
그래도 감사한 것은 곳곳에 앉아 연주를 듣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진 것입니다.
새로 지어진 아파트의 입주민들 때문인 듯했습니다.
드디어 십자가와 ‘영지교회’ 이름을 단 건물을 그들에게 알리며 전도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다음 주에는 전도팀들을 더 준비시켜 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기회를 잘 이용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시옵소서.
새날 주시니 감사합니다.
말씀 앞에 나아갑니다.
십자가 보혈을 의지합니다.
정결한 마음 주시옵소서.
진리의 성령님,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본문)
12.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13.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리라
14.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15.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언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지 아니하셨으리라
16.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었을 터이요
17.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18.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19.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본문 주해)
12절 : 고린도 교인들 중에서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고 하는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육신적 부활을 부정하고 영의 불멸만 인정하는 이교도의 교리와 또한 유대인들 중에서도 부활을 인정하지 않는 사두개인들의 영향을 받았던 것이다.
13~19절 : 부활이 없다면 복음도, 그것을 믿는 믿음도 모두 다 헛것이 된다.
그러면 구원도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죄와 사망을 이기시고 살아나셔야 대속이 이루어져 구원이 완성되기 때문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속죄 제사를 받아 주셨다는 것으로,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죽음이 지닌 속량의 효력이 상실되어 인간은 여전히 죄 가운데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가 생명이 왕 노릇하는 세계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부활이 없다면 구약에서 그렇게 더 나은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핍박받고 죽어간 성도들과 신약에서 역시 부활의 예수님을 믿고 순교당하고 핍박받아 죽어간 그들이 얼마나 불쌍한 사람이 되겠느냐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복음의 핵심이다.
성도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장사됨에 연합되는 것은, 궁극적으로 부활의 생명에 참여하기 위함이다.
그것은 신앙으로 이미 효력을 나타내지만 몸이 부활하는 그 날에 완전한 효력을 발생시킨다.
그날에 주어지는 영광의 삶이 없다면, 그리스도의 죽음을 짊어지고 그를 위해 헌신하는 것은 무의미한 수고에 불과한 것이다.
(나의 묵상)
입으로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실제의 삶은 세상의 영광을 바라고 산다면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지 않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고 사는 사람이라면 이 땅에 소망을 두지 않게 된다.
복음을 알기 전 내게 십자가 은혜가 희미했고, 그 은혜가 희미하니 부활의 의미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저 예수 믿으면서 이 땅에서 복 받기만을 바랐고, 그렇게 살다가 죽으면 천국 간다니 보너스 받는 것처럼 ‘땡큐’ 했던 것이다.
그래서 주일을 잘 지키고, 헌금을 드리고, 봉사를 하며, 담임 목사에게 충성하는 것 등으로 교회에서 인정을 받고, 장차 하늘에서 내가 살 집이 점점 더 좋은 것으로 마련되어지는 것으로 알았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세상에 찰싹 붙은 마음으로 살았던 것이다.
나는 이것이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것인 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과거에는 오히려 이것을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이렇게 살아야 복 받는다’는 것을 강조했었다.
얼마 전 복생 모임 중에 한 지체가 자기 학생부 시절에 내가 이렇게 가르쳤다는 것을 분명히 기억한다고 강조를 했다.
복음을 알고 난 뒤, 이것이 가장 마음에 걸려 주님께 회개했었는데, ‘네가 과거에 이러했노라’ 직접 말을 들으니 새삼 민망하고 부끄러웠다.
이제 복음을 알고 생명으로 사는 자가 되었으니 나는 주님의 부활을 믿고 내 몸의 부활도 믿는다.
주님 다시 오실 때 아름답게 부활된 몸으로 창세 전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가 된 그 세계로 들어가 영원히 살게 될 것이 참으로 기대가 된다. 이것이 소망이 되니, 이 땅의 것에 연연해하지 않는 삶을 잘 살 수 있을 것 같다. (특히 묵상 시간에는 더욱!)
그러나 이 진리의 세계를 보고 기뻐하는 나를 사탄은 집요하게 훼방하고 또 유혹한다.
땅의 것을 구하는 본성을 끊임없이 자극하고, 내가 중심이 되어 살아가는 삶이 되도록 부추기는 것이다.
하지만 매일 말씀 앞으로 나아가 주님과 교제하는 자 되니, 성령님께서 나를 두르시고 인도해 주심을 느끼며 산다. 때때로 흔들릴 때도 있지만, 아주 엎드러지지 않도록 말씀을 통하여 한결같이 일으켜 주신다.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의 사람들은 희롱과 채찍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과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유리하고 궁핍하며 환난과 학대를 받았다. 그들이 무엇을 믿었기에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부활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자들인 것이다.
내 믿음을 생각해보면 참 턱도 없다.
완전히 중량 미달이요, 함량 미달이다.
어제 공원에서도 ‘교회 것들, 재수없다’고 쌍욕을 하며 자리를 뜨는 단골(?)을 만났다.
그를 보자마자 기분이 좋지 않아 얼굴색이 변하는 주제에 무슨 믿음의 선진들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말이다.
혀는 짧아도 침을 멀리 뱉고 싶은, 참으로 가증스러운 나를 보게 된다.
그러나,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부활 소망을 가졌다.
부실한 내 삶의 모양으로 인해 툭하면 사탄의 정죄를 받지만, 나를 이끌어 가시는 성령께서 이 소망을 더욱 든든하게 해 주실 것을 믿는다.
이제 ‘부활’은 내게 더 이상 틀에 박힌 막연한 종교적 용어가 아니라, 현재의 내 삶을 이끌어가는 분명하고도 역동적인 힘이요, 강력한 소망이 됨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땅의 영광을 바라는 마음을 날마다 십자가에 못 박고, 복음으로 인해 비참하게 되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자, 부활의 참된 소망을 가진 자로 이끌어 주실 성령님을 기대한다.
(묵상 기도)
주님,
부활 소망에 대한 더 뜨거운 마음 주심을 감사합니다.
제게 ‘부활’은 더 이상 종교적 용어가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영의 단어가 되었습니다.
부활 소망을 가진 자 되었으니
이 땅에서 높아지는 것을 하찮게 여기에 하옵소서.
이 땅에서 낮아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하옵소서.
세월이 흐를수록 부활 소망이 더욱 견고해지길 원합니다.
성령님, 의지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